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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모든 것의 기적

2012.01.01 02:1501.01

  아프가니스탄의 무델라 지방은 오랜 내전에 시달려 왔다. 수십 개의 세력이 서로 먹고 먹힌다. 밤이 지나고 새로운 태양이 뜰 때면 세력의 구도는 바뀌어 있다. 자신이 사는 마을이 어느 세력에 속해있는지도 모른다, 라는 일도 드물지 않다.
  마노 마을은 무델라 지방에는 얼마든지 있는 평범한 마을이다. 인구는 백 명이 되지 않고, 귀중한 생산물도 없어 자급자족으로 살아간다. 오랜 내전을 거치며 여러 세력에 지배됐지만, 그런 사실은 마을의 주민들에게 있어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이 작은 마을에는 누구도 눈독을 들이지 않고, 간섭하지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평화는 영원하지 않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내전이 마을까지 번질 수도 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마을이기에, 누구라도 멸망시킬 수 있다. 단순한 변덕으로 마을을 불태우고 대학살을 벌인다고 해도 문제될 일은 없다.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백 명 정도가 몰살당하는, 그런 사소한 일에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언젠가 전쟁의 불길은 마을까지 번진다. 주민들은 그런 자명한 사실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내전을 농담거리로 삼을 만큼 평화에 익숙해져 있다. 마을이 전쟁에 휩싸인다는 가능성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지만,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목숨이 갑작스레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탓이다.
그러나 그것이 터무니없는 망상임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마노 마을은 어둠에 잠겨 있다. 조명시설이 어디에나 널려있는 현대에는 보기 힘든 어두운 밤이다. 주민들은 오랜 옛날의 인류가 그랬던 것처럼 활동을 멈추고 조용한 안식에 빠져있다.
  정적에 잠긴 마노 마을 근처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총 24명. 규격화된 검은 바디아머와 암시 고글을 착용했다. 평화에 취한 마을 주민들과는 달리 전쟁에 익숙한 이들이다.
  그들이 착용한 것은 어느 것도 최신예 장비뿐이다. 인종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 지방의 사람이 아님은 분명하다. 군대를 운용하는 데에는 돈이 든다. 이 정도의 무장을 갖출 수 있는 곳은 강대국의 군대뿐이다. 제대로 된 국가도 형성하지 못하는 무델라 지방의 토착민들이 갖출 수 있는 장비가 아니다. 실제로 이들은 미국의 특수부대로 불과 한나절 전에 이곳에 도착했다.
  군인중의 한 사람, 에드워드 클라인은 깊게 숨을 내쉬며 암시고글 너머의 마을을 쳐다봤다. 다른 시대로 건너온 기분이 들 만큼 후진 마을이다. 정보부의 보고에 의하면 무장다운 무장은 없을 거라고 한다. 제대로 된 저항도 받지 않고 임무를 끝마칠 수 있겠지.
  그럼에도 마음이 불편한 것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데에 죄책감을 느끼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성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도, 살인에 죄책감을 느낄 정도라면 군인으로 해나갈 수 없다.
그가 괴로워하는 것은 이번 임무가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을 몰살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호삼 나시르는 최악의 테러리스트로, 10년 전부터 세력을 불리기 시작해 지금은 무델라 지방의 거대 세력인 알 마우자를 이끌고 있다. 세력이라고는 해도 단순한 무력으로만 비교하면 미국은커녕, 거대한 과격단체들에 비할 바도 아니지만, 호삼의 특이성은 알 마우자를 미국에게 있어 최악의 적으로 만들었다.
  호삼은 광신자였다. 그리고 자신이 광신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믿음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망상에 이끌려 판단을 그르치는 일 없이, 종교인다운 성실함으로 조직을 관리하고 세력을 불렸으며, 돈이나 권력에 취하지 않는 겸허한 자세로 테러를 계속했다.
  공표되지는 않았지만 미군은 한번 호삼을 놓친 적이 있었다. 3년 전쯤, 정보부의 첩보에 의해 호삼이 숨어있는 곳이 확정됐다. 곧바로 미군의 특수부대가 투입되었고, 호삼이 숨어있던 주둔지는 간단히 제압되었다. 그러나 미군이 붙잡은 것은 호삼으로 변장한 부하 로페즈 웨인이었다.
  미군은 발칵 뒤집혔다. 작전에 투입된 병사들과 그 상관이 질책을 받고, 이적 혐의로 조사를 당했다. 그러던 와중 밝혀진 사건의 진상은 군 관계자들에게 있어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고문에 가까운 심문에도 불구하고 로페즈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정황을 미루어 볼 때, 로페즈는 자발적으로 호삼의 대신으로 붙잡혔고, 호삼과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단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미국인 청년의 마음을 뒤틀어버릴 만한 카리스마가 호삼에게는 있다, 누군가 그렇게 주장했다. 억측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알 마우자와 직접 싸워본 이들은 타당한 추측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 상황에서 정보부는 호삼이 마노 마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내놓았고, 작은 마을을 몰살시키는 작전을 생각했다. 추측이 옳다는 증거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호삼을 죽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다소 희생이 생겨도 좋다. 그런 논리 하에 작전은 승인됐다.
  부대 안에서도 작전에 대해서는 여러 말이 있었다. 저번의 작전에 참여했고, 로페즈 웨인과도 직접 만난 에드워드는 이 작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호삼은 존재 자체가 위험했다. 가능하면 빨리 없애버려야 했다.
  피해는 있겠지. 그것은 에드워드의 목숨일지도 모르고, 동료의 목숨일지도 모르며, 전혀 상관없는 백 명 가량의 목숨일지도 모른다. 사소한 대가다. 만 명의 국민과 백 명의 이방인, 천칭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는 고민할 거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이성적인 판단이 감정의 불편함을 해소해 주지는 않았다.
  에드워드는 한숨을 쉬었다. 입에서 하얀 김이 흘러나왔다. 적도에 가까운 지방이지만, 밤이 되면 고지대의 기온은 빙점에 가깝게 떨어진다. 영하까지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저지대의 더위에 적응한 탓에 이정도 추위도 괴로웠다.
  그러나 이 추위도 곧 전투의 열기에 지워질 테지. 전투의 열기가 식을 때쯤이면, 에드워드는 귀환할 테고, 마을 사람들은 추위를 느낄 수 없는 상태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추위가 귀중하게 생각됐다.
생각에 잠겨있던 에드워드는 주위의 공기가 일렁이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동료들의 분위기에 날이 서있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에드워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작전을 개시할 시간이었다.

  부대의 어느 군인도 자신들이 관찰당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군인으로서 일류인 그들이 약한 적 앞에서 방심을 했던 것은 아니다. 상대가 너무 약했기에 오히려 긴장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들을 관찰하는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그들을 관찰하는 존재가 너무나 규격 외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예민한 인간이어도 자신이 사는 은하계를 볼 수는 없다.
  아무리 민감한 인간이어도 대기의 존재에 신경을 쓸 수는 없다.
  인간은 일상적인 것에는 둔하고, 거대한 것에 둔하다.
  군인들을 지켜보는 것은 그런 존재였다.
  어디에나 있는, 가장 거대한 존재.
  허무의 바다에 떠있는, 유일한 질서.
  모든 것을 포함하는 알.
  그 존재에 굳이 이름 붙인다면, 우주라는 말이 그나마 적당하겠지.
  우주는 자기 내면의 거의 모든 현상을 관측하는 의식의 끈 중 몇 가닥을 군인들에게 늘어트리고 있었다. 의식의 끈은 불확정성에 지배당하는 인간이 이론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감도로 군인들에 관한 정보를 빨아들였다. 그 정보들 중에는 군인들에게서 뿜어져 대기를 매우고 있는 살기도 있었다.
  이곳에서 비극이 일어날 것은 분명했다.
  따라서 우주가 오랫동안 찾아왔던 기적이 이곳에 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우주는 인간이나 다른 지성체들이 기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광경을 여러 번 봐왔다. 기적이라고 불리는 현상들은 대부분 착각이나 속임수였다. 물론 착각도 속임수도 아닌 진짜 기적들도 있었다. 죽은 자가 살아난 적도 있었고, 은하계 하나가 한순간에 사라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엄밀한 물리법칙 아래 발생한 일이었다. 기적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했다. 그것들을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성체들의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모든 법칙을 알고, 모든 현상을 일으키는 우주는 한 번도 기적을 보지 못했다. 아무리 뛰어난 마술도 자신을 놀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우주가 기적과 경이를 찾는다면, 그것은 물리법칙을 무시한 현상이어야 했다. 거의 전지한 우주조차도, 진정한 기적은 하나 밖에 상상할 수 없었다.

  우주는 군인들의 살의에 흥분하면서도 마을 쪽으로 의식을 돌렸다. 평화에 찌든 사람들은 최소한의 경비마저 세워두지 않았다. 훈련된 군인들은 무거운 장비에도 불구하고 소리 없이 마을의 어둠에 녹아들었다.
  첫 번째 비명이 터진 것은 발포가 시작돼, 마을 사람의 절반 이상의 죽은 뒤였다. 이미 모든 집이 제압당해서 저항은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잠에서 깬 직후, 혹은 잠든 채로 주민들은 살해당했다.
  살해당한 주민들의 대부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파악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죽었고, 설령 죽기 전에 생각할 여유가 있었던 이들이라도 사건의 진상을 짐작할 수는 없었다. 24명의 인간이 소리도 없이 집에 침입해, 한마디 구호도 없이 동시에 발포를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차원이 다른 기술력이 만든 예술이었고, 과학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마법이나 다름없었다.
  마을 사람 중에서 가장 불행했던 것은 안사르였다. 총성을 들은 어머니는 안사르를 깨워 옷장 안에 집어넣었다. 자다 일어난 안사르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어머니가 뭔가를 무서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에 커다란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안사르는 문틈으로 밖을 내다봤다. 어머니는 옷장에서 떨어져서 방문을 노려봤다. 거의 동시에 방문이 열리며 군인 하나가 들어왔다. 전갈의 껍질처럼 반들거리는 검은 슈트를 입고 있었다. 체형으로 미루어 보아 남자 같았다. 얼굴은 헬멧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슈트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싱싱한 혈액의 색이 슈트의 검은 광택과 어우러져, 군인은 자궁에서 튀어나온 악마처럼 보였다.
  군인은 곧바로 어머니를 향해 총을 겨눴다. 망설임이 없는 기계적인 움직임이었다. 총구를 겨누는데 주저하지 않았듯, 저 악마는 방아쇠를 당기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겠지. 그 사실을 깨닫자, 안사르는 군인에 묻은 피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안사르가 잠에서 깨어나 옷장에 숨는 짧은 시간동안, 저 군인은 아버지와 동생들을 죽인 것이다. 잠결에 들었던 소리, 그것은 총성이었던 것이겠지.
  총성은 합창하듯 마을 전체에서 들렸던 것 같다. 군인에게는 동료가 있다. 더 이상 총성은 들리지 않는다. 분명 마을 사람들은 전부 죽었겠지. 남은 것은 두 사람뿐이다. 그리고 이제 어머니가 죽으려 한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낮선 인간에 대한 공포도, 총에 대한 두려움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휘발해 버렸다. 그럼에도 안사르는 옷장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해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해했다. 어머니의 목숨을 체념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군인에게 달려들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그러나 훈련된 군인이 훨씬 빨랐다. 군인은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어머니의 발이 떨어지기도 전에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구에서 튀는 불꽃이 방을 밝혔다. 피가 허공으로 치솟더니, 철퍼덕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졌다. 어머니가 등지고 있던 벽이 혈액과 탄흔에 더럽혀졌다. 벽에 묻은 피는 꼬리를 남기며 흘러내렸다. 마치 담을 타고 흐르는 빗물 같았다.
  저렇게나 많은 피가 몸속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저렇게나 많은 피를 흘려서는 살 수 없다고 깨달았다.
  안사르는 떨었다. 공포가 아닌 증오에 휩싸여, 자신이 오열하고 있는지 어떤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죽었다.
  마을 사람이 죽었다.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살해당했다.
  사랑, 애정, 동경, 호기심, 우정, 모든 감정이 무가치해졌다. 감정을 품을 대상이 하나도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감정의 빈자리를 채우듯 살의가 마음속을 매웠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가족을 살해한 군인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칼 하나 없는 어린애가 최신예 병기로 무장한 군인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안사르는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군인의 모습을 노려봤다. 복수를 하려고 한다면, 지금 가능한 것은 원수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 이 모습을 마음속에 새기는 것뿐이었다.
  안사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은 물론 틀린 생각이었다.

  우주는 굴욕에 젖은 안사르의 표정을 지켜보며 조소했다.
  사람을 죽이는 데에 칼이 없다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총이나 폭탄, 미사일……어떤 병기도 사용자의 의지가 없다면 토끼 하나 죽일 수 없다. 아니, 의지야 말로 살해의 전부다. 살의야 말로 최고의 병기다.
  살의는 기적에 이르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살의가 있다면 우주조차 죽일 수 있다.
  우주를 죽일 수 있다면, 우주 안에 있는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
  안사르가 정말로 해야 하는 것은 무기를 찾는 것도, 원수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도 아니라, 자신의 살의를 우주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기적의 문은 열리고, 우주는 독을 주입당한 계란처럼 썩어버릴 테지.
  그러나 안사르는 당장 눈앞에 있는 병사에 정신이 팔려, 우주의 존재조차 깨닫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벌써 백억 년 이상 어느 지성체도 우주를 죽이지 못했다. 우주가 자신을 둘러싼 허무에게 살의를 품지 못하듯, 지성체는 우주에게 살의를 품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조금 낙담하면서도 우주는 기계적으로 작업을 개시했다. 안사르 가족에게 보이지 않는 손을 뻗었다. 그것은 우주가 가진 진정한 힘이었다. 전지에 가까울 뿐인 의식의 끈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전능한 힘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자동적이고 정밀하게 안사르 가족의 혈액을 흘리고, 고통을 주고, 부정맥을 일으키고, 뇌세포를 부패시켜 죽음에 이르게 했다.

  미션 성공. 사상자 0, 부상자 0.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결과를 냈지만, 기지로 귀환하는 헬기에는 침체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잡담을 하기는커녕 욕설 한마디 내뱉는 사람조차 없었다. 입을 열면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떠오를 것 같았다.
  주민을 몰살했다. 테러리스트가 그 마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노인도 아이도 남자도 여자도 공평하게 죽였다. 주민의 대부분은 침입자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죽었다. 저항한 이들은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제대로 된 무기조차 없었다. 무딘 날이 달린 요리도구 정도가 고작이었다.
  만약 호삼을 죽일 수 있었다면, 이 희생으로 더욱 많은 인명을 구했다고 위안 삼을 수 있었겠지. 하지만 마을에 호삼은 없었다. 정보가 잘못된 것이다. 당연하다. 추측으로 적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다면 첩보 위성 따위가 무슨 가치가 있을까.
  에드워드는 앉은 채로 눈을 감고, 수 십분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마을 사람들을 죽이는 건 너무 쉬웠다. 지나치게 쉬웠다. 벌레를 죽이는 것보다 쉬웠다. 손가락을 굽히는 것만으로도 가족이 하나 사라졌다. 인간의 목숨이 이렇게 가볍다는 것을 느낀 것은 얼마 만이었는지. 어쩌면 신병일 때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뒤로 처음인지도 모른다.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 엉뚱한 정보를 준 정보부에 대한 분노, 사람이 쉽게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 그런 혼돈스러운 감정에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작은 구원이 있었다.
  분명 에드워드는 역겨운 일을 했다. 자신이 맡은 집에서 남자와 아이들, 여자를 죽였다.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와 아직 어린 딸에게 자랑할 수 없는, 그런 일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여자를 죽이고 남은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살필 때, 옷장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소리를 죽인 채 숨어있었지만 암시 고글에는 뻔히 보였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총을 들어 올렸을 때, 망설임이 생겼다. 만약 상대가 어른이었다면 에드워드도 망설이지 않았겠지. 그러나 열원의 크기에서 미루어 보아, 상대는 어린애였다. 그 사실이 에드워드의 죄책감을 자극했고, 동시에 한 가지 변명을 만들었다.
  어린애는 대단한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발견하지 못한 척 하더라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타이르며 에드워드는 아이를 못 본 척 했다.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제거하는 게 낫다. 당시에는 그런 망설임도 있었지만, 역시 죽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 아이를 죽였다면 누군가를 살렸다는 최소한의 위안도 없이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겠지.

  안사르의 생활은 부유하지 않았으나, 빈곤하지도 않았다. 선진국의 시점에서 본다면 처참한 삶이었겠지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영양 섭취는 충분했고, 때로 간식을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런 안사르가 불과 며칠 만에 병자처럼 초췌해져 있었다.
  아니, 실제로 안사르의 건강은 병자의 그것과 같았다. 마을이 침략당하고 며칠 동안 음식도 물도 전혀 손에 넣지 못했다. 시체가 썩는 냄새와 극도의 스트레스가 내분비계를 뒤틀었다.
  이 옷장에서 나가지 않은 지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가. 안사르는 생각했다. 문틈으로 보이는 밖은 몇 번인가 밝아지고 다시 어두워졌다. 어머니를 죽인 군인이 방을 떠난 뒤부터 안사르는 쭉 옷장 안에 숨어 있었다. 어쩌면 군인들이 마을에 주둔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방심하고 밖으로 나가서 발견되면 그걸로 복수는 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먹고 마시지 않으면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지는 않았다.
  군인이 방을 나간 뒤, 사람의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적어도 이 방이나 집에 안사르 이외의 누군가가 머무르지는 않았다. 옷장 밖으로 나가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안사르는 떨리는 손으로 옷장의 문을 열었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아연했다. 어머니의 시체는 낮은 온도 탓에 부패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끔찍할 만큼 변형되어 있었다.
  견디기 힘든 냄새에 위에 든 것을 전부 토해내고 싶었지만, 안사르는 강한 인내심으로 헛구역질도 참아냈다. 가족의 시체를 보고 구역질을 한다는 행위에 대한 저항감도 있었다. 그 이상으로, 불필요한 소리를 내서 주의를 끌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소리를 죽이고 방을 나왔을 때, 적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안사르는 경계를 풀지 않고 집 주위를 살폈다.
  집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안사르는 우선 아버지와 동생들이 있는 방으로 갔다. 역시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죽었는지 편안한 표정들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그 생각을 부정했다. 이런 생각을 품은 것은 그 군인의 탓이었다.
  안사르는 다시 한 번 눈앞의 참상을 마음에 새겼다. 총을 맞아 쓰러지는 어머니, 벽을 타고 흐르는 피, 썩어서 변형되는 시체들. 그 모습을 결코 잊을 수는 없겠지.
  음식과 물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먹는 음식은 맛있었다. 특히 물을 마시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쾌감이었다. 빨아들이듯 물을 들이키던 안사르는 졸음과 닮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여기서 잠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에 아랑곳 않고 안사르의 몸은 잠에 빠졌다. 약해진 몸에 다량의 수분이 들어온 탓이었다.

  안사르는 눈을 떴을 때, 절망감을 느꼈다. 그가 깨어난 곳은 물을 마시고 쓰러졌던 곳과는 다른, 본적도 없는 장소였다. 잠에 든 동안 누군가에게 발견돼 옮겨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가족들의 원수라면 안사르의 목숨조차 위험했다.
  하지만 조금 생각을 진행하자 희망이 보였다. 안사르는 천막 안의 허술한 간이침대에 누워 있었다. 주위에는 간단한 약품이나 의료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안사르의 손발을 구속하는 도구도 없었다.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적대적인 환경은 아닌 듯 했다.
  천막 밖에서는 사람들이 지나치는 기척과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대화에서는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안사르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만약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안사르를 해치려고 한다면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적이라도 안사르를 헤칠 생각이 없거나, 아군도 적도 아닐 경우, 도망치는 것이 나쁘게 작용할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망설이고 있을 때, 천막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를 따라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밖에 서있는 보초 두 명이 보였다. 보초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다.
  “정신이 든 모양이지?”
  남자는 낮선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족을 죽인 군인의 검은 슈트만큼 이질적이지는 않았다. 마을 부근의 사람은 아니지만 아주 먼 곳의 사람도 아닌 듯 했다.
  안사르는 경계의 눈초리로 남자를 쳐다봤지만, 남자의 당당한 태도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
  “겁을 먹은 건……아닌 것 같은데, 혹시 내가 그놈들과 한패인 것 같나?”
  남자는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호삼 나시르다. 아마 이 마을을 공격한 놈들의 적이겠지. 너의 이름은?”
  “……안사르. 당신들은 누구죠? 우리 마을에는 왜 왔어요?”
  “우리들은 알 마우자라고 한다. 의적 같은 거지. 나는 그 리더 같은 거고. 우리는 동지들을 모으고 있는 거야. 지금 미제가 무델라를 노리고 있다는 건 아나? 무델라를 지배해 우리들을 노예로 만들려는 놈들이야. 너도 이미 봤겠지. 평화롭게 사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놈들이다. 이 마을에도 우리 쪽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와보니까 전부 죽어 있더군. 유감스럽게 됐다. 생존자가 없는지 수색하던 중에 너를 발견해서 캠프로 데려왔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안사르는 자신이 기억하는 것만을 대답했다. 그 단편적인 상황만으로도 호삼은 상황을 파악했다.
  “그런 장비라면 미제 놈들이겠지. 내가 이 마을에 온다는 걸 알고, 아니, 아마 이곳에 와있다고 생각하고 공격한 걸 테지.”
  “그렇다는 건 우리 마을에 놈들이 쳐들어 온건 당신들 탓 아닌가요?”
  “우리가 원인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
  호삼의 진지한 태도에 안사르도 화난 표정을 풀었다. 호삼을 원망하는 것은 잘못됐다. 미워해야 하는 것은 그 검은 슈트의 군인이다. 그 정도 분별은 있었다. 단지 호삼을 시험해 봤을 뿐.
  “안사르, 갈 곳이 없으면 우리들이랑 같이 가지 않을래?”
  “당신들이랑요?”
  “우리들과 함께 있으면 너도 놈들에게 복수할 수 있겠지.”
  설령 그의 말이 거짓말이더라도 이곳에서 굶어 죽는 것에 비하면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아직 순진한 안사르는 망설였다. 죄책감을 느낀 탓이었다.
  “저는 당신들과 같은 목적은 없어요. 제가 하고 싶은 건 침략을 막아내는 게 아니라 복수예요. 이런 제가 함께 가도 괜찮은가요?”
  만약 알 마우자와 자신의 이해가 대립한다면 분명 알 마우자를 배신할 것이다,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곳에 버리겠다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호삼의 대답은 불안에 떨던 안사르에게 놀라운 것이었다.
  “상관없어. 미국과 싸울 생각만 있으면 누구라도 좋아. 수백 년 동안 다투던 녀석들이 뭉친 거야. 미제나 다른 나라 출신의 녀석들도 있다고. 목적은 제각각인 게 당연해. 가장 강한 나라랑 싸우려고 들어온 녀석도 있으니까. 사실은 나도 무델라를 구하는 게 목적인건 아니니까. 목적이 복수여도 괜찮아. 중요한건 이거지. 너는 미제와 싸울 건가?”
  호삼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안사르는 맞잡았다.

  우주는 아이러니를 좋아했다.
  최선을 다해 노력과 최선의 선택을 거듭해도 최악의 결과에 이르는 때가 있다. 인간은 그것을 운명의 장난이라고 부른다. 물론, 운명이란 것은 환상일 뿐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은 운명을 세계나 우주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주로서는 그런 생각에 공감할 수 없었지만, 그 생각 자체는 좋아했다. 만약 아이러니에 의해, 억울한 비극을 맞은 인간이 있다면, 그는 운명을 탓하고, 좀 더 나아가서 우주에게 살의를 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희망을 가졌기에, 우주는 늘 아이러니의 현장에 의식의 가닥을 뻗고 있었고, 그 중 한 가닥이 여기에 있다.
  안사르는 긴장하고 있었다. 비록 밀입국이었지만, 그런 사실에 신경을 쓰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는 이전에도 들어온 적이 있었다. 아무리 강대한 국가라도 넓은 영토 전체를 감시할 수는 없었다. 몰래 드나드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안사르가 긴장한 것은 지금 인생의 목적을 이루려는 참이기 때문이었다.
  그 밤으로부터 15년 이상 안사르는 원수를 추적했다. 일개 테러리스트가 얼굴조차 보지 못한 특수부대원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민간인 학살이 공표됐을 때 일어날 파장이 너무나 컸기에, 그 작전에 관한 제대로 된 자료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안사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그 때, 그 장소에 있을 수 있었던 이들을 알아내고, 그런 작전에 투입될 만한 이들을 걸러내고, 다시 한 번 원수의 모습을 떠올리며 비교했다. 왼손잡이라는 사실, 키, 총을 쏘는 자세, 보폭, 어깨의 넓이, 걸을 때 먼저 내미는 발. 결국 원수가 에드워드 클라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한 것이 3년 전이었다. 그러나 안사르 혼자서는 미국에 사는 원수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불가능 했다.
  미국에 들어올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준 것은 호삼이었다. 호삼은 그 대가로 한 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10년 이상 전에 붙잡힌 로페즈 웨인의 탈환. 이제껏 알 마우자에서 해온 일들보다 훨씬 어려운 임무였다. 어째서 한달도 사귀지 않은 로페즈를 무리하게 구하려 하는 지도 알 수 없었지만, 안사르는 그 제안을 수락했고, 2년 전 로페즈 웨인 탈환에 성공했다. 그 결과, 이틀 전에 미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호삼에 의하면, 에드워드 클라인은 마노 마을을 몰살하고 몇 달 뒤 퇴역해 경호회사를 차렸다고 한다. 회사는 잘 굴러가서 지금은 교외의 자택에서 가족들과 함께 편안히 산다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은 안사르에게 불쾌한 동시에, 그 이상으로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가족을 참살한 원수에게는 죄책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째서 에드워드 클라인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퇴역해버린 걸까.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고, 단순한 변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드워드 클라인에게 죄책감이 있다는 가능성 또한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제껏 미국과 싸워오면서, 알 마우자의 동료들과 어울리면서, 미국인들도 자신과 같은 인간임을 깨닫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에드워드 클라인이 안사르 자신에게 했던 일과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닌가.
  그런 고민에 번뇌하면서도 안사르는 클라인가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온 것은 에드워드 본인이었다. 그는 이민자로 보이는 흑인 청년을 보고 눈을 찌푸렸지만, 곧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웃음을 지었다. 호삼 나시르의 테러로 인해 미국에 만연하는 인종차별적인 시각을 벗고 보면, 눈앞의 청년에게는 사람을 복종시키는, 마성 같은 매력이 있었다.
그 낮선 느낌에 불안해하는 도중에 어떤 광경이 떠올랐다. 젊은 시절 몸담았던 군대에서 나오게 된 계기. 누구에게도 토로하지 않았던 그 기억. 청년은 그 마을에서 죽였던 남자와 아이들과 꼭 닮은 모습이었다. 오랫동안 퇴적된 죄책감과, 그들에게 속죄하고 싶다는 마음을 매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어째서 청년이 그 마을 사람들과 닮았다는 것을 바로 깨닫지 못했는지 의아했다. 이렇게나 닮았는데. 죄를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밤의 꿈을 꾸지 않게 된지도 꽤 됐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죄책감도 조금은 옅어진 거겠지. 속죄 같은 건 조금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죠?”
  어째서 그런 잘못을 잊을 수 있는지, 스스로를 경멸하면서 에드워드는 물었다.
  “에드워드 클라인.”
  그 물음에 안사르는 섬뜩한 목소리로 에드워드의 이름을 불렀다. 에드워드는 청년이 마노 마을의 생존자임을 직감했다.
  안사르는 총을 들이밀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 평화로 인해 무뎌진 에드워드가 전장에서 자신을 갈아온 복수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아니, 설령 전성기의 에드워드라도 안사르를 이길 수는 없었겠지. 되살아난 죄책감에 에드워드의 의지는 꺾여 있었다.
  안사르는 에드워드를 제압해 서재에 있는 의자에 묶었다. 집에 가족은 없는 듯 했다.
  “아내와 딸은 없나 보군. 어디 갔지?”
  “……마트에.”
  대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안사르는 놀라면서도 거짓말이 아닌지 의심했다. 안사르를 강도라고 착각하는지도 몰랐다. 가족이 곧 돌아온다고 말하면 겁을 먹고 도망칠 거라고.
  “내가 왜 여기 왔는지는 아나?”
  안사르는 비웃으며 물었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대답은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복수인가?”
  “잘 알고 있군. 내가 왜 복수하려는지 아나?”
  분명 이것은 알아챌 수 없겠지. 그 마을에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고는 상상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안사르의 기대는 빗나갔다.
  “너는 마노마을의 생존자겠지…….”
  에드워드는 무기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을 들은 안사르는 동요했다. 마노 마을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알고 있다. 거기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진실은 안사르가 숨어있는 것을 알면서도 못 본 척 해줬다는 사실 뿐이었다.
  아무리 안사르를 놓아줬다고는 해도 에드워드 클라인이 가족의 원수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실제로 만난 이 남자는 안사르가 상상해온 무자비한 군인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 남자가 정말로 원수인가?
  그런 의심을 떨쳐버리듯 안사르는 말했다.
  “너의 가족들이 돌아오면 고문을 시작하지. 가족 세 명이 나란히 앉아서 비명을 지르는 거야. 걱정 마. 두 명이 죽을 때까지 네 몸에는 손끝 하나 안 건드릴 테니.”
  그런 말을 듣고도 에드워드는 분노할 수 없었다. 이것은 자업자득이었다.
  물론 잘못은 에드워드만의 것이다. 그 책임을 가족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그것을 알면서도, 안사르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무고한 이들을 학살한 인간이 도덕을 입에 담아서는 안됐다.
  그렇기에, 에드워드에게 가능한 것은 애원하는 것뿐이었다.
  “다른 사람은 봐줘. 나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으니까. 제발.”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에드워드 클라인의 모습에 안사르는 원한이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원한에 다시 불을 지피기 위해 가족들의 시체를 떠올렸지만, 그럴수록 원한은 빠르게 사라졌다. 기억속의 원수는 이런 인간이 아니었다.
  “너는 내 가족을 죽인 걸 후회하나?”
  에드워드는 오열하며 끄덕였다.
  원한은 완전히 사라졌다. 안사르는 칼을 꺼내 에드워드 클라인의 경동맥을 베었다. 살의라고는 조금도 없는, 기계적인 행동이었다. 죽음에 빠져드는 에드워드 클라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안사르에게는 조금의 만족감도 없었다. 이제껏 품어왔던 살의는 갈 곳을 잃고 사라진 것이다. 복수를 목적으로 살아온 안사르가 살의를 잃자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공허한 인간인가?”
  에드워드 클라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의식을 잃은 것이다. 에드워드 클라인의 집을 떠나며 안사르는 이제껏 만난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가진 복잡한 감정들이 안사르에게는 없었다. 안사르는 이제야 자신이 인간으로서 결락을 품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 씁쓸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런 감상을 느낄만한 신경은 오래 전에 괴사한 것이다.

  자신이 살려준 인간에게 가족을 잃는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에드워드 클라인이 운명을 원망하고, 우주에게 살의를 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결과를 보니 성공은커녕 대실패였다.
안사르는 살의를 잃었고, 에드워드는 자신을 원망했다. 자신을 원망하는 이는 세계를 원망하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살의가 없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는 살의만으로 살아온 안사르에게 꽤나 기대했기 때문에 실망도 컸다. 생명체에게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우주를 원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라면 안사르는 완전히 무가치하다.
  우주는 안사르에게 드리운 의식의 끈을 거두어 다른 곳으로 뻗었다. 의식의 끈은 무한에 가까웠지만, 무한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무가치한 것에 낭비할 수는 없었다. 우주에는 훨씬 가치 있는 지성체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우주가 안사르에 대한 관심을 잃어 의식의 끈을 거두었음에도, 전능한 힘을 가진 보이지 않는 손은 자동적으로, 오차 없이 안사르를 움직이고 있었다.
  “오, 어서와.”
  호삼은 개인 사무실에서 서류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떤 복잡한 일들도 기초는 간단한 법이다. 전술과 전쟁 또한 그 기본에는 사칙연산과 검산이 있었다. 조금도 질리지 않고 복잡한 계산을 반복하는 호삼은 극단적이라는 의미에서는 안사르와 닮았다.
  “복수는 했나?”
  “네.”
  안사르의 대답에 호삼은 의문을 품었다. 복수를 제대로 끝마쳤다면, 원한은 만족감이든 일그러진 쾌감이든, 뭔가고 변했어야 했다. 그러나 안사르는 텅 비어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마치 이제껏 그를 이끌던 원한이 통째로 절개된 것 같았다. 신문 기사를 고려하면 에드워드 클라인이 죽은 것은 분명했지만, 복수 자체는 제대로 되지 않은 거겠지.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불확정인자를 최소화하는 의미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안사르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과 자신의 생각에 대해 털어 놓았다.
  “그런가…….”
  호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성가시게 됐다고 생각했다. 안사르는 너무 똑똑해서 알아차려 버린 것이다. 이제껏 안사르가 생각해온 원수와 같은 인간은 없다. 누굴 어떻게 하더라도 그는 만족하지 못하겠지. 그러나 이제 와서 복수를 포기할 수도 없다. 원한과 같은 감정을 떠나서, 안사르는 복수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유능한 인재가 망가졌다는 사실에 호삼은 장엄한 슬픔을 느꼈다. 비록 서로의 목표는 다르지만, 안사르의 행동이 호삼의 성전에 강력한 아군이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돼 버린 인간은 다룰 수 없다. 사람의 상식을 벗어나 최소한의 논리만으로 움직이기에,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예상할 수 없는 탓이다.
  그 추측을 뒷받침하듯 안사르는 권총을 꺼내 호삼에게 들이밀었다.
  “저의 가족이 죽은 건 당신 때문이지요?”
  “미제 때문이지.”
  “미국이 공격한 건 당신의 존재 때문이었어요.”
  “내가 존재하는 데에도 수많은 원인이 있는걸. 원인의 원인을 쫓다보면 끝도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호삼은 웃었다. 웃지 않을 수 없는 촌극이었다. 이게 무의미하다는 사실은 안사르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원수를 잃고 아무나 죽여보자고 생각하는 거다. 아무나 죽이다보면 그 중에 원수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미친 논리다. 아마 모든 인간을 죽여도 원수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타당한 논리이기도 하다. 아무 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원수를 죽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논리를 실행하려는 안사르는 분명 광신자다. 자신이 잘못됐음을 알면서도 상궤를 벗어난 논리에 충실하다. 마치 자신 같다고 호삼은 생각했다.
  호삼은 서랍을 열고, 총을 꺼내, 안사르의 심장을 쐈다. 안사르는 호삼의 행동에 전혀 반응 하지 않고 뒤로 쓰러졌다. 피가 책상 위로 떨어져 서류들을 적셨다.
  “괜찮으십니까!”
  총성을 듣고 로페즈 웨인이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괜찮아. 별거 아니야. 이야기가 하고 싶으니까 잠깐 나가 있어줘.”
  호삼은 충성스러운 부하에게 말했다.
  로페즈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죽기 직전의 안사르를 보더니 그 손에서 총을 빼앗아 사무실에서 나갔다.
  “안사르, 왜 나를 안 쐈지?”
  호삼의 물음에 안사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쏘지 않은 데에 명백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방아쇠를 당길 열정이 없었을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대답할 열정도 없었다.
  안사르는 죽음을 느끼며 멍한 눈으로 책상에서 흐르는 자신의 피를 봤다. 피는 자국을 남기며 책상 앞면을 따라 흘렀다.
  어머니의 피도 벽을 타르고 흘러내렸다.
  누군가가 아래로 잡아끄는 듯.
  문득, 안사르는 자신의 원수가 누군지 깨달았다. 잃어버린 살의가 부활했다.

  기적을 찾던 우주는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감각에 전율했다. 달걀이 썩듯, 우주가 문드러지고 있었다. 법칙이 미쳐 날뛰고, 물질 정보가 소실됐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분명했다. 누군가가 우주에게 살의를 품었다. 누가 살의를 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살의를 품은 존재는 의식의 끈이 닿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우주는 무한에 가까운 의식의 끈을 재빨리 살의의 근원으로 뻗었다. 그러나 의식의 끈은 목표에 도달하기도 전에 삭아 끊어졌다. 삭아버린 의식의 끈에서는 해석할 수 없는 노이즈만이 전해졌고, 그마저도 이윽고 사라졌다.
  의식의 끈들이 사라짐에 따라 우주 전체를 아우르던 인식도 공백에 침식당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자신의 밖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허무가 질량을 가지고 우주를 덮어버리는 듯 했다.
  아직 우주는 완전히 부서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손은 감각의 공백에 있는 뭔가를 만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 이 손으로 만지고 있는 것들 중에는 살의의 근원이 되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과연 누구였을까.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누군가가 있었나?
  그렇게 생각하는 중에도 우주의 감각은 붕괴하고 있었다. 우주의 죽음은 막을 수 없었다.
  우주는 두려움을 느꼈다. 많은 것들을 죽여 온 우주도 자신이 죽어본 적은 없었다.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곳에서 손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도 소름끼쳤다.
  동시에 우주는 환희했다. 우주는 허무에게 살의를 품어보지 못했지만, 누군가는 우주에게 살의를 품은 것이다.
  처음으로 받아본 살의는 정말이지 훌륭한 것이었다.
  우주가 이제까지의 삶에서 보아온 것은, 우주 자신이 가진 보이지 않는 손의 움직임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전능하고 자동적이었다. 단조로운 움직임을 조금의 변화도 없이 반복하는 자신의 손을 150억년 가깝게 지켜보는 것은 단지 지루할 뿐이었다.
  이제야 처음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만약 우주를 놀라게 할 수 있는 기적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 행하는 물리법칙을 벗어난 현상이어야 했다. 그리고 우주조차도 그런 현상은 하나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우주 자신의 죽음.
  우주는 누군가에 의해 해체되듯 침식되고, 부서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작업을 하는 것은 우주 자신의 손이 아니었다. 어떤 순서, 어떤 원리에 의해 자신이 부서지는지 우주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놀라웠다.
  분명 머지않아 분해 작업은 끝날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우주는 진심으로 자신의 죽음을 즐겼다.
이 방대한 우주에서, 우주가 즐길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죽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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