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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INA - 프롤로그 (판타지)

2020.12.05 23:4212.05

그는 세상이 가지고 있는 간절함들을 들을 수 있었다. 노래처럼 도시를 날으는 소망들을 하나씩 잡아 연주를 해보기도 한다. 그의 귀가 사람들의 소망으로 가득 찰 때면, 그는 귀를 닫았다.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간절함과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사람을 찾으려 하였다. 낮의 공원과 밤의 거리 위로 하늘을 발에 둔채 세상을 둘러본다. 사람들이 사는 빛 하나에서 수많이 빛나는 소원들이 있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기준으로 사람들의 소망을 들어주었다. 달이 환하게 빛나는 만월의 밤에서 그들은 현실의 건너편으로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스페인, 세빌에서는 깨진 와인잔을 들고 방 한가운데 서있는 남자가.

중국, 청두에서는 다 쓰러진 허름한 집에서 만찬이 가득 차려진 탁자를 멍하니 보고 앉은 여자가.

베트남, 다낭에서는 눈앞에서 연인의 자살을 목격한 여인이.

독일, 라이프치히에서는 수백장의 메모지가 붙여진 독방에 홀로 앉은 노인이.

 

그들이 선택한 인간들은 제 소망을 이루고 사라졌다. 그 역시 그들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준으로 까다롭게 소원들을 골랐다. 그는 바랐다. 필요한 이들에게 자신의 힘이 닿기를. 용기 있고 내면의 힘을 믿는 이가 자신의 손에 닿기를. 그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그녀를 관찰하였다. 그녀가 정말 용기 있는지, 갖은 역경과 어려움에서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지켜낼 수 있을지, 그는 궁금하였다. 그는 항상 모든 이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작은 나라의 작은 마을에서 작은 집에 살고 있는 그녀에게 그는 바랐다.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게 할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기를, 그는 바랐다.

 

 

 

나는 세 평짜리의 좁은 방에서 다리를 폈다. 유통기한이 남은 식빵을 물고서 조심스럽게 우물거렸다.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고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학교로 가고 있다. 반지하의 시멘트를 손으로 짚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따사로운 봄볕이 볼을 감싼다. 엄마나 아빠에 대한 기억은 없다. 사진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아 눈을 감고 상상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엄마, 배고파.

아빠 잘 갔다 와.

 

나의 아침은 세 평짜리 반지하에서 봄볕을 맞는 것으로 시작한다. 색이 바랜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 덮으며 몸을 웅크렸다. 혼자서 속삭였다.

 

혹시 날 찾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너 찾더라.]

 

남자가 귀찮은 듯 눈 하나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그가 초록색 알바 옷을 벗는다. 나에게 건네어준다. 눈썹이 내려간 불쌍하다는 표정.

 

[점장님이 너 찾더라고.]

 

10시부터 새벽까지. 편의점을 보면서 돈을 구했다. 음식은 유통기한이 지난 재고를 얻어 겨우 먹고 살았다. 혹시 재고가 필요하신 걸까. 더 이상 음식을 주기가 싫으신 걸까.

 

남자가 떠난다. 카운터를 보며 손님들을 받았다. 라면을 먹으며 술을 마시는 남자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남자들의 대화를 들으며 최대한 조용히 서 있었다.

 

[실종 건 들었어?]

 

[또? 요즘 너무 흉흉해.]

 

[내 말이 아예 못 찾고 있다잖아.]

 

[듣기로는 이상한 동물 가면을 쓴 사람이 납치한다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모르지.]

 

사람들이 납치 되던가. 집에 티비가 없어서 알지 못했다. 나도 위험할까. 조심해야 할까. 동물 가면을 쓴 누군가가 내 팔을 붙잡고 어디론가 끌고 간다. 신고해주거나 찾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빈 단칸방으로 손을 뻗는다. 있지도 않은 가족을 부른다. 엄마, 아빠.

 

[이나 양?]

 

[네.]

 

남자들의 대화를 엿듣느라 점장님이 오신지도 몰랐다. 어깨를 숙였다. 혹시 날 버리시는 걸까.

 

[편의점일 잘하고 있지요?]

 

[네.]

 

[힘든 건 없고?]

 

[네.]

 

[필요한 건?]

 

지금도 충분해요. 제발 절 버리지만 말아주세요. 말들이 입속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없어요.]

 

[다름이 아니라 이나 양.]

 

눈을 질끈 감았다. 저런 누군가의 말 한마디조차 버겁고 힘들다. 무섭고 두렵다. 온 세상에서 나 혼자인데. 손을 꼭 쥐고 있는 걸 보이면 점장님이 화를 내실까봐 등 뒤로 꼭 감추었다. 제발.

 

[이거.]

 

점장님이 손에 드신 건 하얀 봉투였다. 손에 받고 들어보니 묵직하다.

 

[매일 폐기 음식 챙겨가잖아요.]

[아내가 신경을 쓰더라고요.]

 

얼굴이 괜히 발개졌다. 고개를 푹 숙였다.

 

[먹고 통은 천천히 돌려줘요.]

 

울먹였던 통에 감사인사를 하지 못했다. 점장님은 얌전히 편의점을 떠나셨다. 눈물이 나오는 게 싫어 화장실로 달려갔다. 문 너머로 손님이 나를 부른다. 물을 틀어 눈가를 씻었다. 씻고 또 씻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밤새도록 울었다.

 

집으로 돌아와 하얀 봉투를 열어보았다. 김치, 멸치볶음, 감자조림, 햄 볶음, 콩나물무침. 하나씩 꺼내어 바닥에 놓았다. 세평짜리의 방이 나와 반찬 통 몇 개로 가득 찬다. 햄이든 통을 열어 손으로 집어 먹었다.

 

[엄마 이거 맛좋다.]

[아빠도 먹어봐.]

[나 다음에 이거 또 만들어줘.]

 

눈을 감은 채 상상으로 엄마랑 아빠를 만들었다. 손으로 뻗으면 사라질 것 같아 몸을 움츠렸다. 남은 밥이 없어 반찬 몇 개로 끼니를 때웠다. 배가 부를 정도로 먹지는 못했다. 아까워서. 그리워서. 목이 메어서. 숨을 죽여 다리를 오므렸다. 사진 한 장이 없어 기억에도 없는 가족을 꿈으로 그렸다.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서 시간을 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잠을 자듯 숨을 세어 귀를 기울이는 것. 세상의 소리로 묻히어 가는 것. 눈가로 파란 편지 봉투가 들어온다. 반지하 방의 창에 걸쳐진 편지 봉투 하나. 시멘트 바닥에 놓여진 알 수 없는 물건 하나.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 살펴보았다. 봉투는 부드러웠고 좋은 냄새가 났다. 박하 향이 손끝에서 번진다.

 

노란색 인장을 떼어내고 안에든 편지를 꺼내었다. 남의 물건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주소도, 보낸 이도 적혀있지 않은 봉투. 수취인 불명의 편지가 제 주인을 만난 것처럼 꼭 내 손에 들려있다. 편지의 말머리엔 낯선 단어가 적혀있었다.

 

딸아.

 

낯설지만 그리웠던 단어. 누굴까. 누가 날 찾고 있는 걸까. 정말 나에게 온 것일까. 혹시나 엄마랑 아빠가 날 찾고 있는 걸까. 편지에는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딸아.

 

혹시 이 편지를 발견했다면

나를 보러 와주렴.

 

 

 

나는 그대로 앉아있었다. 보낸 이도, 받는 이도 없이 달랑 짧은 문장들만 들어있는 편지. 더 온 것이 있을까. 창 밖을 확인해보았지만 나를 찾는 편지는 저 한 장뿐이다. 쓰지 않아 오랫동안 방치한 가방 속에서 펜과 공책을 찾아 답장을 적었다.

 

보러갈게요.

 

잘못 배달된 편지일지라도 믿어보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세상에서 기대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장난이라면 그대로 내버려두고 싶었다. 나를 찾는 편지 한 장이 나를 구해줄 것이다. 막연하지만 희망이 나를 감싼다. 포근하게 나를 감싸 안는다. 정말 날 찾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공책을 찢어 만든 편지를 파란 봉투에 넣고 창틀에 올려 두었다. 답장이 왔으면, 하고 난 바랐다.

 

 

 

 

 

 

편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혹시나 했다. 내가 모르는 곳에 숨어있는 나의 가족이 편지를 발견해 주지는 않을까. 내가 꺼낸 한마디가 내가 모르는 어떤 곳으로 나에게 가족들을 만들어주지는 않을까. 그 날이 있은 후로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편의점을 가지 않는 쉬는 날에는 하염없이 창틀에 올려둔 편지를 노려보았다.

 

조용히 눈을 감아 숨소리를 세었다. 반지하가 비추는 좁은 세상이 눈을 감는다. 시계는 9시를 가리켰고 저녁때가 한참 지났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다. 편의점으로 일을 하러 가고 손님들을 상대한다. 변하는 것은 없었다. 헛된 희망 하나로 헛된 기대나 하였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익숙했으니까.

 

일을 마친 새벽 4시. 불이 깜빡거리고 쓰레기통으로 고양이들이 몰려있다. 발자국 소리가 나 하나만 남은 세계는 마치 멸망이라도 한 듯 소리하나 내고 있지 않았다. 반지하 방이 있는 낡은 빌라 앞에 누군가 서있다.

 

까만색의 정장에 붉은 빛이 도는 장신구들. 조용히 웃으며 곧게 서있는 그는 허리를 숙이며 나에게 알은 채를 하였다.

 

[이나 양. 당신을 모시러 왔어요.]

 

마을의 흉흉한 소문과 달리 그는 동물 가면 같은 건 쓰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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