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편지가 상자와 함께 왔다. 집배원이 쿵하고 문을 닫고 나갔다.

 배달된 편지봉투를 뜯는다. 그리고 편지를 꺼낸다. 편지와 함께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바닥으로 떨어진 무언가를 줍는다. 그것은 열쇠였다. 편지와 열쇠를 번갈아 바라보다 편지를 펼쳐 읽는다.


[나의 영원한 동반자에게

이렇게 네게 연락을 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아. 처음에 무어라 운을 때야 할지 한 참을 고민했어. 하지만 평소 처럼 네게 말하기로 했어. 이봐. 나, 간다. 잘 살아. 뭐, 생뚱맞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게 내 성격이었잖아. 어쨌든 이게 이 편지를 쓴 원래 목적은 아니지만. 어쨌든 결론은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난 이 세상에 없을 거라는 거야. 그래서 열쇠 하나를 보낼게. 그 열쇠로 같이 온 상자를 한 번 열어봐.]


 편지에 적힌 대로 상자의 포장을 뜯었다. 그러자 자물쇠가 달린 나무로 된 상자가 나온다. 문득 꽤 전에 여기에 무언가를 넣은 게 생각이 났다. 편지에 들어있던 열쇠로 상자에 달린 자물쇠를 연다. 자물쇠가 열린 상자에는 야구공과 사진, 음악CD와 티셔츠가 들어 있었다. 나는 편지로 눈을 돌린다.


[아마 놀랐을 거야. 그렇지? 우리가 같이 했던 것과 모았던 것을 상자에 넣었잖아. 그래서 나중에 우리가 결혼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걸 열자고 말이야.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날은 오지 않았고, 나는 그 날을 보지 못하게 되었어. 그리고 내가 입원을 하고도 너는 날 찾아올 수 없었지.

그래서 내가 너에게 간 거야. 사진을 봐봐. 사진에는 나와 네가 다정하게 찍은 모습이 담겨 있잖아?]


 상자 안에 들어있던 사진을 바라본다. 사진에는 남자 둘이가 있다. 한 명은 편지를 받은 사람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아마도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있다. 눈물이 팽 돌았다. 편지를 한 손에 들고서 상자 안 사진을 들어 살살 쓰다듬는다. 그리고 눈물을 닦으며 다시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너와 함께 했던 캐치볼 기억나지? 네가 나보고 야구 못하면 캐치볼이라도 하자고 했잖아. 그런데 난 캐치볼도 못해서 너한테 만날 구박만 받았지? 그리고 그러면서 너 한테 공 받는 법도 배우고 던지는 법도 배웠지. 그리고 그때마다 노트북에다가 CCM을 틀어놓았잖아. 그리고 내게도 선물했지. 난 우리 사랑을 부정하는 교회의 찬송가는 듣기 싫다고 했는데도 말이야. 하지만 결국 나도 너하고 같은 종교를 가지게 되었고. 그렇지?]


 글을 읽고 눈은 다시 상자로 향한다. 상자 속 음악CD를 집어 든다. CD 재킷에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과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사진이 있었다. 그것을 보관하는 상자를 꺼내 라디오로 가져가 CD를 넣고 돌린다. 그러자 라디오에서 찬송가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편지로 옮긴다.


[근데 말야 나는 그것들 중에서 너하고 맞춘 티셔츠가 가장 마음에 들더라니까. 내가 억지로 너하고 커플 티를 맞추자고 했을 때, 우리는 아직 커밍아웃 하지 않았잖아. 커플 티를 맞춰 입고 다니면 우리 사이를 금방 들키게 된다고 거절했잖아? 하지만 내가 동정의 눈길을 보내니까 네가 한 숨을 쉬고는 이렇게 말했었지?

"좋아. 사랑의 힘으로 그 정도는 극복하지 뭐." 라고 말야. 그때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알아? 하지만 동시에 닭살까지 돋았다니까. 그래서 속으로 웃고 말았지 뭐야. 그리고 너와 만나지 못하는 지금도 그 티셔츠를 입고 있어. 아, 근데 오해는 하지 마. 너한테 보낼 때는 아주 깨끗하게 빨아서 보낼 테니까. 넌 꽤 깔끔 떨었잖아. 이게 내가 너한테 해주는 마지막 배려야.

마지막으로 네게 해주고 싶은 일이 있어. 내가 없더라도 잘 살아. 알았지? 다른 사람 만나서 말야. 이 글 읽으면서 울지 말고 바보야. 알겠지? 그럼 난 이제 여기서 글을 멈춘다. 사랑해. 나의 영원한 영혼의 동반자.]


 편지의 글은 거기서 끝이다. 시선은 편지에서 상자의 티셔츠로 향한다. 장롱 속에도 이런 것과 같은 것을 넣어둔 기억이 있다. 장롱 속에서 상자 속 티셔츠와 같은 것을 꺼내 거울 앞으로 가 입어본다.  거울 속에는 편지를 받은 남자가 아니라 편지를 보낸 남자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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