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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탄생]dedicate

2012.03.31 23:4903.31

이제 도시를 콘크리트의 정글 따위로 비유하는 것은 조악하다.
정글보단 바다가 좋지 않을까. 그래, 이 농밀한 철근콘크리트들은 바다가 아니면 비교할 대상이 없다. 불야성을 이루는 밤의 도시를 내려다보던 달은 무수한 빛의 기둥들, 광해로 보이지 않게 된 지 오래. 이젠 달을 전설 속의 흡혈귀쯤으로 치부해도 될 것이다.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고층건물들 사이로 퍼져 나가는 소음 속에 사라져버린 자연의 호곡 성이 들려오는 것 같다면 과대망상일까? 바벨탑. 인간들이 신에 도전하기 위해 짓다가  파괴당한 이것은 현대에 다시 부활하여 이번엔 신을 찔러죽일 창으로 변모된듯하다.
페스트...흑사병이 당시 유럽인구의 1/3을 줄였던가? 제3차 세계대전은 세계인구의 삼 분의 일을 지웠다. 인간이란 중요자원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핵과 같은 대량 살상무기의 사용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자그마치 40억이 죽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초 단위로 수천의 사람이 죽어간다.
중요자원이라…. 현대에 와선 인간의 가치가 폭등했다.
생각해보라. 모든 기계문명은 어떤 식으로라도 석유나 석탄, 천연가스 같은 유한하고 대가가 큰 자원을 소비한다. 하지만 지구 상에 넘쳐나는 인간을 사용하기 위해선 빵과 고기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인간! 130억에 육박하는 인간이 지구 상의 물을 멸종시키다시피 한 후, 모순되게도 인간은 물의 재창조에 가장 힘쓰게 되었다.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 연관성 없는 문장들의 흐름 속에서 사혁은 눈을 떴다. “아…. 지금 시간이?”
깜빡 잠이 들었었나? 사혁은 시계를 슬쩍 쳐다보며 벤치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4시 반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가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사혁! 많이 기다렸나?”
약속시각에 늦은 것치곤 굉장히 보편적이고 식상하며, 염치없는 말이었다. 늦은 걸 알면서도 뻔뻔하게끔 저렇게 물어보다니? 늦었을 땐 사과부터 해야 성장기에 정상적인 부모님과 나쁘지 않은 교육기관에서 올바른 교육과정을 거쳤다는 걸 의심받지 않을 텐데. 사혁은 어이없어했다.
“당연히 많이 기다렸지. 심지어 이십 분이나 졸았다고. 그보다 사영, 배급은 어떻게 됐나?"
”말도 마. 이놈들은 핑곗거리만 있으면 배급량을 줄이려고 기를 쓰는데, 이번에 또 2L나 줄였어!
사영은 공무원들에 대한 적개심을 마음껏 표출하며 짜증을 냈다. 그 목소리 크기가 포효하는 수준인데 이 정도면 사영이 곧 고양잇과 대형 맹수로 변신하여 구청 공무원들을 물어뜯으러 간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닌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사영이 소리치는 걸 보고 슬금슬금 멀어지는 게 아닌가!
“그래도 수도관에 장난친 놈이 물을 이만저만 빼 간 게 아니잖아? 구청 측에서도 피해가 클 텐데 말이지. 사실 수도관도 구청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각 가정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으니 구청에서 ‘배급은 해줬는데 관리를 못 한 너희 잘못이다. 불만있어? 배 째라!’ 식으로 안 나오는 게 다행이지.”
“그래도 수도관에 구멍을 뚫어서 빼돌릴 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던 게 누군데? 조질 거면 파이프에 장난질 한 놈을 잡아 조져야지, 물 받으러 구청까지 온 사람을 조지냐! 힘없는 서민은 엿 먹으라 이건가?”
사혁이 구청을 옹호하자 화가 난 듯 더욱더 목청을 돋우는 남자. 정사영이었다. “하여간 물을 훔쳐간 놈은 확실히 ‘공장’ 행 일 테니 그걸로 만족하는 게 어때.” “그건 당연한 거고! 그놈이 ‘공장’에 가는 건 가는 거고 내 피해는 어쩔꺼냐는거지.”
“아아 피곤한 친구로세. 그런 건 저 하늘 위에 있는 분께 말하는걸 추천하는데…. 듣기로는 무한한 인내심으로 세상 모든 불평불만을 들어준다더라. 그보다 난 일단 집으로 갔으면 하는데?”
사혁은 벤치에서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뗐다.
공장이라…. 이 ‘공장 시스템’덕에 세계적인 물 부족도 어느 정도 해결됐고 전 세계의 치안수준도 급격히 높아졌는데. 구 싱가포르의 범죄처벌이 엄격했다 하나 모든 노숙자와 범죄자는 ‘공장’으로 보내는 지금에 비하면 오히려 어린애 장난 일터이다. 아니, 적어도 노숙자나 사회빈민층이라고 해서 처벌하진 않았을 테니 구 싱가포르의 법제정자들은 부처와 간디의 현신이라 해도 될 정도이리라. 아마도 모든 범죄자를 사형시킨다고 해도 이 정도 치안율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니지. ‘시스템’도 사형이나 마찬가지인가?”
“응? 뭐라고?”
사혁의 혼잣말에 사영이 되물었다.
“아아, ‘공장시스템’ 말이야. 그건 사실 사형이랑 다를 게 없지 않느냐고.”
“공장으로 보내지면 결국 죽는다는 점에선 동일하지. 그렇지만 난 노숙자나 빈민들까지도 공장에 보내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사영의 얼굴엔 약간의 공포와... 혐오감이 깔려있었다. 그걸 눈치챈 사혁은 불쾌감을 느꼈다.
‘어째서지? 어째서 너는 공장시스템에 혐오감을 내비치지, 사영? 시스템 덕에, 공장으로 보내지는 ‘노동자’들 덕에 살아있는 주제에? 너의 혐오는 정당한가? 너는 순수하고 깨끗하게 살아왔나 정사영!‘
사혁은 생각하면 할수록 친구에 대한 불쾌감이 분노와 경멸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탈주한 중국인들이 아직도 안 잡혔다지? 그놈들이 수용돼있던 제3공장의 책임자들이 전부’공장 노동자‘ 가 되었다던데 사실이야?”
사혁은 사영에 대한 경멸감을 숨기지 않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렇다던데? 공장장이 ‘노동자’가 되다니…. 인생 종 친 거지. 하긴 얼마나 관리가 허술했으면 ‘노동자’ 1만 2천 명이 탈출을 했겠어? 다 자업자득이지 뭐.”
사영은 사혁의 경멸이 중국인들이나 공장장을 향한다고 생각했는지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여기서 오른쪽으로. 이쪽 길이 좀 더 빠르더라고.”
사영이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사혁과 사영이 들어간 곳은 예전의 빈민가였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공장 노동자’로 끌려가고 이곳은 재개발지역으로 시정됐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모종의 연유로 재개발 시일이 차일피일 미뤄지다 결국은 몇 년이 넘게 방치되어 사람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분명히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야 마땅할 터인데...사람이 있었다!
“사실 이런곳을 함부로 돌아다니다간 부랑자로 오인 받아서 ‘공장’으로 잡혀갈 수도 있지만, 사람도 없는 곳을 굳이 경찰이 순찰하겠어? 그러니 그만 두리번거리고 빨리 가자니깐.”
“쉿, 잠깐만.”
사혁은 사영의 말을 반도 듣지 않고 중간에 잘라내며 한 곳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엔 럭키슈퍼란 간판을 비스듬히 걸친 벽돌집 아래에 사람처럼 생긴 누더기, 아니 누더기를 꽁꽁 둘러 싸맨 사람이 있었다.
“헤에? 사람이네? 이런 곳에 사람이 아직 있었나?”
사영은 다소 기묘한 감탄 성을 터뜨렸다. 말투를 보니 딱히 도와준다는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아니지. 그저 도와준다는 생각이 아직 안 떠올랐을지도. 사영이란 인간은 가볍긴 해도 잔정이 많고 착해 빠졌으니 못 본 척 지나칠 리는 없다.
사혁과 사영이 노숙자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뭐라 외쳤지만 사혁으로썬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저거…….중국어인가?”
“그런 거 같은데. 죽기 싫으면 꺼지라고 협박하는데?”
대학 다닐 때 교양과목으로 중국어를 배운 사영이 해석해 주었다. 한국의 길거리에 돌아다닐 수 있는 중국인은 분명 제3공장에서 탈출한 놈들 중 하나일 터. 그런 신세라면 사람들을 피하는 게 당연하겠지? 그래도 열흘 넘게 물 한 모금 못 마셨을 텐데 조금 지쳐있는 게 전부라니. 사람 하나 죽이고 피라도 내어 마신 건가? 사혁은 의문을 느꼈다.
“저 사람이 자신은 칼을 가지고 있으니 죽기 싫으면 꺼지라는군.”
사영이 말하는 것만 제외하면 대형 쓰레기와 차이점이 없어 보이는 자의 말을 요약해주었다. 대형 쓰레기라……. 대형 쓰레기를 폐기하려면 어디다 신고를 해야 하더라? 동사무소? 구청? 어쨌든 저 사람도 구청이든 경찰서든 신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쓰레기와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겠다. 그렇지. 쓰레기는 처리해야지….
“칼을 가졌다고? 협박치곤 조악하군그래. 애초에 칼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 사혁이 중국인의 협박을 무시 하려하자 마치 알아들은 것처럼 중국인은 칼을 꺼내 들었다.
“아..아 좀 당황스럽구만”
“…….”
사혁은 정말 당황했는지 살짝 멍한 표정이 되었다.
‘저놈이 한국말을 알아듣나? 아니 근데 왜 중국어로 말하는 거지? 여기가 중국이었나? 그렇지, 여긴 중국인데 우린 한국인….일 리가 없지!’
당황한 나머지 사혁의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다.
“으음…. 그러면 저 사람 붙들고 개소리라도 상관없으니 시선 좀 끌어봐. 경계심을 풀게 하면 더 좋고.”
“넌 어쩌려고?”
“생각이 있으니까 시키는 거겠지? 일단 해보기나 하라고.”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사혁은 웃었다.








영화나 소설처럼 목 뒤나 뒤통수를 쳐서 사람을 기절시키는 건 힘들다. 하지만 상대가 며칠째 허기에 고통받고 쫓기느라 피로한 상태라면 어떨까?
각목 정도라면 손쉽게 기절시킬 수 있을듯하다. 하지만 각목은 부피가 너무 크다! 세상 그 누구든 각목을 들고 접근하는데 대비를 안 하려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칼도 가지고 있다. 상대가 저항한다면 아~아프구나 하며 끝낼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어쩔 수 없지만, 벽돌을 써야 하나. 너무 힘껏 치면 죽을 수도 있지만,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괜찮겠지.’
사혁은 바닥에서 한 손안에 들어갈 만한 깨진 벽돌을 찾아 손에 꼭 쥐었다. 한번, 한번에 쓰러트려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다음이 꽤 고달파 질 것이다.
사혁은 손안에 보이지 않게 움켜쥔 돌의 촉감을 확인하며 그동안 열심히 탈주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영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되가냐?”
“우리가 자신을 잡아가려 한다 생각하고 겁을 먹은 모양이야. 그래서 ‘우리는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다 칼은 내려놓아라, 원한다면 도움을 주겠다 라고 했더니 적어도 경계하진 않네.”
순간 사혁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저 중국인에게 괜한 경계심을 심어줘 일을 어렵게 만들 수 도 있다는 걸 떠올리곤 억지로 얼굴을 폈다.
저런 한심하고 멍청한 놈! 어떻게 생명을 위협당해 도망치는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저렇게나 안일하단 말인가! 물론 며칠째 쫓겨 다니며 심신이 피로하단 건 알겠지만 몇마디 말에 쉽게 긴장을 풀어버리다니…. 저 정도로 어리숙해서 어떻게 도주생활을 계속해왔는지 심히 궁금해진다. 사혁 자신이 저런 입장이었다면 역으로 불쌍한 척 다가가서 죽여 버렸을 것이다. 사혁과 사영은 가족도 집도 없이 정부 보조금으로만 살고 있기 때문에 실종된다 해도 경찰이 딱히 성심성의껏 조사할 것 같지도 않다. 이런 인적이 드문 곳에서 죽여도 뒤탈이 적은 것이다.
‘그런 건 알 리가 없겠지만 말이지.’
사혁은 속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럼 우리가 숨겨주고 보호해줄 테니 따라오라고 말해봐 그리고 잠시라도 좋으니 내 쪽으로 등을 돌리도록 서있는 위치를 조절해주면 좋겠는데.”
“예예, 알겠습니다 고객님. 주문확인 하겠습니다. 저 사람을 따라오게 한다. 그리고 등짝 좀 보자 맞으시죠?”
사영은 그 답지 않게 비꼬며 다시금 중국인에게 말을 걸었다. 말투와 표정을 보니 아까부터 명령조도 말한 게 마음에 안 들었나보다. 사혁이 사영에게 사과를 할까말까 고민하는사이에 벌써 설득 작업이 끝났는지 사영과 중국인이 움직이는게 보였다.
중국인이 사혁을 한 번 뒤돌아보더니 사영을 따라 움직였고 사영이 미묘하게 방향을 틀자 중국인의 등뒤가 무방비하게 사혁에게 들어났다. 그순간을 노린 사혁은 팔을 휘둘렀다! 퍽! 다행히도 한 번에 끝났다. 모래성이 무너지듯이 스르륵 쓰러지길래 죽었나 싶었지만 숨을 쉬는걸보니 죽진 않았나보다.
“아...! 뭐하는 짓이야 사혁! 도와준다고 해놓곤 왜 이러는거야?”
사영이 매섭게 따져물었다. 사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있는 친구란게 저 모양이라니. 등뒤를 내보이게 해달라고 말했을 때 어느정도 눈치를 채야 정상아닌가? 아니면 다 알고서도 자신의 선함을 가장하고 뻔뻔스럽게 모르는 척 되묻는건가? 어느쪽이라도 사람 참 피곤하게 만드는 케이스가 아닐 수 없다.
“아아 그건 알거 없고 그냥 지켜만 보면 너한테도 좋은 일이니깐 가만히 있어.”
사혁은 사영의 말을 일축하고 핸드폰을 꺼내 경찰서로 전화를 걸었다.
“경찰서죠? 여기 이번에 공장에서 탈출한 중국인 한명이 있는데요. 아,네? 그렇습니까?”
사혁은 실로 위풍당당하다 말할수 있는 표정과 몸짓으로 통화를 시작했으나 이윽고 목소리가 잦아들고 힘이 빠지는게 아무래도 일이 잘 안풀린 것 같았다.
“왜 그래? 경찰서에서 뭐라고 하던데?”
사혁에게 따져물었던 사영이지만 궁금한건 참지 못했는지 전화를 끊자마자 물어왔다.
“하아...저번에 탈출한 중국인들있지? 그놈들이 제4공장을 습격했다네. 지금 군은 물론 경찰인력까지 전부 차출당해서 이리로 올 사람이 없다는데. 대신 제1공장에 연락을 줄테니 거기로 직접데려가라는구만.”
“제 4공장이면 광주잖아! 그놈들이 언제 그까지 갔대?”
“그러게 말이야. 하긴 대구에서 탈출했는데 여기 부산까지 내려와서 우리한테 붙잡힌 놈도 있는데 광주쯤이야.”
그렇지만 정말 대단한 놈들이다. 대구의 제 3공장 노동자들이 탈출한 이후로 전국이 비상태세인데 부산과 광주까지 가다니. 경찰관계자들이 또 경을 치게 생겼지만 그야 내 알 바 아니지. 전국 각지에서 몇주째 야근하는 모든 경찰들을 분노케 할 만한 무관심을 보인 사혁은 결정을 내렸다.
“가자.”
“어딜?”
“그야 제 2공장으로지 어디겠어?”
여전히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영을 내버려두고 사혁은 중국인이 뒤집어쓰고 있던 천 재질의 낡은 모포를 찢어 기절한 중국인의 손을 묶었다.
“하지만 공장으로 데리고 가면 저 사람은 죽게 되잖아?”
역시 사영은 착해빠졌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저런 유약한 심성으로 버틸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어차피 이 사람은 언젠가 죽게되어있어. 고통의 기간을 우리가 줄여준다 생각해”
“하...하지만 이건 살인이야! 이럴순 없다고!”
“하! 모른척하지마. 23년간 네가 살기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네가 걸어온 길은 수천 수만 구의 시체들로 만든 통곡의 붉은 도로다. 그런데도 이제와서 손에 피를 묻히기 싫다는거냐!!”
아니,적어도 피는 없겠지.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장소는 새햐얀 백골의 땅. 철근콘크리트의 도시를 받치고 있는 것은 악취나는 시체들의 기둥이다.
존재만으로 죄악의 증거가 되는 마당에 홀로 고결한 척하다니!
“살아 숨신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형벌은 정해져있는거야. 너의 원죄를 잊지마라 사영.”
“궤변늘어 놓지마. 원죄를 지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살인을 정당화할 권리는 없어!”
“서로 흥분한 것 같군. 그러니깐...내말은 인골탑 위에 서서 죽음이란 형벌을 기다리는 동안 삶을 좀 더 윤택하게 만들어 보자는거지. 사형수에게도 그 정도 권리는 있잖아?”
궤변이다. 헛소리다. 사영을 설득하기 위해 되는대로 지껄였더니 결국 개소리 밖에 하지못했다. 그래도 워낙 박력있게 말해서 그런지 반박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형수의 권리라니....  사형수에게 만찬을 주는건 마지막 식사뿐이다. 하필 그런걸 예로 들다니. 곧 죽을 것 같이 말해 버렸잖아?
“그럼 공장으로 가자고.”
사혁은 사영이 반박할 말을 못 찾길 바라며 시계를 봤다. 5시였다.










큰 길로 나서니 시선이 집중된다. 당연하겠지. 이건 아무리봐도 사복경찰이 노숙자를 연행해 가는 꼴일테니. 사실 '노숙자 및 빈민층 처리법'이 시행되었을 때 이런 모습쯤이야 세발자국 걸을 때마다 한번씩 보였고 요즘도 간간히 일어나는 모양이니 딱히 엄청난 주목을 받을 만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시선집중은 그저 호기심에 의한 것일테니 신경 쓸 필요없다. 그런데 이 중국인을 같이 끌고가는 사영은 덜덜 떠는데 과장을 덧붙이자면 간질발작한다 해도 믿을 정도다.
“그만 떨어. 그러다가 의심받으면 골치 아파진다.”
“그..그렇지만 경찰에게 들키면!”
“그럴일 없어. 지금 전국의 군경들은 제 4공장으로 집결하고 있다. 부산경찰이 광주까지 갈 정도면 탈주했던 중국인 1만 2천명 대부분이 거기 있단 거겠지. 그러니 걱정 그만하고 태연한 척 하란 말이야.”
사혁은 불안해 하는 사영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아무리 비상사태라도 경찰의 공백이 있을 리 없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은 해놨지만 지금 그들이 하고있는 짓은 경찰 사칭에 납치인 것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만약 경찰에게 걸려서 한번 의심받기 시작한다면 끝도 없이 오해와 갈등이 불어나 나중엔 무슨 아침드라마 마냥 서로의 빰을 후려갈기고 고혈압으로 뒷목 잡고 쓰러지며 알고보니 경찰과 사혁이 형제지간이었다~라는 전개가 될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런일이 생기기전에 경찰서에 전화를 해서 공장에 데리고 가란 허락을 받았다는걸 확인하면 되지만...아까 나와 통화했던 경찰이 부재중이라던가 하는 상황도 고려해야지.’
그런거야 어찌됬든 사영의 상태는 확실히 나아졌다. 떨지도 않고, 불안한 눈빛으로 두리번 거리지도 않는다. 표정은 굳어있지만 굳은 표졍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가능하니 신경쓸 필요 없으리라.

“그런데 이 사람을 공장으로 넘기는 것과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것이 무슨 관계지?” 사영은 긴장이 풀려서인지 질문할 여유도 생긴 모양이다. 말투가 시비조에 가까운 걸모니 아직도 중국인을 풀어주자고 말할 셈 인듯하다.
“포상 받아야지. 듣자하니 공장장들은 생산량으로 실적을 평가한다더라. 이 중국인은 손실을 감안해서라도 4L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에게 1L씩은 주지 않을까?”
“제기랄! 이건 살인이야. 난 못하겠어! 제발 부탁인데 이 사람 그냥 놔두고 가면 안될까?”
“하아...헛소리 좀 하지마. 여기까지 와서 놓아주자고? 그리고 너도 배급량이 줄어서 물이 필요할텐데?”
“.....”
실질적인 문제를 언급하자 사영이 입을 닫았다. 역시 이상주의자들이란. 입에선 한껏 고결하고 숭고한 대의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자신의 일에선 소인배나 다름없다. 방금까지 살인이네 어쩌네하던 사영도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들이대자 잠잠해지지 않았는가?



사영은 스스로에게 한없이 경멸감을 느꼈다. 자신에게 배급된 40L, 아니 2L가 줄어든 38L의 물과 아직 기절한 채 축 늘어져 있는 저 사람을 죽게 놔둔다면 받을 수 있는 1L의 물을 생각했을 때, 죽여도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사영이란 남자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방금까지 선을 말하다가 악을 생각하고 침묵한 자기자신에게 살인 충동을 느꼈다. 사영은 사영이란 자를 죽이고 싶었다!



사혁은 사영의 눈빛과 표정에서 자괴감과 혐오를 뒤섞은 듯 한  감정을 보았다. 아마 자신의 모순된 행동을 생각하고 그 상황을 곱씹으며, 혹은 자신에 대한 경멸감을 계속 헤집으며 자해하고 있겠지. 사혁은 사영의 주의를 돌릴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데 공장시스템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 그분 덕에 인류는 구원받고 멸망에서 벗어났는데. 그 정도로 위대한 천재를 역사책에선 ‘그저 그런 사람이 있었다.’라고 밖에 기술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 위인전이나 그의 삶을 다룬 영화가 나오긴 못할망정 너무 홀대하는거 아니냐고.”
“시스템을 상상하고 만들어 낸 것만해도 충분히 미친 놈이란걸 알 수있지. 어떤 사이코패스인지는 몰라도 워낙 상종못할 쓰레기라서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겠지.”
사영의 자기혐오가 공장시스템을 만든 과학자에게 전이 된 걸보니 사혁의 의도는 성공인 듯 하다. 하지만 인류의 구원자를 너무 심하게 매도하는게 아닌가?
“쓰레기라니, 말이 너무 심한거 아니야? 그는 인류의 메시아, 재림예수, 미륵불이라고. 그분이 없었으면 인간이란 종은 이미 멸종된지 오래. 몇 백만년 뒤에 인간이 화석으로 발견될지도 몰랐다고.”
“헛소리하네. 그렇게 위대한 신의 현신이 세계 대전을 일으키냐? 그 빌어먹을 개자식덕에  몇 억이 죽었는지 알아? 알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고!”
반응이 예상보다 격렬하다. 사혁이 알기론 그 과학자에 대한 사영의 분노가 저 정도로 크진 않았는데, 스스로에게 보내는 증오가 전이되어 더 더욱 커진모양이다.
하지만 증오받으면 받을수록 좋다! 희생을 강요당하는 약자들의 분노일수록, 저항하지못하는 사냥감의 분노일수록 사혁은 기뻣다.
“나약한 자들은 도태되는거지. 나약한 국민들은 인류의 진화를 위한 밑거름으로 쓰이는거야. 시스템의 발견은 인류사의 위대한 한걸음이 되는거지!”
“미친 새끼.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3차세계 대전이 끝나고 패전국의 국민들이 모조리 공장으로 끌려가는게 위대해? 중국의 20억 인구가 어떤 꼴이 됬는지 알면서? 지금 당장도 우리가 공장으로 끌고가고 있어! 옛날엔....우리 할아버지 세대가 어릴 때 만 해도 물 부족따위는 꿈도 못 꿨다고 들었어.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어떻지? 물 1,2L에 민감해지고 전쟁포로들을 붙잡아 물을 만들고 있는데? 정말로 인류가 진화해서 한 단계 더 나은 종족이 된다해도 이런 미친 세상 따윈 엿 먹으라 그래!”
사혁은 사영이 분노하는 이유를 알아챘다. 사영의 아버지와 형이 세계대전 중에 전사한 뒤 그는 7년간 고아로써 지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가족을 잃은 슬픔, 자신에 대한 증오를 모두 미친과학자에 대한 분노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 형! 내 아버지는! 그들은 뭐가 되지? 그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 생각하고 가족들의 죽음을 용납하라고? 너도 시스템을 개발한 미친놈이랑 똑같은 놈이야! 난 이 중국인을 공장에 넘기는 것까진 동참하겠어. 같이 잡은 것이고 물도 받아야 하니까. 하지만 그 뒤론 너랑 나는 모르는 사이다. 미친 사이코 패스 새끼야."
시스템을 개발한 미친놈이랑 똑같은 놈이다라... 같은 사람인게 당연하다. 사혁이 시스템을 만들었으니!
'하지만, 미친놈이란 수식어는 맘에 안드는데. 난 인간들을 위해서 한 행동이라고. 미시적으로 밖에 볼 줄 모르는 우매한 것들은 이해 못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구원자다. 구세주다.'
수백년 뒤 인간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지 생각하니 흥분된다. 열 세살의 나이에 시스템을 개발한 뒤 자신에 대한건 공개하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글쎄,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니 집요한 수색자들은 사혁에 대해 뭔가를 알아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우선순위는 격앙된 사영의 감정을 가라 앉히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와 형님의 일은 정말 유감이다. 비극이지. 하지만 너희 가족만 죽은게 아니야. 내 아버지도, 형도, 누나도! 전쟁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내가 그들의 죽음을 하찮게 본단거냐? 아니지. 오히려 그런 일은 다시 생기면 안돼. 그러나 전쟁을 겪지 않았으면 인류전체의 공멸이었으니 어쩔수 없다는 거지."
"..."
"그리고 누가 중국이 홀로 15개국의 협공을 1년간 버틸거라 생각 했겠어? 연합국의 마지막 적이었던 중국이 그렇게 분전할 줄이야..."
사실 중국은 동맹국이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인구를 가졌다는 여건 덕에 동맹국이란 누명을 쓰고 연합국에게 공격 받았고 그 결과가 사혁과 사영에게 끌려가고 있는 중국인 포로이다.
그리고 사혁과 사영의 가족들은 중국군의 공격에 죽었는데, 사혁이 은근슬쩍 그걸 상기시켜 줬으니 사영의 남은 분노는 눈앞의 중국인에게 옮겨갈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 가족들이 전사해서 보상금과 정부보조금이 나오는 거지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도 공장에서 물이나 만들고 있었겠지."
"..."
어쩌면 가족들이 죽어서 잘 됐다고 들릴수 있는 뉘앙스의 말을 내뱉었는데도 사영은 반응이 없다. 기절해 있는 중국인을 쏘아 보느라 여념이 없는 것이다.
사혁은 자신의 예상에 한치의 빗나감도 없이 행동하는 친구를 보고 속으로 웃었다.
"이까지 끌고 왔으니 여기서부턴 택시를 타고 가자고."
사혁은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6시였다.











"공장내부는 외부인 출입이 금지되어있습니다. 내부인과 선약이 되어있습니까?"
"예, 아마 공장장님과 약속이 되어있을 겁니다."
경비원의 물음에 사혁이 대답했다. 사혁의 대답을 들은 경비원이 경비실 내부에서 무언가를 하더니 잠시후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공장장님은 서편 3층 공장장실에 계십니다. 내부관람은 불가능하오니 외부인 통로로 다니시길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뒤 어디선가 공장직원 두명이 나타나 중국인을 인계해 받아가고 사혁과 사영은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사혁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6시반이었다.
"여기가 그 악명높은 '공장' 이란 말이지? 생각외로 으시시하거나 피로 얼룩진 곳은 아니네?"
"여긴 외부인 통로이니 당연히 깔끔하고 정상적이지. 그런데...... 이곳도 오랜만이네."
"응? 오랜만이라니. 너 여기 와본적 있었냐?"
"...... 내가 오랜만이라고 했었나? 말실수겠지. 신경꺼."
위험했다. 사영이 그냥 대수롭지않게 넘어가서 망정이지 일일이 캐물었으면 변명하기 힘들었을게 분명하다.
그건 둘째치고 이곳에 정말 오랜만에 와본다. 게다가 사혁이 직접 디자인하고 설계한 공장인 만큼 더욱 애착이 가는것이다.
부산 지역의 제 2공장은 말이 제 2공장이지 가장 먼저 건설했고 첫번째로 가동을 시작했다. 다른 지역의 공장은 부산의 공장을 그대로 본따 만든것 뿐인것이다.
몇분간 걷던 사혁과 사영은 공장장실 이라고 적힌 방앞에 도착했다.
"여기구나. 그런데 굳이 공장장을 만날것 없이 그냥 물만 받아가면 안되나?"
"더 좋은거 아닌가?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건 좋은거라고."
사혁이 대답하며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안에는 중년이라기에도, 노인이라하기도 애매한 반백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제2공장 공장장인 김요셉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탈주자를 잡았다고요? 대단하시군요! 이를 어찌 보답해야할지..."
"안녕하십니까, 저는 사혁. 이쪽은 정사영이라고 합니다. 뭐..우연히 잡은것일뿐. 대단하지도않고 공장장님께 치하를 들을 일도 아닙니다. 보답은 물로 주시면 좋겠는데요."
"겸손하신데다 소박하시기까지! 물정도야 드리고말고요 더 필요하신건 없나요?"
위험하다. 사혁의 본능이 경고하고있었다. 이 남자는,이노인은 위험하다!
"정말로 다른건 필요없습니다. 그저 저와 사영에게 물 1L씩만 주시면 됩니다. 바쁘실텐데 저희가 방해를 하는건아닌지?"
"왜 그래? 좀더 많은 걸 주신다는데 마다하고..."
"조용히 해."
눈치없이 끼어드는 사영을 조용히 시키고 사혁은 공장장의 눈치를 살폈다.
사혁은 언젠가 읽은 책에서 '이유없이 많은것을 주려는 사람은 가장 많이 가져가려하는 사람이다.'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공장장은 긴장하는 사혁을 보고 웃더니 자연스레 왼손을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그럼 두분에게 간단한 질문을 해도 될까요? 공장 자산을 제 임의대로 빼돌리는데 적어도 어떤사람인지는 알아도되겠죠?"
"예 그정도야... 그보다 말을 놓아주시는게 어떠실지? 듣는 제가 불편하네요."
"존대는 제가 편해서 하는것이니 신경안쓰셔도 됩니다."
사혁의 말을 자연스레 흘리는 공장장이었다. 계속 저자의 페이스에 넘어가면 대화의 우위에 서기 힘들다. 하지만 너구리같이 빠져나가는 말새가 예사롭지않다!
"두분의 나이와 가족구성, 직업을 알고싶은데 묻는게 실례는 아니겠죠?" 공장장이 웃으며 물었다. 별 괴상한걸 묻는다 싶지만 또 해주기 곤란한 질문은 아니라서 대답을 회피하기도 힘들다.
"저희 둘다 스물세살, 가족은 없고 직업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건왜..?"
"직업도, 가족도 없단거죠? 그럼 없어져도 사회에 해악을 끼치진 않겠군요." 그말과 동시에 공장장은 오른손을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
퍽!
둔탁한 소리와함께 사영이 쓰러졌다.
"......"
사혁은 움찔했다. 그순간까지도 공장장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왜 반응이 없지요? 보통 깜짝 놀라던가 방어자세를 취하던데."
"제 뒤통수는 어째서 치지 않는지 궁금해서죠."
"그건 뒤통수를 후려칠 사람이 한 명 뿐이라서 그렇습니다. 왜이러는지는 묻지 말아주세요 자세히 알려드릴 수는 없지만 공장은 실적이 중요하단것 정도는 말해드리죠. 그럼... 저희 공장의 노종자가 된것을 환영합니다. 사혁씨"
그말을 마지막으로 사혁은 정신을 잃었다.







"아...여기는?"
사혁이 다시 눈을 떳을 땐 그의 사지가 결박당하고 컨베이어 벨트에 묶여 어딘가로 이동되는 중이었다. 사혁은 무의식적으로 공장 한쪽에 걸려있는 시계를 봤다. 9시였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펼쳐져있는 것은 지옥, 아니 지옥을 압도하는 수라장의 광격이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가슴을 꿰뚫고 등골을 싸늘히 만들었으며 사혁이 매달려있는 컨베이어 벨트의 끝에는 압착기, 사람을 짜내는 압착기가 있었다.
벨트에 묶여있는 사람들이 차례로 압착기속에 들어가서 쥐어짜여 피를 내놓고 그 시체에서 한 방울의 피라도 더 짜내려 격자 철창에 한번 더 찍어누른다.
그런뒤 영혼이 빠져나간 짓무른 고깃덩이와 뼈조각은 잘게 갈려 육류 가공품으로 만들어졌다.

공장내부에 있다면 그 과정이 하나도 남김없이 고스란히 보여지는데 그광경을 본 인간제물들, 소위 '노동자'들이 미쳐 소리지른다.
사혁옆에 묶여있는 사영도 다를 바 없었는데 눈에 핏발이 서고 입에 거품을 문 채로 뜻모를 괴성을 내뱉았다.

결국 나의 결말은 이런것인가. 공장시스템을 만들어낸 자라고 돌팔매질당해 죽는 것이나 중국군에게 암살당하는 것 까진 상상해봤어도 이런 죽음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내 발명품에 내가죽다니. 마치 죠제프 기요탱 같잖아?'
사혁은 단두대를 발명하고 단두대에 목이 잘린 죠제프 기요탱을 떠올리며 실소했다.
죽는건 두렵지 않다. 사혁은 어렸을 때 부터 죽음이 주는 공포에 무감각했으며 가끔은 이 지루한 삶을 피해 죽는건 어떻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한적도 많았다.
하니만 사혁이 자살을 하지않은건 귀찮음. 그리고 이제껏 살아있던 습관에 의해, 타성에 젖어서이지 결코 삶에 애착을 가져서가 아니다.
그러니 사혁이 지금의 죽음에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나 삶에대한 집념이 아니라 자신이 이런죽음을 예측하지 못해서이다.
'내가 이런 걸 예상하지 못했다니. 주위에서 천재니 수재니 띄워주던 멍청이들이 틀렸다는걸 결국 증명해주는군.' 사혁은 어릴 때 자신 주위에 달라붙어 아부해대던 무리들이 떠올랐다. 자신이 모든 지위와 돈을 버리자 어느샌가 사라졌지만 그전까진 몹시 귀찮게 해서 그냥 죽여버릴까 고심도 많이하게한 놈들이었다.
사혁은 자신이 죽고 난 뒤의 일을 생각했다. 사혁의 피는 모아진 뒤 정수과정을 거쳐 물로 바뀌어서 인근지역에 배급될것이며 의지를 잃은 몸은 한낱 비루한 고깃덩이가 되어 가공된뒤 팔려나갈것이다.
사혁은 상상했다. 임산부가 삼킨 자신의 살이 새로운 생명의 일부가 되는것을.
그리고 사혁은 또한 상상했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피로 만든 물을 마셔 갈증을 씻어내는 장면을
"마셔라. 그물은 나의 피이니라. 먹어라. 그것은 나의 살이니라." 사혁은 성경구절을 제멋대로 바꿔 지껄였다.
그래. 이 쓸모없는 삶을 새로운 생명에게 바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이것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아닌가.
사혁은 어린애를 싫어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양분삼아 커갈 아이들을 생각하자 처음으로 그의 메마른 마음에 충족감이 생기는걸 느꼈다.
"내 피와 살을 먹고 자라나 죽음으로 회귀할 그대들에게....축복있으라."
사혁은 눈을 감았다.

-fin-


부족한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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