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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별의 여인

2011.10.12 22:5410.12

존재하지 않는 태양과 함께 그녀는 빛났다.
잔잔하게 흐르는 푸른빛의 바다 아래 그녀는 무형의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풀 위를 지나갔다. 초록빛이 터져나가면서 빛으로 이루어진 풀들의 존재가 잠시 흐릿해졌다.

"안녕..."

우주 전체를 뒤흔드는 목소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만의 공간이자 기존의 시공간과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내우주에 존재할 수 있는 지성체는 오직 '그녀' 밖에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그녀와 똑같았다.

"언젠가...언젠가 그들을 멸망시킬 수 있어. 이 공간에서 갇힌 너의 고통이 보상받을 순간이 올거야. 복수의 순간이 곧..."

그녀는 슬픈 얼굴로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리고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괜찮아. 언제나처럼 나는 이 우주에서 신으로 존재할게. 이 우주에서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한 최적의 방법을 생각해낼게. 이 우주가 존재하는 그 순간까지 영원히...
일순 그녀의 존재는 실체를 잃었다. 그림자에 가까운 잔상이 흩어진 순간 그녀는 찬란하게 빛나는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하늘로 올라갔다.
차가운 결정이 그녀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존재하는 모든 색깔을 내부에서 강렬하게 발산하는 결정체는 그녀의 육체를 대신했다.
그녀는 아주 잠시 태양의 표면을 걷다가 우주를 뛰어넘어 베가를 내려다보았다.
푸른 불꽃과 함께 불타오르는 베가성을 품에 안은 그녀는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로 우주 너머 별들 사이를 응시했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목적지는 정해져있었다. 수없이 파괴되고 수없이 재구성된 행성.
에르데(Erde).
언제나처럼 질량병기가 좋았다. 하지만 에르데와 연결된 모든 행성들은 어떻게 할까?
그것이 그녀의 고민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많았다.
사실상 무한한 시간과 함께 자신만의 우주에서 살아가는 그녀에게 불가능은 없었다.
이미 해결책은 거의 찾아낸 상태였다. 거의.
그녀는 언제나처럼 별을 소중히 품에 안고 에르데로 향했다.
우주 전체를 뒤흔드는 나지막한 흥얼거림과 함께.

전투의 혼란 속에서 흑색에 가까울 정도로 어두운 청색 두정갑과 가재 비슷한 검은 흉갑을 몸에 걸친 남자는 저 멀리 칼을 들고 서있는 자를 노려보고 서있었다.
선주군수 김하혁은 왜란이 끝나고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이 땅에 버림받은 왜군 잔당들 중 금오산에서 수십여 명의 규모를 이루고 산적질을 하던 세력의 우두머리이자 한때는 왜장이었던 자를 비웃으며 외쳤다.

"숨어서 도적질만 하더니 이제는 겁을 먹은 모양이지? 뭘 꾸물대느냐!"

왜장은 그 도발적인 말에 몸을 흠칫 떨었다. 김하혁은 왜놈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왜장은 얼굴 전체를 가리는 검붉은 얼굴 가리개를 쓰고 있었다.
왜란 때도 꽤나 자주 볼 수 있던 저 가면. 멘구라고 했던가? 하여간 어떻게든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겁도 주기 위해 제 딴에는 나름 흉악하게 만든 것 같지만 김하혁에게는 실소만 나올 뿐이었다.

"그런 것은 이 조선 땅에도 있다, 이 왜놈아."

김하혁은 어두운 은빛으로 빛나고 표면이 거친 철제 가면을 품에서 꺼내들었다.
지금의 주상께서 분조를 이끌 때에 고안해낸 것으로 마치 도깨비처럼 왜군들에게 겁을 주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가 얼굴에 철면을 쓸 때 왜장은 요란한 기합성과 함께 칼을 허공에 휘둘러대고 있었다.
광인과 같은 움직임, 무인 특유의 침착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몸부림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김하혁은 날카롭게 찢어진 철가면의 눈으로 왜장을 노려보았다.
가면의 형태는 해골의 윗부분과 비슷해보였다. 얼굴 부분의 아래턱을 감싸는 곳 좌우에 마치 인간의 아래턱뼈와 비슷해 보이는 3개의 원추형 구멍이 존재한 탓이었다.
왜병 잔당을 거의 죽인 군졸들이 김하혁 군수를 지원하기 위해 왜장 주변으로 다가와 빠져나갈 틈 없는 포위망을 형성했다.
그 와중에도 왜장은 칼을 겨눈 채로 서있었다. 김하혁은 차갑게 웃으며 왜장을 노려보았다.
한때는 화려했을 형형색색의 외양은 빛이 바래 낡아빠졌고 장갑도 군데군데 부서져있었다.
산적 우두머리로 전락한 왜장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듯 했다.

“단칼에 베어주마!”

김하혁은 사냥감을 덮치는 표범과도 같이 쇄도하며 칼을 크게 휘둘렀다. 왜장은 기겁하며 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완전히 피해내지는 못했다.
불꽃이 번쩍이면서 흉갑이 길게 베이자 왜장이 무어라 외쳤다.

“그 입 닥쳐라!”

김하혁은 그대로 몸을 날려 놈의 공포에 질린 눈동자가 아주 가까이 보이는 거리까지 근접한 후 몸을 세차게 돌렸다.

“크아아악!”

왜장은 칼을 떨어뜨리며 반사적으로 목을 부여잡았다. 목이 깊게 베였는데 어떻게 비명을 질렀는지 의문이었지만 김하혁은 칼을 내려쳤다.
푸른 섬광이 눈앞에서 번쩍이는가 싶더니 깨끗하게 잘려나간 왜장의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김하혁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투구를 잡았다. 머리통을 잃은 왜장의 몸은 무릎을 꿇은 채 부들부들 떨다가 앞으로 쓰러졌다.

“크허억...허억...”

거칠게 숨을 내쉬며 김하혁은 왜장의 목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두정갑은 붉은 선혈로 흠뻑 젖어있었다.
전투의 흥분에 취해 울부짖는 그의 머리 위 하늘 저편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점이 나타났다. 마치 도깨비불처럼 빛나는 초록빛 광점은 완전한 원형을 이룬 채로 푸른 하늘을 점차 잠식하며 선명하게 불타고 있었다.


심연 한가운데서 환하게 폭발하는 섬광과 함께 우주선은 초공간을 빠져나왔다.

“통상 우주로 진입했습니다. 좌표 및 진로 확인 결과 목표로 하는 글리제 항성계에 성공적으로 진입했습니다.”

“흐음...”

우주선의 지배자는 살아있는 컴퓨터이자 노예의 보고에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이 항성계에서 식민 행성으로 삼을 가치가 있는 행성이 분명...”

“글리제 581입니다. 육안으로 확인 가능합니다. 전면 스크린에 영상을 띄우겠습니다.”

그녀, 티케-가헤스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하며 가녀릴 정도로 연약한 손가락을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기계처럼 움직였다.

“좋군. 쓸 만한 위성이 하나뿐이란 걸 제외하면 너무나 훌륭한 행성이야. 완벽에 가까워!”

우주선의 지배자는 경탄하며 안락한 의자에서 일어났다. 푸른 바다와 육지가 조화를 이루며 우주 공간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분명 생명으로 충만할 것이다. 제국을 위한 신천지가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문명의 발달 수준은 확인할 것도 없군. 궤도에 원시적 인공위성 하나 없다니! 보나마나 간신히 천 따위로 몸을 가리고 있거나 겨우 농사나 짓고 있겠지. 크흐흐흐...”

지배자는 희열에 찬 얼굴로 글리제 581 행성을 노려보았다. 이제 저 별을 정복한다면 그는 바타일론(Bataillon)에서 단숨에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명문가 자제 녀석들은 어느새 거들먹거리고 있는데 이제야 자신에게 맞는 직위를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글리제 581을 홀로 정복한 전적을 토대로 가문의 힘을 동원한다면 충분히 코만디렌더 게네랄(Kommandierender General)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지배자의 이름은 폰아레얀 13세, 그는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황금빛 미래의 구체적 환상에 사로잡혀 희열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먼저 무인기를 파견해 조사를 해야만 합니다."

폰아레얀 13세는 거침없이 뻗어나가던 자신의 즐거운 상상을 깨버린 그녀의 목소리에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흐음...이유는?"

그녀는 아무런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기계가 합성하는 것처럼 너무나 인공적 아름다움이 배어나오는 목소리였다.

"여기는 다른 항성계입니다. 저희가 알던 항성계의 몇몇 법칙과 위배될 경우...자칫 크나큰 위험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아,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주인님의 패배. 최악의 경우 전멸할 수도 있습니다."

폰아레얀 13세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너의 판단이란 말인가? 광자 컴퓨터에 버금간다는 그 지성이 기껏 내세운 것이 제국 탐사대의 패배라고? 웃기는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아래에는 가만히 보는 것만으로도 탐욕이 샘솟는 찬란한 행성이 존재했다.
폰아레얀 13세는 한 손을 과장스럽게 펼치며 외쳤다.

"그럴 걱정은 없다. 이미 본성이 알려준 대략적인 정보로도 충분하다. 물과 공기가 존재하는...그것도 표준형 테라 행성과 완벽히 일치하는 이 행성에 무슨 위험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탐사대 본연의 임무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저희들은 일단 궤도상에 머무르면서 정복 함대를 호출해야 됩니다."

폰아레얀 13세는 그런 그녀를 비웃었다. 그건 제국군이 우주를 상대로 정복 전쟁을 시작한 초창기에나 해당하는 말이었다.

"하! 잊혀진 그 규정을 지금 이 나에게 말하는 건가? 나를 이 우주의 겁쟁이로 만들 생각인가?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우리 제국이 우주에 진출한지도 어느덧 2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 제국은 우리들과 동등한 수준의 외계 문명은 거의 보지도 못했어! 단지 너희 페어차일드 종족을 제외하면...그 외에는 모두 야만인들에 불과했지."

오이로파(Europa)의 지배자는 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저항을 제국에 행했었던 페어차일드 여성의 말을 살짝 노려보았다.
멍청한 년.
설사 원주민이 있다고 해도 분명 미개한 녀석들일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 탐사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만 보고도 벌벌 떨며 굴복할 것이다.
자신을 신적 존재로 열렬히 숭배할 것이다. 설사 분별없는 짐승처럼 달려들어도 제국의 스토스트루펜(Stoßtruppen)이 퍼부어대는 무차별적인 빔 공격으로 느긋하게 술 한 잔 마실 순간에 끝장낼 수가 있다.


그녀는 행성 에르데를 내려다보았다. 제국 그 자체인 에르데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연결된 초광속 우주 고속도로가 보였다.
공간 너머에 존재하는 제국의 식민지들까지도.
그녀의 등에 달린 날개가 복잡하게 뻗어나갔다. 푸른 광점으로 이루어진 날개의 형태가 점차 안정화되는 순간 그녀는 눈을 감았다.
제국도 한때는 일개 국가에 불과했다. 제국의 본성이자 제국 그 자체인 행성은 제국에 의해 하나로 통일되기 전 갈기갈기 찢어진 수백여 개의 나라들로 이루어진 채 서로 다투고 있었다. 제국의 기원이었던 국가는 강대국들의 틈에서 그럭저럭 역사를 이어나가고는 있었지만 주변 국가들의 무력과 간섭에 의해 반식민지 상태였다.
모든 국민들이 굶주림과 패배감, 무기력에 빠져 절망하고 있을 때 돌연 위대한 존재가 나타났다. 위대한 존재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승리와 달콤한 미래를 약속했다. 정당한 선거로 국가의 수장에 선출된 위대한 존재는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하는 제국의 체제를 성립시켰다.
정당한 국민 투표의 절차를 거쳐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위대한 존재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을 선포했다.
패배는 없었다. 오직 승리만이 있을 뿐. 끝없는 승리가!
전쟁이 끝났을 때 제국은 행성, 행성은 제국이 되었다.
하지만 황제는 만족하지 않았다. 위대한 황제는 끝없는 승리를 갈망했다. 그리고 제국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쟁이라는 정복 행위가, 모두를 열광케 하는 승리의 정신이 필수적인 상황이었다.
황제는 우주의 무한한 가능성에 집착했다. 별들과 별들 사이에 아직 손에 넣지 못한 무수한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황제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는 결단을 내렸고 행성 제국의 모든 이들을 향해 열변을 토해냈다.
제국의 생존권 레벤스라움(Lebensraum).
황제가 그 영역을 우주로 확장할 것을 결정한 순간 제국의 모든 과학자들은 우주 개척을 위한 방도를 찾아내기 위해 혹사당했다.
실패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 친위대의 혹독한 감시 속에서 한 연구 집단이 불규칙적인 시공간 뒤틀림 현상에서 영감을 얻었다.
시공간 왜곡 현상을 일으키는 이 자연 재해를 일부나마 규명해내는데 성공한 제국의 과학자들은 곧 미지의 입자형 물질을 관측해낼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TS입자였다. 황제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 과학자들은 간신히 인공 TS 입자를 생성하는데 성공했고 TS입자를 이용해 공간과 공간 사이를 뛰어넘는 워프 장치를 만들 계획을 수립했다. 시간 여행의 가능성은 처음에 어떤 순진한 과학자가 제기했다가 그 즉시 황제의 친위대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이후로도 TS입자를 이용한 시간 여행의 가능성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워프 홀 장치와는 별개로 TS입자를 보다 많이 생산하기 위한 하이퍼 TS 드라이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우연히도 하이퍼 TS 드라이브를 통해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게이트 너머로는 우주 전체를 연결하고 있는 자연적 고속도로가 존재했다.
슈넬슈트라세(Schnellstraße).
제국의 과학자들은 이 우주를 가로지르는 초광속 고속도로가 타임 슬립 현상처럼 이해할 수 없는 물리 법칙일 것이라 추정했다.
하지만 제국 입장에서 슈넬슈트라세(Schnellstraße)의 정체 따위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워프 홀은 단숨에 잊혀졌다. 하이퍼 TS 드라이브는 대량으로 양산되었고 게이트 생성 외에도 동력원 및 추진 장치로써의 역할이 추가되어 우주선 각함에 1기씩 장착되었다.
제국은 게이트 발생 이후에도 충분할 정도로 하이퍼 TS 드라이브에서 생성되어 남아도는 잉여 TS입자를 활용한 빔 병기를 실용화하여 우주선을 무장시켰다.
그렇게 우주 탐사가, 제국의 무제한적인 정복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우주 공간 속에서 붉게 빛났다. 품 안의 베가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녀는 속삭였다.
베가야, 너는...
무어라 말하려던 그녀는 순간 슬픔을 느끼며 말하길 그만두었다. 칠흑 속에 빛나는 결정 사이로 그녀의 새하얀 손가락이 베가를 떨어뜨렸다.
별을 이용한 대질량 병기,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폭탄, 별과 별의 부딪침.
행성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지성체라면 상식을 벗어난 우주적 재앙에 끔찍한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도망칠 길 없는 파멸 직전에 제국의 녀석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폭발 에너지는 에르데 주변에 연결된 초공간 고속도로를 따라 제국의 전 영역으로 뻗어나갈 것이다.
아무리 외진 곳에 있는 식민 행성이라도 피할 수 없어.
그녀는 낙하 속도와 궤도를 가늠하며 베가와 에르데가 충돌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쾅.
그녀의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페어차일드 종족은 제국의 탐사대가 유일하게 고전을 한 외계 종족이었다. 그들은 비록 물질문명으로 따지면 어린아이 수준에 불과했지만 대신 고도의 정신계 능력을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페어차일드는 모성의 자연을 사랑했다. 그들은 자연과 더불어 살며 사색을 즐기는 평화로운 종족이었다. 행성 단위의 네트워크를 구축한 페어차일드는 우주의 진리를 탐구하고 여러 가지 철학과 이론을 상호 토론하길 좋아하는 지성체들이었다.
그리고 제국이 도착했다.
탐사선 한 척으로 행성을 정복하기가 관례화되고 탐사대가 정복 함대를 호출하는 일 자체가 사실상 유명무실화된 시점에서 제국의 탐사대가 페어차일드 종족의 행성에 진입한 것이다.
제국군은 이전처럼 탐사선 하나로 행성 전체를 제압하려 시도했다가 페어차일드 종족의 정신 공격에 패배한 후 급히 도망쳐야만 했다.
하지만 페어차일드 종족은 너무나 순진하고 미숙했다. 페어차일드 종족은 본능에 가까운 자기 보호를 위해 정신 공격을 가하기는 했지만 제국군은 완전히 죽여버린다는 개념은 상상조차 못했다. 페어차일드가 외계 지성체의 침공이라는 개념에 당황했을 때 제국 본성에서는 거의 113년 만에 정복 함대가 소집되어 페어차일드로 파견되었다.
정복 함대라고는 해도 탐사선이 50척 정도 떼를 지은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전쟁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한 페어차일드는 정신계 능력을 전술, 전략적으로 이용하기도 전에 패배하고 말았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정신계 능력을 봉인당하고 제국군의 노예 겸 생체 컴퓨터로 활용되었다. 정신계 능력이 봉인된 상태에서도 그들의 지성은 실로 광자 컴퓨터에 버금갈 정도였다.
그리고 다시 시간의 흐름이 제국을 휘감았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국은 우주에서 페어차일드와 같은 난관에 전혀 부딪치지 않았다. 다시 강화된 규정은 기껏해야 몇 년 정도 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금 자신감과 오만을 되찾았다.
정복 함대 따위는 필요 없었다. 제국의 앞을 감히 가로막을 적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에서 유일하게 선택되고 축복을 받은 종족. 우주를 정복할 유일한 지성체.
실로 살아있는 신성한 존재들.
제국은 그렇게 우주로 끝없이 뻗어나갔다.
그녀의 귓가로 오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우주에서 우리 종족이 특별하다는 생각은 이제 확신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면에서 특이한 발전을 이룩한 문명은 있지만...거의 모두는 원시인이나 다름이 없었지. 우리가 만난 녀석들 중 가장 괜찮았던 전사가 돌도끼를 든 파충류...그것도 70년 전이 마지막이었지. 모든 녀석들은 우리를 신으로 여기며 기꺼이 노예가 되길 원했어. 물론 저항하는 자도 있었지만 우리들은 자비가 넘쳤어. 실험체로 목숨을 연명케 해주었으니.
뭐, 이제는 실험할 표본이 너무 많아 그냥 죽여 버리기는 하지만 말이야. 하하하!”

티케-가헤스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저희 종족은 그래도 제국과 한때나마 대등하게 저항을 했습니다.”

“오,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나? 물론 처음에는 놀랐지. 정신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은 정말 상상도 못했으니까. 최초에는 충격을 받았고 대부분 혼란스러워했지만 결국 우리는 승리했어. 덕분에 우리들은 전 우주에서 가장 뛰어난 종족을 노예로 삼게 되었지. 그것도 벌써 100년 이상이 지난 일이고. 자, 잡담은 그만하도록 하지.”

우주선의 지배자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이제 이 행성을 제국의 것으로 만들 시간이다.”


전투가 끝난 후 상처를 입은 이들을 제외한 군사들은 왜군들의 병장기와 놈들이 약탈한 각종 물품들을 한군데 모으기 시작했다.
선주군사 김하혁은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아 물로 갈증을 달래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순간 그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전신이 떨리는 기이한 감각.
김하혁은 삽시간에 주변이 어두워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나타났다.
수백 개의 천둥이 한꺼번에 터져나가는 것처럼 요란한 울부짖음과 함께 그것은 구름을 뚫고, 푸른 하늘을 활활 불태우며 나타났다.
하늘을 찢어버릴 듯한 기세로 그것은 포효하고 있었다.

"저...저것은 대체?"

김하혁은 당혹해하며 중얼거렸고 동시에 군졸들은 허둥대며 도망치려했다. 그만큼 담이 세지 못한 군졸들은 주저앉거나 엎드려서 덜덜 떨고 있었다.
길쭉하면서도 둥그런 것이 흡사 물고기를 닮은 그것은 청명한 창공의 바다 사이로 칠흑처럼 검게 빛났다. 그것은 점차 가까워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움직임이 아주 느려지고 있었다.
김하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어떤 것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폭음은 이미 옅어졌지만 아직도 최초의 충격으로 전신이 덜덜 떨리었다.
그것의 꽁무니는 날카로운 형상의 지느러미 비슷한 것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는데 초록색 불길을 활활 뿜어내며 날고 있었다.
선명한 화광이 또 한 번 번쩍이더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래로 향해있던 앞쪽 부분(머리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을 들어 올리며 땅에 몸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
김하혁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노려보며 침묵과 함께 기다렸다.
고래를 닮은 그것의 아랫배 양쪽 부분에서 큼지막한 두 개의 다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더니 발바닥에서 불꽃을 뿜어냈다.
그것은 이내 거대한 굉음과 함께 지면에 다리를 단단히 처박았다.
김하혁은 입을 살짝 벌리며 중얼거렸다.

“맙소사...”

검게 빛나고 새하얀 연기까지 간간히 뿜어내는 그것은 정말이지 무지막지하게 거대했다. 하지만 조금 더 침착하게 그것을 살펴보자 용은 분명 아니었다. 김하혁은 저것이 고래와 상당히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늘에서 내려온...고래라...”

전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가 공부하고 읽은 유교 경전과 고명한 유학자들의 기록, 옛 문헌에서도 저 괴이한 고래 닮은 녀석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김하혁은 혀를 찼다. 산해경이라도 읽어봤으면 조금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잡다한 책들은 살아오면서 눈길을 주기는커녕 멀리했었다.

“아이고, 용신님이 나타나셨다!”

어떤 녀석이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 하늘에 큰 절을 올리며 소리쳤다.
용신? 저것이 용이라고?
김하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저 녀석이 무슨 괴물인지는 몰라도 절대 용과 같은 신수는 아니었다.

“아니?”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짐승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자코 동태를 살피던 김하혁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이변에 깜짝 놀랐다.
고래를 닮은 그것의 아랫배 측면 부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더니 양옆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요란하게 삐걱대는 굉음이 가시면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계단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흐음...”

폰아레얀 13세는 꽤나 화려한 옷을 몸에 걸치고 있는 우두머리격 녀석을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녀석들도 우두머리보다는 못하지만 의복과 금속으로 이루어진 장갑 같은 것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의외로 문명이 발달한 모양이다.

“그나저나...텔레파시 능력이 이 미개한 현지 생명체에게도 통할지 궁금하군.”

티케는 유령처럼 기척 없이 폰아레얀 13세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족쇄를 풀어주세요. 저를 해방시켜주십시오. 한 번 시도해보겠습니다. 주인님의 흥미를 채워드리겠습니다.”

“아, 그럴 수는 없지. 과학적 흥미가 있기는 하지만...그랬다가 내 마음을 마음대로 조종하려 들지 않겠나? 난 너희 종족을 너무 잘 알아. 후후, 우리 제국이 너희 같이 위험한 종족을 살려둔 이유도 텔레파시 덕분이지만. 텔레파시를 봉인해두어도 광자 컴퓨터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다니....”

폰아레얀 13세는 티케를 걷어차며 히죽 웃었다.

“뭐, 시도는 좋았어. 덜 떨어진 유아라면 속았을 수도 있겠지. 자, 이제 일 할 차례군.”

폰아레얀 13세는 오른 팔목에 큼지막하게 달린 정사각형 모니터를 작동시켰다.
오이로파의 해부도와 그와 관련된 모든 정보가 화려하게 빛나는 글자들과 함께 나타났다.
He(Heinkel) 무인 전투기 6기와 장갑 전투병 스토스트루펜(Stoßtruppen) 30대라.
일단 저 놈들을 쓸어버린 후 각 대륙마다 He 전투기들로 존재하는 거의 모든 선주민들의 거점을 무자비하게 파괴할 계획이었다.

“후후, 일단 여기서는...스토스트루펜 13대를 내보내도록할까.”

사실 장갑강화병 1대로도 충분하겠지만 원래 기계란 자주 움직여주어야 좋은 법이었다.

“금방 끝나겠군.”

티케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하게 폰아레얀 13세의 곁에 서서 곧 벌어질 무자비한 학살을 지켜볼 준비를 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물을 머금은 보석의 단면처럼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이...이럴 수가!”

김하혁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저 안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다니?
그는 이 쉽사리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당혹해하면서도 본능적으로 환도를 붙잡았다.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면 분명 짐승은 아니었다. 문득 왜란 때 싸움에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는 비차가 동원되었다는 소문이 생각났다. 과장된 풍문이라고 치부했었거늘 그렇다면 저것은 정녕 비차란 말인가?

“설마하니...다른 나라에서 온 이들인가?”

김하혁은 저들이 왜란 때의 왜인들처럼 침략자의 선봉일지 아니면 정식으로 교역을 하고자 찾아온 사신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하혁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경련을 일으킨 순간 그는 군사들에게 명했다.

“너희들은 저들을 겨누고 있어라. 그리고...저 고래를 닮은 것에서 사람들이 더 나온다면 그들 역시 겨누어 공격을 준비하고 있어야만 한다. 저들이 적대적 행위...조금이라도 무언가 수상함 낌새를 보이면 지체 없이 모든 것을 퍼붓고 나를 원호해야만 한다.”

김하혁은 잠시 심호흡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그는 그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금발에 도무지 인간 같지 않은 새하얀 피부의 남자는 금박이 들어간 화려한 회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남자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하혁은 심장이 멎는 듯 했다. 그리고 거대한 비차 안에서 머리에 검은 도자기 같은 것을 뒤집어 쓴 거구의 사내들, 복잡한 형태의 은빛 막대기(조총인가?)를 들고 있는 병사들 수십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것에 더 이상 평정을 유지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놈들은 갑옷이라기에는 너무나 이질적 철갑을 두르고 있었다. 흡사 몸 전체에 은을 처바른 것처럼 너무나 휘황찬란했다.
옥황상제의, 천계의 병사들이 저 모습일까?
조선의 선주군수 김하혁은 공포를 감추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에 퍼져나갈 때에 푸른 눈의 남자가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남자의 옆에는 여자가 오연히 서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가.
순간 그는 숨 쉬는 것을 잊을 뻔 했다.


“호오, 원주민이군. 갑옷에...활과 화살인가? 흐음, 저건 뭐지? 뭐, 크게 상관은 없겠지. 역시나 빔 병기 같은 하이테크 무기는 가지고 있지 않군. 예상보다는 발달은 했지만...크크, 역시나 야만인에 불과해.”

폰아레얀 13세는 웃으며 제국이 자랑하는 장갑강화병들이 진격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장갑강화병. 그들은 전차와 같은 기동 병기의 인간화를 극한으로 추구한 개념의 병기이다.
하지만 제국의 식민화 전쟁이 별 탈 없이 지속되면서 기술과 전술이 조금씩 정체되는 것도 모자라 퇴보하면서 현재는 보다 대량 생산 및 관리, 비용 절감에 적합한 형태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빔 병기 이전의 기술을 잊어버리면서 생각지도 못한 약점이 내재하게 된다.
자아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뇌에 프로그래밍된 명령과 전투 시스템으로 움직일 뿐.
머리 부분만이 유일한 생체 조직이지만 그마저도 살아있는 존재라고 할 수 없다.
액체금속을 기반으로 한 기계몸체는 기계의 강인함과 생물의 유연함 모두를 담아내려 시도한 결과물로 대 빔 병기에 특화되어있다.
우주 전체를 목표로 삼고 무수한 별들을 탐욕스럽게 정복하는 제국군 입장에서는 무겁고 예상치 못한 지형과 환경에서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차량형 병기를 운용할 수가 없었다.
우주선에 보다 다량으로 탑재하기 위해서, 그리고 보다 효율적으로 각종 행성에서의 전쟁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서 제국은 전혀 새로운 병기를 탄생시켰다.
2미터 내외의 크기에 인간 형태와 유사한 병기. 그러나 인격은 지니지 않은 무적의 병기.
그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한때는 인간이었지만 그 무력은 전차와 버금가는 존재였다. 사실상 그들은 일인 전차였다.
TS입자 빔 병기로 무장한 장갑병들은 그렇게 거부할 수 없는 제국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며 우주를 짓밟았다.

“자, 어서 저 벌레들을 쓸어버려라! 이 따위 녀석들에게 시간 낭비하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


김하혁은 놈들이 대열을 이루는 광경을 멍하게 지켜보았다. 그 어떤 군사들이 저렇게 일사분란하고 아무런 움직임의 차이 없이 동작을 완벽하게 일치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저 은빛의 군사들은 두 팔을 들어올렸다. 그 어떤 검법의 달인이라도 쉽사리 보여주지 못할 차갑고 날카로운 움직이었다.
김하혁은 그들의 팔 끝, 원래는 손이 달려 있어야할 부분에 붉은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네모나고 길쭉한 괴이한 것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직감적으로 지금 저 놈들이 자신들에게 총포 비슷한 것을 겨누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검붉은 빛의 섬광이 동시에 터져 나올 때에 김하혁은 눈이 머는 듯 했다.

“맙소사!”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져 나오는 빛줄기들, 광선이 그를 덮쳤다.


"이...이게 무슨!"

폰아레얀 13세는 믿을 수가 없었다. 대기를 가로지르는 무수한 빔들과 함께 저 미개한 생명체들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해골 비슷한 가면을 얼굴에 쓴 우두머리 놈과 부하들은 각자의 무기를 든 채 비틀거리고는 있었지만 아주 멀쩡하게 서있었다.
원래 스치기만 해도 녹아버리는 저 빔을 어떻게 직격으로 맞고도 멀쩡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분노와 당혹감으로 새빨개진 얼굴로 외쳤다.

"티케! 이게 무슨 일이냐! 지금 당장 설명해라!"

"빔의 수속률 문제입니다. TS입자의 집적률을 이 행성의 대기권 내에서 제대로 높일 수가 없습니다. 원인은 불명이지만...분명 이 글리제 행성의 중력과 자기장, 대기와 같은 복합적 요소에 TS입자가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크으..."

폰아레얀 13세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조각상처럼 완벽했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한동안 모멸감과 분노, 충격과 같은 온갖 감정으로 평정을 잃은 그는 이내 묘안을 떠올리고는 흐트러진 금발 머리카락을 다듬으며 자신 있게 외쳤다.

"빔의 출력을 최대로 해라! 입자의 압축률을 있는 대로 끌어올리란 말이다!"

티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원하시는 대로.


어른 주먹 크기의 가죽 주머니는 그 끝의 끈이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안에 빼곡히 들어찬 소형 발사체들, 연환이나 철환 따위를 쉽게 흘릴 정도는 아니었다.
김하혁은 서둘러 손을 움직이며 조금 전의 광선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뜨거운 열기가 몸 전체를 감싸는 듯 했으나 천만다행히도 그는 멀쩡했다. 심장이 멎을 것처럼 놀라기는 했지만 그는 조금도 다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광선에 맞은 다른 병졸들 역시 마찬가지인 듯 했다. 눈을 까뒤집고 기절한 녀석들이 몇몇 있기는 했지만.

‘저들은 대체...크윽!’

붉은 광선이 또 다시 날아오더니 바로 옆을 스쳐지나갔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화약을 각각의 구멍에 쏟아 부었다. 화약통을 다시 허리에 단단히 고정한 그는 토격을 다져 넣은 후 가죽 주머니를 뒤져 철환 6개를 집었다.

“공격, 공격하라! 포수들은 어서 적병을 겨누어 방포하라!”

그렇게 외친 김하혁은 군사들이 일제히 조총과 활을 적 군사들에게 겨누는 모습을 확인했다. 병장기를 든 군졸들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돌격할 차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하혁은 땀에 젖은 얼굴로 철환 2개를 각각의 총열 구멍에 재고 약선을 새로 꽂았다.
팔에 휘감아둔 화승줄은 아직 반이 남아있었다. 그가 약선에 불을 붙이려는 순간 귓가로 뜨거운 빛줄기가 스쳐지나갔다.
놈들은 여전히 검붉은 광선을 쏴대고 있었다. 가슴에 빛을 적중당한 군졸 하나가 처절한 비명과 함께 그대로 쓰러졌다.

“젠장!”

적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무용지물이라 생각했던 저 알 수 없는 술법이 이제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김하혁은 천천히 타들어가는 화승 끝을 약선에 대어 불을 붙이고 자세를 바로잡아 삼안총을 겨누었다. 놈들과의 거리는 이제 오십 보.
김하혁은 약선이 반 이상 타드는 순간 삼안총을 들어 올려 겨누었다.

“방포하라!”

산중왕 노호의 포효처럼, 폭우 속 천둥처럼 총성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면서 하얀 연기가 주변을 뒤덮었다.
빗발치는 총탄이 은빛으로 빛나는 정제불명의 적병들을 삽시간에 덮쳤다.
김하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공격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적병들은 광인처럼 전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몇몇 녀석들의 몸은 엉망으로 부서져있었고 그럭저럭 멀쩡해 보이는 놈들도 팔과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뒤틀려있었다.
그는 삼안총을 하늘 위로 치켜세우며 적진을 유린하고 놈들의 숨통을 끊기 위해 앞으로 돌진했다.

“이제 돌격하...우아악!”

화염과 섬광, 그리고 거친 돌풍이 무자비하게 그를 덮쳤다.
김하혁이 다시 제정신을 차렸을 때에 그는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오직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만이 귓전을 뒤흔들었고 입에서는 흙이 한가득 느껴졌다.
얼굴이 뜨거웠다.


“하하하, 바로 그거야!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이제야 제대로 되어가는군.”

폰아래얀 13세는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채 느긋하게 전투를 구경했다. 하지만 그의 여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빔의 출력을 무리해서 최대로 한 것은 분명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순식간에 장갑강화병의 동력원인 입자탱크가 텅 비어버리게 됩니다. 분석 결과 기껏해야 빔 두어 발 정도를 쏘고 나면 그들은 무용지물 신세가 됩니다.“

폰아레얀 13세는 입을 딱 벌린 채 티케의 말을 듣기만 했다.

“전투 상황은 지극히 불리합니다. 벌써 장갑강화병 절반 정도가 제대로 자립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가동 가능 수는 5대입니다. 현재 일시적으로 빔의 발포를 중단시켰습니다.”

“이런 제기랄!”

폰아레얀 13세는 분통을 터뜨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가장 적절한 방법은 입자가 고갈된 장갑강화병을 회수해 오이로파에서 충전하는 방법이었지만 너무 시간이 걸리고 또 번거로웠다.
나머지 장갑강화병을 투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윽고 폰아레얀 13세는 결정을 내렸다.

“He 전투기 1기를 발진시켜라.”


김하혁이 다시 제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맹렬히 삼안총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적병이 포진해있었고 남은 군졸들의 수는 어림짐작으로 보아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삼안총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적병의 얼굴 부분이 완전히 뭉개진 채 쓰러졌다.
등 뒤에서 기괴한 금속성 소음이 들려왔다. 김하혁은 몸을 돌리며 자신을 덮치는 적병의 가슴팍을 강하게 찔러 넣었다. 푸른 불꽃이 번쩍이면서 적병이 주춤하는 순간 그는 고함과 함께 다시 한 번 삼안총을 휘둘렀다.
적병의 머리는 완전히 뜯겨져 나갔고 김하혁이 치켜세우고 있는 삼안총의 총신은 심하게 휘어있었다.
선주군수 김하혁이 혀를 차며 삼안총을 내던진 순간 강렬한 소음과 함께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것이 나타났다. 경악으로 물든 군졸들의 얼굴을 가볍게 무시하며 날개를 활짝 펼친 하늘의 존재가 하강을 시작했다.

“으아악, 괴조다! 괴조!”

한 병사가 들고 있던 조총을 집어던지더니 도망쳤다.
김하혁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새를 닮았지만 분명 새는 아닌 요사한 존재가 날개를 활짝 편 채 자신들 바로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꽁무니에서는 무수한 검붉은 빛의 알갱이들이 하나의 빛줄기를 이룬 채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활을 꺼내 장전을 시위에 메겼다. 새를 닮았으니 머리도 약점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김하혁은 그렇게 생각하며 새보다는 뱀을 닮은 괴조의 머리를 겨누어 화살을 쐈다.

“크윽!”

화살이 빗나가자 김하혁은 얼른 장전 하나를 집어 들었다.
괴조는 굉음과 함께 크게 선회하고 있었다. 문득 그는 꽁무니에서 뿜어져 나오는 반짝이는 빛줄기에 시선을 고정했다. 좀 전에 비차에서 나온 군사들이 쏴대던 것과 색이 비슷했다.
순간 괴조의 날개 바로 아래에서 검붉은 섬광 수십여 개가 뿜어져 나왔다. 빛으로 이루어진 화살들이었다.
놈이 퍼부어대는 빛의 화살들은 김하혁 군수와 조선군이 있는 장소 전체에 작렬했지만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둔중한 폭음을 제외하면 아무런 일도 없었다.
괴조가 뿜어내는 저 빛의 가루들. 어쩌면 화약 비슷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소리 없이 중얼거리며 목표를 바꾸고 활을 겨누었다.
삐죽하게 나와 있는 괴조의 머리에서 광선이 길게 뻗어 나와 지면 전체를 휩쓸었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으며 시위를 잡아당겼다.
공기를 찢는 파공성과 함께 화살이 괴조의 몸을 꿰뚫는 순간 괴조의 몸 전체에서 불꽃이 튀었다. 곧이어 천지를 뒤흔드는 것 같은 폭음과 함께 햇빛과는 전혀 다른 붉은 화염이 환하게 빛났다.
김하혁은 몸을 던져 바닥에 엎드리려다 자세를 잘못 잡아 그만 땅에 나뒹굴었다.
반사적으로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붉은 화염과 섬광으로 활활 불타는 검은 형체가 떨어지고 있었다. 괴조의 시체가 파편을 주변에 마구 흩뿌리며 자신을 향해 굴러 떨어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김하혁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제국이 자랑하는 무적의 병기들이 연약한 얼음 조각처럼 쉽사리 깨지고 부서지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결국 TS입자가 문제였다. 장갑병의 전신에는 TS입자가 흐르고 있었다.
아니 장갑병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 격추된 무인 전투기 역시 장갑 겉과 안쪽에는 미세한 혈관처럼 입자들이 흐르고 있었다.
이 행성의 특수한 환경으로 인해 손상된 TS입자가 물리적 타격에 과도한 반응을, 폭발로 이어지는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TS입자.
우주 전체를 영역으로 삼는 제국의 입장에서 보급과 정비의 통일성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원자력과 플라즈마 제트 추진기는 순식간에 퇴출되었다. 도시 하나를 증발시킬 수 있는 우라늄 기계 역시 TS입자 폭탄으로 대체되었다.
TS입자 기술을 바탕으로 한 에너지 계열 병기가 제국을 지배한지도 어느덧 3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불노불사로써 여전히 군림하는 황제의 뜻에 따라 제국의 군대는 별들 사이를 여행하며 영원한 정복 행위에 열중해있었다.
어느 순간 그들은 TS입자 이전의 통상 병기와 관련한 기술에 대해 잊어버렸다. 그들에게 있어 이제 TS입자 기술은 완전하고 신성한 영역처럼 보였다.
TS입자에 대한 맹신. 그것은 아주 작은 균열이었고 지금 그 균열이 모든 것을 파멸시키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기다리던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몰라.
그녀는 어설프고 멍청한 자신의 지배자를 쳐다보았다. 놈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공포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곧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추가로 투입한 전투기와 장갑강화병이 저 용감한 원주민의 공격에 순식간에 전멸했다.
화려한 불꽃과 폭음.
아아, TS입자는 기본적으로 물리적 충격에 취약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약점이 드러나지 않았다. 근접전이 벌어지기도 전에서 원거리에서 라이히의 병사들이 퍼부어대는 빔에 모두는 패배했고 굴복했다.
하지만 우주는 넓었다. 몇몇 행성은 지옥 그 자체라고 할 만큼 가혹했으며 몇몇 행성은 한정되고 편협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 법칙과 환경이 지배했다.
그리고 이 행성은 TS입자라는 외계의 것을 쉽사리 용납하지 않았다.

“전 이미 경고했습니다. 여기는 다른 항성계, 다른 우주. 우리가 알고 있던 당연한 상식이 여기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에르데에서는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가 여기서는 어린애 주먹보다 못해질 수도 있고, 그 무엇도 파괴할 수 없는 에르데 불사의 기계가 여기서는 쉽사리 부서질 수 있습니다.”

티케는 살짝 웃으며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죠?”


허리 왼쪽에 매달린 대승자총총을 세워 조준한 하혁은 얼른 심지에 불을 붙였다.
심지가 타들어가나 싶더니 전신을 뒤흔드는 강한 충격과 귀가 터져나갈 듯한 폭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반동으로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는 꾹 참았다.
눈을 가리고 코를 따끔하게 만드는 화약 연기와 함께 대승자총통은 철환 15발을 한꺼번에 토해냈고 철환 대부분을 뒤집어쓴 장갑척탄병 두 명이 붉은 빛이 감도는 샛노란 불꽃과 함께 도자기 따위가 산산이 깨지는 소음을 내며 폭발했다.
하혁은 이제 쓸모없어진 대승자총통을 우악스럽게 뜯어내고는 환도를 뽑아들었다.
칠흑의 하늘을 수놓는 별의 광채처럼 김하혁의 눈동자는 선명한 안광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 같지 않은 새하얀 피부와 파란 눈,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색목인을 노려보며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야수의 울부짖음과 인간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네 이 놈! 이 죽일 놈!”

김하혁은 피를 토할 것처럼 고함을 지르며 칼을 휘두를 준비를 했다. 놈이 이제 바로 코앞이었다. 푸른 눈동자를 통해 자신의 얼굴이 보이는 듯 했다.

“단숨에 베어주...커억!”

직격으로 날아오는 검붉은 광선을 미처 피하지 못한 김하혁은 피를 토하며 몸을 떨었다.
가슴이, 흉갑이 너무나 뜨거웠고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늘과 땅의 감각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그가 간신히 얼굴을 들었을 때 작은 총통이나 조총 비슷한 걸 꺼내든 녀석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김하혁은 광소에 가까운 맑은 웃음과 함께 천천히 일어났다. 칼을 똑바로 놈에게 겨누고 그는 당당하게 외쳤다.

“화약이 떨어졌느냐? 철환이 없느냐? 아니면...그 묘한 빛이 이제는 없느냐?”

비차 안으로 도망치려던 색목인은 일그러진 얼굴로 김하혁을 응시하더니 허리춤에 매달린 양날검을 꺼내들었다. 검신 전체가 검붉은 빛에 휩싸인 것이 참으로 이상했다.

“그래도 기개는 있군.”

김하혁은 자세를 바로하며 중얼거렸다.


“티케! 어떻게 해보아라! 크윽, 어서!”

폰아레얀 13세의 절규에 티케-가헤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은 분명 의도적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너무나 순진한 눈빛으로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저보고 무엇을 하라는 겁니까?”

원주민 우두머리가 휘두르는 칼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폰아레얀 13세가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로 다급하게 외쳤다.

“저 녀석을 해치우란 말이다! 어서!”

티케는 너무나 우습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어떻게요?”


김하혁은 단순히 찌르고 베는 것을 초월한 실로 고강한 도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선명한 예기로 빛나는 도신이 화려하게 춤추자 금발의 녀석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허둥지둥 꽁무니를 빼는 녀석에게 접근해 어설프게 휘두르는 놈의 괴이한 색깔의 검을 피하고는 단숨에 칼을 휘둘렀다.
비명 소리와 함께 금발 녀석의 오른 어깨에서 흉한 상처가 입을 벌렸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치명상이었고 녀석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도망치려했다.
김하혁은 굳은 표정으로 놈에게 다가갔다.


폰아레얀 13세는 정신 조작에 대한 기본적 방어술 정도는 알고 있으니 괜찮다고 필사적으로 변명하며 티케-가헤스에게 가해진 금제를 해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내면에 품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폰아레얀 13세가 티케-가헤스의 정신 능력을 해방시켰을 때에 그녀는 환희했다.

“드디어!”

-드디어!-


김하혁은 금발 녀석이 싸움 중에 정신이 어딘가에 팔려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피식 웃었다.
생과 사가 결정되는 전투 중에 저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그는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돌진했다. 두정갑과 겉에 걸친 흉갑과 지금까지의 격전으로 전신이 무거웠지만 지금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이제 저 녀석의 정신을 파괴시켜...어? 으악!”

티케에게 무시무시한 기세와 속도로 쇄도해 들어오는 그 기세에 폰아레얀 13세는 급히 칼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새하얀 섬광과 함께 찔러 들어가는 환도는 폰아레얀 13세의 칼을 박살내면서 그대로 목을 꿰뚫고 들어갔다.

“끄...끄거어억...”

충혈 된 폰아레얀 13세의 두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김하혁을 쳐다볼 뿐이었다.
눈에 띄게 창백해진 안색의 김하혁이 단숨에 칼날을 빼내자 폰아레얀 13세는 숨조차 제대로 못 내쉬면서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막으려는 헛된 시도와 함께 천천히 무너졌다.

“크윽....”

김하혁은 몸 안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순간적으로 몸을 구부리면서 메마른 기침을 연속적으로 했다.

“너무 무리하였는가...”

땅을 짚고 서있는 다리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피부처럼 밀착되어 아무런 존재감을 느낄 수 없던 갑옷과 투구가 갑자기 천근만근 마냥 무거워지고 있었다.
방금 전의 그 일격에서 그는 모든 기력을 소진했고 자신도 모르게 맥이 탁 풀린 것이다.

“허허...”

김하혁은 힘없이 웃었다. 이겼음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대로 주저앉아 잠들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인기척을 감지했다.

“여자!”

김하혁은 이를 악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여자를 가까이서 보았을 때 그는 머리를 뒤흔드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본분을 망각하고 하염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처음에 멀리서 봤을 때에는 오귀자로 착각을 할 정도로 얼굴이 검다고 생각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오히려 갈색에 가까웠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새하얀 빛을 은은하게 발하는 백발이었다. 얼굴만 보면 분명 꽃다운 처녀, 그것도 너무나 아름다운 희대의 절세미녀였지만 다 늙은 노인처럼 백발의 머리카락이라니?
하지만 이제 백발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귀는 아주 길었다. 날카로울 정도로 긴 귀의 끝부분은 뾰족했는데 그는 아주 우아하다고 내심 생각했다.
김하혁은 그녀와 눈을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전신이 굳어버리는 감각과 함께 정신이 멍해졌다. 그녀의 눈동자는 바다나 하늘과 전혀 닮지 않은 신비로운 푸른색으로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 때가 됐어.
지금?
티케는 긍정의 뜻을 표시했다.
제국이 알아차리기 전에 서둘러야 해.
생명으로 충만한 이 행성을?
시간이 없어. 폰아레얀 13세의 죽음은 항성간 통신으로 거의 즉각적으로 제국에 전달되었을 거야. 이제 내 안의 우주를 해방시킬 때가 왔어. 제국은 우리 종족의 네트워크 연결을 끊어버렸지만 우리 안에 존재하던 정신 우주 자체는 말살시키지 못했어.
그래, 그것이 너와 나의 희망이었지. 그리고 네가 나를 창조해냈어.
정확히는 분리라고 해야 될 거야. 본질적으로 너와 나는...
...같은 존재야.
이제 하나가 될 시간이야.
제국이 파멸을 맞이할 시간.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 복수라는 감정에 휩쓸릴 시간.


-당신의 이름은 김하혁이군요.-

김하혁은 머리에 직접 전해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기절할 것처럼 놀랐다.
그가 고함을 지르기 전에 그녀는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

-진정하세요. 전 그저 당신과 특별한 방법으로 대화를 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녀는 김하혁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걷는 방법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저의 이름은 티케-가헤스에요. 티케라고 인식해주세요.-

티케라는 이름의 여인은 슬픈 미소를 입가에 지은 채 숨결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김하혁은 자신의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고 느꼈다. 뒤늦게 그는 무언가 밧줄 같은 것이 자신의 몸을 단단히 휘감고 있음을 깨달았다.
문어나 오징어 같은 촉수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역겨운 촉수 두 개가 김하혁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고 그는 비명과 고함을 있는 대로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요망한 요괴! 상체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지만 하체는 셀 수 없는 촉수가 달려있는 요괴였다니!

-정확히는 13개에요.-

티케는 촉수로 김하혁의 목 전체를 휘감은 채 눈을 감았다.

-정말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저는 드디어 복수를 할 수가 있어요. 비록 그 행위로 우주적 규모의 파괴자가, 별들을 살해하는 존재가 되겠지만...고마워요. 그리고...

뼈가 부러지는 경쾌한 소음과 함께 김하혁의 목이 단숨에 돌아갔다.

-미안해요.-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은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식물마저 그 목소리를 듣고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절절한 감정의 집합체, 슬픔과 후회로 가득 찬 목소리는 끝없이 반복되었다.
목소리는 어둠이 주변을 뒤덮을 때에도 하염없이 미안하다고 외쳤다.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지구 주변의 칠흑이 낮은 흔들림과 함께 옅어졌다. 회색빛으로 변한 공간은 천천히 입을 벌렸다. 빛나는 광채와 함께 어둠은 지구를 뒤덮었다.
부서진 결정의 단면처럼 어둠의 형태가 변했다. 태양계 전체를 영역으로 삼는 빛을 뿜어내며 어둠은 지구를 받아들일 준비를 끝마쳤다.
우주의 법칙을 초월한 공간에서조차 지구는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어둠의 궤도에 접한 지구는 푸른 궤적만을 남기며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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