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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이유.

2005.03.08 01:0403.08

이유.


어둠이 찾아드는 시간. 도시는 낮의 어수선함을 벗고 조명의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희고, 붉고, 노란. 다양한 빛깔들이 도시를 현란하게 물들인다. 밤의 도시는 빛의 베일을 두르고, 어둠을 쫓으며 찬란하게 빛난다. 그러나 높이 솟은 빌딩 숲 사이, 빛의 손길이 닿지 않는 어둠 속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조명의 화려함과 현란함을 뒤로 하고, 어둠 속을 달리는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창백했고,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집에서 나왔을 때는 말끔하고 정돈되었음직한 진회색 양복은 여기 저기 얼룩지고 구겨져 있었다. 본래 반짝 반짝 윤이 났을 구두도 더럽혀진 채 어두운 골목을 내달리고 있었다. 골목과 골목 사이, 어둠과 어둠 사이를 달리면서 남자는 힐끔힐끔 뒤돌아봤다. 골목 속 어둠은 웅크린채 내달리는 남자의 다리를 잡아챌 듯 으르렁 거리는 듯 했다. 남자는 석달 전 그 날을 떠올렸다.

34세. 대기업 대리. 곧 진급 예정. 사귄지 3년된 애인 있음. 가을 결혼 예정.
그의 생활은 지극히 안정되어 있었다. 좋은 대학교에 가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안정된 대기업에 취직하고, 진급도 순조로웠고, 연애도 순조로웠다. 그래, 그것이 그에게는 문제였다. 본래 모험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30여년간 이어온 안정된 생활은 지루했다. 따분했다. 남자는 새로운 것을 원했다. 그것이 남자가 지금 뒷골목을 달리게 된 이유였다.
단지, 지루했다는 그 이유.




"따분하세요?"

바에 앉아서 독한 술을 찔끔찔끔 맛보는 그에게 어느 날 '그녀'가 다가왔다. 하얀 얼굴에 검고 고운 머리칼을 가진, 매혹적인 향을 가진 여자였다. 여자는 그에게 다가와 옆자리 앉고는 싱긋 웃었다. 까만 눈동자가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짙은 붉은 와인잔을 흔들며 그녀는 다시 웃었다.

"따분하신가봐요."
"네."

남자의 대답에 여자는 웃었다.

"그럼 제가 즐겁게 해드리죠."

남자는 웃었다. 여자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하듯. 그 밤 이후, 남자는 따분하지 않았다.


전에는 지긋지긋했던 사람들이 사랑스러웠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그들. 살아있고, 덧없는 생명을 헛되이 불사르는 그들이 사랑스러웠다. 찰라에 불타오르고 식어버리는 인간들. 인간, 피, 그 환한 생명. 남자는 새로운 세계에 매혹되었다. 도시의 밤 사이를 걷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 그 중 하나가 되어 남자는 따분한 인간 생활을 청산했다. 낮은 정상적인 생활을 보냈지만, 밤은 달랐다. 낮에는 일을 하고 퇴근할 시간이 되면 어둠이 적당히 허공에 섞인다. 그 때부터 그의 진정한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남자는 웃었다. 즐거웠다. 아아. 이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즐거울까? 밤마다 그는 거리를 떠돌았고,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을 유혹했다. 따뜻하고 붉은 것, 감미로운 생명수를 마시는 그는 즐거웠다. 따분한 34세의 직장인이 아니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밤의 포식자.
그는 어둠 속에서 향기로운 인간을 유혹했다. 어둠의 유혹은 달콤하고 위험한 매력이기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도시의 밤 뒤에 숨은 뒷골목에 서서 그는 한 사람을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피부 속에 감춰진 핏줄을 감상하며 남자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강인한 턱이 연약한 피부를 찢는다. 쏟아지는 붉은 피를 마시며 남자는 웃었다. 유쾌하다.
유쾌하고 또 유쾌하다. 낮은 지루하지만 밤은 새로움으로 가득찬 어둠, 어둠, 어둠. 남자는 더이상 따분하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 밤까지는 그랬다. 오늘도 여느때와 같은 날이었다. 따분한 낮의 근무에서 벗어나 회사를 나오면 그는 우아하고 매혹적인 밤의 포식자가 된다. 도시의 어둠과 빛 사이를 거닐며 살아있는 자들을 유혹한다. 도시의 뒷골목에서 살짝 안은 사람의 온기가, 감미롭고 매력적인 향기가 그를 취하게 한다. 그는 손을 뻣어 향기의 근원을 끌어 당겼다. 힘없이 사람이 끌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쓰러진 사람의 감긴 눈도, 봉긋하게 솟은 코도, 핏기가 도는 붉은 입술이 매력적이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쓸어보다 동맥이 펄떡이는 목을 지그시 눌러보았다. 손끝에 살아 움직이는 핏줄이 느껴진다.아아. 살아있구나. 그는 펄떡이는 동맥에 입 맞췄다. 얇은 입술에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잠깐."

감미로운 순간에 들려오는 낯선 여자 목소리에 그는 짜증을 내며 고개를 들었다. 싸구려 나일론 재킷을 입은 여자가 굳은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여자를 보는 순간 그는 왠지 모를 공포감에 휩싸였다. 감정없는 건조한 시선이 그의 얼굴에 들러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그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방어태세를 취했다. 그의 방어 자세에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걸어왔다. 남자는 다가오는 여자를 피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즐거운가."

건조한 목소리가 남자의 귓가를 찔러왔다. 남자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이 여자는-여자일까?- 위험하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남자는 재빨리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인간을 벗어난 그의 감각들은 온몸으로 경고를 외치고 있었다. 그 여자가 쫓아오고 있었다. 빌딩과 빌딩 사이 어둠을 건너고, 도시의 현란한 빛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숨어봤지만 여자의 시선은 계속 그를 쫓고 있었다. 집요하고 건조한 시선에 남자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두려웠다. 저 사람은 누구인가. 인간을 벗어난 자신을 쫓는 저 자는 누구인가.

"즐거운가."

여자의 목소리가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도시의 빛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리는 음성은 지독하게 무감정했고 건조했다. 남자는 그것이 더욱 두려웠다. 감정은 두렵지 않다. 무감각, 아무런 감정이 없는 자가 더 두려웠다. 몇 번이나 구르고, 넘어져도 남자는 계속 달렸다. 잠깐의 아픔보단 쫓아오는 여자가 더 무서웠다. 저 여자의 손에 잡히면 자신의 운은 다한 것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차고 무서운 것이다. 저 여자는. 남자는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밤의 어둠이, 도시의 빛이 자신을 숨겨줄 것이라 기대하며 남자는 쉴새없이 달렸다. 귓가를 스치는 음악소리도,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남자는 느낄 수 없었다. 오직 여자의 건조한 목소리만이 남자의 귓가에 들러 붙어있을 뿐이었다.

"즐거운가."

다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남자는 뒷골목 어둠 속에 지쳐 쓰러져 있었다.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 앉은 남자 앞에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여자의 물음 아닌 물음에 남자는 숨을 몰아쉬며 겨우 입을 열었다.

"즐거워. 당신만 나타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

남자의 대답에 여자는 찡그리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렇게나 그려진 초상화가 구겨지는 듯한 묘한 표정이었다. 남자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여자를 바라봤다. 감정 없는 새카만 눈, 창백한 뺨, 말라붙은 입술. 여자는 살아있는 시체였다. 남자는 쓰게 웃었다. 자신보다 더 시체같은 사람을 보다니. 따분한 인생이 극적으로 변한다고 생각했더니 이 모양이다. 저 시체 같은 여자를 보니 자신의 지난 시간이 얼마나 고마운 시간이었는 지 알 수 있었다. 저 죽지도 못한 여자보단 따분한 자기 인생이 더 나아보였다.

"고맙군."

남자의 말에 여자는 또다시 찡그리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표정이 우스워서 남자는 킥킥 억눌린 웃음을 터뜨렸다. 묘한 일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다니.

"뭐?"
"고맙다고 했어. 당신을 보니 내 인생이 얼마나 축복받았는지 알겠어."

남자는 이 말을 꺼내며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저 여자는 포식자다. 자신 위에 있는 또 다른 포식자. 따분하다는 이유로 인간을 벗어난 결과물이 저것이다. 저-기 살아있는 시체. 잠자코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메마른 목소리가 쉭쉭 새어나왔다.

"먹어주지."
"...뭐?"
"네 지루하고 따분하고 남에게 빌붙는 구차한 인생. 먹어주겠다."

여자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어둠을 삼키는 깊은 그림자가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남자는 두려움에 떨며 이리저리 황망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도망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여자의 그림자는 어둠을 삼키고, 남자가 서 있는 뒷골목을 삼키고 마침내 남자까지 삼켰다. 여자의 그림자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또다른 포식자인 그녀이 외에는. 여자는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도시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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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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