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탄생] 무성세계

2012.03.31 19:0703.31



1

  “자네가 포르노 사업을 시작했다고?”
  “쉿. 밖에서는 동물원 사업이라고 해줘.”
  오랜만에 만난 친구였다. 꽤 자산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로 돈이 많은 줄은 몰랐었다.
  “이번에 한몫 단단히 잡을 생각인가 보네?”
  “얼마 있으면 본전 돼. 나도 이정도 까지 일 줄은 몰랐는데 찾는 사람이 소문보다 더 많더라고.”
  “그럼 오늘은 자네가 한 턱 쏘는 거지?”
  “아, 이 친구가 이 사업 이제 얼마 못 가는 거 알면서. 하지만! 그래 기분이다. 오늘은 내가 쏠게!”
  간단히 식사를 마친 우리는 장소를 옮기기 위해 일어났다. 스물 남짓의 의자 사이를 지나서야 문에 닿았다. 이 길쭉한 인테리어는 효율성이 떨어지지만 이게 새로운 유행이었다. 야광 지렁이가 유행할 때쯤부터 시작된 것으로 기억한다. 친구를 좀 더 늦게 만났더라면 식당 깊숙한 곳에 앉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는 지금쯤 몇 분간을 걸어 나오며 불평을 했겠지.
  요즈음에도 신촌은 여전히 사람이 많다. 사람들이 술집을 찾는 이유에서 연애가 사라지다보니 길거리의 분위기는 작년과 다르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더불어 유리벽 인테리어가 유행을 끌었다. 지하의 술집들은 대부분 장소를 일층으로 옮겼다. 이제는 신촌 어느 방향을 보든 유리 안에서 술 마시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 너머의 몽환적인 조명은 알게 모르게 색이 천천히 바뀐다. 그 소리 없는 분주함은 술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내 기분을 고양시킨다. 저 너머에 있는걸 알고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노력 끝에 새로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도전적인 흥분의 페로몬. 밤거리는 오감을 다채롭게 자극해 준다.
  우리는 근처의 바에 들어갔다. 우리가 찾은 곳은 2층이어서 밖에서 안을 볼 수 없었다. 유리벽을 썩 좋아하지 않는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테이블에 앉자마자 기본안주로 닢이 나왔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닢이 있다. 돌기가 하나 있고 분홍색의 동그란 형태를 한 닢은 입에 쏙 들어오며 씹는 맛이 있다. 최근 과자를 잘 안 먹는 나도 닢은 좋아한다. 씹으면 안에서 나오는 단물과 친숙해진 게 벌써 6달 전 얘기다. 칵테일 두 잔을 주문한 뒤 아까의 화제를 이어서 얘기했다.
  “포르노 사업은 어때? 할 만해?”
  “어허 이 친구야. 우리끼리니까 괜찮지만 어디 가서는 동물원 사업이라고 해.”
  사람들은 언제 부턴가 스테이들을 다루는 일을 동물원 사업이라고 불렀다. 평소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한순간에 다르게 부르기란 쉽지 않았다. 포르노 사업을 동물원 사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뿐 이었다. 동물원이라는 단어가 더 부드럽다는 이유. 내게는 아직 친숙하지 않은 그 단어를 멀리 한 채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당연하지. 내가 어디서 말 함부로 하는 거 봤나? 다 자네 앞이니까 이렇게 편하게 얘기하는 거야.”
  “그럼 알고말고. 아무튼 일에 대해 물었지? 솔직히 말하면 무척 편해. 예전처럼 머리 복잡하게 사용할 일도 없고 전화 받고 왔다 갔다 하는 일 뿐이니까. 다른 동물원보다 앞서기 위해 새로운 메뉴를 구상중이어서 머리가 아프긴 하지만.”
  “하루에 전화는 몇 번 오나?”
  “거의 두 번 정도. 아예 없는 날도 있고. 전화가 오면 우선 고객과 장소를 확인해. 그러고는    하얀 방에 가서 암수를 하나씩 대리고 나오지. 둘을 트럭에 넣어서 고객의 집으로 찾아가. 대부분은 집에 검은 방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 그러면 그 곳에서 암수는 거사를 치르고 고객은 그걸 감상하는 거지. 그걸로 끝이야. 한 번에 어마어마한 돈을 받아.”
  “하얀 방? 구지 그들을 하얀 방에 넣어둘 필요가 있나?”
  “스테이들은 하얀색에 공포를 가지고 있거든. 그래서 하얀 방에 넣어두면 함부로 저항 하지 못해. 그러다 검은 방에 가면 극도의 안심을 하게 되며 눈앞의 상대에게만 초점을 맞춰. 이게 우리가 그들을 다루는 방법이지.”
  “자네는…….”
  “주문하신 칵테일 나왔습니다.”
  내가 질문을 던지려할 때 웨이터가 내 말을 끊었다. 잔에는 아른한 녹색 빛이 담겨 있었다. 잔을 부딪치고는 한 모금 입에 담았다. 나는 술을 들이키기 보다는 음미하는 것을 즐긴다. 입안에 머금은 빛의 향을 천천히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술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친구는 나를 차분히 기다려줬다.
  대화주제는 해외여행으로 바뀌었고, 덕분에 다음번 휴가 장소 고민이 해결되었다. 내 새로운 거주지 주변 얘기를 하다 보니 밤이 깊어져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해어졌다.
  집에 가는 길에는 가로등이 정렬되어 있다. 가로등이 뿜는 강렬한 흰 불빛은 스테이를 다시 생각하게 하였다. 몽롱함 속에 흰 점들은 뿌옇게 흩어져갔다. 탁 트인 공간이지만 어딘가 갇힌 것 같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흰색과 배경은 어울려 소용돌이를 이루었고, 그 중앙에는 내가, 저 멀리에는 스테이가 서 있었다.
  사실 나는 한 번도 스테이를 본적이 없었다. 상상 속의 스테이의 모습이었지만 그게 내가 아는 스테이였고 그게 바로 저쪽에 보이는 생명체였다. 가로등이 하나 둘 뭉쳐 나에게 이정도의 환상을 보여줄 줄이야. 마침 찬바람이 스쳤다. 덕분에 몸을 움츠리던 도중 정신을 차렸다.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둑한 길에 가로등들이 있을 뿐이었다. 길가의 노숙자는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깡통 뒤에 잠들어 있었다.
  순간 현실로 돌아오자 가족생각이 났다. 가족들을 빨리 보고픈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자기 전에 가족들과 할 게임을 생각하니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그러고 보니 집에 늦게 들어가면서 에로에게 줄 선물을 하나도 안 사들고 왔다. 에로가 아침에 초록색 주사위를 가지고 싶다고 식사 시간 내내 얘기했었는데…….
  아무렴 어떠랴, 문을 열고 들어가면 타나토가 나를 반겨줄 것이니 걱정 없다. 하린은 소파에서 독서를 하고 있을 거다. 소이, 도우는 설거지를 끝내고 후식을 먹고 있을 시간이다. 도림은 다음 주에 여행에서 돌아온다. 그럼 환영파티를 열어야지. 기분은 더 좋아진다. 이 기세라면 내일 아침에는 새로운 연구 계획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미래를 위한 나의 연구. 아직은 끝을 만들고 싶지 않은 인류의 해방구를 찾는 연구. 나는 매일매일 적합한 색을 찾기 위해 고민한다. 길에는 올 해의 유행은 녹색이라던 오늘 아침 신문이 바람과 지나가고 있었다.



2

  지금이다! 난 앞의 동물을 팔로 재끼고 달렸다. 그 동물은 내 예상 밖의 행동에 어쩔 줄을 몰랐다. 난 오로지 탈출만을 생각하고 달린다. 내 뒤로는 나와 함께 이동 중이던 여자가 보인다. 몸매와 얼굴을 보면 예전에는 꽤나 한 미모 했을법하다. 하지만 몇 달 동안 안 씻은 몸에서 나는 냄새와 어벙한 표정은 그녀를 점점 아름다움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그녀는 부러움과 놀람이 섞인 눈동자로 도망치는 나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어린아이가 가지고 싶어 하는 장난감을 백화점에서 찾은 눈빛이다. 사실 이 여자의 얼굴은 순간 스치며 보았기 때문에 어떤 얼굴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말이다. 난 오로지 탈출만을 생각하고 앞으로 달리기에 바쁘다.
  “스테이가 다갔로절! 어잡!”
  복도에는 짙은 하늘색 조명이 가득하다. 몇 번 모퉁이를 돌고 계단을 내려가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해가 지며 노을이 지는 중이었다. 한동안 갇혀있느라 진짜 빛을 오랜만에 점한 나는 눈을 찌푸렸다.
  내가 나온 곳은 생각보다 도심지였다. 사람들을 가둬두는 곳이었기에 도심과는 떨어진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길에는 인간을 닮았지만 도저히 인간이 아닌 동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봤을 때 그들은 너무 게으름을 피워 배가 나온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스테이가 다했출탈!”
  내가 탈출했다고 어떤 동물이 소리친 것 같다. 다른 언어는 이해 못하지만 그들이 나를 스테이라고 부르는 것은 알고 있다. 내가 나온 빌딩에서는 나를 추적하려는 동물들이 나오고 있었다. 삼삼오오 길거리에 나와 있던 동물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된다. 나는 네온사인 아래를 달렸고 외계인 같은 그 동물들은 나를 매우 불결하게 쳐다보며 길을 열어주었다. 그 틈새를 놓치지 않으며 달리고 달렸다. 덕분에 내 뒤를 따라오는 몇 명의 동물들과 겨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하아…….하아…….”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나왔다. 숨 돌릴 틈이 생기자 그간의 일들이 뇌리를 스친다. 나는 지난 10달간 감금을 당해왔다. 이상한 일의 시작은 작년 여름으로 돌아간다. 회사 근처에 방을 구하여 결혼을 기약한 여자 친구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방이 비록 지하여서 빛은 전혀 없고 공기는 습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냈고 집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기에 바빠 시간이 부족했었다.
  큰 계약을 하나 성사시킨 뒤 하루 포상휴가를 받았다. 덕분에 평일에 집에서 낮잠을 자는 호강을 했고 여자 친구는 외가 집에 김장을 도우러 갔었다. 그 뒤 잠에서 일어났을 때는 이미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공기에는 하얗고 끈적끈적한 느낌이 가득했다. 일어나자마자 습관적으로 담배를 물고는 TV를 틀었다. 속보를 통해 지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속보에서 들었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오늘 오후 3시경 하늘에서 빛이 떨어졌었습니다. 빛은 곧 지구 전체로 퍼졌고, 빛을 조금이라도 쬔 사람은 신체상에 큰 변화가 생긴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검토를 하고 있으며, 현재 세계 각국 대표들은 온라인상으로 긴급회의를 진행 중입니다. 시민 여러분은 자신의 성기가 없다고 당황하지 마시길 바라며 정부의 지침을 따라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뉴스의 뒷내용은 각 나라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으므로 겁먹지 말라는 말로 요약된다. 조잡한 영상이 끝나자 아나운서가 앉아 있는 화면이 나왔다. 그런데 그곳에는 사람이라고 보기 힘든 생명체가 앉아있었다. 그림자만 보면 인간과 똑같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동물은 머리카락이 길고 팔과 목이 뭉툭했으며 눈은 작으나 동그랗고 입술이 두꺼웠고 핑크빛 피부가 정장 사이로 비쳤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가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이상으로 뉴스를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아나운서 이상철 이었습니다.”
  내가 아는 이상철은 잘생긴 남자 아나운서이다. 그런데 그가 저런 모습을 하고 있다고? 그리고 나는 그가 남자라고 인식을 못 한다고?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일단 집 앞을 둘러보자는 생각으로 1층에 올라가자 바로 누군가와 마주쳤다. 방금 TV에서 본 그 동물이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남자인지 여자인지 판단이 불가능했다. 비록 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겁이 많은 나는 바로 내 방으로 도망쳤고 며칠간 TV만 보며 바깥에 나가지 않았다. 내 여자 친구와 가족들과는 연락이 닿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동물들이 우리 집 문을 부수고 들어와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 후 눈을 뜬 곳이 바로 하얀색 방 안 이었다. 그 곳에는 나와 같이 멀쩡한 인간들이 몇 명 더 있었다. 우리는 모두 나체였다.
  “안녕하세요.”
  “으어아어”
  나보다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은 영화 속의 좀비 같은 소리를 냈다. 어색한 와중 하얀 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그 뒤로 몇 달간 나는 사고라는 것을 하지 못했다. 날 잡아온 동물들은 가끔 나와 여자 하나를 검은색이 가득한 방에 데려갔다. 그러면 본능적으로 눈앞의 여자와 성행위를 하였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그들은 긴 버섯 모양의 소시지를 먹으며 우리를 감상했다. 소시지용 나이프에서 반사 된 빛은 내 흥분을 고양시키곤 했다. 방안의 소파는 쌍봉낙타의 혹을 크게 만들어 논 것 같았다. 살색의 말랑해 보이는 두 덩이 사이에 앉아서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 그들 앞에서 나는 운동의 마무리를 장식한다. 내 주인행세를 하던 녀석은 이 시간 내내 다른 녀석에게 굽실거린다. 마지막에 그들은 조개에서 짠 즙과 우유를 섞어 마시곤 했다. 나에게서 수치심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러던 중 오늘 점심때 나의 수치심이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무시하고 있었던 기억과 이성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방금 막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 내가 이성을 찾았는지는 모르겠다.
  방금 전, 달리던 도중 남산타워를 봤다. 이곳이 서울이라는 건 믿기 힘들지만, 외계인에게 납치 된 게 아니므로 나처럼 평범한 인간이면서 아직 이성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았다. 일단은 살아남아야 한다. 10달 전, 빛이 내려왔다던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왜 사육되고 있었을까.



3

<리뉴얼 오목>

신세대가 도래하면서 대중게임의 새로운 지표가 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게임. 기본적으로 오목과 비슷하지만 실제 해보면 많이 다르다. 흰 돌, 검은 돌과 같이 두 종류의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즉, 상대방과 나는 똑같은 한 종류의 말을 사용한다. 이것은 너와 나의 경계가 없으며 하나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 규칙이 있고 이로 인하여 적당한 간격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규칙은 예전 사람의 행동에 따라 내 행동에 제약이 생기는 변동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넓게 해석하면 현대 사회의 축소판이라 볼 수 있다. 게임 판의 한계를 적절히 이용하고 상대의 상황을 미리 예측하여 게임을 진해하는 묘미가 리뉴얼 오목의 특징이다. 다양한 게임 판을 만들 수 있다는 응용성도 재미를 더한다. 그러나 경우의 수가 매우 다양하여 모든 상황을 예측하기는 매우 힘들다.

*준비물
한 종류의 바둑알과 바둑판(혹은 종이와 펜)

*기본 게임 판 크기
7*7 크기
(게임 판은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하다.)

*게임 인원 수
딱히 인원수에 재한은 없으나 둘이 적당하다.

*게임 진행 순서
번갈아가며 자신의 차례에 바둑알을 하나씩 놓는다.

*바둑알 놓는 법
기본 오목과 다르게 아무 장소에나 바둑알을 놓을 수 없다. 이전에 놓아진 알을 중심으로 5*5 영역 안에 내 바둑알을 놓을 수 있다. 자신의 차례를 지나갈 수는 없다. 즉, 자신의 차례에는 반드시 바둑알을 하나 내려놓아야 한다.

*이기는 법
바둑알 다섯 개가 일직선이 되도록 만드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응용 게임
바둑알 놓는 법을 다르게 하여 게임한다. 이전에 논 바둑알을 중심으로 5*5영역의 바깥에 다음 바둑알을 놓을 수 있다.



4

  하늘에서 빛이 떨어졌다. 마치 천둥이 치듯 순식간에. 태양은 하늘에 있었지만 햇볕과는 다른 빛이었다. 처음에는 유성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떨어진 빛은 사방으로 다시 퍼져나갔다. 성서에 적혀있는 창조의 빛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빛이었다. 바른 사용은 아니지만 창조의 빛이라는 표현은 완벽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빛은 공기가 대기를 채우듯 퍼져나갔다. 빛나는 꽃가루가 퍼져나가는 모습을 몇 배속 한 모습이랄까. 지구를 덮는데 1초도 걸리지 않는 속도였다. 빛줄기는 그렇게 우리의 주변을 메꾸었고 사람들은 놀랄 틈도 없이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이후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날 밤 뉴스에서 어떤 사람이 얘기했다.
  “갑자기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가 더 이상 너희들의 죄를 보고 싶지 않으니. 너희에게 나누어준 선물을 거두어 가노라.’ 그리고는 곧 빛이 떨어졌습니다. 이건 하느님의 계시입니다! 기도합시다, 여러분!”
  다른 사람도 나왔다.
  “외계인이 인류를 침략하기 위해 에너지 광선을 사용한 것입니다. 저희 그룹은 예전부터 이런 일은 우려해 왔었지요. 물론 해결책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빛이 온 길을 거꾸로 따라가 외계인을 만나야 합니다. 저는 외계어를 할 줄 알거든요.”
과학자도 나왔다.
  “현재 상황을 파악 중입니다.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우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모든 인류의 생식기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한눈에 성을 파악 할 수 있는 특징, 성욕들도 더불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으며 저희는 지금 쉬지 않고 현 상황을 분석 중입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갑작스런 변화가 두려웠다. 몇몇은 이 놀라운 현상에 감탄했다. 광기를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곳이 어느 나라든지 간에 혼란스러운 것은 분명했다.



5

  오늘은 휴일이다. 내 직업상 휴일이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가족들과 시간 걱정 없이 보드게임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날이다. 매일 밤 리뉴얼 오목으로 달래고 있기는 하지만 한번 플레이 하는데 2,3시간이 걸리는 게임들의 스릴은 무엇도 따라잡을 수 없다. 우선 머리 풀기 용으로 리뉴얼 오목을 하였다. 이건  시작과 끝은 리뉴얼 오목을 한다는 퍼즐러(puzzler)들만의 규칙이다. 때문에 우리 가족은 모두 자기 전에 습관적으로 리뉴얼 오목을 한다.
  리뉴얼 오목의 창의성은 끝이 없다. 두 칸 너머로는 갈 수 없다는 규칙은 미묘하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고, 그러던 중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도 있다. 필요한 경우에는 재미난 모양을 게임 판으로 삼을 수 있다.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게임 판이나 십자가 모양이 가장 인기 많은 변형 게임 판이다. 첫 게임은 내가 타나토와의 게임에서, 소이가 도우와의 게임에서 이겼다.
  “오늘은 내가 이겼네. 타나토는 오늘도 졌구나.”
소이는 간만에 도우를 이긴 것에 기뻐하며 타나토를 놀렸다. 도우는 패배를 인정하며 말이 없었다.
  “아아, 역시 에고를 이기는 건 무리. 오늘도 한 번이 부족했어.”
타나토는 바둑알을 하나하나 다시 놓으며 방금 전 게임을 재현하더니, 아쉬운 표정으로 얘기했다.
  “그래도 실력이 많이 늘었던데 뭘.”
  “다음으로는 차이나타운해요! 내가 제일 자신 있는 걸로 승부를 걸겠어!”
  우리는 모두 그러자고 하였고, 차이나타운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다들 머리를 굴렸다.
  인류가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정부는 빠르게 대처했고 사람들은 새로운 흐름에 몸을 맡겼다.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일부러 잊으려고 애쓰는지도 모르겠다. 언어와 세계의 통일에 따른 자연스런 변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미래연구자의 직업병으로 과거에 대한 기억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과거를 모르는 이유야 어떻든, 덕분에 지난 10달 동안 거대한 변화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가족관계이다. 사람들은 혈족관계로 모여 사는 것을 버리는 대신 흥미관계로 모여 사는 방식을 택했다. 어머니, 아버지라는 개념이 소용없었기 때문이었다.(어머니, 아버지라니 얼마나 오랜만에 사용해보는 단어인지!) 예를 들자면 우리 가족의 등록 명칭은 ‘퍼즐-67’이다. 가족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며, 명수는 적으면 5명 많게는 20명이다.
  집에서 다른 가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식의 역할은 없어진지 오래였고, 모든 사람들은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게 되었다. 대체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었기에 일은 즐거워야한다는 분위기가 퍼졌다. 추가로 사람들은 취미생활을 함께 할 상대가 주위에 있기를 바랐다. 자연히 취미 혹은 사상이 비슷한 사람들이 뭉치며 대가족형태가 발달하였다. 다른 가족에 참여해보고 싶다거나 취미가 바뀌면, 언제든지 동사무소에 이사를 신청할 수 있다.
  대가족 시스템 덕분에 소이, 도우, 도림을 만날 수 있었다. 에로와 타나토는 청소년 배정기간에 우리 가족이 되었다. 에로와 타나토는 적성검사를 통해서 들어왔는데, 의무 학습을 마치면 취미선택권이 주어져 이사를 신청 할 수 있다. 우리 가족에 잘 적응한 것 같아 이 아이들을 볼 때 마다 뿌듯한 기분이 든다. 어느새 차이나타운이 끝났고 기다렸다는 듯이 하린은 소리쳤다.
  “점심 먹어요!”
  하린은 요리를 좋아하여 모든 식사를 준비해 준다. 그럼에도 요리 가족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소이와 사이가 매우 좋아 소이를 따라 왔다고 한다. 하지만 모던아트와 클루 실력만큼은 그녀가 제일이다. 그녀를 만나면서 추리소설 작가에 대한 인상도 다시 생겼다.
  “이번엔 내가 일등이야!”
  타나토는 신나서 하린에게 자랑하며 식탁에 앉았다. 도우는 아까 그 땅을 팔았어야 했다며 중얼거렸다.
  “안녕하세요. 늦잠 잤더니 벌써 점심이네요.”
  “에로도 일어났구나. 어서와 앉으렴. 식기 전에 먹으면 더 맛있을 거야.”
  맛있는 식사시간이다. 아침부터 말을 잘하면서 머리를 써야하는 게임을 했더니 배가 많이 고팠다. 정신집중은 의외로 많은 체력을 소모한다.
  “내일 아침에 계란프라이 예약해도 될까?”
  “그럼. 얼마든지 주문하라고 에고. 하하.”
  최근에는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게 많다. 과거에 비하면 밥을 많이 먹는데도 식욕은 점점 더 왕성해 지고 있다. 상상속의 음식이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내 코를 자극하는 일도 많아졌다. 비록 식사는 배를 채우고 에너지를 얻기 위해 하는 행위라고 하지만,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우리는 마치 무언가를 대신하려는 듯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다. 가랑이 사이의 빈자리마저 채워질 정도로 열심히 음식을 씹어 삼켰다.



6

  비가 내린다. 잠시 세차게 내리나 했으나, 가볍게 땅을 두드리며 비가 내리고 있다. 달팽이관에 전달되는 가벼운 울림은 꽃향기와 함께 다가온다. 길에는 밤나무가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져 있다. 뿌옇게 흩어지며 살짝 다가온 밤꽃 냄새는 코를 마비시켜 어느새 큰 자극이 되지 못했다.
  “아, 그만 좀 뛰어! 물 튄단 말이야.”
  “그럼 너도 우비입고 장화 신으면 되잖아! 메롱.”
  에로는 자신에게 새 달팽이가 생긴 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산책을 나올 때 에로에게 우비를 입히고 나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안 그랬다면 뛰어다니느라 이미 흠뻑 젖었겠지. 바로 지금 저기 에로를 잡으려고 따라 다니느라 자신은 우비를 안 입었다는 걸 까먹은 타나토처럼. 그러는 사이, 비가 그쳐 나는 우산을 접었다. 결국 타나토만 젖어버린 꼴로 코엑스에 도착했다.
  “드디어 도착! 달팽이, 이제 넌 내꺼야!”
  점심시간에 에로가 달팽이를 기르고 싶다고 얘기했다. 가족회의 결과 에로에게 달팽이 기르는 것을 허락했다. 이제 어느 정도 애완생물을 키울 나이도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 하린, 소이, 도우 중 아무도 쇼핑을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유는 집에서 보드게임을 하고 싶다는 것. 결국 우리는 리뉴얼 오목 다음으로 대중적인 게임인 구슬치기를 하여 정하기로 하였다.
  한 사람에게 세 개의 기본 구슬과 왕 구슬이 주어진다. 기본구슬은 작은 호두 같고, 왕 구슬은 땅콩처럼 생겼다. 왕 구슬이 부메랑처럼 돌기 때문에 사용법이 다양하다. 게임 결과 내가 꼴찌를 했고, 에로와 타나토를 데리고 쇼핑을 나오게 됐다. 이렇게 된 이상 즐겨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달팽이코너로 달려가는 에로는 놔둔 채로 타나토와 가게를 한 바퀴 둘러봤다.
  “우와, 야광 아메바다!”
  “안녕하세요, 손님. 이쪽에 있는 것은 야광 아메바입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수조를 보시면 야광 히드라, 야광 굴도 찾으실 수 있습니다. 색도 다양하게 선택하실 수 있으며, 집안 어느 벽이든 설치가 가능하고 기르는 것도 어렵지 않아 현재 가장 인기가 많죠.”
수조안에서 은은하게 자신이 있음을 알리는 빛은 매혹적 이었다. 알레스카 하늘의 오로라를 살짝 담아 전시회를 여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흐음. 아메바 종류 말고 요즘은 새로운 거 뭐 없나요.”
  타나토는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흥미가 떨어진 듯 얘기했다.
  “마침 엊그제부터 새로 연 코너가 있는데 보여드리죠. 절 따라오세요.”
복도 양옆의 아메바들이 빛을 내어 다른 차원으로 가는 통로 같은 느낌을 자아내었다. 그 중에서 대형 전시용 수조에는 놀랍게도 북극곰이 헤엄치고 있었다.
  “우와!”
  “아, 저 북극곰은 특이하게도 자웅동체입니다. 인간에 맞춰서 진화하는 포유류 중 하나로 밝혀졌지요. 전시용 생물로 이번에 새로 구입했죠.”
  타나토는 자웅동체 북극곰이 있다는 것에 놀란 반응이었지만, 크게 흥미를 보이지는 않았다.
  “자, 다 왔습니다. 이쪽은 사슴벌레코너입니다. 자웅동체만 모은 이곳의 사슴벌레와 풍뎅이 들은 하나하나가 보석이나 마찬가지이죠. 이쪽으로 와서 구경해보시겠어요?”
  타나토의 눈동자가 빛난다. 사슴벌레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뿔, 껍질, 다리, 몸통 어디하나 부족함 없다는 것이 사슴벌레의 매력이지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점원이 얘기한다. 타나토는 반응도 없이 사슴벌레에만 집중하며 구경을 한다.
  “타나토, 갖고 싶으면 한 마리 사가자.”
  마음이 약한 나는 어쩔 수 없나보다.
  “정말? 진짜 그래도 괜찮을까?”
  “그래그래, 달팽이 사는 김에 네 것도 하나 사가는 걸로 하자.”
  신난 타나토는 진지하게 어떤 사슴벌레를 고르지 고민했다. 1시간이 지나고서야 타나토는 결정을 내렸다. 마침 에로도 자신의 달팽이를 정하여 우리를 찾아왔다. 매끈한 피부와 풍만해 보이는 무늬가 포인트인 달팽이였다.
  계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둘은 자신의 애완생물에게서 눈을 때지 못했다. 내가 어렸을 때, 강아지를 선물 받아 얼마나 기뻤었는지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요즘에는 강아지나 고양이, 토끼 등을 키우는 사람은 드물다. 이제 동물들은 하위존재 취급을 받는다. 긴 유행이 이렇게 바뀔 줄 누가 알았을까.
  집에 도착해서도 둘은 애완생물과 친해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가족들과 몇 가지게임을 즐긴 뒤 리뉴얼 오목을 끝으로 잘 준비를 하였다. 뿌듯한 하루였다. 그리고 오늘 밤, 내 연구는 완성된다. 나는 마지막으로 너무도 사랑스러운 가족들을 생각했다. 돌고 도는 사랑을 영원히 잊지 않기를 바라며.



7

  어느새 날이 밝았다. 청록색 꽃이 그려진 타일이 빛을 반사해 눈이 부셨다. 어재 밤에는 마땅히 갈 곳이 없었기에 어떤 음침한 건물의 화장실에서 잠을 청했다. 다행히 안에서 문을 잠글 수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배가 고팠다. 봄이 올 때인데도 날씨는 아직 쌀쌀했다. 춥기도 했지만 수치심이 돌아와서인지 옷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밖을 둘러보기로 결정했다. 위험이 있겠지만 현 상황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화장실 창문으로는 반대쪽 건물의 벽만 보일 뿐이어서 아무런 도움이 안됐다. 혹시나 밖에 혼자 돌아다니는 녀석이 있다면 기절 후 옷을 뺏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끼이익’
  화장실문은 나에게 조용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혹시나 누가 있을까 싶었지만 다행히도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선 내가 있는 건물을 둘러봤다. 한동안 사용하지 않은 흔적들이 있었다. 계단은 옥상까지 연결돼 있었고 문도 열려있었다. 옥상에서 주위를 살펴보니 이 인근은 폐허였다. 우연히 도망친 곳이 폐허라니, 한동안 들킬 걱정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다.
  건물들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낙서들이 있었다. 한국어랑 영어가 섞여있었는데 전부 문란한 뜻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곳의 낙서들은 파격적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형광색이 없었고 휘갈겨 쓴 글씨체도 아니었으며 매우 정중하게 적은 듯해 보였다. 오랜 시간 함께 한 친구의 주검을 배에 실어 강에 떠내려 보내는 보랏빛 이야기가 겹쳐졌다.
  그럼에도 어색했던 점은 낙서들이 노란 색, 녹색 등 밝은 원색을 배경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너는 갔지만 우리는 꿈을 향해 간다. 삼류 소설 결말에나 어울리는 상상력이다. 나는 어쭙잖은 추론을 관두고 약간 떨어져 보이는 시가지를 둘러보기 위해 일층으로 내려갔다.
  몇 분 걷자 가게들이 즐비해있는 큰 도로가 보였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몰라 멀리서 새로운 지배자들을 바라보기로 했다. 일단 그들도 옷을 입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건 거의 벗은 것과 다름없이 투명한 원피스만 하나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천이 두툼해 보이는 걸로 봐서는 한 벌이 이들의 옷의 전부인가 보다. 각각의 원피스에는 다른 무늬가 있었다. 친숙한 것으로는 줄무늬가 있었고 특이한 것으로는 음식무늬와 지렁이무늬도 있었다.
  그렇게 둘러보고 있던 중 내가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건물들의 일층이 모두 유리벽이지 않은가! 내가 모르는 사이 건물 안에서 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유리가 빛에 반사되어 안쪽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무수한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생각하니 공포가 밀려왔다.
  “스테이가 다있기저!”
  겁먹은 나는 어제처럼 여러 번 길을 꺾으며 도망쳤다. 그러나 좀처럼 거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러나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오히려 큰길이 나왔다. 그리고 내 왼쪽에서 거대한 물체가 다가왔다. 외형은 풍뎅이처럼 생겼으나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은 흡사 황소와 같았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교통사고는 먼지바람을 일으켰고, 짙은 남색의 심해에 가라앉듯 스테이는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을 조용히 맞이했다.



8

  진심으로 나를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은 언제일까? 내가 살아오면서 오랜 시간 고민한 문재들은 항상 간단한 답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눈앞에 있는 답을 쳐다보기가 두려워 눈을 감았을 뿐. 이제는 당당히 맞설 때이다. 나를. 그리고 내 주위를 바르게 느껴야만 한다. 애초부터 물리적 번식만 생각한 것이 문제였다.
  그 날 이후 우리는 23쌍이 아닌 22쌍의 DNA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신체의 모든 비밀을 밝혀낼 수 있었다. DNA 한 쌍의 감소는 도미노 넘어가듯 모든 질병 치료의 답을 이끌어 왔다. 앞으로는 모두가 똑같은 검진에 같은 치료를 받고 서로서로는 더욱 닮아지게 될 것이다.
  정신적 번식. 그래서 내가 찾은 답은 정신적인 번식이다. 생각의 파장을 멀리 퍼트리는 거다. 같은 생각이 많을수록 파동은 커지고 고유한 에너지로 더 멀리 전파되는 힘을 가진다. 하지만 그래서는 융합이 있을 뿐 발전이 있을 수 없다.
  발전은 신세대가 구세대의 것을 재해석 할 때 새로운 지평이 열리며 이루어지는 것. 과거에는 유전을 통해서 각 환경에 맞추어 후손에게 필요한 부분을 발달 할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예전부터 매일 밤 행하던 평범한 습관이 후손을 낳는 숭고한 의식으로 승화된다. 대물림 되는 생성, 사랑, 죽음의 본능, 무죄. 나는 정신을 집중한다. 이불의 감촉, 달빛, 시계소리와 멀어진다. 금세 꿈에 빠진다. 꿈은 향수 같다. 수많은 기록이 뒤섞여 하나로 표현되며 달콤하지만 항상 달지만은 않은 향수와 꿈. 어느새 흩어져버려 기억하려야 기억나지 않는 아쉬움은 둘의 관계를 더욱 굵게 이어주었다.
  오늘 밤, 꿈은 하나의 우주가 된다. 과거의 기억들은 각각 하나의 행성이 되고, 뭉쳐 은하가 된다. 잊고 있던 추억은 유성우가 되어 내린다. 이루지 못한 꿈들은 별이 되어 사방으로 쏘아지고 고리를 이룬다. 살면서 느껴온 지혜들이 은하수로 흘러들어 간다. 우주는 쉬지 않고 흐르며 출렁인다. 그럼에도 매순간이 또렷이 들린다. 나를 이루던 것들이 해체되고 재구성 된다.
  은하수의 반대편에는 내 아이가 있다. 아이도 꿈을 꾼다. 그리고 꿈을 통하여 우주를 받아들인다. 내가 못다 이룬 이상도 흘러들어간다. 반복된 재구성에 깊게 우려진 먹물 한 방울은 진한 농도를 뽐내며 온 종이를, 천지를, 숨어 있던 신마저도 검게 물들인다.
  앞으로 나는 내 후손들의 무의식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내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세상의 흐름을 이어 나가겠지. 온몸이 스러져 가는 고통에 환락의 색을 덮으며, 나는 아스러졌다.



9

  “타나토야 밥 먹으러 내려와라! 소이랑 도우군은 벌써 다 드시고 일가셨다! 너도 먹고 학교가야지!”
  “하린, 분명 오늘 아침에 고양이 소리를 들었다니까!”
  “에로가 꿈에서 본건 아니니? 타나토! 내려올 때 에고도 깨우고 오렴.”
  “아니야 분명 아기고양이 소리였어.”
  “그래. 그럼 에고가 에로의 옆방이니까 오시면 여쭤보도록 하자.”
  식탁에는 따뜻한 계란프라이가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는 TV가 혼자 떠들고 있었다.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은 사람이 동물보호협회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다.
  ‘이들은 최근에 있었던 스테이 교통사고의 판결에 강한 반발을 보였습니다.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동물보호협회는 운전자에게 무죄를 내린 법정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머리 말리느라 늦었어요. 에고씨 깨우고 내려갈게요.”
  타나토가 2층의 방에서 나오며 얘기했다. 타나토는 에고의 방문에 노크를 하였다. 그러나 반응은 없었다.
  “에고가 오늘은 깊게 잠드신 것 같아요. 근데 이 소리는 알람인가? 방에서 무슨 소리가 나요.”
  아무래도 에고를 깨워야겠다는 생각이 든 타나토는 방문을 열었다. 노란색 시계에 붉은 장창이 꽂혔을 때처럼 이 순간은 매우 천천히 이루어졌다. 시간은 상대적 이므로 확신 할 순 없지만 적어도 타나토는 방에서 나오는 공기를 마시며 느려진 시간을 경험했다. 침대에는 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이가 힘차게 울고 있었다.


(sangsangn6@yonsei.ac.kr)
이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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