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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2012.06.30 22:0006.30

1. 괴물

문 밖에는 괴물이 산다. 붉은 얼굴에 눈이 툭 찢어지고 사나운 이빨을 번들거리는 괴물이다. 울음소리가 우레와 같아 지축은 흔들고 꼬리로 불꽃을 내뿜는다. 식성도 요란하기 그지없어 다리달린 것은 책상에서부터 비행기까지 가리지 않는 것이 없다. 게다가 한 번 노린 먹이를 절대 놓치지 않는 집요함까지 지녔으니 이 어찌 두려운 괴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 괴물이 내 방문 앞에 둥지를 튼 건 4년 전의 일이다. 내가 지금 대학교 2학년 쯤 되니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이야기일 것이다. 추측형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이 긴장된 나날이 너무 오래되어 옛 기억이 희석되었기 때문이며, 내 방 안에 붙어있는 달력이 2007년의 것에서 멈춰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쇄골 뒤가 서늘하다.

4년 전 어느 날 저 괴물이 내 앞에 나타났는지는, 애석하게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일은 저 괴물의 그 무시무시한-내 방문을 통째로 집어삼킬만한 아가리를 피해 방으로 도망쳐 들어왔던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괴물의 입은 너무 커서 내 방 안으로 미처 들어오지 못했다.

어째서 저 괴물이 나를 노리게 되었는가는 자명하다. 이 세상에 먹어치워도 좋을 만큼 가장 쓸모없는 존재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의 언행에 의하여 증명되었다. 부모님들이 언제나 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에서-너는 언제나 돼서야 사람 구실을 할래? 흑흑흑.-, 언젠가 다니던 학원 선생님의 눈빛에-저새끼만 없어도 우리 학원 평균이 올라가는 건데…….- 같이 고등학교를 다니던……그 사람들을 표현할 말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와 동갑인 어떤 아이들로부터-아 쟤랑 같이 앉기 싫다고!-충분히 증명되었다. 내가 살아갈 가치가 없음은 충분히 증명되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너무하잖아.

괴물은 어느 순간 당연하다는 듯 거실에 있는 물건을 전부 집어삼키고 내 방문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어찌할 대응수단도 찾지 못한 채 그저 방 안에 틀어박혀 4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이젠 뭘 어쩌기에도 너무 늦었다. 모든 상황이 종결된 것이다. 나는 갇혀있고. 괴물은 저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내가 잡아먹히지 않은 것은 내가 충분히 겁쟁이이기 때문이리라. 만일 내가 조금이라도 용기를 내서 방문을 지나 현관으로 탈출을 시도했더라면 괴물은 그대로 나를 와그작! 하고 씹어먹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내 주제를 알고 위험한 모험은 하지 않는 인물이어서, 방 안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며 하루하루를 견뎌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힌 사실은 내가 고립되어 있는 것을 알아챈 국제평화유지군-혹은 적십자회가 지속적으로 구호물자를 보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보통 괴물이 잠들어있을 시간대인 오후 세시에서 오후 여섯시 사이에 창문을 통해 식량이나 기타 물자를 전달해주었다. 하지만 그럴 여력이 있다면 괴물의 시선을 끌어 내가 탈출할 수 있게 해주면 좋을텐데, UN은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아마도 중립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 방과 저 괴물이 있는 거실이 각각 하나의 정당한 독립국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까.

어쨌거나 농성은 손쉬웠다. 나는 애초에 이것이 천직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잘 버텼다. 내 방에는 책도 많고 인터넷도 뚫려있어 갇혀있는 시간을 보내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식량과 의복 또한 호재였다. 위생환경이 조금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만, 거기까지 바라는 것은 큰 사치다. 화장실은 거실의 현관보다도 멀리 떨어져있다. 머리 한 번 감으러 나갔다가 괴물에게 머리부터 잡아먹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방안에 콕 틀어박혀, 저 괴물이 내게 관심을 잃고 떠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나에게는 최선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 이불 밑에서 그걸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2. 구멍

이불 밑에 무엇이 있는지 두려워 방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자취생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 이 이야기가 처음 돌았을 때 많은 이들은 3년 동안 단 한 번도 이불을 빨지 않은 자취생의 위생관념에 대해서 비웃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불도 안개고 살 수 있는가.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이불 위에 누울 때가 얼마나 많으며, 굳이 감시하는 사람도 없는데 방 안을 청결히 해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찮은가를 모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오랜 시간 이불을 방치하면 그 밑에 정말로 무언가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이불 밑의 구멍을 발견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밤새 뒤척이던 도중 이불 밑으로 말려들어간 휴대폰 충전기를 찾기 위해 이불을 들췄을 때 그 구멍을 발견했다.

그래. 구멍 말이다.

지름이 15cm정도 되는 작은 구멍이었다. 새까만 구멍이었고,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구멍이었다. 3D 게임의 폴리곤에 구멍이 뚫린 모습 같았다. 혹시나 해서 휴대폰 불빛을 비춰봤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 안은 얼마나 깊을까 싶어 연필을 집어넣어 봤다. 연필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귀를 붙이고 구멍에서 어떠한 소리가 들려오지는 않는지 살폈다. 텅 빈 지하실처럼 휑한 소리가 들렸다. 큰 용기를 내어 손가락을 살짝 집어넣어 보았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다만 구멍 밑은 내 방보다 온도가 훨씬 낮은 듯, 구멍에서 한기가 끊임없이 새어나왔다.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걸린다지만, 그대로 저 구멍을 방치해둬서 좋을 건 없어보였다.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문 밖에 괴물이 도사리고 있는 마당에 바닥의 구멍에서 뭐가 튀어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나는 낡은 만화책으로 구멍 위를 덮은 다음 박스테이프로 그것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혹시나 싶어 인터넷으로 검색한 괴물퇴치 부적도 잘 그려넣었다. 이 구멍 밑에서 튀어나올 무언가가 문 밖의-자물쇠를 걸어두는 것만으로도 들어올 생각을 못하는-괴물만큼 멍청하다면 이것으로 충분하리라.

구멍을 가린 책 위로 다시 이불을 깔며 나는 내가 어쩌다 이리 되었나 한탄했다. 이게 다 문 밖의 괴물 때문이다. 내가 방 안에 틀어박히는 일만 생기지 않았더라도 이불이 계속 깔려있진 않았을 테고 이러한 구멍과 마주할 일도 없었을 텐데. 만일 밖에 나갈 수 있다면 지금 먹는 형편없는 음식들이 아닌, 좀 더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을 먹으며 사람다운 옷을 입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

그게 불가능한 쓸모없는 말종이니까 괴물이 들이닥친 거지만.

우울했다. 내게 우울하다는 건 피곤하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어렸을 때부터 울적한 일이 있으면 항상 꿈속으로 도피하던 나는, 어느새 우울한 생각이 들 때 마다 견딜 수 없을만큼 강렬한 졸음을 느끼게 되었다. 잠을 자는 순간만큼은 비참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평온해질 수 있는 그 시간을 나는 사랑했다.

이불 밑 한 구석이 툭 튀어나와서 잠자리가 불편했다. 몇십분을 뒤척인 뒤에야 나는 잠에 들 수 있었다.

3. 꿈

나는 거의 항상 꿈을 꾼다. 깊은 잠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항상 악몽을 꾼다. 문 밖 괴물의 울음소리 때문에 기분이 뒤숭숭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악몽은 이런 식으로 구성된다.

나는 집 밖에 있다. 나는 부모님이나 또는 그에 준하는 아는 누군가-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다. 나에게는 친구가 없다. 꿈속에서만 친구로 등장하는 누군가일지도-를 찾는 중이다. 그들은 항상 내 눈 안에 있지만 내 손이 닿는 범위에는 절대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소리를 쳐본들, 막연하게 들리는 소리는 내뱉어지지 않는다. 결국 나는 그들에게 다가서기 위해 먼 길을 돌아가게 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려고 하면 옆으로 간다. 지하철을 타면 뒤로 돌진한다. 버스를 타면 그만 졸아서 정류장을 놓치거나 노선이 변경된다. 나는 어찌해도 그들에게 다가설 수가 없는 것이다.

때로는 학교에서 알고 지내던 옛 사람들이 꿈에 등장하기도 한다. 이 경우 그들은 반드시 내 손에 닿는다. 혹은 그들의 손이 내 몸에 닿는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 적의를 드러낸다. 나는 무기를 빼들어 그들의 몸을 찌른다. 목을 조른다. 눈알을 파낸다. 나는 꿈을 해석하면서 심리상태를 분석하는 미신에 빠져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하나같이 우울한 내용의 꿈을 생각하면 스스로의 인격에 문제가 있나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혹은 인격에 문제가 생기려고 하고 있거나.

나는 궁금했다. 저 괴물의 울음소리만 없다면, 좀 더 편한 꿈을 꿀 수 있을까.

괴물의 울음소리는 꿈 속 까지 나를 쫓아왔다. 그 울음소리는 때로는 선생님의 비웃음으로, 아이들의 욕설로, 부모님의 흐느낌소리로 바뀌어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날 미치게 했다.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니까 제발 좀 닥쳐. 네가 그렇게 울지 않아도 다 들린다고.

꿈속에서 비명을 아무리 내지른들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그것만큼은, 현실과 똑같다.

꿈에서 깨어나면, 언제나 저 문을 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누군가를 부둥켜안고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안도의 한숨을 흘리거나 펑펑 울고 싶었다. 그러니까 저 빌어먹을 괴물만 없었다면! 거실에 있는 것을 다 먹어치웠으니 우리 부모님도 그 뱃속안에 있을까. 모를 일이다. 그 분들은 나와 달리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니 용케 잘 빠져나갔을지도. 하지만 그럴 능력이 있다면 나도 좀 끄집어냈으면 좀 좋을까.

악몽 때문에 잠에서 깨면 나는 컴퓨터를 켰다. 생각할 것도 없는 반사적인 행동이다. 오래 된 습관이었다. 다시 잠들어 악몽을 꾸느니 그대로 밤을 새는 게 낫다는 것이 나의 중론이었다. 밤을 새고 계속 인터넷의 게시물을 뒤적거리며 정신을 소진해서, 지쳐 쓰러지게 된다면 꿈을 꿀 기운도 없으니까. 최고의 방법이다.

부모님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기에도 최고의 방법이다. 어쨌거나 밤을 지새우며 인터넷에 몰두하는 내 모습은 인터넷 중독자와 다를 게 없었다. 다를 게 없다고 해야하나. 사실 그냥 인터넷 중독자였다. 지쳐 쓰러질 때 까지 인터넷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잠도 들 수 없다니. 마약 중독자가 나와 같을까.

하지만 나는 이 일을 그만둘 수 없었고, 부모님과의 관계는 그냥 파탄이 났다.

4. 부모님

우리 집안이 다 같이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려면 내가 글씨도 제대로 못 쓰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어렸을 때 우리는 처음이자-내가 워낙 어리던 시절이라 확실하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해수욕장에 놀러갔다. 그 때 아빠는 동네에서 제일 잘나가는 요리사이자 월급쟁이였고 엄마는 유치원 선생님보다도 애들을 잘 가르치는 슈퍼맘이었다. 아빠는 일 때문에 바빠서 언제나 늦었고 엄마는 주변 이웃들에 비하면 다소 엄한 편이었지만, 그 때 우리는 재정적으로나 가족 간의 화목으로나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이런 행복에 금이 간 건 내가 초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 되던 그 사이다. 계기는 둘이다.

하나는 집단따돌림 문제였다. 그 때 즈음 우리 집은 더 큰 집으로 이사했는데, 나는 변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남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미덕이라 믿으며 자란 아이에게 이 동네의 아이들은 너무 가혹했다. 나는 그들의 좋은 스트레스 해소 대상이었다.

다른 하나는 IMF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경제위기에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고, 아버지도 그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위기를 기회로 사용하고자 하셨는지 치킨집 사업을 벌였는데, 그냥 망했다. 아버지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중국으로 건너가서까지 돈을 벌어오시려고 할 만큼 의욕적이신 분이었는데, 중국에서도 사기를 당했다. 그 전까지 외출할 때 마다 백화점을 들르며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던 우리 집은 한 순간에 빚더미에 올라앉고 말았다. 엄마는 이런 변화를 견딜 수 없었는지, 앓아눕고 말았다.

우울증과 심장부정맥과 허리디스크와 위장염과 공황장애와 각종 기타 등등. 의사가 우리 엄마에게 내린 진단이었다.

나는 충격 받았다. 언제나 제일 강하고 제일 믿음직스럽고 항상 나를 감싸주던 엄마가 그렇게 약한 사람인 줄 몰랐다. 심장병이나 정신병 같은 건 텔레비전 속 드라마에나 나오는 건 줄 알았다. 드라마 속 비극의 여주인공들은 우울증 때문에 괴로워하며 하루하루를 눈물로 보냈다. 근데 이제는 엄마가 그 드라마 속 비극의 여주인공이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멋진 모습으로 내 공부를 지도해주던 엄마가 이제는 신경안정제를 먹어가면서 밤마다 울었다. 수원역 노숙자들처럼 다리를 절었다.

나는 어렸다. 아픈 엄마를 감싸고 위로해줄 만큼 충분히 강하지도 못했다. 나는 엄마를 외면하고 컴퓨터 게임 속으로 도피했다. 아빠는 어떻게든 돈을 벌려고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는 나와 엄마 둘 뿐이었는데도. 내가 한 일이라고는 컴퓨터 바꿔달라고 징징대거나 왜 다른 집 애들 엄마처럼 잘해주지 않는 거냐고 징징거린 것 밖에 없었다. 엄마는 더 아파졌고 더 앓아누웠고 더 약해졌다. 나는 더 외면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중학교 과정까지 전부 깨우친, 나름의 수재였다. 내가 특별히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었고 순전히 엄마의 단독과외 덕분이었다. 엄마가 건강했을 때 나는 반에서 상위권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앓고 난 후, 성적은 딱 중학교 때 까지만 유지됐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성적이 바닥을 쳤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 된 왕따가 더 심해졌다. 이제는 선생님도 날 지켜주지 않았다.

나는 컴퓨터 게임에 더 몰두했다. 그건 엄마의 도움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엄마가 밤마다 울어도, 아빠가 돈을 못 벌어 와도 게임 속의 나는 강했다. 나는 게임 속 괴물을 용감하게 무찌르는 영웅이었다. 거기선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못했다.

하지만 매일을 게임 속으로 도피한 나 역시 아무도 도와주지 못했다.

괴물이 들이닥친 날. 집안을 뒤흔드는 괴성과 각종 물건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던 날에도 나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5. 앨리스

톨킨은 양탄자에 뚫린 구멍을 보고 호빗족을 구상하고, 나아가 반지의 제왕을 구상했다고 한다. 나는 바닥에 뚫린 구멍을 보고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구멍을 발견한 다음 날 나는 이불 한 구석이 푹 꺼진 것을 발견했다. 책을 붙여둔 테이프가 떨어져나간 모양이었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다고 생각하며 이불을 들추자 나는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멍이 어제보다 커져 있었다.

이제 만화책으로 구멍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적당한 책이 없나 책장을 살폈다. 가장 크고 두꺼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마틴 가드너의 주석달린 앨리스. 내가 작가가 되려고 했을 때 공부하려고 샀던 책이었다.

나는 책으로 구멍을 덮으며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였다. 이젠 쓰지도 않는 소설을 위해 산 책이니, 아까울 것도 없었다. 차라리 이 책을 살 돈이 나에게 있었으면 치킨이라도 한 마리 더 시켜먹었을 텐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었을까.

어렸을 때는, 그냥 엄마한테 칭찬받는 일이 하고 싶었다. 엄마가 건강할 때는 문제를 잘 풀면 칭찬받았다. 그 만큼 내가 배운 게 많아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앓아눕고 내 성적이 나빠지자 문제를 잘 풀어서 칭찬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많이 읽고 글을 많이 썼다. 엄마는 아픈 와중에도 칭찬해줬다. 책 읽고 글 쓰는 건 문제 푸는 것 보다 쉬운 일이었다.

소설쓰기는 당시 인터넷에 푹 빠져있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해봤을만한 놀이였다. 포켓몬스터, 디지몬, 봉신연의 등 각종 만화 커뮤니티에는 기본적으로 소설 게시판이 달려 있었다. 우리는 거기에 시덥잖은 소설을 올리며 서로 비평가인 양 잘난 척하며 놀았다. 나중에 판이 좀 커지고 퇴마록이나 드래곤라자처럼 히트작이 생겨나자 작가라는 꿈을 꿔보는 바보들이 늘어났다. 그 중에 소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냥 유행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실을 좀 더 일찍 깨달은 사람은 진즉에 소설을 그만두고 자기의 미래를 개발했다. 나는 멍청하게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계속 소설을 썼다.

아니지.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나는 소설을 쓴다고 말만 했다. 언젠간 소설가가 될 거라고 떠들면서 게임에만 열중했다. 게임에만 열중하는 주제에, 소설 쓰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가리지 않고 사댔다. 엄마는 더 칭찬해주고 더 많이 사줬다. 마틴 가드너의 주석달린 앨리스는 그 중에서도 제일 비싼 축에 드는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읽어본 적도 없었다.

내가 소설이라도 열심히 썼다면 세상에 조금이라도 쓸모가 생겨, 저 괴물이 들이닥치는 일이 없지 않았을까. 이제와 생각한다고 해도 너무 늦은 일이었다.

소설을 아무리 써본들, 이 방에 엄마는 없다. 괴물의 울음소리만 들린다.

나는 책 위로 다시 이불을 깐 뒤 잠이 들었다. 밤 새워서 인터넷을 해서 너무 피곤했다. 나는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들었다.

6. 태만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재난이 있고, 그 온갖 종류의 재난에 당한 피해자가 있다. 나는 확실히 단언해서 말할 수 있다. 그걸 두고 본 사람이 나쁘다. 그 지경이 될 때 까지 아무것도 못 했다는 것 자체가 예정 된 비극의 복선이다.

구멍이 더 커졌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놀라기 보다는 내 자신의 안이함을 자책했다. 한 번 커진 구멍을 조금 더 큰 책으로 막아서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제 구멍은 스케치북만큼 컸다. 나는 이불 정리했다. 무턱대고 덮어뒀다간 저 구멍에 빠져 큰일을 치룰 수도 있었다.

나는 잠자리를 방바닥에서 컴퓨터책상으로 옮겼다. 의자에 앉아 책상에 엎드려 잤다. 불편한 자세였고 허리와 목이 아팠다. 학교 책상에는 앉자마자 곯아떨어졌는데 집 책상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잠들기가 힘들었다. 선잠을 자는 덕분에 나는 매일같이 피곤했고 악몽을 꿨다.

이제 괴물은 꿈속에까지 쫓아왔다. 나는 괴물을 도망쳐 이리저리 뛰다가 갑자기 나타난 구멍속에 쑥 하고 빠지고 만다. 그 속에는 괴물이 있다. 나는 괴물을 도망쳐 이리저리 뛰다가 갑자기 나타난 구멍속에 쑥 하고 빠지고 만다. 그 속에는 괴물이 있다…….

나는 더욱 더 인터넷에 몰두했다. 잠자는 시간은 이제 하루에 세 시간도 되지 않았다. 내 방에는 거울이 없지만 내 얼굴에 기미가 가득하리라는 건 뻔했다.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방문이 쿵쿵 울렸다.

인터넷 세상은 평온했다. 바보들이 많았고 허풍쟁이도 많았다. 나는 그 속에서 나름의 이름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주로 나쁜 쪽으로 유명했다. 인터넷 게시판은 게임처럼 몬스터 잘 잡는다고 환영받는 세상이 아니었다. 나처럼 성격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게시판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을 사칭하며 여러 사람들을 골탕 먹이는 일에 몰두했다.

거짓말이란, 고도의 정신노동이다. 이야기의 앞뒤도 잘 짜 맞추어야 하고 언제 어디서 갑작스레 닥쳐올지 모르는 진실의 공격에도 대비해야 했다. 다행히 난 그 분야에서는 전문가였다. 오랫동안 소설 쓴다고 이거저거 생각해왔던 경력이 도움이 되었다. 소설 속에서 극중의 인물들을 연기하던 내 능력은 탁월했다.

하지만 역시 거짓말은 오래되고 꼬리가 길면 잡히기 마련이다. 나는 내 거짓말을 간파한 사람과 마주쳤다. 내가 사칭을 하던 당사자였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지만 나는 되려 그 사람을 사칭으로 몰았다. 서로가 자신임을 증명하는 온갖 증거들을 올려대며-내 경우에는 조작해대며-밤을 지새웠다. 일주일에 걸친 큰 싸움이었다. 결국 상대의 닉네임이 게시판에서 사라지고 내 승리가 확정되었을 때 나는 오랜만에 환호했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피곤했고 목이 말랐다.

나는 기지개를 펴며 습관처럼 이불이 펴져있는 잠자리로 향했다. 내가 좀 멍청했다. 이불이 있던 자리에는 구멍밖에 없는데. 하마터면 구멍에 빠질 뻔 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구멍은 이제 바닥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컸다. 사람 두셋이 드나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언제 이렇게 커졌지?

내가 인터넷에 몰두하는 동안 계속해서 커진 모양이었다. 아니, 이렇게 커질 거라는 건 구멍을 본 이튿날부터 알았다. 그냥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고 뭔가 하기도 귀찮아서 현실에서 도피했을 뿐이었다. 전부 내 탓이었다. 태만한 내가 문제였다.

부모님의 일도, 친구들을 사귀지 못한 것도, 성적이 떨어진 것도 내가 게을렀기 때문이었는데, 아직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한 것이다.

구멍은 커다란 괴물의 입 마냥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문 밖에서는 여전히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피곤했고 목이 말랐다. 태만해도 좋을 시간이 거의 끝났다. 이제 어떻게든 행동하지 않으면 저 구멍 속에 빠지게 된다.

7. 문

문 밖에는 괴물이 있고 방 안에서 구멍이 커지고 있다.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창문으로 탈출을 감행했을 것이다. 자신의 방이 17층에 있든 170층에 있든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탈출에 성공한다. 그런데 나는 내가 실패하리라는 걸 알고 있다. 창문에 매달려 어디론가 가기에 내 체력은 너무 약하고 이 방 안에는 도구가 없다.

단일선택지다. 문으로 나가야한다.

나는 그 때부터 밥을 굶었다. 긴장 되서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기는 커녕 허기와 갈증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지만 나는 음식을 모았다. 문을 나서는 순간 괴물의 주의를 끌 미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이틀 정도 밥을 굶자 현기증이 나고 뱃속을 쥐어짜는 듯 통증이 느껴졌지만 음식이 그런대로 많이 모였다. 좋아. 이걸 던지고 곧바로 현관으로 빠져나가는 거야.

허기는 적절한 마약이었다. 점을 덜 자고 밥을 못 먹은 내 판단력은 술에 만취한 노숙자와 비슷했다. 그래서 나는 문고리를 잡아당겼을 때 안 열리는 문을 붙잡고 한참을 덜컹거렸다.

으르르르르르르르릉! 괴물이 뭔가 낌새를 느낀 듯 울음소리를 냈고 나는 깜짝 놀라 주저앉았다. 왜 문이 열리지 않지? 당황하던 내 눈에 자물쇠가 들어왔다. 그렇지. 저건 괴물이 열쇠로 문을 열까 무서워 내가 따로 설치해 둔 자물쇠였다. 그런데 열쇠는 어디에 있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무리 방을 뒤져봐도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물건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교과서도 잃어버리고, 핸드폰도 잃어버리고, 언젠가는 엄마의 돈이 잔뜩 든 가방을 잃어버린 적도 있다. 엄마는 그 때 마다 나를 야단치고 혼냈지만 내 건망증은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고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집 밖으로 나갈 일도 별로 없으니 물건을 잃어버릴 일도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생각했다. 생각해라 생각해라 생각해라. 나는 뭔가 막힐 때 그렇게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엄마는 그런 내 버릇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뭔가에 집중을 할 때 마다 다리를 떠는 버릇, 거짓말 할 때면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목소리가 커지는 버릇, 밤마다 새벽까지 책을 읽느라 밤을 지새우던 버릇, 중요한 물건을 항상 깜빡하는 버릇.

그래서 엄마는 다리를 떨지 못하게 바닥에 앉도록 시켰고 거짓말을 할 때 마다 알아차렸으며 밤에는 내 방의 불을 꺼버렸다. 그리고 내 중요한 물건들은 언제나 책상 서랍 속에 두라고 말했다.

과연. 내 책상 서랍 속에는 소중한 물건이 가득했다. 어렸을 적 내 사진들, 이 아파트로 이사오기 전 친구들과의 추억, 아빠가 사줬던 생일선물, 내가 조르고 졸라 구입했던 스타크래프트 CD……. 열쇠는 그 속에 있었다. 내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과 함께. 나는 잠시 앨범을 뒤적거렸다. 행복하게 웃는 가족. 오랜만에 보는 엄마의 웃는 얼굴이 낯설었다. 저 문을 열고 나가면 힘쌔고 강인한 우리 엄마가 있다.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가 다소 작아진 것을 보건데 문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분명해야 했다. 안 그러면 문을 여는 순간 잡아먹힐 테니까. 나는 미리 준비해 둔 음식들을 헌 옷에 싸맨 채 심호흡했다. 이야기 속 괴물들은 후각이 민감하니 옷에 싸맸더라도 음식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구멍을 조심하며 방을 가로질렀다. 구멍은 이제 눈에 보일 정도의 속도로 커졌다. 나는 침을 꿀떡 삼키고 자물쇠를 풀었다.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8. 다시 괴물

커다랗게 찢어진 입이 보였다. 흉물스러운 이빨, 무시무시한 꼬리도 보였다. 한 쪽 다리가 이상하게 뒤틀린 괴물은 식탁 앞에 있었다. 거기에 놓여진 음식은 어제까지 UN군이 보내주던 구호물자와 같은 것으로 보였다. 설마 그들이 저 괴물에게도 구호물자를 준 것일까? 그 순간 괴물과 눈이 마주쳤다.

으-------------------------------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그 어느 때 보다도 커다란 괴성이 들려왔다. 괴물이 곧장 나에게 달려왔다. 나는 음식을 집어던졌다. 괴물은 잠시 주춤했지만 음식을 내버려둔 채 나에게 달려왔다. 그 모습은 더 싱싱한 고기를 쫓는 프레데터 같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현관문의 자물쇠를 풀었다. 손이 떨려서 제대로 열리지가 않았다. 마침 내 현관문이 열렸을 때 괴물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나는 진저리를 치면서 아무거나 손에 잡고 휘둘렀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괴물의 눈에 깨진 도자기조각이 박혔다.

으르르르르르르르르릉!

괴성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네발로 기다시피 휘청거리다 아파트 계단을 굴러 떨어졌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마침내 1층에 도착했을 때 나는 비명을 질렀다. 저건 우리 엄마가 아니야. 도와달라고 소리도 쳤다. 하지만 내 비명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으르르르르르르르르릉!

다시 괴성이 들렸을 때 나는 귀를 의심했다. 괴성은 우리 집에서만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으르르르르르르릉! 사방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괴물은 한 마리가 아니었다! 온갖 곳에 괴물이 있었고 나를 노리고 있었다.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뛰었지만 금새 지쳐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로 뒤에서 괴물들이 천천히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앞으로 뛰었다.

갑자기 세상이 위로 솟았다.

아니다. 내가 아래로 꺼진 것이다.

아차 구멍! 하고 떠올렸을 때는 이미 알 수 없는 곳에 떨어진 이후였다. 위를 올려다보니 까마득히 높은 곳에 세상의 빛이 보였다. 이곳은 그 빛조차 닿지 않는 어둠이었다. 지옥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괴물이 있었다.

다리가 부러졌는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괴물은 힘들이지 않고 나를 낚아챘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말했잖아. 너무 늦었다고. 이젠 뭘 어쩔 수도 없어. 전부 포기해버렸다고. 게으름 피우는 동안 전부 끝장났어.

괴물이 쩌억 입을 벌렸다. 그 안에는 엄마의 얼굴이 있었다. 문을 닫기 전 마지막에 봤던 모습 그대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그런 곳에 계신 거에요. 엄마는 괴물이 아니잖아요. 엄마는 슈퍼우먼이잖아요.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 끝이 찼다.

와직. 괴물이 내 머리를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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