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안녕하세요, 교도관님. 잘 지내시지요?

교도관님과 처음 만났을 때가 그러니까, 석 달 전이네요. 석 달…벌써 석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는 이곳으로 옮겨와 지내게 되었고, 만삭이었던 교도관님은 이제 엄마가 되셨겠군요. 아기, 참 예쁘지요? 제게도 일곱 살 난 쌍둥이가 있어서, 처음 아기를 품에 안았던 순간이 이따금 고스란히 떠오르곤 합니다.

아직 기나긴 밤을 이기는 법을 몰라 장문의 글을 쓰고는 있지만, 교도관님은 편지를 받고 난감하실지도 모르겠어요. 봉투에 적힌 이름만으로는 누구인지 떠올리기가 쉽지 않으시겠죠. 저란 사람도 결국엔 구치소에 들어와 교도관님과 마주 앉았던, 비슷한 기록과 비슷한 관상을 가진 범죄자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피해자 여성을 좋아했냐고, 그날 교도관님은 제게 물었고, 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상담 기록에 뭐라고 적히건 신경 쓰지 않았어요. 자신을 용서하려면 먼저 세상의 시선을 달게 받아야 한다고 믿었죠. 교도관님은 다만 저를 가만히 쳐다봤어요. 그 시선에 못 이겨 무슨 말이라도 내뱉길 바라는 것처럼요.

좋아하지 않았죠, 그분. 사건 기록을 찬찬히 넘겨보던 교도관님이 마침내 조용히 말했어요. 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15분이라는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 버리자, 교도관님은 절 돕고 싶다며 언젠가 말하고 싶을 때가 오면 편지를 달라고 했어요.

이제 기억나시나요. 작년 가을 서울 강동구 우림 아파트에서 불법 침입과 살인미수, 재물손괴 혐의로 체포된 39세 인테리어 업자 A가 바로 저입니다. 교도관님과 만난 그날 이후 90일 만에 비로소 편지를 쓸 용기가 생겼습니다.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것만 빼면 저는 잘 지냅니다. 낮에도, 밤에도 오롯이 맨정신으로 깨어 지낸 나날이었습니다. 자야 하는데, 오늘 밤은 꼭 자야 하는데, 생각하면서 돌아눕고, 엉치뼈가 배겨서 바로 눕고. 그렇게 모로 눕고 바로 눕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다가 잠이 오질 않는 괴로움에도 끝내 지겨운 밤의 일부분처럼 무감각해질 즈음에야 거짓말처럼 희끄무레하게 밝아오는 창문을, 교도관님은 바라본 적 있으신가요. 그런 냉정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의 흐름을 교도관님은 느껴본 적 있으십니까.

이 세상에 최고로 우직하고 성실한 놈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토록 알지 못했겠죠. 별볼일 없는 삶의 한 뭉텅이를 여기서 흘려 보낼 뿐이라고, 그렇게 위안 삼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수감자들이 간호사 앞에서 바지를 까내리고 오목을 두다가 싸움이 벌어지곤 하는 이곳도 조금은 숨을 쉬고 살만한 곳이 될 테니까요.

처음엔 그 시간이란 놈의 목을 분질러 되감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위력에 절로 고개가 숙어집니다. 지난 석 달은, 지난 90일 동안은, 그런 한 시간, 한 시간이 얇고 짜증스런 비닐 랩처럼 저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2160겹, 2160시간을 떼어낸 끝에야 비로소 제 몸이 비닐 랩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종이심이 있는 데까지 모두 풀리면 끝나고 마는, 시간이, 인생이 바로 비닐 랩 덩어리라는 거요. 한 꺼풀 벗겨내고서 안도하고, 그러면서 또한 저주하게 되는, 인간에게 내려질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이 시간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때 깨달았습니다. 후회하고 있느냐고 그때 제게 물으셨지요. 이만하면 그 질문에 답이 되었을까요.

그런 밤의 시간은 조각난 기억으로 채워집니다. 기억의 한가운데에는 물론 그날이 있습니다. 그래, 그때 그녀에게서 그 말을 들었고, 뱃속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무언가 꽉 차오르면서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고,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고…배출해야 했고 일단은 살아야 했고 그래서 난 해머를 들고…

무엇이 그리도 화가 났느냐고 그날 물으셨죠. 그녀의 말 한 마디에 왜 난 그리도 격분할 수밖에 없었는가.

감기에 걸리면 병원에 가듯, 범죄자들이 마음의 건강을 회복시키러 들어오는 곳, 치료감호소는 그런 곳이라고 상담사는 말했습니다. 건강한 정신, 행복한 사회. 입소할 때 감호소 입구에 붙은 현판을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어요. 남들 눈에는 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죠.

하지만 내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정말, 이렇게 쉽게 정리될 수 있는 일인가. 어떤 미친 스토커가 벌인 살인극, 그 한 줄로 충분한가. 그걸로 넌 정말 괜찮은가.

이해받고 싶었습니다. 확인받고 싶었어요.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고 그래도 조금은, 그래도 누군가는, 그 ‘동기’라는 것에 공감해주지 않을까 하면서요.

제가 그녀와 그 집을 만나기까지, 그러니까 이 바닥에서 펜치와 드라이버와 빠루와 흙손을 잠잘 때와 밥 먹을 때 빼곤 손에서 놓지 않았던 세월이 십 오 년이네요.

큰일 작은 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여름이고 겨울이고 미친놈처럼 매달려 살다 보니 힘들고 지긋지긋해서 못 해 먹겠다 싶다가도 손에 든 게 없으면 허전해 못 살겠고. 나중엔 그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런 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시간의 압력과 타오르는 감정과 땀, 눈물, 더러운 체취가 잔뜩 엉겨 굳어진 지층에서 생성된 희귀 암석 같은. 너무도 사랑스럽지만, 가끔 주체 못 할 정도로 미워져 힘껏 파내 버리고 싶어도 이미 그게 없는 자신이란 상상조차 가지 않고 아무도 봐주지 않는 버려진 땅과 같아서 차마 그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그런 게, 결국은 사랑이겠죠. 사랑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따라지 대학 졸업해서 뭣 할려고 허냐. 십 오 년 전 그날 점심을 먹다가 귀싸대기를 날리듯 훅 들어온 정식이 형님의 물음이 생각해보면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것 같네요. 그래서 뭣 할려고. 그거 해서 뭣 할려고. 그 집요한 뭣 할려고, 하는 물음에 우물쭈물 대답을 못 한 탓도 있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형님한테는 절 꼭 데려다 써야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너 보니까 잘 할 거 같으다, 내 밑에서 일이나 배워라. 대신 결정을 내려주듯 툭 들려온 한 마디. 그 한 마디에 운명은 정해졌습니다. 잘한다, 가 아니라 잘할 것 같다는 한마디를 듣고 가슴이 그토록 뜨거워진 건 처음이었어요. 스물넷 평생 그런 말은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요. 일이라고 해봤자 빈집에서 뜯어낸 폐기물을 트럭으로 나르는 게 고작이었던 일용직 잡부의 어디가 형님은 마음에 들었던 걸까요.

면담할 때는 입만 꾹 다물고 있더니, 구구절절 편지로 무슨 헛소리를 이리 길게 하고 있나, 싶으시죠. 교도관님이 보셨던 사건 기록에는 뭐라고 적혀 있던가요. 39세 인테리어 업자 A가 고객이었던 피해자 여성을 연모해 스토킹하다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 앙심을 품고 살해를 시도했다. 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을 것 같은데, 정말 그렇습니까. 교도관님 생각은 어떠신가 궁금하지만, 그런 질문을 하신 걸 보면 뭔가 달리 짐작 가는 게 있으신 거겠죠.

변호사에게도 재판정에서도 저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부모님이나 이혼한 아내에게도요. 무슨 변명을 해도 제가 해머로 그녀를 내리쳤다는 것과 그게 중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녀의 집에 무시로 들락거리는 거로 모자라 매일 밤 맞은편 건물 비상계단에서 불 켜진 거실을 엿본 변태, 그게 저였으니까요. 아무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진실을 얘기한들 무슨 소용일까요. 단지 ‘미친 변태’라는 카테고리에서 ‘그냥 미친놈’이라는 카테고리로 폴더 이동을 하는 것뿐이겠죠.

진짜 미친놈들은 자기가 미친 걸 모른다고들 하죠. 여기서 지내보니 정말 그 말이 맞더군요. 옆 침대의 어떤 사람은, 매일 아침 창밖을 보면서 중얼거립니다. 저 새끼, 저거, 또 왔네. 그때 제대로 쑤셔버렸어야 하는데, 하면서요. 아침마다 오는 식자재 배달차 기사가 자기 이웃집 사람이래요. 자기만 보면 시비를 걸고 욕을 하고 직장도 잘리게 하고 그렇게 괴롭히더니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매일 찾아온다면서.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종일 탄원서를 쓰는 사람도 있어요. 자신은 국정원 소속 요원이었는데, 국가 정보기관에서 자길 가둬 놓고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면서요. 그 진실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국가 기밀이라 알려줄 수가 없답니다. 누가 믿어 주길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남들이 알아주건 말건, 그 사람에게 그건 그냥 진실이거든요. 정보기관…정보원…1급 기밀…인간이 직립보행을 하고 개가 네발로 걷는 것처럼 그의 세계가 그에게는 너무도 당연합니다. 자신이 만든 견고한 돔 안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이 범죄자는 커녕 오히려 성실하고 유순한 모범시민에 가깝죠. 제가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게 못내 안타까울 정도로요.

저는 아닙니다. 정확히 무슨 짓을 했으며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누군가는 알아주길 바랬습니다. 매일 밤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생각했어요. 내가 정말 미친놈인가. 아니요, 결론은 아니요, 였습니다. 한순간 머릿속이 펄펄 끓어오르더니 눈앞이 뿌예졌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모든 일이 벌어진 뒤였습니다. 이것이 떠올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이해받는다는 건 어쩌면 인정받는 것과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너의 심정과 너의 분노를 인정한다. 네가 흘린 피와 땀을 인정한다. 너의 살아온 시간을 인정한다. 너를 인정한다. 결국 인정받는다는 건, 시간에 마침표를 찍는 것과 같습니다. 마침표가 없는 글은 읽을 수가 없듯, 시간에도 그런 마침표가 찍혀야 비로소 우리는 이해될 수 있을 겁니다. 왜 우리는, 왜 저는 온종일 탄원서를 쓰는 저 전직 요원이라는 남자처럼 의연히 살아갈 수 없을까요. 왜 끊임없이 의심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잘했다, 애썼다, 와 같은 재채기처럼 가벼운 말 한마디에 이다지도 목이 마른 걸까요. 하지만 다들 솔직하지 못할 뿐이지, 누구나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도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 같은 건 세상에 없습니다. 다만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도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을 인정받고 싶은 거겠죠. 어찌 생각하면 인정 없이 살아간다는 건 미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개가 직립보행을 하고 사람이 네발로 기는, 틀리거나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라는 굳건한 믿음의 세계에서만 가능한지도 모르죠.

쓰다 보니 말이 자꾸 길어지네요.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도 결국 또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드디어 인정받았구나, 하고 느낄 때 찾아오는 그 강렬한 기쁨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겠죠.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닌 것. 교도관님은 그런 걸 가져본 적 있으십니까? 고통스러우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 괴롭지만 없으면 못사는 것은요? 생각해보니 이미 가지고 계시겠네요. 흔히들 자식을 두고 이런 비유를 하니까요. 남의 집에 맨발로 들어가 몇 시간, 며칠 혹은 몇 주씩 어루만져 낳은 결과물을 남겨두고 되돌아 나와야 하는, 인테리어 일이란 게 제겐 바로 그랬습니다. 어찌 보면 예술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팔아 생계를 잇는 화가들의 심정은 과장해서 말하면 거의 피붙이와 생이별을 하는 기분이겠죠.

그녀가 처음 매장을 찾아온 그 날이 떠오르네요. 지은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아파트 단지에서 흔히 볼 법한,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간판들을 외벽에 다닥다닥 따개비처럼 붙이고 있는 상가 건물 1층이 제 가게입니다. 깨진 창문을 누런 테이프로 발라 놓은 오래된 떡집과 역시 그만큼이나 오래된 부동산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있지요. 처음 오신 손님들은 철물점인 줄 알고 무심코 가게 앞을 지나치다가 ‘우림 토탈 인테리어’라는 간판과 매장 앞에 쌓아 놓은 타일을 보고서야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오곤 했습니다.

사실 인터넷에 사이트 거창하게 만들어 놓고 광고하는 업체 치고 제대로 하는 데 없습니다. 디자인이나 번드르르하게 꾸밀 줄 알지, 기술을 모르니 공사 시작하면 인부들한테 통으로 맡기고 들여다보지도 않다가 하자 생기면 바로 발뺌이나 하죠. 현장에 살다시피 하면서 똑바로 하는지 잘 지켜봐야 하는데 한 번에 몇 군데씩 맡아 진행을 하니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있나요. 특히 욕실 공사는 누수라도 생기면 큰일이라 저는 철거부터 시공까지 제 손으로 다 합니다. 당연히 하자 같은 건 있을 수가 없죠.

작고 낡은 가게지만 그래도 늘 일감은 있었어요. 노후화가 한창 진행 중인 아파트라 장마철이면 어느 집 베란다에선 꼭 물이 샜고, 겨울철엔 결로도 많이 생겼고요. 또 세입자 수리라고 해서, 전세나 월세를 놓기 전에 도배하고 장판 깔고 도기랑 싱크대를 저렴한 거로 교체하는 공사가 있는데 제게 들어오는 일감도 주로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 몇 년간은 불황이라 참 많이 어려웠습니다. 가뜩이나 손님이 없는데 어쩌다 오신 분들은 너무 가격을 깎고. 이제 동네 장사로는 안되는구나, 싶어서 온라인 견적 사이트에 입찰도 넣어봤지만, 자재를 빼돌리라는 건지 생살을 깎으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낙찰가를 보고 포기했어요. 인테리어 일 하면서 사기꾼 취급받는 거야 드문 일은 아니지만, 하자가 날 수밖에 없는 엉터리 견적서를 인터넷에서 뽑아 가지고 와서는 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는 고객들을 상대하는 일이 점점 버거워졌습니다. 십 오 년간 기술자로 살면서 돈만 보고 일한 적도 없고 누굴 속여본 적도 없는데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게 납득할 수 없었죠. 묵묵히 하다 보면 누군가는 알아준다,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온다는 위로마저 마치 절 놀리는 말처럼 들렸어요.

생각해보면 이 지경이 된 것도 그냥 결국은…그래요, 제가 무능한 탓이겠죠. 헤어진 아내의 말처럼요. 너는 가족에게 쓸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성의가 없는 거다, 성의가 있는데도 이 꼴이면 그건 네가 무능한 거다, 라고 했었죠. 그래요, 맞습니다. 저는 가정도 못 챙기고 남들처럼 적당히 일할 줄도 모르는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가게 월세라도 벌려고 남의 공사판에 날품팔이를 다니며 이게 딱 네 수준이라고 뇌까리면서도 이따금 억울한 감정이 예고도 없이 솟구치곤 했습니다. 큰 디자인 업체들 홈페이지에서 인테리어 사진을 찾아보면서, 대체 내가 저들과 무엇이 다른가, 생각했어요. 저 같은 영세 업자들이나 어렵지, 그런 데는 공사 스케줄이 일 년 치가 꽉 차 있다고들 하니까요.

주제넘은 꿈. 눈으로만 맛보는 씁쓸한 꿈이었습니다. 한 건 하면 삼만 원, 오만 원 남는 도배일이라도 감지덕지하는 게 현실이었고요.

그래서 금요일 저녁에 그녀가 매장 문을 밀고 들어왔을 때도 또 집에 물이 새서 찾아왔겠거니 짐작했어요.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한숨이 나왔습니다. 이 양반은 어떤 쪽일까. 마른걸레 쥐어짜듯한 금액으로도 성에 안 차 타일값 얼마, 방수제값 얼마, 하며 따지는 타입인가, 그게 아니면 견적을 쳐다보며 멋쩍게 웃다가 조용히 나가버리려나, 생각하면서요.

나이는 30대 중반쯤, 손에 든 노트북 가방으로 보아 직장에 다니는 분 같았어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매장을 한번 휘 둘러보곤 자리에 앉더니 40평대 아파트의 전체 리모델링을 맡기고 싶다고 했어요. 도배만, 타일만이 아니라 전체 리모델링을 말입니다. 뛰기 시작한 가슴을 애써 누르며 일단 집을 보러 갔습니다. 집은 비어 있었어요. 거실 하나에 방이 넷, 화장실이 두 개. 수리 흔적 하나 없이 오롯이 세월에 삭은 듯한 순결한 모습에 마음이 설렜습니다. 그녀는 사진 몇 장을 보여줬습니다. 지금 사는 집의 사진이라고, 이러이러한 가구가 있고 이런 스타일로 진행했으면 좋겠다고요. 거실 벽을 둘러싼 느릅나무 책장, 부모님께 물려받았다는 고가구 협탁에 현대적인 소품이 적당히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예스러우면서 세련된 분위기였습니다. 그 순간 부드러운 크림색 벽지와 브라운 월넛 색상의 강마루. 검은색 중문과 북유럽 조명을 단 우아한 화이트 클래식 주방이 떠올랐습니다. 점쟁이만이 볼 수 있는 미래의 환영처럼, 완성된 집의 내부가 머릿속에 생생히 펼쳐졌어요.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죽어 있던 뇌세포에 찌릿찌릿 전기가 들어오는 것 같았죠.

그녀가 원하는 날짜에 맞추려면 시일이 너무 촉박했습니다. 공사 기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할 요량으로 동네 업자에게 일을 맡기는 건 아닐까 싶었어요. 하지만 결국 개의치 않았습니다.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처음 본 순간부터 그 집은 제 것이었습니다. 견적서의 항목을 고급 사양으로 채워 넣으면서도 이상한 확신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전 제집을 알아보았거든요. 그녀의 취향을 믿었고, 직감을 믿었습니다. 다음날 다시 찾아온 그녀에게 견적서를 보여줄 때도 불안하지 않았어요.

언제 느껴보았을까요, 그런 기분은. 운명의 상대에게 대시할 때의 절대 거절당하지 않으리란 확신. 그런 상대를 앞에 둔 포근함과 이미 현재를 넘어 미래를 꿈꾸는 마음 같은. 그녀는 견적서를 훑어보며 금액이 높은 항목 위주로 간단히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남편과 짧은 통화를 끝낸 뒤 마침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이 견적대로 해주세요, 라고요.

자그마치 일억짜리 공사였습니다.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보다 바보같이 되물었습니다. 하신다고요. 정말 이 디자인, 이 견적 그대로 하신다는 말씀이죠, 라고요.

메이크업으로 덮인 피곤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네. 사장님이 워낙 정직해 보이셔서, 알아서 잘해 주실 것 같아요. 누군가를 상대하느라 오늘 하루 수십 번 갈라졌을 그 눈가의 주름을 보며 갑자기 부끄러워졌습니다. 취조하듯 꼬치꼬치 따지고 드는 얼뜨기 손님과 저의 행동이 다르지 않은 것 같았거든요. 제집처럼 해 드리겠다고, 저는 단지 그렇게 말했고, 그녀는 썰렁한 농담을 듣기라도 한 듯 나지막이 웃었어요.

지난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작업자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 영하 10도는 우습게 내려가는 날씨에 혹여 줄눈이 터지지는 않을까, 실리콘이 안 마르지는 않을까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했어요. 하루 한 끼 겨우 먹고 새벽까지 작업한 날도 많았고요. 틈틈이 해외 인테리어 잡지를 찾아보며 원하는 고급스러운 색과 질감의 자재를 구하려 멀리까지 발품을 팔기도 했죠.

이럭저럭 입주 날짜는 맞출 수 있겠구나, 한숨 돌릴 무렵 그 사달이 났습니다. 주말에 아내가 쌍둥이를 맡기고 일을 보러 간 사이, 제가 베란다 공사 때문에 집을 비운 사이 둘째가 쌍둥이 형과 집 밖에 나와 놀다가 사고를 당하고 말았죠. 저녁이 되도록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본가에서 전화를 받고는 허둥지둥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조그만 머리를 붕대로 싸매고 애처롭게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도의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우두커니 앉아 쳐다보는 아내의 시선이 느껴졌어요.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만 달싹거리는데 아내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너도 사람 새끼니, 라고요.

아이가 퇴원하자 아내는 이혼서류를 내밀었습니다. 분노나 번민을 찾아볼 수 없는 홀가분한 표정에서 지금껏 제가 얼마나 나쁜 남편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죠.

저는 아내를 놓아주었습니다.  달리 뭘 어쩌겠나요.

어느덧 공사도 막바지였습니다. 강마루가 들뜨지는 않았는지 일일이 눌러보고, 도배에 묻은 풀 자국을 지우고, 손걸레로 유리창과 바닥을 닦고…갓 태어난 아기를 따뜻한 물에 씻기듯,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가 달려있는지 확인하듯 제 손으로 하나하나 마무리를 했습니다. 이토록 완벽한 집을 정녕 네가 완성했는가, 속으로 거듭 되뇌면서요.

마침내 그녀와 남편에게 집을 보여주던 날,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탄성을 내지르는 그녀를 보며 느꼈던 이상한 감정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사장님 고맙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하는 말에 뿌듯함과 동시에 돌연 가슴이 아릿하게 아파왔어요. 지금까지 공사를 마쳤을 때 잠시 느꼈던 섭섭함과는 조금 다른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들뜬 얼굴로 남편과 가구 배치를 의논하는 그녀의 모습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왜 저들은 나를 빼놓고 이 집에 대해 이야기 하는가. 누구 마음대로 커튼과 샹들리에를 달겠다고 하나. 콘크리트 알몸이었던 시절부터 사랑해온 내 것이 갑자기 남의 소유가 된다는 게 몹시 부조리하게 느껴졌습니다.

무엇이 그리도 급했는지, 이제 현관 비밀번호를 바꿔도 되냐고 묻는 그녀에게 마무리할 게 남았다고 급히 둘러댔습니다. 아직 이별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그날 밤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고 그 집을 다시 찾았어요. 은은한 거실 조명과 베란다 조명까지 화려하게 밝히고 나니 마치 근사한 쇼룸에 서 있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라면 유명 업체의 프로젝트에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누구에게 내보여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며 거푸 셔터를 눌렀습니다. 아주 잠시, 이런 집을 위해서라면 아들에게 사고가 난 것이나 아내와의 이혼도 후회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검고 매끈한 폴딩 도어 유리에 두툼한 파카를 입은 볼품없는 실루엣이 어리비쳤습니다. 가족을 잃고 곧 이 집마저 떠나보내게 될 남자. 부르트고 피딱지가 앉은 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그 집에 들인 건 단지 일억원 어치의 노력이 아니었습니다. 가진 모든 기술의 정수와 간절했던 꿈, 불발된 미래를 모두 거기 묻었죠. 그래서 입주가 끝난 뒤에도 수시로 드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에 댐퍼를 달아주겠다, 환풍구에서 냄새가 나는지 봐주겠다, 따위의 온갖 핑계를 대면서 말이죠. 결국 그녀는 거실 창문에는 커튼을, 주방에는 샹들리에를 달고야 말았더군요. 그걸 보자마자 얼굴에 확 열이 뻗쳤어요. 블라인드가 세련돼 보이고 모던한 등이 더 어울릴 거라고 그리도 신신당부했는데, 알아서 달아주겠다는 걸 극구 사양하더니 결국 이럴 셈이었구나. 보는 눈이 좀 있는 줄 알았더니 고작 저런 흔해 빠진 취향이었나, 싶었죠.

처음엔 웃으며 맞아주던 그녀도 잦은 방문에 슬슬 싫은 기색을 비치기 시작했어요. 연락도 없이 찾아와 초인종을 누르지 말라고 어느 날엔 대놓고 말하더군요. 그 후론 전화나 메시지에도 전혀 답이 없었고요.

‘사장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전 사장님만 믿어요.’

밤이면 온기 없는 방에 누워 처음에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습니다. 제집처럼 해드리겠다고 했던 약속과, 그 말을 듣고 그녀의 입가에 야릇하게 번지던 냉소도요.

그렇게 그 집마저 미워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그리움을 어쩌지는 못했어요. 그 집을 처음 만나 설레던 그때로 돌아가고만 싶었습니다. 어떤 것도 잃어버리거나 다치지 않고 오로지 부푼 미래만이 가득했던.

매일 밤 아파트 맞은편 건물로 올라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그 집은 4층이었고, 헬스장이 있는 5층 비상계단의 창문으로 아파트 거실이 환히 내려다보였어요. 매일 꼭 한 번씩은 그렇게 봐야 안심이 됐습니다. 궁금해서,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 여자가 또 어떻게 멋대로 집을 망쳐 놓을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원래 있던 베란다 조명을 떼고 거기다 라탄 등을 달아 놓은 걸 봤을 땐 정말 찾아가 그 여자의 목을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녁이 되면 그 집 창문에는 두터운 커튼이 드리워졌습니다. 누군가 훔쳐보고 있다는 걸 아마도 눈치챈 거겠죠. 모든 게 끝이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놓아 주어야만 했어요. 그걸 알면서도 간혹 커튼이 열리면 드러나는 찰나의 풍경을 포기할 수 없어 매일같이 맞은편 건물 계단에 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우연히 아파트 앞을 지나치다 용달차 한 대가 주차된 걸 보았어요. 불길한 예감에 무작정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 집으로 향했습니다.

역시나 일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현관문이 열려 있었고, 문 앞에는 손수레와 공구함이 나와 있었습니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집 안으로 들어갔죠. 목수가 한창 주방과 거실 공간 사이에 가벽을 세우고 있더군요.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마치 제 가슴에 철심이 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가빠왔습니다. 마침 그 여자와 남편이 거실로 나왔어요. 저를 보자마자 그녀는 꼭 커다랗고 무서운 개라도 본 양 몸을 움츠리며 남편 뒤로 물러났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그녀의 남편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당신들이 저한테. 제가 어떻게 했는데. 그때 따져 물었어야 했습니다. 고함을 치든 울며 패악을 부리든 뭐라도 해야만 했어요. 하지만 저라는 인간은 그 순간조차 힘겹게 가슴팍을 오르내리며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었죠.

미쳐 날뛰는 맥박이 관자놀이를 깡깡 두드려댔습니다. 더는 서 있기가 힘들어 비척비척 돌아 나오는 등 뒤로 남편의 말이 날아와 꽂혔습니다. 아내에게 왜 자꾸 연락합니까. 집은 왜 자꾸 훔쳐봅니까. 한 번만 더 그러면 경찰에 신고할 테니 그리 아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그녀의 음성이 희미하게 들려왔어요.

‘지 주제를 몰라…’

그 후에 벌어진 일은, 이미 알고 계시는 것과 같습니다.

교도관님 말이 맞습니다. 제가 좋아한 건 그녀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그걸 아셨을까, 내내 생각했어요. 수사관이나 변호사가 아니라 심리전문가인 교도관님만이 간파할 수 있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제가 부수었던 가벽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충분히 도망칠 시간이 있었음에도, 경찰이 들이닥치는 그 순간까지 저는 해머를 들고 가벽을 부수고 있었으니까요. 저에겐 도망치는 것보다 그 고통스러운 이물을 철거하는 게 우선이었던 셈이죠.

무언가를 온전히 사랑한다는 건, 어쩌면 그것과 한 몸이 된다는 의미인지도 모릅니다. 내 분신. 나의 전부. 아내가 쌍둥이들을 가끔 이렇게 불렀던 것처럼요. 교도관님의 곁에도 갓 태어난 분신이 잠들어 있겠지요. 오늘 문득, 아이가 아내에게 분신이 되기까지에도 저처럼 너무 구구해 차마 꺼내지 못한, 그래서 기나긴 편지로밖에 풀어낼 수 없는 나날들이 퇴적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도관님은 마음의 준비가 되셨습니까. 사랑하면서 또한 사랑하지 않을 자신, 있으신가요.

저 너머로 돌아갈 수 있을까. 크림색 담장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이제는 무엇을 잡고 살아야 할까. 그 집이 아닌 다른 어떤 무엇이 날 그토록 깊은 구덩이까지 끌어내리고 내 심장을 그토록 분홍빛으로 펄떡이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또다시 흙손을 쥐는 상상을 합니다. 새 타일의 차갑고 매끈한 감촉, 샤아악 하고 퍼지는 회반죽의 질감, 손등을 타고 전해지는 망치질의 환통을 하루에도 몇 번씩 느낍니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헐벗은 콘크리트의 축축한 냄새에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

그러니 교도관님, 부디 저의 부탁을 들어주세요. 저에게 집을 맡겨주십시오. 사시는 집이 주택인지 아파트인지 평수는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 아이가 커서 학교 들어갈 때쯤 되면 아마도 이사를 한번 하셔야 할 거고, 낡은 집이면 리모델링이 필요할 테고요.

제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하셨죠. 아직도 그 마음에 변함이 없으시다면, 그렇다면 교도관님, 제가 7년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을 때 부디 그 집의 공사를 제게 맡겨주세요. 교도관님이 절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것뿐입니다.

제집처럼, 정말 제집처럼 해드리겠습니다.

피오마

Peace of mind

댓글 2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57 단편 x가 보낸 편지 단팥방맛이없어 2022.01.04 0
256 단편 꿈통신1 희야아범 2022.01.06 2
255 단편 버틀러의 추억 - 하이 데이브 Regzmk2 2022.01.08 0
254 단편 붕어빵 마음 우주안에책 2022.01.16 0
253 단편 랜덤, 박스 우주안에책 2022.01.16 0
252 단편 어둠속을 헤엄치는 우리 우주안에책 2022.01.17 0
251 단편 추억교정소 희야아범 2022.01.20 3
250 단편 [공고] 2022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명단 mirror 2022.01.20 4
249 단편 안드로기노우스의 사랑 운칠 2022.01.22 1
248 단편 빛, 그리고 당신 우주안에책 2022.01.24 0
247 단편 의견설화 우서림 2022.01.25 0
246 단편 슭곰발 운칠 2022.01.25 4
245 단편 프로토타입2 운칠 2022.01.26 3
244 단편 당신이 떠나기 2분전 우주안에책 2022.01.27 0
243 단편 나만 아는 속도 우주안에책 2022.01.27 0
242 단편 솔드아웃 인생 우주안에책 2022.02.03 0
241 단편 그래서 범인이 누구야 우주안에책 2022.02.04 0
240 단편 인터넷 공동체 우주안에책 2022.02.07 0
239 단편 유리차원1 희야아범 2022.02.08 2
단편 제집처럼 해드리겠습니다2 피오마 2022.02.09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