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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번제(燔祭)

2012.07.01 00:4907.01

1.
오늘도 느지막이 눈을 떴다.
시계는 여전히 제자리다. 가끔씩 세월이 얼마나,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궁금하다.
눈을 뜨면 아침이고 어둠이 드리우면 잠을 청하는 삶을 산다. 달력에 치던 동그라미도 십이월 팔일을 끝으로 그만두었다. 겨울이 지난 건 확실하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이년이 지났다. 태엽소리는 멈췄지만 시간은 확실히 제기능을 하고 있다.
뭉친 어깨를 두드리며 창문을 활짝 열었다. 집 안에 틀어박혀서 그런지 컨디션이 엉망이다. 친구들이 본다면 놀랄 정도로 살이 불었다.
물론 친구란 인간들은 오래 전에 거리 곳곳에 쌓여져 가솔린을 뒤집어 썼기 때문에 내가 얼굴을 붉힐 일은 없다. 아무튼 ‘살아있는’ 그들이 봤다면 그랬을 거라는 얘기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매우 흡족해하실 모습이다. 내가 육십 킬로그램이 채 안 나가던 때에도 ‘집 귀신’이라고 소리를 질렀으니까. 별로 억울하진 않았다. 반년동안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히스테리였다. 아버지의 비난은 소나기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그리 연로하지도 않으시건만 욕설을 쏟아 붇곤 헐떡이며 잠에 빠져들었다. 안방이 조용해지고서야 난 옷을 챙겨 입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가 침대에서 하루 종일 보내는 시간에 아들이 일한단 사실을 몰랐다. 물론 알았어도 신경 쓰셨을 것 같진 않다.
어차피 이젠 다 과거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원대로 진짜 ‘집 귀신’이 되었다.

하늘은 여전히 파랗다. 하지만 오래 열어놓을 수는 없다. 예의 그 냄새가 집안으로 스며들 터였다. 공기에 눌어붙은 악취. 저 숨 막히는 연기가 어디까지 왔는지 살펴야 한다. 이제 도시는 내리막 끝에 도달했다. 거대한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는 마지막 숨을 쉬고 있다. 아마 다른 코끼리들도 마찬가지일거다. 저번 달에는 텔레비전 수신이 끊겼다. 덕분에 정든 아나운서를 떠나보내야 했다. 비록 24시간내내 같은 표정으로 같은 얘기를 지껄였지만 아름다운 여자였다.
라디오는 언제 끊길지를 두고 내 자신과 내기를 하고 있다. 간간히 잡히는 전파가 이번 주를 버티면 아껴둔 소고기를 먹고, 못 넘긴다면 역시 아껴둔 닭을 먹기로 했다. 어디가 이겨도 나는 좋다. 이런 거지같은 세상에서 손해나는 내기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피스텔 십 구층에서 보는 도시는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을 연상케 한다. 이 지경이 되기 전에는 전면을 뒤덮은 유리가 번쩍이고, 생명력으로 꿈틀대던 건물들이다. 사흘 전에는 신호등이 미친 듯이 깜짝이더니 꺼졌다. 신호등 다음에는 가로등이 꺼졌다. 암흑에 잠긴 도시는 인간이 인간을 불태울 때만 야경을 보여준다. 으스름하고도 섬뜩한 밤 풍경.
며칠 전, 몇 주 전인가? 건너편 건물에서 누군가 손전등을 비춰주었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만약 탈출했다면 무사히 빠져나갔기를.
세 블록 건너에서 희뿌연 연기가 솟아오른다. 놈들은 점점 빠르게 다가온다. 사실 라디오보다 내가 먼저 끝장날 지도 모른다.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귄다. 살점을 배불리 뜯어먹는지 점점 커지고 있다. 지금처럼 바깥을 볼 때면 어릴 적에 보았던 영화가 떠오른다. 시커먼 새들이 세상을 뒤덮었던 흑백 영화가 있었다. 물론 현실은 스크린보다 훨씬 끔찍하다. 새들의 싯누런 부리와 먼지로 뒤엉킨 깃털을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치밀었다. 마음껏 배를 채워 피둥피둥 살들이 올랐다. 인간이 세상에 도래한 이후로 놈들에게 가장한 행복한 시간이 아닐까 싶다.
냉장고에서 색이 바랜 양상추와 샌드위치를 꺼냈다. 아직 전기는 들어온다. 전기가 들어온다고 해서 불을 켜거나 할 수는 없다. 프로메테우스가 되었다간 내 몸의 기름으로 어둠을 밝히게 될 테니까. 낮에라도 가전제품을 사용할 수 있어서 다행인가? 수많은 책의 주인공마냥 통조림만 먹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다. 뭐 난 주인공도 아니지만. 사실 전기도, 물도 가스도 남아돈다. 줄어드는 건 인간뿐이다. 빵에 양상추를 끼워 입에 털어 넣었다. 해질녘엔 우아하게 커피와 치즈 케이크를 먹기로 했다. ‘음식은 배불리 먹어라’ 어머니의 좌우명이다. 밥투정을 하면 불벼락이 떨어지던 어린 시절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 되니 옜날 생각이 더 많이 난다. 아버지는 세상을 어깨에 짊어질 듯했고 어머니는 아름다웠다. 맙소사. 어린 시절이라니. 곰팡내 나는 옛날 책같다.  
이백리터 들이 냉장고 안에 레또르뜨나 통조림 따위의 가공식품은 하나도 없다. 난 내 몫의 행운은 다 누리고 죽기를 원한다.
말라빠진 육포 따위 빌어먹을 하늘의 신도들이나 씹으라지.
냉장고를 비우는 게 먼저일지, 전봇대에 매달리는 것이 먼저일지 궁금하다.

2.
-인간들- - 새로- -상에
진정—구원 –을- 바- - -

젠장, 들리는 건 빌어 처먹을 염불뿐이다.
어제부터 하루 종일 라디오에 붙어있었다. 완전히 낡아버린 1990연식 단파 라디오 수신기. 아버지가 물려주신 라디오다.
USB도, CD플레이어도 달려있지 않은 라디오는 이미 아버지 시대에 구식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어머니가 자리만 차지한다며 치워버리자 얘기해도 아버지는 항상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당신의 아버지께 받은 첫 선물이라 했던가.
터치 스크린과 함께 자란 내게 라디오는 흥미로운 물건이었다. 요술램프 같다고 할까? 커다랗게 돌출된 버튼들. 시커멓고 괴물 같은 생김새. 아직 모든 것이 정상이던 어린 시절, 그러니까 피 묻은 깃발이 휘날리기 전에 나는 주파수 휠을 돌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 영향인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할 때 라디오를 버릴 수 없었다.  덕분에 바깥 얘기를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었지만.
오래전에 끊겨버린 공영방송 대신 개인 주파수가 등장했다. 종말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라디오에만 매달렸으니까 난 꽤 충성스런 청취자였다. 재밌는 것들도 꽤 많았다. 지독한 노래실력을 자랑하던 인간부터 시작해서 울기만 하던 여자(도대체 왜 방송을 하는지)도 있었고 나름 문자로 사연과 신청곡을 받아 진행하던 방송다운 방송도 기억난다. 괜찮은 목소리의 남자였다. 아주 더운 날, 한여름으로 기억하는데 그는 며칠 새 문자가 한통도 안온다고 말하곤 훌쩍였다. 청취자들이 다 사라졌다고 중얼거렸다. 한참 침묵하던 남자는 쓸쓸한 클로징멘트(정확하게는 기억이 안나는데 종말어쩌구였다)와 함께 방송을 끝냈다. 그의 마지막 방송이었다. 부디 총을 입에 넣은 채로 -입이라 할 만한 부분이 남아있을 때 얘기다- 의자에 널부러져 있진 않기를 바란다.
국내의 방송에 질릴 땐 다른 나라의 온갖 언어를 사용한 방송을 들었다. 인터넷이 백년도 전에 끊겨 오랜만에 접하는 외국 소식이었지만 절망에 빠진 목소리로 보아 다를 건 없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하나둘씩 노이즈로 변했고 수 십개의 방송은 어느덧 두 개가 되었고- '생존요령’을 되풀이하는 기계음과 지금 듣고있는-

불-에 -- - 화시-키는-
-그대-의-일-- --   --
- -구원--하-의--신--

결국  이 놈 하나만 남았다.
감도가 나빠 띄엄띄엄 들리긴 하는데 지껄이는 바는 짐작이 간다. 인간기름을 짜내어 천국에 오르자는 얘기겠지.
어찌되었건간에 내기는 아직 유효하다. 라디오는 주말을 버텼고 나도 아직 살아있다. 소고기와 닭은 조금 더 놔두기로 했다.
저 염불이 다음 주에도 라디오에서 들리면..
그 때 먹어치울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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