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산 채로 넣어야 맛있지!”


제주까지 와서도 저 고집은 변하지를 않는다. 어머님, 물 좋고 공기 좋은 섬에 왔다고 사람까지 좋아지지는 않네요. 얼굴까지 붉히며 떼를 쓰는 그 옆에서 나는 그의 아내를 바라봤다.


“아무튼, 난 못해! 그렇게 좋으면 그 식당이란 데 가서 먹으면 되잖아.”


“거 참, 집에서 해 먹으면 간단한 걸 꼭 그렇게 말해요. 살림한 세월이 얼마인데 그걸 징그러워해?”


“아니, 징그러워서가 아니라...”


우물쭈물하며 변명하듯 대꾸하는 여자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시부모가 제주로 이주한 지 이제 석 달이 되어갔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어갈수록 시부의 진상은 놀랍도록 새로워졌다. 그의 아내는 복지관에서 도시락 배달 봉사를 하고 저녁에는 야학에 가 한글을 배웠다. 시부는 그런 곳에 다녀온 아내가 붉은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돌아오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모양이었다. 은퇴 후 이전에는 본 체만체 하던 부인에게 집착했다. 도시락 봉사를 하면 무릎의 통증보다 즐거움이 얼마나 더 큰지, 한글을 배우는 기쁨이란 어떠한지 말하며 생글대는 부인의 권유는 거절하면서. 그런 그가 연고도 없는 제주 생활에 로망을 품게 된 건 반년 전이었다. 텔레비전 아침 프로에서 제주에 정착해 전원생활을 하는 중견 탤런트 부부를 본 것이 화근이었을까. 네 시애비가 제주에 정말 가고 싶은 모양이더라, 말하는 여자의 말끝에 한숨이 묻어났다. 그래도 무기력하게 집안에 있으며 화만 내던 사람이 드디어 무언가를 하자고 말한 셈이었다. 깊어가는 남편의 히스테리가 도시 생활에 지친 탓도 있으리라는 판단하에, 그는 제주행을 결심했다. 많은 것을 뒤에 두고. 언제나처럼.


“...아버님, 문어는요, 꼭 산채로 안 삶아도 맛있대요.”


“허, 참! 여편네가 남편을 무시하니까 이젠 며느리까지 그러고 드네! 집안이 거꾸로 돌아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 남편의 아버지는 지금, 맛집 프로에서 산 채로 문어를 넣어 끓여주는 라면집을 보고 나서 아내에게 식탁에 그것을 내놓으라 요구하는 중이었다. 더구나 제주는 돌문어가 맛있는 곳이었다. 이곳에 와서도 그는 여전히 종일 티비를 보았고, 자주 성질을 냈다. 어머니는 내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끙. 속으로 앓는 소리를 한 번 내뱉고는 시부가 싫어할 소리를 하고 말았다. 내가 아주 잘하는 일이었다.


“아, 아버지! 그냥 대충 식당에 가서 먹어요! 왜 그러셔, 정말.”


남편은 리모컨 버튼을 꾹, 꾹 누르며 건성으로 끼어들었다. 시부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들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머릿속에 두 글자를 썼다. 이런, 씨발. 니 아들한텐 화 안 내니?


“하여간 다들 똑같아! 시애미가 못하면 너라도 나서서 해야지. 너 집에서 그렇게 귀하게 자랐냐. 문어 손질하는 거 하나 안 배웠어?”


피가 역류했다.


“그러는 아버지는 안 배우셨어요?!”


목에 핏대를 세우는 내 등에 안절부절못하는 시모의 손길이 닿았다.


“아이, 왜 그래, 왜 그래! 며느리한테 그게 무슨 소리야.”


어머니는 내 등을 떠밀며 주방과 연결된 쪽문 밖으로 나섰다. 시부의 몸에 빨판을 만들어주고 싶은 욕구를 꾹 누르며 물었다.


“어머님, 아버님 정말 왜 저러세요?”


“늙어서 그래, 늙어서. 네가 이해해라. 미안하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내게 대신 사과했다.


“도대체 어떻게 같이 사세요?”


“그럼 별수 있니...”


친구들은 내가 시부 복은 없어도 시모 복은 있다 했다. 똑똑한 새 아가, 그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대차게 할 말을 다 해도 되바라졌다며 언성을 높이는 일 한번 없었다. 하지만 나는 종종 그가 안쓰러웠다. 시어머니에게 연민 같은 것은 갖고 싶지 않았는데. 우습게도 그가 불쌍해 남편을 참았다. 시부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게 대체 무슨 복이람. 평생 보육원에서 자랄 수도 있었는데 피도 안 섞인 우리가 거둬줬으니 너는 참 복이 많은 아이야. 설거지에 얼룩이 남았다는 이유로 흠씬 맞고 난 뒤 그런 말을 듣던 어린 날처럼,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보니 울컥, 무언가가 치밀었다. 화를 가라앉히려 숨을 고르는데, 어째 점점 더 가슴이 들썩거렸다. 그러고 있자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훌쩍, 그때 어디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뿌연 눈으로 내 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반만 뒤로 돌린 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얼굴이 다 보이지 않지만, 알 수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할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는 계속 훌쩍이더니,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고생이 참 많다...”


그 말에 이상하게 마음 어딘가가 저릿했다. 동시에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그런 채로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 시부는 보이지 않고 남편은 멍청한 표정으로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팟, 팟. 채널이 바뀔 때마다 티비는 완성되지 못한 짧은 어절들을 악, 하고 토해냈다. 또다시 화가 올라왔다. 쾅.


‘악, 씨발...!’


나는 엄지를 붙들고 속으로 흐느꼈다. 분을 이기지 못해 걷어찬 주방 벽은 단단했고 내 귀여운 발가락은 너무도 약했다.


“아아악!”


그때, 안방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고개를 번쩍 들어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봤다. 어머니 목소리였다. 미처 달려가기도 전에, 그가 방에서 뛰쳐나왔다. 어머니는, 내가 서 있는 주방으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너, 괜찮니. 그는 그렇게 말했다. 오렌지빛 좁은 좌석에 몸을 우겨 넣으며, 그날 제주의 방에서 나를 향해 달려와 그렇게 묻던 시어머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발가락을 찧었으니 얼마나 아파?”


그는 울상을 짓고 말했다. 꼭 발가락을 다친 사람처럼. 그때도, 어제도, 오늘도 나는 조금 의아했다. 어제, 내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폭언을 퍼붓는 남편새끼와 몸싸움을 하다 도망친 모텔방에서 어머님의 전화를 받았다.


-너, 괜찮니?


그는 또 그렇게 물었다. 핸드폰 하나만 꼭 쥔 채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기대자마자 걸려온 전화였다. 어머님. 세 글자가 떴다.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이라면. 내가 아는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마치 기다린 전화처럼. 그렇게 되었다.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그 목소리를 듣는데, 나도 모르게 울음이 북받쳤다.


-춥지 않아? 발도 시리잖아.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무너져 엉엉 울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초가을 얇은 원피스 한 장에 맨발로 슬리퍼를 꿰차고 나온 내 모습을 그가 보지 못했음을 깨닫지 못한 채로. 그는, 한참을 침묵하다 말했다. 너, 여기로 올래? 세상에 어느 미친 며느리가, 개 같은 남편의 폭력을 피해 나와서는 시가로 간단 말인가. 그것도 제주도에 말이다. 그런데 그 미친 며느리가 나였다. 나는 어느새 더듬더듬 포털 사이트 창을 열어 저가 항공권을 검색하고 있었다. 비수기라 표는 많았다. 예매를 마치고 무릎에 얼굴을 푹 묻은 채 나는 또 울었다. 동남아에 보내달라던, 나를 키운 부부의 성난 음성이 생각났다. 결혼 후 명절 외에는 연락을 끊다시피 한 나를 그들은 아주 괘씸히 여겼다. 은혜도 모르는 년,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친척들의 전화를 빌려 가며 내게 전화를 걸 때마다 내뱉는 말들이었다. 그러더니 자꾸 어디로 여행이 가고 싶다고 했다. 필리핀은 망고가 맛있다더라. 방금까지 저주를 퍼붓던 딸에게 치기에는 참으로 웃긴 대사였다. 누가 엿들었다면 우리를 아주 평범한 부모 자식 간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행 얘기가 나오면 말을 돌리는 내게, 거의 증오심에 가까운 감정을 표현했다. 섭섭할 수 있었으리라. 그래도, ‘부모에게 버림받아 도리를 모르는 년이니 네 남편이나 자식에게도 버림받도록 만들어 주겠다’는 저주는 꽤 서늘했다. 그러고 난 며칠 뒤 그들은 추석 때 못 간 인사 명목으로 함께 들린 나의 배우자 앞에서, 나를 입양하던 날의 이야기를 흘렸다. 실수인 듯. 남편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굳이 그럴 필요성도 못 느꼈겠지. 말없이 굳은 얼굴로 앉아있다가, 말없이 집으로 운전을 했다. 현관문이 닫히고 안방에 들어서자 싸움이 시작됐다. 곱게 자란 척, 귀한 척 다하더니 나를 속였어? 그렇게 말했다. 순간, 대응할 틈도 없이 온몸에 힘이 탁 빠졌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이 새어나가 버린 것 같았다. 그간 그렇게도 담아놓은 게 많았는지, 지난 일들을 세어가며 이제 와 따지는 남자의 입은 멈출줄을 몰랐다. 그제야 내 눈에도 불이 일었다. 그가 손바닥을 들어 나를 치려는 몸짓을 취했을 때, 나는 움찔했다. 그게 너무 분했다.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아주 조금 뒤로 밀려나더니, 그는 이내 이를 악 물고 내 머리채를 잡았다. 나는 램프를 들어 그의 어깨를 때렸다. 악. 비명을 지르는 그를 밀치고 핸드폰만 겨우 낚아채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씨발, 씨발, 씨발... 빌라 계단을 내려가 큰 길가로 나서고서야 나는, 잊었던 욕설을 읊조렸다. 그렇게 택시를 잡고, 스마트폰으로 계산을 하고, 모텔에 도착했다. 그런 후에는 갈 곳이 없었다. 보통 이럴 때, 어디로 가지? 친정? 친구네 집? 모든 문패가 흐렸다. 그때,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방금 내 머리를 잡고 흔든 남자의 모친. 나의 시어머니. 그는 조심스레 내게 말했다. 제주로 오겠냐고. 좌석이 텅텅 비었던 탓에, 비행기 삯이 저렴했던 탓에, 그리고 한껏 웅크려봐도 몸이 덜덜 떨리는 탓에 나는 지금 이렇게 제주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기체가 바다를 지나 섬으로 향하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멍하니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제주 공항에 발을 디뎠을 때, 저 멀리 양손을 모은 채 초조하게 제자리걸음을 하는 한 사람이 보였다. 흰 파마머리를 하나로 대강 묶은, 나의 시모였다.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이 나를 스쳐 간 자리에 멍청히 서 있는데, 그가 먼저 나를 발견했다.


“너, 괜찮니?”


그는 후다닥 내게로 다가와 그렇게 물었다. 주름졌지만 나이보다 꽤 어려 보이도록 동그란 그의 얼굴과 몸을 보며, 나는 보육원에 있던 곰 인형을 떠올렸다. 배를 꾹 누르면 알러뷰, 그 말을 반복하던. 우리는 조금 어색하게 나란히 걸었다. 힐끔힐끔 곁눈질로 나를 보며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갑자기 한껏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얘, 근데 있지, 니 시아버지가 글쎄 문어 산 채로 끓이는 건 이제 포기했댄다.”


“...정말요? 잘 됐네요. 어머님 고생하실 뻔했는데.”


“그치. 정말로 잘 됐어...”


“그럼 이제 문어라면은 식당에 가서 드시겠대요?”


“아이, 무슨. ...그냥 죽은 문어를 사다 썰어 넣어달래.”


“그래도 그게 낫죠. 살아서 꿈틀거리면, 그거 만지기가 얼마나 곤욕이라던데요.”


“그래, 그리고 문어도 아프지가 않잖아...”


“문어가요?”


“그래, 문어가...”


말을 하다 말고 그는 흠칫, 놀라는 기색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니, 문어는 고통을 못 느끼지 않아요?”


“못 느끼긴 누가 못 느껴! 그게 말이 돼!”


그가 느닷없이 소리를 쳤다. 아, 나는 또 배워먹지 못한 말을 내뱉고 만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의외였다. 내가 무슨 아는 척을 해도 ‘그러냐.’ 대꾸하던 생불 같은 분이 문어 얘기에 이렇게 불쾌해하다니.


“누가 그러디?! 문어는 아픈 거 그런 거 모른다고?”


“...그야... 문어는, 통각, 그러니까 통증을 느끼는 기관이 없대요.”


“잘 났다, 잘 났어. 지들이 산 채로 끓는 물에 들어가 봤대?!”


그는 순식간에 다시 흥분해 씩씩거렸다. 나는 당황해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게 얼마나 아픈데! 세상에 있는 말로 표현을 다 못해! 어릴 때 듣던 지옥, 불지옥이 그런 걸 거다, 싶더라고!”


“네...?”


“...”


멈칫, 둘의 발걸음이 동시에 멎었다.


“...아가야.”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이마와 볼에 식은땀이 반짝였다.


“...방금 내가 한 말은, 꼭 너랑 나랑 비밀이다. 알겠지?”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당부했다. 나는 나도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시어머니는 방금, 라면 속 문어의 고통에 과하게 몰입했다. 그래, 그뿐이다. 그쯤이야, 얼마든 비밀로 지킬 수 있었다. 어쩐지 무시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애써 치워두었다. 그런 채로 공항 택시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목적지로...? 그가 기사에게 부른 주소는 낯선 문장이었다. 어머니, 우리 어디로 가요? 답이 없었다.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차는 공항이 있는 시내와 시가가 있는 애월을 지나쳐, 깊고 낯선 공간으로 자꾸자꾸 들어갔다. 어느새 차창 밖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온통 캄캄해지고 나서야, 드디어 차가 멈추었다. 문을 열고 나선 내 앞에, 겨우 내 어깨만큼 오는 나지막한 돌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양끄트머리에 걸쳐진 굵은 나뭇가지가, 비스듬히 엇갈린 채 대문 대신 입구를 막고 있었다. 그 너머로 자그마한 석조가옥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오래되고 밋밋한 집이었다. 하지만 절대 바람에 날아가지 않을 듯 단단해 보였다. 그 순간,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여기를, 어디서 보았더라? 오는 길 스쳐 지나간 풍경과 달리 기억 속에 생생한 초막집 앞에서, 이상할 만치 익숙한 바람이 머리칼을 스쳤다.




가옥 안은 옛스러운 느낌이었지만, 내부 시공을 새로 했는지 외관에 비해 그리 낡지는 않은 태가 났다. 습기를 먹는 일을 피하지 못한 황토벽과, 통상 티비가 있을 자리에 놓인 나지막한 자개장을 눈으로 훑는데 여자가 말했다.


“아는 사람 사는 데야. 물질하러 다니는데, 요 며칠 잠깐 시내 있는 딸네 집에 갔댄다.”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애월에 갈 순 없잖니. 니 시애비도 있고.”


“...감사해요, 어머님.”


자개장으로 다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달리 떠오르는 답이 없었다. 은빛 학이 날아오르고 사슴이 하늘을 바라보는 까만 자개장 위, 동그란 백자가 눈에 담겼다. 시모의 얼굴 대신 그것을 바라보았다. 저 모습이 그와 퍽 닮았다고 생각하며.


“나는 이제 가야겠다.”


고개가 저절로 홱 돌아갔다.


“지금이요?”


“그래.”


“어머님, 벌써 밤이 다 되어가요.”


“그러니까 얼른 가야지.”


나는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하긴, 주인 없는 낯선 이의 집에 신세를 지게 된 주제에 자고 가시라며 시어머니를 잡는 모양새도 꽤 뻔뻔하고 이상할 터였다.


“네 시애비 밥 차려줘야지.”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 말에 이상하게 눈이 돌아갔다.


“가지 마세요, 어머님.”


“뭐?”


“가지 마세요. 저녁 시간이 벌써 지나가는데, 가는 동안 배고프시잖아요. 아버님은 아버님이 알아서 차려 드시겠죠.”


“얘는 무슨. 내가 가서 차려줘야지. 나도 가설랑 먹고.”


“여기서 드시고 가세요, 어머니.”


말을 멈추는 기능이 고장 난 것 같았다.


“저도 아직 저녁 안 먹었단 말이에요...!”


아무리 나라는 며느리에게 익숙해진 그여도, 그 말에는 기가 찬 모양이었다. 하, 입을 떡 벌리더니 팔을 뻗어 거실 너머 저편을 가리켰다.


“저 안에, 오징어도 문어도 싱싱한 거 있댄다. 쌀통엔 쌀도 있고. 집주인한테 얘기해뒀으니까 꺼내서 잘 해먹어.”


그의 손가락 끝에는 자그맣고 색이 누렇게 바랜 금성 냉장고가 놓여있었다.


“어머니, 저 해산물 다듬을 줄 몰라요! 어머니가 옆에서 봐주세요!”


남편, 아니 내가 혼인신고를 했던 개새끼는 결혼을 앞두고 말했다. 아들 하나뿐인 자기 엄마에게 딸 같은 며느리가 되어달라고. 너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나. 미친놈이 안목 하나는 좋았던 것 같다. 야, 네 말대로 나는 딸 같은 며느리가 되었나 보다. 이보다 더 딸 같을 수가 있나? 나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자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눈썹을 찌푸리더니, 이내 풋 하고 웃었다.


“...정말로, 너는... 참 다르다, 아가.”


멀뚱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손에 든 지갑을 툭, 신발장 위에 놓고는 아까 가리킨 주방으로 느릿하게 향했다. 이 층 냉동실 문이 열리고, 파란 비닐봉지가 부스럭 소리를 내며 나온다. 시모가 그 안에 손을 넣어 꺼낸 건, 자그맣고 꽁꽁 언 문어였다.


“...이것만 녹여주고 갈게. 죽은 거니 만지기 어렵지 않아.”


나는 그 옆에 다가가, 찬장을 열어도 되느냐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기에 문을 열고 스텐 볼 하나를 꺼냈다. 여자는 빙그레 웃더니, 싱크대 바닥에 볼을 놓아두고 물을 받았다. 하얗게 살얼음이 낀 한 마리 두족류가 그 안에 잠긴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냉동칸 속 오징어도, 조개도, 문어도 모두 금세 먹음직스러운 요리로 바꿔놓을 수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습게도, 시어머니를 붙잡아놓으려는 속셈이었을까.


“곧 녹을 거다.”


뽀득, 문어 머리통을 만지는 그의 옆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내가 자기 아들 머리통을 깨부수려 한 걸 알면, 죽이고 싶을 만큼 내가 밉겠지? 아니, 어쩌면 제 아들이 싫다고 도망 나온 지금도 이미 어느 정도 밉겠지. 그때, 그가 얼굴을 내게 돌리며 입을 열었다.


“시애미가 이깟 거 해준다고, 미움이 사라지겠니.”


“...네?”


“아들 잘못 키운 죄가 크다. 내가 너한테 무슨 할 말이 있겠니.”


“어머님.”


“아무리 못나도 내 서방, 내 아들이다. 어쩔 수가 없어... 그런데, 너는 다를 거야.”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너는 똑똑한 애니까, 못 배우고 나이 많은 나랑은 다르게 살겠지.”


우리는 잠시 가만히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여자의 눈은 젖어있었다. 그리고 조금 흔들렸다. 제주의 밤이어서일까. 찬 바람이 공간을 스치며 불어오는 듯했다. 도저히 마땅한 언어를 골라낼 수 없었다. 그는, 슬픈 표정을 짓더니 돌아서 현관 쪽으로 갔다. 나는 소금기둥처럼 서 있다가 주춤주춤 뒤를 따랐다. 그때, 비명과 함께 어머님이 발을 붙들고 나동그라졌다.


“아이고, 아이고!”


“어머님!”


나는 냉큼 달려가 시어머니를 붙들었다. 엄지발가락 쪽이 붉고 통통하게 부어있고, 어디서 사사삭 소리가 났다. 순간 온몸이 뻣뻣이 굳었다. 다리가 다글다글하고 몸이 긴 벌레 한 마리가, 타닥대며 장판 위를 빠르게 건너가고 있었다.


“뭐야...! 어머님, 저 놈이 물었어요?”


“아이고, 세상에 여기는 사방팔방 지네가 그냥 판을 친다!”


지네. 지네... 잠깐, 지네라고? 머리 뒤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나는 더듬대며 신발장 주변을 훑었다. 신발 주걱이 손에 잡혔다. 손가락이 벌벌 떨릴수록, 무기를 그러쥔 손목에는 힘이 들어갔다. 무서울 땐 언제나 그랬다.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뜬 채로 바닥을 내리쳤다. 퍽, 퍽. 처음엔 장판 위를 헛돌던 주걱은 가구 밑으로 기어들어 가기 직전에야 지네에게 명중했다. 두렵고 징그럽고, 또 죄책감이 들어 눈물이 맺혔으나 떨어지지는 않았다.


“악!”


그 순간 시모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숨이 끊어질 듯한 소리였다. 깜짝 놀라 주걱을 집어 던졌다. 어머님을 끌어안는데, 가쁜 숨에 등이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지네를 잡을 때보다 더 두려웠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여기서 가장 가까운 응급실은 대체 얼마나 걸릴지 가늠해보았다.


“어머님, 왜 그러세요?”


그때, 끼이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더니 큰 그림자가 머리 위로 일렁였다.


“내 이럴 줄 알았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자, 문밖에는 까만 어둠만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반딧불 두어 마리가 느리게 날아갔다. 그 외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키 큰 그림자는 계속 흔들렸다.


“말하지 않으면 쭉 이럴 거야. 여기까지 와놓고, 어째서 결단을 못 해?”


목소리는 바람처럼 웅웅댔다. 나는 허공을 멀거니 쳐다봤다. 시모는 내 품에서 머리를 쥐어 싼 채 끙끙 흐느끼다가, 나와 같은 곳으로 천천히 얼굴을 돌렸다. 입술을 가늘게 떨며, 그는 연거푸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멈추더니 한곳을 응시했다. 그러곤 한참을 머뭇대다, 혼자서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에야 그는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아가... 실은,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낯선 바람 내음이 났다.


“어릴 때는, 사람은 누구든 다 그런 줄 알았어.”


“...”


“남들은 옆에서 닭을 잡아도 제 모가지가 아프지 않고, 파리가 죽어도 몸이 터져나가는 것 같지 않고, 며느리 마음이 찢어질 때 같이 피눈물이 나지 않는 줄, 늦게서야 알았다.”


말은 잠시 쉬었다 이어졌다.


“...주애야, 나는, 내 눈에 한 번 들어온 놈이 아프면 나도 딱 그만치 똑같이 아프다.”


그는 비밀처럼 속삭였다.


“그러니 저 바다 건너에서 다쳐도, 알 수가 있데.”


머리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송순자씨와 나는 낯설고 낯익은 거실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시린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끌어안고 나의 시어머니, 순자씨를 바라봤다. 그도 나처럼 다리를 세우고 앉아 방바닥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러다 한 번씩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고, 눈이 마주치면 서둘러 시선을 내렸다. 묵직한 발가락이 꼼실거렸다. 가만히 있으려니 슬슬 발이 저려왔다.


“...어머니.”


“응?! 어, 그래, 아가.”


“배... 고프지 않으세요?”


“...”


“저는 배고픈데요.”


“...아가야.”


“네.”


“있잖니, 그... 내가 방금 한 말 말이다...”


그는 한참 뜸을 들였다.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유난스럽게도 말했지? 유별난 게 뭐 자랑이라고.”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를 응시했다. 그는 무릎을 꽉 끌어안더니 거기 뺨을 비스듬히 기댔다. 안 그래도 동그란 얼굴이 그렇게 옆으로 누우니 더 팽팽하게 당겨졌다. 문득, 그가 나만큼의 나이를 살아낼 때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어룽대는 얼굴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


“...어머니는, 그런 능력이 싫으세요? ...물론, 힘드실 건 당연하지만요.”


그가 얼굴을 번쩍 들었다.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진 채로.


“능력?”


“네. 그... 고통을 전이 받는다는, 초능력 말이에요.”


그의 입꼬리가 힘없이 내려갔다.


“어려운 말을 쓰고 그러니. 나는 그런 거 모른다.”


나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어 그를 향해 몸을 쭉 뺐다.


“어머님 같은 사람들이 가진 비범한 능력을요, 요즘 사람들은 초능력이라고 해요.”


그는 갈수록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다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어휴, 비범은 무슨. 네가 말을 잘못 알아들었나 보다.”


순간 알 수 없는 기분이 머리끝에 스쳤다. 초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어째서 그렇게 은밀하게 내게 고백하셨어요? 설마, 모르시는 건가? 그게 얼마나 큰 능력인지?


“...밥이나 먹자. 배고프다며.”


그는 어쩐지 붉어진 얼굴로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싱크대에 놓여있던 우리의 문어는 어느새 살얼음을 벗고 있었다. 나는 남의 집 냉장실 문을 덥썩 열어젖혔다. 냉장실에는 냉동실만큼 많은 해물과 채소가 있었다. 순자씨는 찬장 문을 열더니 솥을 꺼내 밑에 물을 채웠다. 문어를 찔 모양이었다. 내 손가락은 방황 끝에 우선 생선을 집어 들었다. 지글지글, 기름 튀는 소리와 문어가 익어가며 내뿜는 연기가 주방에 가득 찼다. 와씨, 예정보다 빨리 침이 고이는 냄새였다. 나는 잠시 발바닥으로 부엌 마루를 탁탁 두들겼다. 참자, 참아보자, ...참을까? 내 손은 잠시 머뭇대다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음료 칸에는 정체불명의 갈색 액체들이 담긴 유리병이 주르륵 담겨있었다.


“어머님, 여기 이 물들은 뭐예요?”


“그거? 아, 상황버섯 달인 물일걸?”


젠장, 역시 술은 없는 것이었다. 나는 물기가 맺혀 차갑고 미끄러운 병들을 손가락으로 연주하듯 훑어보았다. 주둥이가 가는 병 하나가 손에 잡혔다.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포로롱, 연갈색 찰랑대는 액체 안에 회오리처럼 거품이 일었다. 됐다, 이거야. 나는 씩 웃으며 병을 상 위에 탁 내려놓았다. 어제 베어온 듯 나무 옹이가 선명한 식탁에 문어찜과 생선구이와 연근 솥밥이 줄줄이 차려진다.


“어머님, 완전 맛있어보이죠?”


“야, 그래. 맛있겠다.”


그가 문득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런데 너... 생선 못 만지지 않니?”


머그잔 두 개를 자리에 놓던 손이 움찔했다.


“그...”


할 말을 찾느라 눈동자가 분주하게 돌아간다. 오.


“그... 어머님이 옆에서 봐주셨잖아요, 그러니까 아까 제가 부탁드린 거예요.”


차마, 오늘의 어머님은 몰라도 그간 어머님 집 남자들 먹이려고 생선 비늘 다듬기는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말할 수는 없었다.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어머님, 저... 외람되지만요.”


나는 외람된 줄 알면서 꺼내는 말이 참 많았다.


“어머님 혹시, 술 하세요?”


뱉고 보니 별 것 아닌 말인데. 나를 양육한 부부의 거실에 들어가 다리를 벌리고 앉아있다가, 장인어른 술은 좀 하세요? 턱을 들고 묻던 구 남편, 현 개새끼가 떠올랐다.


“술...?”


그는 잠시 눈을 아래로 내렸다.


“좋아하지. 니 시애비가 싫어해서 그렇지.”


애비씨는 싫어하는 게 뭐 그리 많담. 나는 조금 열이 오른 채로 어머님의 잔에 술을 콸콸콸 따랐다.


“근데, 이 집에 술이 없을 텐데...?”


"제가 방금 물을 술로 바꿨어요, 어머니."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깔깔 웃었다.


“용하다. 우리 며느리.”


“...정말인데.”


입술 사이로 말을 흘리고는 슬프게 미소지었다. 순자씨는 듣지 못한 듯했다. 유교 국가 며느리답게 고개 돌려 사과주를 한 모금 넘기고, 나는 투박하고 커다란 이름 모를 생선의 대가리와 꼬리를 양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한 입 크게 무는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젓가락으로 생선의 배를 정갈하게 가르고 있었다. 포슬, 그런 소리가 났던 것 같다. 순간 어깨가 빳빳이 굳어 슬그머니 생선을 내려놓았다. 야만인, 쟤는 엄마가 없고 가난해서 저렇게 먹는대! 단정하고 차가운 부부가 내 손을 잡고 집으로 데려가기 전 다니던 먼 옛날의 학교에서는, 급식시간이 지나면 그런 음성이 나를 자꾸 때렸다. 그 목소리는 다른 이와 식탁에 앉을 때면 자주 다시 살아나 귓가에 웅웅댔다. 탁. 그때, 웬 소리가 균열을 일으켰다. 순자씨가 젓가락을 내려놓은 것이다.


“생선은, 그렇게 먹는거구나...”


그는 얼굴이 조금 붉어진 채로 조심스럽게 생선을 양손에 집어 올렸다. 그리고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하다가, 머쓱하게 덧붙였다.


“하긴, 그렇게 잡고 뜯어야 골고루 발라먹겠지. ...이 나이 먹도록 남이 남긴 것 말고는 생선을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어서, 나는 몰랐다 얘.”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가슴을 스쳤다.


“...어머니, 저도 잘 몰라요.”


사과주 한 병을 거의 비워갈 때쯤, 벌게진 얼굴을 식탁에 괴며 내뱉었다.


“뭐어?”


나보다 더 붉어진 얼굴로 순자씨가 대꾸했다.


“잘 모른다구요, 음식 앞에서는 항상.”


말하다 보니 키들키들, 웃음이 났다.


“근데요 어머님, 생선 먹는 법은요, 누가 어디에 적어놓은 거래요?”


말을 마친 내가 마구 웃자, 순자씨도 깔깔 소리 높여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와 나의 것이 섞인다. 웃음이 가라앉을 때쯤, 나는 탁자에 뺨을 대고 엎드렸다. 왠지 모르게 물기 섞인 무언가가 속에 찰랑거렸다. 고개 돌려 앞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다가, 가만히 검지를 들어 구부렸다. 톡, 톡. 그의 머리가 까맣게 물들어간다. 마침내 순자씨의 배가 동그랗게 부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손가락을 멈췄다. 그가 아들을 가졌을 나이. 조금 전 바닥에 마주 앉아 떠올렸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순자는 주름살이 펴진 손으로 계속 술잔을 잡았다.


“글쎄, 그때 공장 일 마치고 옷 갈아입고 나서면 남자 놈들이 그렇게 쫓아왔다니까아.”


그의 얼굴에 문득 미소가 번졌다.


“공장 안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건 모르고.”


“정말요? 잘생긴 사람이었나보다.”


“그럼, 잘생겼었지. 얼마나 미남이고 사람도 괜찮았는지 몰라.”


“그분이랑... 결혼하시지.”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순자씨는 술 취한 발음으로 대꾸했다.


“그러려고 했지. 근데 우리 때 그런 게 마음대로 되니. 부모들이 점찍어준 동네 사람이랑 얼굴도 못 보고 살림 차렸지, 뭐.”


그렇게 말하며 상 위에 비스듬히 턱을 괴던 그의 부푼 배가 툭, 상에 부딪혔다. 순자씨는 아주 조금 놀란 기색으로 배를 내려다봤다. 그러다 가만히 그 위에 손을 얹더니, 나를 쳐다봤다.


“얘, 내가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뱃속이 그냥 막 꿈틀댄다.”


그러곤 속눈썹을 아래로 깔고 입술을 꾹 다물다가, 덧붙였다.


“...꼭 내 새끼 뱄을 때 같네.”


나는 물끄러미 시모의 얼굴을 바라보다, 상 너머로 팔을 뻗었다.


“어머님.”


“응?”


그의 손에 깍지를 끼고 들어 올려 보였다.


“짠.”


그는 가늘게 뜬 눈을 끔뻑였다.


“어머님 손이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는 눈을 거듭 깜빡이다가, 자신의 배를 한 번 더 내려 보다가, 상 구석에 놓인 핸드폰을 더듬더듬 집었다. 그가 액정에 얼굴을 비추어 본다.


“...너.”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네가 가진 천능력인가 그런거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초능력을 천능력이라고 얘기하신 것쯤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 멍해진 채 눈을 한 바퀴 굴려보았다. 시모를 대상으로 능력을 쓰고, 그것을 언질까지 해놓고 나는 왜 놀랐을까. 취기로 한바탕 웃고 넘어가 해프닝처럼 잊기를 바랐다는 것은 핑계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어머님.”


“그래.”


“어머님은...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걸, 저한테 아까 왜 말해주셨어요?”


그의 눈이 흔들리더니 내 시선을 피한다.


“...너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았다.”


한참 만에 답이 돌아왔다.


“어째서요...?”


“너도 나 같은 사람인 걸 알았으니까.”


마음 어딘가 작게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아가야, 나는... 나한테 요상한 병이 있는 게 참말 부끄러웠다. 자식을 낳고 키워서 장가보낼 때까지, 나 같은 사람은 한 명도 본 일이 없어. 그런데...”


그가 내 손을 만지작, 움켜쥐었다.


“네가 우리 집에 인사 오던 날, 느껴버렸어. 뭔지 몰라도, 그 요상한 기운을 누르겠다고 애쓰느라 네 맘이 벌벌 떨리는걸. 자세한 건 나랑 달라도, 너도 무언가를 그러고 있구나, 알아차렸다.”


순간 그의 얼굴에 울 듯 말 듯, 이상한 표정이 스쳤다.


“...아가야.”


“네, 어머님.”


“너도, 나한테 말해줄래. 너를... 힘들게 한, 병인지 힘인지 말이다.”


나는 순자씨와 맞잡던 손을 슬그머니 빼, 그 손에 턱을 괴고 몸을 웅크렸다. 능력을 숨기지 못해서, 또 숨길 수밖에 없어서, 그리고 영화 속에선 초능력이라 불리는 이 특질이 내 세상에선 무엇도 구하지 못해서 소리죽여 울던 날들이 빠르게 스쳐갔다. 고민 끝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 손을 천천히 뻗어, 아까부터 쭉 눈에 밟히던 저 거실 장 위 백자를 향했다. 간절히 주먹을 쥐었다 폈을 때, 하얗고 동그란 백자는 입구가 길쭉한 청자로 변해있었다. 시모는 이번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나를 가만히 보더니 물었다.


“너, 행색을 바꿀 줄 아는 거니?”


“어머님, 저는요...”


평생 나를 따라다닌 특징이지만 막상 누군가에게 말로 풀어 설명한 적이 없는지라,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시간이 걸렸다.


“저는, 물질의 속성을 바꿀 수가 있어요...”


아, 너무나 부적절한 축약이었다. 뱉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급히 설명을 다시 풀어냈다.


“제 눈앞에 있는 물건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같이 있는 동안만큼은 바라는 대로 바꾸어놓을 수가 있어요. 색깔도 그렇구요, 종류도, 만질 때 느낌도, 나이까지도요...”


순자는 눈을 감지 않고 나를 쳐다봤다.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리고 이내 슬픈 눈으로 입을 열었다.


“주애야. ...그럼, 너는 지금 나를 어떻게 바꾸어놓은 거니.”


“지금보다 젊으실 때... 아니, 아이를 가지셨을 때로요.”


“...왜?”


나는 고개를 숙였다. 바로 답할 수 없었다.


“주애야.”


그는 다시 말했다.


“그렇담 지금 내 속에, 네 남편이 있는 거니, 내 딸이 있는 거니?”


고개가 번쩍 들렸다. 딸이라니?


“어머님, 그게 무슨...”


“말해줘라. 지금 내 뱃속에서 움직이는 게, 큰 아이인지 말이다.”


시선이 마구 흔들렸다. 나는 다만 염원하는 대로 어떤 속성을 바꿔놓을 뿐이지, 아주 정확한 무언가를 가늠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보다, 외동으로 자랐다는 남편에게 여자 형제가 있었단 말인가. 내 표정을 읽은 그의 입술이 머뭇거리다 떨어졌다.


“결혼하고 첫 아이가 들어섰는데, 세상이 어찌나 빠른지, 벌써 병원에 가면 아들인지 아닌지 말해주던 때였다. 분홍색 옷을 사두세요, 의사가 그러데. 그날 돌아와서 니 시애비, 방문을 꾹 닫고 말없이 한참을 앉아있더니 그러더라. 수술을 하러 가자고.”


아까보다 큰 쿵 소리가 마음을 흔들었다.


“딸 가진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니. 가기 싫어서 속으로 울면서도 이끌려서 소파 수술을 한다는 병원에 갔다. 병원 한 번을 같이 안 가주던 양반이 그날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같이 가더만, 꼭 그걸 기다린 양 의사가 옷 색깔을 얘기하고 그 뒤론 모든 게 순식간에 이루어지데.”


여자의 목소리에 물기가 차올랐다.


“나는, 나는 여태 너무 궁금해. 그 애가 태어났으면, 어떤 눈을 하고서 내 얼굴을 쳐다봤을지, 정말로 분홍 빛깔을 좋아했을지.”


그가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주애야, 지금 내 딸 한 번만 보게 해다오. 그렇게 해줄 수 있지?”


“어머님...”


“이때 말고, 그 애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로 바꿔줘. 너, 그거 할 수 있다며.”


간절한 목소리였다.


“어머님... 그런 거는, 못해요.”


툭, 내 손을 꽉 쥐었던 손에 힘이 풀렸다. 그는 실망한 눈을 글썽였다. 태어나지 못한 이를, 태어나게 할 능력 같은 건 내게 없었다. 눈앞의 어른마다 엄마로 바꾸어보려 했지만 실패했던 어린 날처럼. 한번 사라진 것은 그냥, 그렇게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시모가 내 아픔을 읽었다고 부은 발가락을 가라앉혀 주거나 친모처럼 나를 자기 집에 품어줄 수 없던 것처럼, 나도 신은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왜 그런 비밀까지 털어놓아 괜히 나를 또 죄인처럼 느껴지게 만드시는 거지. 무겁게 울고 싶어진 마음으로 내팽개치듯 손을 뻗었다. 그냥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모든 걸 돌려놓고 싶었다. 핑, 눈앞 순자씨의 얼굴에 주름이 서서히 다시 새겨지고 동그랗게 부풀었던 배는 세월이 남긴 양감으로 돌아갔다. 내가 또 괜한 짓을 했구나. 속으로 읊조리며 잠시간 청자의 모습을 했던 백자를 향해 손가락을 옮겼다. 봉긋하게 올라왔던 긴 주둥이가 스르르 가라앉고 푸른 물은 녹아내리듯 흰색 안에 몸을 감춘다. 그때.


“그릇을 키웠기에 거기 맞춰 몸뚱이 좀 폈더니, 그새 돌려놓는구나.”


아까 들은 목소리였다. 의자에서 튀어 오를 뻔한 엉덩이를 애써 누르고 소리의 근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백자 안은 둥글기는 해도 깊이가 너무 얕았어. 자네가 오면, 이리 변할 줄이야 알았지만 커진 내 몸 숨길 새도 없이 금세 돌려놓을 줄은 몰랐네.”


소리는, 거실을 지나 우리가 앉은 부엌까지 온 집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거실과, 자개장과, 그 위의 단지를 쳐다보다가 시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문득 따뜻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그리고 노랗게 반짝이는 반딧불 몇이 바람을 따라 식탁 위를 날았다.


“어머님, 이거... 뭐예요?”


재차 물었다.


“여기, 대체 어떤 분 집이에요? ...저, 여기 와 본 적이 있는 것 같단 말이에요.”


그때, 낯설고 낯익은 아까 그 목소리가 귀 옆에서 말했다.


“너를 보았고, 놓아버렸고, 오래도록 기다린 집이지.”


나는 굵고 힘찬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어떤 형상의 입을 통해 나오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직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어쩐지 먼 옛날처럼 그리운 그 소리는, 다만 여성의 것이었다. 본 적 없는 엄마 같은 이 음성을 어디서 들었던가. 손을 뻗어 반딧불에 대었을 때 그것은 날아가지 않고 내 손바닥을 밝게 물들였다. 어디서 훈풍이 불었다. 손바닥을 바라볼 때마다, 낡은 기억들이 서서히 빛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억났다. 이곳이 어디인지.




엄마, 우리 어디로 가는 거지. 작은 배 안 선실에서 나는 흐린 얼굴을 향해 물었다. 엄마는 답이 없었다. 통, 통, 통. 모터 돌아가는 소리와 출렁이던 배의 기억. 그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 엄마를 보고 싶어서, 볼 수 없다면 누구라도 엄마라고 부르고 싶어서 자라며 만나는 어른마다 조금만 다정하면 엄마로 바꾸려 손을 뻗었다. 보육원에서 우리 방을 돌봐주던 이모, 유치원 선생님, 초등학교 선생님, 동네 아주머니. 내가 간절하게 손을 뻗었다 오므리면, 그들은 이내 컥, 소리와 함께 발버둥을 쳤다. 건조하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물을 끼얹은 듯 푹 젖은 채 뚝뚝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하얗게 질려가며 고통스러워하는 그들을 보고 당황하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소망을 멈추는 것.


“엄마랑... 여기 살았던 기억이 있어요.”


나는 그 말을 하며 손바닥을 들여다봐야 할지, 시모를 봐야 할지 헷갈렸다.


“엄청 어릴 때, 보육원 가기도 전에, 아빠가 술 먹고 집안을 부수면 엄마랑 여기로 왔어요...”


자개장 앞 작은 이불을 나눠 덮은 엄마가 토닥토닥, 내 가슴을 두드리던 손길이 떠올랐다. 도망쳐 이 집에 머물던 어느 밤, 단지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을 때 하늘엔 반딧불이 가득하고 큰 그림자가 허리 굽혀 내게 말해주었다. 너는, 모든 것을 바꾸는 사람이 될 거야. 이 집을 거쳐 간 여자들도 온통 바꾸어놓을 거야. 그러더니 그림자가 떠오르기에 어린 손을 조심스레 뻗자, 까맣던 밤하늘에 한 줄기 빛나는 은하수가 흘렀다. 돌아와 잠든 엄마의 뺨에 손을 조물대보았다. 다음날, 엄마는 안방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내게 옷을 단단히 입히고 선착장으로 갔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알려주지 않았다. 눈앞의 이에게 어떤 마음을 심어놓아도, 어떤 얼굴을 하게 만들어놓아도 바람은 여전히 차갑다는 걸. 아빠를 벗어났어도 엄마는 내 곁에 머물지 않는다는 걸. 답이 없는 허공을 향해 물었다.


“우리는 왜 뭍으로 가야 했나요? 그리고 엄마는 왜 어느 날 사라졌지요?”


간절히 물어도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그때, 침묵을 깨고 시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정말 이 집에 있던 기억이 있니...?”


나는 젖은 눈으로 순자씨를 바라봤다.


“여기 집 주인이 들려준 얘기가 있어. ...물질 다니면서 친하게 지낸 옆 동네 애 엄마가 있었는데, 일찍 몸이 상해서 일을 못 나가고 쉬게 되니 집에서 놀던 남편이 그렇게 때리고 집을 뒤집어엎었대. 허구한 날 그걸 당하고 있다가, 어느 날은 무슨 용기를 냈는지 딸을 데리고 뭍으로 가겠다 하기에 뱃삯으로 자기한텐 큰돈을 내어줬다네. 그러기 전까지... 남편이 난리치는 밤이면 딸이랑 도망와 숨어있으라고, 이 집 거실을 내어줬었대.”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잠시 그를 쳐다봤다. 어렴풋하던 기억에 선명히 색이 칠해져 갔다.


“...뭍에 가서는요? 바로 서울로 갔대요? 갔다가 여기로 다시 왔대요? 애는... 어쩌고요?”


질문이 마구 쏟아졌다.


“뺏겼대요, 잃어버렸대요, 버렸대요...?”


여자는 말이 없었다.


“데리고 떠나놓고서, 나를 두고 왜 돌아오지 않았대요?! 그 엄마라는 이름 겨우 얻고 또 잃어버릴까 봐, 아무리 때리고 미워해도 어른이 되어서까지 떠나질 못했는데, 또 엄마 없는 애가 될까 봐!”


울음이 북받쳤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들썩이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망했다. 너, 지금 네가 보육원 출신인 것도 모르는 시모 앞에서 과거사를 줄줄이 읊고 있어.


“어머님, 저 사실 고아예요. 상견례 때 인사하신 분들, 제 양부모세요. 일곱 살 때 입양됐는데, 저는 실은 쭉 고아였어요. ...그걸 상우씨가 알고 싸우다가 집 나온 거예요.”


이왕 망한 김에 온갖 소리를 털어놓았다. 사람 몸에 문어 빨판을 박아넣을 수도 있는 괴상한 능력보다도 더, 더 숨기고 싶어 온몸이 터지도록 애썼던 비밀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 앞에서도 터놓지 못한 그 비밀을 나는 지금 시모 앞에서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말하고 있다. 복잡한 마음 때문일까, 울음 때문일까,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때 무언가 내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쿵쿵, 심장 소리가 났다. 시모였다. 조금 당황스러운 그림이었지만, 나는 거기 머리를 묻고 계속 흐느꼈다. 그러다 문득 깨질듯한 두통이 사라짐을 느꼈다. 서서히도 아닌 단숨에 통증이 제거된 고개를 들어, 시모를 올려다봤다.


“주애야.”


“...네.”


“어릴 때 사돈어른들이, 너를 때렸니?”


“.......네.”


“심하게?”


“네.”


“아팠겠구나.”


여자와 나는 잠시 서로를 마주 봤다.


“상우도... 너를... 때렸니...?”


힘겹게 토막 나 말해진 그 물음이 내 폐부를 찔렀다.


“...아니요.”


엉엉 울다, 고백하듯 변명하듯 덧붙였다.


“제가 때렸어요. 때리려고 손을 들더니 머리채를 잡고 흔들길래, 밀치고 어깨도 한 대 쳤어요...”


맞을까 겁내던 어린 날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시모에게서 물러났다. 나는 떨고 있었다. 씨발. 그게 너무 화가 났다.


“...잘했다.”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여자 때리는 버릇은 한 번 들면 못 고쳐. 상우 애비도 애 다 키울 때까지 그러더니 늙어서 기운 빠지고서야 안 그런다.”


“어머님, 아버님하고 헤어지실 생각은... 정말 안 해보셨어요?”


“젊을 때야 그런 건 생각도 못 했지. 어느 집 남자든지 여자를 패든, 노름에 빠지든, 술을 퍼마시든... 하나씩은 꼭 문제가 있으니 다 그러려니 하고 지낸 거지, 뭐. 다 늙고서야... 이 나이에 남편 없이 어찌 살까, 겁이 나면서도 갈라서고 싶은 마음이 한 번씩 불쑥불쑥 드는데 그래도 내 남편이지, 그래도 내 아들 애비지, 생각하면서 참는다.”


그는 옆 눈길로 나를 보았다.


“너는... 상우랑 갈라설 작정이니?”


“...”


우리는 잠시 말없이 나란히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어디서 또 사사삭, 소리가 났다. 나는 의자를 끌며 벌떡 일어섰다. 팔뚝만 한 지네가 현관에서 이쪽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대뜸 죽이려 다시 주걱을 찾는데, 시모가 내 팔뚝을 꼭 잡았다. 아까 머리를 쥐어 싸고 쓰러지던 그가 떠올라 나도 멈칫했다. 꿈틀대는 지네를 물끄러미 내려 보다, 오른손을 뻗었다.


“얘!”


여자가 탄성을 뱉는다. 내가 손을 쥐었다 폈을 때, 지네는 보이지 않고 형광등 아래서도 노란빛을 내는 반딧불이 포로로 날아올랐다.


“저놈 봐라. 제주 와서 본 반딧불 중에 제일 예쁘다, 주애야.”


“나중에 다시 자기로 돌아갈 거예요.”


“뭐가 됐든, 죽이지 않았으니 좋은 거 아니니.”


잠시 생각해보았다. 어차피 언젠가 크게 아프고 언젠가 사라질 생명을 내 손으로 죽이지 않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든 산 것은 다른 산 것을 잡아먹고 어떤 식으로든 해치며 사는데, 나는 왜 또 그 순간을 피하고 싶은지. 그 순간 아까 찾아왔던 따뜻한 바람이 뺨을 거듭 스쳤다. 방금 지네를 향해 뻗었던 오른손을 들여보았다. 노랗게 빛나는 손바닥 안에, 옛 기억이 둥실 떠오른다.


-주애야, 살아만 있어라. 살아만 있으면, 엄마가 물질 열심히 해서 꼭 찾으러 올게. 아파도 물에 나갈 수 있을 만큼만 되면, 금방 찾으러 올게. 적어도 그때까지는, 아무 일도 당하지 마라...


바람처럼 먹먹히 귀를 때리는 먼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여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어머님.”


“그래, 주애야.”


“아까 해주신 저녁... 진짜 맛있었어요.”


“같이 만든 걸...”


“어머님이 다 가르쳐 주셨잖아요. ...어머님. 여태 공장 일이랑 식당 일하시면서 버신 돈, 그건 다 어머님 거예요. 몽땅 아버님 거 아니고요.”


“너, 무슨 얘길 하는거니...?”


“아버님이랑 같이 살지 않으셔도, 원하는 대로 쓰실 몫 있다고요.”


나는 냉장고로 걸어가 그 앞 콘테나에 수북이 쌓인 귤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귤을 쥔 손을 오므렸다가 펴자 길쭉하고 샛노란 망고가 모습을 드러냈고, 다시 반복하자 컵 안에 노란 주스가 가득 찼다. 향긋한 망고 향이 났다. 여자에게 컵을 건넸다.


“어머님, 제가 식당을 열든, 어머님이 여시든, 요리법은 어머님이 좀 가르쳐주세요. 저, 그래도 이런 거는 만들 줄 알거든요.”


망고 주스 한 잔을 다 비운 여자가 나를 빤히 보다가, 동그랗게 웃었다.


“이런 거는 난생처음 먹는다, 얘. 요즘 애들은 별 걸 다 만드는구나.”


취기가 조금은 가시고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순자는, 설거지통 근처에 꽂아두었던 식칼을 다시 들더니 내 손에 쥐여줬다.


“생선 요리할 때 푸성귀들을 먹기 좋게 썰려면...”


칼질하는 법을 알려주는 순자씨를 따라 손목을 움직이는데, 그가 문득 부엌 창 너머 까만 하늘을 한참 바라보았다.


“어머님, 왜 그러세요?”


“...어디서 문어 우는 소리가 나서.”


문어도 우리처럼 우나요,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고요한 제주의 이 밤은 그에겐 고요하지 않을까. 뭍에서는 보지 못한 것들까지 눈에 담아 버려서.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어머님, 그런데요... 아까 어머님이 안아 주시니까, 아프던 머리가 안 아파졌어요.”


순자씨는 조용히 웃더니 답했다.


“아픈 거를 느끼는 거는 저절로 돼도, 그걸 나한테 가져오는 거는 애써야 되더만...”


톡, 톡. 도마에 칼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히 울려 퍼진다. 따스한 공기 위론 노란 반딧불들이 날아다녔다. 이 집에 산다는 해녀는, 내일이면 돌아올 테지. 묻고 싶은 이야기들을 가만히 골라두며 미나리를 집어 들었다. 이젠 고맙다고 웃어주는 사람을 위해서만 요리할 테다. 여자도 그럴 것이었다. 등 뒤로 그림자가 일렁이고, 멀리서 낯익은 웃음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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