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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탄생] 목소리

2012.03.28 23:3303.28

<목소리>

  박사는 능숙한 솜씨로 트렘멜의 오른 팔에서 붕대를 벗겨냈다. 트렘멜은 그 과경을 물끄러미 지켜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그런 타입의 사내인 것이다. 박사는 상처가 아물지 않은 그의 팔을 살펴보며 끝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사람과는 다르군!”
  프리머스 박사는 몸을 좀 더 앞으로 당기며 왼팔로는 안경을 고쳐 쓰고, 오른팔로는 트렘멜의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관찰했다.
  “확실히 다르단 말이지.”
  박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이내 자신이 문득 어떤 실수를 했는지 깨닫고는 얼른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평범한 일반인과는 말이지.”
  트렘멜은 어깨를 으쓱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박사님.”
  트렘멜은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이마 위를 어루만졌다. 사실 이런 흔한 말실수 보다는 상대방의 지나친 조심성이 오히려 그를 더 불편하게 했다.  그러자 박사는 살짝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트렘멜의 팔을 놓으며 말했다.
  “굉장히 회복 속도가 빠르다네. 아마 다음 주에는 근력 훈련을 시작해도 되고, 그 다음엔 바로 다시 작전에 투입되고 상관없을 거야.”
  트렘멜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써는 조금 더 회복이 빨랐으면 했다. 지금도 늦었다 싶다. 특히 지금 같은 시기에는. 그는 팔에 난 상처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아직은 더딘 움직이다.
  “너무 조바심 내지 말게. 자네는 수많은 생명을 구해냈어. 긍지를 갖게.”
  하지만 지금 내 팔이 정상이었다면 지금쯤 더 많은 생명을 구해내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내 동료들도. 트렘멜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속에 있는 말이 그의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만 일어나 봐도 될까요?”
  그가 말하자 박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내일은 들르지 말고 모레에 한 번 더 확인하도록 하자고. 셰먼 양에게 가서 붕대를 갈아달라고 하게.”
  “고맙습니다, 박사님.”
  트렘멜이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인사하자 박사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고맙다는 말은 나나,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이 자네에게 할 말이지. 가보도록 해. 우리 모든 1초의 시간도 아껴 써야할 때이지 않나.”
  박사는 자신의 책상 위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트렘멜은 고개 숙여보이고는 박사의 방을 빠져 나왔다.
  새 붕대를 감고 복도로 나오자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긴장한 모습들이 역력한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단 한 명,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에게로 다가오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지옥에 떨어지면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트렘멜이 유일하게 지목할 남자.
  “에일런.”
  “트렘멜.”
  에일런은 성큼성큼 걸어오며 오른 팔을 치켜들었다. 다분히 고의적인 행동이며 그 다운 행동이었다. 트렘멜은 미소 지으며 붕대를 감은 오른팔로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손바닥을 마주 쳤다.
  “엄살 피우니까 편한가. 그래 좀 어때?”
  “괜찮아.”
  “괜찮으면 얼른 장비 갖추고 오라고 이 친구야.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있지?”
  물론 트렘멜은 잘 알고 있었다.  
에일런은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파워 수트는 보호색을 띠기 위해 지금은 복도의 연 푸른 빛에 물들어 있고, 에일런의 어깨엔 대형 화기가 걸쳐져 있었다. 무게만 해도 일반 인간 병사 두, 세 명이 달라붙어야 할 그런 무기였다.
  트렘멜이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못하자 에일런이 거대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네가 있었어야 했어.”
  “그래.”
  트렘멜은 전장으로 가는 동료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특히 이번처럼 중요한 임무에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그곳이었다. 동료의 옆. 아니면 등 뒤에.
  “…그래.”
  트렘멜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를 안심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명 밖에 없다는 거 잘 알지?”
  에일런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걱정 마. 이번 건 나 혼자 개고생 좀 해서 마무리 짓고 올 테니까 다음에 함께 나가자고.”
  트렘멜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가볼게. 안 그래도 내가 제일 지각이라서 말야. 우리 분대원들 전부 내 욕하면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중에 보자고.”
  트렘멜은 에일런이 손을 들어 보이며 복도 너머로 걸어가는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 봤다. 그 역시 지금 작전을 위해 출동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그와 생사를 함께 하고 그를 뒤따라준 동료들과 함께.
  하지만 붕대가 감겨있는 오른 팔은 덫처럼 그를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팔은 그날의 기억을 자꾸만 떠올리게 만들었다.
  

  “난 말이야, 크리쳐 부대는 영 마음엘 들지 않아. 효율이 떨어지고 돈만 많이 들거든. 어떻게 생각하나, 트렘멜?”
  나란히 걸어가며 필로이 준장이 말했다. 그들은 바쁜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다음 작전 브리핑 시간이 예상보다 오래 걸려 약간 늦어진 것이다.
  트렘멜은 미소만 질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서 자네의 레플리컨트 부대는 매우 흡족해. 우리 전력의 최대 핵심이지.”
  평균 남성보다도 키가 약간 작은 필로이 준장은 수고를 감수하고서라도 트렘멜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종종 걸음으로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필로이 준장이 굵고 우렁찬 목소리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많은 눈이 일제히 그들에게로 향했다. 필요로 할 땐 목소리를 줄여야 한다는 자각이 있으면 좋으련만. 트렘멜은 부담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들은 원형통로를 돌아 다른 사람들과 합류했다. 지각자들에게서 흥미를 잃고 나자 방 안에 모인 이들은 빙 둘러선 채로 하나같이 원 안쪽을 주시했다. 그곳에 커다란 배양캡슐이 자리 잡고 있었고, 캡슐 옆에는 폴릿 주임이 상기된 표정으로 서있었다.
  “자, 이제 모두 모이신 것 같으니 슬슬 시작해볼까요?”
  그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한발자국 걸어 나오며 캡슐을 두어 번 두들겼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크리쳐 부대는 전투력에서는 두말할 여지가 없으나 저희가 컨트롤을 할 수 없다는 심각한 단점이 있었죠. 피아를 구별하지 못 했기 때문에 우리 부대원들이 특수 약품 처리된 전투복을 입지 않았거나 파손되었을 시 공격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또한 섬멸전 이외에 민간인 구출 작전 같은 임무엔 애시 당초 투입할 엄두 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 연구 팀은 기초 배양 과정부터 인간의 지시를 이해하는 크리쳐를 만들어 내는 실험을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손에 넣었기에 여러분에게 브리핑을 할 수 있게 되어 일개 과학자로서 너무나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트렘멜에게 필로이 준장이 속삭였다.
  “너희 레플리컨트 부대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잘 봐. 저 비싸 쳐 먹은 놈들을 어떻게 부려먹을지 잘 생각해보란 말야.”
  폴릿 주임은 점점 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그간의 실험 과정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18주의 배양 기간 끝에 이렇게 완벽한 모습으로 자라나게 된 것입니다. 이번 실험은 거의 완성 단계에 도달했으며, 앞으로는 실험을 거듭된 통해 배양 기간을 좀 더 단축시켜 크리쳐들을 최대한 빨리 임무에 투입시킬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헨드리 부주임 팀이 또한 다른 방법을 통해 크리쳐를 배양하고 있음을 간단히 말씀드리며 그 실험 역시 성과를 보이는 대로 여러분께 바로 보고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폴릿 주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수많은 질문을 예상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좌중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러자 그는 다소 호흡을 가라앉히며 다시 말했다.
  “자, 그럼 크리쳐를 배양 캡슐에서 나오게 해 지시를 내려 보겠습니다.”
  그는 뒤를 돌아서 능숙한 손놀림으로 키패드를 두들겼다. 그러자 천천히 배양 캡슐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트렘멜은 사람들이 나지막이 감탄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캡슐에 문이 끝까지 열렸다.
  “이리로 나오도록.”
  폴릿 주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잠시 후 거대한 모습의 크리쳐가 캡슐 밖으로 스르르 빠져 나왔다.
  “오오, 대단한데.”
  필로이 준장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까지만 해도 크리쳐 부대에 대해 평가가 박했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모두가 감탄하고 있었지만 이 공간에서 폴릿 주임만큼 감탄한 이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미소를 감추려 굳이 애쓰지 않고 크리쳐를 올려다보았다.
  잠자리의 눈처럼 여러 개로 갈라진 눈, 지금은 축 늘어져 있지만 전투 시 가공할 파괴력을 자랑할 긴 팔, 구부정한 허리, 등 뒤에 달린 8개의 촉수.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생명체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지시를 내리기 위해 크리쳐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그러자 촉수 하나가 위쪽으로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하, 이 녀석도 고양이처럼 꼬리라도 치켜세우려는 것일까요. 이 반응은 어떤 감정을 나타내는지 아직까지 잘 모르겠군요. 차차 연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때였다. 폴릿 주임이 지시를 내리려 하는 순간 위로 향했던 촉수가 순식간에 내려와 채찍처럼 내리쳤다. 너무 빨랐던 탓에 트렘멜은 아마 보통의 인간이라면 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를 제외하곤 아무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새도 없이 둔중한 것이 실험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폴릿 주임의 머리였다.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야 이 실험실 안의 모두가 사태를 깨달은 것이다. 크리쳐의 등에서 촉수들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8개의 촉수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다시 비명소리. 공포로 인해 비명을 지르는 소리와 고통으로 인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한 데 어우러졌다.
  트렘멜은 앞의 난간을 넘어 뛰어내리며 발목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빌어먹을. 개인 화기도 없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후회됐다. 그리고 이곳에 아무런 안전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폴릿 주임을 저주했다. 그렇게도 자신 있었단 말인가. 결국 자신의 목숨까진 내놓은 자신감이었지만. 트렘멜은 폴릿 주임의 머리를 축구공처럼 발로 세게 차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대신 그는 최대한 낮은 자세로 크리쳐의 하반신을 향해 파고들었다. 인간은 결코 따라할 수 없는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그리고는 다른 희생자의 피를 묻히고 돌아오는 한 가닥의 촉수를 칼로 절반 넘게 베어 떨어트렸다.
  크리쳐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로서도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육체적 고통일 것이다. 그 고통의 혼란 속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끝장내야 한다고 트렘멜은 생각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크리쳐의 머리로 칼을 겨누었다. 하지만 그때 반이 넘게 잘리고도 맹렬히 움직이던 촉수가 그의 오른팔을 감았다. 트렘멜 역시 격렬한 고통을 느꼈다. 촉수가 잘려 나가서 그나마 이정도지 제대로 된 촉수에게 잡혔다면 아마 그의 팔은 지금쯤 발밑으로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트렘멜은 고통으로 인해 몸을 비틀면서도 오른팔에든 나이프를 떨어트리지 않고 왼팔로 바꿔 잡았다. 남은 일곱 개의 촉수가 일제히 위로 솟구쳤다. 그것이 공격준비임을 트렘멜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이프를 재빨리 크리쳐의 긴 머리에 박아 넣었다. 끔찍한 비명소리. 이곳의 모든 인간들의 비명소리를 덮어버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촉수들이 공중에서 휘청거렸다. 크리쳐가 엄청난 고통으로 인해 제대로 자신은 컨트롤 할 수 없다는 증거였다.
  트렘멜은 시간을 두지 않고 재빨리 나이프를 뽑았다가 다시 머리에 깊숙이 박았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내리쳤다. 크리쳐의 피가 눈에 튀어 눈이 따끔거렸다. 크리쳐의 피가 산성이었던가?  그는 폴릿 주임이 설명을 기억해보려 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있다간 자신의 머리도 주임의 머리와 함께 나란히 데굴데굴 굴러다닐 터였다. 그는 계속해서 나이프를 찔러 넣었다. 비명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 비명소리가 멈추더라도 계속해서 찌를 생각이었다. 크리쳐의 생명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신이 전쟁터에서 봐왔던 것임에도 상대를 하게 된 다음에야 그 질긴 생명력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이윽고 그의 오른팔에서 촉수가 스르르 풀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제야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강인한 레플리컨트의 몸으로도 왼팔의 피로가 선명하게 전해졌다.


  2주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왼팔의 저림이 남아있음을 트렘멜은 가끔 느끼곤 했다. 그것은 어떠한 기억과 경험보다도 그의 머리와 육체에 진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어느새 복도에는 출동을 준비하는 부산함과 어수선함이 사라지고 정적만이 내려앉았다. 그는 기지 안을 잠시 둘러보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곳에 지금 그를 필요로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기계인간과의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그가 서있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기계들의 반란 이후 인간은 수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이곳은 인류에게 얼마 남지 않은 군사 기지였고, 이곳에 모인 이들은 전쟁을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자신도 모르게 어느샌가 잠시 눈을 붙였을 즈음 하사관 한 명이 그의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와.”
  문 너머에서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트렘멜은 몸을 일으켜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하사관이 문을 열고 들어와 그에게 경례했다.
  “쉬시는 도중에 죄송합니다. 지금 막 인근 도시에서 민간인 피난민을 실은 버스들이 도착했는데 통솔 인원이 부족해서 좀 부탁드려도 될까 찾아 왔습니다.”
  “작전 진행 중이라 일손이 부족하겠군. 알았어. 금방 나갈게.”
  하사관이 문을 닫고 나가자 트렘멜은 크고 두꺼운 손으로 얼굴을 몇 차례 비비고는 이내 상의를 입고 문을 나섰다. 버스들이 도착한 광장에는 많은 인원이 몰려 있었다. 민간인들은 이미 하차한 상태로 병사들의 지시에 따라 줄을 맞추고 있었다.
  “트렘멜. 금방 또 보는구만.”
  트렘멜이 계단을 내려오자 서류를 손에 든 프리머스 박사가 아는 체를 했다.
  “박사님.”
  트렘멜은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피난민들 신체검사를 하라고 지시하더군. 이미 기지 밖에서 인간인지 아닌지는 전부 조사를 끝마쳤으니 형식에 불과하지만 말일세. 몇 명이나 되는 지 확인하러 왔다네.”
  “그렇군요. 그림 제가 인솔해서 의무실로 데려 가겠습니다.”
  “그래주게. 열 명 단위로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트렘멜은 다시 박사에게 목례하고는 인수인계를 위해 버스를 통솔해 온 소위에게로 다가갔다. 민간인들과 그들을 이끌고 온 군인들 모두 초췌한 모습이 역력했다. 트렘멜은 간단한 보고를 받은 후 기지의 민간인 담당 장교에게 지시를 내려 몇날 며칠을 버스를 이끌고 온 군인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고, 민간인들이 신체검사 후 쉴 수 있는 거처를 미리 정비해 놓게 했다. 그는 오늘은 일인당 할당 분량보다 훨씬 많은 음식을 준비해 하게끔 지시 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맨 처음 줄을 의무실로 이동시키도록.”
  트렘멜은 인솔 병사에게 말했다. 첫줄의 민간인들은 지친 걸음으로 병사를 따랐다. 그는 남아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민간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 이곳까지 오시느라 대단히 고생 많으셨습니다. 검사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되도록 빨리 검사를 끝마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검사가 끝나면 지정된 거처에서 짐을 푸신 후, 식사가 준비되는 대로 바로 식사를 하실 수 있도록 조처하겠습니다. 우리 기지에 오신 것을 환영하며 편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인류의 승리를 위해.”
  그가 마지막으로 경례 구호를 말하자 몇 명의 군중이 작은 목소리로 따라 말했다.
  인류의 승리를 위해. 그것은 모든 인간의 바람일 것이다. 그리고 트렘멜 같은 이들은 그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트렘멜?”
  트렘멜이 무선으로 의무실에 첫 조가 출발했음을 알리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트렘멜이 고개를 돌리자 민간인 무리에서 한 여성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멜린?”
  길지 않은 검은 반 곱슬머리, 약간 쳐졌지만 날카로움을 간직한 눈매, 입술 왼쪽에 있는 작은 점. 그가 기억하고 있던 그녀와 달라진 점이라고는 꽤나 불룩 나온 배 뿐이었다.
  “세상에, 천하의 여장부 멜린께서.”
  그들은 웃으면서 포옹했다. 배가 많이 나와 포옹하기가 쉽지 않았다. 트렘멜로서는 만삭의 임산부와 안아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어떤 남자가 널 고꾸라트릴 수 있었던 거지? 제우스 외에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닥쳐. 이 민 대머리야.”
  트렘멜과 멜린은 멀지 않은 과거에 합동으로 팀을 이루어 작전을 펼친 적이 있었다. 멜린은 특수화기 부대 소속으로 레플리컨트 부대를 엄호하는 역할을 했었다.
  “임신해서 전역한 건가? 멜린이 민간인 행세를 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
  “오, 아냐. 나는 계속 부대에 남아 있었어. 이런 몸이라도 쓸 데는 많거든. 그러다가 만삭이 돼서 민간인들과 합류해 이곳으로 가라고 하더라고. 굉장히 따분해지겠구나 생각했지. 그런데 널 보게 될 줄이야. 더럽게 따분하진 않겠어.”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왼편 앞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배 갑을 꺼냈다.
  “불 좀 있어? 씨팔, 버스에서 한 대도 피지 못해 죽을 뻔했지 뭐야. 버스는 한 번도 안 멈추고.”
  “나는 담배를 안 피잖아. 이따가 얻어다 줄게. 기지에 보급 담배가 많이 있을 거야. 식사하고 만나자고. 어때?”
  “알아서 척척이군. 좋아. 역시 맘에 드는 남자야. 누나가 상을 줄 테니 샤워 깨끗이 하고 찾아오렴. 홀랑 다 벗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멜린이 팔꿈치로 트렘멜의 가슴을 쳤다.
  “못 말리겠군. 어서 가기나 해. 너네 줄 출발하잖아.”
  “알았어. 이따 봐, 자기.”  
  그녀가 줄을 따라 걸어가면서 뒤를 돌아보고는 손을 입술에 갔다대며 키스를 보냈다. 트렘멜은 쓴 웃음을 지으며 강적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싫지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담배에다 술까지? 임산부가 그래도 되는 건가?”
  트렘멜은 가져온 담배들을 블루종 안주머니에서 꺼내 멜린이 누워있는 침대 머리맡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고지식하긴.”
  멜린은 베개를 여러 개 쌓아 반쯤 기댄 채로 누워 포켓 병에 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뒤 병을 내밀었다.  
  “아니. 오늘 야간 근무가 있어.”
  트렘멜이 거절하자 멜린은 다시 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재미없는 놈은 필요 없어. 꺼져 버려.”
  “그나저나 독실이라니. 임산부는 역시 대우가 다르군. 다른 사람들은 열 명 넘게 한 방에서 지내는데.”
  “그럼. 인류의 미래가 내 안에 있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나 말고도 임산부가 대여섯 명 더 있는 데 모두 독실을 받은 것 같더라고.”
  트렘멜은 구석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놓고 앉았다.
  “임산부가 그렇게나 많아? 인간들의 종족 번식 의지란 감탄할만한데.”
  “그걸 농담이라고 하니 레플리컨트들이 발전이 없는 거야."
  트렘멜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태어났는걸.”
  “그것도 지금 농담치는 거지? 역시 재미없어. 너랑 얘기하느니 술이나 더 마시는 게 낫겠다.”
  트렘멜이 웃자 멜린도 따라 웃었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면 사람답게 사는 법 좀 배워봐. 군대 따윈 전역해버리라고.”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올 거라고 믿어야지. 내 아이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날이.”
  “엄마가 되면 확실히 달라지나 보네.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엿 먹어.”
  멜린은 병을 입으로 가져갔다가 급히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참참, 너한테 줄 게 있어.”
  그녀는 부산떨며 자신의 더블 백을 뒤졌다. 아마도 찾는 물건은 맨 밑바닥에 있는 듯 했다. 마침내 몇 마디 욕이 입에서 나온 끝에 힘들게 찾아낸 물건은 책이었다.
  “너, 책 좋아했지? 소설책 같은 거. 이거 내가 저번에 똥 닦을 휴지가 없어서 하나 챙겨 놨던 건데 이젠 필요 없으니까 너 줄게. 좆나 소중하게 짱 박아 놓은 거야. 고맙게 생각해.”
  트렘멜은 조심스레 책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고마워. 생각지도 못한 횡제인데.”
  그는 겉표지의 제목을 소리 내어 읽고는 책장을 넘기며 책을 훑어 봤다.
  “담배를 구해준 보답이야. 고마워 할 필요 없어.”
  그녀가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그녀가 쑥스러울 때 나오는 표정이었는데 그녀 자신은 알지 못하는 듯 했다.
  “괜찮다면 근무 시간 전 까지 여기서 읽다가도 될까? 내가 있는 곳은 너무 시끄러워서 말이야. 조용한데서 읽고 싶군.”
  “그렇게 해. 난 졸려서 좀만 잘래. 침대도 편하겠다, 술도 마셨겠다. 잠이 잘 오겠는데.”
  “아, 그럼 불 끌까? 난 어두워도 잘 보이니까.”
  멜린은 이불을 덮고 벽 쪽으로 돌아누우며 손을 저었다.
  “시끄러. 불 끄면 덮쳐버릴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유혹의 의미로 받아들이겠어.”
  트렘멜은 대답하지 않고 미소 지으며 책장을 펼쳤다. 책을 손에 넣은 건 굉장히 오랜만이라 약간 설레기까지 했다. 그는 소설 안에 있는 자신이 겪지 못하는 다른 세계에 굉장히 마음이 끌렸다. 어떤 소설이든 그 안의 세계는 언제나 흥미로웠다.
  그는 멜린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소설은 바다 속에 있는 해저 도시들의 이야기였다. 바다 속이라니. 그는 아직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해안 도시들이 점령당한 건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인간들은 최초의 패배이후 좀 더 깊숙이, 깊숙이 험한 땅으로 밀려 났던 것이다. 그런데 바다 속의 세상을 상상하기란 트렘멜에게 굉장히 힘들면서도, 설레는 일이었다.
  그는 근무 시간에 늦지 않으려 자꾸만 시계를 쳐다보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근무 시간이 되자 그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멜린은 깊게 잠들어 있었다. 트렘멜은 불을 끄고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아저씨, 안녕?

  갑자기 그를 부른 소리에 트렘멜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며 불을 켰다. 그곳엔 잠들어 있는 멜린 뿐이었다.
  “멜린?”
  그는 멜린이 장난을 치는 건가 싶어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들리는 거라곤 그녀의 숨소리 밖에 없었다.

  내 목소리가 들리나요?

  트렘멜은 그제 서야 깨닫는 게 있었다. 그는 이 낯선 목소리를 귀로 듣고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듣고 있는 것이었다.
  “…누구지?”
  그는 침을 삼키며 물었다. 자신은 입으로 말하는 게 다소 웃긴 상황이긴 했지만 그런 걸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들리나보네. 신기해요. 지금까지 내 말을 듣는 사람은 없었는데.

  “그래, 들려. 그리고… 혼란스러워.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

  나는 엄마의 뱃속에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마음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트렘멜은 혼란에 빠졌다. 지금 자신이 미쳐가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뱃속이라고? 누구? 멜린의?”

  맞아요. 난 엄마의 아이고 지금은 뱃속에 있어요. 태어날 날이 얼마 남진 않았지만.

  “지금 그 말을 내가 믿어야 하는 건가?
  그는 발소리를 죽이며 걸어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입안이 마르기 시작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나는 언제나 혼자서 심심했는걸.

  목소리는 너무나도 선명했다. 마치 고급 헤드폰을 낀 것처럼 트렘멜의 머릿속에서 맑게 울려 퍼졌다. 인류는 기계들과 오랜 전쟁을 해오며 부족한 화력, 한계가 있는 육체, 통일 되지 않은 체계 등등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해왔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인류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신병기, 대체병사들을 연구하고 생산해냈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트렘멜은 인류가 실험을 통해 자신들의 한계를 뛰어 넘는 초 인류로의 발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들은 바가 있다. 지금 백병전을 담당하고 있는 레플리컨트들 보다도 향상된 육체, 통신이 감청될 걱정할 필요 없이 텔레파시로 소통을 하는 두뇌, 끊임없이 발전하는 지능…. 인류는  멸종의 위기 앞에서 과학의 힘을 빌려 한 단계 더 진화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트렘멜은 지금 이 상황이 자신의 그 진화의 첫 단계를 목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건 초 인류 프로젝트의 한 일환일 것이다. 엄마의 뱃속에 잇을 때부터 완성된 지능을 소유한 태아, 그리고 다른 이에게 자신을 말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심심했다고? 너는 언제부터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지?”
  
  몰라요. 꽤 오래 전부터.

  “그렇군. 놀라워. 진심으로 놀라워. 그럼 엄마의 뱃속에 있으면서 엄마랑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대화를 모두 들을 수 있단 말이지?”
  
  음, 그건…,

  “멜린, 카드 게임이나 하지 않을래?”
  그때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트렘멜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중년의 한 여자가 더 놀란 모습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녀는 어두운 방안에 덩치 큰 남자가 뒤돌아 앉아 있는 모습에 진심으로 놀란 듯 짧게 비명 질렀다. 트렘멜이 불을 키며 안심 시키자 중년 여인은 그제야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방해했나봐요. 아이고,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부인. 들어오세요.”
  여자가 황급히 문을 닫고 나가려하자 트렘멜이 말렸다.
  “음? 헤시예요? 나도 카드 할래요. 어제 너무 많이 잃었어.”
  트렘멜의 뒤에서 멜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중년여자와 멜린을 번갈아 바라보며 트렘멜이 말했다.
  “목소리는?”
  그러자 멜린이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키며 말했다.
  “뭐, 이 미친놈아. 아직도 여기 있었냐? 어서 썩 꺼져. 나 돈 따러 갈 거야.”
  트렘멜은 잠자코 기다렸다. 하지만 어떤 소리도 그의 머릿속에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             *             *

  작전을 나갔던 부대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에일런이 속해 있던 레플리컨트 부대였다. 그리고 이 기지의 거의 마지막 남은 정예부대였고, 트렘멜 자신의 소속부대이기도 했다.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니, 처참할 정도였다. 레플리컨트 부대는 궤멸 상태에 처했으며 살아남은 소수의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진 채 복귀 중이었다. 에일런의 생사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 그의 모습을 봤다거나, 그의 최후를 목격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알지 못할 지도 몰랐다.

  “그래도 자네는 나름 침착해 보이는군.”
  프리머스 박사는 붕대를 풀고 상처를 확인한 뒤 말했다.
  “그런가요.”
  트렘멜은 박사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상처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상처는 저번 진료 때보다도 확연히 좋아져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손의 상처를 만져보았다.
  “응? 왜 그렇게 힘이 없지? 자네 같은 남자도 죽음이 두려운가?”
  “아닙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아요. 두려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트렘멜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며 말했다.
  “그거 흥미롭군. 괜찮다면 말해 주지 않겠나?”
  박사가 상체를 뒤로 젖히며 팔짱을 끼고 말했다. 트렘멜은 상처에서 눈을 돌리고 앞으로 몸을 숙이며 팔을 깍지 껴 턱에 받쳤다.
  “제가 침착해 보이신다고 말씀하시기에 문득 든 생각입니다. 이따금 혼자 생각해보기도 했었는데, 어쩌면 저는 제가 만들어질 때부터 감정이 불완전하게 태어나지는 않았나 불안해하곤 했습니다.”
  “불완전? 그건 자네가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쉽게 흔들리지 않고, 페이스 유지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왔기 때문에 그리 생각하게 된 건가?”
  트렘멜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것도 있죠. 확실히 저는 그런 면이 있으니까요. 저는 감정의 기복이 적죠.”
  “그렇다면 감정이 불완전하게 태어났다는 사실이 왜 두렵지?”
  “그건… 저는 비록 전쟁을 위해, 싸움을 하기 위해 태어나긴 했지만 한낱 병기가 아닌 한 사람의 인간이고도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지 제 자신이 병기로만 남게 될까봐 그것이 두렵습니다.”
  “음.”
  박사는 고개를 끄덕일 뿐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트렘멜은 허리를 피며 미소 지었다.
  “제가 쓸 대 없는 얘기로 박사님의 시간을 뺐었군요.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박사가 말했다.
  “아, 트렘멜. 나는 자네가 그다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엿한 한 인간인걸.”
  트렘멜은 문을 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선 방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감사합니다, 박사님.”
  “무슨 소리. 꼭 붕대 새로 갈게. 아직 감염을 조심해야 한다네.”
  트렘멜이 그러겠다고 대답하며 문 밖을 나섰다. 하지만 그는 다시 돌아서서 고개를 안쪽으로 내민 채 말했다.
  “아, 박사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응? 뭐지?”
  “이번에 기지로 들어온 피난민들 중에 멜린이라는 임산부가 있죠? 그녀 좀 잘 신경써주세요. 아는 사이기도 하고, 또….”
  트렘멜은 차마 뒷말을 덧붙이지 못한 채 말끝을 흐렸다. 프리머스 박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멜린? 임산부? 그녀는 내가 담당하지 않는 것 같은데 말이지.”
  “박사님이 담당하지 않으신다고요? 이 기지에 박사님 말고 다른 의사가 또 있습니까?”
  “그렇진 않지. 어쨌든 잘 모르겠는걸. 다른 도시에서 건너 온 임산부니까 그곳에서부터 계속 그녀를 담당하던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나?”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트렘멜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박사의 진료실 문을 닫았다. 프리머스 박사는 의자를 돌려 트렘멜의 진료 차트를 훑어보고는 한 쪽으로 치웠다. 그러다가 그는 곧 왜 자신이 트렘멜이 말한 임산부를 맡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트렘멜과 어떤 관계일지 궁금해졌다.


  밤이 깊었다. 트렘멜은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서도 자꾸만 시계를 바라보며 시간을 확인하다가, 이윽고 때가 되었다 판단했는지 책장을 덮었다. 그는 조용히 복도를 나서서 간간이 마주치는 불침번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느 방 앞에 멈춰 섰다. 잠시 가만히 서있으면서 방 안에서 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했다. 잠시 후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 아저씨.

  “그래, 안녕.”
  트렘멜은 어둠 속에서 말했다. 물론 레플리커트인 그에게 어둠은 그다지 깊지 않았지만.

  보고 싶었어요. 너무 외로웠어요.

  “외롭지 않아도 된다. 엄마가 곁에 있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잖아.”  

  그래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저씨뿐인걸.

  “혹시….”
  트렘멜은 자신의 말소리 외엔 아무 소음도 내지 않겠다는 듯이 의자를 가져와 앉을 생각 조차 하지 않고 서서 말했다.
  “너는 엄마가 잠들어 있을 때만 너의 생각을 전할 수 있는 거니?”

  맞아요.

  “그래서 저번에 갑작스레 우리 대화가 끊어졌던 거구나. 그럼 엄마한테도 네 마음을 전하기는 힘들겠군.”

  네. 그러니 나중에 엄마한테 말 좀 해줄래요? 담배나 술은 자제해 달라고. 엄마가 담배를 피거나 술을 마실 때면 은근히 괴롭다고요.

  트렘멜이 미소 지었다.
  “알았다. 철 안든 엄마는 아저씨가 교육시키도록 하지. 그리고 앞으론 시간이 될 때 마다 아저씨가 밤마다 대화 상대가 되러 와줄게.”

  정말? 고마워요, 아저씨. 정말로.

  목소리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느끼자 트렘멜은 자신의 마음도 따스해 지는 것을 느꼈다. 그에겐 의문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런데 왜 나만이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걸까?”
  
  그건 우리가 공통점이 있어서라고 생각해요.

  “공통점? 너와 내가?”
  트렘멜은 언제나 생각에 잠길 때면 나오는 버릇인 턱의 갓 자란 수염들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우린 평범하게 태어나진 않았잖아요. 아마 그런 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너는 우리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혹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어떤 공명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네. 그거예요.

  트렘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흥미로운 생각이야. 우리 그 점에 대해 더 얘기해보자고. 밤은 길고 멜린은 잠꾸러기니까.”

  맑은 웃음소리가 트렘멜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트렘멜은 발소리를 죽여 침대 밑에 있는 의자를 가져왔다. 그는 의자에 앉아, 멜린의 규칙적인 숨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복도 밖 발자국 소리에 신경을 쓰며 대화를 시작했다.


  인류의 방어선이 점점 더 후퇴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필사적으로 만들어 내 투입되었던 신병기들이 적에게 그다지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는 증거를 포착한 자료들이 속속 기지로 보고되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방어선의 최 거점이 될 이곳 기지에는 현 인류 보병 병력의 핵심인 레플리컨트 부대가 거의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완치되었네. 자네의 몸으로도 조금 오래 걸린 편이지만.”
  트렘멜은 오른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확실히 이제 아무런 이상도 없는 듯 했다.
  “이제 실전에 투입되어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네. 아니, 벌써 다음 작전에 편성되었던가?”
  프리머스 박사의 물음에 트렘멜이 웃으며 답했다.
  “네. 이미 가동 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라서. 팔이 낫지 않았더라도 출동할 예정이었습니다.”
  “음. 자네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겠군. 부담을 주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요사이 박사의 얼굴도 한층 피곤해보였다. 그는 요새 환자를 진료하는 일뿐만 아니라 각종 프로젝트에 가담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실험에 열중하고 있었다.
  “박사님. 인류에게 과연 희망이 남아있는 걸까요?”
  박사는 다소 놀란 눈길로 트렘멜을 바라봤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많은 이들 중에서도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는 가장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런 이조차 인류의 미래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물론이지. 아직 인간은 모든 카드를 내보이지 않았다네. 카드를 하나씩 뒤집을수록 기계들은 똥줄이 타게 될 거야.”
  트렘멜은 박사의 말이 오히려 돈을 전부 잃기 직전인 도박사의 허세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믿기로 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그 카드들이 나올 때까지 제 임무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제 돈만 전부 잃지 않으면 되는 거겠죠.”
  “바로 그거네. 핵심을 제대로 알고 있군, 그래.”
  박사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며 트렘멜을 가리켰다. 트렘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박사님.”
  “그래. 부디 몸조심 하게.”
  박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을 나서며 본 안경을 닦고 있는 박사의 모습은 초췌해 보였다. 하지만 트렘멜은 굳이 그 모습을 자신이 본 박사의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브리핑이 모든 끝난 새벽, 트렘멜은 피곤함을 느끼며 침대에 누웠다. 그는 잠시 누워 눈을 감고 있다가 이내 다시 몸을 일으켜 전투복을 벗었다.

  아저씨!

  그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상의를 갈아입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일까? 요사이 마음 속 대화에 열중했던 나머지 환청이 들렸을 수도 있다. 목소리가 자신이 있는 곳까지 전해져 오기엔 자신과 멜린의 방이 너무 멀었다.

  아저씨! 도와주세요. 엄마가 아파요!

  그는 다시 들려온 소리에 이번엔 지체하지 않고 문을 박차고 나섰다. 분명히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불침번들에게 아랑곳 않고 내달려 멜린의 방으로 들어갔다. 멜린이 땀을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아저….

  “멜린, 괜찮아?”
  트렘멜은 재빨리 멜린을 손으로 안아 올렸다. 만삭에 가까운 임산부라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그에겐 문제 되지 않았다. 그는 복도로 나가 불침번에게 소리쳤다.
  “프리머스 박사를 호출해! 긴급환자다.”
  그는 굉장한 속도로 의료실을 향해 내달렸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트렘멜은 멜린을 부축해 다시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미안해, 번거롭게 해서.”
  멜린은 그녀답지 않게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며 침대에 조심스레 누워 트렘멜이 덮어주는 이불을 끌어 올렸다.
  “이렇게 약한 모습은 처음 보는데. 종이호랑이가 된 건가, 멜린?”
  “그런가봐. 그런데 내가 아픈 건 어떻게 알았어?”
  멜린은 물음에 트렘멜은 잠시 당황했지만 그녀에게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는 척 하며 잠시 시간을 끌었다.
  “브리핑이 끝나고 잠이 안 와서 복도를 걷고 있었거든. 그런데 네 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리더라고. 너, 그 정도로 아팠던 거야. 나한테 감사하게 생각해.”
  “이번이 두 번째네. 예전에 허벅지에 파편이 박힌 나를 안고 7층에서 뛰어 내렸었지.”
  “그럼 너 같으면 뒤에서 다른 폭탄이 또 굴러들어왔는데 앞뒤 재고 있었겠어? 사실 나 혼자 뛰어 내렸어야 됐는데.”
  멜린이 힘없이 웃었다.
  “남자에게 안기다니. 그것도 레플리컨트 따위에게. 이 멜린 여사의 치욕이라고.”
  “오늘도 안겼잖아. 그때보다 훨씬 무거워졌지만.”
  “그러게.”
  멜린은 눈을 감았다.
  “나 잘래.”
  “그래. 나는 네가 잠드는 거 보고 내 방으로 갈게.”
  그녀는 잠깐 동안 몸을 뒤척이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안녕, 아저씨.

  “그래, 안녕.”
  트렘멜은 다시금 나타난 목소리에 깊은 편안함을 느꼈다.
  “많이 놀랐겠구나.”

  네.

  “그래도 나를 부른 건 정말 잘한 행동이었어. 당황하지도 않고.”

  당황했어요…. 그리고 무서웠어요.

  트렘멜은 신음을 삼켰다. 아무리 어른스럽더라도 실상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였다. 칭찬보다도 놀란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먼저였을 것이다.
  “그랬구나. 이젠 괜찮아. 엄마도, 너도….”

  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트렘멜은 좀 더 따뜻하고 부드럽게 달래주고 싶었지만 그런 말과 행동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랐다. 이건 기계와의 전투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저씨는 피곤한 것 같아요.

  잠시 후 목소리가 말했다. 트렘멜은 안도했다.
  “응. 내일 작전에 투입돼서 새벽까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거든. 미안하지만 원래 오늘 밤은 들리지 않을 생각이었단다.”

  그렇구나. 작전이란 말이죠? 있지, 나도 태어나면 기계들과 싸우게 되겠죠? 얼른 커서 아저씨를 도와주고 싶어요.

  트렘멜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쁘지 않은 웃음이었다.
  “네가 기계들과 싸울 수 있을 만큼 자라게 되면 나는 늙어서 총들 힘도 없을 텐데. 나 대신 싸워주렴.

  싫어요. 같이 싸워요, 네?

  트렘멜은 어쩔수 없이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는 이 안락한 느낌을 계속 간직하고 싶었다. 이 밤 내내.

  저기… 이번 작전은 어렵나요? 아저씨, 힘이 없어 보여요.

  이번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 아마도 우리가 다신 이렇게 대화를 못 나눌지도 모르겠구나. 솔직히 이번엔 자신이 없어. 이런 적은 나도 처음이지만.”
  그는 목이 잠기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말요? 그건 싫어요. 난 아직 아저씨 얼굴도 보지 못했는걸.

  “나도 안타까워. 하지만 어쩔 수 없단다. 대신 최대한 살아 돌아오겠다고 약속할게.”

  목소리는 잠시 들리지 않았다. 그는 서서히 안락함이 스르르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절망적인 현실로 돌아올 때가 가까워진 것이다. 그때였다. 힘찬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럼 이렇게 해요! 아저씨, 제 예정일이 사흘 뒤 인거 아시나요?

  “그럼. 잘 알고 있지.”
  내내 기다리고 있었거든. 트렘멜은 자신의 아쉬움을 차마 털어놓지 못한 채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나, 나 스스로 버텨서 미뤄볼게요. 할 수 있어요. 아저씨가 꼭 돌아와서 나 태어나는 모습을 지켜봐주세요.

  “그러면 안 돼. 그런 행동은 하지 마.”
  트렘멜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서 말해 하마터면 멜린은 깨울 뻔 했다. 그는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면 엄마나 다른 사람들이 걱정하실 거야.”

  괜찮아요. 걱정하라죠, 뭐. 난 꼭 아저씨가 내가 태어나는 모습을 봐줬으면 좋겠어요. 내 첫 번째 친구니까.

  트렘멜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에게 있어선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이제 자신도 감정이 물결 넘치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것은 큰 기쁨이었다.

  “알겠다. 꼭 돌아와서 네가 태어나는 모습을 지켜볼게.”
  그는 감정을 억누르며 가까스로 말했다.

  약속.

  “약속.”

  *             *             *

  차라리 죽고 싶었다. 몸을 수그린 채로 연신 핏덩이를 뱉어냈다. 치명적인 상처는 입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내상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랑데뷰 지점에 대기하기로 했던 타 기지 병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그들은 기계들의 거짓 정보에 의한 함정에 빠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동료들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불꽃 속으로 사라져 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최초의 일격에 부대원의 절반 이상이 희생됐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첫 공격과 함께 기계인간 부대가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폐허가 된 도시 한 복판이었지만 그들에게서 달아나기란 쉽지 않았다. 아니, 달아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는 살아남은 이들을 이끌고 정신없이 퇴각했지만 동료들은 줄줄이 나가떨어졌다. 마치 자신이 부대원들을 총알받이로 삼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가까운 곳에서 큰 폭발이 한 번 더 있었고, 트렘멜은 그대로 날아가 폐허에 부딪혀 벽을 무너트렸다. 그 충돌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듯 했다. 기계들은 폭발음과 함께 사라졌다. 하려는 의지만 있었더라도 남은 생존자를 찾아내어 처리하는 것은 그들에게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미 인간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 할런지도 몰랐다.
  어둠이 찾아오고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트렘멜은 그제 서야 몸을 움직여 아직 성한 건물로 들어가 벽에 몸을 기댔다. 다시금 미약한 통증이 찾아 왔다. 그는 입가를 훔쳤다. 손등에 피가 묻었다. 그는 머리를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자신도 몰랐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 살아남은 다른 누군가일수도 있고, 자신의 목숨을 거두러 온 기계 병사였을 수도 있고, 이대로 자신을 멈추게 할 시간의 흐름일수도 있고, 어쩌면 기대해도 좋을 마음 따뜻해지는 미래였을 수도 있다. 그는 기다렸다. 그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자신을 찾아오기를. 혼자 이곳에 내버려 두지 않기를.  
  “여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트렘멜은 눈을 떴다. 에일런이 평상시 모습 그대로 굳건하게 자신의 앞에 서있었다. 듬직한 미소와 함께.
  “에일런. 오랜만이군.”
  “그래. 이런 곳에서 뭐하고 있나. 꼴사납게.”
  “꿈을 꾸고 있었지.”
  트렘멜이 다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다시 꿈을 꾸려는 것처럼.
  “레플리컨트는 꿈을 꾸지 않는다네.”
  “아니, 나는 꿨어. 너무도 생생한 꿈을.”
  “무슨 꿈인지 물어봐도 될까?”
  눈을 감고 있어도 에일런의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그는 그런 사나이인 것이다.
  “내가 아기를 안고 있었어. 완전 작은 아기야. 나는 그런 일에 익숙하질 않잖아. 그래서 쩔쩔 매면서도 너무나도 기쁜 마음으로 아이를 안았지. 아이는 내 품에서 큰 소리로 울고 있었어.”
  “이제 알았네.”
  “뭘?”
  “그건 자네가 꿈을 꾼게 아니라 그냥 미쳤다는 것을. 역시 레플리컨트는 꿈을 꾸지 않아.”
  트렘멜이 소리 내어 웃었다.
  “섭섭한 소리 말아. 자네도 내 꿈에 일부분일 뿐이잖나. 내 꿈에 나온 거라면 내 기분 좀 맞춰주라고.”
  에일런이 웃었다.  
  “그런 건가? 그럼 내 한마디만 하지. 사실 자네 꿈을 믿네. 그건 너의 미래야, 알아들어? 그러니 어서 일어나. 그리고 자네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기다리게 하지 말게. 얼마나 마음 졸이고 있겠나. 그들을 실망 시키지 마.”
  “그래야겠지. 그런데 힘이 없어.”
  “할 수 있어. 약한 소리 마.”
  “그래.”  
  “이봐, 이봐. 잊지 말라고. 자네는 내가 유일하게 남에게 명령을 받아도 아무렇지 않았던 유일한 남자야. 그건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거야.”
  “고마워.”
  “그럼 이제 그만 일어 나. 그들이 전부 철수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어둠속에서 이동하는 게 훨씬 나을 거야. 내가 등 뒤를 지켜줄게.”
  트렘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떴다. 주위는 고요했다. 어느 순간부터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은 직접 행동해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고, 지금도 그건 바뀌지 않았다. 그는 지금 정말로 원하는 것이 있었다.
  트렘멜은 발소리를 죽이며 건물 밖을 나섰다.


  구원의 손길을 받게 된 것은 기지를 십여 킬로미터를 앞둔 지점에서였다. 트렘멜은 몸이 괜찮을 때는 웬만큼 많이 걸으려 노력하며 부지런히 나아갔다. 밤낮은 가리지 않았다. 레플리컨트인 자신의 눈도 어둠을 그다지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계들에게 낮과 밤은 아무런 차이도 없을 터였다. 아직도 밤의 어둠을 무서워하는 건 인간 밖에 없었다.
  그는 몸이 괜찮을 때는 조금이라도 더 많이 걷고, 몸에 통증이나 이상이 있을 때면 되도록 몸을 쉬었다. 하루 이동 거리는 나쁘지 않았다. 단지 작전 지역이 기지에서 지나치게 멀었던 것 일뿐. 그는 하염없이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그래도 목적지는 멀게만 느껴졌다. 그는 고통이 다소 수그러들어 잠시나마 눈을 붙였다가 일어날 때면, 자신이 잠든 사이 기계군의 진군 속도가 이미 자신을 앞지르지는 않았을까 생각하곤 했다. 이미 돌아갈 곳 따윈 어디에도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것이 그림자 속에 스며들어 그와 길을 같이 거닐었다.
  그를 발견한 것은 소형 정찰기였다. 그의 몸 안에는 식별기가 내장되어있어 정찰기는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명령에 의해 잠시 동안 그 자리에서 두 손을 든 채 대기해야 했다. 기계들의 수법은 나날이 진화하고 있기 때문에 검사는 철저히 해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검문이 끝나고 나자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트럭 한 대가 그를 데리러 왔다. 그는 조심스레 트럭 뒤 칸에 몸을 뉘이고 눈을 감은 채 바람을 맞았다.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곳으로.
  낯익은 기지 안에서 그를 처음으로 맞이한 건 프리머스 박사였다. 트렘멜의 몸이 성치 않다는 소식을 듣고 대기 중이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늦었나. 이 친구야. 모두들 얼마나 기다렸다고.”
  “죄송합니다.”  
  트렘멜이 웃으며 말했다.
  “잘 돌아왔네. 자네가 귀환했다는 소식에 기지가 발칵 뒤집혔었네, 이 기지 안에서 소식을 모르는 사람 찾기가 힘들 정도야. 통풍구의 쥐새끼들도 알고 있을 거란 말일세. 그래, 몸은 좀 어떤가?”  
  “괜찮습니다. 사실 좀 별로군요.”
  트렘멜이 등을 구부려 보며 말했다. 그는 요새 자신을 이따금 괴롭히는 등의 경련이 다시 찾아오지는 않을까 신경 쓰면서.
  “자세히 진료를 해야겠군. 그런데 잠시만 진료실에 누워 편히 기다려주게나. 내가 다녀올 곳이 있어서 말이야.”
  어쩐지 서두르는 박사의 모습에 트렘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는 별다른 질문 없이 대답했다. 명령이든 부탁이든, 그는 지시받는 것에 익숙한 것이다. 프리머스 박사가 고생했다는 의미로 트렘멜의 등을 두들겨 주고는 등을 돌려 황급히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사는 채 열 걸음을 떼기도 전에 뒤를 돌아봤다.
  “아니, 자네도 같이 가야겠군. 트렘멜. 이건 역사적인 순간일세.”
  박사가 손짓하자 트렘멜은 될 수 있는 한 빠른 걸음으로 박사에게 다가갔다. 그가 나란히 서자 박사는 트렘멜의 몸 상태에 맞춰서 발걸음을 늦춰 걷기 시작했다. 트렘멜이 아무런 질문도 없이 묵묵히 뒤따르자 박사가 말했다.
  “얼마 전, 기지로 온 피난 여성들 중에 임산부 하나가 좀 전부터 진통이 시작됐네. 자네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해 하던 참에 말야.”
  그 말에 트렘멜의 가슴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약속을 지킬 거라곤. 둘만이 알고 있는 소중하고도 은밀한 약속, 그것을 지켜낼 것이라곤.
  “제…생환 소식이 들려오고 나서입니까?”
  “그렇다네. 자네 소식이 알려지고 자네를 데리러 가기 위해 트럭이 출발했을 때쯤 일거야 덕분에 기지가 한 번 더 소란스러워졌다고. 어쨌거나 인류의 희망 아닌가.”
  박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죠. 인류의 희망….”
  자연스레 트렘멜의 걷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통증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저씨.

  금방이라도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가 이젠 머릿속이 아닌 실제로 들릴 것만 같았다. 아니, 실제로 금방이었다. 이제 곧. 지금은 목소리보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릴 것만 같았다.
  그는 박사를 따라 갈림길에서 오른쪽 통로로 접어들었다.  
  “진료실로 가는 게 아니군요.”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쪽이네. 거의 다 왔어. 몸은 어떤가?”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서두르자고.”
  한발 한발 내딛는 발걸음이 목적지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수록 그의 심장 소리가 커졌다. 자신뿐 아니라 박사도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체력적인 면에서 특화된 레플리컨트의 심장이 이 정도로 뛰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 었다. 어느새 트렘멜은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잘 모르면서 박사 보다 앞서 걷고 있었다.
  벌써부터 잠시 후 벌어질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는 그대로 굳어버린 듯 멈춰 서서 바라보고 있고, 멜린은 땀을 흘리며 신음과 함께 힘을 내고 있다. 그리고… 아이가 엄마의 뱃속에서 나온다. 건강한 울음소리. 아이와 그가 마주본다. 웃고 있다. 그도, 아이도.
  아이는 태어나서도 마음 속 목소리로 내게 말을 전할 수 있을까? 나는 뭐라고 해야 하지? 그저 고맙다는 말만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마워. 태어나줘서 고마워.
  “자, 들어가지.”
  박사가 앞장서 문을 연다. 트렘멜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이곳이 어딘지 아직 깨닫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심장 소리에 휩싸여 박사를 뒤따른다.  
  “박사. 트렘멜.”
  누군가 자신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다. 자신도 정중히 고개 숙인다. 많은 이들이 보인다. 이곳이 어디지? 트렘멜은 주위를 둘러본다. 아직, 낯설다.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선 채 방 한 가운데를 주시하고 있다. 그들은 기적적으로 생환한 트렘멜에게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모두 똑같은 곳만을 숨죽인 채 바라보고 있다.
  트렘멜도 고개를 돌려 그들과 함께 한다. 방 한 가운데에는 방어막이 둘러 싸 있고, 그 안에는 침대가 놓여 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방어막 바깥쪽에 자리 잡고 있다. 안쪽엔 오직 흰색 가운을 입은 채 절규하고 있는 멜린과 머리맡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수술복을 입은 한 남자뿐이다.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트렘멜은 그 남자가 누군지 알고 있다. 분명 그는 크리쳐 연구팀의 헨드리 부주임이었다. 그가 왜 저기에? 왜 프리머스 박사가 멜린 옆에 있질 않는 거지? 왜 아무도 저렇게 괴로워하는 멜린을 도와주지 않는가? 여기… 여긴 어디?
  트렘멜은 다시금 주위를 둘러본다. 낯설다. 하지만 그는 어렴풋이 이곳이 어딘지 생각나기 시작한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곳이다. 지금은 자신이 알고 있던 모습과 많이 변해서 선뜻 기억해내질 못했다. 이곳은 폭주한 크리쳐에 의해 살육이 펼쳐졌었던 실험실이다. 지금은 말끔히 정리하고 수리가 돼어 그때의 아수라장 같은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곳에?
  “잘 보게. 트렘멜. 이제부터 인류가 꺼내드는 카드를.”
  프리머스 박사가 손을 트렘멜의 어깨에 올렸다. 트렘멜은 박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의 심장 소리는 너무 컸고, 이곳의 풍경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무언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삐걱거리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히 알지 못한다.
  방어막 너머로 고통에 가득 찬 멜린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멜린은 강한 여자다. 자신의 허벅지에 파편이 박혔을 때도 욕을 실컷 내뱉었을 뿐 신음소리 조차 내지 않았던 전사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온통 땀투성이가 된 채 고통으로 범벅 된 비명을 지르고 있다.
  트렘멜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내딛으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힘이 들어 간 박사의 손이 그의 어깨를 누르고 있다. 박사는 흥분에 가득 차 있다.
  “저번의 실패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준비 중에 있었다네. 좀 더 크리쳐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박사의 동공이 커진다.
  멜린을 도와야 해. 그녀가 저렇게 비명 지르다니.
  뭔가 잘못 된 게 틀림없다. 하지만 트렘멜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침대를 주시하며 박사가 계속 말한다.
  “우리가 생각했던 방안 중 가장 획기적이었던 것은 크리쳐를 배양 중에 지능과 인격을 자연스레 주입함으로써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었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인간의 몸속에서 키우는 게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 숙주와 교감하고 높은 지능을 활용해 숙주 주위의 세상을 관찰하게 되는 거지. 인류는 패배하고 있었지만 우린 포기하지 않고 있었네. 연구가 완성될 날만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지. 그리고 지금… 보게! 보라고, 저 경이로운 광경을!”
  박사가 소리친다. 주위의 다른 이들도 탄성을 지른다. 트렘멜은 고개 돌린다. 멜린의 비명이 최고조에 달한다.
  그리고 새빨간 촉수가 멜린의 배에서 삐져나온다. 조금씩, 천천히. 곧이어 매끈한 무언가가 꿈틀대면서 그녀의 배를 찢고 나오기 시작한다. 온통 피투성이다. 멜린의 비명이 멈추고 그녀는 고개를 떨군다. 헨드리 부주임이 기계장치를 쳐다본다. 그리고는 그녀의 배에서 나오는 생물을 두 손으로 받쳐 든다. 자그마한 크리쳐다. 새빨간 피로 물든 채 여러 개의 촉수가 꿈틀 거리고 작디작은 몸을 움찔거리며 숨쉬는.

  안녕, 아저씨.

  목소리가 들려온다.  

  <끝>

  underdog03@naver.com    
  
딜레탕트
댓글 1
  • No Profile
    이니 군 12.03.29 00:32 댓글 수정 삭제
    딜레탕트 군!! 올만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여기서 뵙네요. 예전에 비해 문장이 훨씬 안정적이고 차분해지셨네요 :) 재밌게 읽었습니다. 제 습작은 바로 밑에 있어요 ㅎㅎㅎㅎ // 건강 조심하세요. 저는 올해 3월에 발목 수술하고 지금 병원에서 요양 중이에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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