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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육아 스트레스

2012.04.23 01:2304.23

낙영은 터벅터벅 슬리퍼를 끌며 아파트 분리 수거장 으로 향했다. 어제 도시락으로 볶음밥을 쌀 때 쓴 참치 캔, 양파망, 아파트 주간 정보지 몇 권, 그리고 저녁에 먹은 치킨 포장지와 맥주 캔들. 아내가 아기를 데리고 잠시 친정에 간 사이 몰래 누린 호사이다. 새벽에 하는 프리미어 리그 클래식 더비를 보면서 양념 반 프라이드 반. 여기에 화룡 정점은 평소에 아내가 가격이 두 배라며 매정하게 장바구니에서 빼놓는 기네스 드리프트다. 프리미어 리그를 보면서 카스 라이트라니. 안될 말이지, 안될 말이야. 그것마저도 요새는 살이 올랐다며 맥주 금지령을 내리셨다. 아무리 애를 낳은 후라고 하지만, 너는 거울도 안보고 나한테 살쪘다는 말이 나오냐고 말해 주고 싶었다. 물론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낙영은 그렇게 까지 간 큰 남자는 아니다. 아니, 요새는 간이 큰 것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게 중요하다. 돈이 많아 지면 간을 크게 만드는 약을 살 수 있을 테니까.
신혼 2년 차인 낙영은 이제 갓 10개월 된 딸이 있다. 아빠가 되기 전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라는 말이 어떤 것인지 몰랐다. 팔불출, 팔불출, 못났다, 못났다 하며 초보 아빠들을 흉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결혼도 했고, 전세금 대출 이자가 많이 남아 있지만 직장은 그나마 안정적인 편이고, 눈에 넣고 싶을 만큼 이쁜 딸이 있다. 그런데, 그런데 낙영은 왜 이렇게 허전한지 모르겠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아니 결혼을 하고 나서는 그 누구도 온전한 낙영만의 시간을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낙영 자신 조차도. 엄마의 ‘아들’이라는 포지션에서 '남편'으로 전직을 하며 할 일과 책임은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만 갔다. 할일, 책임, 할일, 책임. 할일 다음에 책임이 오고 책임을 지면 할 일을 얹어 놓는 나날들. 그 속에서 그나마 꿀맛 같던 아내와의 잠자리는 임신 후부터 지금까지 OFF. 폐업 상태. 낙영은 24시간 연중 무휴 편의점 처럼 언제나 준비 ok인데 아내는 폐업 상태. 게다가 호리호리하고 늘씬한 아내의 몸매가 좋아서 결혼 했는데 - 오직 '그것'때문에 결혼 했다라는 말은 분명 아니다. 적어도 낙영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 임신 후 아내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덩치'가 되어 버렸다. 아이를 낳으면서부터 낙영의 책임과 할 일이 더더욱 늘어난 것은 말할 필요 조차 없다. 물론 낙영은 고급 교육을 마친 21세기의 도시 남자이기 때문에, 아내의 입장도 백 번 이해한다. 그래, 열 달 동안 아가와 한 몸으로 생활하느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사회적 환경들을 박탈당한 체로 집에 묶여 있느라. '딸'에서 '아내'로, '아내'에서 '엄마'의 포지션으로 전직을 하느라. 여린 여자의 몸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공황 상태 일 것을 이해한다, 이해해. 그렇지만 낙영도 사람인 지라, 왜 남자는 밖에서도 일하고 안에서도 일해야 하는지, 이거 내가 아빠이자 남편이자 가장이라는 포지션이 맞는지 의아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낙영의 생각엔, 이 포지션에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은 아마 '집사'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 이렇게 몇 달에 한번씩 아내가 장모님께 sos를 치고 휴가 차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서 하루 이틀  있다 올 때면 꿀맛 같은 자유를 누리지만, 이틀은 너무 짧다. 아, 내일 하루만 더 시간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친구들을 불러내 게임방에서 밤새 게임을 할 텐데. 그냥 하루 이틀 게임하고 술 마시고.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소소한 것들이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운 지 모르겠다. 분리 수거 쓰레기통에 다다른 낙영은 가져온 쓰레기들을 차례차례 해당하는 곳에 던져 넣었다. 양파 망...이건 어디다가 넣어야 되냐. 분리 수거는 할 때마다 고민이 된다. 항상 그렇듯이 낙영은 폐 신문지가 쌓여 있는 더미 사이에다가 쑤셔 넣어 처리했다. 신문지 더미 옆에 버려 진 오래된 잡지 묶음 위에 걸터 앉은 낙영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내일이면 담배도 또 끝이구나. 아직 반갑이나 남았는데 이걸 버릴 수도 없고. 어디다가 숨기지?'

요즘 아내들은 자신의 남편이 아빠가 되는 순간 청교도가 되는 줄 안다. 집에서 금주와 금연은 당연하다. 낙영은 담배 숨길 곳을 생각하는 자기 모습이 처량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탱그랑!

상념에 잠겨 인기척을 전혀 못 느꼈던 낙영은 조금 놀라 옆을 쳐다봤다. '캔' 분리수거 통에 여러 개의 캔을 버리고 있는 여자의 옆모습이 보였다. 적당한 키에 질끈 묶어 올린 머리. 날씬한 허리에 꽃무늬 에이프런이 가지런 했다. 조금 빈약하기는 하지만, 앙증맞고 날렵한 구석이 있는 몸매였다.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스키니 진에 하얀 난방이 잘 어울릴 몸매. 낙영이 좋아하는 몸매였다.

'아, 우리 마누라도 저럴때가 있었는데...날씬하면서도 품에 딱 들어오겠구먼. 분리 수거도 직접하러 나오고..아냐 남편이 잠깐 어디 갔나 보지 뭐...요새 그런 여자가 어디 있냐. 근데 캔을 많이도 버리는 구만. 요리를 못해서 주로 통조림으로 반찬 만드나 봐? 하긴, 우리 와이프도 처음엔 그랬지..결혼 초기에 참치란 참치는 종류별로 다 먹어 봤으니까. 결혼이란 항해를 시작하는데 원양어선을 빌려 탄 기분이었지.'

곁눈질로 훔쳐보며 낙영은 이런 저런 상념에 빠졌고, 자연히 그 상상의 끝에는 나신으로 예쁜 미소를 짓고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의 모습을 그렸다.

'뭐야, 이거. 내가 굶긴 굶었나 보다. 이그, 첨 보는 동네 주민한테 무슨 상상을 들이대는 거야. 큭큭. 하지만 뭐...상상은 자유 아니겠냐고. 흐흐..'

그녀가 쓰레기를 다 비우고 갑자기 낙영을 돌아보았다. 혼자만의 상상에 킥킥대던 낙영은 눈이 마주치자 괜스레 머쓱해 져 고개를 돌리다가 아차 싶어 서둘러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아아, 왜 쳐다보나 했더니..여기는 금연 구역이지. 사람 없을 때 한 대만 빨리 피고 간다는 게 그만..괜한 상상 때문에. 빨리 사라져야겠다. 괜한 잔소리 듣기 전에. 아니, 잔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소문이라도 나면..'

"저기요..."

'아차, 한발 늦었네. 젠장.'

"죄송합니다. 금연 구역이라는걸 제가 깜빡 하고..."

"담배 한 대만 빌릴 수 있을까요?"

"..네?"

"저기...담배 한 대만 빌려 주셨으면 해서...담에 만나면 드릴께요."

"아..아, 네. 그럼요."

낙영은 잠시 당황 했지만 서둘러 세븐스타를 꺼내서 그녀에게 건 냈다. 담배를 받아 든 그녀가 필터의 로고를 확인하고 배시시 웃었다. 이런, 세븐스타를 좋아하는 건가? 낙영이 대학교 때부터 15년간 피어 온 담배였다. 그 당시 과외를 하던 대학생 누나가 피던. 수능이 끝나고 저녁을 사준 그 누나는 공원에서 세븐스타를 꺼내 물었었고, 낙영에게도 한 개비를 건네 주었다. 꼴사납게 기침을 했었지만, 낙영은 그날 이후로 남대문에서 세븐스타를 사서 담배를 배웠다. 세븐스타를 좋아하는 여자는, 여간 해선 찾기 어렵다. 유명한 순정 만화에 나오는 숏컷트의 락 보컬리스트 그녀처럼. 그녀는 잠시 그렇게 필터를 바라보다 미소를 띈 체로 고개를 들어 낙영의 눈을 마주 보았다.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의 표정과도 같은. 동네 주민이자 아줌마라는 포지션을 가진 자에게선 볼 수 없는 미소였다. 낙영은 작은 감동을 느꼈다.

'와, 웃으니까, 웃으니까 완전 귀엽다.'

그런 낙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낙영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한 체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기..."

"..네, 네?"

"불도 좀....."

"아하, 아, 하하하.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걸까. 알아서 불을 꺼내 주지 못한 눈치 없음? 아니, 그보다는 동네 주민에게 느낀 작은 설레임에 대한 송구스러움 일 것이다. 낙영은 지포 라이터를 꺼내 팅! 하는 경쾌한 지포 특유의 소리와 함께 불을 그녀가 문 담배에 가까이 다가갔다. 담배를 물고 있는 앙 다문 입술도 귀여웠다. 담배에 불을 붙이느라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목덜미는. 새하얗기만 했다. 그리고 강한 섬유 유연제 향기. 향기? 흠. 섬유 유연제를 좀 과도하게 쓰는 것 같다. 진하게 향수를 뿌린 여자가 지나갔을 때 느껴 지는 거북하면서도 쳐다보게 만드는 기분. 섬유 유연제 생각을 하자 갑자기 낙영은 현실로 돌아오는 느낌이었고, 서둘러 눈길을 그녀의 목덜미에서 거두었다.

"후...."

불을 붙인 그녀는 분리 수거 장 끝의 어두운 구석으로 가더니 쭈그리고 앉아 맛있게 한 모금을 뱉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안 했으나, 낙영은 그 옆에서 같이 담배 한 대를 더 피고 싶다 라는 강력한 욕구에 휩싸였다. 그냥 담배 한 대 같이 피는 것뿐이다. 뭐 더 하자는 것도 아니고. 저거 내가 준 담배 아닌가. 담배 빌려 준 사람이 같이 담배 한 대 정도 필 수 있는 것도 아닌가. 하지만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분리 수거장이고, 오늘이 분리 수거 하는 목요일은 아니지만, 아줌마와 아저씨...아니, 유부녀와 유부남이 어두운 분리 수거장 구석에 앉아, 그것도 정답게, 담배를 피고 있는 풍경은 분명 아줌마들의 좋은 화제 거리가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기분에 있어서는 항상 안전한 쪽을 택하는 낙영이다. 낙영의 운전 철학은 '갈까, 말까 고민 되는 상황에서는 절대로 가지 말 것' 이었다. 하지만 아까의 작은 감동이 낙영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같이 한 대 피세요"

그녀가 조용히 아까의 감동을 입에 머금고 낙영에게 말했다. 낙영은 그 한마디에 면죄부를 얻었다. 만일 누군가 보게 된다 해도, 그녀가 먼저 권한 것 아니었나. 담배를 달라고 한 것도 그녀였고, 같이 피자고 한 건 그녀니까. 물론 상상을 한 건 낙영이 먼저지만.  

"아, 그럼 한 대만 피고 일어나죠. 여자분 혼자 피시는 것도 좀 그렇고..."

여기가 뒷골목 할렘가도 아니고. 괜한 멋적음에 낙영의 입에서 쓸데 없는 말들이 튀어 나왔다. 낙영은 그녀의 옆에 같은 포즈 - 팔장을 끼고 담배를 든 손을 얼굴 가까이에 들고 있는- 로 쭈그리고 앉아 불을 붙였다.  

최악의 상황에 둘러 댈 - '아, 나는 별로 피고 싶지 않았는데 억지로 권하는 바람에 잠깐 같이 피워 준 것뿐이야..정말이라고...' - 변명 거리를 속으로 한두 번 읊조리고 있는 동안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세븐스타를 처음 사서 가져온 거에요. 처음 보는 양담배, 그것도 일본 담배니까. 너무 신기했죠. "

"아, 그랬군요."

"그런데..어떤 애가 이 담배 초콜릿 맛이 난다는 거에요, 필터에서."

"초콜릿 맛이요? 그런 담배가 있긴 하다만...세븐스타는 아닐 텐데요."

"네, 그렇죠. 그런데 우리는 그 말을 철썩 같이 믿었어요. 다들 한 대씩 펴 보고 어머어머, 진짜다, 얘. 이거 되게 신기해. 담배에서 초코렛 맛이 나! 하면서 호들갑 떨었었죠."

"흐음..왜 그랬죠?"

"차콜필터charcoal filter를 초코렛필터chocolate filter로 읽었거든요!"

"푸하핫!!"

진지하게 듣고 있던 낙영은 자기도 모르게 큰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우리들 진짜 무식했었나 봐요"

"쿠하하, 혹시, 혹시, 그거 신기하다고 다른 반 애가 88 한 갑이랑 세븐스타 한 개비랑 바꾸자고 막 그러지 않았어요? 왠지 그랬을 거 같은데! 푸하하하."

"어머머, 어떻게 알았어요? 근데 그때는 이미 전 차콜 필터라는 걸 알아 버린 후라 이거 바꿔 줄 수도 없고 안 바꿔 줄 수도 없고...하하하하"

둘은 담배가 다 타 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웃어 댔다. 낙영은 또 다른 감동을 느꼈다. 처음 만난 남녀, 아니 꼭 남녀가 아니더라도, 처음 만난 '어른'들이 자신의 방어 기제를 먼저 제거하고 자신의 '바보 같음을 드러내서 웃긴다'라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호감의 표시였다. 게다가 남여의 입장에서 여자 쪽이라면은 그건 더더욱 큰 의미를 가진다. 여자들은 항상 자기를 웃겨 달라고만 하지, 남자를 웃기고 싶어하지는 않는 동물이니까. 꼭 호감의 표시가 아니더라도, 초면의 대화를 유머로 풀어 나가는 센스는 아무 여자나 갖는 게 아니니까. 낙영은 이 여자의 남자가 부러워 졌다. 동시에 회의도 들었다. 이런 센스를 가진 여자라도, 애들을 한 둘 낳다 보면 와이프와 비슷해 지는 게 아닐까. 왜 여자들은 아이를 얻는 동시에 여자로서의 자신을 버리는 걸까. 씁쓸한 생각과 함께 낙영은 물었다.

"아직 신혼이신가 봐요? 그러고 보니 처음 뵙는 거 같은데.."

"차암, 이 많은 동네 사람을 어떻게 알아보세요? 후후."

"하하, 그렇긴 하죠, 다 알아 볼 수는 없죠."

"저 신혼은 아니에요. 애들도 많아요."

애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많아? 방금 전의 생각과 판이하게 다른 그녀의 대답에 낙영은 감탄했다. 모든 여자가 다 그런 건 아니구나. 그녀는 힘든 가사일과 육아 스트레스 에서도 자신을 온전히 지켜 냈다. 재치 있는 입담. 보기 좋은 몸매 둘 다. 낙영은 그녀의 남편이 더더욱 부러워 졌다.    

"그럼 남편 분께서는 늦게 들어오시나 봐요? 분리 수거도 직접 하러 오시고.."

"아, 저 남편은 없어요."

"...죄송합니다..그러니까..., 아니, 제가 실례했네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더 뜻밖이었던 것은 하마터면 정확히 없다라는 게 무슨 뜻인지 물어 볼 뻔했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알아서 낙영의 호기심을 풀어 주었다. 정말 솔직한 여인이다.  

"사별했어요. 남편이랑은. 사고였죠. 남편은 어린 나이에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했고, 다른 이들보다 일찌감치 많은 것을 누렸어요. 아마...일찍 갈려고..일찍 누린 걸지도 몰라요. 후후."

"...그렇군요.."

호기심은 충족 되었지만 자조 섞인 그녀의 웃음에 낙영은 죄책감을 느꼈다. 분명 일생의 가장 아픈 기억 중 하나 일 텐데. 내 못난 호기심으로 그녀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구나. 이런, 못난 놈의 자식. 분위기를 환기 시키고 싶은지, 그녀는 낙영에게 물었다.

"그쪽은 어때요? 아가는 있어요?

"예, 이제 10개월 된 딸내미가 하나 있습니다."

"어머, 제일 귀여울 때죠. 너무 예쁘겠어요"

"그럼요, 너무 귀엽고 예쁘죠. 특히 딸이라."

"맞아요, 애들은 너무너무 작잖아요. 손톱도 발톱도 어쩜 그리 작은 게 있을 거 다 있나 싶잖아요. 호호"

"그렇죠, 정말 작아요. 하하. 그쪽 아기는 몇 살이에요?"

"큰애들도 있고, 작은 애들도 있어요."

"아..애들이 많으시군요...힘드셨겠어요, 낳으시느라, 기르시느라."

"뭐, 그렇긴 해도...그 애들 때문에 사는 거죠. 애들에게 많은 의지가 되요."

그녀의 대답은 이미 혼잣말에 가까웠다.

"정말..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아이들 때문에."

"......."

"하지만, 남편은 아이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던 거 같기도 해요.."

"..네?"

"가끔.....좀..말하기는 그래요. 이런 생각 하면 안되지만...혹시..벌을 받은게 아닌가 싶은..생각도 가끔 해요. 정말 이런 생각하면 안되긴 해요. 그렇지만 어쩌죠,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단 말이에요. 마땅히 받을 벌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요...저..진짜 나쁜 여자인가 봐요."

낙영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건 반전이네. 어떤 망나니 자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센스 있고 귀여운 그녀에게. 능력 있는 놈이랬지. 아마도 재력을 바탕으로 육아는 그녀에게 맡겨 버린 체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을 거다. 아니, 여자들을 '후리고' 다녔을 거다. 가끔 원망하는 그녀에게. 제발 가정으로 돌아와 달라고, 아이들의 다정한 아빠가 되어 달라고 애원하는 그녀에게 폭력을 휘둘렀을지도 몰라. 그럴 거면 애는 왜 많이 낳았냐고?!! 하여간 돈 있는 것들이란!!  아까의 이름 모를 남자에 대한 부러움은 분노로 바뀌었고 분노는 그녀에 대한 보호 본능으로 바뀌었다. 만약에 우리 와이프가 이렇게 착하고 센스 있었으면...나라면 내장이라도 순대로 말아 갖다 바치겠다!! 낙영은 자세를 고쳐 잡고 단호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거죠. 너무 착하신 분이세요."

".....아니에요. 이렇게 못된 생각을 하는 전데요."

"아니, 아닙니다. 그런 남편..죄송합니다. 그런 새끼는 벌을 받아 마땅한거죠! 분명히, 훨씬 멋지고 훨씬 능력 있는 좋은 남자가 나타날 겁니다. 힘내세요."

낙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호흡이 흐트러진 그녀의 모습은 분명, 가슴의 먹먹함을 애써 진정시키려 하는 것이리라.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웠다.  

"..고마..고마워요...흑..흑흑..."

낙영의 이성은 여기서 무너졌다. 여기가 어디든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거 같았다. 작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서 진정시키는 것이 지구 온난화를 막는 것보다 더 시급한 과제라고 느껴 졌고, 낙영은 곧 실행에 옮겼다. 낙영의 품에 들어온 그녀는 우는 아기가 엄마 품을 찾은 듯이 금방 흐느낌을 멈췄다. 그녀가 진정되자, 낙영도 조금 기분이 누그러져서 인지 발 밑에 어지럽게 버려 진 담배 꽁초들이 눈에 띄었다. 둘이 얘기를 하면서 피운 담배 들이다. 이런,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본능적으로 이제 그만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라는 것을 낙영은 느꼈다.  그때, 흐느낌을 멈춘 그녀가 소곤 거리 듯 말했다.

"참...따뜻하다..."

들릴락 말락 한 작은 목소리였지만 낙영은 분명하게 들었다. 들었을 뿐 아니라 그 한마디는 낙영의 안에서 메아리가 되어 버렸다. 그 메아리는 신기하게도, 한번 돌아올 때마다 점점 커지기만 했다. 낙영이 고개를 내려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 또한 낙영의 눈동자를 쳐다봤다. 이제 낙영은 확신을 얻었다. 이 눈은, 아까의 그 아이 같은 눈동자가 아니다. 약한 여자의 모습이 남자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키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눈이다. 그리고 그 남자를 어떻게 움직이게 만들 것인가는 더더욱 잘 알고 있는 눈이다. 이런 순간에 움직이지 않을 남자는 없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남자가 아니거나....고자다. 내 두 다리와 나머지 한 다리를 걸어도 좋다. 그녀는 눈동자를 거두고 천천히 일어나서 낙영에게 등을 돌린 체로 말했다. 처음 담배를 달라고 했을 때와 같은 톤이었다.

"차나 한잔 같이 하실래요?"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였다. 낙영은 방금 버린 이성의 한 조각을 갖고 있는 척, 되물었다.

"하지만 애들이 있다고 ..."

등은 돌리고 있었지만 낙영은 그녀의 피식, 하는 웃음 소리를 들었다.

"애들은...잘 시간이잖아요."

그리고 그녀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낙영이 간은 크지 않지만, 그렇게 멍청한 남자 또한 아니다. 낙영도 그녀와 거리를 둔 체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 모양 보도 블록이 깔린 보행 도로를 걷다, 놀이터를 가로 질러, 자전거 거치대를 지나쳐서 어느새 그녀의 집 앞 현관문까지 와 버렸다.
중간 중간, 그녀는 흘끗 뒤를 돌아보며 낙영과 눈을 맞췄다. 눈을 맞출 때는 작은 감동을 주었던 미소도 잊지 않았다. 미소에는 교태가 더 해져 있었고, 낙영은 그녀가 가진 매력의 스펙트럼에 감탄을 마지 않았다. 과연 저 여자가 아까 깡통 버리던 그 수수한 여자가 맞는가 싶었다. 현관문 앞에 서서야 그녀는 뒤로 돌아 낙영을 온전히 바라 보았다. 그리고 한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살짝 얹고 말했다.

"문 좀 열게요. 애들 자니까.조용히 해주세요..."

그녀가 현관 도어락의 번호를 두드렸다.

톡톡톡톡톡톡...

아마 '음소거'를 한 체로 버튼을 누르나 보다. 지금 낙영의 눈에는 그녀의 이런 모습도 센스 넘쳐 보였다. 번호를 다 누르고 '열림'키를 눌렀는지, 도어락이 오픈 되는 소리가 들렸다.

지잉..징..징징...치잉...쥥...지-잉.....

철컥
철컥
털컥
치리릭
철컥
철커덕
치릭- 철컥.

아니, 무슨 열쇠가...분명히 하나를 열었는데, 몇 개가 열리는 거지? 처음 보는 도어락에 어리둥절한 낙영은 목소리를 낮춰 그녀에게 물었다.

"저기...신기한 문이네요. 자물쇠가 여러 개가 있나 봐요 안쪽에는...몇 개가 있..."

"쉿! 조용히"

그녀가 낙영의 말을 막고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단호하게 말했다. 머쓱해 진 낙영은 살그머니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하긴..애들도 여러 명이라 했고, 여자 혼자 사는 집이니....'

"문 좀 조용히 닫아 주세요..."

그녀가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집안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애들은 잘 시간이니까. 낙영은 조심 조심 문 쪽으로 몸을 돌리고 두 손으로 소리가 안 나게 닫았다. 한밤중에 와이프 몰래 담배 피고 들어가면서 문을 닫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물론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기대로 그 강도는 두배였다. 문을 닫자 열었을 때처럼 도어락 닫히는 소리가 났다.

철컥
철컥
털컥
치리릭
철컥
철커덕
치릭- 철컥.

낙영은 자기도 모르게 도어락을 세어 보았다.

'하나..둘...셋... 여덟 개나 있네...쯧쯧...얼마나 혼자 있는 게 불안 했으면...'

낙영은 안타까움에 혀를 차면서 신발을 벗었다. 그녀는 먼저 집안 쪽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불을 계속 키지 않는 건 아이들 때문이리라. 침실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걸까. 어둠 속에서 신발을 벗던 낙영은 신발장 옆에 놓여 져 있는 포대 자루를 몇 개 보았다. 호기심에 낙영이 포대 자루 입구를 벌리 자 통조림 육류에서 나는 특유의 소금, 조미료 냄새가 확 올라왔다.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 졌고, 몇 분 후 어둠에 익숙해 진 낙영은 포대 자루가 대형 섬유 유연제 라는 것을 알았고, 그 안의 희미한 형체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아까 그녀가 분리 수거하던 빈 캔들이었다. 참치 캔 크기의 캔들이 하나...둘...셋....다섯 개. 다섯 개의 섬유 유연제 자루에 꽉 차 있었다. 와, 통조림만 먹고 사는 거야? 그것도 고기 통조림만? 그리고 왠 섬유 유연제를 이렇게 많이...고개를 갸웃거리는 낙영의 뒤로 그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이에요."

현관에서 이어진 짧은 복도의 왼편 거실 쪽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낙경에게는 거실의 소파의 끄트머리가 보였고, 소파에 누워 있는 날씬한 다리의 윤곽이 보였다. 낙영은 그녀가 소파까지 어떻게 걸어갔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머리를 질끈 묶었던 머리 끈, 가지런 했던 에이프런, 에이프런 안에 있던 티셔츠, 바지, 그리고..그녀의 속옷들이 하나씩 간격을 두고 복도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

"조심해서 오세요."

그럼, 조심해서 가고말고. 낙영은 조용히 그녀에게로 발을 옮겼다. 짧은 복도를 지나 거실로 가는 낙영의 가슴은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실로 통하는 코너를 돌았을 때, 빠르게 뛰던 낙영의 가슴은 멎어 버리는 듯 했고, 발걸음 또한 멈추었다. 왼쪽 발목에 무언가 습기 차고 따스한 바람이 느껴 졌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숨결이었다. 아..아이가 여기서 자고 있나? 아니다, 아이의 숨결 치고는...무언가 너무 무겁고... '두꺼운' 숨결이다. 낙영은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을 리가 없겠지만. 아니,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눈은 어둠 속에서 고양이처럼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낙영은 메두사의 눈을 본 이름없는 전사처럼 굳어졌다. 발목의 숨결이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눈동자를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어서요. 이리 오세요."

그녀의 빛나는 눈꼬리가 내려 가는 것이, 웃고 있는 듯 했다. 낙영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건..이 상황은 뭔가 위험해. 동물적인 본능이 적색 경보를 강하게 울렸다. 그녀의 빛나는 눈 때문이 아니다. 빛나는 눈들이 하나 둘 점점 많아 졌기 때문이다. 야구 경기장에 서치 라이트가 순서대로 켜 지듯이, 그녀의 주위로 노란 눈들이 하나 둘 켜 지기 시작하더니 거실을 가득 메워 버렸다. 그 노란 눈들은 점점 밝아 져서 주황색 빛이 감돌기 시작했고, 그 희미한 빛에 하얀색 이빨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크고 촘촘하게 박혀 있는 짐승의 이빨들.

"이...이게...이..다..다....뭐, 뭐죠...?"

"뭐라뇨, 그게 무슨 소리에요. 제 아이들이죠."

어둠 속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생긋 웃는 그녀의 표정이 보였다. 그녀 또한 크고 촘촘한 것을 갖고 있었다.  

"이쪽이 큰애들. 그쪽이 작은애들이요."

그녀의 그림자가 한쪽 팔로 이쪽, 저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아니...애들이 있다고.."

"아, 어두워서 그러시나 보다. 잠시만요. 애들이 밝은걸 좀 싫어해서 그래요."

스탠드의 줄을 당기는 소리가 났다. 희미하게 붉은 빛이 거실 안을 매웠고, 낙영은 tv에서 언젠가 본 장면을 실제로 보게 되었다. 아니 본 장면이지만 정확히 같은 장면은 아니었다. 아마 '세상에 이런 일이' 였을 거다. 가끔 그런 분들이 계시다. 외로움 때문인지, 사람에 대한 배신 때문인지, 방황하는 어린양을 거두시는 누군가처럼 유기견들이나 버려 진 애완 동물을 4~50마리씩 집에서 키우시는 분들. 하지만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눈동자의 주인들은 유기견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 대형견 크기만한 수십 마리의 개들. 그들의 안광이 점점 붉어져 이제 불타오르는 듯 했다. 도대체..어디가 작은애들이고 어디가 큰 애들이란 말인가. 전부 큰데.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본 줄 알았는데, 아마도 그리스 로마 신화 삽화에서 본건가 보다. 지옥의 문을 지키는 켈베로스. 켈베로스를 애완용으로 품종 개량 - 너무 많은 머리 개수를 줄이는 - 을 했다면 저런 모습일 거다. 아마도.

"우리 애들 너무들 예쁘죠?"

식은 땀은 윗도리를, 다른 분비물은 낙영의 아랫도리를 흥건히 적셨다. 그토록 기대했던 그녀의 나신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얇고 우아한 금빛 모피 코트를 입은 듯 그녀의 전신이 털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예쁘지 않냐고 물었어요."

"...그...그게...:

갑자기 그녀의 송곳니 사이에서 카랑카랑한 쇳소리가 섞인 일갈이 터져 나왔다.

"남자들이란!!!"

낙영은 주저 앉고 말았다. 그녀는 쇼파에서 일어나 교태롭지만 단호한 걸음으로 낙영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살랑대는 그녀의 엉덩이 뒤로 흔들리는 아홉 개 정도의 꼬리를 본 것 같지만, 아마 기분 탓이리라. 붉은 눈동자들은 여왕의 지시를 기다린 내시들처럼 하나 둘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거실 바닥에 침을 뚝뚝 떨어뜨리며.

"이 아이들은 내가 데려 온 아이들이에요. 얼마나 가련하고 어여쁜지."

"..네..네..그럼요, ..예뻐요, 예쁘고 말고요. 너무 귀여운 아이들이네요."

"거짓말 하지 말아요. 어째서 남자들은 다 그런 식이죠? 아이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요. 다들 자기만 알죠. 말로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낙영은 앉은 체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눈동자들과 그녀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다가올 때마다 뜨겁고 습한 짐승의 냄새가 느껴 졌다. 저 냄새를 지우려 옷에 섬유 유연제를...낙영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통조림의 빈 캔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8개의 도어락. 바깥에서 열 때는 하나만 열면 되지만, 안에서는 8개를 열어야 하는 도어락. 영혼만이라도 이 육체를 벗어나 빛의 속도로 도피하고 싶었지만, 육체의 감옥은 항상 그런 식으로 우리들을 배반한다.

"아..아닙니다.조..좋아해요, 전 아이들을 사랑. 정말 이에요.."

"그래요, 전 그 말을 이제 믿으려고 하는 참이에요."

그 말이 신호가 된 듯, 그녀의 '아이들'은 덫에 걸려든 사냥감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위해 달려들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럼요, 그럼요, 제말...제말을 믿어 주셔야만 합니다. 이 아이들한테 제가 얼마나..."

"전 남편도 그런 식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었어요. 아마 남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애정 표현 이었다, 라고 저는 생각해요."  
  
"예..? 그..그게 무슨..."

"아이들 에게는 항상 싱싱하고 영양가가 많은 것을 먹여야 하거든요."

"!!.."

물론 그래야만 했다. 아이들은 싱싱하고 영양가가 많은 것을 먹어야 하는 법이다. 아이들은 쑥쑥 자라나야만 하니까. 하지만 과연 그녀의 '아이들'이 '더'자라야 하는지가 낙영에게는 의문 이었고, 낙영의 의문은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을 신호로, 짐승의 이빨들은 그 용도에 맞는 쓰임새를 착실히 수행했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아담의 사과'라 불리는 갑상 연골에 질끈 박혀 버린 하얀 이빨은 마지막 순간의 비명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다정하게 말했다.

"얘들아, 천천히, 천천히 싸우지 말고 나눠 먹어야 한다. 아빠가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두들 알고 있지?"


경태는 오랫만에 혼자만의 여유를 맘껏 즐겼다. 아내가 집을 비운 첫날 저녁. 피자 라지 사이즈 한판과 맥주. 제일 좋아하는 좀비 영화들을 질리도록 보며 하루를 보냈다. 그 지긋지긋한 뽀로로를 보지 않으니 살 것 같았다. 아내는 아이와 함께 1박2일로 여행을 떠났다. 어느 육아 제품 기업에서 주최하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크맘 베케이션'이라는 유치한 이름의. 내일 오후면 아내가 돌아올 테니, 그 전에 맥주 캔과 피자 포장지를 없애 버려야 한다. 좀비영화 디비디도 반납해 놓고. 분리 수거장에 도착해 쓰레기들을 버린 경태는 사람도 없겠다, 담배나 한 대 빨리 피우고 갈 겸 담배 갑을 꺼내 들었다. 아차차차, 아까 지하철 내리고 피운 게 마지막 한 개비였구나. 이런, 이거 사러 다시 가게까지 가기도 귀찮고. 이럴 때의 짜증은 비흡연자들을 절대 알 수 없다. 급하게 화장실을 찾아 변기에 앉아, 힘을 주려고 하는 참에 휴지가 없는 것을 알아 버린, 그런 기분인 것이다. 경태는 빈 담배갑을 농구의 자유투를 던지는 자세로 '종이' 분류 수거통에 넣으면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담배 한 대 같이 피시겠어요?"

"네?"

처음 보는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어려 보이는데, 앞치마를 한걸봐서 아줌마 인듯 하다. 아줌마 치고는, 꽤 귀여운 여자다. 언제 옆에 와 있었지. 게다가 아줌마가 무슨 담배여? 남사스럽게 시리. 나 담뱃갑던지는 것도 다 본거 아닌가? 멋적 은 맘에 사양하고 싶었지만, 경태는 그녀가 내민 담배갑의 유혹을 뿌리 칠수가 없었다.

"그럼, 죄송하지만 한 개비만 빌리 겠습니다."

경태는 담배를 받아 필터를 흘끗 보았다. 세븐스타 라는 양담배다. 처음 피는 담배인데. 경태가 담배를 입에 물자 팅, 하는 지포라이터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이 다가와 불을 붙였다. 놀란 경태가 그녀를 처다 보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경태는 생각했다.  

'이 여자 웃으니까 너무 귀여운데?'


End.
댓글 2
  • No Profile
    clo 12.04.23 11:33 댓글 수정 삭제
    담배갑 -> 담뱃갑
    한대 -> 한 대
    한 개피 / 한가치 -> 한 개비
    죄송해요. 핵심 소재인 듯싶어서 그런지 다른 글과 달리 유독 눈에 들어와서요.
  • No Profile
    이니 군 12.04.24 12:03 댓글 수정 삭제
    아해들이 소재라서 그런지..묘하게 무섭네요
    전 아해들을 몹시 좋아하는데. 그래서 그런가 객관적으로 읽을수가 없엇습니다 ㅠ
    하기사 원래 글이란게 객관적으로 접하기가 어려운건지도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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