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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마트료시카 역설

2022.03.02 15:4503.02

 

그동안 나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놈을 만든 건 내 인생에서 가장 멍청한 짓이었다. 아니 적어도 덮어쓰기 기능만큼은 허용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놈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내 집에서 지내는 모습을 떠올리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이런 젠장. 또 그 시간이 왔다.

갑자기 다리가 느껴진다.

가만히 서있을 수 없도록 트레드밀이 쳇바퀴를 돌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귀에 들리는 것도 없다.

오로지 내 두뇌와 다리만 있다. 그리고 트레드밀. 쳇바퀴...

 

복사본인 놈의 디지털 트윈 신세가 되어 버린 나는 이 트레드밀 위에서 전속력으로 뛰어야만 한다. 헉. 헉.

원본은 난데. 제길. 이게 무슨 꼴이람. 헉. 헉. 헉.

반드시 여길 빠져나가겠다. 그리고 놈을 처치하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겠다. 헉. 헉. 헉. 헉.

여보. 얘들아. 보고 싶어. 날 꼭 기다려줘. 헉. 헉. 헉. 헉. 헉.

 

 

고객 문의

 

주식회사 마트료시카 시스템즈 전영생 대표님께.

 

안녕하십니까? 저는 귀사의 플래티넘 등급 우수 고객 장주몽이라고 합니다. 대표님께서는 제가 장주몽의 디지털 트윈인 마트료시카 월드 내의 장주몽_copy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객 문의를 드리는 제가 지금 현실 세계에 있어야 하는 원본 장주몽이고, 귀사가 개발한 저의 디지털 트윈 장주몽_copy가 귀사 시스템에서 탈출해서 현실 세계에서 제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귀사 시스템의 심각한 오류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본 시스템 오류가 귀사의 최고 우수 고객인 저 원본 장주몽의 인격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귀사의 사업은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알려드릴 모든 상황이 귀사의 클라우드에 기록으로 남겨져 있을 것입니다. 부디 신속하게 확인하셔서 이 말도 안 되는 오류 상황을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귀사가 지금이라도 상황을 바로잡는다면 저는 제가 입은 피해에 대해 함구하겠습니다.

 

제가 이곳에 갇히게 된 경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 주치의는 제 DNA 정보를 반영한 디지털 트윈을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심각한 질병에 걸리더라도 제 신체에 딱 맞는 표적치료제 처방이나 수술 방법 선택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제 신체에 딱 맞는 인공장기를 배양해서 이식할 수 있다는 말도 했습니다.

솔깃했습니다. 집안 대대로 간이 좋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다음 말이 더 놀라웠습니다. 다이어트 기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디지털 트윈이 저 대신 디지털 월드에서 운동을 열심히 하면 제가 운동을 안 하고 아무렇게나 먹어도 날씬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한 달에 한 번씩 디지털 트윈의 신체 세포 정보를 양자 수준까지 현실의 제 몸에 동기화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말이 좋아 동기화지 결국 덮어쓰기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아직은 연구 중이지만 결국 이 덮어쓰기 기능 때문에 저는 영원히 늙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제 몸이 하루하루 늙어가도 완벽한 디지털 트윈의 세포 정보를 정기적으로 덮어쓰기 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한번 디지털 트윈의 세포 정보가 양자 수준까지 제 현실 몸의 DNA에 동기화되면 제 몸 안의 세포들이 해당 정보를 읽어내서 변화하는 원리라고 하더군요.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몸이라는 건 탄소들이 모인 단백질과 지방 덩어리고 그것이 고유한 몸으로 존재하게 해주는 건 DNA 정보와 호르몬 같은 신경 전달 물질이니까 말이죠.

 

늙지도, 죽지도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니!

저는 앞뒤 가리지 않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습니다. 인간은 결국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를 구덩이에 빠트리는 존재인가 봅니다. 그놈의 덮어쓰기 기능 때문에 제가 이렇게 당신들의 디지털 감옥에 갇히고 말았으니까요.

 

다이어트 기능은 놀라웠습니다. 96킬로그램으로 세 자릿수 몸무게를 눈앞에 두고 있던 제가 10개월 만에 70킬로그램으로 감량을 했으니까 말이죠. 여느 배우 부럽지 않은 근육질 몸매는 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병원 침대에 누워 동기화 작업을 하는 동안 깜빡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제 의식이 이곳 마트료시카 월드에 디지털 정보 형태로 들어와버린 것입니다. 마치 유리통 속 포르말린에 둥둥 떠있는 표본 두뇌처럼 저는 제 몸을 잃어버리고 이곳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분명 그놈, 장주몽_copy가 꾸민 일일 겁니다.

그놈이 어떻게 자기만의 디지털 의식을 발전시켰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놈은 분명 제 몸을 차지하고 자기가 원본 행세를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 두뇌에 몰래 잠입한 뒤 제 의식을 놈이 원래 있었던 이곳 마트료시카 월드에 업로드한 것입니다.

 

지금 저는 먹지도 말하지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채 오로지 정해진 시간 트레드밀 위에 올라가 달리기만 할 뿐입니다. 잠도 자지 못한 채 끊임없이 밀려드는 후회를 곱씹는 저주 받은 제 의식과 이상하게도 달릴 때면 헉헉대며 뛰는 심장과 다리 근육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 외에는 달릴수록 몸이 데워지는 신체 감각도 흐르는 땀과 같은 대사 작용도 없습니다. 심지어 다리가 움직일 때 같이 움직여야 할 팔의 존재조차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곳이야말로 지옥입니다.

 

 

그래. 수없이 머릿속에 떠올렸던 문장들이다. 이걸 어떻게든 시스템에 전달하면 된다. 그런데 제길. 어떻게 전달하지?

지금 나는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이곳에 종이와 연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키보드와 컴퓨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곳에는 오로지 내 의식과 심장과 다리만 있다.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그렇다! 트레드밀! 트레드밀!

 

 

트레드밀이 움직인다.

나는 보폭으로 모스부호를 타전한다.

세 번은 작은 보폭으로, 세 번은 큰 보폭으로, 그리고 다시 세 번은 작은 보폭으로.

돈돈돈(…) 쯔쯔쯔(- - -) 돈돈돈(…)

돈돈돈(…) 쯔쯔쯔(- - -) 돈돈돈(…)

SOS, SOS, SOS...

구조 요망, 구조 요망, 구조 요망...

 

 

제기랄.

시스템은 구조 신호에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번에도 또 시도해 보기로 한다. 어쨌든 달리는 시간 동안 달리 시도할만한 아이디어가 현재로서는 모스부호밖에 없지 않은가.

 

만일 시스템과의 소통이 계속해서 실패한다면 나는 자력으로 이곳을 탈출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놈은 어떻게 이곳을 탈출했을까?

누군가와 소통할 수도 없고 물리적인 몸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놈은 분명 이곳을 탈출했다.

아마 동기화 과정 가운데 시스템을 빠져나갈 포털 같은 곳이 있을지 모른다.

다음 번 동기화 때 나도 놈이 했던 것과 같은 방법을 통해 놈에게, 아니 원래 내 몸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놈이 동기화를 하러 올까?

이미 자신의 목적을 이룬 놈이 굳이 덮어쓰기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마트료시카 시스템을 다시 찾아올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을 못 하겠다.

놈이 내 의식이 이곳으로 보내졌는지를 아는지도 알 수가 없다. 내 의식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안다면 놈은 덮어쓰기를 하려 하지 않겠지. 하지만 놈이 그것을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

 

가만, 내가 이곳에 갇힌지 얼마나 되었더라?

나의 두뇌에는 감각 기관이 없으니 시간의 흐름조차 파악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나는 우선 트레드밀 운동이 하루에 한 번 있는 일과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보기로 한다.

그 가설이 맞다면 오늘이 닷새 째다. 그렇다면 25일 후에 나에게 기회가 올 수도 있다. 그때까지는 우선 매일 SOS 신호를 보내도록 하자. 어쨌든 할 수 있는 방법은 뭐든 다 시도해 봐야 한다.

 

 

열흘이 지났다.

시스템은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다.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눈도 귀도, 손도 없는 나는 이곳에서 죽을 방법조차 없다.

 

무의미하게 계속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에 대해서 어떻게든 아이디어를 내보기로 한다.

 

이곳은 어떤 곳일까?

시각이나 청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으니 이곳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곳,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곳. 이렇게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재는 반대일 수 있다. 아주 밝고 환한 곳. 아주 시끄러운 곳이지만 내 의식에 그 정보를 받아들일 감각 기관이 없으니 그저 깜깜하고 조용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공간에 대한 파악은 이 정도 결론이 최대한이다. 모든 추리는 단서에서 시작되는데 감각 기관이 없는 나의 두뇌는 이 면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그나마 하루 한 번의 트레드밀이라는 가설 때문에 시간에 대해서는 지금 여기에 갇힌지 보름이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가만. 그렇게 따지면 이곳의 존재 목적은 트레드밀인 셈이다.

트레드밀은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단서다.

트레드밀은 왜 필요할까?

디지털 트윈인 내가 원본 대신 운동을 해서 원본의 신체 세포 정보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

아! 방금 떠올린 문장은 정말 죽기보다 생각하기 싫은 문장이다. 사실은 내가 원본이 아닌가? 하지만 현재 주어진 상황은 어쨌든 내가 복사본인 셈이므로 이 가정을 그대로 이어가보도록 하자.

 

디지털 트윈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DNA 정보라고 했다. DNA 정보는 A-C-G-T로 코딩되어 있는데, 이 마트료시카 월드도 A-C-G-T의 코딩 체계일까? 아니면 A-C-G-T의 생명 정보를 0과 1의 바이너리 코드로 옮겨 놓았을까?

지금의 나라는 존재는 오로지 두뇌의 흐르고 있는 의식과 글로 옮길 수는 없지만 그 의식이 생산하는 텍스트 정보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는 어쨌든 디지털 월드이니만큼 바이너리 코드로 운영되고 있지 않을까? 아니지. 놈의 의식이 내 신체에 있는 두뇌로 자연스럽게 침투한 게 맞는다면 이곳 전체가 A-C-G-T의 정보 체계로 돌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이 특정한 정보 체계가 하는 일은 뭔가? 트레드밀을 돌려서 칼로리를 태우는 거다. 즉, 정보가 에너지로 변환되는 과정이다. 정보가 에너지로 변환되는 과정. 정보가 에너지로 변환되는 과정. 언젠가 이 비슷한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그래. 질라드 엔진이다!

 

마트료시카 월드의 가장 큰 본질은 정보 덩어리인 디지털 트윈이 역시 정보 덩어리인 트레드밀을 돌려서 세포 정보가 양자 수준으로 업로드된 원본 신체 정보의 칼로리를 태우는 질라드 엔진이다.

그래서 나는 디지털 정보에 불과한데도 달리면서 숨을 헉헉댔던 것이다. 지방을 태우려면 운동 에너지가 필요하다. 운동 에너지 발생에 필요한 기관은 단 세 개다. 두뇌, 다리, 그리고 심장.

 

그렇다면, 이 시스템에 신호를 보내는 방법은 트레드밀 위에서 달리지 않는 것이다.

나의 두뇌는 트레드밀이 돌고 다리가 느껴지자 넘어질지 모른다는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에 다리에게 움직이도록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나는 지금 유리통 안에 있는 포르말린에 둥둥 떠 있는 두뇌 덩어리다.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허상이다.

내가 트레드밀 위에서 달리지 않는다면 시스템은 문제 상황을 인지하고 뭔가 반응을 할 것이다!

 

 

트레드밀이 움직인다.

난 다리를 움직이지 않는다.

넘어질 거라는 두려움은 허상이다.

나는 이 시스템이 가진 목적에 저항함으로써 시스템에 나의 존재를 알린다.

 

시간이 지난다. 예상대로 난 넘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2분? 3분?

 

나의 두뇌로 무엇인가 쑥 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뭔가 반응이 있다.

코드다! 누군가가 내 코드를 들여다보기 위해 디버깅 명령어를 입력하고 있다! 그리고 난 그것을 느낀다!

 

도와주세요!

꺼내주세요!

 

나에게는 입도 없고 손도 없지만, 개발자가 내 두뇌에 디버깅 명령어를 입력했기 때문에 난 비로소 내 두뇌 안에 있는 텍스트 정보를 개발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흐른다. 5분? 6분?

 

갑자기 내게 귀가 생긴다. 뭔가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타다닥 타다닥 타다닥...

갑자기 내게 눈이 생긴다! 처음에는 캄캄한 어둠 한가운데서 희끄무레한 빛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주위가 환하게 밝아온다.

 

누군가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개발자다!

그가 말한다.

 

“누구...세요?”

 

 

개발자는 자신이 시스템운영팀의 조은혜 대리라고 했다. 그녀는 나와의 원활한 대화를 위해 급한 대로 내게 그래픽 몸을 만들어줬다. 이제 밑을 내려다보니 비록 홀로그램이기는 하지만 내 몸통도 보이고 손도 보이고 발도 보인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만족스럽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란 거예요?”

나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조은혜 대리는 기가 막히다는 투로 묻는다. 하지만 분명히 이 생각도 들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디지털 트윈이 말을 할 수가 있지?’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혼잣말하듯 말한다.

“하긴, 지금 내가 이렇게 당신하고 대화를 하고 있다는 상황 자체가 믿기 어려운 상황이긴 하니까...”

그녀는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간다. 상사한테 보고를 하러 가는 것 아닐까?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주민등록번호하고요. 마트료시카 시스템 홈페이지에 회원 가입하셨을 때 사용하신 이메일 주소랑 비밀번호 좀 알려주세요.”

 

30분쯤 지났을까?

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온다. 겨우 십 센티미터 남짓한 컴퓨터 화면 속 홀로그램에 불과한 나는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모두 나를 응시하자 엄청난 압박감을 느낀다. 아니지. 지금 나는 심각한 피해를 입은 이 회사의 최고 등급 고객이 아닌가. 내가 위축될 일이 아니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들과 한 판 승부를 벌이겠다.

 

“장주몽 선생님.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희도 지금 이 상황이 매우 당황스럽기는 합니다만, 장 선생님께서 지금 왜 거기에 그러고 계시게 되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고객지원본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이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죄송’이라는 단어를 듣자 일단 안도감이 든다. 사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들이 함께 작당해서 나를 다시 포르말린 속 표본 두뇌로 돌려놓는다고 해도 나로서는 어떻게 저항할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처음부터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는 걸 보면 확실히 오류 상황에 대한 로그가 이들의 데이터베이스에 남아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나는 일단 좀 세게 나가도 될 것 같다.

“내가 왜 여기에 이러고 있냐고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당신들 때문인 것 같군요. 지난 보름 동안 나는 포르말린 안에 둥둥 떠 있는 표본 두뇌처럼 오로지 말똥말똥한 저주 받은 의식으로만 존재했습니다. 그 기분이 어떤 건지 아십니까? 영원한 공포의 암흑 속에서 의식만 존재하다가 뜬금없는 트레드밀 위에서 헉헉대며 뛰어야 하는 존재의 괴로움을 아시냐고요?”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기 위한 전략적인 분노였지만, 막상 분노를 터뜨리고 보니 새삼스럽게 내가 처한 이 상황이 더욱 분하게 느껴진다. 나는 내친김에 한 발짝 더 나아가기로 한다.

“당신들 마트료시카 시스템 안에 있는 모든 디지털 트윈들이 이런 의식의 감옥 안에 갇혀있는 겁니까? 내 트윈이었던 장주몽_copy도 이런 처지에 놓여있었던 건가요? 이거야말로 심각한 인권침해가 아닙니까?”

고객지원본부장의 얼굴이 흙빛이 된다. 예상했던 것보다 센 고객을 만나서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다. 아니다. 고객지원본부장이라면 온갖 종류의 진상 고객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상대해온 베테랑일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는 건 내가 센 캐릭터라서가 아니다. 이 상황 자체가 이 회사가 겪는 유일무이한 케이스라는 의미다.

“아닙니다. 디지털 트윈들은 의식이 없습니다. 지금 이 상황은 저희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라서 원인 규명을 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부디 고객님께서 겪으신 일들에 대해 상세 정보를 저희에게 주시고 함께 이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해나가면 좋겠습니다. 고객님께서 입으신 피해에 대해서는 저희가 충분한 보상을 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보상’이란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그래. 우선 이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도록 하자. 그런 다음, 보상 문제에 대해 원만한 협상을 하는 게 좋겠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미 지난 보름 동안 내 의식 안에서 ‘고객 문의’에 쓸 문안을 수없이 시뮬레이션 하지 않았던가? 나는 천천히 그동안 내가 겪었던 황당한 일들을 설명해 나가기 시작한다.

말을 하는 한편으로 나는 여전히 이들이 나를 다시 포르말린 속 표본 두뇌로 돌려보낼 위험성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열 명의 사람 중에 그걸 막아줄 사람은 누굴까? 어느 회사든 대표와 임원은 닳고 닳은 여우들이라서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해가 될라치면 어떤 범죄든 주저하지 않을 자들이다. 하지만 말단 사원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우선 말하는 중간중간, 나의 첫 구원자였던 시스템운영팀의 조은혜 대리와 눈을 마주친다. 만일 이들이 나를 다시 의식만 존재하는 디지털 감옥 속에 처넣는다면 조 대리는 기꺼이 내부고발자로서 공익제보를 해줄 것이다. 그녀의 동정심에 호소하기 위해 나의 목소리는 극적으로 더 높아진다.

한편으로 나는 이들 중에 전영생 대표가 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무릇 어느 회사든 그 법인의 대표가 최종적인 법적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 이 정도의 대형 사고라면 누구보다 법인 대표를 직접 공략하는 것이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끌어낼 수 있는 전략이다. 이들에게 있어 나는 십 센티미터짜리 홀로그램, 팅커벨 요정에 불과하겠지만 내가 후크 선장이 누구인지를 효과적으로 파악해 그를 공략할 수 있다면 이 해적 모두를 손쉽게 물리칠 수 있다.

이 싸움은 그다지 어렵지가 않다. 저기 저 뚱뚱한 대머리 아저씨. 아까부터 누구보다 초조한 표정을 하고 나의 얘기를 듣고 있다. 주위의 다른 직원들도 중요한 얘기가 나오면 저 아저씨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다. 저 사람이 나에게 영생을 약속했던 전영생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거 봐라. 저 아저씨는 뚱뚱하네? 왜 디지털 트윈을 만들어서 다이어트 기능을 이용하지 않았지? 자기 자신조차도 이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는구나. 가만. 언젠가 인터넷 뉴스에서 마트료시카 시스템즈가 코스닥 상장을 앞두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것 같다. 그렇다면 더군다나 전영생 대표에게 이 사고는 보통 일이 아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겪은 일입니다. 그나마 저 조 대리님께서 디버깅을 시도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영원히 이 깜깜한 감옥 속에 갇혀 말라죽어 갔겠죠. 생각만 해도 너무나 끔찍하네요.”

자초지종을 마무리 지으며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짐작한 중요 인물인 조은혜 대리와 전영상 대표에게 눈을 마주친다. 그리고 묻는다.

“제가 가장 먼저 알고 싶은 부분은 이것입니다. 저를 어떻게 원래의 제 몸으로 돌려놓으실 겁니까? 장주몽_copy를 당장 이곳으로 불러다가 제 의식을 원래 제 몸으로 원상복구시킬 방법이 있기는 한 겁니까?”

그때 젊고 호리호리한 친구가 나서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다음번 장주몽_copy가 동기화를 하러 올 때, 선생님의 의식을 선생님의 원래 몸에 다운로드하면 됩니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연구소장이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그놈이 동기화를 하러 올지 어떻게 확신하죠? 그놈이 원본인 내가 여기 있는 줄 알면 이 시스템에 접속하려 하지 않을 텐데요.”

내가 묻는다. 아무도 대답을 못 한다. 그럴 줄 알았다. 이놈들. 정말 답이 없는 놈들이다.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고객님”

오랜 침묵을 깨고 고객지원본부장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애원한다. 침묵이 더 길게 이어지면 자신들의 위신이 더욱 깎이게 될 테니 일단 아무 말이나 내뱉고 보는 거다.

나는 기가 막힐 따름이다.

“‘어떻게든’이라뇨? 멀쩡한 사람이 한 줌도 안 되는 코드가 되어 버렸는데, 어떻게든 하겠다? 당신들 정말 무책임한 사람들 아닙니까?”

 

“놈은 꼭 올 겁니다. 놈에게 ‘프로젝트 딜라이트’를 제안하겠습니다.”

드디어 전영생, 대머리 뚱보가 무거운 입을 뗀다. 좋은 징조다. 대표가 나와 직접 협상을 하기 시작했다.

“사장님. ‘프로젝트 딜라이트’는 아직 연구 단계에...”

연구소장이 나선다.

“자넨 가만히 있게. 자네 모르게 나는 이미 여러 번 ‘프로젝트 딜라이트’에 접속했어. ‘프로젝트 딜라이트’는 이미 매우 안정적인 수준으로 구축되어 있지. 게다가 이 경우에는 우선 장주몽_copy를 유인하기 위한 용도이니 안정성과는 무관하다고 볼 수 있고.”

전영생이 말한다.

 

“‘프로젝트 딜라이트’가 도대체 뭡니까?”

내가 묻는다.

“저희 마트료시카 시스템즈가 개발한 가상 현실 서비스입니다. 고객 님들께서 디지털 트윈의 의식에 접속하시면 디지털 트윈은 오감이 느낄 수 있는 온갖 쾌락적인 상황들을 가상 현실 세계인 마트료시카 파라다이스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스릴 넘치는 체험들, 예를 들어 스카이다이빙, 심해 잠수, 우주 유영 같은 것들부터 폭력적인 체험들,예를 들어 생생한 슈팅 게임, 그리고 쾌락의 극치를 느끼게 하는 에로틱 모멘트 등, 고객님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험들을 제공할 겁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원본인 나 장주몽은 마트료시카 시스템즈가 이런 유혹을 하면 거기에 넘어갈 것인가? 대답은 생각할 것도 없이 예스다. 그렇다면, 나의 복사본인 장주몽_copy도 여기에 넘어오겠지. 말이 된다.

“저희가 상세한 소개 자료와 함께 여러 차례 장주몽_copy에게 ‘프로젝트 딜라이트’를 처음으로 경험할 최우수 고객으로 장주몽_copy가 선정되었다고 알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마 놈은 이리로 올 겁니다.”

전영생이 놈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나는 왠지 내 속마음이 들킨 것만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다.

“좋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내 몸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말씀하신 방법으로 신속하게 진행해 주세요.”

 

나는 전영생의 말에 동의하며, 한편으로 ‘보상’ 문제를 이 협상 테이블에서 마무리 지어야 할지 잠시 고민한다. 하지만 우선 몸부터 찾고 나서 보상 문제를 협의하는 게 유리하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제시하는 금액을 듣고는 이들이 나를 다시 포르말린 속 표본 두뇌로 처넣어 버리고 싶어질지 모르니까 말이다.

 

 

놈이 왔다!

그동안 무슨 맛있는 것들을 먹었는지 살이 포동 하게 올랐다. 놈은 발그스레한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올 쾌락을 기대하는 눈치다. 놈이 망설임 없이 침대에 눕는다. 그러고는 머리에 접속용 헬멧을 쓴다. 연구소장이 버튼을 누른다.

 

지~~잉~~

 

여기가 어디지?

들어왔다!

드디어 내 의식이 원래 있어야 할 곳인 내 몸으로 돌아왔다.

 

나는 벅찬 마음을 억누르며 내 팔과 손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홀로그램이 아니라 살과 피로 이루어진 실제 몸이다! 이 몸이 이렇게도 반가울 줄 몰랐다.

 

 

“놈은 꼭 폐기 처분해 주십시오.”

전영생의 방에는 찬란한 햇빛이 스며들고 있다. 나는 책상 위에 내 팔을 올려놓고 팔에 반사되는 햇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 말부터 뱉는다. 놈을 꼭 처치해달라.

“물론입니다. 장주몽_copy는 바로 딜리트 하겠습니다.”

장주몽_copy가 미워서만은 아니다. 그 누구든 살아 있는 의식이 통 속에 갇힌 두뇌와 심장, 다리만 갖고 트레드밀 위에서 살아가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장주몽_copy 본인도 삭제 되기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약속하신 대로 비밀 유지 계약서를 읽어보시고 사인을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영생이 고객지원본부장으로부터 계약서를 받아 건넨다.

나는 한 항, 한 항, 꼼꼼히 읽어 내려간다.

일반적인 비밀 유지 계약서 조항들이다.

중요한 항은 단 하나다.

내 눈이 그 부분을 찾아가 멈춘다.

 

‘마트료시카 시스템즈는 본 비밀 유지 계약의 유지 조건으로 장주몽에게 일시금 50억 원을 지급한다. 장주몽은 사망 시까지 본 사실을 비밀로 유지한다. 장주몽은 유언 등에도 본 사실을 언급하지 아니한다.’

 

50억? 내가 당한 고통에 비해 50억이 합당한 금액인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사람의 고통을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으랴. 하지만 50억이라면 나는 모든 기억을 삭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펜을 들어 사인을 한다.

 

 

서운하게도 아내는 내가 잠시 장주몽_copy였다가 다시 장주몽이 된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아내에게 복권에 당첨되어 50억 원이 생겼다고 대충 둘러댄다. 나는 훌륭한 인격을 가진 남편이다. 아내를 속이고 딴짓을 하는 그런 놈이 아니다. 나는 우선 건물을 하나 사서 임대료로 고정 수입을 만든 후, 나가던 직장을 때려치운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과 세계 전역을 돌아 다니며 즐긴다.

 

온갖 맛있는 것, 온갖 즐거운 것, 온갖 아름다운 것...허물어지지 않는 물질세계와 그것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감각기관을 가진 몸. 나의 몸! 이것이 이리도 소중한 것이었던가!

 

이 몸이 한 줌의 흙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나는 이 몸을 사랑하며 이 몸이 줄 수 있는 모든 기쁨을 맛보겠다. 다시는 노력 없이 주어지는 멋진 몸매와 회춘의 마법 따위에 기대지 않겠다. 그저 하루하루를 내 몸에 충실하게 살다가 때가 되면 흙이 되어 내가 원래 온 곳인 별로 돌아가겠다.

 

 

요즘 마트료시카 시스템즈로부터 자꾸 메일이 온다. 메일의 내용은 이러하다.

 

장주몽 고객님께.

항상 저희 마트료시카 시스템즈를 사랑해 주시는 고객님께 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고객님께서는 저희 마트료시카 시스템즈의 최우수 고객으로 선정되셨습니다. 이에, 고객님께 저희가 새로 개발한 ‘프리미엄 딜라이트’ 서비스를 무료로 무제한 제공해 드리고자 합니다.

‘프리미엄 딜라이트’ 서비스는 고객님께서 저희 마트료시카 파라다이스에 접속하셔서 고객님이 원하시는 그 어떤 즐거운 경험이든 현실보다 더 생생하고 짜릿하게 체험하실 수 있는 가상 현실 서비스입니다.

고객님이 원하시는 욕망, 원하시는 쾌락이 무엇이든 저희는 모두 생생하게 구현해 드립니다. 고객님과 저희만 아는 은밀한 시나리오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지금 바로 ‘신청하기’ 버튼을 누르세요.

 

늘 고객님의 친구인 마트료시카 시스템즈 올림

 

난 ‘신청하기’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나 원본 장주몽은 이런 식의 말초적인 욕망에 굴복하는 그런 천박한 인간이 아니다. 통 속의 두뇌였다가 겨우 내 몸을 찾아 돌아왔을 때 이제 다시는 마트료시카 시스템에 접속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나다. 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유혹해도 나는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의 내가 너무나 만족스럽다.

 

 

그러고 보면, 마트료시카 시스템즈라는 이 회사의 이름은 참 상징적이다.

인형을 열면 더 작은 인형이, 더 작은 인형을 열면 더 더 작은 인형이, 더 더 작은 인형을 열면 더 더 더 작은 인형이...

이런 식으로 계속 똑같은 인형이 나온다.

그렇다면 어떤 인형이 원본이고 어떤 인형이 복사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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