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지하철

2005.02.24 16:0902.24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야근이었다. 손꼽아 기다려온 주말이건만 어제 퇴근하는데 연락이 왔다. 내일 보자는 A의 문자였다. 내일은 A의 결혼식이었다. 일에 치여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다.

“그럼~ 꼭 가야지! 신부 화장 기대할게!”

잊은 미안함에 과장된 호들갑으로 답문자를 보냈다.
하필 결혼식도 오전 10시인지라 늦잠을 잘 수도 없었다. 안 떠지는 눈을 억지로 부비며 일어나 화장을 하고 정장을 찾아 입었다. 그래도 새로 산 정장에 새 구두를 신을 때는 기분이 좋았다. 연보라색 몸체에 청회색으로 가장자리에 장식 줄이 달려 있었다. 9cm에 통굽도 아니고 하이힐이긴 했지만 눈이 맞아 버려 사놓고 막상 회사에 나갈 때는 신고 나갈 엄두가 안나 안 신고 있었다. 그래도 모처럼 새 정장을 입는데 새로 산 구두도 신고 싶었다.

결혼식은 강남이었다. 결혼식을 보고 친척이 하는 호프집으로 옮긴 우리는 낮부터 술을 마셨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도 반가웠지만 그동안 스트레스가 쌓여 들어가는 대로 마셨다. 술자리가 파한 건 7시쯤이었다. 이미 대부분 취해 있었다. 3차를 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온 몸에 힘이 빠졌다. 다음에 보자고 인사하고 헤어져 지하철역에 들어섰다. 하필 빈 자리가 없었다. 아주 빡빡한 것 까지는 아니어도 자리마다 한두 사람씩 서 있었다. 내 옆에도 나처럼 잘 차려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지치고 피곤하고 발이 아팠다. 살며시 발을 들어보니 뒤꿈치가 피투성이였다. 새구두라 길이 안 들어 까졌는데 술에 취해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보고나니 통증이 밀려왔다. 집까지는 아직도 40분은 더 가야했다. 어쩌자고 이걸 신고 나왔담. 신고 나올 때의 설렘은 간 곳도 없고 뒤꿈치는 쓰라리고 발바닥은 아프고 발가락은 힐의 특성상 힘이 몰려 쪼개질 것 같았다. 종아리는 뻑뻑하고 허벅지가 땡기다 못해 허리까지 아팠다. 마신 술에 머리는 몽롱하고 일주일간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아무 곳이고 간에 털퍼덕 주저앉고 싶었다. 다리가 이 꼴만 아니었어도 선 채로 잘 것만 같았다.

위잉 진동 소리가 들리더니 앞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응, 이제 두 정거장 남았어. 응, 거기서 기다려.”

눈이 번쩍 뜨였다. 두 정거장, 분명히 두 정거장이라고 했다. 순간 내 옆에 선 아가씨도 바짝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그 여자와 내가 서 있는 위치는 참으로 애매했다. 남자는 의자 제일 끝에 있었다. 그 아가씨는 끝에서 막대에 기대 있었고 나는 그 옆이었다. 어쩌다보니 나도 그 여자도 그 사람 앞에 반씩 걸쳐져 있었다. 나는 살그머니 발을 왼 쪽으로 옮겼다. 그 여자는 기대있던 몸을 똑바로 세우고 바로 반격에 나섰다. 오른 쪽으로 몇 센티미터 다가왔다.

문이 열렸다 닫혔다. 이제 한 정거장이었다. 나는 초조해졌다. 그 여자가 먼저 서 있었던 걸 기억해 낸 탓이었다. 그 여자는 그걸 이용해 내게 정신적인 압박을 주고 있었다. 그 여자의 신발도 만만치 않은 뾰족구두였다. 피곤하고 발이 아플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내가 그랬으니까. 그런데도 도무지 양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차마 노골적으로 어쩌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직 아줌마가 되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 여자도 그런 눈치였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남자가 내릴 준비를 하는 지 가방을 부스럭거렸다. 여자가 냉큼 반 발 옆으로 옮겨왔다. 어이가 없었다. 그 여자 발을 힐로 밟아 뭉개주고 싶었다. 손으로 밀쳐내고라도 그 앞에 서고 싶었다. 집까지 어떻게 가라고. 네 발만 발이고 내 발은 발도 아니냐. 이 여자야, 너만 피곤해? 난 이번 주 내내 야근이었다고!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여자가 앉는 걸 보지 않기 위해, 그 여자가 앉으면 막대에나 기대야겠다는 생각이나 하며.

지하철이 속도를 줄일 무렵 남자가 일어섰다. 내리기 위해 문 쪽으로 몸을 움직였기 때문에 내 옆에 있는 여자는 비켜줄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틈이었다. 나도 모르게 잽싸게 빈 자리에 앉았다. 양심의 가책 따윈 없었다. 눈을 치켜 뜬 여자를 무시했다. 고소했다. 그러게 그렇게 얌체 짓을 말았어야지. 지하철이 멈추고 문이 열리기 무섭게 내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나 내렸다. 그 여자는 내 옆에 앉았다.

민망하고 창피했다. 나는 그냥 옆에 있는 막대에 머리를 누였다. 피곤했다. 어쩐지 울고 싶었다.
아진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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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키 05.02.24 21:30 댓글 수정 삭제
    ....... 지하철에서 일어나는 처절한 자리암투.... 눈물나죠.(먼별) 지하철 많이 타는 저로서는 왠지 공감이 가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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