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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

 

 

 

나는 디지털 유해게시물 청소부다. 

전 세계 40억 인구가 이용하는 현시점 최고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 '오션'의 제7대륙 콘텐츠 모니터 요원.

 

"으악!"

오늘도 출근하자마자 저 뒤쪽에서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신입인가 보네? 이곳에선 업무 중 동료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혼절하는 것이 낯설지 않다. 나만 해도 첫날 받은 첫 신고 게시물이 10대들이 살아있는 이구아나 한 마리를 스테이크처럼 프라이팬에 구우며 칼질하는 동영상이었으니. 하지만 아무리 끔찍한 환경이어도 사람은 결국 적응한다. 동료들은 아무도 소리의 근원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그저 이번 건은 또 얼마나 창의적인 콘텐츠였는지 쉬는 시간에 슬쩍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내 이름은 페블. 도시에서 다소 벗어난, 지하철 종점에서도 셔틀을 타고 28분을 더 가야 하는 근교의 마케팅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명색은 마케팅 대행사지만 사실 이곳은 엄밀히 말해서 '마케팅' 회사는 아니다. 여긴 오션의 콘텐츠 모니터링 하청업체다. 제7대륙 국가들에서 업로드되는 수백 만개의 신고 게시물을 검토하고 관리하는 아웃소싱 허브.

 

오션처럼 글로벌한 SNS 플랫폼에는 매일 같이 불법적이거나 유해한 콘텐츠들이 무수히 많이 올라온다. 당신이 오션의 이용자라면 (당연히 그렇겠지만) 오션의 피드를 탐색하면서 동물 학대나 포르노, 잔인한 이미지 혹은 동영상에 눈살을 찌푸려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콘텐츠들은 곧 신고 게시물 리스트에 올라오는데, 모든 신고 게시물은 나와 같은 인간 모니터 요원의 검토를 반드시 거친다.

자동화해서 처리하면 편할 일을 왜 굳이 느린 인간이 맡아 하냐고? 인공지능의 필터링에 따라 죄다 삭제를 해서 해결된다면 참 좋겠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예를 들면, 백인 경찰이 흑인 소년을 총으로 쏘는 동영상이라고 치자. 이는 살인 또는 살인 미수에 해당하는 폭력성 짙은 게시물임이 확실하지만, 반드시 삭제될 콘텐츠인가 하면 보다 심도 높은 고민이 필요하다. 만약 이 게시물이 특정 지역의 인종 차별과 경찰의 과잉 진압을 비판하는 글이라면? 만약 주류 언론사에서 아무도 이 사건을 보도해주지 않아 보다 못한 시민, 곧, 오션 이용자가 공론화에 나선 상황이라면?

이런 경우를 위해 (아직까지는)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오션이라는 SNS의 존재 의미를 고려하면서도 이용자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현재의 기술로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지역별, 문화 및 사회정치적 맥락을 인간만큼 압축적으로 판독하기 어렵기 때문에 말이다. 게다가 이런 게시물들은 한두 건이 아니라 실리콘밸리 본사의 직원들이 단독으로 처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여러 현실적 조건을 따져봤을 때 오션은 각 대륙마다 나의 회사처럼 각 지역의 신고 게시물을 직접 검토할 수 있는 요원들을 두는 것이 효율적이라 판단했다. 아주 합리적인 결정이다.

그러니 하청업체 직원 주제에 유세 떤다고 생각지 말라. 나는 매우 큰 자부심을 갖고 일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오션의 푸른 터키옥색 로고 뒤에 우리 같은 요원들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지만, 난 글로벌 플랫폼의 전지전능한 권한을 위임받은 중재자니까. 이 불완전한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니까!

 

"분류: 음란물, 불법촬영물의 확률 87%."

"분류: 자해 및 자살, 신체 훼손의 묘사 정도 매우 높음."

오션이 제공하는 검토 도우미 AI 프로그램인 '니모'가 내 귓가에 속삭인다. 니모가 신고 게시물의 카테고리와 폭력성, 유해성의 정도를 알려주면 난 이를 기반으로 게시물이 커뮤니티 규정을 위반하는지 검열한다. 글의 경우는 사례마다 다르지만 사진은 평균 5초, 동영상의 경우 보통은 앞 10초, 뒤 10초면 어느 정도 삭제 여부가 판별 난다. 

쉽네.

얼굴이 모자이크 된 중년 남성이 4세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의 성기에 바비인형 머리를 쑤셔 넣는 영상이 뜨자 난 3초 만에 '삭제' 버튼을 누른다. 이렇게 선악이 분명하게 판가름 나는 게시물은 참 고마운 놈이다.

이런 끔찍한 광경을 보는데 '고맙다'고 말하는 게 이상하다고? 내가 악마처럼 느껴진다고? 나라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이 일을 시작했을 땐 상상도 못할 잔인함에 하루 딱 두 번, 15분씩 주어지는 황금 같은 휴식 시간마다 화장실 변기를 붙들고 토악질을 했다. 위액이 얼마나 역류를 했는지 목구멍이 다 까질 지경이었다. 

때론 중범죄를 넘나드는 게시물의 심각성에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요원들은 모두 오션으로부터 내려온 아주 두껍고 숨 쉴 틈 없는 비밀유지협약서에 서명을 하고 월급을 받는다. 그 말인즉, 당장 우리 집에서 범죄가 일어난다는 글을 봐도 난 그 내용을 경찰은커녕 내 부모, 정신과 의사나 상담사, 외부인 그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비밀유지협약을 어긴 요원들은 기밀 누설로 인한 오션의 피해금 전액의 10배를 배상해야 하는데…. 시간당 8달러를 받는 내가 천문학적인 돈을 무슨 수로 구한단 말인가? 글로벌 기업의 변호인 군단에는 어떻게 대항하고?

게다가 난 이곳에서 일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깨달았다. 인류애가 박살나는 유해 콘텐츠를 하루 수천 개씩 보는 것보다 더 고역인 게 따로 있다는 사실을.

"구구?"

"구오."

"아이고."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할 정도로 날카로워진 분위기 속, 회색 옷을 입은 관리자가 또각또각 굽소리를 내며 요원들의 부스 사이를 거닌다.

오전 11시 반. 바로 모든 요원들의 전일 실적이 발표되는 시간이다. 

"신속! 정확!"

처리 건수는 다다익선,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99%의 정확도. 이것이 오션의 눈치를 보는 이 허브의 방침이다. 연일 99%를 외쳐대며 실적 압박을 주는 센터 관리자를 우리는 '비둘기'라 부르는데, 게시물 검토의 정확도가 조금만 기준에 못 미쳐도 해당 요원은 비둘기와의 면담을 명 받거나 심하면 즉시 해고된다. 실적 발표 시간이 하필 점심시간 직전이라, 비둘기의 눈총을 받은 일부 요원들이 식사를 거르고 작업에 매진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페블, 이대로만 해."

트레이드마크인 30cm 투명 자로 실적 최하점의 요원들을 찍어내던 비둘기는 나에게만 슬쩍 윙크를 하고 지나간다.

초짜 시절엔 나 또한 비둘기의 압박에 배를 곯으며 눈이 빠져라 일했다. 매일 객관적 수치로 내 무능함을 증명받다 보니 꽃다운 20대의 정수리가 휑하니 반 민둥산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11개월째 실적 1등을 달리고 있는 지금, 허브의 실적 확인 시간은 그저 짜릿한 인정의 시간이다. 난 법정 최저임금보다 2배 높은 급여에 혹해서(이 지역의 최저시급은 약 3.75달러다), 혹은 ‘마케터’를 구한다는 구인광고에 속아서 온 대부분의 직원들과는 처지가 아주 다르다.

응? 똑같은 직급에, 똑같은 돈을 받고 일을 하면서 뭐가 다르냐고? 겨우 비정규직 알바 주제에 무슨 처지를 따지냐고?

모르는 소리 말라. 나, 페블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곳 하청업체의 아주 핵심적인 메리트, '골든 티켓'을 노리고 왔거든. 

 

매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글로벌 기업 오션은 전대륙에 고루 퍼진 아웃소싱 허브의 모니터링 요원 중 최고의 실적을 가진 단 한 사람에게 본사 입사의 기회를 준다. 그것이 바로 오션의 '골든 티켓' 제도다.

이 제도가 생긴지는 3년도 채 되지 않았다. 몇 년 전 오션의 하청업체 직원들이 연이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아프리카에서 4명, 북아메리카에서 3명, 아시아에선 2명이 업무 중 과로 및 자살로 숨졌다. 이렇듯 모니터링 요원들에 대한 처우가 문제가 되자 오션에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매일 전 직원이 최대 11분간 이용할 수 있는 '웰빙 프로그램'을 신설하는 것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복지와 연봉으로 유명한 본사로 특별 채용을 진행하는 정책을 세운 것이다. 수만 명의 요원 중 오직 한 사람만 채용하기 때문에 가능성은 몹시 희박하지만, 애초에 나로선 선택권이 많지 않다. 

국제 정세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북미나 서유럽, 몇몇 부유한 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제7대륙은 소위 말하는 ‘양질’의 일자리가 있는 지역이 아니다. 나름 대도시다운 도시가 있고 당장 굶어죽을 만큼 가난하진 않더라도, 제7대륙 대부분의 국가들은 소득과 교육수준 등의 지표로 보았을 때 여전히 개발도상국에 속한다. 나처럼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 작은 제조업 회사에 취직하거나 지방으로 내려가 선생이 되는 정도를 ‘성공’으로 여기는 것이 우리 제7대륙의 현주소라면 설명이 될까? 그러니 어쩌겠는가. 비영미권 유색인종, 상대적 빈곤국의 거주자가 무려 미국 본사의 커뮤니티 관리자로 입사할 수 있다는데 목숨이라도 걸어야지. 대학에서 사회윤리학을 전공한 나는 마지막 학기에 학과 선배로부터 이 하청업체와 골든 티켓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고, 졸업과 동시에 바로 이력서를 냈다. 여러 정황을 봤을 때 특히 올해는 대대적 시위를 비롯한 정치적 격변, 혐오 단체의 테러 이슈 등으로 제7대륙에서 TO가 날 가능성이 있으니 희망을 걸어볼 법 했다. 국력 없는 나라에서 썩기엔 너무나도 큰 꿈을 가진 나, 페블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

물론 예상대로 도전의 벽은 높았다. 골든 티켓 후보에 이름을 올리려면 계약기간 1년간 하루 평균 700건 이상의 게시물을 99% 이상의 정확도로 처리해야 한다. 점심시간 30분, 그리고 공식 쉬는시간 30분을 제외한 정규 업무시간은 8시간에 불과하니, 최소한 신고 게시물 1건당 평균 41초 이내로 실적을 내는 것이 필수이다. 당연히 이 기준은 그저 최소 조건이고, 실제로 골든 티켓을 얻기 위한 싸움은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다. 니모의 도움을 받는다 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아까도 살짝 언급했지만, 처음엔 내 실적도 아주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99%는커녕 수습 기간엔 92%의 정확도만 떨어져도 감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난 이내 시스템의 허점을 파악했다. 이 '정확도' 평가 방식은 알고 보니 내가 전일 검토한 게시물에서 무작위 샘플을 수십 건 뽑아 품질관리를 맡은 QA 직원에게 재검토를 맡기고 그와의 일치를 비교하는, 그러니까 일종의 코더 간 신뢰도를 계산하는 통계 방식을 사용한다. 그러니 난 그저 내 담당 구역의 QA 직원, 47세 남성인 이마누엘이 가진 성향을 분석하여 답안을 맞추면 되는 일이었다.

내 문화권의 남성성에 대한 연구, 그리고 몇 번의 항소(정확도 평가에 대한 클레임을 뜻함)를 거치자 난 이마누엘의 경향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나와 이마누엘의 도덕적 판단이 갈리는 기준(주로 여성과 성소수자, 이민자에 대한 이슈였다)에서 내 뜻을 굽히는 게 죽기보다 싫었지만, '더 큰 시스템' 안에서의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타협이 필요했다. 물론 이따금씩 나도 모르게 내 비대한 자아가 튀어나와 정확도를 떨어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곧 그 문제들은 오답이 아니게 되었다. 아마도 우리보다 겨우 0.5달러를 더 받는 이마누엘이 항소 처리 과정이 귀찮아서 날 봐준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실마리를 얻은 나는 더욱 업무에 매진했다. 수당 없는 야근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더 이상 셔틀을 타지 않았으며 가까이 사는 삼촌으로부터 중고 스쿠터를 한 대 얻어와 남들보다 빨리 출근하고, 또 남들보다 늦게 퇴근했다. 화장실 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설사약을 먹으며 배변활동을 조절했고, 생리 중에는 고무컵과 성인용 기저귀를 겹친 채 일했다. 그렇게 세 달 즈음이 지나자 내 몸은 물 없이 근무시간을 버틸 수 있게 되는 동시에 아예 무월경 상태가 되었다. 음, 지금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현상이다. 

피나는 노력의 결과, 11개월 3주차 기준으로 나의 실적은 일평균 처리건수 4017.4개, 정확도는 99.98%에 다다랐다. 적어도 제7대륙 허브에서는 전례 없는 신기록이다. 동료들, 비둘기들, 심지어는 센터장마저 이대로만 간다면 골든 티켓은 무리 없을 것이라고 모두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순항하고 있다.

12월 21일 오전 9시 정각. 업무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벌건 눈으로 모니터를 노려보는 난 홀로 중얼댄다.

“마지막을 불태우는 거야.”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딱 3일. 앞으로 딱 3일만 더 내 영혼을 갈아 넣으면 된다.

 

삭제, 삭제, 삭제.

 

음. 코피가 흐른다. 난 대수롭지 않게 탐폰을 콧구멍에 쑤셔 넣는다. 

 

또, 삭제, 삭제, 삭제.

 

입술 위 묵은 물집이 팡 터진다. 찝찌름한 고름 맛 물집을 수분 삼아 삼킨다. 내가 여기 왜 앉아있더라? 아, 맞다.

 

환경미화원, 폐기물 처리사와 특수 청소부가 없는 사회를 상상해 본 적 있는가? 

극한의 환경에서 세상 사람들 모두가 기피하는 오물을 다루는 그들이지만, 그들이 일주일만 제 역할을 해내지 않아도 도시의 주거지는 역겨운 암모니아와 음식물 썩은내, 그리고 오만 쓰레기가 넘쳐흐르는 난장판이 될 것이다. 떠올려보라. 대기질과 수질은 유해 가스와 화학 물질로 오염되고, 날파리와 해충이 우리의 촉촉한 눈가로 달려들어 갖은 질병을 전염시키는 그런 끔찍한 미래. 나 또한 이 같은 최악의 미래를 막기 위한 전선에 서 있다. 단, 내가 정화하는 곳은 물리적인 현실 공간이 아니며, 내가 처리하는 쓰레기는 재활용되거나 땅속에 묻히는 류의 물건이 아닐 뿐이다.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 하에 디지털 공간을 표류하는 극악의 쓰레기들. 40억 이용자를 지옥으로 이끄는 오션의 유해한 정보들은 나를 통해 삭제되어 이 세상에 없었던 존재가 된다. 난 기꺼이 모두의 행복과 권리를 위해, 비교적 ‘무해’하고 안전한 광장을 제공하기 위해 오션의 광고판을 닦아준다. 지금은 하잘 것 없는 모래알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거대한 판의 규칙을 정하는 인물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러니 이 정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야.

 

“있지, 난 이제 모든 것이 다 몰카로 보여.”

함께 점심을 먹는 중에 밋지가 말한다. 요원들이 검토하는 콘텐츠 카테고리가 고정된 건 아니지만, 니모는 되도록이면 요원별로 정확도가 높은 카테고리를 리스트업한다. 홀로 엄마와 동생 셋을 먹여 살리는 밋지에겐 주로 불법 음란물이 검토 요청되는 모양이다.

“분명 내 두 눈으로 보는 현실인데, 샤워를 하고 거울을 보고 지하철을 타는 모든 순간이 일종의 몰카 필터를 쓴 것 같달까? 오늘 아침엔 혹시 모를 카메라를 찾는다고 집 화장실을 한바탕 엎어버렸어. 내년에 3년 차만 채우면 바로 QA로 지원할까 해. 참, 저작권 파트도 살만하지?”

시들한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밋지는 유진을 쳐다본다. 

“뭐… 저희는 대신 시급이 낮으니까요.”

지적 재산권 모니터링을 주로 맡는 유진이 머쓱하게 고개를 숙인다. 이 그룹 중 유일하게 고졸인 유진은 (허브는 나름 배운 자들의 직장이다!) 비교적 우선순위가 낮은 신고 게시물을 다루는 부서로, 다른 모니터링 요원들보다 시급 2달러를 더 적게 받는다. 어차피 대부분의 판독은 인공지능이 해내고 인간은 항소나 규정 체크만 하는 추세니 밋지가 무시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여기서 그 정도 스트레스면 양반 아닌가? 견디기 싫음 그만 둬야지, 뭐.”

나는 단호하게 말하지만 곧 내가 한 말을 조금 후회한다. 돈이 꼭 필요한 밋지 같은 친구 앞에서 뱉을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뒤늦게 스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밋지는 착하게도 그런 나를 치켜세워준다.

“그래도 넌 좋겠다, 페블. 곧 본사로 가게 되면 고생 끝 아니야?”

“맞아요. 실리콘밸리에 살게 되는 거잖아요.”

세계 최고의 복지로 유명한 오션의 본사. 그곳의 정문을 당당하게 열어젖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벅차오르면서도 급격히 불안해진다. 대충 겸손한 답변으로 대화를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옆에서 동굴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는 뭘 하든 잘 할 거야.”

우리의 대화에 묵묵히 끼어든 사람은 바로 내 절친한 파트너, 네이선이다.

보통 일을 오래 한 요원들의 표정은 세 가지다. 멍하거나, 울상이거나, 격앙되어 있거나. 가끔 아주 평안한 얼굴을 하며 웃는 동료들도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의무 상담 결과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난 그들이 내 경쟁자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경계했지만, 다행히도 사이코패스들은 정확도 점수가 현저히 떨어지거나 응답 분포가 이상점에 위치해 얼마 가지 않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두곤 했다.

네이선은 위의 세 경우, 그리고 사이코패스 위험군에도 속하지 않는 유일한 동료다. 그는 커다란 몸집을 가졌으며, 다양한 인종과 성별, 연령대가 일하고 있는 이곳 제7대륙 허브에서 손꼽힐 정도로 건강하다. 나보다 2년 먼저 모니터링 요원 일을 시작한 네이선은 꾸준히 보통의 실적을 유지하고 있는데, 평상시에 웃지도, 그렇다고 화나 보이지도 않는 아주 평범한 표정을 하고 있다. 적당한 호의와 적당한 무관심, 적당한 스트레스를 가졌달까? 게다가 그 몸…. 보통 허브에 온 지 서너 달이 지나면 한때 탄탄했던 몸도 죄다 녹아내리기 마련인데, 이 청년은 어쩐지 점점 더 단단해지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업무 이외의 모든 시간을 운동에 쏟는 모양이다.

"고마워."

내가 감사를 표하자 네이선은 쑥스럽게 씩 웃는다. 아, 아름답다. 이 청년이 없었다면 나도 진즉 정신병으로 허브 옥상에서 뛰어내렸을지 모른다.

그의 숨 트이는 미모를 보자 갑자기 피가 화끈거린다. 나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곤 네이선에서 슬쩍 눈짓을 한다. 우리는 점심시간을 15분 남겨놓고 황급히 자리를 뜬다.

허브의 비상계단은 섹스하기에 그닥 좋은 환경은 아니다. 일단 지나치게 음습하고, 특히 점심시간엔 층층마다 이미 누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빈 통로를 찾기가 힘드니까. 하지만 그건 그다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우리 요원들은 언제나 극강의 스트레스를 견디고 있고, 그래서인지 서로의 일탈을 눈감아주자는 모종의 합의가 되어있다. 북미에선 직원들이 업무 중에 마리화나도 핀다지만 안타깝게도 제7대륙은 마약 규제가 빡빡한 편이라 스트레스를 빠르게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누군가를 죽이거나 자살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오르가즘은 썩어빠진 우리의 정신과 심장을 되살리는 최고의 자연 진통제다! 겨우 요가와 명상 따위를, 그것도 인공지능의 판단에 따라 4분에서 11분 행할 수 있는 ‘웰빙 프로그램’ 따위보단 훨씬 효과적일 수밖에.

“있지, 페블.”

여기저기 얽힌 신음 소리가 울려 퍼지는 와중에 네이선이 입을 연다. 오, 난 대화가 없는 편을 선호하는데.

나는 시계를 보고 네이선의 등을 툭 친다. 그는 바로 내 신호를 알아듣고 나의 필살의 지 스팟으로 달려간다. 왼손으로는 내 골반과 엉치 사이를 있는 힘껏, 오른손은 내 머리칼을 두피에 긴장이 느껴질 정도로만 살짝 비틀어 잡고, 10, 9, 8, … 타임아웃! 언제나 그렇듯 정확하게 내 욕구에 따라주는 소중한 존재, 네이선. 바깥세상에서 꽤나 자유롭게 사람을 만나봤지만 이토록 내 오르가즘에 협조적인 이를 찾기는 쉽지 않다. 덕분에 나는 상쾌하게 정화된 심적 상태를 되찾는다.

“후….”

눈을 감고 옥시토신의 폭죽놀이를 음미하는 일도 잠시. 거친 숨소리 사이로 네이선이 나와 눈이 마주치길 기다리는 것이 느껴진다. 안돼, 이 평화를 유지해야 해!

나는 여운 있게 내 팔꿈치를 어루만지는 두터운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선수를 친다.

“나 집에 전화할 일이 있어. 먼저 갈게!”

와우, 누가 들어도 뻔한 거짓말이다.

멍한 얼굴의 네이선을 뒤로하고 난 계단 위로 도망친다. 나도 안다. 내가 너무하단 거. 하지만 어쩌겠는가? 현재 내 인생에 있어서 연애의 중요도는 꼴찌. 나에겐 집중해야 할 더 큰 일이 있고, 친구 겸 스트레스 조절기 이상의 관계는 바라지 않는다. 

올해 안에 골든 티켓을 꼭 따야만 하니까.

 

어느새 일층까지 뛰쳐온 난 로비의 공중전화박스 앞에 줄을 선다. 서너 명의 직원들이 자기 차례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대충 시늉만 내다가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막상 전화기를 붙든 사람들을 보니 집에 연락을 하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기억난다. 

…이왕 온 김에 진짜 전화나 할까?

난 박스 앞에서 괜히 서성인다. 하지만 이내 뒷사람에게 줄을 양보하고 로비를 멀찍이 돌아 나온다. 그래. 입금이나 잘 하면 됐지. 괜히 엄마에게 또 싫은 소리를 들을 여유는 없다. 

터덜터덜 내 부스로 돌아온 나는 업무 시간에 딱 맞춰 자리에 앉는다. 곧 내 손에 ‘무’의 세계로 사라질 새로운 쓰레기들이 니모에 의해 줄 세워져 날 기다리고 있다.

손깍지를 끼고 천장을 한번 바라본다. 심호흡 세 번. 

페블, 이제 3일 남았어. 막판 스퍼트야! 

계단에서 채운 엔도르핀의 힘으로 최대한의 기운을 쥐어짜낸다. 내가 누구다? 바로 세계 최강의 빗자루, 쓰레받기, 에프킬라, 매직블록!

 

12월 21일 오후 12시 30분.

애써 동기부여를 마치고 마침내 팽팽하게 뒤로 꺾였던 목이 다시 모니터를 마주 보았을 때, 나는 오랜만에 심장이 철렁임을 느낀다.

 

"응?"

 

러닝타임 00:34. FHD 동영상. 늦은 밤, 가로등, 익숙한 길가…. 황량한 아스팔트 무인도 안에서 유일하게 생명력을 뽐내는 파릇파릇한 버드나무가 주황빛 가로등에 희미하게 물들어 있는. 그 뒤로 문을 닫은 채 최소한의 조명만 남기고 고요해진 우리 제7대륙의 허브 건물이 보인다. 뭐지? 허브 맞은편 CCTV 인가? 어둠은 목소리를 남기지 않고, 나는 점차 귀를 쫑긋인다. 간간히 들리는 바람소리를 제외하곤 정지화면에 가깝다. 나는 마우스 커서를 동영상의 20초 지점으로 당긴다. 딱히 별다를 게 없는데…. 

 

쾅! 

 

나는 순간적으로 내 입을 틀어막는다. 내가 지금 앉아있는, 우리 모두가 앉아서 컴퓨터 화면을 노려보고 있는 이 허브가 폭발한다. 난 서둘러 캡션을 확인한다.

 

‘이 동영상은 곧 현실이 됩니다.’

 

나는 침착하게 다시 폭발 지점을 반복 재생한다. 쾅, 쾅! 다시, 쾅! 아, CG다. 그것도 불꽃이 파편 없이 터져나가는, 레이어가 참 조잡한 CG.

이딴 걸 만들 시간에 일이나 하지, 참. 

가뜩이나 바쁜 와중에 짜증이 팍 솟구친다. 분명히 이 게시물은 내부자의 소행이다. 허브 직원들의 게시물 테러는 비상계단에서의 섹스와 결이 같은 행동이다. 가끔 본인들이 재치 있다고 착각하는 미친놈들이 서로를 놀래기 위해 허브와 관련한 농담을 일부러 오션에 업로드하곤 하니까. 그러니까 넌 허브를 날려버리고 싶다 이거지? 그래, 나도 그 마음 안다.

난 가차 없이 '삭제' 버튼을 누른다. 근거는 '괴롭힘 조장'. 

유치원생이 만들어도 이것보단 리얼하겠구만. 화는 나지만 이깟 저급한 장난질은 빨리 치워버리면 그만이려니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똑같은 게시물이 바퀴벌레처럼 죽지 않고 계속 나의 리스트에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이딴 재미도 감동도 없는 영상을 가지고 왜 애먼 요원들을 괴롭히는 건지. 대체 누가 장난을 치는 거야? 이 새끼 혹시 해고된 놈 아냐?

난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끈질기게 삭제 버튼을 클릭한다.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와, 또? 

오후 5시 반쯤 되어 서른 댓번째 게시물이 올라올 때였나. 녀석의 지나친 끈질김에 문득 내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스친다. 

잠깐. 설마 이게 진짜 '테러' 예고면 어떡하지? 여태 서른 건도 넘게 삭제 조치를 취했는데…. 혹시 외부에 알려져야 마땅한 정보라면? 그래서 내가 하루 종일 잘못된 검토 결과를 내놓은 거라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골든 티켓 발표까지 54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이제 와서 정확도가 떨어지면 내 숫자가 엉망이 될 텐데….

나는 다급해진 마음에 복도를 휘 둘러본다. 지금 즈음이면 모니터링 요원들을 제외한 다른 직원들은 슬슬 퇴근 준비를 하고 있을 테지. 지금이라도 이 게시물을 테러 전담의 주제 전문가, 허브의 SME 직원에게 전달할까도 했지만 그들이 이런 식의 확인 요청을 결코 반길 리 없다. 일전에 폭발물 제조 튜토리얼이 검토 요청 되어서 문의를 남겼을 때 날 얼마나 한심하게 보았는가. 게다가 5시 반이 넘어서 들어가는 요청이라? 오, 그건 싸우자는 거다.

난 또 다른 권위에 기대 보기로 한다.

"니모, 이 게시물이 '테러' 범죄 예고일 가능성은?"

"분류: 합성 영상. 위험도 낮음. 캡션은 유행이 지난 '밈' 추정."

평소에 니모의 의견을 무시하곤 했지만 지금은 결정을 회피하고 싶은 순간이다. 그래, 오션 너네가 노래를 부르는 인공지능이 아니라잖아. 

난 다시 내 본연의 업무에 집중한다. 길고양이가 공업용 분쇄기에 갈리고 깡마른 소년병이 지뢰에 터지는 화면이, 들어본 바 없는 류의 신음이, 뇌를 찌르는 상대의 웃음소리가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최소한의 불빛만이 허브를 비추는 자정까지 그 동영상은 다시 올라오지 않는다. 

난 어두운 동영상 속 길가를 거쳐 홀로 퇴근한다.

 

12월 22일 오전 8시 20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다.

어제 그 동영상은 봄에 촬영된 거구나. 황갈색으로 축 늘어진 허브 정문의 수양버들 가지를 보니 새삼 지금이 겨울임이 실감난다. 신선의 옷자락처럼 휘휘 날리는 이파리들이 퍽 자유로워 보인다. 매일 스쿠터를 타고 지나쳐온 길목임에도 새삼스러운 감상이다.

“며칠 안 남았네? 건강 챙겨가며 해.”

내가 바삐 주차장을 가로지르자 경비 아저씨가 출입구를 쓸며 말을 건넨다. 난 아저씨에게 빚진 것이 많다. 솔직히 아저씨가 퇴근할 때마다 몰래 카드 키를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관리자들도 자신들의 실적을 위해 이를 용인한 셈이지만) 직급이 높지 않은 내가 새벽에 허브를 드나드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유, 젊어서 좋은 게 뭐예요.”

난 한껏 선하게 미소 지으며 아저씨의 호의에 능글맞게 답한다. 그대로 여느 날과 다름없이 보안실에 휴대전화를 제출한 뒤 출근 카드를 찍으려는데, 불현듯 어제의 동영상이 뇌리에 스친다.

혹시…? 난 성큼성큼 문가로 돌아간다.

“저, 아저씨!”

“응?”

“여기 입구 앞에 카메라가 있다거나, 밤에 이상한 사람이 돌아다니거나 하지는 않죠?”

내 뜬금없는 질문에 아저씨는 비질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둥글게 쏘아붙인다.

“야밤에 여기 알짱거리는 바보는 너밖에 없다.”

“아하하. 그렇죠?”

난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푸드덕 털어낸다. 맞아, 어제 그 동영상은 가짜야. 우리 일이 그런 거잖아? 난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그깟 저급 장난 따위에 좌우되지 말자. 여긴 허브고, 난 안전해.

 

주간 센터의 서버는 오전 9시 정각에 일제히 켜진다. 탕비실에서 인스턴트커피를 잔뜩 타온 난 평소처럼 책상 앞에서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다. 슬슬 셔틀을 타고 온 다른 동료들도 자리에 앉는다. 

오늘도 가보는 거야!

8시 59분 57초, 58초, 99초, 땡!

어제의 찝찝함은 옛 일이다. 나는 다시 귀신처럼 업무에 집중한다. 

 

러닝타임 11:34, 9:16 세로 동영상, 스마트폰 촬영. 화질 다소 떨어짐. 카메라가 한 여성의 뒷모습을 촬영하며 지하철역으로 따라들어온다. 아직까지는 노출 없음. 10초 뒤로 가기, 10초 뒤로 가기…. 여성은 긴장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화장실로 황급히 걸음한다. 마우스 커서를 6분 10초경으로 옮긴다.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박힌 채 강간 당하고 있는 여성. 청바지 찢김, 의식 희미함. 흔들리는 화면, 위로부터 눌러 찍는 앵글, 페니스 모자이크. 아, 뻔하네.

 

…잠깐만. 

 

나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본다.

6:34, 6:35, 6:36…. 

"악!"

짧은 성폭행을 끝으로 여성은 화장실 타일 위로 내동댕이쳐진다. 퍽 퍽. 힘없이 축 뒤집힌 채 준비된 스패너로 가격 당하는 여성의 머리카락 아래, 낯익게 부루퉁한 입술이 비친다. 

 

밋지, 밋지의 얼굴이다. 

 

내 비명소리는 센터의 분주한 타자 소리, 마우스 소리에 묻힌다. 페블? 페블이 웬일이지. 내 근방 동료들의 뒤늦은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나는 즉시 관리자를 호출한 뒤 게시물을 포워드한다. 허브 건물을 폭파하겠다는 농담은 그럭저럭 봐줄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이건 도를 넘었다. 

 

- 내 사무실로 - 

 

밋지의 주검 옆으로 메시지가 뜬다. 나는 관리자 사무실인 부스 쪽을 쳐다본다. 비둘기가 이리 오라고 손짓한다.

“페블, 무슨 일이야?”

내가 분노에 싸여 부스로 들어서자 비둘기는 의아한 듯 묻는다. 상급자 눈치를 보는 건 물론, 작업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관리자 호출을 되도록 지양하던 나다.

“제가 포워드한 동영상 보셨어요?”

“지금 체크하던 중이야.”

“밋지…. 밋지예요!”

비둘기는 툭, 툭 바를 건너 뛰어가며 동영상을 빠르게 훑는다. 그러곤 여성의 얼굴이 가장 잘 나오는 화면을 정지시키곤 잠시 고민한다.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밋지를 닮았다고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지?”

무슨 상관이냐고? 애써 침착한 척하려던 내 일말의 노력의 비둘기의 무심한 한마디에 날아간다.

“저 사람이 밋지를 살해했잖아요! 우리가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지금 당장 밋지를 만나야겠어요.”

"잠시만."

비둘기는 전산망 어딘가를 클릭하곤 타자를 탁탁 친다. 그리고 모니터를 자기 쪽으로 슥 돌린다.

“밋지는 어제 자로 그만뒀다고 나오는군. 몰랐나?”

밋지가 그만뒀다고?

나는 당황한 채 부스 창문 너머로 밋지의 자리를 찾는다. 이곳 부스에선 감시탑처럼 모두의 자리가 내려다보인다. 비둘기의 말이 맞았다. 분명 밋지가 있어야 할 자리엔 다른 누군가가 채워져 있다. 비둘기는 내 무례함을 한번 봐준다는 듯 푹 한숨을 쉬고 답한다.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이게 밋지라는 보장은 없어. 딥 페이크 앱에서 3달러만 내면 이 정도 합성은 가능하다고. 허브 놈들이 이런 식으로 농담하곤 하는 거, 페블 너도 알잖아.”

“하지만 혹시 모르니 신고라도….”

“너. 비밀유지협약을 잊은 건 아니지?”

비둘기는 엄한 눈으로 마법의 단어를 뱉는다.

오, 왜 모르겠나. 그 대단하신 NDA를.

비둘기는, 이 하청업체는, 그리고 오션은 알고 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감히 비밀유지협약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을. 허브는 오션의 ‘선진적인’ 문화를 차용해 사원들 각자의 본명 대신 영미권의 별칭을 사용하도록 사내 규칙을 세웠다. 상호간 인종초월적, 수평적인 관계와 업무의 편의를 위해서라지만 난 그들의 진짜 의도를 뼈가 시리도록 실감한다. 이 회사에 ‘나’는 없다. 진짜 ‘나’는 협약과 내규를 명목으로 지워진 비밀이며, 난 ‘밋지’에 대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얘기할 수 없다.

진짜로 ‘밋지’가 죽었대도, 이 게시물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증거물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결국 더 항의하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온다. 일개 사원이 허브에서 공식적으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이게 끝인 셈이다. 

그래, 며칠만. 며칠만 더 참으면 돼. 

현실을 바꾸기엔 아직 힘이 없는 난 억울함으로 끓는 마음을 애써 다독인다. 바싹 마른 입술이 부르르 떨려온다. 난 굳은 손으로 버튼을 누른다.

 

삭제.

 

12월 22일 11시 30분. 일평균 처리건수 4020.1개, 정확도는 여전히 99.98%. 

오전의 짧은 반항이 지나가고, 어김없이 실적 발표의 시간이 다가온다. 밋지의 일로 심장이 두근대는 와중에도 견고한 나의 실적을 보니 묘한 안심이 든다. 그래, 일이랑 밋지 일은 별개니까.

센터 벽에 붙은 커다란 전자시계에 12:00:00이 떠오르자마자 나는 지하의 카페테리아로 달려간다. 유진과 네이선이 일하는 층은 나의 센터가 위치한 곳보다 낮아서, 그들은 언제나 먼저 내 식사를 받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 

“밋지가 그만뒀대. 우리 밋지를 찾아야 해.”

나는 의자에 제대로 앉기도 전에 헉헉대며 외친다.

“그럴 것 같았어.”

네이선이 중얼대며 나의 샌드위치 랩을 벗겨준다. 그럴 것 같았다고? 언제 나를 빼고 퇴사 얘기를 나눈 거지?

내 눈매가 매의 꼬리처럼 솟아오르자 유진이 침울하게 설명한다.

“페블. 밋지는 계속 일을 힘들어했어. 언제 그만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일이 안 힘든 사람이 어딨어! 다 참고 견디는 거지!”

네이선과 유진이 어색한 표정을 주고받는다. 내 말이 무례하게 들렸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난 재빨리 본론으로 들어간다.

“내 말은, 아까 아주 끔찍한 게시물이 올라왔단 말야.”

난 주변을 살피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소곤댄다. 

내 우려 섞인 자세한 설명에 유진과 네이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일인 맞아? 딥페이크 아니고?”

네이선이 묻는다. 나는 화면의 리얼함과 딥페이크 확률이 46.7%에 불과했던 (모두가 이게 높은 확률이라 말하지만, 인간인 나의 모든 촉이 아니라 말하고 있다!) 니모의 분석 결과, 그리고 비둘기에게 다소 대들었던 일까지 모조리 고백한다. 네이선은 심각한 표정으로 ‘음’하고 소리를 낸다. 

“하지만 그게 딥페이크가 아니더라도, 정말 ‘밋지’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어떻게 확인해?”

“그야….”

유진의 질문에 나는 허를 찔린 듯 뇌가 멈춘다. 보통의 직장 동료 사이라면 아주 간단할 문제다. 전화를 걸면 되잖아? 하지만 우리는 서로, 아무의 연락처도 소장하고 있지 않다. 명색이 동료고 매일 점심을 함께 먹는 친구지만 우리는 전화번호는커녕 서로가 어디에 사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곳에서 직원들 간 사적인 만남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고, 금지가 아니더라도 밖에서까지 동료를 만날 여유는 없었다. 어차피 우리가 나눌 이야기는 오션의 거지같은 게시물과 모니터 요원들의 망할 처우, 그러니까 정리하면, 비밀유지협약을 깰 각오를 하지 않고서야 절대 허브의 담장을 넘을 수 없는 ‘비밀’들뿐이니까.

현실을 깨닫자 생각이 멈춘다. 그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날 설득한다.

“들어봐. 이게 실제 상황이고 실제 범죄라면, 유사한 게시물 검토 요청이 수십 개는 더 올라왔을 거야. 그리고 인터넷 뉴스에라도 한 줄 보도가 되었겠지. 일단 진정하고 퇴근 후에 검색해 보도록 하자. 나도 찾아볼게.”

예리한 지적이다. 네이선의 차분함은 가끔 놀라울 정도로 나를 가라앉힌다.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우리가 몸담는 이 허브, 그리고 오션의 디지털 쓰레기들은 대체로 가짜 뉴스다. 모든 전자기기를 제출하고 철저한 고립 속에 일을 하는 우리지만, 우리는 이상한 방식으로 세계와 매 초 연결되어 있다.

나는 들릴 듯 말 듯 중얼댄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거야.”

나는 다시 자리로, 또 야근 후 집으로 돌아간다. 밋지로 추정되는 여성의 동영상은 다시 업로드 되지 않았고, 뉴스를 검색한 결과 내가 사는 지역 그 어디에서도 유사한 범죄는 일어난 적이 없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씁쓸함과 안도감, 그리고 불현듯 공포가 뒤섞인 채 나는 새벽 3시에 잠에 든다. 더 대항하지 못한, 침묵해버린, ‘삭제’ 버튼을 누른 죄책감을 몰래 묻으면서.

 

12월 23일 새벽, 이브까지 하루 전.

나는 꿈을 꾼다. 이 꿈에서 나의 일평균 처리 건수는 얼마나 될까? 정확도는?

깨진 십자가, 자그마한 페니스, 38구경 리볼버. 음, 강간이 이렇게나 많이 일어나다니. 커터칼로 제왕절개를 당하는 모견의 절규, 전쟁 노예를 타고 노는 군인들, 고데기에 데이는 왕따, 물뽕과 미프진, 그리고 유해 화학물질 판매글. 또 포르노, 강간, 포르노, 강간. 잠시만. 둘을 어떻게 구분하더라? 삭제, 반려. 섹제, 아니, 삭제! 끓는 기름에 튀겨지는 젊은 여자, 소스 배합기에 빨려들어가는 원숭이. 오, 그 반대인가? 잠깐만. 이게 꿈인가? 게시물인가? 칼로 썰리는 저 인간이 바로 난가? 악! 아니야!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출렁이는 흰 가슴, 그리고 그 가슴으로 만든 물컹한 침대 위에서 뒤척이는 나. 그러다 늦잠을 자고, 중앙선을 침범한 4.5톤 화물차에 천장이 바사삭, 통나무에 갈비뼈가 콰지직! 내가 사고를 당한 건가? 아, 이건 게시물이지. 다음 블랙박스 영상으로 넘어갈까요? 초침의 짤깍대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벌써 99초네? 9시 정각이 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허브에 도착한다. 어디에 차를 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는 아침이다. 아니, 점심인가? 

 

점심? 아, 네이선!

 

정신을 차려보니 난 부스에 앉아있다. 내가 언제 출근을 했더라?

“페블, 여기야!”

뒤늦게 시계를 보고 서둘러 카페테리아로 내려가니 네이선이 나를 향해 뛰어온다. 내가 3분이나 늦었는데 그는 여전히 빈손이다.

“나도 봤어, 봤다구!”

“응? 무슨 말이야?"

네이선은 거칠게 내 손을 낚아채곤 비상계단으로 향한다. 밥까지 거르자고? 좀 피곤한데….

“누군가의 집에 강도가 든 동영상이 검토 리스트에 올라왔어.”

아무도 없는 계단의 구석에 다다르자 그는 숨을 헐떡이며 소곤댄다.

“처음엔 그냥 연출된 장면인 줄 알았어. 벽 쪽 구조물에 카메라가 설치된 평범한 몰카 구도였거든. 강도는 저항하는 집주인을 식칼로 찔러 죽였고, 노트북과 금품을 모조리 훔쳐갔는데….”

“그런데?”

“유진이었어, 페블. 그 집주인은 유진이었다고.”

나와 네이선 사이에 처음으로 정적이 흘렀다. 아냐, 우연일 거야. 나는 최대한 희망적인 회로를 돌려본다.

“우리 다시 식당으로 가보자. 어쩌면 유진이 올지도 모르잖아.”

내 밝은 대꾸에 네이선은 깊게 심호흡하고는 고개를 젓는다.

“그 애는 오지 않아.”

“아냐! 혹시 모르잖아.”

“…페블.”

“저작권 팀에 한번 가보는 건? 그게 몇 층이더라….”

“유진은 여기 없다고.”

그의 무거운 목소리가 폐쇄된 천장을 타고 울리자 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다. 네이선은 나의 말에 반기를 든 적이 없다. 하지만 왜? 왜, 지금?

억울함에 눈물이 고인다. 가상인지 현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어쨌든 우리의 친밀한 동료들이 개죽음을 당하는 동영상이 유해 게시물의 탈을 쓰고 나타났다. 그리고 오션은 이 일을 철저하게 방관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니, 아무것도 없는 게 맞아? 이건 누군가의 장난으로 치부할 만큼 가벼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난…. 나부터도 이미 밋지의 동영상을 영영 지워버렸는걸.

내 머리 뚜껑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려 하는 순간, 손바닥 위에 얇은 무언가가 바스락댄다.

“금지된 일인 거 알지만….”

섬뜩한 직감이 등골을 타고 오른다.

난 내 오른손 안에 쥐어진 쪽지의 정체를 눈치챈다. 동그랗게 내 손을 감싸는 네이선의 손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타오른다.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신고를 해달라는 뜻이야?”

난 눈치를 팔아먹은 사람처럼 순진한 얼굴로 묻는다. 네이선의 견고한 짙은 눈썹이 미간으로 모인다.

“그런 것만은 아닌 거 알잖아.”

“…….”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자. 서로를 치유해 주는 거야.”

“...뭐라구?”

“난 너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페블. 이 허브를 벗어나서, 어디에서라도.”

시간의 흐름이 멈추고 뇌가 새하얘진다.

허브를 벗어난다고?

9개월 전, ‘웰빙 프로그램’으로 신설된 요가원에서 아주 타이트한 운동복을 입고 고요히 스트레칭을 하던 네이선. 난 처음 그를 발견했을 때 마치 달 탐사에 성공한 옛적 우주비행사처럼 짜릿한 정복감을 느꼈다. 난 그에게 다가갔고, 이후로 네이선은 언제나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난 나의 분노, 억압, 조울, 불안과 때론 과한 희열까지 전부 묵묵히 받쳐주는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난 그와 쌍방으로 녹아들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 어스름한 새벽에 같이 눈을 뜨고 같이 출근하고 같은 가로등 아래 같이 차를 타고 돌아와 간단한 저녁거리와 와인 한잔을 기울이는, 그런 평범한 일상이라.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온다. 그와의 데이트에서, 그와의 식사 자리에서 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비상계단 밖에서 주어진 수많은 시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오션의 해양 쓰레기 이야기 외에 이 남자와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게다가 내가 본사에 간다면…. 

아, 난 확신한다. 네이선은 나와 다르다. 내 인생엔 오션과 골든 티켓을 향한 내 꿈이 전부지만 네이선에겐 아니다. 그에겐 분명 오션 이외의, 허브 밖의 인생이 있다. 그는 나라는 존재를 위해, 나에게 맞지 않는 아주 작고 갑갑한 철장을 마련해 두었다. 큰 꿈도, 몰입도 없는 안정적인 삶. 그리고 독가스처럼 서서히 날 마비시키겠지.

 

본명, 연락처, 주소. 

 

난 공포스러운 기호들이 적힌 작은 종이 쪼가리를 그의 탄탄한 복직근 위로 밀어낸다.

난 네이선을, 이 남자를 모른다.

“지웠어?”

“응?”

“유진이 나왔다는 그 영상, 삭제했냐구.”

그의 말에 똑바로 대답하는 대신, 난 취조를 하는 검사처럼 무섭게 읊조린다. 유진이 아니라 내가 살해당하는 장면이 나왔어도 넌 게시물을 삭제했을까? 오션의 강압을 뚫고 날 살리겠다고 나섰을까? 내 죽음의 진실을 알리고자 게시물을 퍼뜨리고 경찰에 신고를 넣을 수 있었을까? 날 추적할 수 있었을까?

묻는 나도, 침묵을 지키는 너도 모두 정답을 알고 있는 질문. 우리 둘의 잘못이 아닌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난 비겁하고 잔인하고 치졸하게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가슴 깊숙한 곳이 쓰라려온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고통을 삼키고 버티거나, 혹은 떨어져 죽는 것뿐이다. 난 절벽을 달리는 말 위에 서 있다. 

“너 정말 무심하구나.”

낯선 자의 건실한 얼굴에 깊은 실망감이 스친다. 내가 한때 애정 했던 힘 있는 그의 갈색 입술이 얇게 떨리고야 만다.

허브 곳곳에 점심시간 종료 5분 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난 입을 꾹 닫고 그의 세계가 무너지는 냄새를 최선을 다해 뿌리친다. 그리고 다시 오션으로, 내 작은 자리로 도망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12월 23일 오후 10시 40분.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핏줄이 선 눈으로 신의 가호를 위한 마지막 시련을 견디고 있다. 때론 웃으며, 때론 눈물을 나누며 매일 30분을 함께했던 친구들의 얼굴이 아른댄다. 

“정신 차려, 페블.”

그건 모조리 가짜고, 지금 이게 현실이야.

난 다른 모든 잡념을 떨쳐버리려 모니터 속 세상에 투신한다. 혼란으로 미쳐버리겠는 와중에도 내 뇌와 손가락은 자동분류기가 되어 돌아가고 있다. 영화 <모던 타임즈>의 공장 노동자들처럼. 

“너 정말 무심하구나.”

정신없이 유해 게시물을 쳐내고 있는 와중에도 네이선의 고통스러운 한마디가 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내가 무심해? 그럼 너는! 나에게 내일이, 올해의 크리스마스 이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면서. 골든 티켓이 발표된 뒤에 연락처를 줬어도 늦지 않았잖아. 밋지와 유진도 말이야. 그래도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말도 없이 사라지곤…. 

어긋난 원망을 멈출 수 없다. 내 옹졸한 마음은 계속해서 실체 없는 그들의 가슴에 생채기를 낸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나는 증명해야만 한다. 밋지와 유진을 당장에라도 찾아가지 못한 내 이기심, 9개월을 함께 한 파트너를 단숨에 걷어 차버린 내 무정함, 전날의 게시물 테러를 무시한 어리석음…. 이 모든 게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괜찮아, 페블. 아무 일 없을 거야.

이제 나를 다독일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난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피해망상이 생긴 거라고. 성공엔 희생이 따르는 법이라고. 갖은 시련을 견디고 드넓은 대양으로 나아가는 것, 그게 내 운명이다. 후지다 못해 썩고 있는 제7대륙에, 이깟 하청업체에 갇힐 순 없다. 내 골든 티켓은 트로피가 되어 더욱 인정받는, 성공한, 다채로운 세상으로 날 데려가줄 것이다.

짤깍 짤깍.

난 오직 모니터 속 세상에만 집중한다.

짤깍 짤깍.

도살자는 이유 없이 암소를 지지며 즐거워하고 핼러윈 코스튬을 입은 젊은이들이 좁은 비탈길에서 압사를 당한다. 까치머리의 성인 남성이 초등학생을 향해 총기를 난사하고 애견카페 주인은 망치로 포메라니안의 두개골을 깬다. 헐벗고 기이한 자세로 다리를 오므린 저 아시안 여성은 법적 아동일까? 니모는 아니라고 한다.

쾅 쾅. 막판 스퍼트를 위한 내 열기만큼이나 뜨거워진 컴퓨터의 팬이 힘겹게 돌아간다. 이 밤이 지나면, 내 전담 QA 직원이 출근을 해서 오전 11시 20분까지 품질 확인을 마치면 내 최후의 실적이 허브의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각개 인간을 하나하나 바꿀 순 없어도 전체 인류가 흐르는 이 망망대해에 조금이라도 빛을 내주겠다는 푸르른 꿈. 찌든 때와 분해되지 않는 쓰레기로 뒤덮인 청명한 물가를 내 한 몸을 갈아서라도 닦아내겠다는 사명감. 누군가는 이런 나를 어리석다 비웃겠지만 비웃는 바로 그 사람조차 이보다는 더 아름다운 세상에 살아 마땅하다 여기는 내 굳은 믿음. 난 그 믿음이 실현되는 세계를 향해 위대한 한 발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나도 모르게 어느덧 자정을 향해간다. 난 단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는다.

삭제, 삭제, 삭제, 삭제…. 그리고…. 

 

“오, 이러지마.”

 

실시간 라이브 동영상. 3:2 저조도 저화질. 어둑한 실외 공간에서 한 남자가 플래시 조명을 키고 카메라와 대화를 한다. 매서운 바람이 불어온다. 날이 꽤 쌀쌀해 보임에도 남자의 의상은 얇은 하얀 반팔 티셔츠가 전부다. 남자는 카메라를 들고 건물의 끝을 향해 걸어간다. 난간을 오르는 남자. 시야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꽤 높은 건물임이 분명하다. 격하게 흔들리는 화면, 남자는 각도를 고쳐 위태롭게 자신의 얼굴을 비춘다.

 

“페블, 보고 있어?”

동영상 속 남자는 말한다.

“넌 항상 우리를 ‘청소부’라고 불렀지.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어둡게 깨지는 배경 너머로 익숙한 주차장과 축 늘어진 버드나무가 보인다. 좁은 난간 위를 걷는 그는 곧장 바닥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남자는,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대로 맑게 웃는다. 그리고 외친다.

“우리의 역할은 진주를 찾는 거야! 어둡고 추운 바다 속에서, 수많은 조개껍질을 깨면서 단 하나의 보석을 찾아내는 거라고. 내가 널 찾았듯이 말이야.”

“허튼 짓 하지마, 네이선. 내가 갈게!”

나는 두려움에 찬 나머지 헤드셋을 집어던지고 자리를 박찬다. 오직 나만 남은 깜깜한 센터를 등지고 달려나가려는 순간, 둔탁한 파열음이 적막을 뚫고 내 발목을 붙잡는다.

퍽.

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영영 이대로 선 채 굳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리고 빨리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잠시 동안 공존한다. 난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거덕대며 조용히 뒤를 돌아본다. 내 포효에 가까운 절규가 299대의 꺼진 모니터, 그리고 단 한대의 환한 화면에 부딪혀 진동한다. 오션의 터키옥색 로고가 박힌 새하얀 화면 속 작은 네모 세상에는 한때 나와 살을 섞었던 동료의 검붉은 액체가 주차장 바닥을 적시고 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정신이 혼미해진 나는 동영상 속 장소로 뛰쳐나간다.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또 비상계단을 타고 허브의 꼭대기 층으로 향한다. 옥상 출입구는 쉽게 열리지 않는다. 네이선!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소리쳐보지만 문밖은 고요하다. 쿵, 쿵. 두터운 철문을 향해 내 48kg 짜리 몸뚱어리를 부딪힌다. 우둑, 하고 어깨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내 하찮은 몸통은 균형을 잃고 옥상으로 튀어나간다.

“네이….”

기대하던 넓은 등판은 보이지 않고 싸한 공터만이 나를 맞는다.

아냐, 아니야. 나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난간으로 달려간다. 철봉을 붙잡은 두 손, 가까스로 굳은 몸통을 지탱하는 종아리가 겨울바람 아래 버들잎처럼 떨린다.

눈을 깜빡일 새도 없이 난간 아래를 살핀다. 아스팔트 땅바닥 위로 네모난 하얀 선들이 가지런히 그어져있다. 오렌지빛 가로등 조명에 물든 주차장 바닥엔 아무것도, 네이선도, 그 누구도 없다. 귀퉁이 한구석에 놓인 내 스쿠터뿐. 

…내가 잘못 본 거야?

텅 빈 주차장을 몇 번이고 확인한 나는 급격히 힘이 풀린다. 그러곤 차가운 옥상 바닥에 그대로 등을 붙이고 쓰러진다. 

냉정한 자정의 공기가 쏴 하고 내 콧날을 스친다. 어디서부터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모니터 속 세상일까. 페이크, 페이크, 리얼…. 현실에 발붙여야 할 나의 오감이 스케치북에 그려진 실패한 그림처럼 허공에 북북 찢어진다. 애초에 내가 모니터 밖에 있는 사람이 맞나? 난 어느 세계를 살고 있는 걸까? 어디에 살고 있던 내 존재는 잔인하다. 네이선이 허브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며 좌절한 게 불과 30초 전인데, 지금은 빨리 부스로 돌아가 게시물을 처리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난 미치지 않았어. 이건 열정이야. 재가 되더라도 불태우는 거야. 

난 다시 옥상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 내 작은 부스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처리 건수 6042, 6043, 6044…. 상상이라기엔 너무 생생한 폭력이 줄을 잇는다. 다 죽어, 아니, 날 살려줘. 끝없는 쓰레기의 회오리로부터 나를 깨운 건 통근 버스의 경적소리다. 

“안돼!”

악몽에 시달리다가 눈을 떠보니 뻥 뚫린 맑은 하늘이 날 맞이한다. 난 뻐근한 어깨를 부여잡고 옥상에서 일어난다. 밤새 여기 있었던 건가? 밤새 여기 있었던 건가? 온몸이 깨질 듯 아파왔지만 내 가장 큰 걱정은 통증 따위가 아니다. 난 곧장 내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오전 9시 17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다.

 

지각이잖아!

나는 황급히 황량한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탄다. 어제의 기억이 희미하다. 내가 어쩌다 옥상에서 쓰러진 거지? 내가 마지막 게시물 어떻게 처리를 했더라? 혹시 접속이 종료되어서 미검토 상태로 넘어간 건가? 그럼 내 실적은 어떻게 되는 거지?

잠시만, 마지막 게시물이 뭐였지?

 

맞아, 네이선! 

 

그를 떠올리자 뇌가 깨질 듯이 아파온다. 실시간 동영상도 믿을 것이 못 되는군. 가짜야, 그건 가짜라고. 난 다시 한번 마음을 쓸어내리지만 어쩐지 씻기지 않는 찝찝함에 몸을 부르르 턴다. 그래, 내가 피곤해서 잘못 봤던 거야. 어제 하루 종일 네이선 생각을 하느라 스트레스가 많았던 거지…. 게다가 내 실적은 겨우 하룻밤 안일해졌다고 무너질 정도가 아니니까. 이제 결과를 기다리는 것밖엔 남지 않았어, 페블. 내가 할 수 있는 건 끝났어. 

나는 팔딱이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며 센터로 향한다. 숙취를 10배는 머금은 듯한 전신을 이끌고.

그런데 센터 안이 왜 이렇게 시끄러울까? 

“씨발, 이러는 게 어딨어!”

“이 좆 같은 오션 새끼들….”

우리 층의 복도에 내리기도 전, 쿵쾅대는 발걸음과 함께 여기저기서 욕지거리가 날아온다.

“무슨 일이에요?”

난 뛰쳐가는 동료들에 대고 외치지만 그들의 눈엔 내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불길한 기운이 내 싸늘한 뒷골을 타고 화르르 번져 오른다. 

나는 허겁지겁 성이 난 사람들을 피해 내 부스를 찾는다. 아수라장이 된 센터에서 자리 하나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텅 빈 채 굳게 잠겨있는 비둘기의 감시탑을 멀찍이 바라본다. 대체 허브는 뭘 하는 거야? 누군가는 고함을 지르기도, 누군가는 자기들끼리 웅성대며 모여있기도 한 낯선 모습이 펼쳐진다.

“비둘…. 아니, 관리자님은 어디 가셨어요?”

나는 그나마 대화를 해본 같은 층 아주머니를 붙잡고 묻는다. 그녀는 나를 아래위로 훑고는 말한다.

“메일 확인을 아직 안했나봐요.”

아주머니는 고개를 휙 돌리고 총총 사라진다.

그녀의 말에 난 비어있는 아무 자리를 낚아챈다. 그리고 사내 포털에 내 계정과 비밀번호를 입력한다. 클릭, 클릭. 두 개의 메일이 도착해있다. 나는 먼저 온 공지를 클릭한다.

한동안 난 믿을 수 없는 문자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친애하는 사원 여러분.

 

오션의 자랑스러운 모니터링 프로그램 '니모'의 성공적인 시범 운영 결과에 따라, 핵심 허브에 제공했던 '골든 티켓' 제도를 폐지하고 일부 구역의 센터 인원을 축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세부적인 축소 방안은 개별 통지문을 확인하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센터장 알림. 

 

째깍대는 초시계, 어수선한 센터를 떠나 난 오직 네모난 박스의 이메일 화면에 갇힌다. 긴 이명이 들려온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이메일의 밝은 어투가 끔찍하게 거슬린다. 그럼 내 꿈은 어디로 가는 거지? 내 목표는….

아냐, 이게 ‘꿈’이야. 일어나, 페블!

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내 양 뺨에 따귀를 날린다. 방금 전까지 찬 돌바닥에 눌려있던 동그란 광대가 얼얼한 고통과 함께 부어오른다. 눈물이 차오르는 동시에 난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인지부조화에 몸부림친다. 

난 떨리는 손으로 가장 최근 이메일을 클릭한다.

내가 제7대륙 허브의 우수 사원으로 선정되었으며, 그 보상으로 <모바일 요가 클래스> 1회권을 보너스로 수여한다는 내용이다.

“허….”

난 혓바닥을 짓누르며 헛웃음 친다. 

울분. 억울함. 분노. 모든 부정적 감정이 용솟음치다 못해 죄다 녹아내려 나의 내면의 심해에 묻힌다. 이건 옳지 못해. 난 용납할 수 없어.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지?

 

“…….”

언제나 정확하게 작업대를 오갔던 두 손이 벌벌 떨린다. 이내 난 내 정신을 가다듬고 벽면의 시계를 찾는다.

12월 24일, 오전 11시 30분. 

내 최후의 실적이 모니터 위로 떠오른다. 

 

일평균 처리건수 4028.3 건

정확도 99.99%

 

구구, 구구.

나 해냈구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는 점수, 나의 뇌와 혈관이 마약 같은 숫자에 녹아든다.

격하게 자랑이 하고 싶다. 아니,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다. 이 두 감정이 어떻게 공존하는지는 몰라도, 나는 언제나 이 거짓스러운 두 마음을 함께 품고 있다. 네이선이 보고 싶다.

난 네이선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모든 것이 어색하지만 난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노력한다. 아주 오랜만에 직접 점심을 배식 받고, 휑한 카페테리아 한가운데 자리를 잡는다. 드문드문 모르는 요원들(나를 포함, 방금 전 허브의 정리해고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다)이 앉아있는 외딴섬 속에서 나는 전혀 외롭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켁켁. 샌드위치 속 시든 양상추가 목구멍에 눌어붙는다.

식사를 마친 난 마법사의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로비를 향해 걸어간다. 점심시간이 10분이나 남았음에도 이곳엔 아무도 줄을 서 있지 않다. 어제 네이선이 준 종이를 펼치지 않은 것이 사무치게 후회된다. 0,4,2,8,6,3…. 내가 ‘아는’ 유일한 번호. 난 어쩔 수 없이 나의 검지가 이끄는 대로 딸그락대는 구식 공중전화 버튼을 누른다. 허브에서 진행되는 모든 통화 내용은 비밀유지협약에 의거해 녹음된다는 안내 음성이 들려온다.

 

여보세요?

 

기다렸던 목소리는 기약이 없고 뚜, 뚜- 하는 긴 연결음만이 내 심장을 조인다. 막냇동생이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갔는데 공장이 아닌 대학에 원서를 넣은 이기적인 첫째. 가족을 외면하고 꿈을 찾겠다며 몰래 집을 나간 도망자. 무슨 일을 하는지 연락조차 없는 못된 딸. 그게 나다. 

그래도 문은 잘 잠그시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도시로 오던 날, 한쪽이 잘린 다리로 침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위로금은커녕 퇴직금도 받지 못한 공장 노동자 아버지. 엄마는 날 항상 원망했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는 다르지 않았을까? 아버지도 날 원망할까? 애비가 죽든 말든 저 혼자 살겠다고 날라버린 나쁜 년이라고…. 그때부터 난 그랬나? 나는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인가?

세상을 살린다고 굳게 믿었던 나. 난 그 누구를 살리지도, 심지어는 꿈을 쟁취하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내가 숨을 쉴 이유가 뭐지? 

 

다시 내 자리까지 돌아오는 길에 마주치는 자들은 모두 낯선 사람들이다. 허브 인원의 4분의 3 가량이 해고되어 자리를 박차고 나간 가운데, 난 홀로 차분히 모니터 정면을 마주한다. 그리고 1년간 내 일상을 갈아 넣었던 바로 그 서버에 접속한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는 작업을 시작한다.

 

“분류: 자해 및 자살, 신체 훼손의 묘사 정도 매우 높음. 삭제 요망.”

“분류: 자해 및 자살, 신체 훼손의 묘사 정도 매우 높음. 삭제 요망.”

“분류: 자해 및 자살, 신체 훼손의 묘사 정도 매우 높음. 삭제 요망.”

“분류: 자해 및 자살, 신체 훼손의 묘사 정도 매우 높음. 삭제 요망.”

“분류: 자해 및 자살, 신체 훼손의 묘사 정도 매우 높음. 삭제 요망.”

 

“흐흐흐….”

오늘은 지뢰밭 군인들도, 불타는 고양이도, 아이티의 소녀들도 없다. 대신 나와 조금이라도 얽혔던, 내가 아는 모든 인간들이 있다. 허브 옥상에서 떨어지는 네이선, 부스에 박힌 못에 관자놀이를 갖다 박는 비둘기, 레깅스에 목을 매다는 요가원 강사 클로이, 질식할 때까지 담배를 목구멍에 쑤셔 넣는 옆자리 초이, 책상에 몰래 숨겨놓은 술병으로 머리를 깨는 이마누엘, 약물 과다 투여로 변기 위에서 숨이 끊기는 북미의 아치, 파트너와 섹스를 하던 계단에서 구르는 아프리카의 써머, 부스 한가운데서 손목을 긋는 아시아의 진, 그리고 아빠와 동생을 목 졸라 죽이는 우리 엄마. 

5:8. 1:1. 16:9. 9:16. 4K. SD. FHD. 셀프 카메라. 수평 앵글. 버드 아이. 로우. 광각. 클로즈업. 롱 숏. 핸드 헬드. 달리. 페이드인, 페이드아웃…. 가능한 모든 규격과 각도에서 촬영된 동영상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밋지가 공중 화장실에서 성폭행 당하는 동영상을 봤을 때, 네이선이 유진이 강도 살해당하는 동영상을 목격했을 때, 네이선이…. 허브 옥상에서 떨어지는 라이브에 참여했을 때. 난 그들의 절규와 고통을 세상의 기록에서 지워버렸다. 그들의, 나의, 우리의 아픔이 삭제될 콘텐츠가 아님에도.

 

반려, 반려, 반려, 반려, 반려…. 

 

밤은 깊어가고, 난 조금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나를 버린다. 손가락은 굳어가고 두 눈이 점점 충혈되어 간다. 네이선, 밋지, 유진…. 어른에게 물린 수많은 아이들과 이구아나들이 모니터를 우글우글 덮는다. 악취가 나는 오만 쓰레기들이 27인치 상자의 틈을 비집고 질세라 튀어나온다. 난 생각한다. 사람들이 유명 셰프의 고함에 열광하는 만큼 이 이구아나를 사랑했다면, 무리한 주식투자법을 검색하는 만큼 소외된 자살자들의 아픔을 궁금해 했더라면, 10대 아이돌 소녀의 브라 사이즈가 아닌 열악한 육성 시스템에 연민을 비쳤다면, 자신이 도파민이 부족하다고 착각하는 현대의 멍청한 소비자들이 눈 뜨고 숨 쉬는 시간 모두를 오션에 바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네이선은, 밋지는, 유진은, 나는 멀쩡히 살 수 있었을까?

내가 오션에 눈 멀지 않고 네이선을 사랑했더라면, 나는. 

 

“너! 너구나!”

다시 그 동영상이 날 찾아냈을 때, 난 모두가 떠나간 뒤 홀로였다. 

 

실시간 라이브 동영상. 3:2 FHD. 늦은 밤, 가로등, 그리고 버드나무. 퍼석해 보이는 나무의 마른 잎들이 막대에 걸린 시체처럼 휘날린다. 겨울이네. 어두컴컴한 허브의 전경이 촬영되는 가운데, 내가 현재 앉아있는 층의 푸른 불빛만이 희미하게 비친다. 

 

‘이 동영상은 오늘 현실이 됩니다.’

 

단 한 줄의 캡션이 나를 비웃는다. 우리의 역할은 진주를 찾는 거야. 네이선의 마지막 한마디가 버들가지의 휘파람과 함께 귓가를 간질인다. 난 오래 전부터 내가 단 하나의 진주를 살리기 위해 오늘을 갈망해왔음을 확인한다.

실실 웃음이 나온다. 이제 나의 쓸모를 증명하는 일만이 남았다. 

난 느릿느릿 내 몸을 타는 이구아나들을 살짝 털어낸다. 고어팬클럽 고양이의 잘린 머리, 그리고 네바다를 덮은 귀뚜라미 무리를 파헤치니 낯익은 장난감 하나가 키보드 옆으로 쏙 고개를 내민다. 어렸을 적 주말 저녁이면 가족과 함께 모여 보던 TV 예능 속 빨간 버저. 그 시절 나는 알았을까? 이 세상이, 내가 하잘 것 없는 뼈와 살을 묻어야 할 세계가 이렇게 쓰레기로 가득하다는 걸. 

아니, 알았을 리 없지.

지금도 세상은, 아마 이 순간에도 휴대전화를 손에 놓지 못하고 오션의 중독에 푹 젖어있을 대부분의 이용자들은 모니터 뒤에 내가, 밋지가, 네이선이, 비둘기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누군가의 생존이 글로벌 기업의 손아귀에 달렸음을, 심지어는 자신도 언젠가 디지털 망망대해에 매장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나조차 그래왔다. 우리 모두는 안갯속 가해자다. 명백한 피해자가 되기 전까지.

그때까지 오션은, 매정한 21세기의 인간들은 철저히 숨기고 잊어버릴 것이다. 찍 소리를 낼 때까지 희망과 푼돈으로 고문하며 숨통을 조일 것이다. 그들이 조금이나마 깨끗한 상품들을 누릴 수 있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부수고 죽어가는 검은 화면 너머의 존재들을.

정확도 99.99%의 인간. 내 마지막 자의식은 말한다. 이 현실은 내가 바꿀 수 있다. 

 

여기 진실이 있어요. 당신들 틈에 ‘비밀’이 되어 죽어가고 있어요.

 

나는 창을 열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나의 분노를, 희망과 낙관의 언어를 모조리 오션의 동영상으로 옮긴다. 목에서 피 맛이 느껴진다. NDA? 좆까. 내 삶을, 내 친구들을, 내 희망을 돌려내, 이 쓰레기 같은 새끼들아! 

빨간 버저는 뱅글뱅글 돌며 환한 불빛을 뿜어낸다. 이게 우리의 의미야. 나는 버저에게 말을 건다. 영원히 타지 못한다면 차라리 재가 되기를 택하는 삶.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더 나은 세상을 밝히기 위해 스스로 부싯돌이 되는 존재. 나는 그렇게 선택하며 살 것이다. 나 다음의 페블, 다음의 밋지와 유진, 네이선을 위해서.

모래알만 한 크기일지라도 수면 위로 파장을 만들어내는 힘, 그게 내가 가진 힘이다.

 

반려. 

 

경쾌한 클릭 소리가 나에게 인사하자 난 벅차오르는 가슴으로 버저에 두 손을 얹는다. 지하의 비상계단, 카페테리아, 로비의 공중전화 부스와 명상실, 시계가 달린 센터와 옥상 곳곳에 놓인 내 분신 같은 폭발물이 노랫소리와 함께 터져나간다. 뜨거운 화염이 기쁨이 되어 한때 내 전부였던 세상을 덮친다.

 

"메리 크리스마스, 세상아."

 

나는 이 글이, 동영상이 널리 퍼지길 바란다.

 

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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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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