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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탄생] 엘리키

2012.03.31 04:3703.31

                                                   1

  “그때 처녀는… 생에 단 한 번뿐인 노래를 읊조리기 시작했단다.”
  눈이 펑펑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던 노파는 살포시 눈을 감고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럼 아기는요?”
  “맞아요, 아기는 어떡해요?”
  소년과 소녀는 대답을 재촉했다. 노파는 감았던 눈을 뜨고서 탁자에 둘러앉아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이야기를 듣던 소년과 소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흐음, 잘 모르겠구나. 이야기 그 어디에도 아기에 관한 내용은 남아 있지 않았단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너무해.”
  “그래 정말 너무하는구나. 하지만 어쩌겠니, 이야기가 그런 걸.”
  노파는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소년과 소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맞다, 그래서 그런 거예요.”
  노파의 손길에 몸을 맡기던 소녀가 고개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뭐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소년이 물었다.
  “여왕은 그래서 아이들을 데려가는 거예요. 자기 아이를 대신해서.”
  소녀의 엉뚱한 추측에 노파는 눈을 똥그랗게 떴고, 소년은 눈가의 눈물을 훔쳤다.
  “흐음,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노파는 멋대로 결론짓고 뿌듯해하는 소녀를 향해 연방 고개를 끄덕이다 거의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자, 애들아. 이제 잘 시간이구나. 이다음은 내일 마저 이야기해주마.”
  소년과 소녀는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나 노파의 볼에 입 맞추며 작별인사를 했다. 소년과 소녀가 나가자 노파의 눈길은 창으로 향했다.
  창밖에서는 하염없이 눈송이가 날렸다. 모든 것을 덮으려는 듯이, 오래도록 깊고 넓게 눈이 내렸다.  

                                                         2

  순백의 나무껍질은 듬성듬성 벗어졌고 앙상한 가지에 움이 돋은, 산등성이를 따라 빽빽하게 솟구친 자작나무 둥치 사이로 솜털이 보송보송한 토끼 한 마리가 달음질쳤다. 솟았다가 푹 꺼졌다가 숨죽였다가 불쑥 땅을 박차고 나오기를 수차례, 토끼는 이제 숨이 밭았다.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토끼는 기슭에 멈춰 섰다.
  말라비틀어진 다갈색 덤불에 몸을 숨긴 토끼는 코를 벌렁거렸다. 나무줄기에 짙게 밴 고라니 냄새, 썩어 부스러진 잎이 뒤섞인 흙냄새, 소나무 냄새, 며칠 전 늑대 한 마리가 질러 놓고 간 지린내까지 온갖 냄새가 콧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뒤를 쫓아오던 살내가 나지 않자 토끼는 덤불 밖으로 나왔다.          
  먼 곳, 포기를 모르는 사냥꾼은 비탈 위에서 몸을 낮춘 채 화살을 시위에 메겼다. 시위는 켕겨지고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덤불 앞의 토끼는 적당히 가깝지도, 턱없이 멀지도 않았다. 돌연 바람이 불지만 않는다면 화살은 토끼를 관통할 수도 있으리라. 시위를 놓은 사냥꾼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고, 화살은 표적을 향해 뻗어 나갔다. 안도하던 토끼가 허공을 가르는 파열음을 듣고 뛰어오른 그 순간, 맞은편 소나무 숲에서 바람처럼 늑대 한 마리가 주둥이를 벌리며 달려나왔다.
  약탈자! 당황한 사냥꾼은 벌떡 일어났다. 늑대의 털 색깔은 지금껏 보았던 회색이 아니었다. 늙은이의 머리카락처럼 희디흰, 태양이 하염없이 내리쬘 때 호수에서 반짝이는 그것을 닮은 털빛이었다. 게다가 멀리 떨어져 있어 확실하진 않지만, 눈가에서 무언가 이물감이 느껴졌다. 주둥이를 벌린 늑대는, 사냥감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기도 전에, 토끼의 목덜미를 물고서 자취를 감추었다.
  사냥꾼의 시선이 늑대가 사라진 방향에 닿았다. 낯이 익다, 사냥꾼은 입을 삐죽하게 내밀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사냥꾼은 언젠가 저 늑대와 마주친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억을 더듬고 풀어헤치고 뒤집어 탈탈 털어 보아도 떠오르지 않았다. 막연하게 눈에 익을 뿐, 어째서 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사냥꾼이 고개를 돌리자 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어오는 렘피넨의 모습이 보였다.
  엘리키 앞에 선 렘피넨은 몸을 숙이고서 숨을 골랐다. 단단한 어깨가 들썩거렸고 굵은 허리춤에 매달린 가죽 주머니가 묵직하게 흔들렸다.
  “어딨어?”
  상체를 든 렘피넨이 비탈 아래를 훑으며 물었다. 엘리키는 그제야 토끼를 놓쳤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하는 탄식에 렘피넨은 기슭과 엘리키의 빈손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당황해서 말을 돌렸다.  
  “꼴이 엉망이네. 넘어지기라도 한 거야?”
  엘리키는 어깨를 한 번 들먹이고, 등에 사선으로 질러 맨 활집 안으로 활을 꽂아 넣더니 성큼성큼 걸어갔다. 렘피넨은 배시시 웃으며 엘리키의 뒤를 따랐다.
  집으로 돌아온 엘리키는 화덕 앞에 앉아 몸을 녹였다. 차별을 모르는 화덕의 불꽃은 쌀랑한 날씨에 굳어버린 엘리키의 몸을 금세 녹녹하게 바꾸어 놓았고, 엘리키는 끄응 신음을 뱉었다. 몸이 녹자 허기가 몰려왔다. 엘리키는 콧구멍을 벌렁 이며 수프 냄새를 맡았다. 들큼한 양파 냄새 사이로 한주먹도 되지 않는 희미한 고기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엘리키는 새삼 낮에 놓친 토끼가 아쉬웠다. 속상해진 엘리키는 기억 속의 늑대를 불러내 책망하려고 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밉지가 않았다. 다만, 아련한 기분에 사로잡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삐죽 내밀고서 한숨을 쉬었다.
  라야타르는 포갠 그릇과 국자를 들고 딸이 있는 화덕으로 걸어왔다. 무언가 생각에 잠겨 불을 쬐는 엘리키를 흘끗 보고 난 뒤에 라야타르는 그릇에 담아 온 푸성귀를 솥 안으로 쏟아 부었다. 말없이 국자로 흥덩흥덩한 수프를 젓던 라야타르가 차분한 목소리로 사냥을 나갔다가 온 엘리키를 나무랐다. 엘리키는 아주 오래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마지막까지 사냥을 나갔던 곰처녀의 이름을 차례차례 열거했고, 라야타르는 그랬더랬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그건 단지 옆집 아이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라는 듯한 그런 말투였다. 말끝에 수프를 조금 떠서 맛본 라야타르는 흡족한 표정을 짓고서 그릇에 수프를 떴다.  
  “하지만 애야,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니. 그랬다면 모두가 실망할게야.”          
  “전 한 번도 다쳐서 돌아온 적이 없는 걸요, 엄마.”
  일어나 라야타르가 내민 수프 그릇을 건네받으며 엘리키가 말했다.
  “물론 지금까지는 그랬지. 하지만 나쁜 영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장난을 치곤 한단다. 그걸 알아야 해.”
  라야타르는 빈 그릇에 자기 몫인 수프를 뜨며 엄하게 타일렀다. 화덕을 돌아 라야타르에게 다가간 엘리키는 빈손을 들어 라야타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걱정 마세요. 실수 없이 해낼 테니까요.”
  라야타르는 어깨에 놓인 엘리키의 손을 가볍게 탁탁 두드렸다. 모녀는 마주 보고 앉아 저녁을 먹었고, 그 뒤로도 한참을 화덕에 앉아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가 가장 높은 때, 물을 길고 나서 할 일이 없어진 엘리키가 집 밖으로 나오자, 멀리 공터에서 크고 작은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어수선한 흥분과 약간의 소란과 말썽, 재잘거리고 복닥거리는, 축연을 준비하는 소리였다. 엘리키는 소리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엘리키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저곳과 이곳이 다른 세상이기라도 한 듯이 먼 곳을 보았다. 눈동자는 멀고 입은 삐죽이 나와서, 엘리키는 잠시 흰 늑대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간질였고, 그 뒤를 쫓아 어린것들이 들이닥쳐서는 이구동성으로 ‘넓은 눈썹의 처녀다’라고 소리쳤다. 엘리키를 에워싼 어린것들은 다짜고짜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성화에 못 이긴 엘리키는 ‘곰처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옛날 옛날에 한 처녀가 살았습니다. 처녀는 넓은 눈썹의 아이를 낳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은 터지는 웃음을 애써 참아 누르고는 자기들끼리 ‘아이를 낳고 싶었데’라며 소곤거렸다.
  “그래서 처녀는 숲으로 갔습니다.”
  엘리키는 빈말로도 칭찬할 수 없을 만큼 형편없는 이야기꾼이었다. 발싸심을 하던 한 아이가 마침내 벌떡 일어나더니 엘리키의 말을 가로챘다. 높고 낮은 목소리를 오가며 적절한 때에 몸짓과 손짓을 더하는 아이의 입담은 옹골찼고, 덕분에 엘리키는 몸에 맞지 않은 이야기꾼의 역할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진 채 이야기를 경청했다.
  아주 오래된 옛날에, 곰을 사랑한 한 처녀가 있었다. 처녀는 가장 예쁘지도 가장 못나지도 않았지만, 누구보다 용감했다. 용감한 처녀는 '곰 중의 곰'을 만나기 위해 뾰족하게 솟은 나무를 헤치며 점점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처녀는 곰 중의 곰을 찾아냈고, 그의 신부가 되겠다고 말했다. 곰은 예쁘지도 못나지도 않은 그 용감한 처녀가 마음에 들었다. 처녀는 곰의 신부가 되었고, 곰은 처녀의 신랑이 되었다. 서로 깊이 사랑했던 신랑과 신부는 봄이 가기 전에 아이를 잉태했다. 처녀의 배가 무지개처럼 부풀어 오르던 어느 날, 곰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늑대가 습격했다. 처녀는 애타게 곰을 부르며 달아났다. 불러도 곰은 오지 않았고, 처녀는 뱃속 깊은 곳에서 퍼져 나가는 통증을 느끼며 소나무로 둘러싸인 호수에 다다랐다. 호수에 몸을 던지면서 처녀는 제발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아기에게 애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절망한 처녀는 호수를 건너다 말고 진통을 시작했고, 늑대 한 마리가 처녀를 물어뜯기 위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 순간, 바람처럼 나타난 곰 중의 곰이 거대한 앞발을 휘둘러 늑대를 패대기쳤다. 곰이 자신을 구하러 왔다는 사실을 안 처녀가 기운을 차려서 해산하는 동안, 곰은 홀로 늑대 무리와 맞서 싸웠다. 마침내 태어난 아기는 우렁찬 울음을 터트렸고, 기쁜 마음에 곰은 늑대를 잊은 채 뒤돌아보고야 말았다. 사악한 늑대는 그 틈에 곰의 목덜미를 거대한 엄니로 물어뜯었다. 곰은 사랑하는 여인과 아기의 모습을 두 눈에 담은 채 숨이 끊어졌다. 비통한 처녀는 비명을 질렀고, 늑대는 뜨거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주둥이를 치켜들고 승리의 울음을 울었다.
  기쁨을 만끽한 늑대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처녀에게 다가갔다. 아기를 품속 깊이 끌어안은 처녀는 뒷걸음질쳤지만, 오직 물로 넘쳐나는 호수 그 어디에도 달아날 곳은 없었다. 처녀의 가슴까지 물에 잠기고 늑대가 호수로 뛰어든 찰나, 처녀의 품에 안겼던 아기가 반으로 쪼개지더니, 한쪽은 곰으로 변했고 남은 한쪽은 아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곰이 된 반쪽의 아기가 사악한 늑대에게 달려들어서는 거대한 앞발을 내리쳤다. 단 한 번의 발길질에 늑대는 영원히 호수 아래로 가라앉았다. 늑대가 죽고 나자 아들 곰은 슬픈 눈빛으로 어머니와 쌍둥이 형제를 내려다보았다. 아들 곰의 눈에는 슬픔과 함께 헤어짐에 대한 확고한 결심이 서려 있어서 처녀는 아들을 꺾을 수가 없었다. 아들 곰은 인간 사이가 아니라 숲을 선택했고, 신랑을 잃은 처녀는 이제 인간 사이에서 살아갈밖에 도리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품속의 갓난아기만이 새록새록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먼저 작별을 고한 건 아들 곰이었다. 처녀는 깊은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아들 곰의 듬직한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잠든 아기를 안고 인간 곁으로 돌아갔다.
  돌아온 처녀는 어느샌가 곰처녀로 불렸으며 유난히 양미간이 넓었던 처녀의 아이는 넓은 눈썹의 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넓은 눈썹의 아이는 자라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자라서 또 아이를 낳았다. 곰의 피가 대대로 이어지던 어느 날, 곰의 피를 잇는 자들은 안락한 보금자리를 박차고 나와 떠돌다가 그 옛날 곰처녀가 아이를 낳았던 호수 근방에 눌러앉았다. 곰의 핏줄은 그곳에서 또다시 이어졌고, 후손들은 이제 곰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곰의 첫 아들이 받았던 이름인 '넓은 눈썹'이 곰이라는 말을 대신하는 동안 어머니 중의 어머니인 곰처녀 역시 ‘넓은 눈썹의 처녀’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자랑스러운 선조의 기원이었다.

  집 앞에서 횃불을 들고 선 렘피넨을 본 엘리키는 당황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의 이유가 어머니호수까지 함께 가기 위해서라는 사실에 이르자 엘리키는 분개했다. 엘리키는 갓난애가 아니었고, 혼자서 자유롭게 움직일 만큼 자란 아이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더구나 엘리키는 넓은 눈썹의 처녀였다. 지금껏 어떤 넓은 눈썹의 처녀도 몸을 정결히 하는 의식을 치르기 위한 야행(夜行)에 보호자를 동반한 경우는 없었다. 엘리키가 단칼에 거절하리라 예상했던 렘피넨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렘피넨은 자신이 보호자가 아니라 단지 홰꾼일 뿐이라고 강조했고, 엘리키는 스스로 이미 홰꾼이니 다른 이는 필요 없다고 맞섰다. 둘의 실랑이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밤은 먹성 좋은 어둠에 야금야금 삼켜져서 더할 나위 없이 짙어져 갔다.
  때아닌 소란에 라야타르가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처음에는 뜻밖의 방문에 놀랐지만, 이내 진심 어린 경청으로 렘피넨을 고무시켰고 결국에는 렘피넨의 생각이 나쁘지 않다고 결론 내림으로써 엘리키의 원망을 샀다. 라야타르는 눈을 흘기는 딸을 외면한 채 말했다.
  “애야, 너무 늦었구나. 이러다 어머니호수에 가기도 전에 날이 새겠어. 이제 그만 가거라.”
  렘피넨은 질끈 눈을 감아, 칼날 같은 기세로 버티는 엘리키의 손에서 횃불을 가로채곤 앞장서서 걸었다. 참을 수 없는 모욕에 할 말을 잃은 엘리키는 무서운 기세로 다가가 렘피넨의 한 손에서 횃불을 빼앗았고, 렘피넨은 잠시 넋 나간 사람처럼 굴다가 허둥지둥 엘리키의 뒤를 따랐다. 라야타르는 엘리키에게서 멀어지지도 좁혀지지도 않는, 엘리키는 거의 본 적 없을 렘피넨의 등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렘피넨도, 라야타르도 아는데 엘리키만이 렘피넨의 가슴에 자리한 사랑을 알지 못했다. 외사랑은 손에 박힌 가시와 같아서 손댈수록 깊이 파고들어 가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닿지 못하는 사랑은 삐뚤어지기도 쉬운 법이라 라야타르는 불안했다.
  나날이 가늘어지던 달이 오롯이 몸을 감춘 밤, 드넓은 어둠이 몽긋대는 하늘에서 유난히 별은 빛나고 사위는 고요해서, 두 개의 횃불이 닿을 때마다 붉게 일렁거리다 밀려나는 길의 언저리와 엘리키와 렘피넨의 발소리는 낯설고 기괴했다. 옛이야기 속, 곰 중의 곰이 걸어 나와도 놀랍지 않을 만큼.
  엘리키는 넓은 눈썹의 아이가 태어났던 호수로 묵묵히 향하면서, 자신이었다면 절대 달아나지 않은 채 사악한 약탈자를 화살로 꿰어 버렸으리라 생각했다. 그랬다면 곰 중의 곰이 죽지도 아들 곰과 헤어지지도 않았을 터였다. 어느샌가 나란히 선 렘피넨은 입을 빼죽이 내민 엘리키의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렘피넨은 엘리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엘리키는 집에서부터 여기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렘피넨은 그 침묵이 불안하면서도 깨고 싶지 않았다. 가 버리란 말보다는 침묵이 나았으니까. 호수에 근방에 다다랐을 때, 엘리키가 걸음을 딱 멈추었다.
  “인제 그만 가.”
  “바로 앞인걸.”
  “렘피! 애 취급 그만해.”
  “그런 거 아니야. 난 단지, ‥….”
  “단지 뭐?”
  “그냥 걱정돼서.”
  렘피넨은 시선을 회피하며 턱을 긁적였다.
  “그게 애 취급이지 뭐야?”
  엘리키가 쏘아 붙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가면 되잖아.”
  아쉬움에 잠긴 렘피넨의 목소리가 축 늘어졌다. 타는 속을 알 리 없는 엘리키는 매서운 눈초리로 렘피넨을 재촉했다. 잠시 말도 움직임도 없는 어색한 시간이 흘렀고, 렘피넨이 떠나자 엘리키는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고 매몰차게 호수로 향했다. 엘리키의 발소리가 잦아든 뒤에야 렘피넨은 뒤돌아섰다. 이미 사라진 엘리키의 모습을 찾아 기웃거리던 렘피넨은 허탈한 한숨을 내뱉으며 주저앉았다.
  렘피넨을 보낸 엘리키는 어머니호수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벗고 호수로 들어갔다. 겨울이 물러난 지 얼마 안 돼, 더구나 밤이어서 물은 차가웠다. 엘리키는 살갗을 파고드는 한기에 몸서리치며 한쪽에 받쳐둔 횃불의 온기를 갈망했다. 주홍빛으로 춤추는 불꽃, 불꽃을 따라 구물거리는 숲, 엘리키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며 퍼져 나가는 물결, 차갑고 뜨거우며 찰나 동안 반짝였다 사라지는 모든 것을 갈망했다. 자신의 검은 눈동자에 다 담지도 못할 것을.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튕기듯 호수에서 나와 바닥을 휘둘러보던 엘리키는 마침맞은 섭돌 하나를 주워들었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엘리키는 팔딱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호숫가를 주시했다. 풀숲을 헤치고 나무 사이를 지나 호숫가에 무언가가 모습을 나타낸 건 그와 거의 동시였다.
  짙은 어둠 때문에 엘리키는 그것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무언가를 찾듯 두리번거리던 그것이 엘리키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숨을 죽인 엘리키는 칼 한 자루 가져오지 않은 자신을 책망하며 가장 날카로운 모서리가 아래를 향하도록 섭돌을 고쳐 잡았다.
  한 걸음 두 걸음…….
  꿀꺽, 행여 몸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들릴까 엘리키는 침을 삼켰다. 그것은 점차 거리를 좁혀 왔고, 엘리키는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지려버린 오줌 같다는 생각을 했다. 렘피가 이 꼴을 봤다면 얼마나 우쭐댔을까. 엘리키는 속으로 고개를 내둘렀다. 그것이 코앞을 스쳐 지나가자 엘리키는 사내이며, 키는 자신보다 머리 반 정도 크고, 렘피보다 몸피가 얇은 편이라고 어림짐작했다. 다행히 사내는 엘리키를 그냥 지나쳐서 횃불 앞에 멈춰 섰다. 엘리키는 자신을 등지고 선 사내의 얼굴 대신 불빛에 삼켜진 몸 가장자리만을 볼 수 있었다. 횃불 앞에 선 사내는 망설임 없이 바닥으로 손을 뻗어 엘리키의 옷을 집어 들었다. 손에 옷을 쥔 사내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몸을 돌려 호수를 한 바퀴 훑었다. 사내의 시선과 눈이 맞은 엘리키는 흠칫했지만, 사내는 엘리키를 알아채지 못했는지 다시 손에 든 옷으로 눈을 돌렸다. 사내는 무엇을 찾는 걸까…. 돌을 움켜잡은 엘리키의 손바닥은 물과 땀이 뒤섞여 질척했다. 사내는 옷을 더 자세히 보려는지 아예 머리를 처박다시피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사내가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숨을 들이쉬자 차가운 밤 공기와 호숫가의 온갖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엘리키는 그런 사내의 빈틈을 치고 들어갔다. 화살 중의 화살, 엘리키는 자신이 쏘는 화살만큼 재빠르게 사내를 덮쳐서 쓰러트리고는 가슴에 올라탔다. 기세를 몰아 사내의 목덜미를 뾰족한 돌 끝으로 찍어 누르며 엘리키는 처음으로 사내와 얼굴을 마주했다.  
  “쿠라.”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태평한, 조금은 기쁜듯한 목소리로 사내가 말했다. 엘리키는 사내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고, 사내는 엘리키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쿠라. 내 이름.”
  쿠라는 활짝 웃었다. 아무런 적의도 두려움도 없는 순박한 웃음에 매혹 당한 엘리키는 쿠라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주위는 어둡고 횃불은 붉어서 확신할 수 없지만, 달처럼 밝고 창백한 회색 머리카락, 머리카락만큼이나 하얀 피부, 주홍빛이 감도는 노란 눈동자, 엘리키의 새카만 머리카락과 눈동자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모습이었다. 말로만 들었던 땅을 건너온 사람이 이렇게 생겼을까? 그에 더해 외쪽 눈썹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가늘고 긴 흉터가 시선을 잡아당겨서 엘리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떨림, 호기심이 그대로 떠올랐다.
  쿠라는 엘리키가 무언가 말해주기를 침착하게 기다렸다. 서두르는 것보다 기다림이 삶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쿠라는 온몸으로 익혔다. 훌륭한 사냥꾼은 먹이를 앞에 두고 몸을 낮추는 법이었다.
  한참을 바라만 보던 엘리키는 문득 쿠라가 자신을 소개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고, 동시에 대답을 기다린다는 걸 알아챘다.
  “엘, 엘이에요. 아니, 엘리키에요. 저기 그러니까 엘리키인 엘이고 엘이 엘리킨데, 저기 그게 아니라 원래 이름이 엘….”
  얼굴이 벌게진 엘리키는 얼떨결에 섭돌을 쥔 손을 앞으로 내미는 걸로 모자라 마구 젓기까지 했다. 엘리키는 자신의 행동이 공격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당황해서 허겁지겁 손을 내리다가 사내의 손에 들린 자신의 옷을 보고는 한층 더 당황했다. 알…알몸!
  발바닥까지 새빨개진 엘리키는 쿠라의 손에 들린 옷을 잡아당겼다. 쿠라가 반사적으로 손아귀에 힘을 주자 엘리키는 다시 한껏 움켜쥔 옷자락을 당겼고, 중심이 흔들리면서 엘리키와 쿠라는 물 위로 떨어졌다.
  캬악-촤악.
  엘리키의 비명과 함께 두 사람은 호수 속으로 가라앉았고, 사방으로 솟아오른 물기둥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횃불이 꺼졌다.
  여태 같은 자리에 앉아 돌아갈지 말지 고민하던 렘피넨은 엘리키의 비명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달려갔다. 호수에 도착한 렘피넨은 어두컴컴한 수면을 비추며 엘리키를 불렀다. 물거품 소리와 함께 엘리키가 물 위로 솟구쳤다.
  “무슨 일이야?”
  숨 돌릴 틈도 없이 렘피넨이 물었다.
  “너야말로 왜 여깄어?”
  “그게 뭐가 중요해. 무슨 일이냐니까?”
  렘피넨은 성마르게 소리쳤다.
  “무슨 상-.”
  맞받아치려던 엘리키는 쿠라가 걱정돼서 발이 미끄러졌다고 얼버무렸다. 렘피넨은 눈치 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다급해진 엘리키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렘피넨을 쫓아버렸다. 떠밀리다시피 돌아서면서도 렘피넨은 젖어버린 엘리키의 옷을 대신해 자신의 웃옷을 벗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한쪽에 횃불까지 세워 두었다. 렘피넨이 사라지자 엘리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쿠라를 불렀다. 서너 번쯤 불렀을까, 호수 아래서 숨을 참던 쿠라가 용솟음쳤다.
  “괜찮아요?”
  엘리키의 물음에 쿠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환하게 웃었다. 순박한 웃음에 엘리키는 자신도 모르게 키득거렸고 쿠라가 따라 웃었다. 달 없는 밤, 잔잔한 수면에 흐르던 웃음이 잦아들자 엘리키가 먼저 입을 뗐다.
  “내 이름은 엘이에요, 쿠라.”

  다음날 밤, 곰처녀가 된 엘리키는 곰 중의 곰이 된 사내와 함께 구애의 춤을 추었고, 아들 곰을 낳았으며 아들 곰은 사악한 늑대를 물리쳤다. 매번 새롭게 되살아난 곰처녀와 곰을 통해 곰의 피는 영원히 이어질 터였다. 모든 춤이 끝나자 사람들이 모닥불 주위로 둘러앉았다. 사라졌던 달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낮의 사냥에서 얻은 고기와 땅에서 얻은 재료로 만든 음식은 풍족했다. 계집아이 하나가 손가락에 묻은 고깃국물을 쪽쪽 빨아먹고, 이가 다 빠진 노인은 보리로 빚은 술을 홀짝이고, 어디선가 둥둥 북소리가 심장을 달구면 노랫소리가 그 뒤를 따르고, 박자를 삐끗한 누군가와 그를 놀리던 아이가 횃불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자지러지는 웃음과 발을 구르며 춤을 추는 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올 때, 엘리키는 모처럼 두른 화려한 장신구를 벗으며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축연 내내 엘리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렘피넨도 그 뒤를 따랐다. 말을 붙이는 렘피넨을 보낸 엘리키는 아무도 모르게 호수를 찾아갔다.
  쿠라는 그곳에 없었고 엘리키는 실망했다. 몇 번의 낮과 밤 동안 엘리키는 호수로 찾아갔지만, 쿠라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 후로 몇 번의 낮과 밤을 허비한 후에야 엘리키는 체념했다. 땅을 건너온 떠도는 이가 언제 어느 곳에 머물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질 않는가. 체념해도 습관은 몸에 남아, 엘리키는 얼마간 호수를 찾았다. 호수로 찾아가지 않게 된 뒤에 엘리키는 자주 집 앞 그루터기에 멀거니 앉아서 생각에 잠기거나 한숨을 내쉬었고 사냥에도 시큰둥했다.
  렘피넨이 엘리키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챘다. 렘피넨은 엘리키의 말 못할 고민이 무엇인지 궁금했고 자신이 해결해 주고 싶어 했는데, 엘리키는 그 모든 호의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엘리키에게서 아무것도 캐낼 수 없음이 확실해지자 렘피넨은 엘리키보다 깊은 한숨을 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딸이 나쁜 영에 사로잡힌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라야타르는 엘리키를 ‘영을 보는 자’에게 데려가려 했지만, 이를 안 엘리키가 불같이 화를 내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엘리키는 눈을 내리깐 채 얌전히 지냈다. 한동안 라야타르는 엘리키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살폈고, 나쁜 영이 딸의 몸에서 빠져나갔다는 확신이 들자 감시의 끈을 늦추었다가 결국 완전히 잊어버렸다.
  하늘 가득 별만 반짝이는 밤, 교교한 호숫가를 어슬렁거리던 쿠라는 마침내 엘리키를 만나러 갈 결심을 했다. 엘리키가 어느 집에 사는지, 누군가에게 발각되지는 않을지 따위는 쿠라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쿠라는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 사이로 내려왔다. 숲정이 앞에 선 쿠라는 생각보다 많은 인가에 놀랐으나 엘리키를 만날 수 있다는 믿음만은 확고했다. 인가 사이로 성큼 들어서자, 잠든 순록의 시지근한 땀 냄새와 젖을 물리는 여자의 젖내와 바람이 일었다가 물러날 때 훅 끼치는 먼지내에 누린내까지, 사람 사는 냄새가 훅 끼쳐 왔다. 냄새와 냄새 사이에서 쿠라는 아련하게 떠다니는 엘리키의 체취를 맡았다. 체취가 엘리키가 있는 곳을 알려주리라. 쿠라는 냄새를 쫓아 걸음을 내딛고 방향을 바꾸고 집을 지나쳐서, 엘리키의 집이라 확신하는 곳까지 다다랐다. 쿠라는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짧고 나직하게.
  엘리키는 라야타르보다 끈질겨서 결코 포기를 몰랐다. 라야타르가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잠든 지금도 화덕 앞에서 활대로 쓸 참나무를 깎으며 달아날 궁리를 했다. 엘리키는 쿠라를 찾아 떠나야만 했다, 평생 만나지 못한다 해도. 떨칠 수 없는 그리움은 이미 손발과 다름없었고, 엘리키는 자신의 손발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다. 그리움이 이끄는 대로 따르리라, 붉게 일렁이는 화덕 앞에서 엘리키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밤이 깊도록 수십 개의 활대를 깎던 엘리키는 갑자기 한숨을 쉬며 일손을 놓았다. 엘리키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용감한 곰처녀가 인간 사이로 돌아왔듯이 엘리키는 여기 사람이었고 결국 여기서 죽게 될 터였다. 불타던 용기가 싸늘한 재로 변하고, 마음이 절망 속에서 허덕이던 때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짧고 나직하게.
  엘리키는 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사람은커녕 짐승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다만 어둠만이 있었다.
  "엘!“
  한기를 막기 위해 띄어놓은 집과 바닥 사이의 공간에서 쿠라가 고개를 쑥 내밀며 말했다. 문을 닫으려던 엘리키는 갑자기 들려오는 쿠라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이제 선 채로도 꿈을 꾸는구나 싶어 서글펐다.
  “엘!”
  쿠라는 망연히 서 있는 엘리키를 다시 불렀고, 소리를 향해 고개를 숙인 엘리키는 소리만이 아니라 환상까지 본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엘리키가 라야타르 말대로 정말 나쁜 영에 사로잡힌 건 아닌지 걱정하는 사이, 쿠라는 비좁은 공간에서 기어 나와 엘리키 앞에 섰다.
  “다시 만날 줄 알았어요.”
  쿠라는 엘리키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엘리키는 한 손을 온전히 뒤덮는 따뜻한 감촉과 변함없이 순박한 얼굴 가득 퍼지는 웃음을 보면서 처음으로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남은 한 손을 들어 쿠라의 얼굴을 매만지다가 눈썹에 자리한 걀쭉한 상처가 손끝에 닿자 참말이구나, 생시구나, 눈물이 흘렀다. 쿠라는 엘리키의 눈물에 담긴 의미를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애달파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닦아 주었다. 엘리키는 울면서 웃었고 달리 해줄 게 없었던 쿠라도 소리 없이 웃었다.
  “보고 싶었어요, 쿠라.”
  숱한 그리움을 달래기에는 밤이 너무 짧았다. 오가는 몇 마디 말과 손짓과 눈빛이 아직 남았건만 동은 터오고, 수탉의 방정맞은 울음에 고였던 잠이 달아나 어디선가 달그락, 투닥투닥, 아침이 성큼 다가왔다. 만나자마자 이별을 앞에 둔 연인은 아쉬운 눈길로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달 없는 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연인은 호수로 달려가서, 사람들 눈을 피해 사랑을 속삭였고 배를 맞췄으며 아쉬운 작별을 하곤 했다. 어느 날, 쿠라의 눈썹에 있는 흉터를 만지던 엘리키는 문득 오래전 토끼를 채 갔던 그 늑대를 떠올렸고, 그보다 오래전 곰과 사투를 벌이던 새끼 늑대를 도와줬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새끼 늑대는 그 늑대처럼 눈부신 흰색이었었다.
  “그때 그 새끼 약탈자의 한쪽 눈에서 피가 흘렀어. 나도 모르게 넓은 눈썹에게 화살을 쏘고 말았지.”
  입술을 배죽하게 내밀고 어슴푸레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던 엘리키가 말했다.
  “참 겁 없는 늑대였네. 혼자서 콤과 싸우다니.”
  쿠라는 약탈자, 넓은 눈썹 대신 거침없이 늑대, 곰이라고 말했고, 몇 번을 일러줘도 끝내 곰을 콤이라고 했다. 엘리키는 그런 쿠라가 조금은 부럽고 신기했으며 귀엽기까지 했지만, 한편으로는 쿠라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서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엘, 괜찮아?”
  쿠라는 침울한 표정을 한 엘리키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물었다. 엘리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쿠라는 엘리키를 가슴 깊이 안아 주었다. 땅에 메인 여자와 떠도는 남자는 서로 감싸는 체온 속에서 안도하며 또 한 번의 이별을 맞이했다.
  온 여름과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될 무렵까지 엘리키는 호수로 갔다. 엘리키의 밤 외출을 가장 먼저 알아챈 이 역시 렘피넨이었다. 들뜬 엘리키가 뒤를 밟히는 줄도 모른 채 호수로 향하는 동안 렘피넨은 입안이 바짝 마르고,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했다. 마침내 사랑에 눈먼 연인을 목격하게 된 렘피넨은 온몸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고, 목이 메 숨을 쉴 수도, 소리칠 수도 없었으며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걸음을 내딛지도 못했다. 연인은 사랑을 나누고, 렘피넨은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절규와 함께 얼어붙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애정을 외면당한 렘피넨은 분노로 이글대는 눈초리로 냉정하게 연인을 주시했다. 심술 맞은 어둠이 절정을 넘어서자 엘리키는 호수를 떠났고, 렘피넨은 쿠라의 뒤를 쫓았다. 쿠라는 버림받은 렘피넨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어둠 속에서 군더더기 하나 없이 몸을 놀려 사라졌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우듬지에 햇살이 떨어질 때쯤, 숲을 헤매느라 만신창이가 된 렘피넨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은 오래도록 숲 속을 광폭하게 휘저으며 거목을 흔들었다.
  렘피넨은 이제 엘리키를 증오했고, 엘리키의 뱃속에서는 아기가 자라기 시작했다. 매일 낮과 밤 동안 엘리키를 주시하던 렘피넨은 해 기울 녘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발이 점차 굵어지자, 쌓인 눈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려 서둘러 호수로 가 몸을 숨겼다. 어깨 위로 쌓이는 눈송이의 냉기도 엘리키를 향한, 그보다 더한 쿠라에 대한 렘피넨의 증오는 식히지 못했다. 렘피넨은 달 없는 오늘 밤이야말로 비밀스러운 만남이 이뤄지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엘리키와 쿠라는 약속의 날, 약속된 호수를 찾아갔다. 연인이 서로를 뜨겁게 끌어안는 동안 렘피넨은 이를 앙다물었다. 쿠라의 품에 안긴 엘리키는 탐스러운 눈송이 하나를 손바닥으로 받았다.
  “그거 알아? 여기 말로 쿠라는 흰서리라는 뜻이야. 그곳에서는 뭐야?”
  성글게 엉겨있던 얼음꽃이 녹아내리는 사이 엘리키가 말했다.
  “음……. 내가 살던 곳에서는 눈발이란 말이야.”
  엘리키의 손바닥으로 막 내려앉은 눈송이 위로 손을 포개며 쿠라가 대답했다.
  “그럼 지금 하늘에서 쿠라가 내리는 거네.”
  쿠라가 맞장구치자 엘리키는 쿡쿡 웃었다. 웃음을 그친 엘리키는 아랫주머니 속에서 노랑과 주홍색 실로 엮은 팔찌를 꺼내 쿠라에게 주었다. 팔찌를 받아 든 쿠라는 뜻밖의 선물에 기쁘면서도 팔찌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됐다.”
  엘리키는 쿠라의 팔목에 팔찌를 채워주며 말했다.
  “고마워. 항상 지니고 있을게.”
  쿠라는 팔찌를 한 손을 허공으로 쑤욱 내밀어 신기한 듯이 쳐다보았다. 덕분에 렘피넨도 쿠라의 팔목을 단단히 감싼 팔찌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렘피넨은 그 팔목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싶었다. 아니 목을 베고 싶었다. 시체는 불살라 뼛가루조차 남지 못하도록, 뼈를 잃은 영혼이 영원히 살아남지 못하게 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점점 가늘어지던 눈발이 완전히 그치고, 나뭇가지에 쌓인 눈만이 간간이 부는 바람에 흩날렸다. 이 밤, 날은 더디 새어도 좋으련만, 가차 없이 첫 닭 울 때가 성큼 다가와 하늘 끝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엘리키와 쿠라는 마지막 입맞춤을 나눈 뒤에야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렘피넨은 침착하게 숨을 죽이고 쿠라가 곁을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밤새 쌓인 눈이 쿠라의 발자취를 품고 있을 터였다. 엘리키가 호수를 빠져나가자 렘피넨은 추격을 시작했다. 선명한 발자국이 렘피넨을 쿠라에게 이끌어서 어렵지 않게 목전까지 다가갔다. 팔찌에 정신이 팔린 쿠라는 위험이 닥친 줄도 모른 채 한가로이 걷다가 귓가를 간질이는 희미한 눈 밟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쿠라는 렘피넨의 존재를 알아챘고, 렘피넨도 쿠라가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 사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달렸다. 발끝에 차인 눈이 허공을 날고 밭은 숨 끝에서 새하얀 입김을 토해 내며, 기슭과 산모롱이를 돌아 산자락을 타고 오르다, 눈 덮인 버덩을 지나서 우람한 소나무 줄기 사이를 헤치고, 흑갈색 피를 뒤집어쓴 가문비나무를 따라 산잔등을 넘어선 두 사내는 발목까지 쌓인 눈이 발을 붙잡고 늘어져도 거침이 없었다. 두 사내 사이는 좁혀졌다가 멀어졌다가를 반복했고, 쿠라는 두 발로 뛰는 제 몸이 거추장스레 느껴지기 시작했다.
  엘리키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막연한 두려움과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디밀자 엘리키는 쿠라를 볼 수 없었던 허무한 나날을 되새겼고, 견뎌낼 자신을 잃었다. 엘리키는 이대로 쿠라를 따라 멀리 사라지고 싶었다. 태어난 곳에 뼈를 묻지 않는다는 것, 부족을 떠나 바람처럼 산다는 것, 무엇보다 쿠라가 함께 한다는 사실에 엘리키는 흥분했다. 어쩌면 생각보다 먼 곳, 쿠라가 떠나 온 북쪽 땅까지 갈 수도 있으리라. 발길을 돌린 엘리키는 눈밭에 난 서로 다른 발자국에 심장이 떨려왔고, 발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지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몸이 휘청거렸다. 누군가가 쿠라의 뒤를 쫓는 게 분명했다!
  거의 산마루까지 올라갔다가 급선회한 쿠라는 된비알 아래로 몸을 미끄러트리면서 웃옷을 벗어 던졌다. 기슭에 닿을 무렵, 허리끈마저 풀어버린 쿠라가 엎드리며 푸나무서리로 뛰어들었고, 몸이 빠져나간 바지는 흐느적거리며 땅으로 떨어졌다. 렘피넨이 기슭으로 내려왔을 때는 쿠라가 이미 몸을 감춘 뒤였다. 렘피넨은 주인을 잃은 옷가지를 흘깃 보고는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렘피넨은 쿠라가 왜 옷을 벗었는지 몰랐지만, 기슭에서 발자국이 끊겼고 발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눈앞에 펼쳐진 푸나무 어딘가에 쿠라가 매복 중이라는 사실만은 알았다. 렘피넨은 언제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반을 기하며 나아갔다. 네 번째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눈을 박차는 소리에 몸을 튼 렘피넨은 이렇다 할 반항도 하지 못한 채 흰 늑대의 앞발에 어깨를 붙들려 자빠졌다. 흰 늑대가 덮칠 때의 충격으로 칼을 놓친 렘피넨은 가슴팍의 늑대를 캄캄하게 올려다보았다. 늑대는 엄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고, 그때마다 주둥이 사이로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렘피넨은 어깨를 파고드는 고통을 참아가며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간신히 잡아 든 돌멩이로 늑대의 옆구리를 내리찍으려던 렘피넨은 늑대의 앞발에 걸린 팔찌를 똑똑히 보았다. 엘리키가 선물한 바로 그 팔찌를. 반사적으로 올려다본 늑대의 얼굴에는-사람의 얼굴로 치자면 눈썹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이랑 같은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쿠.라.!

  “쿠라-. 쿠라.”
  비탈을 타고 내려오며 엘리키는 제 연인을 소리쳐 불렀다. 렘피넨은 엘리키에게는 관심조차 없이 비탈로 고개를 돌린 쿠라의 질겁한 옆얼굴을 노려보았다. 렘피넨의 눈초리는 자못 당당했고 의기양양했으며 언뜻 비웃음까지 스쳤다. 렘피넨은 쿠라가 어찌할지 짐작이 갔다. 쿠라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쿠라!”
  늑대가 덮친 사내가 쿠라라고 확신한 엘리키는 비명을 질렀다. 쿠라는 엘리키가 온몸으로 뿜어내는 공포와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이 아닌 늑대 쿠라는, 엘리키에게 단지 사악한 약탈자일 뿐이어서, 연인을 외면하고 도망쳐야만 하는 제 처지를 원망했다. 흔들리는 노란색 눈동자 안에서 엘리키가 커질수록 두려움도 커진 쿠라는 숲 속으로 사라졌다, 시커먼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바람처럼.
렘피넨이 몸을 추스르는 동안 엘리키는 쿠라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한편, 렘피넨이 이곳에 있다는 게 어리둥절했다. 그것도 잠시, 엘리키는 렘피넨이 바로 그 추격자라고 확신했다.
  “쿠라는 어디 있어?”
  “방금 봤잖아, 도망치는 거.”
  비아냥스레 답하는 렘피넨에게서 엘리키는 막연한 불안을 느꼈다.
  “쿠라를 어쨌어?”
  “난 그 약.탈.자.의 털끝도 안 건드렸어. 그놈은 날 이 꼴로 만들었지만.”
  렘피넨은 한발 다가서면서 자신의 상처를 가리켰다.
  “난 지금 쿠라가 어디 있는지 물었어!”
  엘리키는 눈을 희번덕거리는 렘피넨을 피해 뒷걸음치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방금 도망쳤다고.”
  엘리키는 숲 속으로 사라지던 흰 늑대와 쿠라의 새하얀 머리카락을 동시에 떠올렸다가 고개를 휘저었다.
  “아니…야.”
  “저 옷이 누구 건지 알아보겠어?”
  렘피넨은 바닥에 뒹구는 옷을 가리켰고, 엘리키는 단박에 쿠라의 옷을 알아보았다.
  “한 번이라도 있었어?”
  “뭐가?”
  “달 없는 밤에 만난 적이.”
  엘리키는 말문이 막혔다.
  “물론 없었겠지. 왜냐하면, 그놈은 약탈자고 짐승이 사람의 형상을 빌릴 수 있는 건 달 없는 밤뿐이니까!”
  렘피넨의 말에 엘리키는 숨이 막혔다. 엘리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자 그랬다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정말 그것뿐인 건지 자신이 없었다. 엘리키는 렘피넨의 말을 당당하게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야.”
  탄식처럼 내뱉은 엘리키는 망연하게 돌아섰다. 흐느적흐느적 비탈을 오르려는 엘리키를 렘피넨이 붙들었다.
  “난 필요하다면 널 위해 내 심장도 받칠 수 있어. 그러니까 엘, 그깟 놈은 잊어. 그놈만 아니면 우린 예전처럼 잘 지낼 수 있어. 엘, 내가 얼마나 널 사-.”
  엘리키는 다 귀찮다는 듯이 렘피넨을 밀쳐내고는 터덜터덜 비탈을 올랐다. 엘리키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았는데, 그건 렘피넨도 마찬가지였다. 렘피넨은 마지막까지 외면당한 제 빈손을 움켰다. 잠깐 스쳤던 엘리키의 온기를 붙들려는 듯이. 온기는 찰나조차 머물지 않고 사라져 렘피넨은 추위에 시달린 제 살갗의 한기만을 쥐어야 했다. 이제 렘피넨은 엘리키를 사랑하지 않았다.

  눈싸움하려고, 쌓인 눈을 치워야 해서, 순록 먹일 때라서, 각자의 이유로 집 밖에서 아침을 보내던 사람들은 일제히 멈춰 서서 제 눈을 의심했는데, 오직 부족 최고의 수다쟁이 아낙만은 제가 헛것을 보지 않았다는 확신으로 라야타르에게 뛰어갔다. 빗자루를 든 채로 달려온 라야타르는 너무 놀라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엘리키는 수십 군데나 찢긴 옷 사이로 벌건 피를 흘리며 산발한 채 초점 없는 눈을 하고서 걸어갔다. 빗자루가 바닥에 닿기도 전, 앞으로 나선 라야타르는 휘청거리며 다가오는 딸을 끌어안았다. 그 손마저 밀쳐 버린 엘리키는 바닥에 뒹구는 빗자루를 밟고 지나갔다. 라야타르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딸의 뒷모습을 보자 왈칵 목이 메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에 젖은 옷이 축축해지도록 라야타르는 일어설 줄을 몰랐고, 아무도 부축하려고 생각하지 못해서, 라야타르는 엉덩이가 거의 얼어붙을 지경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정신을 놓았던 엘리키가 고통에서 벗어날 무렵, ‘나쁜 영에 붙들렸다’는 소문은 어느새 ‘약탈자의 아이를 가졌다’로 변했다. 라야타르를 위로하고 진심 어린 걱정과 조언을 아끼지 않던 사람들은 소문의 변화와 함께 태도를 바꿔서 이제 엘리키를 조롱하고 경멸하기 시작했다. 엘리키는 치솟는 수치심에 분개하고 슬퍼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욕과 조롱에 갇혀 지내던 어느 날, 무슨 생각인지 엘리키는 문을 박차고 렘피넨을 찾아갔다. 활을 손질하던 렘피넨은 난입한 엘리키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일을 계속했다.
  “너지? 네가 그 소문을 냈지?”
  엘리키는 증오를 불태우며 따졌다.
  “난 본 대로 말했을 뿐이야.”
  렘피넨은 차분하고도 냉정히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뭘 봤다는 건데?”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지. 그놈이 약탈자로 변하는 걸.”
  단호한데다 빈정거리기까지 하는 렘피넨의 태도에 엘리키는 두려움을 느꼈다.
  “거짓말!”  
  악을 쓴 엘리키는 곧이어 울먹였는데 렘피넨은 아무런 위로의 말도 없이 다시 활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홀로 남겨진 엘리키는 겁에 질려서 자신도 모르게 렘피넨을 붙들고 애원했다. 이제 자신을 도와줄 이는 렘피넨뿐이었다.
  “그놈을 버려. 그러면 뱃속의 아이는 내 아이가 될 테고, 부족 모두의 아이로 받아들여질 거야.”  
  렘피넨의 눈이 잔인하게 빛났다. 엘리키는 단 한 번의 부정으로 이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았지만 결국 거부했다. 렘피넨은 쿠라를 잊지 못하는 한 엘리키를 용서할 수 없었고 엘리키는 혼자서 돌아갔다.
  격해지던 조롱이 수그러든 뒤에 찾아온 건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존재를 부정당한 엘리키는 절망 속에서 나날이 무력해졌다. 뻔히 보이면서도 없는 척 무시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조롱이 나았다. 완전히 고립된 엘리키는, 자신이 먼지처럼, 아니 먼지만도 못하게 느껴졌다. 먼지는 쌓이면 털어내기라도 하지만 엘리키를 상대로는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만나러 오지 않는 쿠라, 뱃속의 아이, 악의를 품은 소문, 외면하는 렘피넨까지, 엘리키는 호수에 빠져 죽거나 나무에 목을 매고 싶었다. 엘리키는 집 밖으로 나가는 횟수가 점차 줄었고, 결국에는 집안 귀퉁이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는데, 언젠가 라야타르는 어둠 속에 웅크린 딸을 가죽 뭉치로 착각한 적도 있었다.
  봄이 돌아오고 부족 내 젊은이들이 사냥에 나서는 철이 되자 라야타르는 같이 사냥을 나가면 어떨까 하고 딸을 설득했다. 엘리키는 번번이 움츠러들며 힘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런 모습에 남몰래 한숨을 쉬거나 눈물을 찍어 내던 라야타르는 딸을 토닥이며 격려했다. 화살 중의 화실인 네 실력이라면 금세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게야.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렴, 애야. 주저하던 엘리키는 용기를 내서 모처럼 활과 화살을 손질했고, 사냥 준비로 들뜬 무리에게 쭈뼛쭈뼛 다가갔다. 그들은 엘리키를 반기지도 쫓아내지도 않았지만, 숲으로 가지도 않았다. 엘리키와 함께 사냥을 가지 않으려는 게 분명했다. 엘리키는 렘피넨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고, 렘피넨은 딴청을 부리다가 낙담한 엘리키가 돌아서려고 하자 무리를 설득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다들 렘피넨의 말을 받아들였다. 엘리키는 렘피넨에게 고맙다고 눈인사를 했지만, 렘피넨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휑하니 앞장서 나아갔다.
  엘리키는 사냥 내내 무리의 꽁무니만 쫓아다닌 데다 오랫동안 손을 놓은 탓에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사냥을 끝내고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는 일행 때문에 엘리키는 다급해졌다. 사냥에서조차 쓸모가 없다면 엘리키는 영원히 부정당하거나 최악에는 추방될 수도 있었다. 그 초조함이 결국 화를 불렀다. 평소의 엘리키라면 동면에서 갓 깨어나 사나워진 곰을 무턱대고 쏘려 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날은 그렇게 했다. 보기 좋게 심장을 비낀 화살은 곰의 앞발을 스치고 나무줄기에 박혔다. 굶주림과 갑작스러운 위협에 흥분한 곰이 휘두른 발을 가까스로 피한 엘리키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곰은 엘리키가 일어날 틈을 주지 않았다. 곰의 발톱은 가슴을 할퀴었고, 몸을 가누기도 전에 공격당한 엘리키는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들은 무리가 웅성거리며 달려왔다. 가장 먼저 도착한 렘피넨은 막 엘리키를 덮치려는 곰을 조준했다. 렘피넨이 시위를 놓으려던 찰나, 엘리키와 곰 사이로 쿠라가 뛰어들었다. 쿠라는 사납게 몰아쳤고 그 기세에 눌린 곰이 뒤로 물러났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렘피넨은 활을 내렸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진짜로 약탈자의 아이였어. 엘을 구하러 온 거야? 약탈자가, 약탈자는, 약탈자, 약탈자, 약탈자.
  손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일어난 엘리키는 고개를 쳐들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엘리키는 인정할 수 없었다. 단지 우연일 뿐, 저 약탈자는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존재였고 그래야만 했다. 엘리키의 외침을 들은 쿠라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고, 렘피넨은 지금이 기회란 걸 알아챘다. 렘피넨은 몸을 가누지도 못하면서 아니라고 소리치는 엘리키를 부축하며 말했다.
  “엘. 정말로 약탈자의 아이가 아니라면 저놈을 쏴!”
  엘리키는 다그치는 렘피넨에게 몰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황을 방관하던 자들은 어느새 엘리키 뒤로 몰려와 한 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그래 엘. 약탈자를 죽인다면 네 말을 믿을게. 어서 죽여. 죽여. 죽여 버려!
  엘리키가 머뭇거리는 사이에도 쿠라는 곰의 목덜미를 악물고 놓지 않았다. 곰도 필사적이어서 쿠라를 사정없이 할퀴고 몸을 흔들었다. 발톱에 난도질당한 쿠라의 몸에서 뿜어진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럴수록 쿠라는 단단히 곰을 붙들고 엄니를 목구멍 깊숙이 박아 넣었다. 피차 목숨은 하나여서 누군가는 죽어야 했다. 죽어야 끝나는 사투, 곰은 생존에 대한 욕망으로 단단해진 앞발로 마침내 쿠라를 패대기쳤다. 쿠헉! 피를 토해낸 쿠라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일으켰다.
  렘피넨은 무기력해진 엘리키의 손에 활과 화살을 쥐여주었다. 한참 손안의 활을 보던 엘리키는 쿠라가 피를 토하는 소리에 뒤돌아섰다. 후들거리는 다리로는 몸을 지탱하기도 벅찰 텐데 쿠라는 그게 제 할 일이라는 듯이 번개처럼 날아 곰의 목덜미를 물었다. 다시 목덜미를 물린 곰이 허우적대자 볼품없이 늘어진 가죽이 출렁거렸다.
  낭자한 피, 어째서 저 약탈자는 이렇게까지 싸우려는 걸까, 나를 위해서? 아니다, 제 몸을 지키려 할 뿐, 하지만 그렇다면 처음부터 끼어들지 말았으면 될 일이었다. 치열하게 생과 사를 겨루는 짐승의 모습에 엘리키는 어지러웠다. 어째서 이렇게 됐을까. 너는 쿠라가 아니고 나는 너를 죽여야만 산다. 활을 잡은 엘리키는 화살을 물린 시위를 켕기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가슴의 상처 때문만은 아니었다. 손가락이, 어깨가, 몸이, 시야가 너무나도 떨렸다. 한겨울, 얼어붙은 호수 아래 가라앉아 머리 위를 뒤덮은 두꺼운 얼음에 몸서리치듯. 몇 번이고 시위를 당겼다 놓았다 하는 엘리키와 달리 쿠라는 악착같이 버티어 곰의 살점을 입안 가득 베어냈고, 숨통이 끊어진 곰의 피를 뒤집어쓰며 추락했다. 육중한 곰이 쓰러질 때 피어오른 먼지구름이 쿠라의 몸을 뒤덮었다. 피와 흙먼지를 뒤발한 쿠라는 마치 적갈색 털을 가진 늑대처럼 보였다.
  간신히 숨만 붙은 쿠라는 흐릿한 눈으로 엘리키를 찾았다. 처음 만난 그때, 쿠라는 아직 새끼였고 엘리키는 소녀였다. 쿠라는 엘리키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고, 용감한 그 소녀를 다시 보고 싶어 주위를 맴돌았다. 어른이 된 쿠라는 어느 날, 소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소녀가 처녀로 자라자 쿠라는 장난삼아 엘리키의 사냥감을 가로챘고-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면서-쿠라라는 이름과 인간의 모습을 빌려 사랑받았으며 사랑을 주었다. 쿠라는 곧 마지막이 될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이 모든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은 쿠라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면서 화살을 기다렸다.
  엘리키는 쿠라가 곧 죽으리라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다. 내 손으로 죽여야 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엘리키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입술을 꽉 깨물고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을 곧바로 날아가 쿠라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아--악!”
  새된 비명을 지르며 엘리키는 활을 내버렸고 손바닥을 옷에 문질러 닦았다. 닦고 또 닦아도 활을 당긴 감촉은 사라지지 않아서 가슴이 묵직했다. 가슴을 부여잡고, 땅에 머리를 박은 채 죽어버린 쿠라에게 다가간 엘리키는 머뭇거리다가 앞발을 툭 건드렸다. 죽어버린 쿠라는 움직일 수 없었지만, 아직 따뜻했다. 엘리키는 뜨거운 체온이 포근해서 이번에는 앞발을 쓰다듬었다. 도중에 뭔가가 손에 걸린 엘리키는 자세히 보려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가 자지러지며 뒤로 물러났다. 입술을 깨물고서 바닥을 기어간 엘리키는 쿠라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얼굴을 돌려세운 엘리키는 쿠라의 왼쪽 눈두덩을 살폈고, 그토록 아니길 바랐던 상처를 확인하자 쿠라를 끌어안고 절규했다. 렘피넨은 흐느끼는 엘리키의 어깨를 감싸 안고 일으키려 했지만, 엘리키가 밀치는 바람에 자빠졌고, 죽음보다 매서운 엘리키의 눈빛에 질려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엘리키는 눈부신 태양과 울연한 숲과 시름에 잠긴 라야타르의 모습을 눈동자에 간직하며 눈을 감았다. 엘리키는 몸과 몸이 한없이 가까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온기를 만끽하며 생에 단 한 번뿐인 노래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오세요, 오세요.
  저 멀리 호수를 넘고 겹겹의 바다를 건넌 이여,
  그대 이제 돌아오세요.

  노래를 읊조리며 엘리키는 천천히 심장이 있는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오세요, 오세요.
  새하얀 백조에게 빌린 깃으로 급류를 넘어
  내게로 돌아오세요.

  엘리키의 심장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하자 엘리키는 가슴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제 심장을 쥐었다. 렘피넨은 엘리키가 영혼을 부르는 주술을, 자신이 엘리키에게 해 줄 수 있다 자신했던 주술을 행하자, 참을 수 없는 격정에 사로잡혔다.

  오세요, 오세요.
  단단한 그대의 뼈, 빛나는 심장이 여기 있으니
  바다를 건너 호수를 넘어
  차가운 물이 그대를 삼키지 못하게 하세요.
  오세요, 오-

  렘피넨은 우악스럽게, 심장을 쥔 엘리키의 손을 빼냈다. 겨우 약탈자를 되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걸 용납할 수 없었기에, 주술이 방해받으면 어떤 일이 닥칠지 알면서도 망설이지 않았다. 엘리키의 심장은 바로 터져버렸고, 심장을 잃은 엘리키의 몸이 축 늘어졌다. 렘피넨은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엘리키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으며 울었다. 제 몸이 다 터져나가도록, 몸이 말라비틀어지도록 울었다.
  그때였다. 엘리키의 몸에서 서늘한 바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고, 엘리키가 흘린 눈물은 눈송이로 변했다. 엘리키의 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순식간에 하얗게 세는 동안, 몸에서 부는 바람은 점차 거세졌고 눈발까지 더해졌다. 아무것도 모른 채 울던 렘피넨은 순식간에 온몸이 얼어붙었고, 앞다투어 도망치던 무리도 눈보라에 뒤덮였다. 사흘 밤낮으로 몰아친 눈보라는 부족을 완전히 눈 아래로 묻어버린 뒤에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산과 강을 넘어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사위를 집어삼킬 듯 포효하던 눈이 그치자 쓰러졌던 엘리키가 눈을 떴다. 심장을 잃은 엘리키는 쿠라의 시신을 소중하게 품고서 연인과 함께 살기를 꿈꿨던 먼 북쪽으로 천천히 사라져갔다.
  눈에 묻힌 부족은 거의 목숨을 잃었고, 그날 숲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한 처녀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눈을 부리는 자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고했다. 살아남은 자들이 대를 이어가는 동안 눈을 부리는 자의 이름은 눈의 주인으로 다시 여왕으로 바뀌었지만, 결코 엘리키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는 못했다.        

                                                     3

  손을 꼭 맞잡은 소년과 소녀가 차갑고 시린 얼음 복도를 지나서 메마른 얼음 성을 빠져나갔다. 여왕은 미동도 없이,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소년과 소녀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여왕은 숨이 막힐 만큼 느리게 몸을 돌려서 텅 빈 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홀 전체는 얼음으로 되어, 번들거리는 얼음에 여왕의 걸음걸음이 비쳤고 홀 안은 순식간에 여인으로 가득 찼다. 여왕이 옥좌에 도착할 때까지 여인 중 누구도 말을 걸거나 손짓하지 않아서 여왕은 내내 침묵했다. 여왕이 자리에 앉자 무수한 여인이 동시에 옥좌에 걸터앉았다.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던 여왕의 시선이 불현듯이 바닥으로 이끌렸다. 그곳에는 수천의 얼음조각으로 맞춰진 ‘영원’이라는 글자가 숨죽인 채 웅크리고 있었다. 투명한 글자 속에서 영원히 어루만질 수 없는, 왼쪽 눈두덩이 위에 흉터가 있던 은발의 사내와 영원히 태어나지 못할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여왕은 입을 틀어막았다. 손 틈으로 신음이 빠져나온 게 먼저인지, 창백한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른 게 먼저 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흐느끼며 흘린 눈물은 순식간에 쪼개져 수백의 결정으로 얼어붙었고, 마주한 결정들은 서로 끌어안은 채 송이송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여왕이 흘린 눈물이 변해 만들어진 눈송이는 몸에서 피어오른 한 줄기 바람을 타고 떠올랐다. 한 줄기 바람이 빠져나가자 여왕의 몸속에 갇혔던 바람이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떠오른 눈송이가 여왕의 발목에 닿기도 전에 몸 안에서 맴돌며 사나워진 바람이 밖으로 터져 나왔다. 홀 안을 할퀴고 물어뜯던 바람은 영원이란 글자를 벽에 내동댕이쳐서 산산이 부수어 버렸다. 하얗게 질린 공기가 바들바들 떨었고 여왕의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얼어버린 눈물과 공기가 뒤섞인 바람은 홀 안을 돌며 광란의 춤을 추었다. 이윽고 홀을 벗어난 눈보라는 성을 빠져나가 땅끝에서부터 저 먼 남쪽까지 광폭하게 내달렸다. 서럽도록 모질게, 허무하도록 빠르게, 울다 지친 여왕이 쓰러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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