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최후의 인간

2021.10.10 17:3810.10

최후의 인간

 

 

인류가 처음 운석을 보고 공포를 느낀 건 언제였을까? 상서로운 기운과 함께 하늘에서 뭔가 떨어졌다는 왕조 시대에서도 더 거슬러 올라가, 원숭이랑 비슷한 모습으로 나무 위에서 벌레나 잡아먹고 살았던 시절 최초의 인류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이, 갑자기 작열하는 빛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을까? 세상이 끝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을까?

창밖으로 반경 수백 킬로미터, 아니 지구 전체를 감쌀 만큼 거대하고 눈부신 빛의 장막이 드리워졌을 때 유리는 어둠침침한 연구실에서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앞에 있는 모니터 불빛이 한꺼번에 눈으로 파고든 것처럼 한순간 눈앞이 하얘지더니 곧바로 세피아색 여운이 몇 초 동안 이어졌다. 벽을 둘러싼 책꽂이도, 책상 위에 쌓인 책들도, 그 너머로 보이는 창문도 모두 세피아색으로 물들었다.

유리는 키보드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도 세피아색이었고, 손등에 난 상처는 더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지난주 동물실험을 하다가 개한테 물린 상처였다. 유리는 동물실험을 할 때마다 종종 물렸다. 그전 주에는 기니피그에게 물렸고, 또 한 달 전에는 연구실 역사상 최초로 돼지에게 물린 사람이 됐다.

몇 초가 지나자 손도, 더 짙은 색의 상처도, 형광등을 꺼놓은 연구실 풍경도 흑백으로 돌아왔지만 유리는 논문이 띄워져 있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상처가 난 오른손과 상처 없는 왼손 모두 꽉 움켜쥔 채 말 그대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바퀴 달린 의자가 세차게 밀려나 뒤에 있는 책꽂이에 부딪혔다. 책꽂이 한구석에 놓여 있던 비커와 시험관 따위가 덜덜 떨리면서 잘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유리는 그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내다봤다.

빛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밤하늘의 농도는 빛이 번뜩이기 전보다 더 옅었다. 동이 트는 건 아닐 것이다. 해가 뜨려면 아직 몇 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게다가 연구실 창문은 해 뜨는 방향으로 나 있지도 않았다.

뉴스에서는 며칠 전부터 오늘 밤 유성우가 내릴 거라고 떠들어댔다. 그런데 그렇게 밝은 빛이라니. 그 정도 밝기면 유성우가 아니라 소행성이라고 해도 될 만한 크기일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덮쳐 오기는커녕 조그만 흔들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4층에 있는 연구실에서 내려다보이는 건물 앞 벤치와 시원찮은 빛을 뿜는 가로등과 그 너머로 보이는 다른 건물들도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유리는 차라리 운석이 떨어져서 모든 걸 날려버렸으면 하는 마음에 헛것을 봤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모니터 앞으로 돌아가 화면에 뜬 시간을 확인해보니 새벽 4시였다. 유리는 책꽂이에 부딪혀 엉뚱한 곳으로 굴러간 의자를 끌어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런 다음, 화면에 떠 있던 워드프로그램을 닫고 논문 파일을 드래그해서 볼링 치듯 바탕화면 휴지통에 던져 넣은 뒤 휴지통마저 비웠다. 책상 밑으로 몸을 집어넣어, 코드가 여러 개 꽂혀 있는 멀티탭에서 컴퓨터 전원 코드를 뽑기까지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언젠가 이런 일을 하게 되길 기대하며 예행연습이라도 했던 것처럼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었다.

유리는 책상 옆에 놓인 삼단 서랍장 맨 아래 칸을 열어 엉킨 전기선 밑에 처박혀 있던 십자드라이버를 찾았다. 그러고는 다시 책상 밑으로 들어가 흐린 불빛 아래서 조금 힘겹게 컴퓨터 본체를 열고 하드디스크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하드디스크는 실험 캡슐에서 꺼낸 쥐의 시체처럼 뜨끈뜨끈했다.

유리는 하드디스크를 연구실 시멘트 바닥에 내려놓고 잠깐 내려다봤다. 거기에는 연구실 모두가 공유하는 연구일지, 머리가 안 돌아갈 때마다 몇 시간이고 빠져 있기 일쑤인 게임 따위와 함께, 4분의 3 정도 완성된 논문이 들어 있었다. 방금 빛이 번쩍하기 전까지 유리가 쓰고 있던 ‘생명체를 이용한 초고속 추진 실험 계획’이 담긴 논문이었다. 유체공학 분야의 권위자이자 이 연구소의 책임자인 지 교수가 일주일 뒤에 있을 학술대회에서 지 교수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기로 돼 있는 논문이다.

유리는 구부렸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연구실 한구석에 있는 공구상자에서 망치를 꺼내 왔다. 그것은 못을 박는 본연의 임무보다는 주로 실험동물의 주의를 돌리거나 잘못 만든 실험모형을 부수는 데 쓰였다. 가끔 지 교수의 머리가 눈앞에 있을 때 한차례 휘둘러 머리통을 깨버리고 싶게 만드는 물건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 망치가 이제 유리가 하려는 것처럼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부수는 데 쓰이는 건 처음이었다.

유리는 쪼그리고 앉아 망치질을 시작했다. 망치로 한 번 내리칠 때마다 부서진 하드디스크 파편이 바이러스처럼 늘어났다. 하드디스크를 잘디잘게 부수면서 유리는 뭔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조금 전에 떨어진 운석도 처음에는 커다란 덩어리였다가 지구로 떨어지면서 이렇게 잘디잔 유성우로 변했을 것이다. 그 정도 밝기라면 결코 잘디잔 크기가 아닐 테지만.

유리는 숨마저 조금 헐떡거리면서 일어나 하드디스크 잔해를 발로 한번 세게 밟았다. 금속이 콘크리트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났다. 쥐고 있던 망치를 잔해 위로 툭 던지자 더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유리는 망치를 휘두르던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개한테 물린 상처가 아직도 세피아색으로 물들어 있는 듯한 착시가 일어났다. 분노로 인한 열기 때문인지 유리는 갑작스러운 더위를 느끼며 곧바로 연구실을 나갔다.

그날 밤 유리는 꿈을 꿨다. 실험동물들과 유리 자신이 나오는 꿈이었다. 꿈에서 유리는 캡슐에 들어가 있었고, 현실에서 하얀 옷을 입은 연구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캡슐에 들어가 있던 동물들이 반대로 캡슐 안의 유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돼지나 기니피그와 달리 유리는 이족보행 생물이었기 때문에 두 손을 들어 캡슐 벽을 두드릴 수 있었다. “꺼내줘!”라거나 “뭐 하는 거야?”라고, 의미가 확실히 전달되는 외침도 내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캡슐을 둘러싸고 있는 돼지와 기니피그와 잡종견의 귀에는 꽥꽥거리는 소리로만 들릴 것이었다.

군데군데 검은 털이 섞인 커다란 흰 개가 앞발을 들어 장치를 작동시키는 버튼을 누르자 캡슐 안은 순식간에 열기로 가득 찼다. 동물들은 마치 몇 도까지 버틸 수 있나 보려는 것처럼 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즉 평소에 유리를 비롯한 지 교수 휘하 연구원들이 실험동물들을 보는 것처럼 유리를 보고 있었다. 온도가 점점 더 올라가자 유리는 꿈속인데도 견딜 수 없는 뜨거움에 끄아악 하고 돼지가 지르는 것과 비슷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퍼뜩 잠에서 깼다.

유리가 눈을 부릅뜨고 누워서 지금 몇 시쯤 됐을까 하는 적절한 의문이 아니라, 자신이 꿈에서만 소리를 질렀는지 아니면 실제로 입 밖으로 내뱉었는지 같은 이상한 의문을 떠올리고 있을 때 문득 들려온 목소리가 거기에 답을 주었다.

“무슨 꿈이길래 그렇게 소리를 질러?”

안의 목소리였다. 유리는 도로 눈을 감았다. 유리가 연구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 안은 지 교수의 조교들 중에서 최고참 연구원이었다. 지금은 최고참 연구원이자 지 교수의 충실한 오른팔이다. 유리는 안이 어떻게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3초 정도 의아해했다. 둘이 단순한 동료 사이가 아닐 때 알았던 번호키 비밀번호를 여태껏 기억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유리는 비밀번호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전화는 왜 안 받아?”

안의 물음에 유리는 눈을 뜨고는 몇 시인지 보려고 머리맡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지만 휴대폰은 밤새 전원을 꺼둔 상태 그대로였다. 유리는 전원을 다시 켜지 않았다.

“컴퓨터 하드 네가 부순 거 맞지?”

안이 다시 물었다. 유리는 침대에 누운 채, 방문 앞에 서 있는 안의 얼굴을 봤다. 안의 갸름한 턱이 올려다보였다. 언젠가 저 날카로운 턱선을 손가락으로 쓸어보기도 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게 솟구쳐서 유리는 작게 식식거렸다. 너무 더워서 그렇기도 했다. 아직도 뜨거운 캡슐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이다.

“왜 그랬어?”

유리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안의 뾰족한 콧구멍이 씰룩거리는 모양을 혐오감 깃든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안은 유리가 침대에서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유리는 손을 살짝 들어 올려 땀이 맺힌 이마를 훔치지도 않았다.

“지난번에 저지른 일로 쫓겨날 뻔한 거 겨우 막아줬더니.”

유리는 이번에도 아무 대꾸 하지 않았지만 몸은 일으켜 앉았다. 유리는 지금 안이 짓고 있는 표정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즐거워하는지 고소해하는지 화를 내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화를 내는 건 아닐 것이다. 안은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유리가 ‘지난번에 저지른 일’로 연구소에서 쫓겨날 뻔했을 때 안이 노발대발하는 지 교수를 설득하느라 애쓴 것도 사실이었다. ‘이 친구가 술만 먹으면 부모도 못 알아봐요. 아마 술 먹고 그랬을 겁니다.’

“이번 논문으로 기회를 주셨는데 그걸 날려버리면 어떡해? 그래도 작년에 팸플릿 3만 부 발송작업 한 것보단 낫지 않아? 다른 데서도…….”

“얼마만 한 운석이었어?”

유리가 말을 자르고 묻자 안이 “뭐?” 하고 되물었다.

“오늘 새벽에 떨어진 운석. 빛이 엄청났잖아. 그 정도 밝기면 직경 몇 백 미터는 됐을 것 같은데.”

안은 유리가 저지른 짓을 계속 추궁하고 싶었겠지만 잘난 척하고 싶은 유혹을 이기진 못했다. 안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냥 유성우였어. 예상한 것보다 발광점이 커서 그게 진짜 발광점인지 아닌지도 아직 안 밝혀졌고. 조사 중이래. 근데 몇 백 미터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 정도 크기면 나라 전체가 날아갔겠지.”

늘 그랬듯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덧붙인다. 유리가 귀찮다는 듯 다시 눕자 안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내 말은, 다른 데도 마찬가지라는 거야. 이 바닥에서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고. 살아남는 소수가 되려면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

안의 말이 방 안의 먼지처럼 둥둥 떠다니기라도 하는 양 유리는 먼지를 날리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런 유리의 손짓을 못 봤는지, 아니면 보고도 모른 척하는지 안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은 뭐 좋아서 논문 대신 써주고 노예처럼 일하겠어? 나중에 우리가 그 위치에 갔을 때 똑같은 짓 안 하면 되지 않나? 조금만 참으면 교수님 이름 덕이라도 볼 수 있잖아. 그래도 오랫동안 교수님 밑에서…….”

“개처럼 일했지. 할 말 다 했으면 꺼져.”

유리가 잠긴 목소리로 단호하게 내뱉었다. 안은 입을 다물었다. 갸름한 턱밑으로 콧김이 뿜어 나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유리는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안이 바람을 일으킬 정도로 세차게 몸을 돌리는 듯했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유리는 그제야 침대에서 일어나 잠옷 바람으로 가서 번호키 비밀번호를 바꿨다.

 

유리는 휴대폰 전원을 꺼놓고 오전 내내 집에 있다가 오후 2시쯤 짐 정리를 하러 연구소로 향했지만, 사실 목적은 짐이 아니라 운석이었다. 연구실에 들러 얼마 안 되는 짐을 택배로 부치고 운석을 찾으러 나설 생각이었다.

뉴스를 뒤져보니 오늘 새벽 지구를 삼켜버릴 듯했던 빛의 발원지는 연구소에서 남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사람들이 종종 와서 반려동물들을 버리고 가는 야산 근처였다. 안의 말대로 유성우가 내릴 때의 빛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크고 밝았기에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었다. 단순히 번개였을 것이라는 주장부터 자욱한 안개에 반사된 빛이라느니 오래전에 폭파한 별의 흔적이니 하는, 과학적 근거를 알 수 없는 주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리가 연구소 건물 3층에 있는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벽 삼면을 가득 채운 책꽂이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굳어버린 듯한 동료 연구원 영 조교의 얼굴과 오래된 컴퓨터와 자주 고장나는 복합기 따위가 아니고,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 줄기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먼지도 아니고, 창문을 등지고 앉아 있는 낯선 실루엣이었다.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처음에는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지만, 영 조교를 흘낏 보고 다시 보자 실루엣 속에 있는 구체적인 생김새가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창문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가무잡잡한 피부에, 큼직한 눈에는 왠지 물기가 맺힌 듯하고,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하는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 여자였다. 유리가 사무실에 들어오자 그 여자는 몸을 살짝 일으켰다가 다시 앉았다.

유리가 저 사람도 지 교수의 캡슐에 욱여넣어질 인력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영 조교가 다가왔다. 평소 지 교수가 시키는 별의별 일을 솔선수범해서 하고 선배들한테 깍듯한 영 조교를, 유리는 재수 없는 녀석이라고 여겼다. 영 조교가 특유의 애절한 말투로 추궁했다.

“선배님, 왜 전화 안 받으셨어요?”

유리는 휴대폰이 아직 꺼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서른 몇 통의 부재중전화가 와 있었고 문자메시지는 여든하고도 일곱 통이 와 있었다. 유리가 이 메시지들을 한꺼번에 지울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영 조교가 애절함이 담긴 거슬리는 말투로 다시 말했다.

“교수님 화 정말 많이 내셨단 말이에요.”

유리는 먼지와 함께 떠다니는 영 조교의 말 너머로 창가에 앉아 있는 사람을 다시 바라봤다. 그 사람은 무표정한 유리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기 시작한 영 조교를 무례하지 않을 만큼만 번갈아 보고 있었다. 유리는 그 사람 뒤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보고, 창가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혹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을까 조심하면서 창문을 열려고 다가갔다.

다행히 그 사람은 움찔하지도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유리가 창문을 열자 더운 바람이 밀려들어오면서 햇빛 줄기 속 먼지가 살짝 흔들렸다. 영 조교가 “교수님께서……” 하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러더니 창가에 앉은 사람에게 말한다.

“엘,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요?”

엘이라고 불린 여자가 일어나려고 몸을 들썩이자 유리는 “아니에요”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엘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렸다. 그 어깨는 가냘팠고, 살이 없어서 딱딱했고, 미열이 있는 것처럼 따뜻했다. 엘의 커다란 눈이 어깨에 올려진 유리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그런 다음 엘은 곧바로 유리를 올려다봤는데, 깜짝 놀랐다거나 불쾌한 얼굴은 아니었다. 살짝 놀라긴 했으면서도 호기심을 느낀 것 같았고, 표정에는 상황을 계속 지켜볼 만큼의 담담함도 깃들어 있었다. 그래도 유리는 얼른 손을 뗐다.

“아, 미안해요.”

거기에 엘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영 조교가 다시 말했다.

“교수님께서 선배님 보면 연구실로 바로 오…….”

“운석 찾으러 간 사람 있어요?”

영 조교는 유리가 말을 끊자 불쾌한 듯했지만 선배들한테 워낙 깍듯했기 때문인지 발끈하는 것을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네, 백 선배님하고 몇 명…….”

유리는 대놓고 얼굴을 찡그렸다. 안의 동기인 백은 호시탐탐 안의 자리를 노리는, 야망은 안만큼 크면서 능력은 받쳐주지 않는 작자였다.

“선배님, 교수님께서 연구실에서 기다리라고…….”

“짐 싸러 왔어요. 내 사물함은 다른 사람 줘요. 아, 이분이 쓰면 되겠네요.”

영 조교의 얼굴에 불쾌한 빛이 드러났다.

“선배님…….”

유리는 또다시 영 조교의 말을 끊을 작정이었지만 유리가 끊기 전에 전화벨 소리가 먼저 그의 말을 끊었다. 영 조교는 유리를 향해 짓고 싶은 표정을 전화기에게 지어 보이며 잰걸음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영 조교가 차렷자세 비슷한 것을 하고 “네, 교수님, 네, 네, 알겠습니다” 같은 말을 늘어놓는 사이 유리는 인사 같은 건 집어치우고 그냥 나갈까 하다가 이제 다시 볼 일이 없을 사무실을 한번 둘러보았다. 엘이 앞에 앉아 있는 창문을 사이에 두고 양쪽 벽에는 보고서와 공문서 따위로 가득한 캐비닛이 하나씩 서 있었다. 저기 어디에 유리의 이름이 들어간 서류가 있을 테지만 그것도 곧 실패한 실험의 결과물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게 틀림없었다.

영 조교가 유리 쪽을 슬쩍 곁눈질하더니 “아뇨, 아직 안 왔습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고 엘에게 말했다.

“엘, 교수님이 갑자기 일이 생기셔서 오늘 못 들어오신다네요. 내일 오전에 다시 올래요?”

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선배님도 내일…… 앗, 어디 가세요? 안 선배님 만나러 가시는 거죠?”

유리는 속으로 ‘좆까’라고 말한 뒤 사무실 밖으로 나와서 문을 쾅 닫아버렸다. 이제 연구실에 있는 사물함에서 얼마 안 되는 짐을 챙겨 갖고 나오면 십 년 넘게 쌓아온 경력도 완전히 끝이 난다. 유리는 뭔가 허무하면서도, 십 년 넘도록 이 일을 하면서 쌓인 경력이라는 게 과연 있나 하는 생각에 더 허무해졌다.

그때 등 뒤에서 문이 가만히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려서 유리는 뒤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엘이 살짝 목례한다. 유리 또한 살짝 움찔하면서 마주 고개 숙였다.

유리의 눈앞에 서 있는 엘은 의자에 앉아 있을 때보다 더 가냘파 보였다. 어깨는 구부정했고, 조금 큰 듯한 셔츠 소매 아래로 늘어뜨린 팔은 가늘었다. 유리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기 시작하자 엘도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유리는 엘리베이터가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엘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새벽에 그 빛 보셨죠?”

엘은 바로 대꾸하지 않고 큼직한 눈으로 유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갈색에 가까운 엘의 눈동자에는 약간의 호기심과 약간의 두려움과 왠지 모를 안쓰러움 비슷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윽고 엘이 대답했다.

“네, 그 순간엔 빛밖에 안 보였어요.”

힘없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유리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유리가 뭐라고 대꾸하려는 순간, 엘의 어깨 너머로 어색하게 웃는 안의 얼굴이 나타났다.

“교수님한테 가는 거야?”

“아니, 연구실. 짐 챙기러.”

유리는 엘리베이터 문 위의 숫자를 올려다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안의 얼굴이 황당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이대로 그만두려고? 십 년 넘게 쌓아온 걸 한순간에 무너뜨리겠다는 거야? 참아. 지난번 사고 쳤을 때처럼 또 술 먹고 그랬다고 싹싹 빌면 나도 옆에서 같이 빌어줄게.”

유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짐이라도 싣거나 내리는지 엘리베이터는 아까부터 꼭대기 층에 멈춰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안이 다시 말했다.

“지금까지 잘 참다가 갑자기 왜 그래? 무슨 계시라도 받았어?”

말투는 훈계조였지만 안의 얼굴을 쳐다보니 눈앞의 엘을 한번 슬쩍 보고는 실실 웃고 있다. 신입 연구원으로 짐작되는 사람 앞에서 농담이랍시고 던진 그 말이 유리는 그저 가증스럽기만 했다. 안이 말을 이었다.

“너 지난번에 했던 영웅놀이 말이야, 그것도 그래. 과학자라면 누구나 그런 딜레마를 갖고 있겠지만 과학을 하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나?”

“높은 사람 비위 맞추거나 출세하려고 발버둥 치는 게 과학이라면 그렇겠지.”

“삐딱하게 굴지 마. 여태껏 그런 조그만 희생들이 모여서 과학이 발전한 거잖아.”

“그게 네가 정의하는 과학인가 보지? 과학의 핵심은 합리적 사고인데 여기 어디 합리가 있기는 하냐?”

유리는 건물 안 곳곳을 가리키듯 턱을 한 바퀴 돌렸다. 안이 콧방귀를 뀌더니 유리를 똑바로 보면서 내뱉었다.

“합리에 기댔으면 넌 진작에 잘렸어.”

안은 쭉 하고 싶었던 말을 이제야 했다는 듯 시원한 얼굴이었다. 유리는 공격적이거나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길 바라며, 더위 탓인지 분노 탓인지 새빨개진 얼굴을 엘에게 대뜸 돌렸다.

“2번 사물함이 제가 쓰던 거고, 비밀번호는 1111이에요. 짐은 나중에 챙겨 갈게요.”

그러고는 곧바로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

“기니피그한테 물린 상처나 잘 치료해. 아니, 개였던가?”

안이 농담한답시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유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등 뒤를 향해 상처가 있는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유리는 연구소 건물을 나서자마자 운석을 찾으러 남쪽으로 향했다. 연구소에서부터 운석이 떨어졌다고 추정되는 곳까지 3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는 인적이 드물어서,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자란 잡초들의 키가 허리에 닿을 정도였다. 유리는 종종 얼굴에 걸리는 거미줄을 치워가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오뉴월 햇빛은 날카로울 정도로 선명했지만, 지금 느껴지는 더위는 햇빛 탓이 아닌 것 같았다.

떠돌이 개를 포획한 날도 이렇게 청명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실험동물을 구해 오라는 닦달에 못 이긴 유리와 동료 연구원들은 유기견이라도 찾으러 연구소 남쪽 야산으로 향했다. “거기 버려진 동물들 많아요”라고 영 조교가 말했을 때 백이 기다렸다는 듯 “가자”라고 답했던 것이다. 안은 없었고, 백과 영 조교 등 어떻게든 지 교수에게 점수를 따야 하는 사람들로 이뤄진 그룹이었다. 유리는 딱히 지 교수에게 점수를 따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때가 아마 안과 헤어진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나같이 투덜거리거나 욕지거리를 내뱉거나 아무 말 없이 낮은 산을 오르는 사이, 아무 말 없는 쪽에 속했던 유리는 자신이 지금 하려는 일에 대해 생각했었다. 아니, 생각하려 했지만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탓에 낮은 산을 올라가는 것도 힘들어서 머릿속이 이내 텅 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20미터 전방에 군데군데 검은 털이 섞여 있는 흰 개가 나타났다. 유리와 영 조교가 각각 그물망 양쪽 끄트머리를 잡고 조심스레 접근했지만 사실 조심스럽게 다가갈 필요도 없었다. 그들을 본 개가 가만히 서서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유리는 한순간 주춤했지만 영 조교는 가차없이 그물망을 던졌다. 개는 그제야 위협을 느끼고 버둥거리면서도 끝내 그물을 벗어나지 못했다. 백이 들고 온 캐리어에 개를 집어넣었고, 그들은 캐리어 안에서 플라스틱 벽을 긁는 가냘픈 소리를 들으면서 연구소로 돌아왔다.

사람들 말소리에 유리는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운석을 찾으러 온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곧 아는 얼굴들이 나타났다. 영 조교의 말대로 백이 있었고, 어떤 부업으로 밖에서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는 유리의 동기 조 조교와, 그 밖에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연구소에서 오면가면 마주쳤던 사람들이 보였다.

백은 평소에도 인맥 자랑을 그렇게 했는데, 얼마 전 다자녀 가구가 아파트 분양 받는 데 유리하다면서 법조계에 있는 고교 동창에게 입양에 관련된 법률 자문을 받아야겠다 말했다고 한다. 안은 유리에게 그 얘기를 하면서 아마도 입양보다는 입양 이후의 일 처리에 대해 자문을 구하려는 게 분명하다고 덧붙이며 피식 웃었는데, 유리는 그 웃음이 무척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유리는 되도록 멀찌감치 떨어져서 백과 조 조교가 똑같이 목을 쭉 빼고 바닥을 살피는 모양을 바라봤다. 유리가 조 조교의 부업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안이 말해줬기 때문이었다. 안은 백을 비롯한 남자 연구원 몇몇이 조 조교가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십대 초반 소녀들의 영상을 구입했다는 말을 하면서 실실 웃었고, 그때 유리는 그 웃음이 이상하다 못해 역겨웠다.

유리는 조 조교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주위 나무 꼭대기에 내리꽂히는 강렬한 햇살을 올려다봤다. 단순히 햇살만 날카로운 게 아니라 한여름의 무더위마저 느껴졌다. 더위를 느끼는 건 유리뿐만이 아닌지, 백도, 조 조교도, 그 밖에 땅바닥을 기웃거리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손부채질을 하거나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유리는 운석을 찾으려던 의지가 돌연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덕분에 더위를 달래는 데는 도움이 됐지만, 십 년 넘게 쌓아온 경력이 허무하게 느껴진 것처럼 운석을 찾는 행위 자체도 허무해졌다.

유리는 산을 도로 내려가려고 발길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백인지 조 조교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인지가 “어?”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유리는 돌아보지 않았다.

 

뉴스에서는 연일 이상기온 관련 소식을 내보내고 있었다. 카메라가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길거리를 흐느적거리며 걸어가는 사람들을 비추고, 기상학자와 환경운동가와 천문학자 들의 인터뷰가 번갈아 가며 나왔다. 어느 날은 과학자인지 종교인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나와서 과학에 해당하는지 신학에 해당하는지 알 수 없는 얘기를 떠들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칠십여 년 전 미국의 과학자 스탠리 밀러는 지구에서 최초의 생명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어떤 실험을 했습니다. 이른바 원시지구 실험입니다. 플라스크 두 개를 위아래에 하나씩 놓고 두 개의 관으로 연결한 다음 아래쪽 플라스크에 물을 넣었는데 이건 바로 지구의 바다죠. 위쪽 플라스크에는 원시지구의 대기를 이루고 있던 물, 메탄, 암모니아, 수소를 넣었습니다. 아래쪽 플라스크에 열을 가해 관을 따라 위쪽 플라스크로 수증기가 올라가도록 했고, 위쪽 플라스크에는 전극을 달아서 전기 방전이 일어나도록 했어요. 그러자 두 개의 플라스크, 즉 바다와 대기 사이에 순환이 일어났고 일주일이 지나자 아래쪽 플라스크에 처음에는 없었던 유기화합물이 생겼죠. 이 화합물에는 단백질을 구성하는 성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지난번 새벽하늘을 가득 채웠던 그 빛은 사실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는 지구에 하나님이 어떤 실험을…….”

여기까지 듣고 유리는 채널을 돌렸다. 사실 유리도 그 생각을 해보긴 했다. 어떤 절대자가 지구를 갖고 실험한 게 아닐까? 지구를 뜨겁게 데우고 전기 방전을 일으켜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려 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유리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며칠 전에는 안이 문자를 보냈다. 몇 차례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자 결국 늦은 시간에 문자를 보낸 것이었다. ‘연구소 아카이브에서 네 논문 내렸어.’ 이미 예상했던 일이고, 연구소 어딘가에 남아 있을 유리의 이름도 조만간 모조리 폐기될 것이다. 유리는 그동안 다른 연구소에 이력서를 내봤지만 이 바닥에서 지 교수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은 별로 없었다.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오전에 받았다가 오후에 취소 전화를 받기도 했다. 엘이 유리를 찾아온 건 그런 나날이 반복되고, 원인 모를 무더위는 더욱 심해져가던 어느 날이었다.

처음에 현관 초인종이 울렸을 때 유리는 그것이 초인종 소리라는 것을 바로 깨닫지 못했다. 이곳에 이사 온 뒤로 유리의 집에 찾아온 사람은 안뿐이었는데, 안은 초인종 따위 누르지 않았다. 유리는 벌게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현관문을 살짝 열었다가 그 틈으로 보이는 엘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유리의 사물함 짐을 챙겨 왔다고 엘은 조용히 말했다. 한 손에는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주소는 사무실에 물어봤어요.”

유리는 일단 들어오라고 말했지만, 씻고 옷을 갈아입을 동안 엘에게 대접할 만한 게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물을 빼면, 마실 거라곤 캔맥주 몇 개뿐이었다. 유리가 다급히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줘요. 요 앞에 커피 맛있는 집 있어요. 내가 살게요.”

엘은 의외로 몸을 돌려 나가지 않고, 유리가 가리키는 의자에 순순히 앉았다. 화장실에서 대충 씻은 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유리가 “짐 갖다줘서 고마워요”라고 말했을 때도 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곧바로 집을 나섰다.

유리가 종종 안과 함께 찾곤 했던 집 근처 카페 문을 열자 에어컨 바람이 새어 나왔다. 8월 무더위에 버금가는 이상기온 탓에, 6월도 안 됐는데 벌써 에어컨을 켠 것이다. 유리는 엘과 나란히 걸어오는 내내 손부채질을 했지만 엘은 더위를 느끼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둘은 시원한 커피를 주문하고 구석 자리에 마주 앉았다. 유리는 얼른 냅킨을 집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유리가 자기는 원래 더위를 잘 안 타는데 요즘은 너무 덥다느니 어쩌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는데, 엘이 슬며시 웃더니 갑작스레 질문을 던졌다.

“지난번에는 무슨 사고를 치셨어요?”

처음에 유리는 엘이 무엇을 묻는지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엘의 말투는 조심스러웠지만 자연스러움이 주저함을 능가했고, 가십에 가까운 흥미보다는 학구적인 호기심마저 느껴졌다. 질문의 의미를 알아챈 뒤에도 유리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동물……” 하고 운을 뗀 뒤에 유리는 괜히 목을 한번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실험동물들을 다 풀어줬어요.”

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유리는 말을 이었다.

“쥐는 뒷산에 풀어주고 토끼는 화단에, 기니피그는 아마 근처 공원에 풀어줬을 거예요. 개는 잡아 온 데다 다시 놔줬고요. ……뭐, 평소에 동물 보호나 환경운동 같은 데 관심 있었던 건 아니고요, 그날 술 마신 건 사실이지만 정신을 놓을 만큼은 아니었어요. 술기운이 없진 않았겠지만 어쩐지 갑자기 화가 나기도 하고 착잡하고 답답하고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서 북받쳤던 것 같아요. 안 조교가 말한 대로 무슨 계시를 받았을 수도 있겠죠. 딱히 믿는 신은 없지만.”

찬 음료를 마시는데도 자꾸만 땀이 났다. 냅킨으로 훔친 이마에 다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유리는 엘의 담담한 얼굴을 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지 교수는 당연히 노발대발했죠. 당장 내쫓으라는 거 안 조교가 옆에서 같이 빌어주긴 했어요. 그렇게 빌 거면서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물으면…… 뭐, 가끔 그럴 때 있잖아요. 비이성적인 충동이 일어나서,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을 때. 아, 가끔이 아닌가? 딱히 다혈질도 아니고 나름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봐요. 이거 처음 말하는 건데, 어렸을 때부터 영웅놀이 같은 거 좋아했었어요. 학교에서도 반 애들 대표해서 부당한 일에 항의하고 반항도 하고……. 아마 나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니, 그렇게 되고 싶어했다는 게 맞는 말이겠죠. 나이 들면서 그렇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됐지만…….”

유리는 자기가 왜 엘 앞에서 두서없이 이런 말들을 지껄이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대화 상대가 없어서 외로웠나. 아무리 외롭다고 해도 어릴 적 반항이니, 자기가 특별한 인간인 줄 알았다느니 하는 얘기는 좀 창피하지 않나, 중학생도 아니고. 유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날 운석을 찾으러 산에 갔다가 되돌아 나왔을 때처럼 뒤에서 “어?” 하는 외마디가 튀어나왔다.

유리는 그것이 안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고 굳이 뒤돌아보지 않았다. “왜 둘이 같이 있어?” 하는 백의 목소리도 들렸다. “사물함에 있던 짐 갖다주러 왔겠죠” 하는 조 조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유리는 뒤돌아보는 대신 엘을 똑바로 바라봤다. 엘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여전히 호기심과 옅은 연민이 깃든 얼굴로 유리를 마주 보고 있었다. 백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영웅이 여기 계셨네. 신입한테 이상한 거 가르쳐주는 거 아니지? 홀가분한 사람은 좋겠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고.”

유리는 그제야 뒤돌아봤다. 그렇게 내뱉고 히죽 웃는 백의 양옆에 안과 조 조교가 서 있었다. 유리는 다시 엘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이미 인사 나눴겠지만 오랜 동료 입장에서 다시 소개해줄게요. 이쪽은 지 교수 따까리 노릇 해서 이 자리까지 온 안 조교, 이쪽은 입양아 덕분에 이번에 아파트 분양받은 백 선배, 이쪽은 어린애들 동영상 팔아서 돈 버는 좆, 아니 조 조교예요.”

안과 백과 조 조교의 표정이 파도타기 하듯 차례로 일그러졌다. 백이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누군 뭐 배알이 없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아냐.”

“파양 문제는 해결했어?”

앉은 자리에서 몸을 살짝 돌린 유리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백에게 물었다. 안을 쳐다보니, 서 있는 셋 중에서 가장 키가 큰 그는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엘에게 말했다.

“이 새끼들은 인류가 존속할 이유를 의심하게 하는 놈들이니까 업무 관계된 일 아니면 가까이하지 말아요.”

엘은 아무 말 없이, 처음과 똑같은 표정으로 유리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기막히다는 듯 허, 하더니 백인지 안인지 조 조교인지 아니면 셋 모두인지 씩씩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윽고 “야……!”라고 내뱉은 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유리는 그 사람이 말을 더 잇기 전에 재빨리 끊었다.

“미안해요. 나 먼저 갈게요, 엘.”

그런 다음, 가장 바깥쪽에 서 있던 조 조교의 어깨를 밀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유리는 안의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동안에도 전화와 문자메시지가 수차례 왔지만 모조리 무시했다. 그런데 오늘은 에어컨 리모컨을 집어 들다가, 그 옆에 놓인 휴대폰 화면에 뜬 몇몇 단어가 우연찮게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교수’, ‘돌아가셨어’, ‘와줘’.

유리는 한 손에 휴대폰을 쥔 채 한 손으로는 에어컨을 켜면서 안의 문자메시지를 열어보았다.

‘교수님이 돌아가셨어. 빨리 와줘.’

유리는 그 메시지를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지 교수가 죽었다는 건가? 왜? 어쩌다? 유리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안타까운 마음은 없었고, 오로지 호기심 때문이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며칠 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았던 유리는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길거리의 열기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뉴스에서 이상 기온에 대해 떠드는 것도 들었고 그만큼 집 안도 더웠지만 바깥의 더위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비는 몇 달 동안 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유성우의 발광점인지 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빛이 번뜩이던 날 이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공기에도 비 냄새는 배어 있지 않았다. 유리는 그날의 빛의 장막이 아직 남아서 지구를 뜨겁게 감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한낮의 연구소는 어둡고 음습하고 뜨거웠다. 연구소 건물이 통째로 빛을 완벽하게 차단한 캡슐에 들어가 있는 듯했다. 유리는 캡슐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건물에 들어섰다가 곧바로 걸음을 멈췄다. 10미터 전방에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유리는 구급차를 부르려고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오가다 마주치곤 하던 몇몇 사람과 조 조교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혈흔이나 상해를 입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는데 그들 모두 이미 죽어 있었다. 하나같이 끔찍하게 괴로워하는 표정이었다. 유리가 지금 거울을 본다면, 건물 안의 숨 막힐 듯한 열기에 유리의 얼굴 또한 그들과 비슷하게 일그러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리는 그들을 지나쳐 계단 쪽으로 달려갔다. 계단에도 띄엄띄엄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유리가 연구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백의 시신을 본의 아니게 발로 민 다음 문을 벌컥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책상에 고개를 박고 엎어져 있는 안이었다. 유리는 재빨리 다가가 안의 머리카락을 잡고 들어 올렸다. 엄청난 열기에 데워진 시체의 얼굴이 드러났다. 유리는 움켜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자기도 모르게 놔버렸다. 안의 머리가 책상에 떨어지면서 쿵 소리를 냈다.

유리는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수 없어서 온몸에 땀을 줄줄 흘리며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이해했다. 지금의 이 열기는 말 그대로 죽을 정도였다. 유리는 한순간 공포를 느꼈지만, 그 공포는 열기를 식히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유리는 이마의 땀을 닦으려고 한 손을 들어 올렸다가 흠칫 놀랐다. 오른손 손등의 흉터가 세피아빛으로 번뜩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유리는 그 손으로 땀을 훔친 다음 다시 들여다봤다. 흉터는 거기에 흉터가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유리 아니면 아무도 모를 정도로 흐릿했다. 유리는 고개를 갸웃하고 또 한 번 땀을 훔쳤다. 그때, 사각지대에 있던 누군가가 유리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유리는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그 사람 쪽으로 돌렸다. 엘이었다.

“오셨어요?”

목소리가 들리자 유리는 엘을 자세히 보려고 힘겹게 눈을 떴다. 엘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엘?”

“네, 저예요.”

엘이 살짝 웃었다. 늘 담담하던 얼굴에 표정이 생기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괴로우시겠지만 조금만 참으세요.”

이어진 엘의 말에 유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는데 엘이 다시 말했다.

“제 풀 네임이 뭔지 아세요?”

유리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엘이 왜 그런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생각을 제대로 이어갈 수가 없었다. 엘이 여전히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가르쳐드릴게요. 엘 에이 아이 케이 에이…….”

유리는 옆에 있는 책상을 손으로 짚었다. 엘의 이름 철자가 ‘엘 에이 아이 케이 에이’여서가 아니라 공기가 너무 뜨거워서 한순간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책상을 짚은 한 손에 체중을 실은 채 유리는 “엘 에이 아이 케이……”까지 중얼거리고 기절해버렸다.

 

*

 

1957년, 떠돌이 개였던 라이카(Laika)는 살아 있는 생명체로는 최초로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2호에 탑승했다. 소련 측은 라이카가 일주일 동안 생체 변화에 대한 정보를 지구에 보낸 뒤, 미리 설치한 장치로 약물이 주입되어 고통 없이 생을 마감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2002년 공개된 자료에 의해 그 발표는 거짓으로 밝혀졌다. 라이카는 가속도와 고온을 견디지 못하고, 인공위성이 발사된 지 몇 시간 만에 산소 부족과 고열, 스트레스로 인해 숨을 거뒀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유리는 투명한 벽에 기대 있었다. 그곳은 분명 캡슐 안이었다. 꿈에서처럼, 실험동물들이 들어가 있던 캡슐 안에 유리가 들어가 있었다. 앞에는 엘이 서 있었다. 유리는 당황해서 캡슐 벽을 쿵쿵 두드렸다. 문득 머리 위가 뜨거워서 올려다보니 캡슐 뚜껑이 열려 있었다. 캡슐 벽이 바깥의 살인적인 열기를 어느 정도 막아주고 있었다. 유리가 정신을 차린 것을 본 엘이 말했다.

“빛을 봤다고 하셨죠?”

엘은 유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저도 빛을 봤어요. 지구가, 사람들이 내뿜는 빛을요. 죽기 직전 그 빛만이 제 눈을 사로잡았어요. 저는 어둠 속에 있었고요.”

유리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엄청난 열기에 자신이 결국 미쳐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몇 십 년 전 우주로 떠나보낸 개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다시 나타나는 일이 있을 수 있나? 자신이 미쳤거나 엘이 미쳤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구를 녹여버릴 듯한 이 열기도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돌아왔어요. 모두 없애려고요. 그 빛 보셨죠?”

엘이 그렇게 말할 때까지도 유리는 자기가 미친 게 아닌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쩐지 납득이 되었다. 엘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 다 죽을 거예요.”

납득은 되면서도 어느 정도 설득은 해야겠다고 유리는 마음먹었다.

“그, 그렇게 모두 죽어야 할 필요가 있어? 인간이 다 그런 건 아니잖아.”

하지만 힘겹게 벌어진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게 고작 그거였다. 유리는 더위와 지금 처한 상황 탓만이 아니라 자괴감에 더 괴로웠다. 유리의 예상과 달리 엘은 화를 내거나 코웃음 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고유의 개성과 가치를 지닌 개체라고 생각해요. 무엇에도 침범당할 수 없는 고귀한 자유와 권리를 지니고 태어난. 선생님도 그럴 거고요. 지금 그런 삶을 살고 계신가요?”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살려드릴게요.”

그 말에 유리는 기뻐해야 하는지, 고마워해야 하는지, 아니면 절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하필 나야?”

“글쎄요, 뭐라고 정확히 설명할 순 없어요. 저도 스푸트니크를 타고 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왜 하필 나였을까? 내가 아니라 나랑 같이 훈련받던 다른 개가 선택받았다면 어땠을까? 그치만 사람들이 절 선택한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그때 절 연민한 사람도 있었겠죠. 그 사람한테 저를 자유롭게 해줄 선택권은 없었겠지만. 지금 저한텐 선택권이 있어요. 그때는 없었지만 지금은 있어요. 그러니까 전 선생님을 선택한 거예요.”

엘의 선택으로 인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고민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유리는 지구 최초의 인간은 상상해본 적 있지만 최후의 인간을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어릴 적 특별한 인간이 되길 꿈꿨던 적도 있지만 유일한 인간이 되길 꿈꿔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유리는 캡슐 벽을 짚고 있던 손을 떨어뜨렸다.

“엘…… 아니, 라이카.”

앞에 어떤 미래가 놓여 있더라도, 아니 미래라는 것이 과연 있을지 의문이 들면서도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았다.

“미안해.”

엘, 아니 라이카의 얇은 입술 끄트머리가 살짝 일그러졌다. 라이카가 캡슐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유리는 순간 움찔했지만, 라이카는 그저 캡슐 뚜껑을 닫으러 왔을 뿐이었다. 라이카의 몸이 캡슐을 가린 덕분에, 점점 붉게 변하는 세상이 유리의 시야에서 차단됐다. 그리고 다음 순간, 머리 위로 지구를 감쌀 만큼 거대한 어둠의 장막이 드리워졌다. 유리는 몸에서 힘을 빼고 축 처진 채 캡슐 벽에 기댔다. 최후의 인류는 세상이 어떻게 끝장나는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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