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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눈물손(상)

2012.04.24 12:0104.24

#. 순검들.


우리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오척단구에 반쯤 벗은 대머리, 까실까실한 수염이 잡초처럼 자란 턱과 좁은 어깨, 앞으로 다소 휜 허리. 없는 듯이 작은 눈. 마음이 동하면 콧김을 뿜으며 징그럽게 입술을 핥는 버릇까지. 우리는 그가 누군지 사무치도록 잘 알았다. 그는 당금(當今) 최악의 강간마였다.


누구든 맘에 들면 무릎을 죄어잡고 넘어뜨려 올라탄채 손발 관절부터 세심하게 빼버렸다. 한참동안 수캐처럼 끔찍하게 헐떡대다 빼낸 관절을 도로 끼워주곤 자리를 툭툭 털었다. 그렇게 강간당한 피해자는 대륙에서 반도에 이르기까지 지난 십여년간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밝혀진 사람 수만 그러했다. 예의범절을 아는 규중처녀(閨中處女)들까지 합한다면 말 그대로 인산인해(人山人海), 그에게 정절을 빼앗긴 여인들로 산과 바다를 만들어도 모자랄 터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


그는 최악의 강간마임과 동시에 최고의 금나(擒拿) 고수였다. 대륙에서 그는 음혼절수(淫昏切手)라고 불리웠다. 곧죽어도 큰이름에 녹아나는 대륙인들다웠다. 대륙을 어지간히 돌아다닌 뒤에야 그는 산보하듯 반도로 내려왔고, 곧 눈물손이라는 이름이 눈물처럼 퍼졌다. 그 손에 잡힌 이가 울고, 그와 정혼한 이가 울고, 양부모가 울고, 그 일가가 울고, 결국 이어지고 이어져 온 세상을 울린다는 뜻이었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다. 반도의 원한만 합쳐도 온 세상이 얼어붙어야 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서낭당에 돌을 던지며 기도하던 습관조차 버렸다. 서낭신이 계신다면 눈물손을 어찌 해도 해야 할 터였다.



우리 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적지 않았다. 한 제국인들이 가장 먼저 음혼절수 눈물손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본명도 고향도 나이도 몰랐으나 전혀 상관없었다. 그 때 그는 서울 한복판 큰길에서 한 처녀를 쓰러뜨리고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당연히 현행 체포였다. 순검청(巡檢廳)의 날랜 순검들 몇이 육모방망이를 꿰어차고 기세등등하게 나갔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던 눈물손은 벙긋 웃으며 순검들을 상대했다. 공화정으로 바뀐지 얼마 안되던 때라 불줄통이라 부르던 구식 화기(火器)에 순검도 군인도 어리바리하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손발 관절이 전부 빠진 채 한낮 큰길바닥에 나뒹군 순검들을 보며 어째서 그가 음혼절수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중 항문이 파열된 두어 명의 순검들을 통해 오싹한 사실 하나를 더 알게 되었다. 그는 마음에 든다면 정말로 누구도 가리지 않았다.



반도에 물건을 팔러온 색목인들이 돌려보는 잡지가 있었다. 뜻뒤채기(飜譯)를 전문으로 하는 역관이 씨근덕대며 그 잡지를 구겨 내동댕이쳤다. 연유인즉 정신나간 색목인 글쟁이가 눈물손은 세계 최고의 평등주의자라고 쓴 글이 실렸다는 것이었다. 너무 끔찍스러워 황당하고 어이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보다 눈물손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는 마음에 든다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하물며 날씨 따위야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비록 제맘대로 몸을 가지지만 이제껏 피를 보는 일이 없었으니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거친 낭만주의자일 수도 있다는 문장까지 덧붙었다. 우리는 아직 공화정과 왕정의 차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식한 관병(官兵) 출신 순검들이었다. 그러나 눈알이 터지도록 들끓는 분노를 되물려 삼키면서, 뱉는다고 다 말이 아니고 쓴다고 다 글이 아니란 사실조차 모르지는 않았다. 우리는 한동안 눈물손이 색목인들 몇도 덮쳐주면 어떨까 내심 바라기까지 했다. 그러나 눈물손은 색목인들을 결코 건드리지 않았다. 후에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색목인 특유의 냄새에 질색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코가 예민하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색목인들이 오기 이전에 우리가 보던 외국인들이란 거의 한 제국에서 내려온 사신 일행이거나 호쿠사이에서 건너온 상인들이었다. 오랜 내전을 겪은 호쿠사이의 상인들은 본디 낭인 출신인 이들이 많았다. 유술(柔術), 공수(空手), 검술을 아울러 한 가락씩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쉼없이 다리품을 팔아가며 제 한 몸 건사하자면 그런 재주도 있어야할 터였으나 크고 작은 소란 또한 적지 않았다. 그들은 눈물손을 상대로도 난리를 피웠고, 당연히 졌으며, 놀랍도록 황당한 결말을 가져왔다. 눈물손을 호쿠사이의 큰 사범으로 모셔간다는 것이었다. 바다로 사방이 막힌 좁은 섬 호쿠사이에서 재주가 뛰어난 이는 언제나 대접받았다. 왜란 때에도 호쿠사이 무사들은 반도의 뛰어난 장군들의 목을 베어 군신(軍神)으로 모셨고, 천대받는 옹기장이들과 그릇꾼들을 잡아다가 배불리 먹이고 따뜻하게 재우며 그들의 기술을 배웠다.



순검청의 우두머리인 경무관은 차라리 잘 되었다고 혀를 찼다. 공화정으로 바뀐지 얼마 안되어 나라가 몹시 어수선할 때라 연쇄강간마 하나에게 신경쓰지 않겠다는 분위기였다. 병조판서의 무남독녀가 바람타고 나부끼는 벚꽃의 아름다움에 빠져 산책만 나서지 않았어도 그는 안전하게 호쿠사이로 건너가 떵떵거리며 살았을 터였다. 짱짱하게 졸라입어 엉덩이 선이 다 드러나는 기모노 차림의 왜녀(倭女)들을 다다미 위에서 수없이 덮치는 일을 무예 수련이랍시고 가르치며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병조판서는 눈물손이 호쿠사이로 떠나기 전 목을 가져오라 호령했다. 공화정으로 바뀌었어도 높은 이들의 호령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이 굵다란 목울대를 울리면 등골이 얼어붙고 다리 사이가 졸밋거렸다.


우리는 그를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 그에게 걸린 상금과 관직은 삼대를 물려줘도 넘칠듯이 보였다. 꼭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눈물손이 불러일으키는 설움을 참아낼 수 없었다. 그가 깔고 덮치는 남녀들은 결국 우리 모두의 가족이었다. 작은 나라의 힘없는 이로 태어난 설움을 이렇게 천박한 방식으로 느끼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 눈물손을 잡아 족치고 싶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근자근 조지고 밟고 부러뜨려 두 번 다시 그런 짓 따위 못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잡지 못했다.


우리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


#. 은려.



머리를 빡빡 밀어 더욱 사나워보이는 흑인은 커다란 네발짐승 같았다. 어깨 아래로 붙은 팔은 윤기 나는 근육이 불뚝거려 아예 허벅지였다. 팔뿐만 아니라 온 몸의 근육은 기름을 잔뜩 먹여 무두질한 가죽 갑옷처럼 보였다. 흑인은 제 나라 말로 욕설을 내뱉으며 빠르게 주먹을 내뻗었다. 왼주먹이 날래게 앞섰고 오른주먹이 뒤를 이었다. 양주먹이 앞뒤를 다투며 위 아래 옆의 허공을 사정없이 후렸다. 눈물손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장정이라도 곤죽이 될 듯한 매서움이었다.


놀랍게도 눈물손은 폭풍 같은 주먹의 공세 속으로 몸을 던져 뛰어들었다. 안 그래도 작은 몸을 바짝 낮추었지만 허리에 힘을 넣어 중심을 잃지 않았다. 귀신같은 태클 동작으로 단번에 상대방과의 거리를 지우며 왼손으로 흑인의 발목을 잡아챘고 오른손으로 고관절을 누르며 그대로 상대를 넘어뜨렸다. 날쌔게 무릎으로 흑인의 배꼽을 찍어누르며 흐르듯 몸을 날려 두터운 가슴을 엉덩이로 깔아뭉개 바싹 숨통을 조이기까지 반 호흡도 걸리지 않았다. 언제나 처녀실혈(處女失血)이나 항문파열의 매순간마다 수없이 보고 보였던 광경인데도 여전히 도깨비 놀음 같은 솜씨였다.


제아무리 흑인이 무쇠 같은 근육에 번개 같은 주먹을 지녔더라도 이미 넘어진 다음에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눈물손은 익숙하게 흑인의 숨통을 조여가며 몸을 앞으로 수그렸다. 흑인은 세차게 사지를 버둥거렸지만 이미 몸의 중심이 눌려 있어 전혀 상체를 일으킬 수가 없었다. 눈물손은 연인을 사랑하듯 부드럽게 몸을 숙여 오른손으로는 흑인의 뒷목 옷자락을 잡았고 왼손으로는 멱살을 틀어쥐었다. 양손목을 앞뒤로 엇걸어 바깥으로 당기며 힘을 주자 흑인은 몇 초 못 가 눈을 까뒤집고 실신해버렸다. 색목인들의 넓다란 대륙에서 권투왕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며 눈물손을 생포하겠다던 유력 신문들의 취재와는 전혀 다른 비참하고 무참한 결과였다. 그나마 눈물손의 취향이 아니었던지 항문파열의 고통은 면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예스, 반도 뉴스(Yes, Bando NEWS)!>의 신입 기자인 내가 눈물손 같은 거물을 전담할 수 있었던 건 <예스, 반도 뉴스>야말로 여성 인권 보장에 앞장서는 근대식 언론 기관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색목인 국장의 정책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서양식 격투기의이름이나마 알고 있는 일선 기자가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규중처녀(閨中處女)의 몸으로 취직은커녕 바깥으로 나다니기도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눈물손 같은 희대의 강간마가 활보하는 때에 어떤 부모라도 과년한 딸을 집 밖으로 내보낼 리 없었다. 곱게 기른 머리칼을 짧게 자른 것처럼 부모와의 인연도 의절하고 과감히 반도 공화국의 대표 신여성 언론인이 되고자 어렵게 외국 유학까지 마쳤으나 막상 악명 높은 강간마의 싸우는 모습을 보자니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눈물손은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씽글씽글 웃으며 흑인의 팔다리 관절을 모조리 탈구시켜 놓고 있었다. 그렇게 꺾이면 안될 각도로 사지가 꺾여 늘어진 흑인은 누군가 아무렇게나 뭉쳐 던져놓은 커다란 걸레 뭉치 같았다.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색목인 국장의 어설픈 반도어가 내내 내 귓전에 맴돌았다. “팝펄레, OUT! 여자라고 퐈추지 않씀네다! 특종 카져오세요! 미스 백(BACK)! GO BACK NOW!” 아무리 원고를 “뺀찌” 먹어도 그렇지 멀쩡한 사람 성씨까지 “백(BACK)” 이라고 바꿀건 또 뭐냐. 그러나 입술을 내밀기도 전에 천둥처럼 터지는 고함에 쫓기듯 자전거를 타고 우당탕 줄행랑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뭐니뭐니해도 반도 최고의 뜨거운 감자는 눈물손이었다. 이름도 고향도 나이도 정확치 않은 대륙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온 거칠고 무섭고 끔찍한 강간마. 수없는 눈과 손과 창칼들이 그를 노리고 있지만 이때까지 한번도 잡혀본 적이 없는 사나이. 게다가 그는 번듯한 직업까지 가지고 있었다. 지독히 황당한 일이었다.



흑인 권투 선수를 처리한 눈물손은 손을 툭툭 털면서 자신의 가게로 돌아가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미 주위의 구경꾼들은 눈물손이 흑인에게 관심을 거두자마자 재빨리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뒤였다. 말라붙어가는 붓으로 대충 찌익 그어버린 듯한 작은 눈이 자신을 훑어보는 순간 뒷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마음보다 비명이 먼저 입술 사이를 열고나왔다.


“으악! 살려주세요!”


눈물손이 황당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당신 죽인댔소?”


이번에는 내가 황당할 차례였다. 연쇄강간마가 이렇게 물어보면 안 되는거 아닌가? 팔짱을 끼고 선 채 나를 내려다보는 눈물손의 머리 위로 낡은 간판이 보였다. 잡기방(雜技房). 왕정이 공화국으로 바뀌면서 외국인들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지자 온갖 유흥업소가 온 나라에 판을 쳤는데 잡기방은 그 중 대표적인 직종이었다. 적게는 술과 다과, 도색서적을 팔고 크게는 미혼약(迷魂藥) 판매와 매춘 알선까지 하는 불법 업소의 온상이었다. 참으로 눈물손다운 직업이었고 가게였다.


“나는 강간범이긴 해도 살인범은 아니오. 그리고 아가씨한테는 미안한, 아니, 아가씨에게는 좋은 일이겠지만 아무튼 별 관심없소. 가시오.”

“왜, 왜, 왜죠?”

“처녀가 아니니까.”

눈물손은 심드렁하게 대꾸했고, 나는 그 와중에도 누군가 내 귀뿌리에 성냥을 확 그어버린 듯이 화끈하게 부끄러웠다. 귓불의 뜨거움은 얼굴까지 물들어 사방을 어지럽게 했다.

“내가 처녀가 아니라구요?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봤어요?”

“당신 몸에서는 풋내가 안 나. 아무튼 별 관심 없으니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내 취향이 아냐.”

“네? 푸, 푸, 푸, 풋내요?”

“침 닦으시오. 튀잖소.”


눈물손은 작은 눈을 더욱 작게 찡그리더니 다시 가게 앞 의자에 앉았다. 반쯤 가게문을 열어놓고 손톱을 다듬은 채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중년의 퇴락한 가게 주인이었다. 좁은 어깨와 두꺼운 허벅지 사이로 지쳐 바스라진 시간이 툭툭 떨어졌다. 물론 그의 정체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 그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몇몇 괴짜들만이 그를 추종하며 매일 잔돈푼을 보태주고 있었다. 눈물손은 딱히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아보였다. 얼굴에 여드름이 번질거리는, 마르고 뚱뚱한 괴짜들이 나와 눈물손을 번갈아 흘끗거리며 또 무슨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기지 않나 누래진 눈알을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왠지 더 이상 말을 섞다간 아닌게 아니라 저 색목인 대륙에서 어렵게 파트 타임(Part-time)을 하면서 어쩌다 엉겁결에 겪게 되었던 누린내나고 뜨거운 밤이 생각날 것 같아서였다. 어른. 얼울 수 있는 이. 얼워야 사는 이. 그래서 어른. 나는 잠시 반도 공화국 고어 사전의 한 단락을 입으로 우물거렸다.


다행히도 눈물손은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처마 끝에 매달린 바람이 한가로웠다. 햇빛이 스민 초가을의 공기는 상긋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눈물손을 향해 성큼성큼 나섰다. 눈물손의 실속없는 추종자들이 내 몸을 노골적으로 흘끔거리며 군침을 삼켰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예쁘장하게 생긴 단발머리 아가씨가 하얀 대낮에 꿈틀대며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천박한 기대감일 터였다. 벌레의 비를 맞는 듯한 혐오감으로 등골이 자근자근 부서질 것 같았다.


“이봐요. 인터뷰를 하고 싶은데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


나도 모르게 색목인 대륙의 공용어가 섞여서 흠칫했다. 그러나 눈물손은 올려다보지도 않고 메마른 목소리로 대꾸했다. 인터뷰란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아가씨는 신문 기자요?”


나는 <예스, 반도 뉴스>의 서울 본사에서 지급한 검은색 양식(洋式)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낙낙하게 품에 여유를 두는 반도의 복식과 달리 색목인들의 옷은 호쿠사이의 기모노나 한 제국의 치파오처럼 가슴선과 허리선이 한눈에 드러나도록 조여 입어야 했다. 익숙치 않은 복색이 무척 부끄러웠지만 눈물손은 별 반응이 없었다. 나는 옆으로 맨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신문은 아니고 주간지예요. 서역어를 조금 아시는 거 같은데 <예스, 반도 뉴스!>의 문화부 기자 백, 아니아니, 황은려입니다.” 그러나 눈물손은 명함도 받지 않았다. 대신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얼마나 줄 거요?”

“……네?”

“얼마나 값을 쳐줄거냔 말이오. 신문이든 잡지든 결국 나를 팔아먹는 일 아니오.”

“그, 글쎄요. 저는 일개 기자라 제 마음대로 취재비나 수고비를 책정할 수는 없어서요. 데스크(desk)랑 얘기를 해봐야…….”

“서역 딸라, 제국 위앤, 공화국 원화, 왕정 때 냥짜리 푼돈, 호쿠사이 엔화 같은건 받지 않겠소. 사는 땅만 넘어가도 쇳조각, 휴지조각 되는게 종잇돈이더군.”

“그러면 뭐, 뭘 원하시는데요?”

“돌아가서 내 값에 해당하는만큼의 금이나 은을 가져오시오. 나는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들이 좋소. 다른 건 받지 않겠소.”


강간마 주제에 갈수록 태산이었다. 분명 특종감이긴 했지만 회사에서 그만한 거액 지출을 허락해줄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망설이자 눈물손은 피식 웃으며 수염이 다북한 턱을 슬슬 쓰다듬었다.

“그게 어렵다면 말동무 정도는 해줄 수 있소. 남들이 다 아는 것 정도의 이야기 정도겠지만 아직까지 나와 이야기를 해보려는 인간들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정도만 되어도 아가씨에게는 남는 장사 아뇨?”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만년필과 수첩을 꺼내 들어 거리를 두고 앉으면서 힐끔거렸다. 작고 볼품없는 중년 사내였다. 자기보다 두 배는 클법한 흑인 장정을 박살내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어도 도저히 삼국 최고의 무인이라 믿을 수 없는 풍모였다.

“그런데……… 왜 저와 이야기하고 싶으신거죠?”

눈물손은 턱으로 잡기방 안쪽을 가리켰다. “땀내나는 애송이들 눈빛받는 것도 지겨워져서. 저런 인종들은 어디에나 있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물어뜯거나 혹은 덮어놓고 찬양하면서 같은 부류인듯 구는 변태 호사가(好事家)들이 꼭 있지.” 그리고는 의자를 바짝 끌어오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희한하게도 울림만큼은 듣기 좋았다. “내가 사람들을 내 뜻대로 꺾고 내팽개치고 범하고 위압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들이오. 좋아할리가 없잖소? 단지 돈주머니를 들고 오기 때문에 손님으로 받는거요.”

“그럼, 당신은……. 왜 사람들을 당신 뜻대로 꺾고 내팽개치고 범하고 위압하는데요?”


눈물손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무나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시선에 내가 무슨 말실수를 했나 싶을 정도였다.

“아가씨는 바보요? 당연히 하고 싶으니까 하지. 하기 싫은데 자기 힘 써가며 덮치고 범하는 멍청이가 어딨겠소. 흘레붙는 개도 그러진 않을거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아, 좋아요, 좋아요. 그럼 그런 행위가 왜 좋은데요? 좀 더 뭐랄까, 평범하고 정상적인 경로로 몸을 얻는 방법도 충분히 있으…….”


눈물손은 손가락을 가볍게 들어올려 말을 잘랐다.

“궁금하오? 그건 내 과거와 연관되어 있소. 남의 마음 긁어내리는 이야기를 원하신다면 대가를 가져오셔야지.”


눈물손은 다시 의자를 뒤로 드르륵 밀며 거리를 벌렸다. 나는 짜증을 참느라 입술을 앙다물었다. 중요한 얘기 듣고 싶으면 돈을 가져와야 한다는 배짱이었고, 알맹이를 공으로 내주지 않겠다는 심보였다. 당신은 그래봤자 남녀노소 안 가리는 평등주의자 변태일뿐이야- 라고 소리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다른 건 궁금하지 않소? 물론 이름이나 나이, 고향 같은 건 절대 안 가르쳐줄거요. 징그럽거든. 그딴 이야기는.”

눈물손은 얄밉게 빙글거렸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얼굴에 침을 돋우어 탁 뱉어주고 싶었으나 역시 참아야 했다. 대신 대화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당신이 쓰는 무술이 뭔지는 가르쳐줄 수 있나요? 혹시 레슬링 같은건가요?”

처음으로 눈물손의 눈이 조금 커졌다.

“레슬링? 레슬링을 어떻게 알지? 색목인들의 대륙에 있었소? 아니, 거기 있었다고 해도 아가씨들은 별로 관심이 없을텐데.”

“아카치 공국에 4년 동안 어학 연수를 갔다왔어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선조는 아카치안이라고 불리우는 거칠고 난폭한 해적들이죠. 그들의 숭무(崇武) 정신은 일개 외국인 유학생인 저에게도 예외가 아니더군요. 뭐, 저도 복싱은 조금 했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쓰러진 중부 대륙 6개국 통합 복싱 챔피언 제임스 <킹 피스트(King Fist)> 엘리엇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잘 안다구요. 그리고…… 당신이 레슬링을 오래 했다면 아무리 킹 피스트라고 해도 별 대비없이 정면으로 덤빈 건 무척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도 알죠.” 번들거리는 눈빛에 느닷없이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한 박자 쉬었다가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겨우 참고 말을 이었다. 레슬링과 복싱에 대해 길게 늘어놓을수록 눈물손의 눈에 점점 윤기가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놀랍군. 정말 놀랍구려. 이 나라도 많이 변했어. 동방예의지국이네, 소중화(小中華)네 하면서 한 대륙의 전족 못지 않은 짓만 시키는 줄 알았는데. 아가씨 같은 호걸이 다 나오는구려. 하지만 안타깝게도 틀렸소. 내가 배운 무술은 레슬링과 비슷한 원리를 쓰긴 하지만 전혀 다른 무술이오. 오래 배워 원리만 잘 알면 저런 시커먼 곰투가리쯤이야 손가락 하나로도 넘어뜨릴 수 있지.”

“그……… 무술이 뭔데요?”

“도깨비라 불리우던 호쿠사이 유술(柔術)의 시조, 다케다 소오가쿠가 창안한 기술이 바다를 건너 저 멀리 색목인들의 대륙 남부 쪽에서 전수되었다가 다시 그들의 체형에 맞게 변모되고 개량되어 전수된 신비의 무술이오. 그 이름하여…….”

“………바르질리안 주짓수. 대륙 남부 바르질 왕국은 나도 가봤지. 무사 수행을 색목인들의 대륙에서 했으니까.”

갑자기 누군가 끼어드는 바람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쓰러진 흑인 옆에 호쿠사이식 소매 넓은 도복을 졸라입은 근육질의 건장한 청년이 눈물손을 쏘아보고 있었다. 큼지막하고 투박한 이목구비에 송충이처럼 짙은 눈썹이 우람함을 더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얼굴이었으나 기억이 흐렸다. 그는 눈이 풀려 실신한 흑인을 보며 혀를 차더니 탈골된 팔다리를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어긋난 관절을 되돌리는 일 또한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라 흑인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온 몸을 버둥거렸다. 호쿠사이 청년은 동방 삼국인들 치고는 체격이 좋았으나 흑인에 비하면 다소 왜소해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흑인을 어렵지 않게 다루면서 관절을 세심하게 모두 끼워주었다. 그 모습을 보던 눈물손은 예의 그 징그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호쿠사이 유도(柔道)의 귀신, 열네 살에 이미 미친 말을 강바닥에 메다꽂았다는 무시무시한 팔힘, 기무라 앞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뒤에도 기무라가 없을 것이라던 전설의 유도가 기무라 상이 무사 수행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는 얘기는 어렴풋이 들었지. 헌데 이 반도까지 어인 일이신가?”

“유술의 정수들을 정리하여 완성한 호쿠사이 유도 앞에서 바르질리안 주짓수 따위 얼마나 허접한 기술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지. 이미 바르질 왕국의 한다 하는 주짓떼로들은 모조리 내가 뼈를 부러뜨려 놨거든. 하물며 색욕에 미쳐 헤어나오지 못하는 당신 같은 변태가 다이묘(大名)로 초빙되어 온다니 그야말로 속이 뒤집혀서 말이야.”

“그래? 그러고보니 이제 유술에서 어린애 장난 놀음 같은 유도인가로 완전히 전향을 한 모양이로군. 업어치기, 메치기같은 단순한 기술로 사람을 가지고 노니까 좋던가?”


안 그래도 무뚝뚝한 기무라의 얼굴이 더욱 차갑게 굳었다. 제법 세련된 발음의 색목인 공용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호쿠사이의 오랜 내전 탓에 온 몸을 중갑주로 감싼 무사들을 맨손으로도 상대하기 위한 관절 기술의 총집합인 유술과 그 중에서 비교적 쉽고 위험하지 않은 기술들을 따로 모아 정리하여 반복 수련하는 과정으로 만들어낸 유도의 차이에 대해서 정확히 알게 된건 꽤 먼 훗날의 일이다. 그러나 호쿠사이 청년까지 모를 수는 없었다. 다름아닌 기무라 마사히코였다. 근대 호쿠사이가 낳은 불세출의 유도가.

“기껏 배운 관절기를 겁간에나 쓰는 네 놈 같은 변태보다야 낫겠지. 아, 그러고보니 당신 스승도 추문이 있어 바르질 왕국에서 추방당한 인간이던데 말이야.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야. 아, 혹시 사제지간에 서로 닭처럼 붙어먹으며 기술을 전수받았나?”
이번에는 눈물손의 표정이 변할 차례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기무라의 모든 관절을 전부 뽑아 바스러뜨릴 듯한 기세로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어디, 네 놈도 한번 나랑 붙어먹어 볼텐가? 처음이 좀 아파서 그렇지. 피똥 좀 싸고 나면 적응돼서 오히려 그리울걸.”

“어떤 놈이 피똥을 싸게 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기무라의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눈물손의 몸이 바람같이 달려들었다. 상대와의 거리를 지우는듯한 신속한 태클이었다. 그러나 열네 살 때 이미 타고난 팔힘으로 강변에서 미쳐 날뛰는 말의 다리를 잡아채어 강바닥에 꽂아넣었다던 기무라였다. 월등히 긴 양팔을 위아래로 펼쳐 아래로는 눈물손의 돌격을 막고 위로는 그의 허리띠를 잡아챘다. 양손을 풍차처럼 휘돌리며 눈물손을 바닥에 메다꽂는 괴력과 기술은 과연 틀림없는 기무라였다. 눈물손은 방금 전 자신이 내던진 흑인처럼 땅바닥에 구겨박혔다. 짚을 꼬아 만든 호쿠사이식 다다미가 아닌 맨 땅바닥에 그냥 내팽개쳐졌으니 낙법을 쳤다고 해도 상당히 괴로울터였다.


기무라는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턱을 치켜올렸다. 넓은 도복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은 기둥처럼 두꺼웠고, 잔근육과 힘줄이 주름살처럼 새겨져 꿈틀거렸다. 그의 위압감은 점점 내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랬다. 아카치 공국의 레슬링 클럽에서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던 그 이름. 역시 유도의 귀신이라 불리우던 기무라 마사히코다웠다.

“일어날 수 있나?”

눈물손은 기침에 기침을 잇느라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폐를 게워올리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격렬했다. 사실 메다꽂히는 기세로 봐서는 내장이 터져 입 밖으로 흘러나왔어도 당연한 듯 해보였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으나 입가에는 여전히 사람 복장을 긁어놓는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푸하, 푸학! 쿨룩, 퀴, 퀴무라! 으흠, 흠! 일어날 수 있겠냐고? 나한테 지큼, 흠, 흠! 일어날 수 있겠냐고 물은 건가?”

“경기였다면 이미 한판승이었다.”

“경기였다면 그랬겠지.”

기침을 거둔 눈물손의 말투에 조롱기가 가득 배어 있었다. 또다시 기무라의 눈썹이 용처럼 꿈틀거렸다.


“대체 뭘하고 섰나, 기무라? 여자가 침대에 누워 기다려도 그렇게 멀거니 보고 있을건가? 하물며 싸움터에서 적이 멀쩡히 살아 숨쉬면서 주둥이를 나불거리고 있는데, 아, 경기였으면 한판승이다, 내가 이겼다, 하면서 뻔뻔하게 등을 돌릴 참인가? 난 아직 멀쩡해. 그 유도라고 하는 것, 유술을 현대에 적합하게 발전시켰네 개량시켰네 해도 역시 그건 무술이 아니라 그저 <운동>일뿐이야.” 마지막으로 눈물손은 장난스럽게 눈물 고인 눈을 찡긋거렸다. “안 그런가, 운동 선수?”


기무라는 마디 굵은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다시 덤벼들었다. 이번에는 구차한 대화조차 없었다. 유도에도 조르기와 꺾기 같은 관절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셈이었다. 나라면 기어서라도 도망갔을 그 때에 오히려 양다리를 널찍하게 벌리고 누운 눈물손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다리를 벌리고 고개를 쳐든 채 누운 그의 자세가 사실 바르질리안 주짓수의 <열린 막기(Open Guard)>라는 사실도 나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기무라가 덮쳐 누르기 전에 이미 눈물손의 가로눕힌 오른쪽 정강이가 그의 복부를 밀며 막았고, 왼쪽 발로 허벅지의 고관절을 떠밀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땅바닥에 쓸린 등이 쓰라릴텐데도 그는 내색하지 않으며 허리를 띄워 차근차근 기무라의 몸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양다리는 거미처럼 춤을 추며 하체를 얽어매었고, 두 손은 기무라의 양쪽 소매를 말아잡아 쉽게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불세출의 유도가인데다 이미 주짓떼로와 여러 번 시합을 해본 경험이 있는 기무라 역시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눈물손의 움직임은 그가 경험해본 그 어떤 주짓떼로와도 달랐다. 빠르고 부드러우면서도 묘하게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작은 몸을 바싹 붙이고 기무라의 근육질의 몸을 샅샅이 훑으며 온 몸에 쇠사슬을 감는 듯한 그의 느낌은 굉장히……….


야했다.


그 당시에 나는 그렇게 느꼈다. 도합 여덟개의 팔다리가 상대의 몸을 쓸며 버둥댔다. 두 사람은 이미 땀투성이였다. 만약 누가 깨물기라도 했다면 벌건 대낮에 남자 둘이 몸을 드러내며 무슨 짓을 벌이는지 구분조차 가지 않을 광경이었다. 격렬한 성행위 같으면서도 서로를 짓이기고야 말겠다는 거친 살의가 때때로 파도처럼 드러났다.


무술가로서의 숨겨진 모습을 보여준 이는 기무라였다. 그는 유술가 출신이면서도 유도를 고안한 카노 지고로에게 오랫동안 사사했다. 유술이 오랜 실전 경험으로 갈고 닦여진 잔혹한 기술들의 전승이라면 유도는 정밀하고 세세한 과정들을 아득할 정도로 반복하는 수련의 종합이었다. 그는 운까지 포함하여 실전에서 살아 남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유술보다 정해진 과정을 열심히 수련하면 강자가 될 수 있는 유도가 더 좋았다고 했다. 기무라의 우직한 성미에도 그 편이 훨씬 어울릴듯 해보였다. 물론 낭중지추(囊中之錐)였다. 재능의 편차가 심한 범부(凡夫)들과 어울리며 눌러두었던 기무라 특유의 재능이 날카롭게 폭발했다. 기무라의 하반신을 질기게 잠그고 있었던 눈물손의 <닫힌 막기(Closing Guard)>가 일거에 찢어지듯 바깥으로 뒤틀렸다. 기무라가 엇박자로 힘을 주면서 상반신을 밀어붙이고 있는 탓이었다. 목 주위의 옷깃이라도 잡힌다면 그 자리에서 숨통을 졸라 실신시킬 수 있었다. 어쩌면 목뼈가 부러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금나의 고수들에게는 옷조차도 사람을 죽이는 무기였다.


그러나 기무라는 눈물손의 숨통을 지나쳤다. 대신 두꺼운 흉근으로 눈물손의 온 몸을 짓누르며 그의 오른손목을 나꿔챘다. 숨통을 빼앗는 대신 팔목을 잡는 기무라의 아량에 감탄했지만 내 예상은 한참 빗나갔다. 기무라의 왼팔을 눈물손의 오른팔꿈치에 받쳐놓아 버팀대를 만들고, 오른손목을 반대로 꺾어 부러뜨릴 셈이었다. 주짓수의 본산 바르질 왕국에서조차 <기무라 부러뜨리기(Kimura Lock)>로 맹위를 떨친 이 끔찍한 기술은 수많은 주짓떼로들에게 재취업을 강요하기로 유명했다. 기무라는 이미 호쿠사이를 떠나올 때부터 두 번 다시 눈물손이 무술을 할 수 없게 만들 작정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묶여 있는 다리를 완전히 빼낸 뒤 상대의 상반신에 올라타는 <산 자세(Mount Position)>로 가야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무라의 괴력은 그 정도의 불리함은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바르질리안 주짓수가 가진 기술의 정밀함 또한 그 정도의 근력 차이를 상쇄하고도 남았다.


눈물손은 기무라의 허리를 물고 있던 양다리를 풀어냈다. 잡혀 있지 않은 왼손을 오른쪽 귓불 쪽을 향해 대각선으로 뻗치며 허리를 튕겨 <우빠(Uppa)>를 시도하자 기무라의 거구가 크게 휘청였다. 계속해서 힘을 쓰며 하반신의 다리 자물쇠를 풀어내려던 기무라는 갑작스럽게 몸이 놓여나자 중심을 잃고 눈물손의 몸 위에서 버르적거렸다. 상대의 중심이 흩어지자 눈물손의 다리가 하늘 위로 치솟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하체의 유연함이었다. 기무라는 어떻게든 자신이 만들어낸 지렛대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몸을 뒤틀었다.그 때 눈물손의 양다리는 게의 집게다리처럼 이빨을 드러내며 기무라의 튼튼한 어깨를 꽉 물었다. 체중을 실으며 관절을 비틀고 견갑골을 쥐어짰다. 팔 관절만 비트는 것이 아니라 어깨 근육과 견갑골까지 완전히 다리 사이에 넣고 묶어버리는 동작인지라 천하의 기무라도 볼썽사납게 나뒹굴며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준수한 코가 망가졌는지 코피가 새듯이 흘렀다.


“오모플라따(Omoplata/肩胛骨). 겨우 걸었군.”


오른손을 들어 땀을 닦으려던 눈물손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도로 손을 내렸다. 불완전한 기술이긴 했지만 기무라의 완력을 버텨내느라 그의 오른팔도 약간 상해 있었다. 주저앉은 콧등 때문에 기무라의 신음 소리는 다소 찌그러진 울림이었다.

“어, 어떻게……… 된거지? 어떻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 동안 넌 시합을 했고, 난 싸웠고. 네 놈이 유도를 하건 유술을 하건 난 상관 안해. 그러니 시비는 걸지 마라. 특히 스승님 얘기는 꺼내지도 마. 무사된 자의 신뢰로 약조하지 않는다면 이 팔을 복잡하게 부러뜨려서 두 번 다시 재기도 못하게 해주겠어.”


눈물손이 체중을 실어 관절의 부하를 높이자 기무라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그는 피섞인 콧물과 눈물을 흘리며 애걸했다. 기무라는 전혀 무사답지 않은 얼굴로 호쿠사이 전통의 무사 약조를 해야만 했다.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의 눈물손이었다. 다소 고전했으나 천하의 기무라도 그에게 걸리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벌써부터 머리 속에서 기사의 개요를 짜고 있었다. 그 기사를 미끼삼아 국장에게 비용을 충당해볼 셈이었다. 그리고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눈물손이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기무라의 도복 바지를 벗겨내리는 모습이 그 날 내가 본 그들의 마지막 광경이었다.


#. 쇄(鎖)


나는 벽장 속의 아이였다.


한 대륙에는 적게 잡아도 약 서른 개의 크고 작은 부족이 있다. 나는 그 중 숫자가 많지 않은 농경 부족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얼굴조차 가물가물한 내게 부족 이름 같은건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한 대륙의 변방에서 정통 한 제국인의 땅을 부쳐먹으며 대를 물려 농노 생활을 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노예의 자식도, 노예의 부모도 모두 노예였다. 벽장 속의 아이란 후대에 노예 생활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부모의 마음이었지만 그 이전에 이민족들의 숫자와 세력을 통제하려는 제국의 가족 계획 정책의 결과이기도 했다. 한 가구당 한 명의 자녀만이 허용된 사회에서 나는 벽장 속에 처박혀 피임에 실패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얻어맞는 모습을 늘 봐야 했다. 그리고 밤이 어두워지면 밀린 용변과 끼니를 해결하기 전에 어머니에게 얻어맞는 일이 늘 우선이었다. 발길질을 당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딱딱한 떡 조각을 핏물에 적셔 삼켜야 하는 내 눈 앞에 늘 보이는 광경은, 얄궂게도 비단 옷 떨쳐 입고 따뜻한 밥상에서 즐거워하는 땅주인의 아들이었다. 어리고 연한 나이에도 서럽고 고통스러웠다.


그 때 스승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라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


언제부터인가 변방 산자락에 산귀신이 산다는 풍문이 들렸다. 긴 머리칼에 키가 크고 힘이 아주 세서 그 손에 걸리면 꺾이고 부러지고 끊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다. 밤이 되어 벽장 속에서 기어나온 나에게 딱딱한 고구마를 던져주며 형은 징그럽게 웃었다. “산에 던져놓으면 딱일텐데. 그 괴물이 니 모가지를 딱 비틀어서 말야. 증거인멸.” 그 때 찹쌀을 물에 불려놓고 있던 아버지 어머니의 표정은 묘하게 빛났다. 정말 그래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는 듯해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부터가 끔찍하고 서러웠다.


달빛이 바다처럼 벽장 속으로 밀려오던 날에 나는 그 안을 탈출했다.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운명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벽장 속에 갇혀 일도 못하는 아들을 언제까지고 먹여살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부모로서의 의무감과 양심이 무뎌지면 어떻게 죽어도 죽게 될 나였다. 뱃속이 비어 허청거리는 팔다리를 가누면서 가문 논두렁을 구르듯 달려나갔다.


내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산으로 향한 건 스스로 죽고자 했던 마음 때문이었을까. 나는 사실 그 때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잘 알지 못했다. 눈 앞에 펼쳐진 어둠은 깊고 깊어 나를 헤매게 만들었다. 물론 그 때는 그 걸음이 결국 나를 살리는 길이었을 줄 미처 알지 못했다.


용변과 기갈을 참고 참았다가 한 번에 해결하던 습관 때문에 내 몸은 늘 불안정한 균형 속에 있었다. 그 덕분에 오히려 약해질대로 약해진 몸인데도 몇날 며칠을 잘 버티었다. 그러나 사람이 언제까지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살 수는 없었다. 아직 밤이 쌀쌀한 초봄이었다. 하물며 산의 밤은 살을 쥐어짜고 뼈를 흩어놓는 추위 그 자체였다. 입가에 김이 서리며 눈 앞이 어지러웠다.

그래, 이렇게 죽는구나.


아직 어린 내가 죽음을 예감할 때 스승은 나타났다.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칼에 키가 아주 늘씬하게 컸고 단단한 어깨가 흐린 달빛에도 넓었다. 과연 멀리서 보자면 산귀신으로 볼 법한 풍모였다. 고맙게도 스승은 나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 넓고 단단한 어깨로 나를 품에 끌어안으며 바람에 녹듯이 달렸다. 그때까지 스승을 모르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 안으로 파고들었다. 스승은 아주 잠깐 멈칫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스승의 가슴은 돌처럼 무거우면서 고무처럼 말랑거렸다. 산귀신은 가슴도 바위처럼 크고 딱딱하구나 싶었다.


스승의 거처는 산 중턱 쯤에 바람이 잘 통하는 동굴이었다. 시냇가가 멀지 않았으나 산세가 험하여 산짐승들도 돌아가는 곳이었다. 스승은 나를 동굴 안에 부려놓고 불을 피워 더운 물을 조금씩 먹였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코끝에 구수한 냄새가 스쳤다. 스승은 커다란 냄비에서 죽을 국자로 떠서 나에게 내밀었다. 감자와 고기를 갈아 곡물과 함께 끓여낸 죽이었다. 아직까지도 그렇게 맛있는 죽은 먹어보지 못했다.


수저도 없이 죽그릇에 얼굴을 박고 있는 나의 뒤통수를 스승이 안쓰럽다는 듯이 조심스레 쓸어주었다. 그녀의 손바닥은 크고 두껍고 거칠었다. 겨울바람에 삭아든 나무 등걸로 뒷목을 긁어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제서야 빈 죽그릇에서 얼굴을 떼고 스승을 바라보았다. 길게 빗어내린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차갑고 야무져보였다. 눈이 크고 콧날이 높고 눈썹이 짙은 전형적인 색목인이었다. 머리가 굵어지며 알게 되었지만 스승은 그때 아직 젊은 서른줄이었다.


스승은 딱딱한 발음의 우리 말로 물었다.

“넌 누구냐? 몇 살이냐? 어디서 왔느냐?”

나는 절을 하며 말했다.

“이름은 모릅니다. 나이도 몰라요. 저는 벽장 속의 아이예요. 살려주셔요, 마님. 저는 산 밑 농사 부쳐먹는 농노의 둘째 아들입니다. 마님께서 버리시면 저는 죽어요.”

스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벽장 속의 아이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나라에서 정하기를 저희 같은 사람은 많이 있을 필요가 없댔어요. 그래서 아들이건 딸이건 하나만 낳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외의 자식들은 전부 노예로 팔리거나 저처럼 벽장 속에 갇혀 죽어야 하니까요. 마님, 제발 살려주세요. 부모에게로 가면 저는 죽어요.”

스승은 기가 차다는 표정이었다. 불빛을 비스듬하게 받는 스승의 얼굴은 갈색으로 그을려 있었다. 이 근방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피부색이었다. 나는 그녀가 색목인, 그 것도 우리 말을 하는 색목인이라는 점에 고맙고 감사했다.

“끔찍한 일이구나.”

스승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내 손을 꼬옥 잡았다.

“나는 이 근방의 사람들이 산귀신이라 부르며 두려워하고 저어하는 자다. 네 처지가 무척 딱하긴 하다만 그래도 나와 있기 무섭지 않으냐?”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마님. 곁에만 두어주시면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는 마님보다 저를 낳고 기른 부모들이 더 무서워요.”

“마님이라 부르지 말아라. 나는 마님이 아니다. 네가 부모에게 이름을 받지 못했듯 나도 이름이 없으니 그저 스승이라 불러라. 비록 색목인과 동방인의 만남이지만 어찌 귀한 인연이 아니겠느냐. 너에게 가르쳐줄 것이 아주 많고 많다. 너는 어리지만 말을 잘하고 강단이 있으니 좋은 제자가 되겠구나.”

“그게, 그게 무엇입니까? 마님, 아니, 스승님. 이렇게 거두어 살려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저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시려고 합니까?”
스승은 자세를 바로 곧추세우자 긴 강처럼 장대한 몸매가 숨길 수 없이 드러났다. 쇠처럼 낮고 무거운 목소리에 위엄과 진중이 차분하게 실렸다. 스승은 엄숙하게 말했다.

“바르질리안 주짓수.”





“바르질리안 주짓수는 원래 호쿠사이의 고류(古流) 유술에 뿌리를 두었다. 호쿠사이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농지를 찾아 색목인들의 대륙을 방황하다 바르질 왕국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널리 전파되었지. 바르질리안들의 체형에 맞게 변화되고 개량되어 적어도 색목인들 대륙 내에서는 이종(異種) 무술 간의 대결에서 특히 두각을 드러내는 합리적인 기술로 평가받고 있다. 본토라고 할 수 있는 호쿠사이에서 오히려 다시 들여오고자 하니 그 뛰어남을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느냐.”


스승이 바르질리안 주짓수의 역사와 요점을 설명할 때 나는 기본부터 연마했다. 스승은 내 골격과 살집을 손가락으로 짚어 나이를 추산해주었고 그에 맞는 훈련 일정을 만들었다. 온 몸의 관절을 열고 부드럽게 만드는 유연성 훈련과 팔굽혀펴기, 복근 훈련, 쭈그려 솟구쳤다 다시 앉기, 동굴 천장에 꿰어 매단 밧줄을 타고 오르는 등의 근력 훈련 사이에 주짓수의 요점이라 할 수 있는 기술 수련을 함께 했다. 사지를 넓게 벌린 채로 엎드린 뒤 몸을 휘돌리며 걷는 사각걸음은 주짓수에 꼭 필요한 체중과 중심 이동의 기초였다. 기묘한 자세였지만 스승이 나를 자애롭게 내려다보는 눈빛 하나에 나는 지루하지도 지치지도 않은 채 신이 났다.


본격적인 공격과 방어는 스승과 직접 몸으로 하나하나 부딪혀가며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아픔은 깨달음의 다른 이름이었다. 사람의 몸은 몹시 신기해서 엄지손가락으로 이마만 눌러도 일어날 수가 없었고, 무릎 하나만 비틀려도 온 몸이 찢어질듯 아팠다. 동굴 한구석에 바위처럼 쌓인 책더미를 다 읽은 듯한 스승은 인간의 몸이 유기체적 구조이기 때문에 주짓수의 합리와 신비가 모두 설명될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려운 말이었지만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나는 어서 스승의 주짓수를 남김없이 전수받아 맨손으로도 나무를 꺾어 장작을 만들고, 덤벼드는 사슴의 다리를 나꿔채어 저녁거리를 장만하는 이술(異術)을 지닌 초인이 되고 싶었다. 밤낮없이 주짓수에만 매달려도 지치지 않았다. 즐겁고 재미있고 흥분되는 나날이었으나 스승은 나의 경거망동을 제지하며 책도 부지런히 읽도록 했다. 말과 글 또한 스승이 가진 책으로부터 배웠다.


스승은 아름다웠다. 어깨가 다소 넓은 게 흠이었지만 이 나라의 기준이었다. 큰 키에 풍만하게 굽이쳐 흐르는 타고난 몸매가 불꽃처럼 도발적이었다. 약간 쉰 듯하면서도 무겁고 탁한 목소리도 귀에 깊게 녹았다. 그런 스승과 몸을 부딪혀가며 손발을 섞는 기분이 점점 묘해지기 시작했다. 스승이 내 중심을 무너뜨리며 거칠게 파고들어올 때 나는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스승의 강한 기세에는 숨길 수 없는 유혹이 부드럽게 배어 있었다. 언제나 산이 덮쳐오는 듯한 마운트 포지션도 그날만큼은 지나치게 유혹적이었다. 나는 내가 그렇게 커다랗게 발기할 줄 몰랐다. 나의 우빠(Uppa)는 너무 서둘렀고 급했다. 무리하게 상체를 세우다가 오히려 허리를 삐끗하고 말았다.


“아직 멀었구나.”

스승은 장난스레 말하며 내 몸 위에서 내려왔다. 마흔 줄에 접어드는 스승은 원숙한 아름다움이 온 몸에서 뚝뚝 흘렀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처녀처럼 발랄했다. 나는 황급히 다리 사이를 오므리며 기어서 동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몇 번의 사계절이 흐드러지게 지나간 동굴 바깥 풍경은 이제 나에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 스승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내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부끄러움을 타서야 이 스승이 대체 뭘 가르칠 수야 있겠느냐? 그 때의 꼬마가 헌헌장부는 되었구나.” 그러고는 실팍한 상체를 동굴 바깥으로 내밀며 애잔하고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날씨 참 좋다. 그러고보니 너와 내가 만난지도 오래 되었구나.”
그 날 밤 저녁상을 물리고 스승은 나에게 조그마한 종이쪽지를 하나 내밀었다. 예전에 비해 쉽게 구하고 값이 싸지긴 했어도 변방 산자락에 딱히 필요는 없는 물건이었다. 종이를 펼치자 짙은 묵향이 종이 끝으로 흘러내렸다. 획마다 힘을 주어 눌러쓴 한 글자. 鎖(쇠사슬 쇄)였다.


“이게 무슨…….”

“네 이름이다. 쇄. 마음에 드느냐? 여기 사람들은 이름을 박하게 지어야 오래 살고 복을 누린다더라. 쇠사슬처럼 질기고 짱짱하게 오래 살거라. 주짓수할 때도 쇠사슬로 잡아매듯 상대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스승은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웃었으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스승과 제자밖에 없는 동굴에서 새삼 이름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스승님, 이제 저를 내보낼 생각이십니까?”

스승은 놀란 토끼눈을 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비록 네 수준이 여기 말로 하산할 정도는 아니라지만, 오늘처럼 설핏만 건드려도 성을 내는 건강한 장정이 되었는데 이 동굴에 계속 붙어 있을 셈이냐? 이제 마을에도 나가보고 여자도 알면서 사람답게 살아야 할 것 아니냐.”

나는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쉽게 죽이기(Easy Kill)>를 당했을 때보다 더 숨통이 답답하고 막막했다. 내가 무뚝뚝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자 스승은 아연한듯 바짝 다가왔다.

“쇄야. 그래, 예전부터 이 이름을 내 속으로 많이도 불렀었다. 쇄야, 내 제자야. 왜 그러느냐? 이 젊은 나이에 늙어가는 스승 수발 들며 의리 세울 필요 없다. 내 주짓수의 명맥을 이어주는 것만 해도 너는 도리를 다하고 있는 게다. 이 스승과 함께 가시버시로 늙어 죽기라도 할 작정이란 말이냐?”

대답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러면 안됩니까?”

어색한 침묵이 지렁이처럼 끊길 듯 말 듯 길게 늘어졌다. 나는 뱉어놓은 내 말에 아연하여 입을 다물었다. 하물며 스승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참만에야 스승은 한숨을 토하듯 말했다.

“열부 났구나. 쇄야. 너는 네 스승이 왜 이 멀고 궁벽한 동방 땅으로 흘러들어왔는지 궁금하지 않더냐?”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십여 년을 스승과 함께 지냈음에도 그 연유를 몰랐다. 궁금했지만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 때의 나는 빈 죽그릇 앞에서 스승에게 거두어달라 조바심치던 어린 소년이었다. 달그림자보다 더 어둡고 서글픈 스승의 옆얼굴에서 묻어두고픈 과거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기에 묻고 싶지 않았다. 스승은 혀끝으로 말을 어렵고 힘들게 밀어내고 있었다. 입술 끝에 매달린 스승의 말이 무거워 위태로웠다.


“네 스승은 파문자다. 계를 위반하여 쫓겨났단 말이다. 내 스승을 함부로 마음에 품었다 불경죄를 범하고 쫓겨났는데 네가 다시 그 일을 되돌리려 드는구나. 쇄야, 쇠사슬 같은 아이야. 네가 이름을 받자마자 이름값을 하느냐.” 스승은 슬프고 처연하게 웃었다.


“사랑을 아는 건 좋은 일이다. 쇄야. 사람이 길게 살든 짧게 살든 그처럼 자기 산 흔적을 남겨놓는 일이 없다. 사랑은 모든 것을 남김없이 태우는 불이고, 아련하게 쓸어적시는 물이다. 차라리 손발 관절을 전부 빼서라도 내 품에 꽁꽁 넣어 잠그고픈 그 마음이 주짓수의 공방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어차피 모든 무술이 다 그런 것 아니냐. 상대의 뜻과 상관없이 오로지 제 뜻만 지키겠다는 의지 아니더냐. 그것이 사랑과 과연 다르더냐.”

“스승님……….”

“너도 나를 그리 대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스승님, 그것이…….”

돌연 소매를 떨치면서 나를 쳐다보는 스승의 눈매가 전에 없이 차가웠다.


“쇄야, 착각하지 말거라. 네가 내 밑에서 십 년을 넘게 수련하여 기술이 엄밀하다 자신하는 모양이구나. 아닌게 아니라 네 기술은 검은띠를 받기에 모자람이 없을만하다. 그러나 쇄야, 너의 주짓수는 쌀뜨물처럼 밍밍하고 흐리단다. 무술이 가져야할 절박함과 뜨거움이 없고, 매 순간을 무겁게 생각하는 진중함이 없다. 너는 언제나 머리로 생각한 뒤 몸을 움직여 싸우려 한다. 그 또한 주짓수이기는 하되 내가 가르친 주짓수는 아니다. 머리로 생각한 뒤 몸이 뒤따르는 사랑 또한 전혀 사랑이 아니듯 말이다.”


과거를 떠올리는 스승의 말은 장황하고 어지럽고 어려웠다. 나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스승에게 받은 내 이름처럼 무쇠 고리를 길게 엮은 사슬에 매인 마냥 입을 다물었다.

스승은 정좌하며 물었다. “쇄야, 다시 묻겠다. 네가 나를 그리 대하고 싶으냐. 정녕 네가 나를 그리 대할 마음이 있느냐?”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첫 몽정을 할 때부터 저는 스승님을 스승님으로 대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을 품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드러냄이다. 할 수 있겠느냐. 네 마음이 얼마나 뜨겁고 진중하고 무거운지 온 몸으로 보여줄 수 있겠냐고 묻는 것이다.”

더 이상 말이 필요없었다. 스승은 이미 몸을 반쯤 눕히며 열린 막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스승의 긴 다리를 훌쩍 넘으며 나는 산에 오르듯 자세를 잡았다. 그 날 밤 스승은 나에게 거대하고 장대한 산맥이었다.


스승은 요염하고 매정하고 날카로웠다. 스승의 호수 같은 눈망울 주위로 꽃처럼 핀 속눈썹이 몇 올인지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가까이 갔음에도 나는 스승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없었다. 스승은 멀리서도 가까웠고, 가까이서도 멀었다. 내 온 몸을 옭아매면서도 힘을 많이 쓰지 않았다. 다리를 한번 뒤챌 때 내 중심과 마음은 같이 무너지고 쓰러졌다. 팔을 한 번 뻗을 때 나는 더 이상 들이밀지 못하고 꺾이고 튕겼다. 몇 번이고 스승이 공격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 때마다 스승은 호흡을 길게 잡으며 나를 풀어주었다. 나는 이미 스승의 덫에 치어 애달피 발버둥치는 한 마리 작은 짐승이었다. 스승은 일부러 소리 높여 키득거리며 내 옷을 한올 한올 벗겨 드러냈다.
“쇄야. 네가 과연 장정이 되었구나. 알몸으로 덤비면 이 스승이 과연 허물어질 것 같구나. 좋은 속셈이다. 암, 좋구나.”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분통을 터뜨리며 급하게 덤벼들었다. 폭풍처럼 몰아쳐 될 일이 아니었다. 내 생각대로만 몰아쳐 갈수록 스승은 더욱 여유로워졌다. 내 공세를 몸 바깥으로 흘려내어 헛힘을 빼게 만들었다. 스스로 지쳐 내 숨결이 바짝 말라갈 때 스승은 비로소 내 뒤를 잡았다. 내가 미처 볼 수 없는 공간에서 손길이 그림자처럼 뻗쳐왔다. 아차 하는 사이에 이미 숨통은 조이고 목뼈는 부러질듯 꺾였다. 손바닥을 두드려 항복하지 않으면 죽는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공격이었다. 그러나 손을 휘저으면서도 결코 항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설픈 남자의 오기를 나 역시 마음껏 부리고 있었다.


그 때 내 손에 무엇인가 물큰하고 닿았다.


낮의 내가 당황하여 몸을 빼었던 것처럼 스승은 스스로 다 잡은 승기를 버렸다. 재빨리 뒤로 물러나는 모색 끝에 당황과 당혹이 토끼똥처럼 떨어졌다. 나는 화닥닥 놀라 스승을 바라보았다. 무릎과 무릎 사이. 스승에게는 깊고 촉촉하고 뜨겁고 다소 허전해야할 그 곳. 그 곳에 너무나 충실하게 성을 내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스승에게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나는 호기심보다 황당함으로 스승에게 덤벼들었다. 이미 반쯤 넋이 나간 스승의 손발은 어지럽고 힘이 없었다. 그 순간 나는 남자였고 스승은 여자였다. 허물어진 스승의 도복 허리띠를 빼내자 그토록 원했던 건강한 몸매가 폭발하듯 훤히 밀려나왔다. 그러나 바지를 벗기고 난 뒤에야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주 잠깐 사이에 힘을 잃었지만,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것은 나와 똑같이 매우 우람하고 튼튼한 남성이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아주 기묘하고 희한한 공감대가 하나 더 있는 셈이었다. 나는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풍만하고 단단해보이는 스승의 가슴과 다리 사이를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도 어이없이 내 다리 사이는 뿌듯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나는 스승의 가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십 년 전, 어렸을적의 감촉 그대로였다. 손 안에서 터질듯이 맴도는 이물감이 분명히 있었다. 아무리 동굴에서 스승과 단둘이 십 년을 지냈다 해도 스승의 가슴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스승은 앙탈부리듯 나를 떼밀었다.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거칠게 밀려나왔다.


“스승님, 제자는 다 이해합니다. 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본디 남자셨다고!”

그 순간 스승도 처음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대꾸했다.

“이 망할 녀석아, 누가 그러더냐! 나는 원래 태어날 때부터 이랬다! Shemale, 어지자지였단 말이다!”

“……………예?”


“내가 선택한 줄 알았더냐? 그랬으면 이리 억울하지나 않았겠지. 나는 태어날 때부터 뒤죽박죽이었다. 도대체 남잔지 여잔지 모르는 몸이란 말이다!”

“하, 하지만 가, 가, 가, 가슴이…… 그러니까 그게……….”

“내 고향에서 괴물로 쫓겨나 주짓수를 배우기 전까지 몸을 팔아야 했다. 세상에 벼라별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이런 몸도 신기하다고 돈을 주고 자려는 것들이 있다. 그 때 포주가 내 가슴에 뭘 쑤셔넣었는지 지금도 모른다. 주짓수를 할 때에도 함께 운동하던 이를 마음에 두었다가 도복이 벗겨져서 남자도 여자도 아닌 괴물이라고 욕을 먹으며 쫓겨나야 했구나. 쇄야, 내 주짓수는 그러했다. 내 삶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오직 주짓수뿐이었는데 그조차도 빼앗기는 기분을 너는 아느냐. 이런 몸으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닌데, 오로지 그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은 도장에서 땀내 섞으며 서로 엉키는 그 순간뿐이라 내 모든 것을 다 줄 것처럼, 그의 모든 것을 다 줄 것처럼 덤벼야 했던 그 때마저 빼앗기는 그 심정을 너는 아느냐. 그 마음과 감정에 비하면 주짓수의 검은띠 따위는 얼마나 무가치한 것이겠느냐.”


넋두리를 쏟아놓는 스승의 눈이 이미 비어 허망했다. 뒤늦게서야 달빛이 우수수 쏟아져 들어와 스승의 몸을 씻겼다. 스승의 산봉우리 같은 콧날을 타고 꽃망울 같은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스승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듯이 몸을 드러내며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쇄야, 내가 건넨 이름을 받은 내 제자야. 이제 너의 선택이다. 이제 이 몸을 보니 네 마음이 식었느냐? 이 몸을 보니 네 마음이 전과는 다르더냐? 그 것이 너의 사랑이구나. 상대가 예상을 벗어나면 손발을 접는 것이 너의 주짓수겠구나.”

아니었다.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내 몸은 이미 스승, 아니, 그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그녀만큼이나 넋이 나간 얼굴로 다가오자 부지불식간에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사이의 어둠이 흔들렸다. 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쓰윽 닦아내고는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잠시 기다리게 했다. 그리고 등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가지런히 뒤로 묶었다. 땀과 습기로 곱슬곱슬해진 머리끝을 말아올리면서 새삼스레 “내일은 비가 오겠구나.” 라고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스승과 제자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로 넘어가는 그 순간을 새기는 듯한 한 마디였다. 동굴 천장에서 새어나온 달빛이 우리보다 먼저 누워 있었다.


흐릿한 동굴 안에서 그녀의 몸은 하얀 선을 그렸다. 더듬거리며 장님놀이를 하듯 서로의 몸에 입술과 손길을 미끄러뜨리다가 어둠에 눈이 익을 무렵에야 비로소 서로 엉켜 쓰러졌다. 그녀의 신음소리마다 짙은 그늘이 져 가슴 속에 내려앉는 무게감이 있었다. 내가 귓불을 입에 물 때 그녀는 숨을 터뜨리며 묵직한 목소리로 애달픈 신음을 끊어냈다. 가슴을 움켜쥘때마다 가득 느껴지는 이물감조차 황홀했다. 가끔 담뱃잎을 질겅이는 그녀의 입 안은 까슬까슬한 가시나무 맛이 났다. 혀는 거북이처럼 천천히 들어와 내 입의 모든 것을 기억하듯 나른하게 오래 머물렀다.


그녀의 다리 사이는 여전히 수줍어서 쉽게 열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상처받은 기억을 간직한 그녀의 몸은 아주 천천히 스며들듯 달래줘야 했다. 나는 주짓수를 하듯 그녀의 정강이 사이를 열고, 나와 같은 공감대를 가진 그 것을 입 안에 가득 물었다. 그녀의 신음소리를 등 뒤로 흘리며 나는 참을 수 없이 묘한 기분을 느꼈다. 나에게 속해 있는 물건이 그녀에게도 있었고, 하물며 타인의 몸에서 내가 맛을 보는 그 순간은 몹시 낯설었다. 내 것이 이런 질감과 무게와 느낌을 가진 것이었던가. 그녀의 몸 앞에서 나는 나를 보며 전율했다.


비로소 그녀가 파들파들 떨며 다리를 벌렸다. 그녀의 남성과 항문 사이에 비로소 그녀가 오래토록 숨겨둔 여성이 보였다. 깊이 외로웠던 그녀의 여성은 끈끈한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원해왔던 그녀의 몸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축축하고 뜨거운 그 안에서 내가 위안받기를 원했고, 그녀 또한 위로되기를 원했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서로를 원했다. 연결할 수 있는 모든 곳으로 서로를 잡아매고 소통하며 신음했다.


늘씬한 키를 가진 그녀의 동그란 어깨는 놀랍게도 내 작은 품에 쏙 들어왔다. 그녀는 주짓수를 하듯 긴 다리로 내 짧은 다리를 휘어감은 채 몸을 옹송그렸다. 둥글게 선을 긋는 등 위로 바람이 무늬를 그렸다. 우리는 벗은 채 어둠 속에서 서로를 어루만지며 오랫동안 여운을 즐겼다. 해뜨는 새벽을 안타까워하며 함께 고개를 모으고 잠들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다음 날 나는 홀로 일어나 멍했다. 그녀 아닌 스승은 빈 자리에 도복과 허리띠를 두고 갔다. 그녀처럼 검게 물든 흑띠였다. 한 사람의 주짓떼로이자 남자가 되었다는 상징이었다.


스승의 말처럼 동굴 밖에는 때아닌 가랑비가 내려앉고 있었다. 스승의 발자국은 이미 지워져 보이지 않았다. 산 아래 물안개 속을 걷고 있을 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보다, 스승일지 그녀일지가 훨씬 더 많이 궁금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그녀를 찾아 방랑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그녀는 나와 같은 시공간을 버리기로 작정한 사람인 듯 안개처럼 녹아 없어졌다. 아무리 누군가의 몸을 찾아 깊이 탐해도 그녀의 몸과 같을 수는 없었다. 사랑을 지독히도 갈망하는 외로운 몸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군가의 몸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오히려 춥도록 외로웠다.



#. 다시, 은려


나는 기사 원고를 꼼꼼하게 살폈다. 나무랄 데가 없었다. 국장을 졸라 보증까지 서가며 거액을 지출한 보람이 있었다. 내 문장력을 스스로 깎아내릴 생각은 물론 없다. 그러나 워낙에 소재가 좋았다. 호쿠사이로 출항하기 전 금덩이를 챙겨받은 눈물손은 심지어 자신의 본명까지 다 밝히며 소설 같은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설사 진짜 소설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이 기사로 <예스, 반도 뉴스!>의 판매 실적은 오를 것이고, 덧붙여 내 지위도 꽤 올라갈 듯해보였다. 나는 내심 국장을 흘끗거리며 콧대를 세웠다. 국장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막혔던 속이 뚫리듯 트였다.


그 때 갑자기 열린 창문 사이로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전국 각지의 기자들이 보내는 송고용 전서구였다. 급하게 날아와 무리한 탓인지 전서구는 내려앉자마자 국장의 어깨에 희멀건 물똥을 갈겼다. 그러나 전서구의 다리에 묶인 종이쪽지를 풀어본 국장은 그 종이를 구겨내던지며 외쳤다. 다급하게 쏟아지는 그의 발음은 그날따라 더욱 엉망이었다.


“허리(Hurry) 허리 허리 업(Up)! 평초판서가 눈물쏘온 잡으려 합네다! 키자들 팔리팔리 캅니다! 라잇 나우(Right now)! ASAP!"


허리뼈가 부러질 듯 수선을 떠는 국장 앞에서 나는 심드렁했다. 어차피 필요한 건 다 얻은 마당에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장의 서슬에 일단 자전차에 몸을 실었다. 다른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비슷한 난리가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그 무서운 눈물손이 쉽게 잡히진 않겠지만 상대는 병조판서였다. 어려운 싸움 중에 깊게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게 된다면 내 기사가 가진 가치는 훨씬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내 스스로에게 약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출세하고파서 기자가 되었던가? 내가 그랬었나?


호쿠사이로 향하는 어진내(仁川) 항구 앞에서 눈물손은 병조판서가 동원한 군졸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병조판서라 한들 지독한 월권 행위였다. 일반 상해 사건에 대한 수사나 체포 권한이 없는 군졸들이 눈물손을 겁박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은 나조차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병조판서가 동원한 군졸들은 애초에 눈물손을 겁박할 능력도 용기도 없었다. 몇몇 호방한 장수들의 손발 관절이 모조리 탈구되어 짠내나는 어진내 뻘밭에 개처럼 쓰러져 있게 되자 병조판서의 호령도 권위도 같이 쓰러졌다. 몇몇 솜씨 좋은 궁수들이 화살을 쏘아보기도 했지만 변덕스러운 바닷바람이 그들을 돕지 않았다. 맞바람을 뚫느라 힘이 떨어진 화살의 꼬리끝을 잡아채는 일은 눈물손에게 기무라를 상대하기보다 훨씬 쉬운 일처럼 보였다. 손에 잡힌 화살을 뚝뚝 부러뜨리며 눈물손은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올렸고 병조판서는 씨근덕거리며 분을 참지 못했다.


“네 이 놈! 네 놈이 내 딸을 농락하고도 이 땅을 멀쩡히 살아 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마침내 병조판서는 품 안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냈다. 탄환을 넣는 구멍이 여섯 개라 육혈포(六穴砲)라고도 불리우는 색목인들의 리볼버(Revolver)였다. 아카치안들뿐 아니라 색목인들의 대륙 전역에서 결투용으로 쓰이는 개인 화기라 눈에 익었다. 크기가 작고 가벼운데다 품격 있는 모양새에 비해 화력과 적중율이 좋아 많은 장군들이 손꼽는 총기이기도 했다. 이제 겨우 심지에 불을 당겨 쏘는 화승총 방식의 불줄통에 적응하고 있는 공화국의 무기 체제로 보자면 파격적인 신병기였다. 스승을 찾아 오랫동안 천하를 주유해온 눈물손이 육혈포를 몰라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병조판서는 엄지손가락으로 육혈포의 실린더를 뒤로 젖혔다. 짤깍 하는 쇳소리가 천둥보다 더 크게 들렸다. 발포하는 순간 눈물손이 죽어도 문제였고, 죽지 않아도 문제일 터였다. 그걸 아는 병조판서의 손가락은 방아쇠를 쉽게 당기지 못했다. 그의 손끝에 남은 인생의 무게가 모두 걸려 있었다. 딸의 원수를 갚는 아비로서의 도리와 병조판서까지 올라선 남자로서의 야망이 그의 손가락을 천근만근 붙들어두고 있었다.


눈물손은 하품을 했다.


“좋겠소. 여유가 많아서. 쏘려면 빨리 쏘든가. 사랑하기도 바쁜 삶에 왜들 그리도 잡생각들은 많은지.”

“………………………………사랑?”


한참 만에야 병조판서의 힘겹게 뱉어낸 두 글자는 차라리 목에 오랫동안 걸려 있다 빼낸 생선가시 같았다. 그나마 어마어마한 금덩이를 넘겨주고 기사를 써낸 나만이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당혹스러워 그저 눈물손만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백주대낮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손발을 뽑아서 앞뒤로 더럽혀대는 그 짓거리가 사랑이라고?”

눈물손은 가슴을 펴며 당당하게 말했다.


“나한테는 그렇소. 그 것은 내 방식의 사랑이오. 나는 외롭고 외로워서 누구에게라도 위안받고 싶었소. 그러나 나를 위안해줄 사람이 없기에 내가 요구했을 뿐이오. 물론 상대에게는 매번 끔찍한 폭력일 거라는 사실도 잘 알지요. 하지만 나는 그들의 안위를 배려해줄 정도로 여유롭지 못할 따름이오. 굶주린 거지가 먹을 것 앞에 도리를 찾겠소? 당신네들 높은 벼슬아치가 평생 제 한 몸의 안위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괴롭히는 것보다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몸 한 번 덮치고 마는 내가 훨씬 낫다고 생각하오만은.”


물론 궤변이었다. 그러나 공화국 이전의 역사로부터 고금동서 천하지상에 눈물손과 같은 짓을 저지른 이들은 많았다. 다만 눈물손처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직접 힘을 쓰기보다 은밀한 곳에서 금전과 권력을 빌어 덮쳤다는 사실만이 다를 뿐이었다. 뻔뻔스러울만치 당당하고 솔직한 눈물손 앞에서 병조판서는 육혈포를 든 손도 모자라 수염 끝까지 파들파들 떨었다. 그 역시도 그러한 음험한 범죄 행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고관대작이었다. 눈물손은 비웃었다.


“색목인들이 믿는 신이 인간으로 화하여 천하를 주유하던 중, 음란하다 끌려나와 매맞는 창녀를 보았다고 했소. 거기 모인 이들이 창녀의 죄를 탓하며 돌로 쳐죽이려 할 때 그는 그 사이를 가로막고 서며 이 중 죄 없는 자만이 돌을 들어 치라 하였소. 아무도 돌을 들지 못했고 그 창녀는 무사히 살아났다더군. 만일 당신이 죄가 없다면 주저없이 방아쇠를 당기시오.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면 인과응보라고 생각하오. 병조판서. 당신의 죄과를 딸자식이 대신 받은거요. 참으로 효녀 중의 효녀로군. 세상이 바뀌어도 자식된 도리는 금석처럼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


그 역시 궤변이었다. 눈물손은 뱀처럼 혀를 놀리며 서역과 동방의 귀한 가르침을 제멋대로 인용하여 자신을 치장하고 있었다. 그는 무공뿐 아니라 말과 글로서도 능히 자신을 지키고 상대를 꺾을 수 있는 이였다. 그러한 궤변에 스스로 찔려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병조판서가 차라리 딱했다. 공화국에 정치를 한답시고 나선 이들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눈물손은 빙긋이 웃으며 병조판서를 바라보았다. 내가 알기로 병조판서 이경윤은 반도 왕국의 방계 왕족 출신이기도 했다. 젊었을 적부터 왕가의 무인으로서 걸출한 전공을 세워왔던 그는 총기에도 관심이 많아 급변하는 병기의 대세를 비교적 빨리 파악하고 적응한 인물에 속했다. 그가 마음을 먹고자 한다면 성능 좋은 육혈포로 눈물손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제아무리 눈물손이라고 해도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었다. 쇳덩이를 몸에 품고 살아날리가 없었다.


그러나 병조판서는 끝내 육혈포를 떨구며 고개를 숙였다. 육혈포를 떨구는 그의 손목으로 눈물이 떨어져 흘렀다. 역시 눈물손이었다. 그는 이 땅을 떠나는 날까지 반도 왕국을 대표하는 무인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눈물을 쏟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더 이상 그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나에게 날카로운 미소를 남겨둔 채 배 위로 올랐다. 얄궂게도 배의 이름은 아오이(靑)였다. 눈물손의 앞날은 그 배의 이름처럼 여천히 만경창파 망망대해일 것처럼 보였다.


아닌게 아니라 내 기사는 날개돋친 듯 잘 팔렸다. 어떤 색목인이 그 날 잔혹하게 미소짓는 눈물손의 사진을 나에게 비싼 값에 팔았지만, 그 사진을 넣은 탓에 오히려 손해는 벌충하고도 남았다.


나는 반도를 대표하는 여성 언론인이 되겠다는 꿈을 젊은 나이에 이루었다. 그러나 평생토록 어딘가 몹시 찜찜하고 무거운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조차도 그 이유는 몰랐다.


*           *           *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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