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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헬로, 소돔

2012.09.20 10:2709.20

헬로, 소돔

서서히 색이 변하는 하늘 아래에서 노을이 물결쳤다. 노을의 파도는 마른 들판에 일어난 불처럼 일렁였다. 성말라 보이는 붉은 빛이 들쭉날쭉한 건물들 사이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잿빛 건물의 우중충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거리를 덮어나갔다. 한때 라스베이거스로 불렸던 환락의 도시에는 이제 불이 켜지지 않았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이 배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기에 놀랍도록 조용했다. 다리란 게 허리 아래 붙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듯한 어색한 움직임,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천쪼가리를 걸치고 있을 뿐인 몰골. 그리고 아직 그림자 안에 들어가지 않은 무리는 흉측하게 썩은 몰골을 태양 아래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죽은 지 최소 1년은 지난 듯한 시체, 즉 좀비들이 도시의 주인이었다. 과거 이들에 대해 복잡한 학술명을 붙이려는 시도가 종종 있었지만, 어떤 수식어도 ‘좀비’란 고유명사를 이기지 못하고 슬그머니 사라졌다.
3년 전에 미국에서 시작된 좀비 바이러스는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영화처럼 좀비에게 물어뜯겨 감염되기도 했지만, 주 경로는 감기처럼 공기 중의 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되는 식이었다. 감기와의 공통점은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약이 없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발병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아프리카 오지에서마저 발병자가 보고되었을 정도니,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안전한 곳은 없었다.

인간이 지구의 왕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70만 년이 걸렸고,
좀비가 왕좌를 강탈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5년이었다.

고요의 도시에서 유독 눈에 띄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네 명이었다. 넷 모두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으로 감싸 피부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시체보다 더욱 지저분해 보였다. 원래 희었을 천은 검붉은 피로 염색한 것처럼 울긋불긋했고, 그것도 모자라 썩은 살점이며 내장 등을 주렁주렁 걸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들과 다른 외관이었지만 좀비들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진작에 안구가 썩어 눈구멍이 움푹 들어갔으니 당연한 결과일까.
그들은 좀비들과 비슷한 속도로 걸으며 주변을 탐색했다. 속도가 느린 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굶주림에 지쳤기 때문이었다. 그 증거로, 조금이라도 식량이 될 만한 건 모두 챙겼는지 다들 녹슨 통조림이나 풀, 열매 등을 가방에 쑤셔담고 있었다.
만약 좀비를 먹을 수만 있었다면 이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었을 것이다. 이 마당까지 와서 놈들을 사람 취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 놈들은 훌륭한 사냥감이 될 만했다. 하지만 그런 시도가 부질없다는 건 이미 증명된 바 있었다. 5년 전 갑자기 퍼진 좀비 바이러스에 운 좋게 걸리지 않은 이들도 바이러스 덩어리인 좀비 고기를 먹고 예외 없이 좀비가 되었다. 이 사실이 퍼지자 생존자의 식량난은 오히려 약간 개선되었다. 좀비를 먹는 것보다 안전한 인간을 먹는 게 낫다는 합리적인 판단이 굶주린 입을 다소 줄이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들은 가족이란 굴레로 묶여 있어 그런 생각을 자제하는 경우였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수백 개의 그림자가 서서히 멈췄다. 앞선 좀비 무리의 변화에 당황하면서, 네 사람은 서로를 향해 재빨리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의 리더로 보이는 사람이 조심스럽게 망원경을 꺼내 사방을 살펴보았다. 더러운 렌즈를 이리저리 돌려 보자 드디어 어렴풋하게 시야에 잡히는 물체가 있었다.
지평선 너머에서 기괴한 쇳덩어리가 굉음을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한참을 보고 나서야 그는 저 물건이 몬스터 트럭이란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속도가 느리고 굉음을 발한다는 점만 빼면 트럭은 나름대로 쓸 만해 보였다. 만약 좀비 사태 초창기에 이런 물건을 봤다면 누구라도 자신을 구원해 줄 천사로 여겼을 것이다. 그렇지만 좀비의 습성에 대해 낱낱이 파악한 지금은 아니었다. 속도가 느리고 굉음을 발한다는 점이야말로 저 트럭의 모든 장점을 덮는 쓰레기 같은 단점이었다.

“머저리 자식.”

탁하게 갈라진 남자의 목소리가 천 너머로 새어나왔다. 그가 얼마나 당혹해하고 있는지는 이곳에서 음성을 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될 것이다. 좀비는 대기의 흐름, 즉 소리와 냄새에 유난히 민감했기에, 아지트 밖에서 소리를 내면 좀비의 주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 주변의 몇몇 좀비는 고개를 돌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보기도 했다.
짧은 시간 동안 남자는 저걸 구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저기서 굴러오는 미친 쇳덩어리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저게 진입하는 순간 저 안의 운전자는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좀비를 그저 전방을 향해 무작정 걷는 병신으로 생각했던 자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죽어 갔던가. 녀석들은 조직적인 사냥이란 걸 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포갠 장벽을 쌓는 식으로 저런 거대한 물체의 전진을 멈추는 걸 그는 몇 번이나 보아 왔다. 이곳에 진입하는 순간, 10분 안에 저 트럭도 좀비 떼에 포위되어 옴짝달싹못할 게 뻔했다.  
그는 세 사람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들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세 사람은 그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었다. 지독하게 잔인한 명령이었지만 그들은 말없이 순응했다.

"개새끼들아! 이쪽으로 와라!"

"아니, 이쪽으로 와!"

"여기도 있다!"

세 사람이 손에 든 것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흩어지며 크게 외쳤다. 멀리서부터 점점 커지는 소리보단 가까운 데서 크게 외치는 소리에 좀비들은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순식간에 좀비는 세 무리로 갈려 도망가는 세 사람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신선한 좀비였다면 빠르게 뛰어 이들을 순식간에 도륙했겠지만, 지금의 좀비들은 열 살짜리 아이와 비슷한 정도의 속도였다. 근방의 지리를 잘 아는 이들이라면 쉽게 잡히진 않을 것이다.
좀비떼가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한 리더는 무거운 옷을 벗었다. 천 안에 입고 있던 성조기 티셔츠와 십자가 목걸이가 피로 얼룩진 게 보였다. 몸이 가벼워지자 그는 십자가에 키스하고 성호를 그은 후 쇳덩어리 쪽으로 달려갔다. 저게 도시에 진입하면 그나마 잠시 따돌렸던 좀비들이 다시 이쪽으로 올 것이다. 신중함을 포기하고 이렇게 달리는 게 얼마만인지! 그는 달리면서 조금씩 기운이 돌아왔다. 좀비의 피와 살을 짊어지고 그들의 속죄를 비는 선지자처럼 살아온 그였다. 그 짐을 벗어던지자 비로소 인간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트럭 앞에 도착한 그는 문을 두드리며 으르렁댔다.

“머저리들아! 빨리 나와! 위험하다고!”

안에서 잠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눈처럼 새하얀 방호복을 입은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왔다. 머리까지 방독면으로 덮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한 사람은 뚱뚱하고 한 사람은 키가 커 구분하기 쉬웠다. 멸균실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이 작자들에게 좀비 내장 덩어리를 투척해줄 수 있다면! 그는 끓어오르는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난 롯이라고 하오. 이 차로 도시에 진입하겠단 생각일랑 집어치우쇼.”

“우리는……”

“얘기는 나중에 하고, 볼일이 있다면 걸어서 우리 아지트로 갑시다. 시간이 없소. 지금은 내 가족이 놈들을 유인하고 있지만, 언제 놈들이 돌아올지 모르니. 그리고 부탁이니 제발 가는 길에는 입을 닥쳐줬으면 좋겠군.”

둘은 잠시 서로에게 눈짓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트럭에서 커다란 가방을 두 개 꺼내 각각 등에 메고 출발했다. 둘 다 롯에게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지만 그의 당부를 기억했기에 얌전히 있었다. 하지만 거리에 어슬렁거리는 몇 마리의 좀비를 보자 그들은 문답무용으로 품에서 소음기가 달린 총을 꺼내 발사했다. 좀비들이 시원스럽게 쓰러지는 것을 본 롯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치들은 좀비 수백 마리 앞에서도 이렇게 자신만만해할 수 있을까?
오래지 않아 이들은 허름한 주택에 도착했다. 높은 담장과 육중한 대문을 지나쳐, 잘 위장된 개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좀비들의 퇴화한 시각으론 결코 찾아낼 수 없을 법한 곳이었다. 문을 여닫다 보면 혹시 발각될까 두려워 롯이 떠올린 방법이었다. 이들은 그곳으로 기어들어가 주택 정원에 당도했다. 몸에 묻은 흙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낸 방문자들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제 말해도 될까요?”

“그러쇼. 대문은 용접했으니 저기론 못 들어올 게요. 잠시 쉬고 있으면 우리 가족들이 돌아오겠지. 얘기는 그때 합시다.”

롯의 말대로 잠시 후 세 사람이 더 들어왔다. 오래 달려서인지 그들의 숨은 거칠었다. 무거운 위장복을 벗어던지자 비로소 방문자들은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피와 땀에 절은 ‘I ♥ NY' 티셔츠의 가슴 부분이 도드라져 있었다. 바로 롯의 부인과 그의 두 딸이었다. 여자를 셋이나 만날 수 있는 건 지금 세상에선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방문자들은 이들에게 별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그새 이들은 가방에서 꺼낸 소독약으로 전신을 소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모습이 롯 가족에겐 고깝게 보였지만, 이들은 귀중한 바깥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를 참았다.

그들이 소독을 끝내자 롯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 대통령은 여전히 에이브러햄 대통령이오?”

키다리가 그의 질문에 재빨리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각료는 에어포스로 이동하며 좀비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럼 우리에게 그간의 소식 같은 걸 좀 들려주시구려.”

“그 전에 하나 확인할 게 있습니다. 이곳에 생존한 자는 여러분뿐입니까?”

“멀쩡한 건 우리 넷뿐이오. 아직 정신을 유지하는 감염자가 몇 더 있지만 말이오.”

‘감염자’, 즉 바이러스에 걸려 반 좀비화한 인간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좀비 바이러스에 완전한 항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누구나 감염자가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 진행은 반나절에서 수 년까지 다양했다.
롯 가족은 일족이 모두 항체를 가진 드문 케이스였다. 하지만 두 딸의 남편들은 아니었다. 피난 도중 두 딸과 맺어진 남자들이 감염자란 사실을 깨달은 건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 직후였다. 서서히 정신줄을 놓아 가는 그들을 격리했지만, 딸들의 눈앞에서 차마 죽일 순 없었다. 지금도 딸들은 몰래 그들에게 먹을 걸 던져주고 있었다. 롯은 이를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완전히 좀비가 된다면 죽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키다리와 뚱뚱이는 긴 한숨을 토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태도는 절망에 익숙해진 자의 것이었다. 뚱뚱이는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더니 구석으로 가 어딘가와 교신을 시작했다. 그리고 키다리는 제자리에서 잠시 서성대다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여러분이 궁금해 할 소식부터 말씀드리지요. 먼저 바이러스의 정체부터 말씀드릴까요?”

“제기랄, 너무 늦은 거 아니오? 그딴 것보다 차라리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의 정체나 말해 주구려.”

롯의 농담을 무시하고 키다리는 설명을 시작했다.

“바이러스는 배스 솔트라는 마약을 섭취한 인간의 몸에서 생겨났습니다. 몇 년 전에 마약을 복용하고 인간을 뜯어먹는 놈들이 늘고 있다는 뉴스를 기억하시는지요? 그 마약을 하던 놈이 죽어 시체가 썩을 때, 우연히 변종 바이러스가 탄생해 공기 중에 퍼진 게 원인입니다. 미국에서 좀비 사태가 제일 먼저 시작된 이유지요. 그간 미국의 책임 문제 때문에 쉬쉬하고 있었지만, 이젠 말씀드려도 되겠지요.”

“음……지랄맞구먼. 그러니까 마약을 하던 새끼들 때문이란 말이지? 진작에 마약쟁이건 동성애자건 강간범이건 간에 다 쏴 죽였어야 하는 건데.”

롯은 주머니에서 너덜너덜한 껌을 한 개 꺼내 입에 물었다. 몇 달 동안 아낀 껌이였지만, 지금은 씹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롯의 둘째딸이 젊었을 적 잠깐 마약에 손댔던 사실이 지금이라도 밝혀진다면, 그는 정말 딸을 쏴 죽일지도 몰랐다.
키다리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그간 좀비에 대해 우리는 많은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알려드릴 수 있어 기쁘군요. 우선 좀비는 시야보다 후각과 청각에……”

“그따위 건 다 알고 있소. 당신네가 연구실에서 좀비 몇 마리를 붙잡고 끙끙댈 때, 우린 수만 마리를 상대했단 말이오. 당신네가 샌프란시스코 시가지 후퇴전에 참여해 봤소? 로스엔젤레스 섬멸전은? 샌디에이고 방어전은 또 어떻고? 우린 살기 위해 끊임없이 도망쳐야 했소. 밤까지 총을 잡고 좀비를 쏴대던 작자가, 자고 일어나더니 날 아침식사로 여기는 걸 보기는 했냔 말이오!”

롯은 껌과 가래를 거칠게 토해냈다. 가래가 키다리의 발치에 떨어지자 키다리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가 당장에라도 소독약을 꺼내 발치를 소독하고 싶어하는 걸 보며 롯이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원하는 소식은 단 하나요! 대체 좀비와의 전쟁은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거요? 빌어먹을 방송 통제라도 할 때는 그나마 소식이 들리더니, 지금은 아예 방송도 나오지 않더군! 왜, 방송국이 전멸하기라도 했소?”

‘우리는 승리하고 있습니다.’라고 간간이 나오던 라디오 방송이 끊긴 지도 반 년이 지났다. 그간 롯 일행은 라스베이거스까지 밀려와 있었다. 이곳은 거주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좀비의 수도 다른 지역보다 적은 편이었다. 게다가 환락의 도시답게 먹을 걸 구하기도 비교적 용이했다. 물론 술도 넘쳐났지만, 전형적인 청교도 보수주의자인 롯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술을 마시면 매일 자기 전 ‘하나님 아버지, 바라옵건대 저 개자식들을 모두 쓸어가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키다리가 머뭇거리자, 어느새 교신을 끝낸 뚱뚱이가 대신 나섰다. 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미국은 패했습니다.”


잠시의 정적 후, 롯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뭐라……”

“이곳에 있는 건 이제 미국이 아닙니다. 더럽혀져 정화되어야 할 땅일 뿐이죠.”

“그럴 리가! 방금까지 대통령이 전쟁을 수행한다고 했잖소!”

“그건 패전의 뒤처리일 뿐이죠. 이제 미국을 지킬 군대도, 군인도 더 이상 없습니다. 백신이 끝내 개발되지 못한 이상, 어떤 노력도 무의미합니다.”

“맙소사.”

물어볼 말은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지만, 롯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주저앉아 버렸다. 혼란을 이겨내기 위해 그는 속으로 수천 번 넘게 불러본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다시 부르려 했다. 하지만 가사가 생각나지 않았다. 놀란 그는 매주 교회 성가대 앞자리에서 힘차게 불렀던 '십자가 군병들아'를 떠올려 보았다. 하나님 맙소사! 이번엔 멜로디가 떠오르지 않았다.
순식간에 십 년은 더 늙어버린 초췌한 노인을 대신해 작은딸이 나섰다.

“좋은 소식 전해줬으니 엿이나 먹으셔들. 그럼 당신네들은 왜 여길 온 거야?”

이제 갓 스물이 좀 넘었을 당돌한 처녀가 따지듯 물었다. 무례함을 탓하는 대신, 뚱뚱이는 키다리에게 눈짓을 보낸 후 뒤로 물러났다. 키다리는 수많은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린…… 최후의 희망을 위해 왔었지.”

그의 말이 과거형인 것에 모두는 주목했다.
키다리는 재차 말했다.

“에어포스에서 미국 정부는 결단했지. 더 이상 미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할 일은 신 대신 정화의 불꽃으로 미국을 태우는 수밖에 없다고 말이야. 그래서 72시간 뒤 이곳을 비롯한 미국 전역에 순차적으로 핵을 날릴 계획을 세웠어. 그런 후, 아직 감염의 위협이 덜한 어디로든 떠나겠다는 의도였다.
그때 대통령은 정부에 호소했지. 항체가 있는 생존자를 최대한 구해야 하지 않겠냐고. 이미 백신 개발을 포기한 정부 각료들은 냉담했지만, 대통령은 조금이라도 많은 국민을 구하고 싶어 필사적이었지. 하지만 아직 작동하는 위성을 총동원해도 생존자를 찾긴 쉽지 않았어. 오십 명이라도, 사십 명이라도, 삼십, 이십, 아니 열 명이라도…… 그렇게 미국을 뒤지다, 당신들 일행을 보게 된 거지. 그래서 항체를 가진 자가 열 명 이상이라면 연구용으로 그들을 데려오란 임무를 띠고 우리가 온 거야. 유감이군.“

“뭐야! 그럼 열 명이 안 되니까 우릴 버리겠다는 거야? 말도 안 돼!”  

작은딸이 절규하듯 외쳤다. 방문자들은 고개를 돌려 그 외침을 외면했다. 그때 롯의 아내가 구르듯 달려와 뚱뚱이의 다리에 매달렸다.

“우릴 구해줘요! 당신들은 분명 저 위에서 데려갈 거잖아요, 그렇죠? 거기에 우리도 섞여서 가면 되잖아요! 이 지옥에서 꺼내 줘요! 우릴 당신들이 있는 천국으로 데려가달란 말이에요!”

“헬기가 오긴 합니다, 부인. 우리만 아는 장소에 곧 오기로 했지요. 하지만 저희는 4인승 헬기를 호출했습니다. 조종사, 부조종사, 그리고 우리들이지요. 그곳에 예비된 여러분의 자리는 없습니다.”

뚱뚱이가 잔인한 말을 부드럽게 내뱉었다. 시들어빠진 그녀의 손은 곧 스르륵 풀렸다. 큰딸이 지저분한 얼굴을 눈물로 적시며 자신의 어머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작은딸은 거기 합류하는 대신 집에 굴러다니던 쇠파이프를 움켜잡았다.

"개새끼들! 그럼 너흴 다 죽이고 우리가 헬기를 탈 거야!"

"조종은 어떻게 할 건데? 그리고 우리 넷은 모두 총이 있어. 이 자리에서 널 쏴 줄까?"

뚱뚱이가 망설임없이 총을 꺼냈다. 그걸 본 작은딸은 히익, 하며 뒤로 주저앉았다. 총을 쏠지 말지 고민하는 듯한 그의 앞에 키다리가 끼어들었다. 동료의 눈빛을 본 그는 총을 품에 집어넣고 개구멍 쪽으로 걸어갔다. 키다리가 그의 뒤를 따라가다 말고 이들을 돌아보았다.

“가방 안에 총기와 생필품이 조금 들어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어떻게든 이곳을 탈출하세요. 산 너머로 가면 살 수 있을 겁니다. 지금부터 출발하면 분명 산을 넘을 수 있어요.”

여기서 산까지 얼마나 먼지는 롯 일가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걸어서? 그건 불가능했다.
키다리는 몇 번이고 머뭇거리다 속삭이듯 내뱉었다.

“신의 가호를 빕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저만치 멀어진 뚱뚱이의 뒤를 쫓아 뛰어갔다.

“뭐야, 저 새끼들! 제기랄!”

좀비가 듣든 말든, 작은딸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어머니를 감싸안던 큰딸은 작은딸을 함께 끌어안았다. 셋은 둥근 원을 그리며 소리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짐승 같은 신음이 원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때 롯의 안에서 모든 노래소리가 끊겼다.
자신의 가족을 공허하게 바라보던 롯이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피에 젖은 성조기 티셔츠를 벗어던지고, 십자가 목걸이를 뜯어내 땅에 내동댕이치더니 마구 짓밟았다. 그리고 가방을 열어 조준경과 소음기가 달린 총을 꺼냈다. 가족들이 경악하든, 두려움에 질리든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총을 움켜쥔 롯은 개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흰 옷을 입은 작자들은 어느새 저만치 멀리 가 있었다. 한 조각 남은 노을이 장엄하게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피와 세균으로 얼룩진 도시를 정화하러 온 백의의 천사 같았다.
하지만 저들이 날개를 펼쳐 천국으로 돌아가게 둘 순 없었다.
그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멀리 있는 뚱뚱이를 겨냥해 발사했다. 뚱뚱이의 거구가 움찔하더니 천천히 쓰러졌다. 아무래도 허벅지에 총알을 맞은 것 같았다. 옆에서 걷던 키다리는 깜짝 놀라더니,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롯은 방아쇠에서 손을 떼었다.
잠시 후, 키다리의 비명을 들은 좀비들이 사거리 가득 몰려들었다.
저만치서 저주와 욕설, ‘신이여!’하는 고함이 뒤섞여 들리는 가운데, 롯은 안으로 돌아와 가방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가족에게 말했다.

“트럭을 타고 가자.”

그리고 네 사람은 트럭을 탔다.

트럭이 산기슭을 힘겹게 올라가고 있을 때, 핵의 불꽃이 라스베이거스를 뒤덮었다. 그들이 말했던 72시간에는 이동시간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걸 롯 가족은 뒤늦게 깨달았다. 아니, 롯의 부인만은 어렴풋이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두 딸을 억지로 조수석에 태우고 자신은 짐칸을 고집했다.
폭발이 일어났을 때, 롯의 부인은 그 빛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눈이 멀었다. 눈을 움켜쥐고 버둥거리던 그녀는 결국 트럭에서 굴러떨어졌다.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그녀의 목이 기괴한 각도로 비틀렸다. 즉사였다. 그런 그녀를 보고도 롯은 입술을 깨물며 악셀레이터를 밟아댔다. 지금 멈추면 모두가 끝장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곧 하얀 방사능 재에 덮일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백밀러로 바라보며, 그는 이를 악물고 흐느꼈다.
닥쳐오는 열풍을 피해 간신히 산모퉁이를 넘자 트럭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아직 멈출 순 없었다. 울다 지쳐 실신하다시피 한 롯을 두 딸이 질질 끌고 걸어갔다. 산이 방사능 폭풍을 막아준다고는 하지만, 낙진을 피할 장소가 필요했다. 게다가 열풍의 여파인지 군데군데 산불이 일어나 이동하기 힘들었다.
마침 조그마한 동굴이 근처에 있어 롯 가족은 그 안에 고단한 몸을 눕혔다. 작은딸이 동굴 밖에 나가, 마침 근처에서 혼자 타들어가고 있던 가시떨기 나무를 꺾어왔다. 큰딸은 이것으로 불을 지핀 후 음식을 데웠다. 모처럼의 따뜻한 음식이었지만 롯은 이를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두 딸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은 그는 급속히 쇠약해져 갔다. 동굴 안에서 딸들의 간호를 받으며 이틀을 보냈지만, 상태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가방 안에 있던 약간의 의약품은 롯의 고통을 잠시 줄여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결단을 내렸다.

작은딸이 몰핀에 취한 롯의 귀에 속삭였다.

“아버지, 죄송해요.”

큰딸이 비아그라를 잘게 씹은 후 롯에게 키스하며 이를 삼키게 했다. 심장약 대용으로 가방에 들어있던 비아그라는 롯의 일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약봉지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라고 누군가 낙서한 걸 보면, 처음부터 이쪽 효과를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서히 롯의 남성이 깨어나는 걸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며 큰딸이 말했다.

“아버지밖에 없어요. 우리에게 지금을 살아갈 이유를 줄 수 있는 건.”

그녀는 자신에게 롯의 물건을 서서히 집어넣었다. 오랜만의 행위는 쾌감보다 통증을 수반했다. 그녀는 아픔을 참기 위해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버지의 메마른 입술 너머로 따뜻한 숨이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사람과 이어지는 건 더 이상 허락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이 세상에서 오직 셋만 살아남았고, 이제 하나가 줄어들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지금 그 둘을 넷으로 불려야 했다. 이 자리의 모두가 이미 방사능에 피폭되었을 가능성이 컸지만, 그건 나중에나 생각할 문제였다.

“신이 있다면 우린 천벌을 받겠지?”

작은딸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녀도 이미 옷을 벗은 상태였다. 이 행위를 먼저 제안한 것도 다름아닌 그녀였다. ‘과연 이래야 할까?’라는 쓸데없는 질문은 둘 모두 하지 않았다. 이래야만 하는 일이었다.

언니의 대꾸는 냉정했다.

“죽는다면 차라리 천벌을 받고 죽었으면 좋겠어. 그럼 신이 있다는 말이잖아?”

작은딸은 입을 다물고 자신의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거의 재가 된 가시떨기 나무의 불은 한 덩어리가 된 부녀를 힘없이 비추다 사그라들었다. 밀려드는 어둠 속에서도 행위는 오히려 열기를 띠어 갔다. 큰딸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롯의 얼굴에도 미미하게 화색이 감돌았다. 지금 이 순간만은 모두가 행복했고, 그래서 이곳은 천국과도 같았다.

"사랑하는 아버지, 우리 안에서 건강하게 다시 태어나 주세요."

불타는 세상에서 새 불을 얻기 위해 걸어나가다 말고, 작은딸은 아버지에게 오롯이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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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출애굽기를 읽고 오시면 더욱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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