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끈벌레

2023.08.31 23:5808.31

왼쪽 이어폰을 잃어버렸다. 걷다가 문득 알아차렸다. 산 지 얼마 안 된 건데. 오던 길을 되돌아가며 바닥에 떨어졌는지 살펴보았다. 집을 나올 때만 해도 분명 양쪽 다 있었기 때문에, 외출 동선을 거꾸로 추적하며 있을 만한 곳을 전부 뒤져보았으나 허탕이었다. 신경질이 났다. 누가 훔쳐갔을 수도 있고, 흘린 걸 누가 주워갔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에게 부디 끔찍한 저주가 있기를. 근데 반쪽짜리 이어폰을 대체 누가 주워갈까. 집에 돌아와 씻지도 않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을 부리다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눈이 말도 못 하게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황사철도 아닌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람, 구시렁거리며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실핏줄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것이 영 보기 흉했다. 이러다 실명하는 거 아닌가, 하고 가려운 눈을 지겹도록 비벼대면서 생각했다. 그 와중에 손가락에 닿은 안구 주변이 알싸하게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

아무래도 깨알같이 작은 글씨를 긴 시간 뚫어지게 보아온 것이 주된 원인이리라. 요즘 들어 눈 상태가 좀 안 좋긴 했다. 시야에 검은 얼룩 같은 게 흐릿하게 겹쳐 보일 때도 있었고, 미세한 이물감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십 대 초중반인데 벌써 눈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눈에 좋은 음식이 뭐가 있었지 생각하면서 눅눅한 매트리스에 몸을 부렸다. 급한 대로 자취방에 있던 점안액을 찾아 양쪽 눈에 두 방울씩 뿌리고는 누워서 폰을 켰다. 오랜 습관을 따라 인터넷 뉴스창에 접속했다.

속보였다.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30대 남성이 공원에서 흉기를 휘둘러 20대 여성과 40대 여성을 살해했다는 뉴스. 너무 비극적이어서 뻔해진 건지, 반대로 너무 뻔해서 비극적인 건지 모를 일에 쯧, 한 번 혀를 차고는 눈을 비비던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겼다. 꽤 이름 있는 기업의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서 면접관이 여성혐오 발언을 내뱉은 사실이 드러나 기업이 부랴부랴 자체 조사에 들어갔다고 했다. 다른 기사에서는 며칠 전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접수된 군부대 내 성비위 소식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한쪽에는 페미니스트 감독이 연출한 영화들이 연일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는 식상한 헤드라인이 보였다. 하, 씨발, 세상에 좆 달린 기자, 작가새끼들은 다 뒤졌나. 뉴스고 칼럼이고 전부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니 허구한 날 여자들만 억울하다고 생난리를 치지. 나라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시대의 남성혐오를 지적하는 글을 써서 투고해 볼까 하는데 그만 하품이 났다. 그래, 지금 시대에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런 험난한 길을 앞장서 걸을까. 설사 내가 먼저 총대를 메고 나선다 해도 한국 남자 이 호구 새끼들은 도통 뭉칠 줄을 모르니, 얼핏 계산해 봐도 남는 것 없는 장사다. 이러니 맨날 뺏기고 털리면서 욕까지 처먹지, 등신들. 차라리 한남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글을 써볼까. 반응은 꽤 있을 거 같은데. 혼자 망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폰 액정을 아래로 향하게 덮어두고 이불속에 너절하게 파묻혀 있던 논문을 찾아 펼쳤다.

물기 없는 반쪽짜리 사과를 어금니로 씹으며 논문을 읽었다. 주말까지 분석하고 리포트를 써내야 했다.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지역별로 두드러지게 관찰되는 인간관계의 양상을 해당 지역의 평균 소득 수준 및 주거형태를 주요한 변수로 삼아 분석한 논문이었다. 헛소리하고 있네. 띄엄띄엄 읽은 글에 납작한 조소를 보내고 나니 다시 눈이 가려워졌다. 다시 손가락을 눈에 가져가 거칠게 문질렀다. 좀처럼 시원한 느낌이 없어 손톱을 눈꺼풀 안쪽으로 깊숙이 밀어 넣어 긁었더니 그제야 가려움증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양쪽 눈을 번갈아 긁고 다시 액정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거짓말처럼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니다. 도무지 눈물이 날 이유가 없는 데다가, 시야 테두리가 탁한 붉은빛으로 너울거리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명백히 피라는 걸, 거울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멍한 채로 누워 있다가, 베개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핏내음을 맡았다.

 

눈에서 피가 흘러내린 밤 이후 웬만해서는 폰 액정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뉴스도 칼럼도 보지 않았다. 낮에 학과 수업과 간단한 볼일만 마친 뒤 자취방에 와서 계속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눈이 미칠 듯이 가려워도 참았다. 안과에는 가지 않았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곧 실명하게 될 겁니다, 와 같은 소리를 전문의라는 작자로부터 듣게 될까 봐, 그 힘 있는 말에 꼼짝없이 설득되어 버린 끝에 실제로 세상의 빛을 모두 잃어버리게 될까 봐서였다.

병원에 가는 대신 침대에 누워서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점안액만 방울방울 떨어뜨려 넣었다. 점안액에 유통기한이 있었던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시급한 일부터 닥치는 대로 처리하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다음 일은 점안액이 다 떨어지거든 고민해 볼 요량이었다. 운이 좋다면 이대로 상태가 호전되어 병원에 가도 간단한 처방만 받고 끝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너무 안일했다고 해야 할까,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출혈은 지속되었고 가려움도 점점 심해졌다. 급기야 손을 대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아져서 더는 참지 못하고 맹렬히 문질러댔다. 처음엔 주먹 쥔 손의 엄지로 문지르다가, 점점 더 얇은 손가락을 넣어 비벼대다가, 마침내 다시 손톱을 찔러 넣었다. 오랫동안 참아온 갈증이 한 번에 해소되는 듯 기분이 상쾌했다. 그 기분에 취해 바늘 끝에 놓인 비눗방울처럼 위태로운 안구에 마구 상처를 냈다. 피가 눈가에 고였다가 이내 눈꼬리와 볼과 목을 차례로 타고 흘러내려 침구를 적셨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해방감이 찾아왔다. 침대 옆 협탁에 올려놓은 손거울을 들어 피 흐르는 눈을 마주 보았다. 거뭇하게 파인 눈 안쪽에 붉게 물든 안광이 번득이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한참 피를 쏟고 났더니 이번엔 눈자위가 마치 죽은 짐승의 살처럼 시커멓게 변해갔다. 며칠 동안 쏟은 피에 흥건하게 젖었던 베개가 그대로 마르면서 진한 비린내를 풍겼다. 그즈음에는 가려움을 참을 이유도 없어서 온종일 눈을 긁어댔더니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그래도 참지 않았다. 참을 수가 없었다. 가려움보다는 통증이 더 견딜 만했다. 뻑뻑한 안구 속 핏줄이 갈수록 선명하게 불거졌다.

창문 블라인드를 내리고 불을 꺼서 방을 어둡게 하고 폰 액정 밝기를 최대로 설정했다. 그러지 않으면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포털에 접속해 뉴스를 읽고 SNS 피드를 수시로 새로고침해가며 최신 소식을 훑고 간간이 댓글을 남겼다. 그중 한 댓글이 어느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모양이었다. 포털 뉴스 댓글을 캡처한 이미지가 SNS까지 넘어와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고 있었다. 캡처를 보니 기억이 났다. 해당 기사는 젊은 층에서 비혼주의자의 비율이 점점 늘고 있다는 내용이었고, 나는 거기에 데이트 비용을 죄다 남자에게 떠넘기고 자기 잇속만 챙기는 꽃뱀들을 비판하는 댓글을 남겼었다.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원래 댓글이라는 게 자기 생각 편하게 달고 그러는 거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날 알지도 못하는 놈들이 그 댓글을 돌려보며 비난과 조롱을 일삼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포털 사이트 아이디를 지웠다. 그날 심장이 뛰어 늦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좀처럼 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또다시 눈이 가려웠다. 고통 속에서 눈을 비비다 잠들었다.

그 무렵에 어느덧 까맣게 죽은 눈에도 많이 익숙해졌다. 까매진 눈이 오히려 매혹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살면서 한 번쯤 스모키 화장을 해보고 싶었는데. 손거울에 비치는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이죽거려 보았다.

그즈음에 종강을 하자 더는 밖에 나갈 일도 없었다. 지인들의 연락도 없었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가족들한테는 미리 올여름에는 집에 못 간다고 말하고 용돈을 넉넉히 받아두었다. 인스턴트식품으로 끼니를 때우며 생각날 때마다 인터넷으로 각종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주문했다. 씻지 않고 보내는 하루가 방안의 쓰레기처럼 쌓여갔다. 자취방의 좁다란 싱크와 화장실 배수구에서 비슷한 악취가 올라왔다. 가끔은 이유 없이 비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울분이 치솟기도 했다. SNS는 여전히 팔자 좋은 여자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저것들은 저렇게 잘 싸돌아다니고 잘 먹고 잘 살면서 왜 항상 더 갖지 못해 안달일까. 나는 이렇게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데. 정작 열심히 산 나는. 삶과 정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나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기를 국가를 위해 헌신한 나는. 나는, 나는, 나는. 수많은 내가 자기 연민의 땔감으로 스러져 가는 동안에도 작은 액정 속에 박제된 세상은 아무 일 없단 듯 태연하게 굴러갔다. 한 줄기 피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렇게 며칠을 더 보내고 났더니 불현듯, 나와 같은 증상을 겪고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 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한 생각을 더 일찍 떠올리지 못한 자신을 가볍게 책망하며 오랜만에 노트북을 켰다. 포털 검색창에 눈 가려움증과 관련된 단어들을 몇 개 쳐 넣었다. 인터넷 카페에는 익숙하고 평이한 증상을 호소하는 글과 그에 대한 답변글이 줄지어 올라와 있었다. 필요한 정보는 이런 시시한 게 아니었다. 눈에 불을 켜고 자료를 검색하는 동안에도 가려움증은 점점 심해져 갔다. 이제는 눈을 긁는 것도 큰 의미가 없었다. 아예 눈알을 통째로 파내버리고 싶었다. 그런 자기 파괴적인 충동과 매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렇게 내 이야기를 찾아 헤매던 어느 날 밤, 눈에서 처음 그것들이 자라났다.

 

시야 가장자리에서 가는 실 같은 형체가 창백한 푸른빛으로 여리게 반짝이며 앞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것들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처음엔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눈이 정상이 아니었으므로 환각 같은 게 보인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환각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했다. 마치 눈꺼풀 안에 숨어 있던 실지렁이 수십 마리, 아니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바깥으로 기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생물처럼, 어느 과학 다큐멘터리 프로에서 언뜻 본 것도 같은 선충들처럼 그렇게 꿈틀거리며 전진하고 있었다. 어둑한 방 안에서 꺼질 듯 유약한 푸른빛으로 제 주변의 어둠을 힘겹게 몰아내려 애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체불명의 실들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허공을 헤엄쳐가는 모습이 너무 기이해서 전율이 일었다. 순간 끔찍한 생각이 들어 눈을 감고 이불 속에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그러자 기묘하게 편안하고 비현실적인 감각이 찾아왔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되돌아간 듯, 나는 감은 눈 안쪽에서 그것들의 움직임을 느끼며 스르르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았다. 지렁이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모조리 꿈이었다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그건 분명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다시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 검색창에 검색어를 바꾸어 입력했다. '눈에서 지렁이가 나와요.'

안구질환과 비문증에 관한 게시물 목록을 수십 페이지쯤 넘기다 보니 한 게시물이 눈에 띄었다. '끈벌레는 착시나 환각이 아닙니다'. 작성 시점으로부터 4년쯤 지났고 조회수 72에 댓글 반응은 전혀 없는 평범한 게시물이었다. 하긴, 눈에서 지렁이가 기어 나오는 일을 직접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제목에 진지하게 반응하기란 쉽지 않을 거였다. 내용은 이랬다.

 

끈벌레는 초인적인 집념을 가진 인간의 눈 안쪽에 기생하며, 충분히 자란 끈벌레는 이따금 밖으로 나와 숙주의 요구에 응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끈벌레가 아주 독특하고도 은밀한 방식으로 숙주의 욕망을 실현시킨다는 것이다. 끈벌레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숙주가 강한 집념을 품고 있는 대상과, 그 대상을 효과적으로 매개하는 사물이 필요하다. 매개물은 대상의 신체 일부여도 좋고, 대상이 소유하고 있던 물건이어도 좋은데, 가급적 그 대상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것일수록 좋다. 준비가 되면 끈벌레가 나와 매개물을 향해 기어갈 것이다. 마침내 끈벌레가 매개물에 닿으면 숙주는 고도의 집중력을 유지해야 한다. 끈벌레가 충분히 시간 들여 매개물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 안에 숙주의 욕망을 응축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로써 숙주가 대상에게 품고 있는 집념과 욕망은 이전에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방식으로 현실화될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코웃음 한 번 치고 가볍게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그때 끈벌레가 다시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 지렁이들은 곧 나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알려줄 터였다.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가설을 검증하는 심정으로, 그것들이 움직이는 대로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온 정신을 그들에게 집중한 채.

꾸물꾸물 헤엄치던 끈벌레가 곧 화면 위 텍스트에 닿았다. 익숙한 전자제품의 온기 대신 시린 물에 손등을 대었을 때처럼 서늘한 감각이 끈벌레를 타고 안구에 전해져 왔다. 순간적으로 뇌가 저릿했다. 낯선 감각이 파도처럼 덮쳐와 생각을 마비시켰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무언가 극적인 장면이 펼쳐지길 기다렸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뭘 기대한 거야. 냉소하며 눈을 떼려는 순간 게시물에 새 댓글이 달렸다.

 

―두려워 마십시오. 우리는 끈벌레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오후 7시, 종로 이리상가 지하 17층에 위치한 아지트로 혼자 오십시오. 그리고 지금부터 당신이 경험하는 것을 어디에도 발설해선 안 됩니다. 내 말을 믿으십시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정보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H.

 

4년 전 게시물인 데다가 직전까지 남아있는 댓글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그건 분명히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받아본 게 언제였던가. 소박한 감격에 젖어 있는 와중에 일을 마친 끈벌레들이 꾸물거리며 귀환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이 녀석들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밖에 나가보기로 했다.

 

해가 기울어가는 초여름 저녁, 발에 닿는 서울 거리의 감촉이 낯설었다. 나오기 전에 거울을 보았다. 여전히 눈자위는 시커맸고 눈빛은 퀭했다. 혹시 몰라 미리 주문해 두었던 알이 크고 짙은 싸구려 선글라스를 꼈다. 거뭇한 눈자위를 가리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끈벌레들이 예고 없이 튀어나오면 곧장 자취방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기껏해야 그 정도가, 일어날 수 있는 일의 가장 안 좋은 버전이라고 생각했다.

종로를 향해 길을 잡고 십분 쯤 걸어가는데 저쪽 맞은편에서 낯익은 두 사람이 다가왔다. 고등학교 동창 A와 M이었다. 둘 다 졸업 이후에 만난 적도, 연락 한 번 주고받은 적도 없었지만,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을 때 못 본 척 지나치기엔 애매한, 딱 그 정도 사이였다. 둘은 몇 년 전보다 한결 세련되어 보였다. 아니지, 쟤들 원래 고등학교 때도 선남선녀였잖아. 바보 같은 생각을 뇌까리며 몇 걸음을 더 걸었다. 더 가까이서 보니 둘은 사귀는 사이인 듯 보였다. 짙은 회색과 검정으로 슬림하게 매치한 드레스코드가 두 사람이 연인 관계임을 쉬크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뒤돌아 옆길로 갈까, 고민하다 그만 눈이 마주쳤다. A의 눈에 먼저 반가움의 빛이 어렸다. 속으로 한숨이 났다. 어떡하지. 뭐라고 인사를 건네야 최대한 쿨해 보일까. 습관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찰나에 A가 먼저 알은척을 해왔다.

"야, 너 Y 맞지? 이렇게 보네."

"어, A 니가 여긴 웬일이냐."

"일이 있어야만 서울 오냐."

"하긴, 요새 뭐 하고 지내?"

"그냥 이것저것, 다 똑같지 뭐."

별로 똑같아 보이지 않았다. A는 눈에 띄게 뽀얀 피부에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시계와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백화점에 디피된 옷을 별생각 없이 걸치고 나온 듯 무심한 옷 때깔이 곱기도 고왔다. A는 학창 시절부터 돈 많은 집안의 삼대독자라고 줄곧 친구들의 관심을 받곤 했다. 그땐 그 동경 어린 관심이, A가 가진 탄탄한 재력과 배경보다도 부러웠다. 결정적으로 지금 A의 옆엔 M도 있다. 아무리 A가 잘 나간다고 해도 M은 그에게 과분한 보상이다. M도 참 골이 비었지, 자기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나. 저만큼 우월하게 태어나서 만나는 남자가 고작 A라니. 쯧쯧.

"오랜만에 만난 사람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무안하게."

그렇게 쓸데없는 망상에나 젖어 있으니까 니가 지금까지 그 꼴로 사는 거야. 왠지 그런 말이 뒤에 숨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억울했다. 내가 뭘 어쨌길래. 세상은 공정하지 않았다. 정의롭지 않았다. 백날 발버둥 쳐봐야 나는 A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인생을 살겠지. A의 눈빛은 그런 나를 마음껏 경멸하고 있었다. 아무 자격도 없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저 부잣집에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A는 나를 경멸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넌 참 좋겠다."

"어? 뭐가."

"운 좋게 돈 많은 집 자식으로 태어나서 인생 존나 쉽게 살잖아."

"야, 넌 무슨 말을 그렇게..."

"새끼, 그냥 한 말 가지고 뭘 또 그렇게 진지하게 반응하고 그러냐? 됐고, 나 간다."

"어? 어, 어, 그래."

당황한 A의 표정을 보니 속이 꽤 후련했다. 픽 코웃음 치며 A를 지나쳐 스무 걸음쯤 걷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까만 색안경을 통해 한 겹 걸러진 세상에서 A가 우두커니 선 채로 아직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M이 그런 A의 팔을 잡고 채근하자 못 이긴 듯 끌려가는 꼴이 조금 우스웠다. 문득 A의 평온한 내면에 갑작스레 들이닥쳤을 파도가 궁금해졌다. 그때 눈 안의 끈벌레가 또 한 차례 꿈틀댔다. 아니야. 아직은 아니야. 지금은 곤란해. 좀만 더 참고 들어가 있어. 옳지. 머릿속 독백에 화답하듯, 눈이 가려웠다. 선글라스 옆쪽으로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눈 아래 튼살이 때처럼 조각조각 밀려 나와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핸드폰 지도를 보면서 찾아간 이리상가는 구불구불한 좁은 골목 안쪽에 유령처럼 서있었다. 지금 당장 폭삭 주저앉아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외관의 좁다란 5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서울 복판에 이런 허름한 건물이 있는 것보다 더 놀라운 건 이 작은 건물 지하 17층에 아지트라 불리는 뭔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비밀요원들의 접선 장소 같은 건가. 하긴 아지트라는 말부터 어딘가 예사롭지 않았다. 왠지 우쭐한 마음에 기념으로 그 앞에 침을 두 번 탁탁 뱉고는 짙게 코팅된 현관 유리문을 슬그머니 밀었다. 지하로 가는 계단이 있어야 할 곳에 난데없이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에스컬레이터 아래쪽 끝이 보이지 않았다. 게임 속 지하 던전의 입구 같았다.

오케이,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시시껄렁한 인생에 드디어 스펙터클한 사건 하나 제대로 터지나 보다, 하고 정지된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왼쪽 손잡이 옆에 층수를 입력하는 컨트롤러가 있었다. -17을 입력하자 에스컬레이터가 서서히 작동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통로에 드문드문 비치는 붉은빛 사이로 에스컬레이터가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내려갔다.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눈 안 깊숙한 곳에선 이미 수백 가닥의 끈벌레들이 기대에 차 득시글거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에스컬레이터가 천천히 내려가는 동안 컨트롤러에 달린 손바닥만 한 전광판에서 현재 층수를 표기하는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전광판의 숫자가 -17를 가리켰을 때 에스컬레이터가 멈췄다. 동시에 막혀있던 오른쪽 손잡이 부분이 열리면서 지하 17층 복도로 연결되었다. 복도 안쪽도 시커매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놈의 건물 내부 구조가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도통 짐작을 할 수 없었다. 지하 17층 복도에 첫발을 디뎠다.

아지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각 실로 통하는 문은 복도 한쪽에만 달려 있었고, 그 위에 명패가 붙어 있었다. 복도 입구로부터 다섯 번째 문 위에 H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문 앞에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정확히 오후 7시였다. 다른 건 몰라도 시간 개념 하나는 틀림없다니까.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솔직히 안쪽은 조금 밝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모든 게 너무 칙칙했으니까, 적어도 안에는 밝은 조명을 켜서 기분 좋게 손님 맞을 준비를 해두었겠지 했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낡은 전등은 수명을 다해가는 듯 힘겹게 빛을 쥐어짜내고 있었고, 하나뿐인 모니터가 저쪽 벽면 언저리를 창백하게 비추고 있는 게 다였다. 얼빠진 채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지금까지 내내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멋쩍은 표정으로 선글라스를 벗었지만 그래봤자 딱히 화사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좀 더 선명하게 어두운 느낌이었달까.

하지만 정말로 참을 수 없는 것은 냄새였다. 살면서 맡아본 적 없는 지독한 악취가 방 안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이 공간에 서있는 것만으로 냄새에 푹 절여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어두침침한 그곳에서 처음으로 H를 만났다.

H는 사무용 책상 뒤에 비스듬히 앉아 벽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문가에서 얼핏 본 것만으로도 H의 인상이 음침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고, 실은 이 사무실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그랬다. 벽은 불그스름한 벽지를 어설프게 붙여놓아 울렁거렸고, 모서리마다 습기와 곰팡이가 뒤얽혀 얼룩져 있었다. 방에는 복도로 통하는 출입문 외에도 옆방으로 통하는 간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녹슨 문고리에 육중한 자물쇠가 걸려 있어 더욱 음산한 느낌을 자아냈다. H는 며칠 동안 씻지 않은 듯 번들거렸고 옷차림도 꾀죄죄했다. 그다지 좋은 첫인상은 아니었다. 말쑥한 정장 차림에 신비로운 미소 같은 거라도 입가에 살짝 걸고 있으면 좋았을 텐데. 실망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잔뜩 실어 태연함을 가장하며 H가 앉아 있는 책상을 향해 두어 걸음 다가섰다. H는 여전히 뭔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뭘 보길래 손님이 들어온 것도 눈치를 못 채나 싶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어딘가에 불시착한 듯 이질감이 들었다. H는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으로 기괴한 기운을 잔뜩 뿜어냈고, 그런 그를 더 자세히 관찰한 뒤에야 나는 이질감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H의 안구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대신 그의 눈과 귀, 코와 입에서 끈벌레 수백 가닥이 기어 나와 쉼 없이 꿈틀대며 책상 위에 놓인 무언가를 더듬고 있었다. 벌레가 눈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끈벌레의 생김새도 내 것과 많이 달랐다. 일단 색깔이 짙고 거무튀튀한 데다가 길이도 길고 두께도 다 자란 미꾸라지 정도는 되어 보였다. 무엇보다 그것들은 역동적이었다. 벌레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H의 끈벌레는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뚜렷한 의지를 지닌 독립적 생물체로 보였다. 방안을 가득 채운 어둠에 섞여 보이지 않았을 뿐, 내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H는 줄곧 이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그는 내가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언제까지? 약속 시간도 본인이 정했으면서 때맞춰 찾아온 손님을 기다리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생각을 멈추고 헛기침을 두어 번 뱉어 기척을 냈다. 그러자 H가 아, 하는 소리를 신음처럼 내더니 곧 책상 위의 끈벌레들을 능숙하게 거두어들였다. 투망에 갇힌 미꾸라지 떼처럼 울룩불룩한 끈벌레들이 숙주의 부름에 따라 눈으로, 귀로, 코로, 입으로, 각각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끈벌레들이 사라진 자리에 잃어버린 내 왼쪽 이어폰이 놓여 있었다. 텅 빈 눈의 H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Y 씨."

"내 이름을 알고 있군요."

H의 미소가 옆으로 더 길게 째졌다. 일반적이지는 않았지만, 왠지 기쁨의 표현 같았다. 그가 이어폰을 집어 내게 건네며 말했다.

"이름 외에도 많은 것을 알고 있답니다."

"내 이어폰으로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보셨다시피, 저의 욕망을 불어넣고 있었지요."

불쑥 화가 치밀었다.

"원래부터 나를 타깃으로 잡고 있었던 겁니까? 그래서 일부러 내 이어폰을 훔쳐갔고요?"

그 말에 H가 풉, 소리 내어 웃었다.

"아아, 그건 아니에요. 역시나 Y 씨는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계시군요. Y 씨는 누군가의 타깃이 될 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지금 이게 다 뭡니까? 내 이어폰에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냐고요."

"고작 이어폰 한쪽에 너무 예민하신 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일단 좀 앉으시죠."

연신 히죽거리는 H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한껏 언짢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와 맞은편에 놓인 철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H가 건네는 피로회복제 음료를 한입에 들이켜고는 다시 그를 노려보았다.

"말해보세요. 방금 전 상황을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전 그저 Y 씨를 돕고 싶을 뿐입니다."

"남의 물건 가져다 변태처럼 더듬는 게 그 사람을 돕는 일입니까?"

"그렇게 보였다니 유감이군요. 전 Y 씨가 정의로운 사람이라 생각해서 도우려 했을 뿐인데요."

'정의'라는 말이 귀를 파고들었다. 지금껏 내가 생각하는 정의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자세히 말해 봐요."

"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눈에 띄진 않지만 자기만의 정의감을 품고 외롭게 살아가는 Y 씨 같은 사람들이요. 전 그런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럼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살만해지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나한테 힘 보태주고 싶어서 아까 그러고 있었다는 거예요?"

"정확합니다. 사실 제 끈벌레가 성능이 상당히 좋거든요. 웬만한 바람은 다 들어준답니다. 따지고 보면 Y 씨가 지금 여기 와있는 것도 다 끈벌레 덕분이죠."

"대충 알아들었고요. 저 근데, 눈은... 안 보이시는 거죠?"

그 말에 H의 텅 빈 눈자위가 반달 모양으로 굽었다. 내 반응을 즐기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솔직히 소름 끼쳤다.

"여기도 나름 아지트고 사무실인데, 그 정도야 동료직원들 도움 받아서 얼마든지 수집 가능합니다. 그밖에 필요한 것들은... 마음의 눈이 도와준다고 해두지요."

마음의 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앞도 못 보는 분이 내 이어폰은 어떻게 찾았어요?"

"여기도 나름 아지트고 사무실인데, 그 정도야 동료직원들 도움 받아서 얼마든지 수집 가능합니다."

"어쨌든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Y 씨는 그냥 지금처럼 열심히 사시면 됩니다. 가끔 끈벌레 도움도 좀 받으시고."

"겨우 그 얘기하려고 날 여기까지 부른 겁니까?"

"어려운 걸음 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어폰 돌려드리면서 겸사겸사 얼굴도 보고, 대화도 나누고 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누굴 찾아가기는 좀 어려운 형편이라서요."

"그래서, 끈벌레가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움을 받을래도 뭔 사용법을 알아야 받든가 말든가 하죠."

H의 입꼬리가 다시 한 번 양옆으로 길게 찢어졌다.

"먼저 좋은 매개물을 찾으세요. 그럼 끈벌레는 알아서 나올 겁니다."

 

A를 다시 만나기로 했다. 약속을 한 건 아니고, 그냥 나 혼자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A의 SNS 계정을 찾아 지난번에 미안했다고, 밥 한 번 먹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A에게선 답장이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한 주가 지나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기다렸다. 지난번 A와 M을 마주친 그 시간 그 자리에서. 그러면서 틈틈이 메시지를 보냈다. 역시 답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뜻밖에도 그 거리를 지나는 M을 보았다. 다른 남자와 함께였다.

"안녕."

"악!"

벌레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는 M의 다급한 몸짓에 가방에 든 물건 몇 개가 떨어졌다. 나는 재빨리 몸을 숙여 물건들을 주워주면서 작은 머리끈 하나를 손안에 쥐어 숨겼다. M은 내가 주워주는 물건들을 서둘러 낚아채면서 몇 마디 말을 주워섬겼다.

"어, 아... 고마워. 그리고 미안, 너무 놀라서. 그... 그러니까 네가 너무 갑자기 나오는 바람에..."

"괜찮아. 그런데 옆에는 누구?"

"어, 친구. 인사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M은 나에게 친구를 소개해주고픈 마음이 없어 보였다. 나는 턱짓으로 M의 친구를 가리키며 물었다.

"A가 알아?"

"뭘?"

M의 표정에 당혹감이 번지다가 차츰 싸늘하게 변해갔다. 옆의 친구도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얼굴로 M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 이러고 다니는 거 A가 아냐고."

"하 씨발 진짜."

M의 입에서 욕이 나오는 걸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운 좋은 날이다.

"지금 뭐 하자는 건데? 저번에도 왠지 싸하다 했어. 넌 제발 니 인생이나 똑바로 살아."

그 말을 들으니 히죽 웃음이 나왔다. 누가 이렇게 웃던 걸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아 맞다. 지하실의 H.

"난 그냥 A가 걱정돼서 물어본 거야. 아님 말지, 왜 화를 내고 그러냐."

"지랄하고 있네. 거지 같은 새끼가."

그 말을 끝으로 M은 남자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나는 둘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손 안의 머리끈을 만지작 거리며 돌아섰다. 만족스러운 만남이었다.

 

M의 머리끈을 슬쩍 해온 후로 끈벌레가 부쩍 활발해졌다. 녀석은 생각보다 성실해서, 내 간절한 욕망을 밤낮없이 M의 머리끈에 불어넣어 주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집중력도 한몫 톡톡히 했다. 내가 이 정도로 한 가지 일에 오래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스스로가 대견할 때도 있었다.

M의 불행을 빌었다. 능력도 없이 돈 많은 남자에게 붙어 분에 넘는 사치를 누리고, 한 번에 여러 남자를 만나고, 자기보다 못 산다 싶으면 무시하고, 정작 치열하게 살아가는 남자들의 삶을 비웃고, 그러면서도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여성혐오니 차별이니 하는 궤변을 마치 진리인 양 늘어놓는 역겨운 종자들의 삶이 바닥까지 불행해지기를 진심을 다해 빌었다. M의 빛나는 외모가 한순간에 시들기를, 그래서 소중한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하는 일마다 망하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좌절하다가 비참하게 울면서 주저앉기를 기도했다. 그렇게 M이 마침내 제 분수에 맞는 자리를 찾아가게 되면 억울한 내 인생이 조금이나마 보상받은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런 일념으로 M의 SNS를 찾아 들락거리며 날마다 그가 얼마나 더 불행해졌는지 확인했다. 단기적으로 눈에 띄는 변화는 없어 보였다.

와중에 끈벌레가 조금 굵어진 것 같았고, 색깔은 확실히 더 짙고 탁해졌다. 흐리게 푸른빛을 띠던 끈벌레의 거죽에 진녹색 반점이 울긋불긋 피어나더니, 어느덧 썩은 과일의 속살처럼 불그죽죽한 얼룩이 번져갔다. 악취도 점점 심해졌다. 아지트에서 맡았던 것과 비슷한 악취였다. 아무래도 끈벌레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풍기는 냄새인 듯했다. 처음엔 역했지만 끈벌레와의 동거생활이 길어지면서 점점 익숙해졌고, 더 지나서는 묘하게 중독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큼큼거리며 숨을 들이쉴 때마다 동질감이 들어 더는 외롭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불공정한 세상에 드디어 나의 이상이 하나씩 구현될 것이라는 희망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나를 고양감에 사로잡히게 했다.

더 많은 매개물이 필요했다. 챙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를 쓰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일행 없는 여성을 타깃으로 잡았다. 사람 많은 횡단보도에서 부딪쳐 가방을 쏟게 한 뒤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주는 척하면서 그중 하나를 재빨리 빼돌리는 식으로 매개물을 수집했다. 손에 잡히는 작은 물건을 훔치다 보니 주로 립스틱이나 브러시, 휴대용 핸드크림 같은 것들이 모였다. 그렇게 모아 온 물건들을 매트리스에 늘어놓고 끈벌레가 그것들을 마음껏 탐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날 밤의 일과였다. 물건들의 주인이 불행해지는 상상으로 매일 밤을 황홀하게 보냈다.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매개물 수집 4일째 되던 날에 재수 없게도 덜미를 잡힌 것이다. 하필이면 경찰을 건드린 게 화근이었다. 경찰이 아니라 여경인가. 어쨌든 나는 횡단보도에서 그 여자에게 완전히 제압당했다. 여자는 내가 물건을 빼돌린 걸 알아차리자마자 내 손목을 붙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렇게 묻는 여자의 얼굴이 곱상했고, 몸집도 아담하고 호리호리하길래 힘이 없을 줄 알았다. 처음 잡혔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는 걸 알아챘어야 했는데. 잡힌 손목을 홱 뿌리치려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돌려주시죠."

"뭐, 미친년아."

그러면서 잡히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쥐어 여자의 얼굴을 향해 뻗어보았으나, 이번에도 여자를 당해내지 못했다. 내지른 팔이 순식간에 등뒤로 꺾이면서 얼굴이 바닥에 꽂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얼른 파악이 안 될 정도로 빠르고 숙련된 동작이었다. 벌어진 상황을 뇌가 따라가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땅에 닿은 볼이 후끈거렸다. 선글라스가 어그러지고 마스크는 땅에 끌리며 찢어진 듯했다. 그 상태로 손안에 든 물건을 빼앗겼다. 여자가 눈앞에 경찰 신분증을 내밀며 말했다.

"경찰입니다. 지금 제 물건 훔치려고 한 거 맞죠?"

"아... 아니요. 아니에요. 전 그냥 당황해서..."

"당황했다는 분이 남의 물건을 훔칩니까?"

"제가요?"

여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찰나, 끈벌레 몇 마리가 우그러진 선글라스 옆으로 비어져 나왔다.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인생을 좀 영양가 있게 사... 악!"

나는 놀란 여자가 팔에서 순간적으로 힘을 푸는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비틀어 불리한 자세에서 빠져나왔다. 여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 눈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는 그대로 돌아서서 아지트로 내달렸다.

 

"오셨군요. 그런데 얼굴이 왜 그 모양입니까. 오다가 넘어지기라도 하셨나 보죠?"

마치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부터 다친 얼굴을 보고 실실 웃는 태도까지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가만. 다친 얼굴을 보다니. 저 꿈틀대는 벌레들이 정말 H에게 마음의 눈이라도 되어준다는 건가. 잠깐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까짓 것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부러 툴툴거리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분명 나에게 더 많은 권력을 쥐어주고 싶다고 하셨죠? 우리가 끈벌레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면서요. 그런데 끈벌레는 매개물 없이는 아무 힘도 못 써요. 그러니까 내가 뭔가 세상을 바꿀 만큼 큰 힘을 가지려면, 그만큼 많은 수의 매개물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죠. 얼마나 비효율적입니까? 보세요. 오늘도 하찮은 물건 몇 개 수집하러 나섰다가 내 꼴이 이게 뭡니까!"

"Y 씨는 본인이 가진 게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 줄 아직도 잘 모르시는군요."

H는 특유의 재수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정보화 시대입니다. 미디어를 타고 흐르는 정보가 곧 권력이죠. 매개물이 많아야 한다고요? 물론 많으면 좋기야 할 겁니다. 하지만 반드시 많아야 하는 건 아니에요. 예를 들어 Y 씨의 이상이 충분히 반영된 사건을 단 한 번만이라도 완벽하게 집중해서 연출해 낸다면, 다음 일은 미디어가 알아서 해줄 겁니다. 뉴스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도배되고,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가치관의 혼란을 겪게 되겠죠. 결국 기존의 사고와 신념체계를 대폭 수정하지 않고는 삶을 이어갈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즉, 단 하나의 매개물만 가지고도 세계를 변화시키는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비록 겉모습은 남루할지라도 H의 내면에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통찰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나는 H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했다.

"H 님은 도대체 나의 뭘 보고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 겁니까?"

H가 킬킬대며 웃었다. 그가 소리 내어 웃는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뭐가 그렇게 그를 웃겼을까.

"하나의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업계 특유의 직감이란 게 생깁니다. 지하에서 오랫동안 이 연구를 해오다 보니 끈벌레의 축복을 누리게 될 이들은 그냥 척 보면 알겠더군요. Y 씨도 그렇게 알아본 겁니다. 저로선 행운이죠."

그렇게 말하는 H의 혀끝에서 끈벌레가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가 입 안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이, 왠지 먹음직스러웠다.

 

며칠 뒤 내 혀에서도 끈벌레가 돋아났다. 거울 앞에서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새로 나온 끈벌레와 장난스럽게 교감을 시도하다가 뜻하지 않게 내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혀끝만이 아니라 귓구멍과 콧구멍에서도 끈벌레들이 나오고 있었다. 어느덧 끈벌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버린 얼굴이 그리 혐오스럽게 느껴지지 않았고 어느 정도는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흐뭇한 모습으로 거울을 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끈벌레들은 지금까지도 내게 충분한 위안을 주었지만, 정말 H의 말대로 나의 욕망을 실현시키고 있는 걸까.

오랜만에 포털 뉴스에 접속했다. 오늘도 여자가 죽었다. 이틀 전에도 죽었고, 그 전날과 전전날에도 죽었거나 죽을 뻔했던 여자들이 있었다. SNS에는 운이 좋아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여자들이 여전히 주제넘은 소리를 씨부리고 있었다. 얼마나 더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까. 확실한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M의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M의 머리끈을 앞에 두고 끔찍한 죽음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M의 SNS에는 매일같이 새로운 일상이 업로드되었다. 사진 속 M의 모습은 불행과 거리가 있어 보였지만, 초조하지는 않았다. 연출된 사진 몇 장 따위에 흔들릴 이유는 없다. SNS란 본디 작위적인 욕망의 전시장이고 여자들이란 으레 그런 유혹에 잘 빠져들기 마련이니, 난 그저 그들에게 일벌백계의 철퇴를 휘두르면 될 일이었다. 짜릿한 상상은 제 꼬리를 입에 문 뱀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그래, 끈벌레가 대신해 주길 기다릴 게 아니었다. 어쩌면 끈벌레도 내가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다. 나는 M의 SNS에 올라온 장소를 집요하게 추적하여 M이 자주 다니는 지역 몇 군데를 특정하고 동선을 예측했다. 엉성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는 이 방법으로 M을 만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끈벌레가 우리 사이에 운명처럼 다리를 놔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한여름의 무더위에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꽁꽁 여민 뒤에야 집을 나섰다. 허리춤에는 가느다란 회칼을 숨기고 헐렁한 티셔츠로 그 위를 덮었다. 정확한 타이밍에 바로 꺼내 휘두를 수 있도록 칼 뽑는 연습도 충분히 해두었다.

활기찬 대낮의 거리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쿠데타를 목격하길 바랐다. 그리 성공적인 쿠데타는 못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일그러진 시대의 모순에 억눌려 지내던 의인들은 분명 각자의 방구석에서 은밀히 환호를 내지를 거였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꽉 차게 뿌듯해졌다. 그런데 M을 만나리라 기대했던 복합 쇼핑단지 광장의 대형 조형물 밑에서 뜻밖에도 A를 만났다. 나는 A에게 다가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야, 뭐하냐."

A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금세 시선을 돌리곤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냥, 누구 기다려."

언뜻 평범한 반응처럼 보였지만 나는 알았다. 그건 완전한 무시였다.

"누구?"

"너 모르는 사람이야. 신경 쓰지 마."

"모르긴 뭘 몰라. M 기다리는 거잖아."

A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아니면 너도 다른 여자 만나냐?"

"더 할 얘기 없으면 나 먼저 갈게."

"이야, 진짠가 보네. 쌍으로 능력 좋은데."

A는 대답 없이 조형물 맞은편 건물 출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A의 등 뒤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삐졌냐? 남자새끼가 밥 한 번 먹자니까 메시지에 답도 없고."

A가 걸음을 멈추더니 내쪽을 향해 반쯤 돌아서서 말했다.

"야, 내가 왜 너랑 밥을 먹냐."

밥도 급이 맞아야 같이 먹는다는 뜻이겠지.

"이런 씨발놈이 어디..."

칼을 뽑아 드는 데까진 성공했는데 타깃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애초에 내 타깃은 M이었는데. 지금 M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A는 슬슬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내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고, 저쪽에선 건장한 체구의 가드 몇 명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갑자기 어지러웠다. 서로 반대방향으로 회전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듯한 기분이었다. 실은 내 인생 전체가 이런 식이었다. 나는 바닥에 칼을 버리고 곧장 아지트를 향해 질주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아지트 문을 열어젖혔을 때 H는 분명 흥분하고 있었다. 실은 그의 아지트 전체가 묘하게 들뜬 분위기였다. 이번에도 H는 내가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았고, 어느 정도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어서 오십시오."

칙칙한 벽을 배경으로 앉아있는 H의 모습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얇은 소매 안쪽에 있는 그의 팔이 전보다 울룩불룩했고, 목과 어깨 안쪽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피부도 썩은 짐승의 그것처럼 시커맸다. 그가 일어서서 나를 맞았다.

"이쪽으로 가시죠."

그가 한쪽 손을 들어 안내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지트에 처음 왔을 때 자물쇠로 잠겨 있던 간문이 열려 있었다. 그의 비대한 몸이 문을 겨우 통과해 옆방으로 넘어갔다. 나는 말없이 그의 등만 바라보며 뒤를 따랐다.

"이해하십시오. Y 씨에 대한 제 기대가 좀 크다 보니 본의 아니게 몸이 좀 불었습니다."

뭘 이해하라는 걸까.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이 일로 먹고산 지도 꽤 됐는데요."

오늘 겪은 사건과 아지트의 분위기, H의 달라진 외모와 그의 말까지 이해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Y 씨만큼 걸출한 벌레는 아직까지 본 일이 없거든요. 당연히 기대가 커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H를 따라 들어선 방에는 포식자의 흔적이 가득했다. 다섯 평 남짓한 방 정중앙에는 제단 같이 넓은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뒤편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전신거울이 설치되어 있었다. 탁자 위에 누군가 게걸스럽게 먹다 남은 살점이 죽은 자의 뼈에 걸려 피딱지와 함께 말라 썩어가고 있었다. 탁자와 바닥과 벽과 천장과 낡은 불빛이 온통 검붉은 피로 얼룩져 도륙의 현장을 증언하고 있었다. 끔찍했다.

H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기대로 가득 찬 H의 몸집이 점점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의 눈과 귀와 코와 입에서 나온 끈벌레들이 거추장스러운 옷을 풀어헤치며 H의 진짜 몸을 드러냈다. 옷 아래에는 너무 커서 더 이상 끈벌레라 부를 수 없는 어떤 검붉은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존재의 가슴 언저리에 심연 같이 까마득한 구멍 두 개가 벌레들의 뿌리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저게 그, 마음의 눈이랬던가.

"Y 씨는 제 기대에 너무나 훌륭하게 부응해 주셨습니다. 정말이지 먹음직스러운 벌레로 성장해서 오셨어요. 보세요. 당신의 그 통통하고 번들번들한 녀석들을 좀 보시란 말입니다. 오늘은 내 생애 최고의 날입니다."

H의 표정은 황홀했다. 아니, 그는 이미 내가 알던 H의 모습이 아니었으므로 그냥 '그'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가 황홀한 표정으로 전신거울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탁자 뒤편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전신거울 앞에 섰다. 그의 말대로 정말 통통하고 번들번들하고... 먹음직스러웠다. 여기까지 달려오는 그새 또 많이 자랐구나. 이 모습을 보라고 여기에 거울을 놨구나.

공포로 몸이 떨려오는 와중에, 나의 충실했던 끈벌레들이 방 안의 존재에게 완전히 장악당한 것이 느껴졌다. 점점 나는 내 몸을 그에게 온전히 바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 휩싸였다. 기꺼이 그의 만찬이 되어, 그럼으로써 필시 저 위대한 벌레와 하나가 되어, 인생의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갈망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 욕망에 부응하여, H는 나를 머리부터 집어삼켰다.

 

나는 그의 입속에서, 그와 나의 끈벌레가 뒤섞여 꿀렁대는 소리와, 그가 내 뼈와 살을 우적우적 씹어대는 소리와, 애처로운 내 마지막 숨소리와 함께, 이런 감탄사를 들었다.

"역시 일품이야. 역겹기가 이루 말할 수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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