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이상한 나라의 아버지

2023.11.30 10:2911.30

"한쪽은 커지게 해줄 거고, 반대쪽은 작아지게 해줄 거야."

'한쪽? 반대쪽? 뭐를 말하는 거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에서


"양필봉 님 환영합니다."

"나를 언제 봤다고 환영해? 날 아는가?"

"진행을 위해 부스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 니가 뭔데 들어와라 나가라여. 나 돈 찾으러 왔는데."

"진행을 원하시지 않을 경우 [EXIT] 버튼을 누르시면 문이 열립니다."

"내 돈 찾으러 왔는데 갑자기 문 타령이여!"

"직원 문의는 …"

"뭐라는겨."

"진행을 원하시지 않을 경우 [EXIT] 버튼을 누르시면 … "

"환장하겄네!"

그렇게 양필봉은 ATM 부스에 갇혔다.


"위잉~ 위잉~"

나는 외투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다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급히 전화기를 주워보니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다. 또 아버지 전화다.

"아이고, 이를 어쩌냐?"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멘트. 싸한 느낌이 좋지 않다.

"무슨 일인데요?"

"여기서 좀 꺼내줘야겠는데."

항상 그렇지만, 밑도 끝도 없는 시작이다. 

"어디세요?"

"내가 돈을 찾으려고 왔는디. 근데 이 망할 것이 문이 안 열려."

"문이요? 돈 나오는 곳이요? 돈이 안 나와요?"

"그 말이 아니고…"

나는 긴 선문답 끝에 문제가 뭔지 알아냈다. 꺼내야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아버지였다. ATM 부스에 갇히다니.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지만, 아버지는 늘 이런 식이다. 아버지가 기계를 상대할 때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꼬여 결국 일이 벌어진다. 지난주에도 햄버거 가게의 판매 로봇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을 간신히 말렸다. 하긴, 아버지가 사람을 상대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기계를 상대할 때는 아버지가 화를 내지만, 사람을 상대할 때는 상대방이 화를 낸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무인화되고 자동화된 시스템, 혹은 이런 시스템이 탑재된 기계들은 설계 시작부터 사용자 친화성을 추구한다고들 말한다. 그렇지만 그 친화성은 오로지 기계의 설명을 잘 듣고 따라 하는 사람들에게만 발휘된다. 중간에 잠시라도 설명을 놓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을 리셋시키고 처음으로 돌려버리는 시스템. 기계가 하는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기계의 속도를 맞추지 못하면, 밥 한 그릇 사 먹기가 힘든 시대다. 그저 인건비를 줄이겠다는 행정편의주의가 문제일지도 모르겠지만, 역시나 당장은 아버지가 문제다.

"그래서 지금 어디예요?"

"어디긴 그 돈 뽑는 기계 앞이지."

"무슨 안내 같은 건 안 나와요?"

"안내는 무슨 안내. 이 썩을 것이 나를 아는 것처럼 하더니 여기에 가뒀다니께."

"거기 집 앞이에요?"

이런 식이다. 양필봉 씨가 어디선가 무언가 일을 치고 난 후(어디서 많이 듣던 노래 가사 같지 않은가?) 하나뿐인 자식이 나에게 전화를 하고, 결국 나는 해결 방법을 찾아 안달복달하며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양 과장, 또 아버지 일이야? 맘 편하게 다녀와. 오늘은 오후에 비워도 괜찮을 것 같아."

옆에서 흘금거리며 나와 아버지의 통화를 듣던 부장은 내가 전화를 끊자마자 빨리 나가라며 손사래를 쳤다.

"부장님, 그래도…"

"가서 해결 보고 오늘은 그만 퇴근해."

"그럼… 아무튼 고맙습니다!"

대체 이게 몇 번째인지. 부장님께는 죄송하면서도 고마울 뿐이지만, 항상 아버지 때문에 별것 아닌 일에도 두 배는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는 사실에 한숨이 나왔다.


평일 낮인데도 막히는 길은 나를 더 조급하게 만들 뿐이었다. 신호를 기다리며 늘어선 차들을 노려보다가, 대체 아버지는 뭐가 문제이길래 항상 이런 식일까 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최근 들어 인공지능이나 홀로그램을 사용하는 기계나 로봇들이 더 많이 늘기는 했지만, 이런 것들은 삼십 년도 더 전인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나오기 시작했으니 급격한 환경 변화만을 탓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뭐든 기계가 하는 말에 집중해야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남의 말을 흘려들어 버릇하는 아버지가 살아가기 더 어려워진 환경이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환경 변화가 컸다고 해도, 변화에 대한 부적응을 넘어 기계만 만나면 금치산자 수준이 되어버리는 아버지 자신은 정말 미스터리였다. 무슨 기계 관련 자격증 같은 것을 가지고 몇십 년간 일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아버지는 기계치를 넘어 기계의 원수같이 행동하는 분이셨으니 말이다. 말이 났으니 말인데, 사실 그 자격증도 예전에 엄마가 해준 말만 듣고 그런 것도 있나 하는 것뿐이지, 실물을 본 적은 없다 보니 그다지 믿어지지는 않는다. 어쨋거나 기계를 평생 다루었다는 아버지가 기계와 일종의 견원지간이라고 할지 상극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게 지내는 일상은 내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내가 아버지 뒤치다꺼리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치매를 의심하고 병원에 모시고 갈 정도였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엄마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아버지도 우울증에 걸려 잠시 정신줄을 놓으셨나 했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도 못 찾아서, 차로 한 시간은 떨어져 사는 나에게 전화로 물어보시는 것은 일상이었다. 문제는, 아버지가 영상통화도 할 줄 모르고, 나는 그 집을 나온 지가 이십 년은 되어 가는 상황에서, 아버지가 찾는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를 내가 알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물건이라면 있을 만한 곳을 생각해 내 뒤져보라고 할 수라도 있었다. 기계를 상대로 무언가를 하는 때에는 오늘처럼 내가 출동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아버지는 일상에 들어와 있는 기계들을 거의 다루지 못했다. 집 안의 청소 로봇이나 자동 조리 기계부터 집 밖의 안내 로봇까지. 자동으로 작동하는 기계처럼 생긴 것들은 대부분 다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고장을 내곤 했다. 희한하게도 아버지 손에 들어간 기계들은 고장이 더 잘 나는 것 같았고, 이상한 에러 코드를 더 많이 뱉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솔직히 아버지가 그동안 팔십 평생을 어떻게 살아냈는지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일 년 가까이 보내다 보니 나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다.


"아버지, 치매 검사 해 볼래요?"

그 무렵 아버지는 식사도 너무 잘하시고 동네 분들과 이런저런 데도 놀러 다니시면서 활발하게 지내시는 듯이 보였기 때문에 우울증은 아니라고 내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동안의 모든 혼란과 문제에는 이유가 필요했기에, 아버지가 우울증이 아니라 치매가 아닐지 슬슬 의심하던 차였다.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무작정 치매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는데, 다행히 아버지는 검사에 거부감은 없었다. 오히려 딸 덕에 비싼 검사를 한다며 좋아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내가 딸 잘 둔 덕에 그 비싸다는 검사를 해 보네. 내가 딸 하나는 잘 길렀어.”

좋아하는 이유는 좀 이상했지만, 어쨌든 검사하는 것에 동의했다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그렇게 하루 날을 잡았다.

"어르신, 아주 건강하시네요. 기본 건강도 좋으시고, 치매 인자는 거의 없어요. 인지 능력은 연세에 비해 굉장히 좋으시고요."

"내가 머리 하나는 좋지!"

의사의 말에 아버지는 자기가 치매로 자식 고생시키는 사람은 아니라며 싱글벙글하며 큰소리를 쳤다.

“네? 정상이라고요?”

정상이라는 말에 당황하는 나에게 의사는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하며 정상이 무슨 문제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아버지의 이상함에 대한 이유가 없다는 사실 자체가 당혹스러웠다. 우울증도, 치매도 아니라면 지금까지 벌어진 그 수많은 일들은 다 뭐란 말인가. 대체 무엇 때문에 아버지는 기계와 마주할 때마다 극한 대치 상태에 들어간단 말인가. 나는 아버지를 정상이라고 하는 이 의사가 돌팔이가 아닌가, 다른 데에서 검사를 다시 해 봐야 하는가 생각을 상당히 오랫동안 했다. 물론 아버지 말대로 그 검사 자체가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그 이후에 다시 검사를 시도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가까운 곳에서는 비극이지만 멀리서는 희극이라는 명언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사람은 우리 부녀 사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가 감당하던 모든 일이 내게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그 모든 일은 더 이상 코미디가 아니게 되었고, 때론 당혹스러움과 짜증으로 나의 일상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낄낄거리며 대충 들어넘겼던 엄마의 하소연에서 이미 아버지에 대한 것들을 눈치챘어야 했다. 아버지가 얽힌 수많은 사건에 대해 전해 들으며 내가 배꼽이 빠져라 웃을 때마다, 엄마는 나중에 너도 당해보라며 야속한 눈으로 나를 째려보곤 하셨는데,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눈곱만큼도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은 너무 잘 알아 문제지만 말이다. 엄마가 지금의 나를 어디선가 보고 있다면, 예전의 나처럼 엄마도 깔깔거리며 웃고 계시려나.


사무실에서 나온 지 벌써 30분이 지났는데, 집까지는 아직 반도 가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한 번 할까 싶었지만, 도착할 때까지 전화에서 아버지의 고함을 계속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건에 대해서 매번 시트콤 보듯 신나게 웃어대던 나에게, 엄마가 너도 한번 직접 당해보라며 아버지 관련 일을 시켰던 기억이 난다. 매년 하는 정기 건강검진은 부모님 두 분이 함께 다녀오시곤 했는데, 그날따라 엄마는 아빠 때문에 자기가 죽겠다며, 자신은 따로 검사하려고 하니 나에게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일상적인 검진 후 멀쩡하다는 결과를 받는 게 다인데 피곤할 일이 뭐가 있냐며, 대수롭지 않게 엄마의 부탁을 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피를 뽑을 때부터 온몸에 힘을 주며 인상을 써대 간호사들을 놀래켰던 아버지는 마지막 검사였던 내시경에서 한 시간 넘게 버텨 나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진을 뺐다.

"아버님, 이 캡슐을 드시면 이게 위장관을 지나면서 촬영을 할 거예요. 드시고 1시간 동안 여기 가만히 누워계시면 됩니다."

처음에 간호사는 설명과 함께 아버지에게 캡슐 하나와 작은 물컵 하나를 내밀었다. 아버지는 그 캡슐을 한참 쳐다보더니 간호사에게 물었다.

"뱃속에 들어가면 여기서 로보트가 튀어나와서 배가 빵꾸 나는 건 아니지?"

순간적으로 나를 돌아본 간호사는 웃음을 참으며 얼굴에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얼굴이 벌겋게 변했고, 아버지와 간호사를 번갈아 쳐다보던 나도 비슷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그게 배가 빵꾸 날 거였으면 내시경한 사람들 다 죽었게요? 그냥 약 먹듯이 삼켜요."

"예전에는 내시경이 뱃속에 호스 넣어 보는 거였는데, 이런 건 처음 봐."

"전에 내시경 검사 안 해봤어요?"

"그게… 30년쯤 전인가. 그때도 내가 호스를 못 삼켜서 고생했거든. 그때니 엄마가 엄청 화를 내면서 암 걸려 죽든 말든 다시는 검사 안 시킨다고 그랬어. 그래서 내시경은 그때 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안 했지."

이건 엄마가 제대로 계획을 한 것이 분명했다. 예전에 이 얘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분명히 나는 흘려듣고 웃느라 바빴을 게 뻔했다. 그렇지만 아버지에게 검사를 시키는 입장이 된 지금,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아버지는 캡슐을 들고 영 마땅찮은 표정으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큰 캡슐은 못 삼킨다면서, 자기는 오메가3 약보다 큰 것은 못 먹는다고 선언하더니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러자 나보다 간호사가 더 당황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도로 내놓은 캡슐과 컵을 들고 정신줄을 놓고 있던 간호사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더니 우리가 있던 방을 나갔다. 삼십 분은 족히 지나서야 젊은 의사와 함께 돌아온 간호사는 카트 가득 무언가를 가지고 왔다. 

"예전 방식의 내시경은 해 보셨다고 하셨죠?"

의사가 눈은 심각하고 입은 미소를 지은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그건 해 봤지."

"이건 그거랑 비슷하게 호스를 입으로 넣을 거예요. 그리고 호스로 나노봇들을 바로 주입할 거고요."

"나노봇? 아니 그런 이상한 걸 왜 내 뱃속에 넣는겨?"

"이상한 게 아니고요, 원래 캡슐로 삼키는 건데 못하신다니까…"

"그 배 빵꾸 안 낸다는 거? 알았어, 알았다고."

의사는 아버지의 말 중 '알았다'만 입력받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일단 여기 누우시고, 입 벌리세요. 입에 피스를 넣고 고정한 후에 이 호스를 넣을 겁니다."

"잠깐만 기다려 봐."

아버지는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바지 주머니를 뒤지더니 나에게 손바닥만 하게 접은 종이를 건넸다. 

"내가 죽거든, 여기 다 써놨은께."

"네?"

“네?”

의사와 내가 동시에 대답했다. 

"선생님, 이건 아주 안전하고요…"

"아니, 대체 뭘 써온 거예요!"

의사는 '죽거든'에 당황한 듯했고, 나는 '다 써놨다'가 대체 뭔가 싶었다. 

"암튼 다 준비됐으니 거 해 보쇼."

아버지는 갑자기 세계 평화를 이룬 듯한 평온한 표정으로 병원 침대에 누웠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의사는 아버지 입에 마우스피스를 걸고 호스를 배 속에 넣기 시작했다.

"혀 내밀지 마시고요! 이것 삼켜보세요! 꿀떡하세요! 떡 먹듯 그냥 삼켜보세요!"

의사가 아버지와 호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이에 나는 아버지가 건넨 종이를 펼쳤다. 맨 위에는 아버지 특유의 꾹꾹 눌러 쓴 정자체로 '유언장'이라고 써 있었다. 건강 검진하는데 유언장을 가지고 온 것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내용도 이상했다.

'내가 죽으면 재산은 마누라에게 전액 넘긴다. XX 은행의 비밀번호는 0000이고, OO 은행의 비밀번호도 같다. 주식통장에 빚은 없고 **회사 주식이 200주 있으니, 후에 살림에 보태 쓰도록 하여라. 숨겨놓은 첩이나 자식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등등.

어차피 아버지 통장은 엄마가 관리하고 있으니 굳이 알려줄 내용도 아닌데, 숨겨놓은 첩과 자식이라니. 이렇게 써 놓으면 오히려 더 의심스럽다는 것을 모르시나. 내가 유언장의 행간에서 아버지가 숨겨놓은 것을 더 찾는 사이, 아버지와 함께 낑낑거리던 의사는 일을 마친 모양이었다. 

"이제 한 시간 동안 가만히 계시라고 해주세요."

지친 표정의 의사는 아버지에게 해야 할 말을 나에게 하고는 주섬주섬 물건들을 챙기더니 뒤에서 누가 잡아먹으러 오기라도 하는 듯 급히 나가버렸다.


내시경 검사실에 들어온 후부터 세 시간은 족히 지나고야 모든 일이 끝났고, 아까와는 다른 의사가 들어왔다.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나 암이여?"

"결과는 며칠 뒤에 연락드릴 거고요, 일단 특이 사항은 없는 듯하네요."

"근데 아까 넣은 머시기는 어떻게 되는 거여?"

"나노봇이요? 그건 나중에 변이랑 같이 밖으로 나올 거예요."

"뭐? 안 꺼내? 그게 다 나오는지 나오지 않는지 어떻게 알어? 내 배 빵꾸 나면 어쩔 건디?"

아버지는 지금 당장 뱃속의 나노봇을 꺼내라며 있는 힘을 다해 배를 두드리면서 의사에게 항의했다. 내시경 검사 때문에 거의 정신이 혼미해졌던 나는 아버지가 셀프로 자신의 배를 뚫어 응급실로 향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서둘러 아버지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 아버지! 다 괜찮은 거라고요. 집에나 가요!"

아버지의 평소 건강 상태를 생각해 보면 암 같은 것은 당연히 없을 것이고, 변비도 없으시니 나노봇도 걱정할 일이 아니라 생각했지만, 저렇게 불안해하는 아버지를 보니 괜스레 나도 걱정이 됐다. 그 걱정의 대부분이 암이었는지 나노봇이었는지, 이런 아버지를 모시고 집에 돌아갈 길에 대한 것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는 무사히 집에 돌아왔고, 며칠을 기다려 받은 검사 결과에는 암도 없고 모든 상태가 동일 연배보다 좋은 것으로 나왔다. 아버지는 그런 자신을 매우 자랑스러워하셨지만, 나도 엄마의 예전 판단을 따라 다시는 아버지에게 내시경 검사는 시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런저런 일들을 떠올리다 보니 어느새 집 근처에 도착했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ATM 부스에 가봤지만, 그곳에 아버지는 없었다. 

'그새 나오셨나? 연락이나 좀 하고 움직이시지. 이러면 내가 올 것까지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주변을 잠깐 둘러보다 전화를 걸어보니 바로 받으신다.

"아버지 어디예요?"

"어디긴 아까 거기지!"

"네? 집 바로 앞에 있는데 아니에요?"

"집 바로 앞에도 뭐가 있어? 여기 밑에 큰 사거리인디."

집에서 20분은 걸어가야 있는 사거리? 거기를 집 앞이라고 하신 건가?

"아, 알았어요. 이제 집이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요."

도로에는 그렇게 차가 많더니 사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은 보이질 않는다. 하긴 요즘엔 아버지나 아버지를 찾고 있는 나 같은 사람 외에 길을 걸어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긴 하다. 그러니 아버지가 이렇게 오래 갇혀 있는 동안 도와준 사람도 없었지. 사거리에 도착하자 건너편의 ATM 부스 안에 사람 모습이 얼핏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점점 아버지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부스 유리문 뒤에서는 아버지가 오만상을 다 쓰며 밖을 내다보고 계셨다. 

'하… 저런 표정이면 도와주려다가도 도망가겠네…'

부스 앞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드디어 아버지가 나를 봤다. 나를 발견한 아버지는 갑자기 소리를 치며 주먹으로 부스 문이 부서져라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나는 그러지 말라며 부스 밖에서 같이 소리를 질렀지만, 어떻게 만들어진 문인지 밖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개미 소리보다도 작게 들렸고, 아마 아버지에게도 내 소리가 거의 비슷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급히 전화를 꺼냈다. 밖에서 보이는 공황에 빠진 듯한 모습과는 다르게 아버지는 상당히 점잖은 톤으로 전화를 받았다.

“왜 전화를 하고 그러냐?”

"아버지, 문까지 물어내시려고 그래요? 가만히 좀 있어 봐요! 대체 여기 얼마나 계셨던 거예요?"

아버지는 내 말 중 첫 번째 문장만을 입력받았고, 자기가 왜 물어내냐며, 오히려 자기가 돈을 받아야 한다며 흥분했다. 간신히 아버지를 진정시키고 나서야 문 앞에 적혀 있는 안내 전화번호가 눈에 띄었다. 내가 은행에 전화해서 물어본다고 하니, 아버지는 급작스럽게 평안한 모습으로 돌아가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저렇게 평화로워질 수 있느냐는 궁금증은 옆으로 밀어놓고, 나는 부스 문에 적혀있는 안내 전화로 통화를 시도했다. 


상담원인 인공지능은 나의 다급함과 갑갑함과는 거리가 먼, 친절하지만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시키는 대로 번호를 누르고, 기다리고, 다시 번호를 누르고, 앞으로 가고, 뒤로 가는 일을 반복했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얻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따위로 부스를 만들어 놓고 설명은 왜 없는 거야?'

슬슬 화가 머리끝까지 오를 즈음, 콜센터의 인간 안내원이 전화를 받았다. 이렇게 불편한 시스템이 멀쩡한 사람도 진상으로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화를 내고 싶었지만, 이 모든 일이 그 안내원의 탓은 아니기에 억지로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아버지의 상황을 설명한 후, 마침내 받은 대답은 화면 위의 [EXIT] 버튼을 누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이었다니. 안내원과의 전화를 끊고 다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안내원의 말을 설명하니 아버지는 버럭 화를 냈다.

"그게 저것이 계속하는 소리였다니까!"

"네?"

돌아 돌아 결국 처음으로 간 셈이었다. 아버지 말에 따르면, 부스 안에서는 콜센터에서 알려준 것과 똑같은 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는데 버튼이 없단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큰 조각을 먹고 작은 조각을 먹으라는데, 무엇을 먹으라는 것인지, 크고 작은 것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 그래도 앨리스 앞에는 먹어 볼 버섯이라도 있었지. 내 앞에는 소리도 잘 전달되지 않는 두꺼운 유리문과 그 안에 주저앉아 전화에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는 아버지뿐이었다. 다시 안내 전화에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다가 차라리 이런 ATM 부스를 사용해 본 사람을 찾아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해도 요즘에는 주로 밴드에 있는 페이 칩을 사용하니 돈을 직접 찾을 일이 거의 없었다. 당연히 이렇게 생긴 신형 ATM 부스는 사용해 본 적도 없고 말이다. 딸아이는 사용해 봤으려나? 아이는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성인에게 발급되는 밴드 페이 칩을 최근에야 쓰기 시작했을 것이고, 아마도 전에는 종종 현금을 찾아 쓰지 않았을까 싶었다. 점점 지쳐가던 나는 결국 부스 앞에 쪼그려 앉아 아이에게 전화했다. 


한참 만에 전화를 받은 딸아이는 안내원이 했던 말과 똑같이 [EXIT] 버튼을 누르면 된다고 했다. 당황한 내가 지금까지의 이쪽 상황을 장황하게 이야기하자, 아이는 예전의 나처럼 깔깔거리며 웃더니 일단 기다려 보라며 자기가 오겠다고 했다.

"아버지, 소현이가 와 본 대요.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뭐? 소현이가 온다고? 아이고, 우리 이쁜 소현이가 똑똑하기도 하지, 이 문 열 줄도 안다대? 허허허."

아버지는 자신의 최애이자 하나밖에 없는 외손녀 소현이가 자기를 구하러 온다는 소리에 마냥 기분이 좋아지신 듯했다. 엄마가 나에게 전화할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딸아이가 오면 어떻게든 뭔가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그동안의 긴장이 풀리면서 머리가 멍해졌다. 통화 후 거의 한 시간쯤 뒤에 도착한 소현이는 유리문 하나를 두고 완전히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은 할아버지와 엄마를 보자 안쓰러우면서도 우스운 모양이었다.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내 말을 듣던 아이는 유리문 안쪽을 기웃거리더니 할아버지에게 전화했다.

"할아버지, 그 자리에서 뒤를 돌면 화면이 보이거든요. 보이세요?"

아버지는 소현이가 시키는 대로 뒤를 돌아 여기저기를 살펴보다가 드디어 그 망할 [EXIT] 버튼을 찾아냈고, 갇힌지 장장 네 시간 만에 ATM 부스에서 탈출했다. 아버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갇혔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와서는 손녀딸의 등을 토닥이며 아주 기분 좋게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고생했으면서도 손녀 얼굴 한 번 더 본 것이 무척이나 기쁜 모양이었다.


길었던 오후가 다 지나고 저녁이 되어갔다. 딸아이는 약속이 있다며 되돌아갔고,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를 모셔다 놓고, 나도 우리 집에 가려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아버지의 핸드폰이 울렸다.

"김씨여? 내일은 오늘 못 먹은 점심 먹어야지! 햄버거 어뗘? 햄버거 먹은 지 오래됐어? 내가 전에 우리 딸내미한테 거기 로보트 쓰는 법을 배웠는데 말이여!"

뒤통수에서 멀어지는 아버지의 통화 소리를 들으며 나도 내일 점심은 햄버거를 먹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917 단편 샌디크로스 비에러 2019.08.28 0
2916 단편 샌디크로스-0- 비에러 2019.08.29 0
2915 단편 우주 폭력배론 : 증오 니그라토 2021.08.18 0
2914 단편 엘러시아와 발푸르기스 니그라토 2021.08.22 0
2913 단편 2054년 꿈꾸는작가 2023.10.31 0
2912 단편 위층 공주님 낮별 2021.11.03 0
2911 단편 이곳에는 휴지통이 없습니다 김성호 2024.02.25 0
2910 단편 강철 도시 동록개 2021.12.14 0
2909 단편 사원소 학교 땀샘 2020.09.28 0
2908 단편 보고 있다 Insanebane 2019.02.28 0
2907 단편 먼지보다 가벼운 기록 히로 2021.08.09 0
2906 단편 쿨 포테이토 킥더드림 2021.08.03 0
2905 단편 미노타우로스의 미궁 윤도흔 2020.06.30 0
단편 이상한 나라의 아버지 임희진 2023.11.30 0
2903 단편 마트료시카 역설 우서림 2022.03.02 0
2902 단편 샌디크로스-1- 비에러 2019.08.31 0
2901 단편 별 헤는 밤 백곶감 2019.08.31 0
2900 단편 당직 라그린네 2019.08.07 0
2899 단편 지귀, 불귀신 한켠 2019.08.14 0
2898 단편 소설가의 소설가의 소설가의 문그린 2019.02.25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