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2장

2021.10.31 01:5010.31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동준은 집에서 도망 나와 근처 공터로 숨었다.

 

 

준아, 준아.

 

 

자신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고개를 다리에 파묻고 한껏 웅크렸다. 동준은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할머니의 집으로 말이다. 동준은 자신의 마음이 진정 될 때까지 숫자를 세기로 하였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넷......

 

 

한참을 세던 그의 숫자 앞으로 그림자가 불쑥 다가온다. 이른 아침부터 울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 동준은 눈가를 소매로 쓱 닦았다. 동준이가 고개를 든다. 자신처럼 웅크려 앉은 하얀 살갗이 반짝거린다. 젖은 머리칼로 바닷내가 베었고 모래 알갱이가 붙은 살결은 짠 내가 났다. 발가벗은 여자가 동준을 마주 보고 있다. 다리 사이로 눌린 가슴께에 다시 동준이의 뺨이 발그레 진다.

 

 

아, 아, 아.

 

 

뭔가 막힌 소리를 억지로 내며 자신을 가리킨다. 동준은 눈을 무릎 사이로 박으며 눈을 꼭 감는다. 아침이 밝아오고 사람들이 깨어난다. 여자가 동준이의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킨다.

 

 

으앗.

 

 

짧은 비명을 지르며 동준은 버둥거렸다. 여자가 동준을 일으켜 자신을 연신 가리킨다.

 

 

아, 아, 아.

 

 

동준이의 눈이 동그래진다. 언젠가 들었던, 어제 한낮으로 보았던.

 

 

인어 누나?

 

 

여자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목이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주위를 살피며 동준이의 손을 끈다. 동준은 누나를 끌어 집으로 달려갔다. 조용한 바다 마을을 가로질러 동준은 누나를 집 뒤편에 숨겨주었다.

 

 

옷 들고 올게.

 

 

타박거리며 쏜살같이 들어간 동준이의 뒤로 여자는 숨을 들이 쉬었다. 찬찬히 일어서 집들과 언뜻 보이는 정원들을 눈여겨보았다. 목으로 낀 습기를 뱉기 위해 목을 긁고 기침을 해댄다. 그녀의 작은 소란이 누군가의 귀로 들어간 탓일 것이다. 동준이가 아직 옷도 채 가져다주지 못하였는데. 헐벗은 그녀에게로 고함이 떨어진다.

 

 

뭣하는 게야!

 

 

고함 소리에 놀란 여자는 굳은 채로 고개만 돌리었고 엄한 그 얼굴에 또 한 번 놀라 달아나고 말았다.

 

 

누나!

 

 

뒤늦게 온 동준이가 옷가지들을 안아 올리고서 허둥지둥 그녀의 뒤를 따라 내달렸다. 둘은 처음 마주친 공터에 가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동준이가 옷가지를 건네주고서 누나의 앞으로 몸을 번쩍 일으켜 가려주었다. 주섬주섬 옷을 입던 그녀가 또 한 번 목을 긁어 목에 낀 바닷기를 빼내었다. 목소리가 조금씩 돌아온다.

 

 

아, 아, 아.

 

 

동준이가 누나를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말을 할 수 없는 거예요?

 

 

하얀 티셔츠가 훌렁 내려온다. 급하게 들고 온 청바지는 후줄근했고 티셔츠는 목이 늘어나 지저분했다. 무엇보다 신발을 챙길 겨를이 없어 맨발로 뛰어다녔었다. 흙과 먼지가 잔뜩 묻은 발이 까맣게 더러워져 있다.

 

 

 

누나, 정말 그때 그 인어 맞아요?

어째서 다리가 있는 거예요?

누나는 땅에서도 살 수 있는 거예요?

 

 

하타의 순수한 물음들에 여자는 눈이 동그래져 멍하니 그를 지켜만 보았다.

 

 

누나는 왜 여기에 온 거예요?

 

 

여자가 동준이의 머리칼을 헝클이며 조잘거리었다.

 

 

준아, 준.

 

 

맞아요!

 

 

동준이가 그녀의 발치에서 웃음을 짓는다. 여자가 쪼그려 앉아 그를 마주 본다.

 

 

아, 아, 아.

 

 

말이 나오지 않는다. 문장들이 무언가에 막혀 부서지고 구부러지다 휘고는 튕긴다. 입술을 잘근 깨문다. 난처한 얼굴의 그녀에게로 동준이가 천진하게 말한다.

 

 

우리 집에서 잘래요?

 

 

여자는 고함을 치던 노인을 떠올렸다. 다시 그 고함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동준이가 샐쭉해져 입술을 내놓자 그녀는 몸을 일으켜 낮은 크기의 담벼락에 올라타 앉았다. 옆을 탁탁 두드리며 웃어 보인다. 동준이가 그녀의 옆으로 앉아 함께 바다를 본다.

 

 

 

 

 

 

 

 

동준은 저녁 식사 중 몰래 음식을 접시에 따로 담아 의자 밑에 두었다. 엄마와 할머니는 말없이 젓가락을 놀리며 낮에 있던 작은 소동에 대해 대화하고 있었다. 엄마가 동준을 부른다.

 

 

네?

 

 

깜짝 놀라며 답하는 그에게로 엄마는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었다.

 

 

밖에 이상한 여자가 있다나봐.

분명 정신이 이상한 사람일 거야.

조심 하렴!

 

 

동준은 최대한 평소처럼 굴기 위해 능청을 떨었다.

 

 

엄마도 참, 괜찮아요.

 

 

괜찮고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조용한 마을에서는 작은 일도

멋대로 부풀린 다니까.

 

 

응.

 

 

발가벗은 여자가 돌아다닌다니.

 

 

동준이가 젓가락을 살며시 내려놓는다. 입을 오물거리며 간신히 밥을 씹어 넘긴다. 그릇을 들어 조심조심 의자를 끈다. 발밑에 놓인 접시를 밟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참, 어머님은 아침에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신 거예요?

 

 

동준이가 움직임을 멈춘다. 그릇을 어중간하게 든 채로 할머니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가만히 젓가락을 놀리던 할머니의 손이 된장국을 가져간다. 된장국을 마시고 나서도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다.

 

 

후.

 

 

동준이가 속으로 몰래 숨을 내쉰다.

 

 

아무튼, 준아!

 

 

응!

 

 

엄마가 동준을 보며 강조하듯 목소리를 높인다.

 

 

함부로 싸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알았어.

 

 

투덜거리며 동준은 조심히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이제 몰래 숨겨 놓은 접시만 들고 가면 된다. 동준이가 태연하게 의자 밑으로 몸을 숨기려 할 때.

 

 

동준아.

 

 

윽.

 

 

엄마가 그를 부른다. 동준은 의자 밑에서 나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왜?

 

 

엄마가 욕실을 가리킨다.

 

 

일단 씻어, 빨리.

 

 

싫어!

 

 

당장.

 

 

심술이 난 얼굴로 시위도 해보지만 엄마는 물러나지 않았다. 동준이가 뾰로통하게 있자 엄마가 코를 찡긋하며 한마디 한다.

 

 

너 아까부터 짠 내로 덮여서 지독한지도 모르지?

수영이라도 하고 온 거니?

 

 

젖은 머리칼과 바닷내를 풍기던 살결. 그녀와 동준. 한참을 그녀의 옆에 앉아 바다를 보았었다. 동준은 샐쭉한 채로 웃옷을 벗고서 욕실로 들어갔다. 얼른 몸을 닦고는 나와 대충 수건으로 몸을 훑고서 부엌으로 숨죽여 들어갔다. 의자 밑을 확인한다.

 

 

앗.

 

 

숨겨 두었던 음식 접시가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엄마가 발견해 전자레인지 안에 넣어 두었다. 동준은 하는 수 없이 빈손으로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어스름이 지고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마을을 가로지르며, 동준은 누나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줄 수 없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꼈다. 숨 가쁘게 공터로 달린다.

 

 

아무도 없는 공터로 동준은 고개를 바삐 돌리었다. 없다. 누나가 없다. 불안한 눈을 한 채로 동준은 자연스레 바다가 보이는 담벼락으로 몸을 기대었다.

 

 

앗.

 

 

해변가에서 바다로. 물살이 이는 남색 도화지 속에서 그림자가 위에서 아래로 흔들리고 있다. 동준은 마을의 해변으로 달음박질을 쳤다. 까만 모래밭이 달을 받아 반짝이고 먼 수평선으로 수이 많은 파도들이 몸을 밀어 부서지고, 흩어진다. 동준은 남색으로 칠이 된 넓은 도화지로 가 발가락을 꼬물대었다. 작디작은 물결들이 동준이의 발가락으로 닿아 꺄르륵 거리며 간질인다. 제자리에서 동준은 누나를 보았다. 하얀 달 아래에서 맨 몸이 된 그녀가 파도 위에 선다. 까만 머리칼이 밤 한가운데서 모래 알갱이들과 함께 반짝거렸다. 그녀가 동준을 본다. 동준이는 가만히 서서 손을 흔들었다. 누나는 파도를 타고 물살에 밀려나와 모래밭 위를 걸었다. 동준은 밝게 빛나는 누나의 맨 살에 눈을 아래로 피하였다. 해변 한 켠에 가지런히 개어놓은 옷을 펼치며 누나는 웃음을 지었다. 동준은 화끈거리는 뺨으로 더듬거렸다.

 

 

밥을 들고 오지 못했어, 엄마가 들고 가버려서.

미안해 누나.

 

 

그녀가 동준에게로 다가간다.

 

 

준아!

 

 

등 뒤로 찌르는 고성에 동준은 상체를 활처럼 일으켜 굳고 만다. 고개만 살짝 돌린다. 해변과 마을을 잇는 계단으로 엄마가 서있다.

 

 

엄마.

 

 

엄마는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모래를 헤치며 다가왔다. 동준이의 손목을 붙잡고서 밖으로 끈다.

 

 

엄마!

 

 

동준이가 발버둥을 치지만 엄마는 듣지 않았다. 계단을 모두 오르고 마을 담장에서 엄마가 동준에게로 무릎을 꿇는다. 동준이는 그저 엄마가 미웠다.

 

 

엄마, 뭐하는 거야!

 

 

너야 말로 뭐하는 거야!

 

 

엄마가 큰 소리로 호통을 친다. 기가 꺾인 동준은 몸을 움츠렸다. 눈가로 작은 물방울들이 맺히고 고이지만 떨어지지 않는다.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되는 냥 동준은 눈을 꼭 감았다. 엄마는 동준이의 얼굴로 소리 질렀다.

 

 

멋대로 밖에 나가면 어떻게 해!

밤중에 누굴 만날지 알고 돌아다니는 거야!

그 이상한 여자가 너한테 무슨 해코지를 할지,

넌 무섭지도 않니!

 

 

동준이의 목이 방울방울 터지고 발아래로 넘쳐흐른다.

 

 

그 누난 안 위험해.

안 위험하다고!

 

 

엄마가 동준이의 손목을 홱 잡아 채 집으로 끌고 간다. 동준이가 해변에 남겨진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 질렀다.

 

 

그 누나는 할아버지 친구야!

인어라고!

 

 

마구 발을 차고 몸을 뒤틀지만 엄마는 동준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동준이의 손목이 엄마의 손아귀에 꼭 쥐어져 빨갛게 물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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