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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결투

2005.02.28 15:0102.28

1. 레이아 공주

일은 데리카르트 공국 공주 레이아가 고대해 마지 않던 열여섯 번째 생일에 생겼다. 그 날 그녀는 지금까지 중 가장 공들여 몸치장을 했다.
본디 그녀의 매력은 청순함이었다. 엄지와 검지로 만든 원안에 쏙 들어가는 가녀리고 하얀 팔과 궁중 어떤 숙녀보다도 늘씬한 허리선은 산들바람에도 흩날리는 코스모스 같았다.
하지만 이 날 그녀는 변신하고 싶어 했다. 수줍게 피어오를 듯 말 듯한 꽃봉오리가 어느새 활짝 펴 있다는 걸 알게 해 주는 그런 성숙함을 말이다. 야하지 않으면서 성숙한 여인의 미가 그녀의 주문이었다.
마침내 그녀의 승인이 떨어진 머리는 위로 틀어 올려 이마 위 머리에서 원형으로 곱게 땋은 머리를 붙이고 뒷머리를 두 갈레로 곱게 말아 늘어뜨린 모앙이었다. 가늘고 길게 늘어뜨려진 백금에 다이아를 박은 귀걸이는 보송보송한 솜털이 엿보이는 목을 더욱 고혹적으로 보이게 해다. 그녀는 그 이상의 화려한 장신구는 피했다. 드레스는 화사한 벚꽃 색으로 어깨 양끝이 파이고 그 밑에 손가락 하나 길이의 레이스를 가슴 모양으로 박았다. 앞은 허리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수를 놓아 가녀린 허리를 강조했으며 활짝 핀 나팔 꽃 같은 소매 레이스는 팔꿈치 바로 밑에서 정점을 이루어 그녀의 여리디 여린 팔목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녀는 거울을 보고 만족했다. 오늘은 그녀가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날이자 테리아스 공작과 하이언 남작의 보이지 않는 대립이 공식화 될 날이 될 지도 모르는 날이었다.
하이언 백작의 아버지는 소문난 바람둥이였다. 그런 그가 촌구석 이름뿐인 남작의 딸과 결혼했을 때 사교계는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얼마 가지 않아 싫증을 낼 거라고 수군댔다. 하이언이 태어나고 10년이 지나도록 부부의 사랑은 변치 않았다. 사람들이 마침내 그가 길들여졌다고 생각할 때 그는 테리아스 공작의 어머니와 다시 사랑에 빠졌다. 하이언의 아버지는 모자를 고향으로 쫓아 보냈다. 하지만 테리아스의 어머니는 이혼하지 않았다.
테리아스의 아버지가 칼을 앞에 두고 날 베고 가라고 소리치자 그녀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다. 그는 신사답게 그녀의 부정을 모두 잊기로 했다. 하이언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로 돌아가 술과 노름과 방탕한 생활을 즐기다가 몇 년 전에 죽었다. 할머니는 유일한 후계자인 하이언과 어머니를 다시 불러들였다.  
구질구질한 소문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교계에 흡수되는 건 어렵지 않았다. 180cm가 넘는 장신에 달의 여신의 축복을 받은 은백색 머리카락이 허리에서 출렁였다. 혈관이 보일 것만 같은 투명한 피부, 드문 은백색 눈썹 아래 청회색 눈이 빛났다. 여인들이 울고 갈 길고 고운 손가락은 뭇 여인들의 보호본능을 일으켰다. 그는 레이아 공주에게 첫 눈에 반했다. 레이아는 그가 자신에게 구애의 눈빛을 보내는 것이 기뻤다. 그녀는 무수한 구애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청년은 없었다. 백작이 재산을 많이 잃었지만 할머니는 그 몰래 재산을 빼돌려 놓았었다. 할머니와 하이언의 어머니, 두 여장부의 도움을 받아 하이언은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있었다. 몇 년 안에 예전 못지않은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올해 서른인 테리아스는 오랫동안 전장을 돌아다니다 작년에야 다시 수도로 돌아왔다. 데리카르트 국의 북쪽은 비옥한 토지였다. 그 너머에 홉 고블린들의 영지가 붙어 있었다. 공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그들은 해마다 수확 때가 되면 지겹게도 몰려 왔다. 그 골칫거리를 제거한 것이 바로 테리아스였다. 4년간의 싸움에서 홉 고블린들의 영지를 초토화시킨 그는 나라의 영웅이 되었다. 그 역시 돌아온 후 레이아 공주의 성장한 모습에 감탄했다.
레이아는 어릴 때부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뿐 아니라  온 나라 여성의 흠모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레이아는 11세였다. 5년 간 레이아는 그가 돌아올 날만을 기다렸으며 고대하던 그 날 테리아스의 시선을 잡는데 성공했다.
‘어쩌면 오늘 둘 다 내게 청혼할 지도 몰라.’
복잡하게 얽혀있어 더 요란스러운 두 기둥이 모두 그녀에게 빠져있었다. 오랫동안 동경해왔던 테리아스의 강한 남성미와 나르시스의 재현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하이언 중 누굴 택해야하는가. 그녀는 문득 오늘 동쪽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카스트 국의 왕자 프레넬도 참석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역시 상당한 미남자라는 소문이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몸치장을 확인했다.

“데스트레 파두 폐하와 레이아 공주님이십니다.”
시종의 외침과 함께 팡파레가 울렸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누르며 아버지의 손을 잡고 무도회장에 입장했다.
그녀는 무도회장을 녹색톤으로 꾸밀 것을 지시했었다. 커튼은 짙은 상수리 나뭇잎 색으로 하얀 색으로 잎을 만들었다. 대리석 기둥은 포도 덩굴로 장식했고 바닥은 연한 잔디색이었다. 왕은 어릴 때 죽은 그녀의 어머니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그녀가 바라는 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너무 버릇없게 키운 건 아닌가?
레이아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한동안 얌전히 굴었었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너무 쉽게 넘어왔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모든 것이 그녀가 바란 대로 되었다는 것이었다. 녹음 속에서 그녀의 부드러우면서 선명한 분홍색 드레스는 빛을 발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목과 팔목에 쏠려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녀는 부드럽게 무릎을 굽히고 인사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 귀부인들 사이에 박수가 터졌다.
왕이 그녀의 손을 이끌고 무도회장으로 내려왔다. 그 순간 테리아스 공작과 하이언 백작 두 사람이 동시에 두 사람이 그녀에게 춤을 신청하고자 앞으로 나왔다.
테리아스 공작은 빛마저 빨아들일 것 같은 강렬한 검은 머리에 뚜렷한 이마, 흑진주처럼 빛나는 검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오늘을 위해 드물게 멋을 내고 왔다. 검은 망토 안에는 핏빛처럼 검은 안감을 대었고, 망토에는 커다란 루비로 된 브로치가 박혀 있었다. 하얀 타이즈 밑 검은 구두에도 붉은 루비가 박혀 있었다. 검은 색과 붉은 색은 그를 야수처럼 보이게 했다.
하이언의 옷은 은색이었다. 턱 아래부터 어깨를 덮는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세밀하게 주름잡힌 셔츠에는 은실로 섬세한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목에는 옅은 분홍색 리본을, 망토는 겉은 금색, 안감은 마찬가지로 분홍색이었다. 두 손이 나란히 앞에 왔을 때 레이아는 혼란을 느꼈다. 바라마지 않던 순간이었으나 이 순간을 잘 넘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공주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둘 다 무시할 수 없는 가문이었다. 문제를 해결한 건 왕이었다.
“프레넬 왕자에게 첫 곡을 미리 부탁해 놨다네. 멀리서 온 만큼 이해해주게.”
왕은 껄껄 웃었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모두 눈을 맞춘 후 왕자의 손을 잡았다.
프레넬 왕자는 첫 눈에 강한 인상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몇 스텝 밟지 않아 레이아는 그와 함께 있으면 절대 지루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다음 곡은 누구와 추실지 정하셨습니까?”
왕자가 물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속내가 이렇게 쉽게 들키는 건 드문 일이었다.
“여행은 어떠셨어요? 이 곳 음식은 입에 맞으시나요?”
왕자는 감미롭게 웃었다.
“제가 정원을 안내해달라고 부탁드리면,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기게 되는 건가요?”
“무슨 말씀이세요. 영광인걸요.”
다음 곡을 신청한 건 왕이었다. 그녀는 5분 간 내려진 유예 동안 다시 고민에 빠졌다. 외모만큼이나 두 사람은 대조적이었다.
테리아스와 함께 있으면 숨도 쉴 수가 없었다. 그의 손이 닿으면 다리에 힘이 빠지고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가 바란다면 어떤 것도 거절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과 그가 요구하길 바라는 마음 사이에서 방황했다. 하이언은 달랐다. 그와 있으면 여신이라도 된 것 같았다. 영원히 동화 속 공주처럼 숭배와 보호 속에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번째 곡이 끝났다. 이번에도 문제는 그녀 손을 떠나 해결되었다. 둘은 결투를 해 패자는 영원히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기로 이야기를 마치고 무도회장을 떠나고 없었다.


2. 테리아스 공작

테리아스는 왕 앞에 무릎 꿇고 저 더러운 홉고블린 무리가 다시는 데리카르트의 신성한 땅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노라 맹세했다.

홉고블린을 상대하는데 가장 힘든 점은 그들이 길들여 타고 다니는 쿠헤인이라는 짐승이었다. 발에서 머리까지 높이가 4m는 족히 넘는 거대한 짐승은 이마 사이에 있는 긴 뿔로 중무장한 기병도 날려버렸다. 입을 열면 하늘이 진동하는 듯 포효해 병사들은 물론이고 말들이 겁에 질려 날뛰었다.
테리아스는 남부 거친 평야에서 자라는 야생마를 집단으로 포획했다. 사납고 난폭해 다루기가 힘들었지만 일단 길들이는데 성공하자 군마로는 최고라는 걸 증명해보였다. 무엇보다 그 말들은 두려움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테리아스는 제2 기마대를 적진으로 보냈다. 홉고블린들은 원숭이 같은 울음소리를 지르며 쿠헤인을 데리고 돌격했다. 기병대는 겁에 질려 달아나는 시늉을 했다. 신이 난 홉고블린 떼가 돌진해 왔다. 테리아스가 고른 곳은 넓은 평야였다. 뒤에는 거센 물살이 흐르는 강이었다. 홉고블린들은 그가 배수진을 친 거라 생각했다. 평야는 쿠헤인이 움직이기 좋은 곳이었다. 승리를 자신한 그들은 전력으로 돌진해왔다. 테리아스가 직접 이끄는 제1 기마대가 돌진했다. 잘 훈련된 말은 기수의 고삐에 이끌려 달렸다. 그들이 쓰는 무기는 길이 3m가 넘고 날 길이만 80cm에 가깝게 개량한 할버드였다.
“좌우로 진격하라!”
쿠헤인 위에 탄 홉고블린들이 활을 날렸다. 몇몇 기병들은 말에서 굴러 떨어졌지만 대부분 쿠헤인 양쪽으로 붙는데 성공해 할버를 옆으로 뉘였다. 몸무게만 600kg인 말이 달려드는 힘이었다. 쿠헤인의 다리 힘줄은 무력하게 찢겨나갔다.
꾸웨에에에엑-
쿠헤인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 바람에 기병들의 피해도 나왔다. 고통으로 이성을 잃은 쿠헤인은 기수의 명령을 무시하고 무조건 달리거나 무릎을 꿇고 쓰러져 몸부림쳤다.
테리아스의 보병들은 의도적으로 빈 공간을 만드는 진을 치고 있었다. 쿠헤인은 폭주하며 보병 사이를 뚫고 지나가 강에 빠졌다. 강바닥에는 미리 뾰족하게 깎은 통나무를 박아 놓았다. 쿠헤인의 생명력은 질겼다. 그들은 쉽게 죽지 않고 날뛰었다. 기수의 통제를 벗어난 쿠헤인들은 뒤를 따르던 홉고블린 보병에게 달려들었다. 적과 아군의 구분이 없었다. 준비하고 있던 테리아스군은 황급히 물러섰지만 홉고블린들은 돌아서서 달아나다가 본진과 충돌했다. 가벼운 가죽갑옷만 입어 기동력을 높인 테리아스 기병 궁수들이 그들 뒤를 쫓으며 활을 퍼부었다.
싸움이 끝난 자리에는 찌그러진 팥빵처럼 땅에 눌러 붙은 시체가 가득 널려 있었다. 아직 살아남아 비명을 지르는 쿠헤인은 보병들이 달려들었다. 한 마리당 수십 명이 달라붙어 30여분 간을 난도질해서야 겨우 비명을 멈출 수 있었다.
한 번 잡을 수 있다는 걸 알자 테리아스 군의 사기는 높아졌다. 쿠헤인이 무너졌다고 홉고블린들이 쉽게 무너진 건 아니었다. 전쟁은 4년이 걸렸지만 그들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굴욕적인 조약에 승복했다.


3. 하이언 백작

테리아스가 귀환하자 왕은 그를 위해 성대한 귀환과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다. 테리아스와 하이언의 첫 만남이었다. 하이언은 예의바르게 다가와 격식에 맞게 인사했다. 테리아스도 적절하게 응수했다.  
많은 사람들이 은연 중 고대해 마지않던 일이 발생한 건 공주의 생일파티 두 달 전이었다. 테리아스의 제2 기병대를 지휘하는 카를로는 본시 성격이 난폭했다. 아무리 실력이 좋을 지라도 그는 서자였다. 그는 결코 작위를 받을 수 없었다. 그는 술에 취하면 주로 젊은 상속자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사람들이 그를 눈감아 주고 있는 건 그의 아버지가 아니라 테리아스를 봐서였다.
하이언은 다른 사람들처럼 참아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날짜가 잡히고 참관인도 정해졌다.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부인들은 혹 하이언이 다칠까 안절부절했다. 몇몇 남자들은 하이언이 보기 좋게 지길 바랐지만 또 몇몇 남자들은 이 기회에 카를로가 한 번 혼나길 바랐다. 테리아스는 중재에 나서지 않았다. 상대가 하이언이라 껄끄러웠는지 오히려 바라던 바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둘은 마주섰다. 카를로는 구경꾼을 훑어보더니 비릿하게 웃었다. 숨결에 알코올 향이 묻어 나왔다.
“잘난 척 하는 것도 여기까지다, 애송이.”
하이언은 대답대신 거리를 두고 섰다. 카를로는 먼저 검을 뽑았다.
“덤벼봐라, 난 네 선생들처럼 봐주지 않는단다, 꼬마야.”
하이언은 조금 독특한 발검 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하이언은 항상 눈가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웃음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어쩐지 리드미컬한 움직임도 여전했다. 그 모습 그대로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을 뿐이었다. 전투 경함이 있는 남자들은 온 몸의 털끝이 팽팽하게 일어서는 걸 느꼈다. 새들도 울음을 멈췄다. 풀벌레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카를로는 술이 확 깨는 걸 느꼈다. 열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하이언이 마치 거인처럼 느껴졌다. 테리아스에게서나 느낄 수 있던 위압감이 몰아쳐왔다. 카를로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그가 쥐고 있는 날이 두툼한 바스타드 소드가 대거처럼 가냘프게 느껴졌다.
기선을 잡아야 해. 차라리 먼저 공격해. 눌리지 마!
카를로는 무수히 마음속으로 외쳤다. 영원 같은 시간이 흐르고 하이언이 검을 뽑아들었다. 카를로는 기합을 지르며 막았다. 하이언은 공격하지 않았다. 단지 뽑았을 뿐이었다. 그는 쿠헤인이 그에게 돌진해 박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하이언의 검이 밑으로 내려갔다. 카를로는 무릎을 꿇고 쓰러져 숨을 몰아쉬었다. 하이언은 평소처럼 우아하게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카를로는 그 직후 수도원에 들어갔다. 몇 년 후 수도원에서 그를 만난 사람들은 온화하고  미소로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는 카를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다.


4. 결투

레이아는 베게를 집어 던졌다. 장신구를 빼서 거울에 집어 던지고 화장대를 엉망으로 만들려다 얼마 전 구입한 값비싼 향수를 보더니 침대보에 화풀이를 했다.
그녀는 주저앉아 소매 끝을 자근자근 물어뜯었다. 왕이 그녀에게 이렇게 화를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명망 높은 두 가문이 결투를 하게 만든 그녀의 경솔함을 용서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그녀는 편지를 보냈다. 둘 다 같은 시간에 도착하도록 신경 썼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가냘픔과 애처로움을 쥐어 짜내 제발 결투를 그만둬 주길 간청했다. 두 사람에게는 비슷한 내용의 답신이 왔다.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그녀는 편지를 갈갈이 찢어 버렸다.
결투는 어느새 수컷과 수컷의 대결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미 열외였다.
그녀는 탁자 위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다. 왕의 노여움은 하늘로 치솟았고 다른 구혼자들은 왕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왕이 명령하는 곳이면 어디든 시집을 가야 했다. 뭇 여인들의 부러움과 시기, 뭇 남성들의 애끓음을 뒤로 하고 결혼하는 건 이미 글렀다. 아니, 이 사건으로 둘 중 하나가 죽거나 치명적인 상처라도 입게 된다면... 그녀는 더럭 겁이 났다. 하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건 말도 안돼!
그녀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어!
왕은 직접 만류하지 않았다.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어야 했기에 거부당할 일은 피했다. 한 번은 치렀어야 할 일일 지도 몰랐다.

청명하게 맑은 날이었다. 이 날의 결투는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졌다. 그 자리에는 테리아스와 하이언의 시종 하나와 참관인 하나씩 밖에 없었다. 그들은 관례를 무시하고 최소한의 인원만으로 결투를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날짜가 퍼지는 것 까지는 막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끝내 어디서 결투가 이루어졌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두 참관인이 형식에 맞춰 결투를 말리는 시늉을 했다. 물론 둘은 거절했다. 다음으로 상대방의 검을 살폈다. 독이 발라져 있지는 않은지 확인한 후 다른 무기를 숨기지는 않았는지 몸수색을 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페리아스는 하이언이 검을 다루는 손을 보며 만만치 않은 적수임을 직감했다. 하이언 역시 페리아스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사소한 움직임도 주의했다.
참관인이 시작을 알렸다. 하이언과 페리아스는 동시에 검을 뽑았다. 페리아스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압도적인 힘을 느꼈다. 하이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리아스의 자세에는 자그마한 허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두 참관인은 몸이 저릴 정도로 긴장된 공기에서 수천의 적을 앞에 두었을 때의 살기를 느꼈다. 그들은 오랫동안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 건 하이언이었다. 그는 왼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페리아스는 그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페인트, 그 뒤 찌르고 올라오기. 페리아스는 오른 발을 뒤로 뺐다. 페인트를 무시하고 역공격 강하게. 하이언은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다음 순간에 쳐오겠지. 망설이는 듯하다가 재빠르게 그리고 빠지고. 페리아스는 앞으로 전진했다. 하이언은 멈칫했다. 검끝을 받아 오히려 이 쪽으로 찔러오겠다는 건가. 하이언은 옆으로 한 발 움직였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참관인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그들은 전술을, 힘을 읽고 느꼈다.

한 순간 둘은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수를 읽더라도 직접 부딪히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영역이 있었다.
“하앗!”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내달았다. 참관인들은 벌떡 일어섰다.

무심한 비둘기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사위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들의 검은 종이한 장도 채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멈춰 있었다. 그 상태로 한참을 응시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칼을 내렸다.
페리아스가 하이언의 등의 두드렸다. 하이언 역시 페리아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들은 소리 내어 웃었다.
“굉장한 실력이더군.”
“아니, 경이야 말로, 숨이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참관인들이 박수를 치며 일어섰다.
“보는 것만으로 소름이 끼쳤네.”
시종들은 그제야 결투가 끝났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페리아스와 하이언은 한참 동안 서로를 노려보다가, 그들은 하품을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발과 칼을 몇 번 움직이는 듯하다가, 그들은 다른 시종은 이 상황을 이해하는 지 서로 힐끔거렸다, 마침내 시작하는가 싶더니 끝난 것이다.

무승부라는 이야기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서로 체면을 구기느니 적당히 싸우고 끝낸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품었다. 둘 다 한다면 하는 자존심의 소유자들이었다. 결투만으로도 몇 년은 우려먹을 화제였는데 그 뒤 더 놀라운 일이 생겼으니 두 사람이 의형제를 맺은 것이었다. 둘은 공주가 누굴 선택하든 그 선택을 존중할 것을 맹세했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공주에게 초대장을 받았고 어깨를 나란히 성을 방문했다.
공주는 혼자 있지 않았다.
“곧 약혼식을 올리러 떠나게 될 거에요. 그럼 한동안 두 분을 뵐 수 없고... 그 전에 꼭 뵙고 싶어서 이렇게 오시라고 했어요. 축하해 주실 거죠?”
공주는 다정하면서 서글픈 눈매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공주의 옆에는 프레넬 왕자가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상냥하게 굴고 있는 그녀와 달리 그는 속으로 잔뜩 긴장해 있었다.
“이로써 두 나라의 교류는 더욱 굳건해 질 겁니다. 두 분 역시 카스트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왕자는 예의바르게 말했다.
두 사람은 차를 한 잔 마시고 떨떠름한 기분으로 일어섰다. 황량한 바람이 불었다. 둘은 머쓱하니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 뒤 두 사람은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공주님.”
공주는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프레넬이 선물로 준 드레스를 입어보고 있었다.
“카스트는 우리나라랑은 리본을 메는 법이 다르대요.”
“제대로 익혀둬.”

그녀는 왕명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데리카르트에서 그녀가 최고라는 건 이미 증명되었다. 그녀는 카스트에 가서도 최고가 될 생각이었다.

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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