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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공짜 커피를 조심해 -2

2023.04.05 13:1704.05

그 다음날에도 캡슐 커피는 꽉 채워져 있었다. 나는 눈치를 보다가 헤이즐넛 향 커피 버튼을 눌렀다. 부우우우웅. 풍성한 헤이즐넛 향이 났다. 와, 회사에서 주는 커피, 공짜 커피! 나, 이런 대우를 받을 만큼 좋은 직장에 다니는 거야? 뭐, 애초에 커피 머신을 놓아준 게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부우웅 하는 소리를 듣고 팀장님이 내 쪽으로 슬쩍 다가왔다. 팀장님의 한 손에도 이미 커피가 들려 있었다.

"김사원! 들어봐. 어젯 밤에 강사원이 언제까지 캡슐 빠지나 눌러봤는데 진짜 한도끝도 없이 나오더라고 하던데."

"와 입뾰쬭이가 이번엔 좀 심했다. 업체에 신고해야하는 거 아닌가요? 대박."

"그러게. 당근마켓 찾아 봐, 캡슐 엄청 나오는 거 아냐?"

아침 업무를 끝낸 후, 팀장님과 실장님과 실없이 낄낄거리며 점심밥을 먹으러 구내식당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소고기 카레 냄새가 저만치서부터 풍긴다. 점심시간 10분 전부터 이동하는 것이 올바른 습관이다. 그래야지 바로 앉아서 먹지ㅡ 최악의 경우 일어서서 20분 정도 자리가 나길 기다리며 식판을 들고 서성거려야 한다. 외풍이 들어오는 초록색 벽에 붙어 선 우리는 파카를 여미며 무료함을 잠깐이라도 녹여보고자 했다.

"팀장님, 저 뾰죡이랑 같이 양치질하러 회사 화장실에 갔는데 말이죠."

"너 걔랑 왜 노니?"

"그럼 안 놀아요?"

"야, 근데 거 너네 양치를 20분씩하니? 잇몸 닳겠다."

"아니, 하, 뭔 말을 못해."

"말해, 말해. 언로를 틀어막으면 쓰나."

"그런데 말이죠. 뾰죡이가 그러는거에요. 어제 자기는 사장님이랑 지하철 같은 칸 타고 갔다구."

"사장님 원래 제네시스 타고 다니지 않나요? 흰 거, 쥐팔공. 왜 그랬지?”

“서민 체험?"

"하여튼 근데 사장님은 자기가 바로 뒤에 선지 모르는 눈치였대요. 아 2호선 라인에 사람이 원체 많아요? 그래서 엄청 꽉 끼어서 갔는데 사장님 핸드폰 화면이 보이더래요. 왜 맨날 폴드 끼고 살잖아요, 인상 팍 쓰고. 그래서 아 뭐지 주식하는가? 했는데, 뭔지 아세요?"

"모르지!"

나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숨을 들이켰다.

"아니, '방울 도사 주식 떡상 천기누설 리스트' 이따위 블로그 글을 보시는거에요. 더 놀라운 점요, 아니 그 방울 도사가 말이죠 글쎄 왜 방울 도사냐면요..."

목소리가 점점 더 수상쩍게 변하는 것을 듣고 팀장님은 내 손목을 황급히 부여잡았다.

"야, 설마. 너 지금 인사팀 앞에서 하려는 말인거 알고 있지?"

"아, 아! 나 안들을게! 나중에 알려줘!!"

실장님은 귀를 틀어막으며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그 틈을 타 나는 팀장님께만 속닥거렸다.

"아니 글쎄, 그게. 그 도사라는 할아버지가, 이, 이이, 바지춤을 내리고, 자기 거시기를 먹에 푹 찍는다네요. 막춤을 추다가 덜렁거리면서 바닥에 퍼질러 앉았을 때 그 모양이 상방을 향하면 주식 우상향이고 아래로 가면 우하향이라고... 근데 진짜 잘맞는대요."

"거짓말이지?...내가 지금 뭘 들은거야? 2023년 아니야?"

어느새 손바닥을 연 실장님이 나를 충격받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니 실짱님이 들으시면 어떻게 해요! 하여튼ㅡ 이거 진짜 잘 맞는다고요. 댓글을 읽어 봤는데 다 감사하다는 인사 천지였어요."

팀장님은 눈을 땡그랗게 뜨더니 손바닥으로 내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

"그걸 믿니! 그거 다 알바다 얘! 아니 큰일나겠네! 얘!"

"아! 아파요! 아! 아니 근데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우리가 화장실에서 막 깔깔거리고 웃는데 한 부스가 계속 닫혀 있는 거예요. 쏴아 하고 한참 전에 물 내리는 소리가 났는데도!"

실장님은 반찬 담는 집게를 그만 놓쳤다. 얼굴엔 순수한 공포가 씌여 있었다.

"헐."

"어..."

"그리고 큼! 그러는 거예요. 큼! 큼큼!"

내가 성대모사를 하자 실장님은 경악했고, 오 팀장님이 팔꿈치로 툭툭 치자 그제야 다음 반찬인 깍두기를 받으러 옆으로 이동했다. 실장님 자리는 사장 바로 앞이라 하루에도 30번씩은 족히 그 큼큼 소리를 들을 것이다.

"사장님이었지!"

"네. 사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왜 그 까랑까랑한 목소리 있잖아요. 잔뜩 높여서,

큼큼. 밖에 제 뒷담 까시는 년들, 지금 당장 내가 안 나가는 거 다행으로 아시는게 좋을걸? 봐줄때 빨리 나가!"

"그렇게 말했단 말야? 우리 사장님, 어쩐지 말투도 무당같다."

실장님은 앉을 자리를 물색하다가 발걸음을 늦추며 우리 둘에게 속삭였다.

"방울도사라니... 그거 자체가 미친거 같은데... 말로만 들었는데 그 흔들거림이 내 망막에 새겨진거 같아..."

“근데 그 방울도사 말을 믿고 투자하는거잖아요... 우리 사장님..."

"과연 우리 후영 엘리베이터...얼만큼 생존할 수 있을까..."

내가 말했다.

"이직준비 스터디할까요?"


나는 그날 6시까지 엑셀로 장표를 수정하는 척 하면서 방울도사의 네이버 블로그를 읽었다. 썸네일은 눈에 탁 띄는 주황색 글씨에 보라색 배경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담아 전자] 방울 도사 업 앤 다운?" 이런 식이었다. 놀랍게도 각 포스팅에는 동영상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당연히 방울 도사의 앞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잔뜩 산발을 한 흰머리의 할아버지가 낡은 라디오를 트는 것으로 영상은 시작되었다. 멜로디가 뚜렷하지 않아서 웅성거리는 듯한 민요 합창에 맞추어, 할아버지는 어깨춤을 추다가, 휘 돌다가 바지를 쑥 내렸다.

"수요 없는 스트립쇼..."

하지만 아니다. 분명 수요는 차고 흘렀다... 할아버지는 웬 특수제작된 흰 한복 내의 같은 것을 입고 있었는데 앞모습과 이어지는 엉덩이 아랫부분을 살펴보니 그 내의는 아기 귀저기 갈기 좋으라고 귀퉁이 부분을 단추로 마감해 놓은 것처럼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의 바지 가랑이 부분이 말이다. 순간, 내가 모르는 할아버지의 국부를 집중 관찰하고 있었단 사실에 그만 정신이 아찔해져 동영상 멈춤 버틈을 눌렀다가 다시 심호흡을 한 후 용기를 내서 재생했다. 앞모습만 벗은 모양이나 다름없었기에 뒷태를 보면 어쩐지 흥겨운 리듬을 타는 거 같은, 좀 특이한 한복 입은 사람, 정도로만 보일 뿐이었다.

나는 영상을 중간에 멈추고 한숨을 쉬며 아래로 스크롤을 내렸는데... 그 밑에 첨부된 사진을 보니 정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화선지에다가 아래로, 혹은 위로 향하는 까만 작대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에는 항상 애매하게 둥그런 실루엣이 두 개 있었는데...

"하아아아... 이런 게 싸인 비슷한걸까..."

정말 심란하기 짝이 없었지만... 어쩐지 나는 다른 포스팅도 클릭해 보았다가 문득 네이버 주식 섹션을 켜서 그의 방울 점사와 주식의 등락을 비교해 보았다. 이상하게도 방울 도사의 짐작은 그가 점치는 주식의 대략적인 그래프와 소름끼치게 잘 맞아떨어졌다.

팀장님의 말씀 중에 틀린 게 하나 있었다. 댓글들은 댓글알바의 미온적인 열정으로 쓸 수 있는 댓글이 아니었다. 그것은 찬미와 감사였다. 그의 광적인 추종자는 한 300명 정도 되는 거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이제 공구도 하겠구만."

팀장님이 고개를 뻐뜩 쳐들었다.

"야, 너 혼잣말 속으로만 생각하랬지. 그거 습관이다."

"아, 죄송합니다."

"근데 너도 방울도사 블로그 보는 중이냐? 나도 그 생각 했다. 이제 효소 팔겠다고."

"어... 요새는 사람들 인스타에서 효소 안 팔아요."

"뭐 파는데?"

"저 인스타 안 해서 몰라요."

"그럼 왜 말했담?"

"유행을 안다고 강조하기 위하여?"

"참내. 웃기는 짬뽕이야."

"그럼 팀장님은 웃기는 짜장면이에요."

"그런 게 어딨니. 야, 55분이다. 빨랑 챙겨. 어서가자. 근데 이번주 니가 상디 담당인거 알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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