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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눈물손(하)

2012.04.24 12:0204.24

#. 어미들


버들잎보다 가느다란 몸으로 마차에 깔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수백 근이 넘는 마차를 번쩍 들어올린 어미의 이야기라든가, 달리는 말 앞에 선 아이를 보고 아비가 당황하여 허둥댈 때, 어미는 이미 아이 대신 몸을 날린다는 둥의 얘기는 그저 모정을 찬사하는 세인들의 입놀림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딸을 잃었다. 실제로 목을 매거나 손목을 칼로 그은 모녀도 수두룩했다. 그러나 대부분 죽지 못해 겨우 잇는 삶이었다. 하루하루 말라죽어가는 딸들을 두게 된 우리들의 가슴도 살점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듯 고통스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역시 눈물손을 잡아다 사지를 뽑아내고 살덩이로 젓을 담가 씹어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천하의 병조판서조차 어쩌지 못했던 망종이었다. 병조판서 이경윤이 어진내 포구에서 총만 뽑은 병신 꼴로 그를 배웅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모를 수가 없는 비밀이었다. 일개 여인의 몸으로 덤벼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끼리 소중하고 애틋하게 만났다. 그 때마다 서로의 손등을 한숨으로 쓸어주며 서로의 우울함과 비겁함과 무력함을 달랬다.


남편들은 보통 무심했다. 괜시리 바깥양반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북방 지역의 사투리로는 아예 나그네라는 호칭이 일반적이라고 했다. 남편들은 무거운 집안 분위기를 견뎌내지 못해 밖으로만 돌았다. 걸어잠근 방문 안의 딸이 굶는지 죽는지 아예 관심조차 끊고 사는 분위기였다. 남편들 역시 끼리끼리 모여 바둑판 앞에서 수담(手談)을 나누거나 혹은 일간지를 돌려보며 때아닌 정치 걱정으로 한담(閑談)을 나누었다. 그러니 남편, 남의 편인 남편이었다.


한 어미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일간지에 실린 기사를 가져왔다. 어느 여기자가 쓴 눈물손에 관한 취재 기사였다. 그 기사 덕에 색목인들이 일컫는 <스타>가 되어 현대 신여성으로 주목받고 있는 황은려라는 여자였다. 변태스러운 성교를 낭만적인 사랑처럼 치장한 기사도 눈꼴셨지만 그 기사를 읽고 눈물손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정신나간 젊은 여자들의 벗글(Fan-letter)이 우리를 더 망연하게 만들었다. 그날 우리는 일간지를 구겨 찢으며 가슴으로 피눈물을 쏟았다. 여러 번 항의서한을 보냈지만 일간지에서의 회신은 오지 않았다. 그러니 아낙네, 안으로만 인생을 삭여내어 아낙네였다.


우리들 중 가장 공부를 오래하고 똑똑한 이는 안골(內洞)댁이라는 택호보다 이름으로 불리우길 원하는 미진 씨였다. 그녀는 우리들 중에서 한학(漢學)을 깊이 배운 몇 안되는 여자였다. 그녀 역시 혼인하여 딸을 낳은 이후에는 안골댁보다 미진 씨로, 미진 씨보다 윤희 어미로 불리우길 더 좋아하던 평범한 여인이었다. 눈물손에게 정절을 빼앗긴 딸의 죽음 앞에서 그녀의 눈은 광기로 사무쳐 우리조차 마주하기 꺼릴 정도였다. 그녀는 가장 먼저 일간지를 찢어 불태웠고, 가장 많이 분노했다. 그리고 더이상 우리와 만나지 않고 두문불출하여 무언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저 그녀가 앞서간 딸의 뒤를 따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더 이상 가까운 이를 잃게 된다면 우리는 한명씩 한명씩 모래알처럼 허물어지고 바스라져 버릴 터였다. 여인이 나거나 죽어도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던 세상이었다.


미진 씨가 우리를 불러모은 건 달포만의 일이었다. 잠도 밥도 잊은 그녀의 얼굴은 파리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물이라도 한 잔 마시라는 우리들의 권유를 그녀는 뿌리쳤다. 그보다 급한 일이 있다며 그녀는 얼마씩의 각출을 원했다.


“저 혼자 부담할 수도 있지만 우리 모두가 원하는 복수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예요.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지금 나가셔도 좋아요.”

나갈 이유가 없었다. 대신 우리는 앉은걸음으로 그녀와 거리를 좁혔다. 그녀와 우리 사이의 공기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우리는 눈빛으로 뜻을 전달할 줄 아는 여인들이었다. 우리들의 시선을 받아낸 미진 씨는 우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눈물손을 처리할 암살자를 구했어요. 같은 여자라서 그런지 의외로 선선히 의뢰를 들어주더군요. 대신 시간은 조금 오래 걸릴 거예요.”


우리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한 대륙과 반도와 호쿠사이의 뛰어난 인재들이 벌떼처럼 덤벼도 막지 못한 눈물손이었다. 가장 큰 아픔을 받았으면서도 그가 가진 재주를 칭찬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무력함에 또다시 슬픔이 밀려왔다. 인간같지 않은 심성과 재주를 지닌 눈물손을 하물며 여자가 당해낼 리 없다는 의혹도 고개를 쳐들었다. 미진 씨는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믿고 기다려 주세요. 아는 입이 적을수록 일이 잘 처리될테니 미리 말씀드리지 못하는 점을 양해하셔요. 그가 죽는다면 신문에 부고가 대문짝만하게 날테니 그것으로 증거가 되겠지요.”


미진 씨가 초청한 암살자는 호쿠사이에서 온 여자였다. 얼굴을 가리고 우리와 같은 옷을 입었지만 몸에서 느껴지는 기색과 향취가 달랐다. 허리를 짱짱하게 졸라 걸음걸이가 좁아지는 호쿠사이 여자 특유의 몸놀림에는 늘 허리와 엉덩이 부근에 색기가 고여 있었다. 그 때문에 허벅지 근육이 단련되어 호쿠사이 여자들은 하나같이 명기(名器)라는 망측한 소문도 있었다. 그녀들의 전통 복색인 기모노 뒤에 달린 길쭉한 옷꾸밈도 음란하게만 보였다. 그녀는 선입견을 막으려는 길고 어두운 색깔의 발을 드리워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했다. 오로지 미진 씨와 필담으로만 소통함으로써 목소리조차 드러내지 않는 치밀함을 보였다.


미진 씨는 놀랍게도 우리에게 한 명씩 우리의 이야기를 해주기를 청했다. 우리들 중 누구도 모르지 않는 일이었다. 우리가 아닌 사람들도 그 광경을 목도했고 뻔히 아는 일이었다. 굳이 입을 열어 그 이야기를 하게 하는 의도를 알 수 없어 우리는 한덩이로 뭉쳐 화를 냈다. 미진 씨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의중을 되묻는 종이 위의 글자가 어지럽고 난폭했다. 그러나 암살자는 한 술 더 떴다.


“그 이유를 알게 되면 몸의 열기와 독기가 줄어들어 암살이 실패할 수도 있다네요. 그리고 따님들이 살아 계시는 분은 따님들도 이 자리에 모셔와주었으면 한답니다.”


말을 전하는 미진 씨부터가 표정이 흙빛이었다. 우리는 침묵으로 소란스러웠다. 가슴 아래로 오장육부가 들끓어 썩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입 밖으로 모든 것을 다 게워내어 암살자의 면상에 던져버리고픈 기분이었다.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딸까지 데려와 암살자에게 자초지종을 말해야 하는 나날은 끔찍할 정도로 길고 길었다. 세월이 간다고 잊혀질 일도 아니지만 새삼 되짚어서 익숙해질 일도 아니었다.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으면서도, 가장 되돌리고 싶은 순간을 다시 입에 올리고 귀로 들어야 하는 우리 모녀들은 여자로서 한덩이가 되어 부둥켜 울었다. 미진 씨가 솔선수범하여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터였다. 암살자는 그때서야 조심스럽게 발을 걷고 나와 우리들의 눈물을 받아 조그마한 자기병에 소중하게 담았다. 도대체 우리 눈물로 무엇을 할 속셈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중 몇은 돈을 돌려달라고까지 할 기세였다.


“심중팔독(心中八毒) 중에서 제일 독하기로 이름난 한독(恨毒), 그 중에서도 상중상품(上中上品)인 여한독(女恨毒)을 채취했습니다. 제아무리 내공이 뛰어난 고수라 할지라도 이 독을 당해내진 못할 것입니다.”


호쿠사이 암살자는 미진 씨의 붓을 빌어 무례를 정중히 사죄하며 마침내 자랑스러운 어조로 그 연유를 밝혔다. 우리는 다소 아연했다. 여인의 눈물이 천하제일의 독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대륙의 당가문(唐家門), 반도 공화국의 암의(暗醫) 유씨 일족과 더불어 제 나라를 대표하는 독 전문가라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빈틈없고 철저한지 그녀는 자랑스러운 어조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정체는 밝히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우리들은 아주 작은 기쁨이 생겼다. 씹어먹을 망종이 다른 것도 아닌 우리가 만든 독에 당해 죽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기쁘고 통쾌했다. 하물며 여색을 그토록 밝히는 눈물손이 미인계에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입에 거품을 물고 푸르딩딩한 안색으로 사지를 내뻗은 채 개구리처럼 죽어넘어진 그를 상상만 해도 우리들은 끔찍하게 즐거웠다. 남편들은 여편네들마저 정신이 나가 미친년들처럼 웃는다며 투덜거렸다. 그러니 역시 남편이었다.


그때쯤 우리는 희망 고문이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 알 것 같았다.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변해가는 과도기가 막바지에 이르고, 공화국이라는 이름이 익숙해진 뒤에도 나라 살림은 그다지 변한게 없었다. 딸들은 여전히 지쳐 있었고, 남편들은 집안 분위기를 핑계삼아 바람을 피우고 이혼하며 새 삶을 찾았다. 금전도 권력도 없는 젊은이들이 어떻게든 이 땅에서 서로가 서로를 짓밟으며 살아가는 것과 달리, 우리는 우리를 서로 거들어주고 받쳐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신문의 부고란만이 우리의 관심사였다.


미진 씨는 신문의 부고란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돌연사했다. 얄궂게도 호쿠사이에서 씨를 받아다 파종한 벚꽃잎이 바람에 흩날려 그녀의 시신을 덮었다. 그녀가 말아쥔 신문에는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던 소식이 아닌게 아니라 정말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호쿠사이 암살자가 떠난지 근 두 해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일상이 달라지진 않았다.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온 것도 아니었고,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거나 편해지지도 않았다. 그저 희한한 일이었다.



#. 마지막으로, 쇄, 그리고 암살자 무명(無名)


그녀는 몹시 당돌했다.


심심하고 무료한 나날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당돌함이 더 신선하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다이묘(大名)이라는 이름은 크되 비어 있었다. 쓸데없이 허울만 컸지 무게가 없어 사람의 삶을 사는 듯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고 벼슬만 바뀌었을 뿐인데 아침 뒷간에 걸린 비단으로 뒤처리까지 자처하는 시종이 생길 거라곤 예상도 하지 못했다. 하물며 삼시세끼를 내 손으로 떠먹지 않는 일 또한 낯설었다. 내가 사지를 온전히 쓰는 일이라곤 하루 두어 시간 도장에 나가 정좌한 사무라이들을 지도하는 때뿐이었다. 그조차도 별로 힘쓸 일이 없어 사지보다는 말이 앞섰다. 가볍고 지루하여 무렴하였다.


그들이 데려오는 여자는 하나같이 내 성에 차지 않았다. 상황을 수용하는 여자들뿐이라 싱겁고 밋밋했다. 몸을 옹송그려 엉덩이를 하늘 위로 내밀고 고개를 수그려 납죽 절을 하는 손끝이 하염없이 길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으니 마음을 통하기도 어려웠는데 몸부터 먼저 통하는 상황이 우스웠다. 나는 힘을 쓸 필요가 없었다. 내가 전력을 다하기도 전에 상대는 옷끈을 풀었다. 스승은 이렇지 않았다. 스승의 몸과 마음은 언제나 내 헤아림 바깥에서 아슬아슬하게 나를 유혹했었다. 그 하룻밤은 이제 영원히 미완으로 남을 모양이었다.


사무라이들은 열심히 기술을 배웠으나 늘 모자랐다. 상대의 몸을 갖겠다는 열망도 의지도 없었다. 기술이 손에만 익어 될 일이 아니었다. 상대의 철벽 같은 마음을 뚫고 거친 기세를 끊을 수 있는 감각을 익혀야 했는데, 절간처럼 조용한 도장 내에서 연극하듯 손발을 주고 받는 행위는 춤과 다르지 않았다. 몹시 피곤하고 답답했다. 새삼 나를 가르치던 스승이 대단한 아량을 지녔구나 싶어 몹시 그리웠다.


점점 나는 도장조차 나가지 않게 되었다. 영주들과 무사들은 눈치를 보며 시도 때도 없이 문안 인사를 올렸지만 나는 코빼기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고작해야 낭인 주제에 거만하기 이를 데 없다며 기세좋게 쳐들어온 사무라이들도 몇 있었으나 그 때뿐이었다. 나는 일어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누운 채로 발을 걸고 쓰러뜨려 목을 졸랐다. 오락은 오락일뿐이었다. 나는 호쿠사이를 떠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바다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털고 일어났을 자리였다.


호쿠사이의 벚꽃은 아름다웠다. 그들의 노래 가사처럼 사쿠라 꽃잎이 봄눈처럼 바람 소리를 내며 앞마당에 쏴아하고 떨어질 때 나는 지루함을 잊고 잠시 황홀했다. 그 때의 벚꽃은 스승의 뒷모습을 감춰주던 안개를 생각나게 했다. 나는 그 때 종이와 먹을 달래서 마음대로 낙서를 하는 중이었다.


지루하다. 지루하다. 지루우우우하다. 지 루 하 다.



다.

        루
                  하
                        다.
                                지
                             루
                      하
            다.
지 루 지 루 조 루 지 루 씨 발 개 발 새 발



내 맘대로 긁적거려도 지루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지루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지루함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붓을 내던지고 창문을 타넘어 밖으로 나갔다. 벚꽃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바람이 나무의 몸을 안고 흔들 때마다 벚꽃은 눈물처럼 떨어져내렸다. 대저 호쿠사이의 무사란 것들이 저 바람만도 못한 녀석들이었다. 끊임없이 나무를 휘어잡고 못살게 구는 끈기가 없었다. 연애도 사랑도 끈기가 없으면 헛것이다. 배불러서 무술 놀음, 사랑 놀음이나 하며 소일하는 것들, 자지나 떨어져라. 나는 투덜거리면서 자세를 잡고 나무에 기대섰다. 눈 앞의 벚꽃들이 취할듯 어지러웠다. 나도 입술 새로 혼잣말이 새었다.

“좋구나.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릴까.”

“안됩니다.”


대답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놀라 하마터면 진짜 죽을 뻔했다. 스승과의 하룻밤 이후로 심장이 이렇게 몰아치듯 조이는 느낌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방만하게 풀어진 삶이 내 기감(氣感)도 녹슬게 한 모양이었다. 내 온 몸을 긴장시키는 차분하고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 나는 호흡을 가라앉히면서 되물었다.

“왜 안 되지?”

“내가 죽여야 하니까요.”

“당신이 누군데?”

“당신을 죽일 사람.”


말꼬리가 말머리로 되돌아왔다. 발음이 어색하긴 했지만 흠잡을데 없는 우리 고향의 말이었다. 보나마나 암살자였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목표물의 고향 말까지 배울 정도로 대비가 철저한 이는 그를 생업으로 하는 이들밖에 없다.


나는 손을 들어서 벚꽃들을 헤쳤다. 기모노를 맵시 있게 차려 입은 젊은 여자. 위로 쳐들린 눈썹이 호쿠사이의 전통의 다이 카타나(大刀)처럼 날카롭고 서늘했다. 가시를 두른 듯 온 몸에서 뿜어내는 살기가 거세고 뜨거웠다. 저 정도의 살기를 느끼지 못했다니. 나는 새삼 내 스스로의 거만함을 탓했다. 또한 오랜만에 나타난 호적수에게 매우 감사했다. 내 온 몸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흥분으로 곧추선 척추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나는 척추를 달래면서 몸을 아래로 낮췄다. 가랑이 사이를 조이고 허리를 곧게 펴고 네발짐승처럼 빠르게 질주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사용하는 제대로 된 태클이었다. 내 척추가 사정없이 늘어나며 내 몸을 화살처럼 질타했다. 거리만 지우면 그 다음부터는 내 마음대로였다.


그런데 거리를 지우지 못했다.


정말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여자는 다리를 어깨 너비로 벌리고 선 채, 왼쪽 발을 앞으로 내민 전형적인 타격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타격가들이 관절기를 주로 쓰는 이들에게 쉽게 당하는 이유는 하체, 특히 공격을 위해 앞으로 내딛은 왼쪽 발을 너무 쉽게 내주기 때문이다. 일단 넘어뜨리고 나면 허리를 쓸 수 없는 타격가는 팔만 내젓다 하릴없이 당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내가 왼쪽 다리를 나꿔채기 전에 그녀의 주먹이 먼저 내 관자놀이를 때렸다. 한 방이라면 그럭저럭 참고 힘으로라도 우겨넣어 내 공간을 만들었을텐데 그녀의 주먹은 꼭 가을 밤송이처럼 연달아 쏟아져들어왔다. 주먹이 주먹을 끌고 들어오는 화려한 연타였고, 글러브로 주먹을 감싸는 서역의 권투와 달리 맨주먹에 특화된 타격이었다. 하나의 주먹에 실린 힘은 크지 않았지만 점점 가속이 붙으며 거칠게 밀어붙이는 연타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일단 뒤로 물러났다. 얼굴에 밤송이가 달라붙은 것처럼 얼얼했다.


여자의 얼굴은 평온했다. 숨소리도 바뀌지 않았다. 소매 바깥으로 드러난 가느다랗고 하얀 팔이 평온한 나뭇가지 같아 보였다. 상당한 고수로구나. 목울대가 꿀렁 울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으적으적 씹어서 잡아먹어주마.


나는 짐승처럼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주짓수의 기술을 걸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짧은 거리가 필요했다. 나는 위아래로 중심을 바꿔가며, 속도를 늦추고 더해가며 변화무쌍하게 상대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녀의 대응은 똑같았다. 첫 주먹으로 거리를 잡고 두번째 주먹부터는 폭포처럼 쏟아졌다. 더군다나 내가 미처 보지 못하는 사각에서 공간을 뚫듯이 들어오는 주먹의 각도는 예상 외로 무겁고 빨랐다. 유술가들만이 타격이 닿지 않는 공간에서 기술을 거는 것이 아니었다. 타격가들 또한 유술가들이 보지 못하고, 닿지 않는 곳에서 주먹과 발을 마음대로 날릴 수 있었다. 내가 두어 번 휘청거릴 때 그녀는 처음으로 몇 발자국 더 내딛어 발을 날렸다. 그리 높지 않은 각도였지만 위력은 확실했다. 기모노의 좁은 치맛자락이 허용할 정도로 낮은 발차기에 꿰인 나는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졌다.


낙법도 치지 못해 숨이 턱 막혔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나는 짐짓 여유를 부렸다.

“대체 그 무술은 뭐지? 처음 보는 것인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이 처음 보다뇨? 그럴리가요?”

“내가 아는 무술인가?”

“봄을 노래하는 주먹. 영춘(詠春). 한 대륙 출신인 당신이 이 권법을 모른다구요?”

“당신, 호쿠사이 여자가 아닌가?”

“아무렴 어때요. 그나저나 언제 봤다고 자꾸 반말이에요? 이제 끝났으면 죽여도 되나요? 사내 체면에 질질 끌지 말죠? 졌으면 졌다고 승복할 줄도 알아야지.”


이런 쌍년이.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시 일어났다. 누워서 승부를 보는 방법도 있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누워서 비비적대는 것만이 주짓수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나는 일부러 다가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성급하게 태클을 넣지 않을 셈이었다. 그녀는 조금씩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 앞세우며 타격의 자세를 유지한 채 앞으로 나섰다. 거리가 아주 필요없는 나와 달리 그녀는 위력을 내기 위해서 반드시 일정한 거리가 필요했다. 목숨을 걸고 장기를 두듯 수싸움을 벌이는 재미가 소름돋도록 좋았다.


괜히 맞고 싶어 맞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펼치는 영춘권의 공세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글러브로 감싸지 않은 주먹은 눈꺼풀을 깜빡이는 사이에 수없는 초식으로 변화하여 내 앞으로 다가왔다. 화려함에 비해 위력이 모자랐기에 연타로 보충했지만 애초에 거리를 늘리는 방법은 보법 이외에 따로 없었다. 즉 그녀의 다리를 묶어두면 팔길이 이상의 타격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나는 어중간한 거리에서 달려들었다. 그녀의 팔이 분명히 닿지 않는 바깥이었고, 그렇다고 발을 움직여 피하거나 맞서기에도 어정쩡한 거리였다. 훨씬 더 긴 내 오른팔이 긴 궤적을 그리며 그녀의 왼어깨를 잡아눌렀다. 왼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 아래로 눌렀다. 상체를 눌러서 하체를 박아넣는 기술이었다. 애초에 힘으로는 어림도 없을 승부였다. 그녀는 다리를 재게 놀렸지만 짧게 끊어치는 타격에 비해 내 발기술은 훨씬 길고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발질 한번에 그녀의 두 다리가 다 들어오면서 간단하게 쓰러뜨릴 수 있었다. 비로소 어느 정도 속이 풀렸다.


어떠냐는 식으로 의기양양하게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녀의 눈빛이 오히려 당돌했다. 그녀는 마치 나를 유혹하는 듯한 자세로 상체를 젖히고 다리를 꼰 자세로 그대로 누워 나를 올려다보았다. 등 뒤에 붙은 이름모를 긴 장식이 아찔하게 매력적이었다.

“뭐예요, 이게 다예요?”

“……영춘인지 뭔지 주먹질이 누웠으면 끝이지, 다른 수가 있나?”

“음혼절수니, 눈물손이니, 이름만 그럴듯했지 두부처럼 물렁한 병신이네요. 정말 유도의 귀신 기무라 마사히코를 꺾긴 했나요? 당신을 죽인다는 이를 이렇게 자빠뜨려 놓고는 이겼답시고 등을 돌리려구요? 나 아직 멀쩡해요.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요!”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지 싶어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를 꾀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몸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치맛자락을 두 손에 몰아쥐고 옆으로 밀어내면서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몸을 태산처럼 실어서 압박을 줄 때 그녀는 이미 순순히 옷끈을 풀고 있었다. 하얗게 드러나기 시작한 나신을, 더욱 하얀 벚꽃이 수줍게 내려와 덮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다리로 내 허리를 죄어 감았다. 교합(交合)의 한 자세일 수도 있었고, 혹은 그녀가 와술기(臥術技)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내 주짓수는 언제나 사람의 몸과 마음을 동시에 묶어두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의 자세가 무엇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무릎 안쪽을 손바닥으로 내리누르며 허리를 묶은 다리를 풀어내려 했다. 다리만 풀어내면 그녀의 배꼽에 무릎을 박아넣고 <배꼽 위 무릎(Knee on the valley)>으로 완전히 중심을 잡아챌 수 있었다.
그런데 무릎을 풀 수가 없었다.



상대가 내 허리에 다리를 감아 족쇄처럼 잠글 때, 무릎에 힘을 주어 풀어내는 기술은 명칭조차 따로 없을 정도로 아주 본능적이고 기초적인 주짓수의 기술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수없이 상대의 무릎을 풀어내왔었다. 그런데 정작 그녀의 무릎은 풀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가 허벅지를 오므려 내 옆구리 근육을 압박하자 갈빗대가 오그라들며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갑갑했다. 야들야들한 몸이 주짓수에 익숙하지 않은 흰띠 시절에나 겪는 고통이 격렬하게 되살아났다. 나는 숨을 끊어쉬며 볼썽사납게 버둥거렸다. 그녀의 두 다리는 철근처럼 나를 옥죄었다.



“대체……… 이 수법이……… 너는?”

“알다시피 암살자요.”


그녀는 다리를 위로 쳐들어올리면서 가까워진 내 하반신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녀는 내 바지를 거침없이 풀어내리고 있었다. 스승이 떠난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먼저 내 몸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은. 너무나도 아련한 옛 추억은 나도 모르게 하체에 힘을 빠지게 만들었다. 끈이 조금 헐거워지자 바지는 팽팽해진 앞섶을 쓸며 바닥에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거침없이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나는 거부할 수 없이 그녀의 몸 안에 빨려들어갔다.


전희(前戱)조차 없었는데 그녀의 몸 안은 이미 축축하고 뜨거웠다. 그러나 잘못 들어왔다는 생각이 가랑이 사이로 번뜩 솟구쳐 올라왔다. 짐승의 아가리나 맷돌 사이에 나를 들이밀었다는 낭패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뒤늦게 몸을 빼려 했지만 팔을 디뎌 힘을 쓸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녀의 어깨나 상반신에 손을 대고 허리를 뒤로 젖힐 순 있었지만 그녀의 몸에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몸 안에는 넓고 거대한 바다가 갈무리되어 있었다. 내 남성의 끝은 점점 무겁고 깊게 잠겼다. 말라붙은 호흡이 가슴팍에 고여 헐떡거렸다.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사지는 나른해져 더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독(毒)이구나. 내 몸은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모든 대결에서 일격에 사람을 죽여 “그에게 두 번 맞아본 사람이 없다.” 던 팔극권의 이 노사(老師)도 결국엔 독으로 죽어야 했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어쩌면 차라리 이렇게 죽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나는 스승을 떠올리며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그 때 그 순간의 암살자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스승이자 내 첫 여자의 모습을 닮은 듯도 했다. 물론 착각이었을 것이다.



한 가지 황당한 점이 있다. 아직까지 나는 몽달귀신이다. 어째서 내가 동정도 떼지 못한 몽달이가 되어 구천을 떠돌며 이승의 옛 기억을 더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혹시 나는 그렇게 많은 몸을 탐해왔는데도 전혀 사랑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고 애달파했던 모든 과정들이 사랑이 아닌건 아니었을까. 나는 지금도 구천을 떠돌며 오로지 그 질문만을 곱씹고 또 곱씹고 있다. 어쨌든 물(物)과 육(肉)이 없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주짓수를 할 수 없으니까.






스승의 행방은 여전히 알 수가 없다.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서 무얼 하는가.  







*                   *                *

눈물손 완결했습니다.
퇴원하고나서 마무리지은 세번째 습작입니다.
병실의 외로움을 모아 최초의 섹스씬...ㅋㅋㅋㅋㅋㅋ 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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