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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당신의 눈을 바라볼 때

2023.09.05 13:5209.05

“당신은 음침한 면이 있다니까.”

나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을 참이었다. 점차 아래로 내려가며 그녀를 애무해주고, 서로의 몸을 겹치고 나면 오늘도 역시나 행복에 젖어 잠에 들리라.

“당신 눈을 보면 종종 그런 생각이 들어. 한 번도 감지 않는, 그 눈 말이야.”

순간 손길을 멈추고 잠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내 눈을 빤히 쳐다보는 그녀. 그제야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했다. 그녀도 더 이상 나를 버틸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또 다시 끝나는 건가 싶을 무렵, 그녀가 농담이랍시고 말했다.

“그래도 눈싸움에서 져본 적은 없겠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어릴 적, 누가 먼저 눈을 깜빡이는지 친구들과 시합할 때면 늘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이었다. 눈물이 나지도, 눈동자가 떨리지도 않았다. 그런 나를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미리 눈에 인공눈물을 넣어 묘책을 썼다는 말부터 아무도 안 보는 사이 잽싸게 눈을 깜빡인다는 말도 돌았지만 증명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프지 않아?”

그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태세를 전환한 걸까? 내 눈을 빤히 쳐다보던 모습은 사라지고 그녀는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마치 내가 변신이라도 하길 바란다는 듯. 내 진짜 모습이 나타나길 원한다는 듯.

“전혀. 오히려 눈을 감아야 한다는 사실이 거슬릴 뿐야.”

침대에서 일어나 서둘러 옷을 입었다. 창문 너머로 슈퍼 블루문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14년 뒤에나 볼 수 있다는 커다란 보름달… 문득 달을 보니 그녀가 나를 늑대인간으로 생각하면 어쩌나 싶었다. 보름달 아래서 늑대가 되고, 다시 사람으로 돌아와서는 그 기억을 잊는다는 설정은 정말 그럴듯하다. 오랜 세월, 잊히지 않고 사랑받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나는 늑대인간도 아니었거니와 늑대처럼 포악하게 생기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몸을 변장해 ‘진짜’를 감추고 있지 않았다. 눈을 감지 않는다는 사실은 특별히 감출 게 못 됐다. 많은 사람들이 눈을 깜빡인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는 것처럼.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나를 거쳐 간 무수히 많은 연인들에게는 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사귄 여자친구 혜인은 내가 자신을 기만했다며 헤어짐을 고했다. (기만. 그 단어가 너무 강렬한 나머지 나는 여전히 그녀를 그 두 글자로 기억한다.) 내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였다.

“눈은 사물을 보라고 있는 감각기관이잖아. 안 그래? 오히려 그런 눈을 감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아무리 항변해도 소용없었다. 그녀는 나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며 왜 여태껏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도리어 눈을 감지 않는 나를 왜 지금에서야 차버리냐고 묻고 싶었다.

“이제라도 알게 된 게 다행이네.”

나는 안과에서 진행한 검진 기록을 내밀었다. 특이 사항 없음. 그렇게 그녀와 완전히 끝냈다.

그 후로 여러 여자를 거쳤지만 그 중 성적 매력을 과시했던 수아가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확실히 자신이 어떻게 하면 성적으로 호감을 살지 잘 알고 있던 여자였다. 소개팅날부터 타이트한 짧은 치마에 가슴골이 훤히 드러난 옷을 입고 나를 매혹했다. 그녀의 계획은 대성공이었다. 처음 본 여자와는 방을 잡지 않는다는 내 신념은 단숨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로도 그녀와 종종 관계를 맺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점차 내 손길을 피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불길한 예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게 아니라… 나 다 알아. 너 사실 안 좋잖아. 싫은데 좋은 척하는 거잖아.”

말인즉, 내가 그녀와 관계를 맺을 때 눈을 감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한, 남자가 절정에 이를 때면 온몸에 힘이 풀리면서 두 눈이 감긴다고 주장했다. 단지 사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기운이 다 사라지면서 신체가 제 기능을 못 할 정도로 노곤해진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그녀가 사정 횟수로 욕구 불만을 토로하면 할 말이 없겠다 싶었다. 누구는 한 번, 누구는 두 번… 사정 횟수야말로 사람마다 달라 가장 특기할만한 부분 아닌가? 그깟 눈 때문이라니… 그 후, 나는 그녀의 요구에 따라 절정에 이르렀을 때 두 눈에 힘을 풀어 감는 자세를 취했지만 얼마 못 가 내가 먼저 그녀와 정리했다. 황홀경에 이르러야 할 때에 눈에 집중하다 보니 더 이상 그녀와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30대 초반에 만난 지유는 비교적 내 눈을 빨리 파악했다. 처음에는 순간의 깜빡임조차 없는 내 눈을 열심히 바라보더니 신기하다며 아이가 장난감을 다루듯 이리저리 살폈다. 건조하지 않냐고 물었고, 눈에 작은 먼지가 들어가 간지러울 때면 어떻게 대처하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주의를 기울이는 그녀에게 감동해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웬만해서는 건조하지 않아. 간혹 에어컨 바람에 눈이 따갑다고 느끼긴 하는데, 그럴 때면 수돗물을 한 방울 넣어. 먼지가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고.”

그녀는 정말 특이하다며 내 왼쪽 눈에 후, 하고 입김을 불어넣더니 싱긋 웃어 보였다. 나는 본래 이런 행동을 도발로 여겨 피하곤 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친구들이 내 눈에 입김을 얼마나 불어넣었는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의 행동은 귀엽게 다가왔다. 애교처럼 느껴졌달까.

“그럼 잠을 잘 때는? 잠잘 때는 눈을 감고 있던데?”

“그럴 리가. 지금껏 자면서도 눈 뜨고 있다고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데.”

그러자 그녀가 내게 동영상 하나를 내밀었다. 잠을 자는 나를 찍었다고 했다. 영상은 전체적으로 어두웠지만 영상 속 내 눈은 미약하게나마 힘이 풀린 상태였다.

“그래도 잠을 잘 때면 눈도 살짝 감기네. 처음 알았어.”

나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지금껏 나를 이토록 따스하게 바라봐준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녀와도 결국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의 만남을 꺼림칙하게 여긴 그녀의 가족 때문이었다. 특히 그녀의 오빠는 시골 교회 목사로 눈을 감지 않는 나를 아르고스 거인에 비유했다. 나는 아르고스처럼 수백 개의 눈을 갖고 있지도, 몸이 크지도 않음에도 그는 나를 마치 전설에서나 등장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아르고스도 타고난 감시자였다고 하잖아. 저 놈도 분명 우리 가문의 치부까지 전부 보고 있을 거야.”

그녀와 내가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어도 소용없었다. 그녀의 가족은 내가 불길한 징조인 것인 마냥 그녀를 내게서 완전히 앗아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련을 극복하고 만난 여자가 채린이다. 채린은 처음부터 내 눈을 잘 쳐다보았다. 유독 타인의 눈을 잘 마주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채린이 그런 부류였다. 내 눈에 특이점을 찾아내서라기보단, 본래 눈을 잘 마주치고, 시선을 좇길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나는 그녀가 자신감 넘치고 당찬 여자라고 판단했다. 덧붙여 그런 스스로에게 도취한 여자라고. 어쩌면 정말 내 판단이 맞을지도 몰랐다. 자기 자신에게 도취한 여자에게 상대방이 눈을 감는지 안 감는지는 그리 중요하지도, 특기할만한 사항도 아니었으니까. 더군다나 그녀는 사회에서 꽤 성공한 여자에 속했다. 평일에는 매일 회사에 나가 일을 했지만 퇴근하고는 나를 만날 때를 제외하면 필라테스를 꾸준히 해 젊음을 유지했다. 한마디로 그녀에게는 젊음을 살 재력이 충분했다.

손목에 시계를 찬 뒤, 헝클어진 머리를 손볼 새도 없이 신발을 신었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집에 가고, 그녀와는 차차 정리할 예정이었다. 나는 관계를 끝맺는 것에 익숙하다. 여러 번 거절당하고 나면, 내성이 생기는지 더 이상 쓰라리거나 아프지 않다.

“왜 벌써 가려는 건데?”

그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언제 옷을 입었는지 어느새 그녀도 아까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정말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그녀는 여느 때처럼 내 눈을 빤히 보았는데, 상황 때문인지 유독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 알았어. 알고 있었다고. 당신을 속일 생각은 없었어. 그저 언젠가는 말해줘야지 싶었어. 그게 하필 오늘인 거고.”

“내 눈이 음침하다는 말을?”

“그건 그냥…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한 말이야. 기분 나쁘게 들렸다면 사과할게. 미안해.”

그녀가 다 알고 있었다는 대답에 적잖이 놀랐다. 다 알고 있었다고? 그렇다면 어째서 티를 내지 않은 것일까? 나는 그간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결함이 없어 보였다. 홀로 너무 완벽한 나머지 타인을 위한 자리는 없는 것 같았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매 순간 생각했어. 애초에 당신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으니까. 당신을 존중하려고 노력했어.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말까도 싶었지. 하지만 더 늦어졌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까봐…”

그녀는 떨고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그녀를 침대 위에 앉혔다. 그녀는 내 손길에 감정이 더욱 복받치는지 큰 소리로 서럽게 울었다. 눈을 깜빡이는 순간마다 커다란 양의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그날 밤, 나는 사람의 눈에서 물이 이토록 많이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 그녀와 같은 장소에서 슈퍼 블루문을 바라보고 있다. 전날 비가 온 관계로 하늘에 구름이 꼈지만 달은 여전히 푸른 자태를 내뿜는다. 14년 전 달의 모습도 오늘과 같았겠지. 시계를 바라보니 이제 막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달과 지구 사이가 점차 가까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점차 더 커지는 것 같네. 달 말이야.”

그녀가 창문을 열더니 축축한 흙냄새가 공기 중에 퍼졌다.

“지구와 충돌하진 않겠지?”

“지진이나 화산 소식은 듣지 못했는걸.”

나는 일부러 그녀를 웃겨주고자 과학적 지식을 동원해 답했다.

“혹시 화산재를 보거든 나한테 말해줘. 종말을 맞이해야 할 테니까.”

그러자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두 눈을 깜빡였다. 눈자위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당신은 음침한 면이 있다니까.”

그녀가 내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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