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4월의 스콜은 부두부터 시작해서 점차 부두와 포구에 연이어 있는 술집과 포석의 바닥에 잔잔히 굵은 점들을 찍기 시작했다. 미풍이라기 에는 세찬 바람이 불어와 모자의 깃발을 흩날렸다. 사내는 모자챙을 잡아 날아가지 않도록 푹 눌러쓰고 매 같은 눈빛을 감추었다. 뾰족한 콧날 아래 얇게 맺힌 두 가닥의 수염은 뾰족한 차양처럼 입술 위를 감싸고 예리한 첨단을 양 옆으로 펼친 채였다. 모자아래의 윤곽으로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검은 비단 재킷 위에 덧대 입은 낡은 가죽조끼와 그 아래 역시나 낡게 닳아버린 벨트의 옆에 매달린 허름한 레이피어 역시 사내의 나이와 관계없는 간난산고를 말해주는 듯했다. 사내는 마을의 언덕 위에서 조금씩 소나기가 수평선에서 검은 구름을 타고 밀려와 바다 위 배의 범포에 빗물을 떨구고 포구에 늘어선 상점의 붉은벽돌지붕들을 적시며 서서히 밀려 들어오는 것을 보는 중이었다. 후두두 빗방울 소리가 조만간 모자 위에서 울릴 것 같았다. 요새 언덕배기에서 바라보는 식민지의 항구는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고스란히 사내의 눈에 빨려 들어왔다.

검푸른 바닷가 위에 커다란 갤리온 두 척이 닻을 내리고 있었고 닻줄 아래의 넘실대는 바다 위에는 갈매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소나기를 대비하고 있었다. 선원들이 바쁘게 닻줄을 뿌리고 널어둔 돛을 거두었고 부두에 모여있던 사내들은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명령이라도 받은 듯 부둣가의 집 안으로 밀려들어 가고 있었다. 작은 별 무리가 시야 건너편으로 사라지듯 흥청대던 포구가 금세 조용하게 비어버렸다. 사내의 입이 살짝 벌어지고 휘파람처럼 들리는 한숨이 나왔다. 아련한 소리가 바다로부터 들려왔다. 비가 바다에 퍼붓는 소리, 천천히 부딪히는 포말의 소리. 곧 모든 것을 덮을 장막이 되어 줄 장엄한 물줄기의 파열음.

부두로 내려가는 계단 왼쪽의 언덕, 두꺼운 요새의 흰 석벽에 물기 섞인 바람이 부딪혀 조금씩 회색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사내의 발걸음은 떨어지는 비와 함께 부두의 계단을 향해 움직였다. 사내와 같은 스페인식 깃털모자를 쓴 인디오 하나가 슬쩍 골목에서 사내의 얼굴을 보더니 어두운 건물 사이로 사라졌다. 바람이 비보다 먼저 도시를 청소하고 있었다. 술집과 어구상과 포목점을 벗어나 대장간의 옆으로 먼지 한 무더기가 날렸고, 대장장이는 칵 하니 침을 도로에 내뱉고 화사한 붉은 지붕 아래 어울리지 않는 검은 대문을 투덜대며 천천히 닫아걸었다.

부둣가에 붙어있는 노예시장도 잠시 문을 닫아걸었다. 철로 된 문 틈새 사이로 검은 눈동자가 사내의 발걸음을 쳐다보고 있었다. 빗방울이 본격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붕 없는 철창의 위로, 노예들의 두른 것 없는 어깨로 비가 흩날리자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간격을 좁히고 부둥켜안았다. 사내의 시선이 잠시 그들에게 머물렀다. 한 때 이곳의 주인이었던 이들, 바다와 산과 들판의 청색과 초록빛을 자신들의 직물에 물들이던 황금깃털의 주인은 이제 쇠창살에 갇힌 채 처음 보는 세상에 팔려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 하나가 사내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남자는 고개를 다시 돌리고 포석 깔린 부둣가를 천천히 지나갔다. 사내의 옷이 시나브로 젖어들고 있었다. 그 외에도 한 명의 사내가 비를 맞으며 서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검은색 법의와 삼으로 된 허리띠를 잔뜩 졸라맨, 바닷바람에 언제라도 날아갈 듯 비틀대는 말라깽이 수사(修士)가 가느다란 팔목에 두꺼운 성경을 끼고 노예들을 향해 걷고 있었다.

“회개하라!”
투덕거리며 옷에 떨어지는 빗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사의 쉰 목소리는 철창을 향해 울려 퍼졌다.

“무지한 이들아, 멸망을 앞에 둔 이들아! 영원한 심판이 다가오리라! 주를 믿으라! 오직 주 예수의 이름을 믿고 회개하면!”
사내의 오른손이 으르렁대며 울음을 토해내는 잿빛 하늘을 향해 들렸다.

“영원히 살리라. 영원히 살리라!”

영원히 살리라. 사내의 눈이 수사와 알아듣지 못하는 말에 겁먹은 노예들을 손으로 하나하나 만지듯 훑어가고 있었다. 영원히 살리라. 죽음도 없고 고통도 없고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는 그곳에서 영원히 살리라.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금방 오가는 스콜이 아닌 며칠간의 장대비인 듯,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사내는 다시 망토를 추스르고 부두의 설교에서 등을 돌렸다. 하지만 축문처럼 수사의 말은 그의 귀를 따라왔다. 영원히 살리라. 영원히 살리라. 사내는 귀에 들러붙은 포교를 떼어버리겠다는 양, 떠들썩한 소음이 빗소리를 먹어버리는 작은 선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몰려든 뱃사람들로 좁아터진 선술집은 북새통을 이루는 중이었다. 사람 하나는 더 세울 만큼 높은 천장 위에 타륜(舵輪)을 샹들리에처럼 세우고 타륜 위에 촛불을 매단 묘한 조명이 여기저기 밝혀져 있었다. 촛농이 녹아 초를 세워둔 테이블 위와 질척한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이미 럼주와 위스키의 축복을 받은 사내들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밀랍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사내는 천천히 바로 다가가 술 취한 손님들을 상대로 정신이 없는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그(럼주에 물을 타 희석한 술) 한 잔.”

쟁그랑 소리와 함께 컵이 하나 떨궈지며 두 명의 사내가 작은 나이프를 뽑아들고 멱살을 잡은 채 테이블 위로 굴렀다. 둑이 터지듯 왁 하는 함성이 울리더니 사내들의 응원이 펼쳐지고 두 명의 사내는 테이블을 발로 차 던지고 작은 공터를 만들었다. 주인이 오른손으로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 시작했다.
“여기 그러그 하나.”

사내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주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양철술잔을 재빨리 어딘가 휘둘러 찰랑거리는 액체를 가득 담아 사내 앞에 던지다시피 내놓았고 주인의 터진 나팔 같은 목소리가 사내의 등 뒤로 향했다.

“테이블을 부수면 네놈들 모가지로 상다리를 만들겠어!”

사내 하나가 얼굴을 감싸 쥐더니 나이프를 떨어뜨렸다.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샘솟듯 흘렀고 두 싸움꾼을 둘러 싼 관중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주인은 정말 못 말리겠다는 듯 욕을 바닥에 내뱉으며 구시렁거렸다. 사내가 천천히 주인을 올려보았다. 모자 사이로 촛불을 받은 눈이 번쩍였다.

“늘 이렇게 시끄러운가.”

“비가 올 때만 그렇소.”

“늘 비가 오지.”

“그렇지요.”

주인은 술집 안이 조용해지자 자신도 괜히 흥분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사람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내의 오른손이 슬쩍 품 안으로 들어갔다가 은화 한 닢을 바 위에 올려놓았다. 장사치의 본능인 듯, 주인은 사내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왼손으로 은화를 덥석 감쌌다. 사내는 천천히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꺼냈다.

“사람을 찾네.”

“누구 말이오?”

“디에고 헤수스 헤라나”

주인의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가며 바에 앉아있는 검은 모자의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내는 개의치 않고 말을 꺼냈다.

“거래할 일이 있어.”
“겟세마니 거리 위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산 페드로 성당이 나오는 건 알 거요. 성당 앞에서 항구를 내려다보면 오른쪽에 빨간 문이 하나 있지. 거기가 헤라나의 상점이요.”
주인은 빵을 씹어 삼키듯 순식간에 길을 알려주더니 다시 사내를 쳐다보았다.

“당신도 노예상이오?”

“아니.”

“충고하는데, 헤라나하고는 거래를 트지 마시오. 아무리 타락의 도시에서 술을 팔아도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로 내려가는 건 권하지 않는 법이니.”
사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는 아직 다 마시지도 않은 술잔을 앞으로 내밀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내의 인상과 허리에 찬 칼을 보자 주인은 침을 바닥에 내뱉었다. 천천히 사내의 오른손이 술집의 문을 열자 억수 같은 비가 사내를 반겼다. 빗방울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거세지고 있었다. 바람이 빗물을 사내의 얼굴로 휘몰았다. 어느 틈엔가 노예를 전도하는 수사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비를 맞는 검은 어깨들만이 옹기종기 철창 안에 모여 있을 뿐이었다.

-2-

-  불공평이라는 건 규칙일지도 모르지.

-  무슨 소리죠?

-  어느 곳이나 적합한 자가 우위를 접하는 법이지. 열세인 문명은 늘 다른 문명의 노예가 되는 거고, 그렇기에 노예를 사는 이와 파는 이가 생기는 것 아니겠소.
사내의 투덜거림 앞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손은 늘 사내의 앞에 갖다 둔 채였다.

- 그래서 규칙이 필요한 거예요. 사파이들의 행동을 모두 묵과했다가는 교역 자체가 끊기겠죠. 그러다 보면 문명들은 모두 움츠러들고 그 안에서 나오지 않으려 할 거예요.

여인의 말은 이치에 맞았고, 규정에 맞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도덕적 행동이 병행되는 귀감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녀를 존경하는 만큼 사랑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인연의 시작, 그리고 결혼, 그리고 뜻하지 않은 종막.

사내는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 속에서 방향을 찾기 위해 잠시 모자챙을 들고 돌멩이가 가지런히 깔린 언덕길을 둘러보았다. 언덕길에는 이미 작은 개울이 생겨 빗물을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사내가 오르는 길은 성당과 어우러져 있어 평소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대로였고, 그 옆으로는 우뚝 솟은 석조건물들과 사람의 키를 넘어서는 대문과 우아한 아치를 그리며 섬세한 포도덩굴이 장식된 하얀 레피사스(사람이 다닐 수 있는 발코니)를 뽐내는 웅장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관청과 저택들을 지나 성당을 지나면, 무지렁뱅이들과 약장수들과 매춘부와 노름꾼과 노예상들이 몰려 사는 작은 빈촌이 나왔다. 문득 사내는 기척을 느꼈다. 오른 편 건물의 2층 레피사스에 보랏빛 드레스를 차려입은 영애(令愛)가 나타나 쏟아지는 비와 검은 옷차림의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식민지 스페인 아가씨들의 세상을 구경하는 방식은 자신의 방에 뚫려 있는 좁은 나무난간의 틈새를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구애 받지 않는 노예의 삶, 가녀린 새 같은 여인이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커다란 눈망울을 지녔던 아내의 눈동자가 생각났다. 새의 다리처럼 가늘고 우아한 손가락과 팔다리를 지녔던 여인. 그 커다란 눈망울.

  
- 사파이들의 행동은 모두 제어되었네. 이제 함부로 외성단 사이에서 선단을 공격하는 노예상은 없을 거야.

연방의 감사관이 사내에게 말을 했을 때 사내는 뜻 모를 한숨을 내 쉬었고, 좀처럼 하지 않는 셈을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  800년이 걸렸네. 짧은 시간은 아니야.
사파이인, 사내만큼이나 영속하는 생물, 항성의 태생과 종말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종족, 그리고 언젠가부터 안온한 거주의 행복대신 약탈과 방랑의 쾌락을 좇던 이들.
-  그래서 자네들이 담당하는 거지. 수고했어. 내가 네 번째 담당자였나?
-  여섯 번째.
-  그랬군.

감사관이 이상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을 때, 사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을 표시했다. 하지만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내를 쳐다봤을 때, 여인은 손을 내밀어 사내의 얼굴에 갖다 댄 뒤였다. 천천히 아내는 사내를 쳐다보며 말했다.

-  아직 하나가 남아 있어요.

여인의 눈은 사내가 아닌 사내의 헬멧에 달린 팔각의 회색견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내 역시 아내의 가슴에 달린 회색견장을 쳐다보았다. ‘강건하며 고결하라. 시간에 침식당하지 않는 방패여.’ 여인의 자태는 옥타그램 문장의 현현이었다.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여인, 영원히 변치 않았던 태도와 용기, 용모를 지닌 자여.

빗줄기를 뚫으며 올라가는 사내의 눈에 붉은 대문이 저 멀리 들어왔다. 굳이 성당의 계단까지 올라가서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언덕을 가로질러 다시 내리막으로 가는 사잇길 앞에 붉은 대문은 커다란 입을 드러내며 서 있었다. [헤라나 상회]라는 간판이 처마 아래 작게 붙어있었지만, 누구도 간판을 찾아 보고 들어오는 손님은 없을 성 싶었다. 오르막과 광장의 사이 몇 십 미터를 지났을 뿐인데도 들어오는 풍경은 확연한 차이를 내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두 명의 사내가 그를 쳐다보았다. 쥐처럼 뾰족한 얼굴의 사내가 동그란 눈에 힘을 주며 몇 줌 안 되는 수염이 붙은 입을 일그러뜨렸다.

“뭐하는 놈이냐?”

가게는 어두웠고, 앞의 테이블과 건너편 책상 위에 있는 촛불 두 개만이 사람의 음영을 분간하게 하였다. 뒤쪽에 있던 남자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손에 번쩍이는 물건을 들어 보였다. 사내가 그 남자를 응시하는 사이, 쥐수염 사내도 자기 품에서 나이프를 꺼내 사내의 턱 밑에 갖다 대었다.

“묻는 말이 안 들려?”

순간 사내의 오른팔이 어두운 암흑에서 구렁이처럼 꿈틀대더니 순식간에 쥐수염의 칼 든 손을 거꾸로 잡고 무서운 속도로 옆으로 패대기를 쳐버렸다. 쾅하는 소리가 문짝에서 울려 퍼졌지만 물방울 몇 개와 쥐수염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뿐, 건너편의 사내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사내의 입에서 성조(聲調)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나왔다.

“디에고 헤라나를 찾아 왔다.”

천천히 어둠 속에 담겨있던 사내가 촛불 앞으로 솟아올랐다.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땋아 뒤로 넘기고 뭉툭한 코 아래로 사자갈기처럼 수염을 기른 검붉은 머리카락의 사내가 슬쩍 웃음을 지으며 빛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의 굵은 손가락 앞에는 노랗게 광채를 뿜어내는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헤라나를 왜 찾아왔지? 처음 보는 친구?”  

“카르타헤나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이라고 하더군. 벽돌이 올라오기 전부터 있었다고.”
갑자기 킥킥거리는 소리와 함께 헤라나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나이프로 사내를 가리켰다.

“술집주인 놈이 그러던가?”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헤라나는 킥킥 소리를 연발했다.

“지옥이나 가라고?”

사내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털북숭이 사내는 아예 천장을 보면서 깔깔대기 시작했다. 한참으로 웃던 헤라나는 들고 있던 나이프를 식탁에 꽂았다. 번들대는 얼굴과 노란 촛불 빛을 받아 빛나는 눈동자가 사내에게 다가왔다.

“그놈 본국에서는 수도원에 있었다더군! 매일 럼주나 팔아먹는 놈이 지옥 운운이라니! 키킥. 하긴 그놈이 나보다 먼저 지옥불에 처박힐 거야. 이봐, 신사양반! 술집주인이 한 이야기는 다 사실일세. 내가 카르타헤나에 가장 먼저 온 사람 중 하나일 거야. 그리고 내 나이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많지.”
헤라나는 ‘훨씬’이라는 말을 하며 자신을 양팔을 죽 뻗어 보였다. 아무래도 장사꾼보다는 광대 같은 모습이었지만 사내의 눈빛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었고 그런 사내를 헤라나는 재미있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 씩 웃음을 지었다.

“진짜배기 뱃사람이로군. 아니면 군인출신이던가. 좋아, 좋은 얼굴이야. 최소한 거래에 장난은 치지 않겠어. 사업 이야기를 해 보자고. 뭔가? 노예?”

헤라나의 시선은 흔들리는 촛불 아래로 보이는 사내의 굳은 얼굴에 머물렀지만 그도 잠시, 사내의 품속에서 나온 빛나는 물건이 테이블 위 촛불 앞에 놓이자 얼른 눈동자는 방향을 바꾸었다. 헤라나의 손이 테이블에 올라왔다. 혀가 두꺼운 입술 위로 왕복하는 것이 사내의 눈에 들어왔다.

“금화는 왕실의 소유야.”

“에스파냐 금화가 아니다.”
메마른 헤라나의 목소리에 사내의 딱 부러진 목소리가 대답했다. 헤라나는 다시 금화를 불빛에 비춰보았다. 눈동자가 촛불 못지 않게 이글거렸다.

“그렇군. 어디 거지?”

“피사로가 직접 찍은 거다.”

“…엘도라도?”

사내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헤라나의 입이 멍하니 벌어지며 눈의 초점이 천장을 향했다. 손가락은 허공에 뭔가를 연신 쓰는 중이었다.

“얼마나 되나?”

“포구의 작은 보트에 두 짐이 실려있어. 이걸 스페인까지 처리해줄 사람이 필요해. 보수는 7:3으로”

“6:4”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빠르게 대답이 튀어나왔고, 사내의 머리가 좌우로 흔들리기도 전에 헤라나는 허공에 쓰던 손가락을 펴서 세차게 흔들었다.

“영국 놈들과 프랑스 사략선도 생각해야 해. 내가 빌바오까지 실어다 주지. 그 정도 운임이면 육 대 사도 과분한 거야. 육 대 사 아니면 못하네.”

“진짜 장사꾼이라더니 그렇군.”
사내가 수긍하는 어투를 보이자 헤라나는 싱긋 웃으면서 투실한 얼굴을 사내에게 들이밀었다. 마치 오랫동안 거래한 단골이나 교분을 튼 친구를 만난 듯한 몸짓이었다.

“어차피 자넨 이 지저분한 인디오 동네를 떠나면 되는 거잖아? 한탕 해서 말이야. 그지? 좋아, 계약이야. 시원시원한 친구군. 화물은 어디 있나? 항구에?”

“빨리 처리하는 게 낫겠지. 사람이 적은 게 나으니까.”

“잘 됐군. 냄새나는 인디오 사냥도 이젠 지겨웠어. 그나저나, 이 금은 어떻게 얻었나. 원주민들을 죽이고?”

사내의 깃털모자가 아래로 수그러졌다. 눈매를 감추고 싶었다.


-  도와줘요. 순찰정이 피격됐어.

그녀에게 들어온 마지막 교신. 20광년 떨어진 곳에서 들려온 교신의 시차. 사내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성군이 파랗게 우주를 발광하며 헤엄쳐 가는 장엄한 광경. 소흑성 위에 놓여 있던 부서진 순찰정. 그리고 그 바깥에 널브러진 채 쓰러져 있는 파손된 우주복의 순찰대원. 사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예의 억양 없는 목소리로 거래처를 다독이면서.

“지금 가세.”


-3-

구름은 더욱 두꺼워져 하늘은 마치 해가 넘어간 듯 어두웠고,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 사정없이 사내의 모자를 두들겨댔다. 붉은 망토를 두르고 모자를 눌러쓴 헤라나는 잠시 손을 뻗어 물줄기를 잡을 듯 뻗다가 양팔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망할 놈의 날씨.”

사내와 헤라나는 천천히 항구로 통하는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성당의 앞으로 뚫려 있는 길이 아닌 좁은 길, 뚜쟁이들의 음모와 간드러진 여인의 웃음이 어울릴법한 골목으로 두 사내는 들어섰지만 누구도 세찬 빗줄기 속에 얼굴을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헤라나가 진저리난다는 듯, 사내의 뒤를 따라가며 투덜거렸다.

“세상에 이런 빌어먹을 날씨를 가진 곳을 또 본적 있나?”


-이곳에는 없다네. 안드로메다 군은 물론이고 전 플레아데스 성단과 마조르카 군(群)까지 뒤져봤어. 행성-성단 협약에 접촉된 곳은 한 군데도 남아있지 않았어.

-그럼 어디로.

- 뻔한 위법행위를 하겠지. 행성협약에 기명되지 않은 문명으로 갔을 거야.

항성간 자유연락과 공간축약 항해조약, 그리고 전쟁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문명이 아직 일천하여 우주공간으로 넘어올 수 없는 원시문명의 행성으로 도피한 것이 틀림없었다. 안드로메다군이라. 리스트에 올라있는 행성만 해도 천 개가 넘는다. 그걸 언제 찾고 있단 말인가. 행성감사관은 구부리고 있는 사내의 등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 포기하게. 그걸 언제 찾는단 말인가.  

- 언젠가는 찾겠지.
사내는 동그랗게 말고 있는 등을 펴지도 않은 채, 묵묵히 시커먼 우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 시간은 의미가 없으니까.

행성감사관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말투로 사내를 제지했다.
-  사적인 복수는 성간경비대의 규칙위반이네. 1조 1항. 첫 번째 조항 아닌가.

사내는 말 없이 자신의 가슴에 달린 팔각장식을 떼어 던졌다. 감사관은 장식을 받지 않았고 팔각문양은 감사관의 제복에 맞고 파란조명이 빛나는 선실의 바닥에 영롱한 소리를 내며 굴러 떨어졌다. 사내는 천천히 몸을 돌린 채 선실을 빠져나갔다. 행성감사관은 말없이 고개를 들더니 시커먼 우주로 시선을 돌리며 기나긴 한숨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미 보지 않았나. 헤라나.”

“뭐?”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사내의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사내는 몸을 돌렸다. 검은 망토 사이로 슬쩍 번쩍이는 은상감의 레이피어가 들썩였다.

“푸른 유성과 붉은 태양과 새하얀 왜성들의 사이에서 말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사내의 고개가 들렸다. 푸른 눈동자가, 눈망울 전체를 밝히는 푸른 안광이 드러났다. 손을 얹고 빗방울을 얼굴에서 털어내던 헤라나의 찌푸린 얼굴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더니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사내의 눈은 헤라나가 아니라 세차게 내리고 있는 빗줄기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검은 구름은 붉은 지붕 위에 천처럼 드리워져 끝없이 눈물을 흩뿌렸다.

불타는 플레아데스 성단의 위성에서 보던 푸른 유성우가 사내의 눈 앞에 나타났다. 싸늘하게 식어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아내의 눈에 푸른 빛이 비쳐갔다. 사내의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눈에도 역시 푸른 빛줄기가 맺혀 있었다. 마지막 말 한마디를 남기지도 못하고, 켄타우리족의 마지막 만가 역시 남기지도 못하였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아내의 손아귀에 남아있는 회색의 팔각성문양. 고개가 떨어지자 사내의 눈의 유성우가 사라지고 팔각의 문양만이 가득하게 들어섰다. 동일한 음계의 멜로디가 조용하고 낮게 사내의 입에서 울려 퍼졌다. 가족의 상(喪)을 대신하여 부르는 만가. 자신의 목소리지만 그것을 사내는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지구의 남반부에서 사내는 천천히 오른 주먹을 들어서 새끼손가락부터 펴기 시작했다. 묘한 광채가 맴도는 회색의 별장식이 빗물에 젖기 시작했다. 헤라나의 눈이 못 박힌 듯 사내의 손바닥에 얹힌 작은 장식에 머물렀다.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삶이라는 것은 짧다고 인간들은 이야기하더군.”
빗물이 모자에서 떨어져 사내의 입술에 떨어졌다. 사내의 입술과 얼굴에서 물이 흘러 턱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헤라나의 손이 천천히 허리춤으로 옮겨갔지만 사내의 어조는 여전히 담담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추억도 한순간, 후회도 한순간, 행복도 한순간이라지.”
빗물이 바람을 타고 조금씩 자리를 옮겨갔다. 허공에서 벽을 타고 땅으로 흘렀다. 투명한 빗방울은 오렌지색 지붕을 타고 주황색이 되었다가 연갈색의 벽을 타고 갈색으로 흐르며 동무들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포석의 빗물은 시내가 되고 작은 여울을 헤라나와 사내의 발 아래 만들었다. 수직의 운동은 수평의 역동이 되어 항구를 지나 너른 바다를 향해 달렸다. 사내의 입이 다시 열렸다.  

“차라리 짧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수천만 번 들었지.”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푸른 빛이 감도는 사내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드러나자. 헤라나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장검을 뽑아들었다.

“다른 별의 시간과 이 땅의 시간을 수만 군데 뒤져도, 맺힌 것은 줄어들지 않았어.”
쏟아지는 비가 시야를 가리고 뿌연 장막을 만들어내었다. 조그맣게 열려있던 골목의 이층 창들이 하나씩 덧문을 닫아걸기 시작했다. 모자챙의 빗소리가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헤라나의 망토가 한쪽 어깨로 젖혀지고 오른손에 쥔 장검을 앞으로 내밀고 몸을 옆으로 내밀었다. 완벽한 스페인식 결투자세. 사내의 손이 천천히 자신의 허리춤으로 옮겨갔다. 스르릉 칼이 뽑히는 소리가 시냇물 같은 빗소리 사이로 흘러나왔다. 오직 빗소리만이 사방을 메우고 골목을 메우고 하늘을 둘러싸고 있었다.

“말해 보아라. 사파이인이여, 그 영겁의 시간동안 너는 행복했더냐?”
헤라나는 말이 없었다. 켄타우리인이 자신의 말에 스스로 답했다.

“난 내 삶이 짧기만을 바랐다.”
헤라나, 사파이인의 입에 슬쩍 음산한 미소가 흐르는 것을 사내는 놓치지 않았다. 우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번쩍이며 세상이 잠시 밝아졌다. 비웃음. 저 표정. 얼굴과 육신이 바뀌었어도 그 실체가 가지고 있는 정신의 비열함은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사내의 표정 역시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는 중이었다.

“날 자유케 하여라”
사내의 차가운 목소리에 불 같은 분노와 당혹감을 담아 헤라나가 대꾸했다. 성대가 아닌 몸 전체에서 울리는 천둥 같은 소리였다.

죽어라. 사파이인들의 욕설, 붉은 수염의 이가 슬쩍 빛나고 차가운 미소가 얼굴에 감돈다 생각한 순간, 몸은 생각보다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오는 중이었다. 사내가 있던 자리가 진공상태가 되면서 뻥하니 빗물이 모여 터져나갔다. 헤레나의 자취 역시 터져나가는 빗물을 남겨둔 채 비어있었다.

번개가 세상을 밝히며 구름과 구름 사이를 연이었다. 두 사내의 거리는 어느 새 천천히 줄어들었고 두 쇳덩이가 연인의 입술처럼 간극을 없애며 붙었다. 빗물에 다시 번개의 광채가 어렸다. 머나먼 켄타우리의 별빛이 어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베텔규스의 영화가 감돌았다. 이름 모를 은하를 가르는 혜성에 항성의 빛이 닿아 연한 붉은 빛으로 번쩍였다. 푸른 유성우가 맺힌 채 스러지는 아내의 눈동자를 지켜보던 사내의 눈에 빗물이 쏟아졌고 별이 들어갔다. 세상을 밝히는 빛이 사라지자 일순간 땅은 어두워지고 사내의 삶은 영겁의 흑암을 구르고 달렸다. 손 대신 칼이 움직였고 입술대신 쇳덩이가 부딪히며 말을 건넸다.  영원함이란 무엇인가. 별보다 오래 산다는 켄타우리인의 수많은 상념 속에 굳건히 자리잡은 환시(幻視)는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내의 눈동자에 비친 푸른 유성우. 빛줄기. 빗줄기.


흐르는 비 속에 붉은 망토 하나만이 주인을 잃고 질펀한 물 속에 놓여 있었다. 이미 사념체가 소멸한 유기물은 진흙처럼 부서져 엷은 노란색을 띄며 강물이 된 빗물에 흘러 항구로 내달리는 중이었다. 우두커니 검은 조상(造像)처럼 서 있던 사내의 눈은 푸른 빛이 조용히 갈무리되고 어느 샌가 평범한 검은 눈동자로 돌아와 있었다. 날아가버린 모자를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사내는 빗줄기의 근원을 쳐다보았다. 떨어진 비는 눈물인양 얼굴을 타고 흘러 바닥을 적셨다.
사내는 느낄 수 있었다. 간단한 삶의 소멸, 타인의 종말로 잊힐 수 있는 기억이란 없다는 것을. 아득히 먼 종생(終生)의 그날까지 없어지지 않을 추억인 것을. 켄타우리인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의 모든 과정을. 마음속의 푸른 빗방울은 영원이 소멸하는 그 날까지 남을 것이었다. 카르타헤나의 봄비가 언제까지나 쏟아지는 이날을 기억하듯이.

사내는 눈을 감고 홀로 비를 맞고 있었다. 사방이 빗소리 하나로 충만하였다. 도시는 빗줄기와 하나가 되어 은하수처럼 바다로 흐르는데, 제 자리에 버티고 선 사내만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북극성처럼 제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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