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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hERO]

2012.06.27 10:4406.27




「hERO」

If were not a hero to his son, the father is nothing.

남자에게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건, 남자가 거대 로봇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과 얼추 비슷한 수준의 로망이다. 가면을 쓰거나 바지 위에 빨간 팬티를 덧입고 나타나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일은, 정의 구현을 위해 왔으니 내 얼굴을 봐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나머지는 다음 주에―라고 말하는 모습은, 병신 같지만 멋있다. 사실 상상만으로도 황홀할 지경이다. 그렇게 살아온 남자에게 딸이 생겼다. 당연히 부인도 있었다. 영웅을 꿈꿨던 멋진 아빠는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바보가 되었다. 그때까지는, 영웅이 아닌 바보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린 딸의 애교에 녹아 부인 사랑은 뒷전으로 밀어둔 바보도, 행복했다. 괜찮았다.
아내가 지구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달과 같다면 딸은, 저 멀리서도 스스로 빛나는 태양이었다. 우주이고, 빛이고, 곧 삶이었다. 그걸 진리라고 한다면 딸은 진리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의문 하나가 날아와 마음을 꿰뚫고 지나갔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영웅이 될 수 있지만 딸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 아내에게 육아를 맡기고 밀려오는 파도처럼 끊임없는 일에 치이다가, 밀려나가지 않도록 방파제 위에서 구명조끼 하나 걸치고 뿌리내린 지 한 세월이 지났다. 정년퇴직은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자신이 딸에게 해준 것을 정리해보니 다음과 같았다.

○ 아침인사, 저녁인사 받아주기.
○ 한 달에 한 번은 따로 용돈 주기.
○ 아내가 부탁하면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혼을 내서 올바르게 이끌어주기.

의욕이 넘치는 볼펜은 자꾸 마지막 문장 뒤로 점을 생산한다. 몇 번 툭툭 종이 위를 두들기다가, 그것마저 멈춰버린다. 점들이 탑이 되고, 기찻길이 된다. 결국 손에서 볼펜을 놓는다. 그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종이 위의 글자들을 확인한다. 멋진 문장이다. 어디에도 아버지의 영웅적인 행보는 보이지 않는다. 잘못됨이 없는, 완벽한 문장. 물론 가정이 지금까지 순항을 거듭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사회로 나가 거친 풍랑을 막아줬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그는 가정의 엔진이었다. 딸이 엄마와 함께 백화점으로 가서 구입한 별무늬 원피스를 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의 노동에서 비롯된다. 가정의 행복은 곧 그가 흘린 땀방울이 고인 호수의 넓이와 같았다. 그러나 그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건 다른 아버지들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영웅이라는 건, 남들과 다른 특별함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돈을 벌어오고, 가끔 몇 마디 말을 섞고, 때로는 용돈을 준다면, 누구나 딸에게 영웅이 될 수 있다? 그 영웅의 모습을 상상한 그는 당연히 실망했다. 가면을 쓰지 않았다고, 빨간 팬티를 바지 위에 덧입지 않았다고, 중얼거렸다.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남들과 다른 특별함이다. 그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이로써 아버지는 딸에게 영웅이 될 수 없다는 걸 증명했다. 낙담한 그를 쫓아간 시간이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주위를 환기시킨다. 마녀처럼, 속삭인다.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니라고. 시간이 소곤거렸다.
딸애가 24년 동안 타고 다녔던 배가 표류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일종의 문학적 비유였다. 웬 사내놈의 오토바이 뒷좌석에 타고 있다가 의식을 잃어버린 딸은 시멘트 바닥 위에 떨어졌고, 데굴데굴 굴렀고, 상처에서 쏟아진 피는 웅덩이를 이룰 정도였다고. 딸을 오토바이에 태웠던 사내놈은 그 모습을 보고 도망쳤다. 딸과 같은 학과에 다니는 선배들이 잡아오기 전까지 부부는 뺑소니 사고인 줄 알았다. 녀석은 새파랗게 젊은 놈이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부부를 발견한 녀석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아내와 눈을 마주쳤다. 숨어있었다. 작고 여린 아내의 몸 안에서 자라고 있던, 걷잡을 수 없는 괴로움이 폭발해 천둥이 되었다. 그제야 사내놈은 눈물을 쫙쫙 흘리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옆에 죄인처럼 줄줄이 서 있던 선배들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다. 뭉쳐있는 그 모습이 꼭 악어 한 마리처럼 보였다. 죄송하다는 말을 자꾸 되풀이하자 아내는 신경질적으로 대체 뭐가 죄송하냐고 받아친다. 그러자 순간, 세상의 빛이 꺼진 것처럼 조용해졌다. 무릎을 꿇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사내놈은 다시 죄송하다는 말을 연거푸 쏟아낸다. 고장 난 기계 같은 태도에 질렸는지 아내는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그는 고개를 돌려 수술실을 바라본다. 순간 수술실로 향하는 문이 대설문처럼 보여 무서워졌다. 아내의 손을 꼭 붙잡고 수술을 집도하고 있는 의사에게 아들이 있기를, 꺼져가는 생명 하나를 구함으로써 그의 아들 앞에서 영웅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게 4시간이 더 지나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무릇, 만물이 고요에서 출발했다는 생각은 바람에게 귀가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만물이 인간에게 목소리로 말하지 않는, 그들에게 ‘후두의 중앙부에 있는 소리를 내는 기관’이 발달하지 않은, 것도 모두 귀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누군가가. 자신들이 들을 수 없기에 말을 하지 않는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 의사를 전달한다. 인간뿐만이 아닌, 세상 전체에 또렷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전달된다. 목이 마른 나무에게 물을 주면 생명이 꼴깍꼴깍 꿈틀거리는 소리가 침묵 속에서 전해지고, 휴화산이 잘 잤다고 힘껏 기지개를 펴면 대지는 흔들흔들, 하늘은 문을 활짝 열어 온 세상에 그가 영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퍼트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안나푸르나는 어제와 똑같은 정적으로 자신의 정수리를 밟겠다며 악을 쓰고 올라오는 인간을 허락해야할지 고민하고 있다. 그 고민의 정도는 때때로 눈보라, 눈사태로 변하여 시련이 된다. 사람들은 거기서 침묵을 배우고, 인내를 배우고, 자기 안에 있는 잡념과 싸우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오직 인간에게만 영웅이 탄생하는 거라고, 영웅은 만물이 만드는 것이라고 그랬다. ―누군가가.
도시의 불빛이 너무 밝은 게 불만이라며 투덜거리던 별들이 밤의 장막 뒤로 퇴장했던 그날 밤. 딸이 긴 수면에서 깨어났다. 당초 예상보다 3시간이나 늦은 시간이었다. 하루라는 짧은 시간 사이에 많은 종류의 가면을 쓰고 벗었던 아내는 지쳐서 간병인 침대에 쓰러지듯 잠들었고, 그는 건너편 침대에 누워 침묵을, 인내를 배우는 중이었다. 2인실 병실은 딸을 오토바이에 태웠던 사내놈 부모가 마련해준 일종의 입막음이었다. 병원비 전액을 자기 쪽에서 부담할 테니 학교 측에 사고 경위(특히 그놈이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얘기하지 말아달라며, 부탁과 협박을 교묘하게 섞어 말했다. 아내는 더 이상 화를 낼 기력이 없었고 그는 기가 막혀서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돈은 둘째 치고 그들은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딸애의 상태를 물었고, 병원은 어디로 할 것인지, 보험은 들었는지, 병실은 또 구했는지…… 앞으로의 계획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가 숨을 죽이고 베개 위로 욕설을 쏟아낸다. 교양 있는 아버지로 보이고 싶어 딸의 앞에서라면 실수로라도 비속어를 내뱉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그의 삶이, 베개 위로 날숨과 함께 녹아내린다. 딸은 그 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아빠, 뭐해?”
그는 믿지도 않는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속으로 외쳤다. 딸에게 다가가 아내가 깨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상태를 묻는다. 딸은 기분이 매우 개운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야?”
딸이 병실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그저 충격 때문이라 여겼다. 사실 이때부터 징후는 시작된 거였다. 이곳은 딸 인생의 첫 나들이 장소였다. 그러니 모를 수도 있다. 자신이 태어났던 순간을 기억하는 건 부자연스러우니까. 딸의 반응은 정상이다. 그는 믿고 싶었다. 하지만 기억이라는 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지워지는 거다.
그는 먼저 딸에게 사고의 경위를 설명했다. 그 개자식과의 관계를 추궁하고 싶었지만 조심해야만 했다. 그놈의 이름이 나오자 딸애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그건― 나쁜, 좋은 징조였다.
“그래서 오빠는 어디 있어?”
‘외면’이 병실 안을 떠돌아다닌다. 침대 밑, 이불 속, 축축한 그의 팬티 속에도. 이 세계가 자신의 고향이고 이 동네가 자신의 안뜰이라며 으스댄다. 자유와 자살이 한 글자 차이인 것처럼 아빠와 오빠도 한 글자 차이다. 그런데도 울림이 다른 것은 아마 기분 탓일 거다. ‘외면’이 핑크빛 화사함에 놀라 구석으로 도망치다가 피할 길이 없어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어내린다. 이곳은 7층이다. 즉사가 분명하다. 핑크빛 광선을 외면하기위해 눈을 감아버린 그는 딸에게 지금 시간이 새벽 4시라는 걸 일깨워줬다. 아이의 눈에서 광채가 사라진다. 그건― 좋은, 나쁜 징조였다. 딸은 더 이상 말할 기운이 없는 것인지 다시 침대에 누워버린다. 눈을 뜬다. 현실이 눈앞에 있다. 딸이 수술실에서 나왔을 때의 일이 생생하게 재연된다. 아내는 딸을 따라서 엘리베이터를 탔고, 그는 수술을 담당한 의사와 얘기를 나눴다.
“수술은 성공적입니다. 그런데…….”
의사는 말을 아꼈다. 딸에게 혹 나쁜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묻자 의사는 여전히 말하기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보여줬다. 마음에도 없는 감정이라는 걸 알고 있다. 저건 그저 ‘이 정도 여유를 줬으니 충격에 대비하라.’는 신호다. 의사의 얼굴 근육에 쓰인 경고문을 숙지한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늘, 항상 그를 괴롭히는 건 망상, 상상, 공상, 그리고 설상가상이었다. 딸의 상태에 대한 마지노선을 최악으로 설정해놨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잠깐의 공백을 뒀다.
“……임신 4주차였는데, 안타깝게도 유산이 되었습니다.”
마지노선을 가볍게 뛰어넘는 상상 이상의 충격이 글자들과 함께 뒤섞여서 다가오자 버텨낼 수가 없었다. 그만큼 사람은 연약한 존재라고, 의사가 표정으로 말한다. 추락하는 여객기에 탑승한 느낌이다. 가장 안전한 운송수단이라 믿었는데 운행 중에 사고가 발생하면 생존율이 가장 낮단다. 엔진은 멀쩡하다. 탑승한 승객 중 한 명이 조종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고 한다. 그가 입을 다물지 못하자 의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도망치듯 사라진다.
그는 딸과 아내가 있는 병실로 찾아가지 못하고 서성이다가 1층 로비로 짧은 여행을 떠난다.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뽑고, 빈자리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불이 꺼진 내시경실 앞에 앉는다. 가슴 부위를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안쪽에서, 불에 덴 것처럼 통증이 올라왔다. 이상하다. 이 복도는 이처럼 깜깜한데. 왜 별빛이 보이는 것일까. 턱의 선을 따라 내려오다가 고여, 추락하고, 그의 무릎 위에서 조각나 흩어진다. 바지 위에 스며들다가 결국 소진된다. 오늘은 별이 참 많은 밤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내가, 아내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뇌가 상상하고 있는 내용들은 몇 번-이고 뭔가를 고백하려다가 머뭇거리는 장면들이다. 갈리고 삼켜지고 소화된다. 몇 번-이고 들어줄 수 있었지만 갖가지 이유로 듣는 것을 회피해버린 이야기의 토막들이 퍼즐 조각처럼 모이더니 하나의 그림이 된다. 당신 딸에게 남자친구가 생겼어. 당신 딸이 남자친구랑 키스했대. 근데 남자애는 첫 키스가 아닌 거 같다고 하더라. 알아 당신? 당신 딸이 그 남자애 아이를 가졌대. 4주째래. 근데 그거 알아? 오늘 죽었다는 거. 손녀인지 손자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손녀였을 거야. 꿈을 꿨는데 당신 딸 근처에 작은 뱀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어. 그곳이 꽃밭이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입에 해당화를 물고 딸 품에 안기는 거야. 해당화의 꽃말은 온화라고 하던데. 바다에서 피는 꽃이니까 넓고 온화한 마음을 가진 아이였을 거야. 틀림없어. 내 꿈은 제법 잘 맞거든.
짙은 한숨이 복도의 바닥을 가득 채울 정도로 길게 나온다. 그 위에 글자들이 떠올랐다가 얼룩처럼 번진다. 바보야, 해당화의 꽃말은 그것만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엄마가 미역국에 말아준 밥을 조금씩 떠먹고 있는 딸에게 누구의 애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남들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데, 그는 그게 잘 안 됐다. 묻겠다는 생각 자체를 가져서도 안 되는 거였다. 소태와 씀바귀를 넣고 달인 탕약과도 같은 이야기를, 그는 꿀꺽 삼켰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는다. 딸이 식사를 멈추고 그를 바라본다. 뭐가 미안한 것인지 딸은 알지 못한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말은 하늘로 송신되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이번에는 속으로, 텔레파시를 쏘아 보냈다.
점심때가 지나자 남자애가 병실을 찾아왔다. 한 마디 툭 쏘아주고 싶었던 아내는 딸이 크게 기뻐하며 남자애를 반기자 미소를 짓고 만다. 병실의 공기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젊은 피로 달궈진 공기가 병실을 가득 채우자 부부는 마치 찬 공기처럼 병실 바깥으로 쫓겨나듯 빠져나가야만 했다. 식사를 하기 위해 병원 근처의 식당으로 가는 동안 그는 아내에게 딸과 남자애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어요. 자기가 알아서 잘 하겠죠.”
아내는 부부이기에 ‘우리’라는 대명사를 사용한다. 그래도 여전히 그는 홀로 무인도에 갇혀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묵묵히 밥알을 씹어 삼키던 그에게 조난신호가 들어왔다. 휴대폰을 확인하기 전까지 그는 SOS를 보내야할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며 울먹이고 있었다. 부르르 몸을 떠는 핸드폰에는 전혀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받아보니 병원이었다. 딸이 쇼크를 일으켰다는 얘기가 전파를 타고 넘어오자 그는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실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그의 방문을 반기는 건 발목부터 올라오는 냉한 기운이다. 대설문 너머에서 기어 나온 우악스런 손들이 그를 제압한다. 영웅이 될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염라대왕의 사악한 음모다. 심장박동 측정기의 리듬이 죽어있는 것을 본 그는 지금이야말로 신명나게 한바탕 춤판을 벌일 때라는 걸 알아차렸다. 죄인처럼 시선을 피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밀쳐내고 딸에게 다가간 그는 아이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댔다. 뭐? 그래. 알았어. 아빠가 꼭 구해올게.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어. 처음 보는 사람 따라가지 말고.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절대 배는 타면 안 된다. 알았지?
창문으로 뛰어내리면 시간이 절약되겠지만 이곳은 7층이다. 각층마다 멈춰서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하고 계단을 이용한다. 6. 5. F. 3. 2. 1. 전력질주로 병원 정문을 뛰쳐나가지는 못한다. 자동문 앞에서 2초 정도 기다리고, 들어오는 휠체어에게 길을 비켜준 다음, 그제야 뛴다.
언젠가 딸이 말했다.
“아빠, 이 통신사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알아? 방금 인터넷에서 봤는데 대박 웃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그는 신문지 위에다가 뭔데? 라고 물었다.
“고갱님을 털겠습니다.”
음.
“다른 통신사는 뭔지 않아?”
또, 뭔데? 라고 물었다.
“신나게 고갱님을 털겠습니다. 웃기지?”
당초 그는 휴대폰에 관심이 적었다. 통신사의 이름으로 하는 말장난 같은 게 웃길 리가 없다. 딸 역시 아빠에게 웃으라고 한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그냥저냥 흘러갔다. 사실 그건 일종의 신호였다. 여자는 그런 생물이라는 걸, 딸도 여자라는 걸 잊어버린 아버지의 잘못이었다. 그러니 이건 일종의 속죄인 셈이다. 그는 일기당천의 기백으로 휴대폰 매장에 들어선다. 딸의 체온이 식기 전에 이 매장에서 가장 비싼 최신 휴대폰을 챙겨야만 한다. 대낮인데도 사명감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그를 본 직원들은 마치 패를 나눠주듯 그의 앞에 휴대폰들을 탁탁 깔아놓는다. 대답이라도 하듯 그는 지갑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는다. 평소라면 어림도 없겠지만 오늘 그는 관대하다. 고갱이든 호갱이든, 순순히 지갑을 털어줄 용의가 충분했다.



“아버지, 여기가 어디에요?”
과연 S사의 최신 휴대폰은 실로 놀라운 기술을 탑재하고 있었다. 얼굴 인식, 필기 인식, 지문 인식, 망막 인식 같은 건 비교도 되지 않는다. 심장박동이 멈춘 딸에게 S사의 휴대폰을 쥐어주자 집을 나갔던 숨이 되돌아왔다.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지저스’라고 외쳤지만 그는 단 한 사람을 위한 구세주였다. 그러니까 보통 ‘아빠’라고 부르는데, 잠깐. 그는 찌릿한 통증이 심장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고 비틀거렸다. 딸이 걱정스런 어조로 묻는다.
“아버지, 괜찮아요?”
냄새가 떠돌고 있다. 제법 짙은 녀석이다. 일단 대설문에서 새어나오는 냄새는 아니다. 그의 가슴 쪽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나고 있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그 냄새도 범인은 아니다. 아니, 지금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딸의 상태다. 그가 알아차린 괴리감은 딸의 말투에 박혀 있었다.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아프다.
여기가 병원이라는 걸 말해주려던 그를 의사가 가로막는다. 문자 그대로 죽었다 살아난 케이스기 때문에 어서 정밀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막 불륜 현장을 떠나려는 남녀처럼 서두른다. 아내와 단 둘이 병실에 남게 되자 잠시 잊고 있었던 냄새가 다시 그의 콧구멍을 벌렁거리게 만든다. 발정 난 짐승들의 몸에서나 맡을 수 있는 짙은 페로몬이었다. 그제야 왜 의사와 간호사들이 영웅에게 패하고 다음 주를 기약하는 악당처럼 도망쳤는지 이해가 됐다. 그들이 병실에 도착하기 전에 병실은 병실이 아니었고, 환자복은 더 이상 환자가 입는 복장이 아니었다. 눈앞의 쾌락을 좇던 두 마리의 짐승이 한 마리로 합하는, 오묘한 신비가 펼쳐지던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머릿수가 부족하다. 원래 이곳에 남아있어야 할 사람은 셋이었다. 그래 맞아. 누군가 자신의 냄새만 현장에 흩뿌리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하루가 지난 다음날까지도 그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딸이 검사를 마치고 녹초가 되어서야 돌아왔던 그 시간에 다른 놈이 나타났다. 어느 병원 정신과 의사라며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잠이 들어버린 딸의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정신과’라는 단어를 들은 아내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불안에 젖어있는 그녀를 위해 그는 다시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있던 자리가 축축하다. 우드득. 노곤한 뼈와 근육이 좀 쉬자고 소리친다. 그럼에도 그는 어깨를 쫙 펴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병원 밖으로 나가는 건 어렵겠다고 말하자 정신과 의사는 그를 로비로 안내했다. 커피 한 잔을 자판기에서 뽑아 그에게 내민다.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카페인을 굳이 섭취하지 않아도 긴 밤을, 조마조마한 마음과 함께 뜬눈으로 지새우겠지. 딸이 걱정되어 한 박자 빠르게 용건을 묻자 정신과 의사는 기억을 잡아먹는 벌레(기생충)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직 인간에게만 발견되는 이 벌레의 학명은 《Daughter of Eris》라고 한다.
납득하기 어려운 이름을 듣게 되자 그는 정신과 의사에게 장난하는 거냐고 물었다. 상대는 대답 대신 서류 가방에서 갈색 봉투 하나를 꺼낸다. 메스를 놀리고 있는 손처럼 차분해서 오히려 이쪽이 불안해진다. 정신과 의사가 보여준 촬영 사진은 마치 실수로 뜨거운 라디에이터 위에 올려놓은 코팅지처럼 울어있었다. 아니, 필름 자체는 정상이다. 그런 물결무늬가 뇌를 찍은 부분에만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소용돌이처럼 생긴 검은 구멍…… 원이 보였다. 전두엽 부분에도 작은 소용돌이가 있다. 아빠가 아닌 아버지라고 불렀던 딸의 입술이 생각난다. ‘ㅈ’은 경구개음이고, ‘ㅃ’은 양순음이다. 논리적으로도 같은 위치에서 날 수가 없는 소리다. 그제야 딸의 뇌에 정말로 문제가 생겼음을 인정한다. 이제 가슴에서는 탄내가 나고 있다.
정신과 의사는 이 병은 알려진 게 전무한 희귀병이라고 했다. 유전적인 것인지, 환경에 의한 것인지, 바이러스인지, 감염 때문인지, 밝혀진 게 너무 적어 그저 존재함으로써 사람의 기억을 잡아먹는 식충이라고만 부른다고 설명한다. 사실 그런 건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의사에게 치료법을 묻자 대답이 없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납득했다. 치료할 수 없기에 밝혀진 것도 없다는 걸.
“전 암에 걸렸습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는 아버지의 위로, 의사가 고해를 한다.
“이 병은 발병사례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설사 발병 하더라도 보고된 사례가 극히 드물죠. 망각은 인간의 축복이라고, 어떤 빌어먹을 놈이 낭만을 가득 담아 얘기했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사례는 충분히 할 테니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상상한다. 정신과 의사의 나이가 한 20년? 아니 30년 정도 젊고, 신체에 아무런 병이 없고, 특히 30년 후에도 암에 걸리지 않는다면, 그는 기분이 좋았을 거다. 딸 주변을 기웃거리는 발정 난 짐승보다야 훨씬 낫지. 상상을 마친다.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정신과 의사에게 그는 무리라고 대답한다. 그래도 상대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이 벌레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해부를 해야 합니다. 죽은 다음에는 늦습니다. 제발 인류의 밝은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다시 한 번 검토해주십시오.”
혈관 속으로 들어간 주사기 바늘을 통해 감정이 뽑혀 나간다. 몇 번을 재고해도 답은 결국 하나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지저스’가 아닌 ‘아버지’다. 연거푸 거절하자 정신과 의사는 한 걸음 물러선다. 눈빛이 차분한 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제 명함입니다. 생각이 바뀌거든 언제든지 연락을 주십시오. 병에 대해서 궁금한 사항이 생겨도 좋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필름을 서류 가방에 넣고 떠나려고 할 때, 그는 아까 들었던 이야기 중 마음에 걸렸던 문장을 바깥으로 내뱉었다. 죽은 다음에는 늦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정신과 의사는 그제야 사람다운 얼굴을 한다.
“이 병의 진행 속도는 매우 빠릅니다. 본인이 견디지 못하고 몸을 던질 정도라고 하더군요.”
박살난 뇌를 살피는 건 해부라고 할 수 없죠. 생략된 글자들이 머릿속을 유영한다. 자유와 자살은 한 글자 차인데, 왜 이리 어감이 다른 것일까. 정신과 의사가 떠난 뒤에도 그는 한참을 앉아있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으니 받은 명함에 적힌 글자들을 읽는다. 눈에 보이지만 기억할 수가 없다. 온통 딸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찬 뇌는 다른 내용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다시 딸을 생각한다. 딸의 기억들이 사라진다. 포맷된 하드 디스크를 떠올린다. 그 애는 그를 한 번이라도 아빠가 아닌 아버지라 부른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아니. 누구에게나 망각, 혹은 착각이 존재하니 한 번쯤은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의 뿌리가 거기까지 도달하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교통지옥을 뚫고 뇌간을 통해 입으로 쏟아진다. 그중 일부는 갓길을 통해 눈으로 빠져나간다. 웃기게도, 이렇게 열심히 고통을 뱉어내고 있는데도 총량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끊임없이 샘솟는 구렁텅이다. 그곳의 밑바닥에서 숨을 쉬고 있으니 교통이 정체되는 거다.
딸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 기억이 사라지는 병에 걸린 자신을 견뎌내지 못하고. 이보다 더 놀라운 고난과 시련이 있을까. 아마 찾아와도 놀라지 않을 거다. 설령 희망이 집채만 한 파도처럼 밀려와도 눈이 휘둥그레 변할 일은 없다. 파도에 밀려 올라가봤자 구렁텅이의 표면에 떠있는 부표가 될 뿐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그만 괴로워하자. 딸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충격으로 조각나버린 거울처럼 파편화된 기억들을 한데모아 정리하여 나열시킨다. 그나마 제대로 남아있는 것은 목소리가 지나간 흔적들이다.
찢어지-ㄴ다. 비명. 공기. 딸아이. 같은 상황. 다른 공기. 그것. 도. 모르다. 부부. 는. 남자. 놈. 눈치. 에. 쫓겨나-ㄴ다. 병실. 에. 찢기-ㄴ다. 7층 병실. 방음 시설. 철저. 그런데. 들었다. 어떻게. ?. 모르다. 하지마-ㄴ. 들렸다. 비명. 딸아이. 소름. 돋는다. 먼저. 방문하-ㄴ. 감정. 은. 공포. 반복. 자꾸. 머릿속. 정신과 의사. 말.
“본인이 견디지 못하고 몸을 던질 정도라고 하더군요.”
가장. 그것. 이. 무섭다.
“여보, 어디 가요?”
아내. 목소리. 가. 느긋하다. 비명. 은. 찢기고. 있는. 데. 딸아이. 가. 울고. 있는. 데. 왜. 듣는. 사람. 은. 나 하나인가. 에도. 괴로워. 하다. 병실. 앞. 에. 도착하-ㄴ다. 병실. 문. 은. 잠겼다. 웃겼다. 미소. 사이. 로. 광기의징조가번뜩. 였다. 부숴야하-ㄴ다. 문. 복도. 끄트머리. 를. 지나. 비상구. 를. 통해. 계단에. 서. 소화기. 를. 찾아. 다시. 병실. 앞. 에. 서-ㄴ다. ㅋㅗㅏㅇ. !. ㅋㅗㅏㅇ. !. 분말. 조금. 흩. 날리다. 다시. ㅋㅗㅏㅇ. !. 문. 움푹. 그 사이. 마음. 도. 움푹. 억지. 로. 문. 열다. 비명. 다른 이의. 비명. 다른 이도. 듣다. 비명.
“아아악! 이 쌍년이 뭔 짓이야!”
ㅉㅏㄱ. !.
또. 찢기-ㄴ다. 공기. 침대에. 서. 떨어지-ㄴ. 꽃. 은. 필사적. 으로. 부숴지-ㄴ. 문. 밖으로. 기어 나와. 어미. 의. 바지자락. 을. 붙. 들고. 우-ㄴ다. 그놈. 손. 벌겋다. 피. 흐르-ㄴ다. 독기. 차-ㄴ. 눈동자. 로. 그를. 노려보다. 또. 슬며시미소가올라. 왔다. 사람들. 이. 몰려들다. 그놈. 소리치다.
“뭘 쳐다봐? 씨발. 저 쌍년이 평소에는 걸레처럼 잘만 벌리더니 오늘 왜 이래? 씨발, 재수가 옴 붙었나.”
이보게 자네. 어디를 그리 급히 가나. 녀석. 은. 그의 손. 뿌리치-ㄴ다. 그의. 다른 손. 에. 바닥이움푹들어간소화기가들려. 있다. 고갱님을털겠습니다. 신나게고갱님을털겠습니다. 딸아이. 울음. 안. 들리게. 아내. 의. 눈물. 떨어지는. 소리. 도. 안. 들리게. 고갱님을털겠습니다. 신나게고갱님을털겠습니다.
찢겨진 옷. 상처받은 작은 짐승. 부들부들, 몸을 떨며 엄마의 품에서 울고 있다.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닌 피를 묻히고, 자신의 것이 아닌 이빨을 짓밟고, 자신의 것이 아닌 헐떡임을 들으며, 자신의 것이 아닌 시선을 받고 있다. 모녀의 울음을 응원가 삼아 버티고 있는 다리가 여러 이유로 부들부들 떨린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보고 있지만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태도로 방관하고 있다. 마치 무대 위에 선 광대가 된 기분이 들어서, 웃어버리-ㄴ다.
그래. 이 병원도 S사의 계열이었지.



여기가 밑바닥이니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가 진정한 밑바닥의 시작일 줄은 부처님도 모르셨겠지. 라고 누가 말했더라. 집 전화기의 생김새를 면밀히 관찰하던 그는 고개를 돌려 굳게 닫혀있는 딸아이의 방문을 쳐다봤다. 어제 저녁까지, 경찰이 찾아와 그에게 멋진 은팔찌를 선물해주는 광경을 여러 번 상상했었다. 딸아이가 좋아했던 남자를, 소화기를 폐품 처리할 정도로 때려 팼으니 경찰이 찾아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되도록 경찰에게서는 연락이 없다. 병원도 마찬가지다. 딸아이의 울음이 그치자 아내는 이 미친 곳에서 나가야한다며 곧장 퇴원수속을 밟았다. 어떤 지시가 내려왔는지 모르겠지만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가겠다는 말을 하기가 무섭게 그냥 나가시면 된다던 직원의 시원한 대답이 계속 떠오른다.
아내는 딸의 식사를 작은 탁자 위에 차려 방까지 들고 간다. 아직 살 생각이 있는 것인지 방문이 열린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 집 전화기가 요란스레 울었다. 신경 쓰는 것도 지쳤기에 무기력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기계적인 태도로 그의 이름과 부서를 확인한 뒤, 휴가가 내일이면 끝나는 것도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제야 자신이 회사 인사과에 근무하고 있는 아무개라고 말한다.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개인 사무용품은 우체국 택배로 자택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월급 통장으로 퇴직금 계산해서 모레까지 입금될 겁니다. 그렇게 알고 계시라고 연락 드렸습니다.”
그래. 이 회사도 S사에 물건을 납품하는 곳이었지. 40년 가까운 충성이나 무단결근 한 번 없었던 근무일지는 버팀목조차 되지 못했다. 그래. 그만둘 때도 됐지. 딸의 방에서 나오는 아내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하자 하얀 앞니로 핏기가 없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다. 그녀는 뭔가 결심을 한 것처럼 보였다. 퇴직금이 나오니 당분간은 걱정이 없을 거라고 얘기한 뒤 베란다로 나간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그에게는 푸른 도화지로 보였다. 거기에 써내려간다. 당장 갚아야할 은행 이자가 얼마, 혼수자금 통장에 넣어야할 돈이 얼마, 등산 계모임에 넣어야할 돈은 또 얼마였더라. 카드를 잘 쓰지 않는다는 점과 집의 대출금을 모두 갚았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앞서 나열한 숫자들만 풀어놓아도 하늘은 새까맣게 변해버린다. 그래. 신경 쓰이는 것도 어지간히 많구나. 지칠 만하다. 영웅은 대체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계평화를 지킨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20년 전에 끊었던 담배 한 모금이 절실해졌다.
그날 저녁, 기어이 일이 터졌다. 저녁식사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는 엄마를 딸은 알아보지 못했다.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기에 문은 열어줬지만 얼굴을 잊었기에 “누구세요?”라고 말해버렸다. 애써서 준비한 저녁식사가 바닥으로 추락했고, 어수선했던 집의 분위기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는 처음으로 거실에서 제1회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정신과 의사가 말했던 내용을 정리정돈해서 전달한다. 자살의 가능성이 많다는 얘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침묵이 찾아와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그건 일종의 시위였다. 몇 초를 견디지 못하고 그는 쌓아뒀던 말을 밖으로 꺼냈다.
“아버지. 저번에도 제게 미안하다고 하셨죠. 뭐가 그토록 미안한데요?”
그냥. 모든 게 다 미안했다.
“아버지가 무슨 예수예요? 왜 다 미안해요?”
자신의 신경질을 견디지 못하고 딸은 자리에서 일어나 쏜살같이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내가 자신의 손으로 그의 손등을 덮는다. 따뜻하고, 거칠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돈을 벌겠다고 말했다. 그가 해고되었다는 얘길 들었을 때 아파트 부녀회장이 안주인으로 있는 식당에 연락을 넣었다고 했다. 아내가 내일부터 식당 주방에 나가 남이 사용한 그릇을 씻는다고 생각하니 또, 담배 한 모금이 간절해졌다.
아내가 잠든 시간. 그는 몰래 침대를 빠져나와 베란다로 나갔다. 20년 전에 끊었던 담배가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었다.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어 꼬깃꼬깃 구겨진 종잇조각을 펼치자 전화번호 한 줄이 나타났다. 별마저 깊이 잠든 시간에도 정신과 의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의 전화에 응했다.
“병의 진행을 늦추려면 함께 했던 시간들을 자꾸 상기시켜주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던 인물인지를 계속 인지시키는 게 중요하죠. 연극에서 캐릭터를 잡아주면 보통 그 역할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고 몰입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괜찮은 조언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자 난관에 부딪쳤다. 그는 어스름이 깔리는 새벽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린 함께했던 시간이 거의 없었던 것 같소.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빠서. 이유는 단지 그거 하나였다.
다음날. 아내가 없는 집은 주민이 모두 사라진 마을처럼 황량했다. 물을 마시려고 방밖으로 나온 딸은 거실에 있는 그를 무척 낯설어했다. 마찬가지로 그 역시 평일에, 그것도 집에서 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어색했다.
점심을 부엌에 차려놓고 그는 잠시 집을 나섰다. 집 앞 도로 건너편에 있는 큰 문구점에서 담배 한 갑을 구입하려고 했었던 그는 담배를 환불하고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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