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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발신번호 표시제한

2021.10.29 01:4210.29

여보세요?

야, 잘 지냈어?

 

어? 누구냐고?

이야... 내 목소리 못 알아보는구나!

하긴, 초등학교까지만 같이 나왔으니까 기억 안 날만도 하네. 재가 너무 오랜만에 연락했지? 진작 연락 할 걸 그랬다, 야.

 

어어, 그래! 맞아. 이제 기억 났나보네.

응, 잘 지냈지.

너는 잘 지냈어? 뭐하고 지내?

 

막학기 다니고 있구나. 휴학 한 번도 안 했나보네? 요즘에는 다들 휴학이 기본인 것처럼 하던데. 스트레이트 졸업하네.

맞아, 맞아. 나도 남들 다 하니까 괜히 휴학 한 번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했는데 그냥 집에서 시간만 보냈어. 말도 마. 한국사 자격증 하나 땄다, 야. 나중에 생각해봤더니 이건 방학에도 준비할 수 있는데 좀 후회되기도 하고 그렇더라고.

 

어? 나도 이번에 복학했어. 오랜만에 학교 가니까 웬 건물을 하나 더 지어놓고 여기저기 공사 중이라 좀 낯설더라.

그럼 너는 자취해?

아, 기숙사 살아? 와... 4년 내내 기숙사 들어간 거야? 대단하다. 너네도 기숙사 성적순이지? 공부 잘 했네~

나는 자취하지. 응, 여긴 기숙사도 얼마 안 지어놔서 들어가려면 성적 완전 높아야 해. 맞아, 다들 기를 쓰고 공부하나봐. 나도 휴학 전에는 기숙사 살았는데 휴학 직전에 성적을 조져가지고 쉽지가 않더라.

이제 복학이니까 열심히 해봐야지 뭐.

 

기숙사면 1인실이야? 2인실? 헐. 진짜 비싸다. 맞네, 1인실 살 바에는 그 돈으로 자취하겠다. 2인실이면 룸메는 괜찮아? 기숙사 들어가면 진짜 별별 사람 다 보잖아. 오~ 진짜? 룸메 복은 좀 있네. 기숙사 룸메 잘못 만나면 한 학기 풀로 고생하잖아.

헐, 맞다. 지금 룸메 있으면 통화하기 좀 그런 거 아니야? 아아, 나갔어? 잘 됐, 아니, 좋겠다. 아무리 잘 맞아도 가장 좋은 룸메는 안 들어오는 룸메라잖아. 그치, 완전 맞는 말이지?

어. 나도 전 룸메랑 잘 맞아서 같이 야식 엄청 시켜먹고 밤새 수다 떠느라 그 재미로 기숙사에 붙어있었는데 그래도 가끔은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더라고.

 

아, 나는 자취방 아니고 집에 왔어. 어. 금공이라서 오늘 강의 끝나자마자 집에 바로 갔지. 자취 좀 하다보니까 집 밥이 그렇게 먹고 싶더라. 조리도구 좀 사두긴 했는데 안 써. 전기밥솥은 왜 샀는지 몰라, 진짜.

맨날 시켜먹어서 분리수거 거리만 쌓여. 요리는 진짜 하나도 안 늘었어. 집에 가면 엄마한테 밑반찬이랑 김치 다 얻어오잖아. 맞아, 내 주변 자취하는 애들도 다 나랑 똑같아.

너는 기숙사 밥 먹는 거야? 맛있어? 그치? 나도 기숙사 밥 맛 없어서 맨날 애들하고 약속 잡고 밖에서 먹었어. 가만 보면 돈이 두 배로 나가.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진짜 아까워 죽겠어. 어. 우리학교는 처음에 식비까지 다 내서 안 돌려줘. 완전 양아치들이야.

 

어? 아, 나도 이사 갔어. 응응. 어릴 때 살던 곳에 안 가본지도 꽤 됐지. 맞아, 우리 진짜 자주 놀았는데. 학원도 요즘 애들처럼 뺑뺑이 도는 게 아니고 그냥 피아노나 태권도 같은 거 한 두 개 다녔잖아. 완전 추억이다.

학원 끝나거나 안 가는 날에는 약속 안 해도 놀이터 나가면 애들 있어서 같이 놀고. 맞아, 맞아. 모르는 애들도 그냥 같이 놀고 엄마가 부르면 집에 가고. 여름방학 때는 집에 들어가서 밥 먹고 다시 나왔잖아. 인라인 타고 막. 카드랑 딱지도 엄청 모았는데. 그거 지금은 다 어디 갔나 몰라.

요즘 애들은 그런 재미가 없는 것 같아서 좀 불쌍해. 그러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애들도 학원 다닌다더라.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참, 너 기억나? 우리 옛날에 놀던 놀이터는 모래 놀이터였던 거? 요즘은 다 왜, 그 이름을 모르겠는데 푹신푹신한 바닥으로 바뀌었더라. 그래, 너도 봤지? 와... 진짜 깜짝 놀랐어. 시소도 다 바닥에 안 닿는 스프링으로 바뀌고 그네 손잡이도 그 쇠사슬 모양이 아니고 무슨 호스? 같은 걸로 씌워져 있더라.

그래! 그 시소 바닥에 세게 닿으면 엉덩이 완전 아팠잖아. 누가 가운데 올라가서 막 양쪽 균형 맞추고. 맞아! 그네도 한참 타면 막 손에서 쇠 냄새 완전 많이 나고. 가끔씩 막 찝히면 겁나 아프고! 미끄럼틀도 다 은색 반짝반짝한 거라서 해 쨍쨍할 때 반바지 입고는 못 탔잖아. 너무 뜨거워서. 그치, 그치. 우리 진짜 강하게 컸다. 완전 웃겨.

모래놀이터가 진짜 재미있는 건데. 요즘은 땅도 못 파고 뭐 하면서 논대냐. 우리 때는 말이야~ 땅을 파면 돈이 나왔다고! 맞아, 그 그네 밑이나 구조물 밑이 노다지였지. 그네타면서 떨구거나 경도나 탈출하면서 떨구는 애들이 생각보다 많아가지고. 주우면 불량식품 사먹고 그랬는데. 뭐? 지금은 백 원으로 불량식품 하나도 못 사? 와... 물가 무슨 일이냐 진짜.

 

어린 애들은 모래놀이도 많이 했는데. 땅도 많이 파고. 참, 아파트나 학교, 놀이터가 공동묘지 위에 세워진다는 괴담도 많이 돌았었잖아. 나 그거 믿어서 밤에 혼자서는 그런 곳 안 돌아다녔어. 어우, 다 구라인 거 아는데 아직도 좀 무서워. 혼자 다니려면.

아, 땅 파는 거 하니까 내 전 룸메가 했던 이야기 생각난다. 응? 들어볼래? 좀 그렇긴 한데. 뭐, 어릴 때 이야기니까 괜찮겠지 뭐. 나는 듣고 좀 그랬어. 음, 이건 내 느낌이고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어. 어릴 때 룸메가 놀이터에서 겪었던 일이래. 나도 들은 지 좀 지나서 다를 수도 있어. 응응.

 

룸메네 놀이터도 모래 놀이터였대. 거기는 애들이 좀 없는 동네 였나봐. 우리랑 달리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 노는 애들이 뚝 끊겼대. 어, 애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안 다녔나봐.

근데 내 룸메는 부모님이 맞벌이를 해서 놀이터에 늦게까지 남았나봐. 같이 놀던 애들은 다 저녁 먹으러 집에 가고. 그 날도 해가 막 지는데 그 노을이 시뻘겋더래. 다홍색하고 섞인 주황색에 노란 잔상이 남으면서 옅어지는 하늘 색깔하고 막 어지럽게 뒤섞이는 모습이 꼭 무슨 일 일어날 것만 같은 색이라서 괜히 안절부절 못 했대.

양복을 입고 퇴근하는 어른이 저 멀리서 한두 명씩 지나갈 때마다 혹시 우리 엄마는 아닐까. 이번에는 우리 아빠일까. 고개를 쭉 빼고 쳐다봤대. 그치, 나도 듣는데 좀 불쌍하더라고. 그런데 그렇게 애타게 기다려도 안 왔대.

몇 번의 실망을 거듭하고 나서 조금 더 놀고 있자, 하면서 놀이터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서 모래놀이를 했나봐. 자잘하게 느껴지는 모래알을 손바닥으로 눌러보기도 하고 갈퀴처럼 만든 손으로 파보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궁금해진 거야.

 

이 밑에는 뭐가 있을까. 하고.

 

모래 놀이터니까 모래가 끝도 없이 있을까. 아니면 시멘트 바닥 위에 모래를 잔뜩 쏟아 부은 걸까. 숨겨진 보물이 있을까. 미지의 세계는 호기심을 한껏 불러일으켰고 어린 아이는 곧장 탐험가로 변신해서 모래를 파기 시작했어. 지금까지의 지루함이 어디 가고 모래를 긁어내는 손에 힘이 가득했대.

보물을 찾으면 가장 먼저 엄마아빠한테 자랑해야지. 어린아이가 모래를 파봤자 얼마나 넓게 파겠어. 처음에는 옹송그린 몸 크기 정도의 구덩이를 파내려갔지만 자꾸만 주변 모래들이 부스스 흘러내려서 꼭 개미지옥처럼...

아, 개미지옥이 뭐냐고? 음... 그 깔때기? 같은 모양이야. 모래를 파고 깔때기 끝에서 개미귀신이 개미가 구덩이 안으로 빠지길 턱을 쩍 벌리고 기다린대. 개미는 한 번 빠지면 모래가 미끄러져서 나가려고 기어 올라가도 흘러내려서 죽는다나봐. 옛날 집 주변 보도블럭에 개미 진짜 많았는데. 시커먼 게 뭉쳐서 바글바글하면... 뭐야, 이야기가 어쩌다가 개미로 흘러나온 거야? 아, 맞다. 구덩이.

그래서 구덩이가 점점 좁아지는 거야. 쏟아지는 모래를 한 손으로 막고 다른 손으로 파낸 모래를 밖으로 밀어내도 썩 효과는 없었어. 아직 해가 닿아 따뜻하던 모래가 땅 밑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서늘해졌어. 손톱 사이에 이젠 축축하게 진흙 같아진 모래가 껴도 옷이 더러워져도 이상하게 멈출 수가 없더래. 거무죽죽한 땅이 이제는 손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까지 좁혀졌어.

양 손으로 파내던 구덩이에 상체를 쑤욱 집어넣고 왼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오른손으로 흙을 덜어내는데 무슨 소리가 들렸어.

...해.

바람이 귀를 훑고 지나가면서 나는 듯한 소리였어. 이 밑에 지하세계가 있나봐! 흥미를 잃고 슬슬 느려지던 손이 다시 활기를 띄었어. 조금만 더!

흙을 한 줌 덜어내는데 손가락을 뭔가가 당기는 거야. 어? 조금 더 힘을 주니까 뭔가가 툭 빠지는 느낌이 들면서 힘이 사라졌어. 일단 흙을 밖으로 덜어냈지. 구덩이 속에는 시커먼 흙들이 가득해서 잘 보이지 않았어. 그 끝에 뭔가 구물구물한 것들이 모여 있는 거야. 힘껏 몸을 들이밀어도 잘 보이지가 않아.

손을 뻗어서 그걸 낚아챘어. 손가락 사이사이 얽혀드는 느낌이 모래하고 비슷한 듯 달라서 쭉 끌어올리는 도중에서야 눈치 챈 거야. 끝을 모르고 손에 감겨 올라오는 머리카락을.

놀라서 잔뜩 엉켜서 흙이 붙은 머리카락 밑을 내려다봤어. 그 끝에 충혈 된 건지 허옇고 붉은 눈동자 하나가 뒤룩 굴러서 똑바로 마주봐와. 바람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구덩이 안에서 들려왔어.

답답해.

불에 덴 듯 자리에서 일어났어. 벌레가 잔뜩 붙은 걸 털어내는 것처럼 손을 털어내고 급하게 주위에 쌓여있던 모래를 양 팔로 끌어와 구덩이를 메웠어.

그리고? 그게 끝이야. 밤이 되어서 가로등이 드문드문 있는 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꼴이 엉망이었어. 부모님한테 야단도 크게 맞았고. 흙투성이가 된 옷을 벗고 당장 씻으라는 말을 들었지.

울 것 같은 기분으로 들어간 욕실 욕조에 서서 씻고 물기를 닦는데 욕조 수챗구멍에 벌써 머리카락이 보이는 거야. 물이 시원하게 내려가지 않았어. 끄집어내야만 했지. 더러운 걸 만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면서 머리카락을 걸러주는 플라스틱을 집어 들었는데, 주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욱.

 

하하, 놀랐어? 미안, 미안. 룸메는 그 이야기를 끝내고 정말 미안하다고 하면서 화장실 물 빠지는 곳에 고여 있는 머리카락은 나더러 치워달라고 했어. 그래, 그거 뭐 얼마나 어렵다고. 벽이나 세면대에 붙은 머리카락은 또 괜찮은 건지 스스로 치웠거든. 가끔씩 어쩔 수 없이 모여 버리는 머리카락만 모아서 버려왔었어.

그런데 학기가 끝나기 며칠 전에 방에 들어왔더니 룸메가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있더라. 내가 들어가니까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어. 봤다고. 봐버렸다고. 나한테 그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다고 양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어. 완전 당황스러웠지. 시험기간에 이게 무슨 일이냐고.

어찌저찌 달래고 난 다음날 내가 기말고사를 치고 들어온 다음부터 룸메가 사라졌어. 도망간 걸까? 뭐든 간에 내가 기숙사 짐을 다 정리하는 날까지 보이지를 않더라.

그래서 그냥 퇴실 했냐고? 어... 음, 아니? 내가 퇴실 전날 휴학계를 냈거든? 그러고 마지막으로 양치질을 하다가 봤어. 세면대 물이 잘 안 내려가고 안쪽에서 그어억, 그어, 물에 잠겨서 목을 긁는 것 같은 소리만 나더라. 이상해서 들여다봤을 때는 머리카락이 가득 차서 세면대 위로 질금질금 비져나오기 직전이었지. 그 사이로 눈동자가 휘떡 눈알을 뒤집었어. 무슨 말이 들린 것 같기도 한데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응? 괜찮냐고? 어, 나는 괜찮아. 그럼. ...내 뒤에서 무슨 소리 들린다고? 아닌데? 나 혼자 있는데?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혹시 물소리 들려? 아니면 내가 말한 것 같은 소리? 정말? 이 소리가 들린다고?

 

뭐야, 어디 가.

왜 전화 끊으려고 해.

들었잖아.

이미 다 들어놓고 왜 도망 가?

야, 너 전화 못 끊어.

조금만 기다려 봐.

금방 갈 거야.

내가 만나러 갈게.

나 지금 좀 답답하거든.

네가 이쪽으로 오면 나는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러게, 전화를 왜 받았어? 내가 누구일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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