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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악녀와 요술사

2013.11.16 07:2511.16

악녀와 요술사


세레나는 여백작이었다.

여자라도 혈통이 통하면 직위를 물려받을 수 있다는 법에만 기댄 지위는 아니었다. 가족조차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세레나는 검기와 정령술에 기대어 자리를 보전했다. 끼니가 때마다 닥쳐오듯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업보는 쌓이고 힘은 소모된다. 세레나는 중성적인 묘령의 여인으로 자신을 꾸미길 좋아했고. 셔츠 위에 갑옷을 덧대 입는 것을 평소 복장으로 고집했다. 182cm로 여자치곤 큰 키인 세레나는 근육질은 아니지만 늘씬하고 풍만한 몸을 갖고 있었다.

세레나의 차가워 보이던 얼굴에 활짝 웃음이 올라왔다. 발코니 너머 작은 마을을 넘으면 드넓은 황야가 보였다. 세레나는 망원경으로 이를 바라보면서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황야 위로는 농노들의 가난한 살림살이와 그들이 부쳐 먹는 땅들이 있었다.

세레나는 그 땅에 직접 정령을 소환해 불을 지를 작정이었다. 불로 태우고, 기사들로 으깨서, 양털을 깎는 목장으로 바꿀 예정이었다. 도시에서는 양의 모든 것을 탐내는 유행이 크게 일고 있었고, 세레나는 그것에서 돈을 타내 사교계에 나서고 싶어 했다.


드미뜨는 비명을 지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낡은 오두막이 드미뜨의 울부짖음에 흔들거렸다. 며칠 째 계속되는, 똑 같은 악몽이었다. 현실처럼 선명하고, 반복되는, 세레나의 탐욕이 서린 꿈. 드미뜨는 자신이 요술사 가계의 적통을 이어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생명에 대한 위협 앞에서 그 피가 각성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드미뜨는 생각했다. 하지만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어제 어머니에게 말하자 개꿈이라 했다. 드미뜨는 이미 희미해진 피를 신뢰할 수만은 없었다. 드미뜨의 집안은 이 동네에 몇 안 되는 자영농이었다. 세금을 덜 냈고, 소작료는 내지 않았고, 더 많이 수확하는 집이라 나름의 끗발을 부렸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며칠 전 양털로 된 옷을 떠돌이 상인에게서 사서 자랑했다. 양털 옷이 잘 팔린다 했다.

“오빠! 또 개꿈이야!”

드미뜨의 여동생 레아가 문을 세차게 열고 들어와 드미뜨의 옆구리를 살짝 발로 찼다. 레아는 올해 15살의 혼기가 꽉 찬 아가씨였다. 레아는 드미뜨의 턱 밑에 정수리가 오는 157cm의 아담한 체격이었다.

“아야야, 너 그래 가지고 결혼하겠냐?”

“오빠야말로 올해 20살이면서 결혼 안 하고 뭐하냐?!”

드미뜨는 머리를 긁으면서 수줍어했다. 드미뜨는 부끄러움을 많이 탔고 겁이 많았다. 어릴 적부터 집안에 틀어 박혀 집안에 비전으로 전수되어 오던 요술사 책만 읽으면서 지내느라 친구를 사귈 기회를 놓쳤다. 드미뜨의 아버지는 혹시 요술사의 힘이 드미뜨에게서 발현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드미뜨를 방관했다. 아버지가 병사했을 때엔 드미뜨와 결혼할만한 여자는 누군가가 채간 뒤였다. 드미뜨의 어머니가 웬만한 장정 노릇을 했고, 아버지가 약간의 재산을 남긴 덕에 그런대로 먹고 살고 있었다.

드미뜨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일이 마을 축제구나.”

“응.”

레아의 반응이 시쿤둥했다. 드미뜨가 말했다.

“무슨 일이야? 아룬이랑 사귄다면서. 같이 축제를 즐겨야지.”

레아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아룬? 내가 미쳤지. 걘 하급이라지만 귀족이고, 난 농민 중에 높다지만 평민인데 사귀겠다고 들이대는 그 놈한테 내가 속았지. 벌써 도망쳤어. 견습 기사해야 된다면서 날 버렸어!”

그럴 것 같았다고 드미뜨는 생각했다. 아룬은 시종 노릇을 하면서 레아를 만났다. 아룬은 시종치곤 몹시 늙은 19살이었다. 드미뜨가 아룬을 만나 본 바로는 우직하고 힘은 세지만 그뿐인 허우대만 멀쩡한 사내였다. 레아가 미녀니까 달라붙은 흔해 빠진 남자가 아룬이었다.

“오빤, 축제 안 가?”

“난 책 볼 거야.”

“언제까지 책만 볼 거야? 이젠 오빠가 가장이야.”

“내가 요술사가 되면 인생 한 방인 거 몰라? 마법사 바로 아래 단계가 요술사야.”

“으이구, 그러다 폐인 된다!”

레아는 나가버렸다. 드미뜨는 한숨을 내쉬곤 책상 앞에 앉아 햇볕에 의지해 책을 보았다. 악마를 부르는 마법진에 관한 책이었다. 요술사의 요술은 악마와 계약을 해야 하는 위험한 것이었기에 그 길로 가려는 사람도 적었고, 그나마도 혈통을 이어 받은 사람만이 가능했다. 거듭되는 예지 몽 생각에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른 생각으로 마음을 돌렸다. 마법사 혈통을 이어받았다면 가끔씩 공포에 젖어, 시전 방법을 적어 놓은 책을 바라보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드미뜨는 자신의 탓인 건 자신 탓으로 돌렸고, 남 탓인 건 남 탓으로 돌리려고 노력했다. 다만 외부 환경 요인이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세상이 좀 더 자신을 도와주었다면 이런 식으로 살지는 않았을 거라고 드미뜨는 보았다. 드미뜨는 악마와 계약하는 걸 각오했다. 사실 드미뜨는 이미 이론엔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다만 요술사로 행동하기 위해선 보다 덜 사회에 해로운 마법진을 익혀야 할 따름이었다.

이제 곧 마을 축제다. 마을 사람들이 거의 다 모이니 의견을 발표하기엔 최적이지만, 다들 흥겹게 놀고 있는 판국에 마을을 버리고 도망치자고 하는 주장의 근거가 한낱 꿈이라면 드미뜨를 때려죽이려 들 터였다.

드미뜨는 축제 기간 동안에도 책을 읽기로 했다. 요술사가 드미뜨에게 가능한 길이라면, 한 눈 팔게 하는 모든 일은 사치였다. 그때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미뜨! 너 내일 축제 안 간다며?”

“네, 그건 말이에요, 엄마.”

“마을 사람들이 다들 네가 죽은 줄 안다. 온 가족이 간만에 나들이하자.”

드미뜨의 어머니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방문 옆에 세워둔 지팡이를 아들에게 던졌다. 드미뜨가 지팡이를 끌어안았다. 드미뜨는 어머니의 농사일을 가끔 도왔는데, 돕고 나서 오는 길에 힘이 부치면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걷곤 했다. 진짜로 그 정도로 허약한 건 아니었고 버릇에 가까웠다. 사실 드미뜨의 지팡이는 요술사 지팡이이기도 했다.

“드미뜨, 이거 내일 짚고 가라. 그럼 마을 사람들이 널 욕하지 않을 거야.”

사지 멀쩡한 아들을 절름발이로 만드는 어머니였지만 드미뜨는 납득했다. 드미뜨는 다시 책상에 앉았다. 그렇게 하루가 설렁 설렁 지나갔다.

“아, 오늘도 악몽이네.”

그렇게 드미뜨에게 마을 축제의 날이 밝았다.

낮부터 밤까지 축제였다. 드미뜨 가족은 왁자지껄한 축제에 어우러졌다. 이들은 한 군데 바에 대낮부터 자리 잡고 앉았다. 레아는 맥주를 마시면서 신세한탄을 늘어놓았다. 그때였다.

“아룬, 무슨 생각으로 여기 온 거야?”

레아가 성을 냈다. 아룬이 드미뜨 가족 옆에 와 앉은 것이다. 아룬은 건장한 체격에 눈매가 매서웠지만 그가 선한 남자란 건 다들 알고 있었다. 아룬이 말했다.

“레아,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러 왔어. 하도 가족들이 반대하는데 효자인 내가 어떻게 그분들 뜻을 거스르겠어.”

“그러세요, 귀족 나리?”

“비꼬지 말고. 레아, 너 많이 생각날 거다. 네가 그리운데 떠나는 거야. 두고두고 보고 싶고 생각날 거야. 참, 나 오늘 원정 나가. 위험한 일이랬어. 못 돌아올 수도 있데.”

“나랑 도망치자.”

“그럴 수는 없어.”

“알았어, 아룬 오빠. 잘 떠나쇼.”

아룬은 레아와 손을 흔들면서 헤어졌다. 레아는 목 놓아 울었지만 그 밖의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마을 축제가 깊어가던 밤. 보름달이 높게 떴다.

“가축들이 모였구나.”

흑마를 탄 세레나 여백작은 그렇게 뇌까렸다.

세레나는 농노들이 얼마나 찌질하고 노력을 안 했기에 조상 대대로 저렇게 비루하게 사나 싶었다. 노력은 반드시 보상 받는다고 세레나는 생각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외적 요인에 휘둘리는 법이고, 사람마다 한계치는 다른 법임에도, 그 사람마다의 한계치가 태어날 때 상당 부분 결정되는데도 세레나는 그렇듯 귀족스럽게 생각했다. 약자는 노력을 안 했기에 그리 된 것이니 어떻게 대해도 되고, 강자는 노력이 많이 해서 그렇게 되었으니 어떤 짓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세레나에게서 불길이 폭발했다. 정령들이 쏟아져 나와 작열했다. 불기둥이 축제 자리를 쌍끌이 그물처럼 덮쳤다. 기사들이 철퇴를 들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세레나의 기사들 속에 아룬도 있었다. 아룬의 몸이 세차게 떨렸다. 아룬은 철퇴로 도망다니는 농노의 머리를 치면서 드미뜨 가족을 찾았다.

드미뜨의 어머니는 마을 부촌장이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너희는 어서 도망쳐라. 난 영주님을 뵈어야겠다.”

드미뜨가 외쳤다.

“제 꿈 그대로에요! 영주가 저지른 짓이라고요!”

“영주님이 그럴 리 없다. 분명 성에서 곤히 주무시고 계실 거야. 난 성으로 갈 테니 너희는 도망쳐라.”

“엄마, 같이 가요!”

한 기사가 철퇴를 들고 불길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불꽃이 범벅된 검은 갑옷은 마치 마그마와도 같아 보였다. 기사가 철퇴로 드미뜨의 어머니를 후려쳤다. 뇌수가 쏟아지면서 어머니가 쓰러졌다. 드미뜨와 레아는 허겁지겁 불길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기사와 드미뜨 일행 사이로 한 기사가 달려 와 막아섰다. 기사가 외쳤다.

“레아, 도망쳐!”

아룬이었다. 아룬의 무장은 허술한 편이었다. 철퇴와 철퇴가 부딪쳤다. 드미뜨와 레아는 가끔 뒤돌아보면서 달아났다. 불길이 일어나는 진원에서 큼직한 불덩어리가 춤을 추면서 날아왔다. 불의 정령이었다. 정령이 갑자기 속도를 내더니 아룬을 덮쳤다. 아룬이 폭발했다. 레아와 드미뜨는 아룬이 시간을 버는 동안 꽤 멀리 간 상태라 세레나의 더듬이엔 걸리지 않았지만 아룬의 죽음을 지켜 볼 수는 있었다.

“오빠, 엄마 죽은 거야?! 아룬도 죽은 거야!?”

“죽었을 거야. 제길, 젠장!”

드미뜨는 한적한 공터에 가 멈추었다. 어릴 적에 놀곤 하던 모래밭이었다. 드미뜨는 보름달 아래 환하게 볼 수 있었다. 불길과 비명으로 가득 찬 곳을 한 번 쏘아 보곤 드미뜨는 레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복수하고 싶니?”

“응! 찢어 죽이고 싶어!”

드미뜨는 지팡이를 들어 꽂았다. 머리속으로 온갖 수식이 지나갔다. 드미뜨는 홀린 듯이 모래밭에 온갖 기호들로 가득 찬 여러 겹의 원을 그었다. 마법진이었다. 요술사의 피는 레아도 나눠가졌다. 드미뜨와 레아의 복수심이 마법진과 동조하면서, 남매만이 느낄 수 있는 진동에 싸여갔다. 요술사의 피를 이어받은 남매가 비슷한 상념을 공유할 때 특수한 마법진을 통해 불러낼 수 있는 악마가 소환되었다. 남매의 피 모두가 각성한 것이 명백했다.

레아는 자신이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 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비수를 든 채 우물쭈물하는 드미뜨의 손을 낚아채 자신의 목에 꽂아 넣었다. 포물선으로 목에서 피를 뿌리면서 레아가 마법진 위에 쓰러졌다. 드미뜨의 몸이 무너져 내리면서 크게 떨렸다.

악마가 말했다.

“계약은 이루어졌다, 드미뜨. 너에게 나의 의지가 아닌 권능을 내린다.”

드미뜨의 뇌리에 악마의 지식이 폭격되었다. 어느새 드미뜨는 강력한 요술사였다. 누이의 피로 이를 이루었다는 자괴감과 이를 복수로 벌충하겠다는 호승심이 들끓었다. 드미뜨가 마력을 펼치자 세레나가 다스리는 영지의 모든 농민들이 잠에서 깨어 쏟아져 나와 흉기를 들고 세레나의 군대에 덤벼들었다. 악마에게 조종당한다기 보다는 그동안의 울분이 폭발된 결과였기에 드미뜨의 마음 한켠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저들이 세레나를 상대로 혁명을 일으킨다 한들 저들의 조직력과 지력으로 귀족의 통치를 대신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런 한가로운 생각은 금방 드미뜨에게서 사라졌다. 세레나는 드미뜨의 가족을 죽였다. 자신을 존중하기는커녕 생존을 보장해주지도 않는 사회라면 그 사회의 규범을 지킬 이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약한 구석이라도 찔러 봐야 하는 법이었고, 드미뜨에겐 이제 세레나와 맞먹는 힘이 있었다. 드미뜨는 투쟁을 선택했다.

드미뜨가 발을 구르자 드미뜨 뒤에서 키가 2미터나 되는 근육질 오크들이 소환되어 쏟아져 나왔다. 이제 세레나의 정예 병력을 상대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을 때 드미뜨는 창끝에 꿰인 세레나의 목을 뽑아 폐허가 된 성채 아래로 내던졌다.



Fin.
[201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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