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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엽편]지금은 수업중

2012.06.28 21:2706.28

3교시 수학시간. 4학년 찬규는 칠판 위를 기어 다니는 숫자와 공식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반에 있는 30여명의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공부에 흥미가 없거나 딴 짓을 해서 집중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겁에 질려 있다. 창밖으로 들려온 공포의 소리를 듣고. 지금은 잠시 소강상태인지 잠잠하지만 방금 전 까지만 해도 태양보다 눈부신 섬광과, 굉음, 지진과 맞먹는 진동으로 모두들 비명을 지르고 심하면 오줌까지 지렸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은 예외였다. 바로 선생님.
우만호. 반 아이들이 전부 엿 같다고 욕하는, 저주받아도 마땅한, 악랄한 이름. 그에게 용감히 맞섰다가 죽빵터진 애들은 그를 배불뚝이 스탈린이라 부르고는 했다.
차라리 지금이 4교시고, 옆 반의 잔 다르크 같은 국어 선생님이 다 같이 빨리 빠져 나가자고 하면 좋을 것을. 어쩌다 뚱보 스탈린이 군림하는 이 시간에 사이렌이 울리고 폭발음이 들렸는지…….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낀 스탈린이 주먹으로 칠판을 부숴버릴 것처럼 내려쳤다.
“이 새끼들 여기 안 봐? 이래가지고 대학은 가겠어?”
찬규는 이 상황이 그저 어이없고 증오스러웠다. 이제 겨우 초등학생에게 대학 타령하는 것에다가 폭격이 떨어지거나 총알이 쏟아질지 모르는 이 위태로운 상황에 공부 타령을 하다니.
미쳤다, 돌았다.
어떻게 저런 작자가, 상황파악도 못하고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는 폭주 불도저가, 고등학교 일진 형들보다 더 폭력적이고 담배 피고, 침을 뱃는 자가 선생님이 될 수 있었을까?
위층에서 수류탄이나 탱크 포탄이 날아들었는지 폭발과 함께 진동이 울리면서 콘크리트 덩어리가 교실 뒤쪽의 사물함 위로 쏟아졌다. 맨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입 다물어! 그게 뭐가 대수야! 칠판 보라고, 칠판!”
저 뚱보는 겁도 없나? 찬규의 인상은 점점 찌르러졌다. 어쩌면 저 인간 말종은 영혼도 없는 악마일지도 모른다는 상상까지 도달했다.
“저 선생님.”
그때 반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탈린은 아무 말 없이 반장을 꼬나보았다.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아시나요? 전쟁 났다고요, 전쟁. 그런데 지금 수업을 한다는 게 말이 돼요? 게다가 다른 선생님들이 다 대피했다고 다른 과목까지 직접 가르치겠다는 게……. 선생님도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폭발음과 총 소리를 들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반장의 말이 체 끝나기 전에 스탈린은 따귀를 올려붙였다. 반장은 곤두박질 쳐서 교실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이 새끼가 지금 반항하는 거냐? 지금은 수업 중이야 수업 중! 수업 중에는 선생의 지시를 따른다. 오늘 수업이 끝나기 전까지 나가는 자식들은 전부 죽을 테니까 알아서해!”
스탈린이 다시 칠판으로 가서 분필로 수학 공식을 마저 써내려갔다. 분필을 얼마나 거칠게 다루는지 마치 칼로 박박 긁는 것 같았다.
마음속에서 치솟은 불길이 폭발해 버린 찬규는 필통에서 커터칼을 꺼내들어 스탈린에게 달려들었다. 스탈린은 찬규를 발견하고 앞자리의 책상 하나를 집어 들어 찬규를 내려쳤다. 아이들의 눈이 왕방울 만해졌지만 눈물이 말랐는지 아니면 감각이 무뎌졌는지 이제는 반응이 없었다.
“하여간 요즘은 미친놈들 천지라니까! 이 새끼야! 빨리 자리로 가!”
발길질로 ‘내가 너보다 더 높은 존재다.’ 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스탈린은 머리에서 피가 쏟아지는 찬규를 뒤로 하고 다시 분필을 들었다.
창문 쪽으로 날아간 커터칼을 다시 집어 들기 위해 찬규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창문 밖에서 교실로 날아오는 쇳덩이가 찬규에게 보였다.
불꽃과 굉음이 돌풍을 일으키며 교실 외벽을 무너뜨리고 잔해를 무차별로 내던졌다. 아이들의 비명이 공습경보사이렌 만큼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또 한 발.
이번에는 교실 내벽이 부서졌다. 콘크리트 조각들이 뿜어내는 연기가 교실 곳곳을 뒤덮었다. 나무 바닥에 붙은 불길이 만이 연기 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콘크리트 더미를 해치고 나온 찬규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직감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뿌연 연기 속의 교실에서 간간히 보이는 것이라고는 파괴의 현장과, 지옥의 불꽃, 그리고 죽은 아이들의 사체였다.
칠판 앞에 서 있던 스탈린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교탁 앞에 널 부러져 있었다.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것 같았던 거대한 거구가 콘크리트 조각 사이에 처박혀 있다는 게 약간은 믿기지 않았지만 이네, 언제 잡았는지 모르는 커터칼을 인식하고 찬규는 시체에 접근했다.
탱크바퀴가 거친 대지를 질주하는 소리와 커터칼이 살을 파고드는 소리가 미묘하게 장단을 이루었다. 어차피 이미 숨이 끊어져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찬규는 아무 상관없었다. 그저 단 한 번이라도 증오의 대상을 자기 손으로 파해치고 싶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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