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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장미 행성

2011.10.03 01:4910.03

인류가 만들어낸 충실한 기계 노예는 날개를 활짝 편 채 아주 먼 옛날 신들의 영역이라 상상되던 공간을 마음껏 비행하고 있었다.
하나의 완전한 칼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전투기는 푸른 빛깔 속에서 하나의 이질적인 검은 점으로 작용했다. 매끈한 광택으로 표면이 반짝이는 어두운 청색은 검은색에 가까웠고 전투 병기 특유의 불가사의한 매력을 강하게 발산하고 있었다.
두 개의 제트엔진에서 불꽃이 점차 강렬해졌고 전투기는 급가속을 시작했다.
전투기는 귀환을 위해 선회비행을 펼치기 시작했고 그러한 탓에 갑작스러운 이질적 현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투기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공간에 존재하던 옅은 안개구름이 흡사 스스로 덩치를 불리기라도 하듯 급격히 팽창하면서 눈이 뒤덮인 설산처럼 하나의 거대한 기둥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적란운과 비슷한 외형을 띠게 된 정체불명의 구름은 보라빛으로 그 색이 변질되면서 섬광과 불꽃을 연속적으로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적란운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요동치며 주변을 불길한 보라빛으로 물들였고 마치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휘몰아치면서 이미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전투기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백훈은 정신을 차렸다. 흐릿한 시야가 선명해지면서 바다처럼 아름답고 푸른 하늘이 캐노피 너머로 펼쳐져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지금 자신이 장갑강화복을 입고 있음을 뒤늦게 떠올렸다.
마치 깊은 바다를 헤엄치는 감각이 온몸을 사로잡고 있었다. 시야는 충격으로 전환되었는지 전투 훈련 때처럼 한없이 붉었다.
백훈의 몸을, 심지어는 얼굴까지 감싼 항공용 장갑복은 비행복과 G-슈트를 겸하고 착용자를 각종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등의 다용도 기능을 갖춘 것으로 이번 임무를 위해 기존의 군용 장갑강화복을 개조한 것이었다. 정식 명칭은 장갑형 강화 비행복이었지만 백훈을 포함해 지급받은 조종사 거의 모두는 항공장갑복으로 불렀다.
그는 시야를 전환한 후 연료전지를 확인했다. 다행히 전원은 무사했고 다른 부분도 멀쩡한 듯 했다. 문제는 현재 상황, 불시착한 전투기였다.
그 이상한 섬광에 휩싸이면서 백훈은 정신을 잃었고 전투기는 지상에 추락했다.
천만다행으로 그는 멀쩡하게 살아있었지만 전투기는 과연 얼마나 손상을 입었을지 의문이었다. 백훈은 터치 스크린을 중심으로 하는 각종 모니터와 전자 기기를 확인해보려다가 그만 두었다. 고장 난 전투기의 수리나 정비는 이후 찾아올 사람들의 일이었다.
일개 파일럿에 불과한 자신이 섣불리 건드렸다가 나중에 욕을 먹기 보다는 그저 구조를 기다리는 것이 나았다.
백훈은 캐노피를 강제 개방하는 레버를 돌렸고 곧 신선한 공기와 햇살을 느낄 수 있었다.

"후우..."

백훈은 한숨과 함께 푸른 하늘을 잠시 응시했다.
교육과학기술부와 공동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불규칙적인 자연 현상, 일명 타임 슬립 현상을 관찰 및 추적하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사실 다른 녀석들과 함께 이 임무에 투입되었을 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정말이지 처음 들어보았다.
3개월 정도를 과학자 녀석들이 지정한 공역으로 출격하고 아무런 수확 없이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백훈은 지금 자신이 뭘 하고 있나 심각한 회의에 접어들었다.
물론 그것은 새로 편성되어 자신과 함께 제13특수과학비행단에 배치된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파일럿 슈트는 육군이나 해병대 몇몇에서나 쓴다는 장갑강화복이라는 것을 개조해 입은 탓에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전투기도 미사일이라던가 기관포에 탄약은 유사시를 대비해 그대로 장착이 되었지만 기수부와 날개 끝에 기묘한 전자 장비가 추가 장착되는 등의 개조가 되어버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백훈은 과학자들이 왜 이렇게 태풍이나 용오름, 폭풍이나 구름 등등의 각종 기상 현상에 관심을 가지는지 의문을 감출 수 없었다.
처음에 말한 터무니없는 타임 슬립 현상과 기상 현상이 무언가 관련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백훈은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설마하니 기상청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해볼 정도였다.

"또 한 번 험한 꼴을 당하는군...이러다 정말 죽겠어."

그는 어떻게든 그만두리라 마음먹으며 전투기 밖으로 빠져나왔다.
일종의 훈련 기지처럼 보였다. 프롭기 십여 대 정도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주기해있었고 격납고와 단층짜리 건물, 관제탑과 같은 구조물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멀리서 사람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차량도 하나 선두에서 질주해오고 있었는데 백훈은 자신이 운이 좋다고 안도하며 전투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깜짝 놀랐다. 전투기는 조금 과장해 생채기 하나 없이 아주 깔끔하고 멀쩡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전투기가 마치 금방이라도 이륙할 수 있을 것처럼 아주 깔끔하게 착륙해있다는 점이다.
백훈은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낯설었다.
어떻게 정신을 잃고 있던 자신이 기적적으로, 그것도 무사히 착륙을 해낸 거지?
그러고 보니 지금 자신이 서있는 곳은 활주로라 보기에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프롭기들은 마치 옛날 비행기들처럼 깔끔히 다듬어진 풀밭 위에서 주기해있었고 건물들도 풀바닥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백훈은 불길한 감각을 느꼈고 곧 등 뒤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과 차가운 금속성 소음이 들려왔다.

"손들어! 정체를 밝혀라!"

"손을 들고 당장 투항해! 네 놈은 어디서 왔냐! 그 이상한 비행기는 대체 뭐야?"

"지옥에서 걸어온 것처럼 끔찍한 갑옷을 입고 있군. 해골을 닮은 그 흉악한 가면을 벗어던지고 얼굴을 드러내라! 지금 당장!"

"움직이면 당장 쏴버릴 테다!"

분대 규모의 병력이 총을 겨눈 채 적의, 호기심, 그리고 의아함이 뒤섞인 시선으로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백훈은 그 군인들의 얼굴이 꽤나 예쁘장하다는 점을, 그리고 가슴도 튀어나와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근처에서 여군들이 단체로 훈련을 하고 있었던가 생각했지만 뭔가 좀 이상했다.
여군들이 부르짖는 말도 뭔가 어색하게 들려왔고 입고 있는 저 복장도 마음에 걸렸다.
2차 세계 대전 때나 50년대에나 쓸 법한 생김새의 군복(2차 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봤던 독일군 군복과 닮아있었다)에 들고 있는 총도 목재 재질로 보이는 등 아주 고전적 외관이었다.
예비군 훈련장인가?

"이봐요, 저기 잠깐..."

덩치가 가장 크고 계급도 높아 보이는 여자 군인 하나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우...우리들의 말을 한다! 당장 붙잡아!"

그 여군의 외침과 함께 여군단체로 고함을 질러대더니 병사들 여럿이 단숨에 백훈에게 달려들었다.
백훈은 팔이 뒤로 꺾이고 강제로 땅바닥과 입을 맞추는 동안 지금 이 모든 상황이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었다가 마음 속 깊이 격렬하게 끓어오르는 반발심에 강제로 저항을 해보았지만 누군가 그의 목 뒤를 강하게 내리쳤다.


좁은 방이었다. 예전 대학생 시절 친구들과 놀러간 방갈로가 생각날 정도였다.
어두운 조명 아래 백훈은 비무장 상태로 두 팔을 뒤로 구속당한 채 서있었다.
분명 심문을 할 의도로 준비된 시설이겠지만 백훈에게 앉을 의자도 주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여전히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목 뒤는 아직도 얼얼했다. 아무리 강화복의 장갑판이라도 목이나 얼굴 부분은 완벽하게 착용자를 보호해주지 못한다.
백훈은 제압당할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이 순진했음을 후회했다. 강화복이 아니라 방탄 능력만 겨우 갖춘 무동력 장갑복이라는 혹평이 있긴 해도 일단은 착용자의 힘을 강화해주는 강화복에 속하는 장갑강화복을 입고 그렇게 손쉽게 제압을 당할 줄이야.
백훈 자신이 항공장갑복을 특수한 파일럿 슈트로만 이해하고 주로 사용했고 장갑강화복을 이용한 전투에 어느 정도 미숙한 탓이 컸다.
백현은 허전한 자신의 몸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항공장갑복은 그가 정신을 잃고 있던 와중에 모조리 벗겨 가버려 몸에 착 달라붙는 상의와 하의만 남아있었다.
알몸으로 만들지 않은 게 다행이었지만 별반 차이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잠시 신음할 때 육중한 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장교 정복에 가까울 정도로 화려한 군복을 입은 여군이었다.
위로 올라간 날카로운 눈매에 주근깨가 선명하게 얽힌 그녀는 백훈이 보기에 이목구미가 탄탄한, 상당히 잘생긴 얼굴이었다. 물론 여성 입장에서는 칭찬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는 굉장히 미묘한 표현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흠...”

그녀는 뭔가 서류를 한 손에 들고 살펴보며 백훈을 살짝 응시했다. 눈매 탓인지 강하게 노려보는 것 같았고 실제로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저는 한지은 소위입니다. 만나서 반갑다고...는 할 수 없군요.”

한지은 소위의 말은 그가 듣기에 아주 이상했다. 흡사 외국인이 어색하게 말하는 한국어와 같았다. 처음에 여군들에 붙잡힐 때 그녀들이 내뱉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뭔가 위화감을 느꼈었고 지금 한지은 소위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더더욱 의문을 품었다.
백훈은 순간 가장 합리적인 가능성을 도출해내고는 공포에 사로잡히며 허겁지겁 물었다.

“서...설마 여기가 북한입니까?”

한지은 소위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고개를 저었다.

“북한이 어디입니까? 당신이 온 곳인가요? 질문을 하셨으니 대답을 해드리겠어요. 아니요, 여기는 대한 왕국이에요.”

백훈은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혹시 대한민국을 잘못 말한 것 아닙니까? 다시 천천히 말해주세요.”

“이봐요, 천천히 말해야 될 건 당신 같은데요? 어디서 우리말을 배웠는지 몰라도 왜 그렇게 빠르게 말하는 거죠? 세상에, 당신은 정말 성질이 급한 것 같군요.”

백훈은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이 그를 사로잡았다.
자신을 덮치고 조종석 안을 가득 채운 새하얀 섬광.

“저는 잘못 말하지 않았어요. 여기는 대한 왕국이에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왕립 공군 13전투비행단 기지지만.”

“소위, 당신과는 말이 통할 것 같지 않군요. 남자는...남성 장교를 불러와줄 수는 없습니까?”

골치가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감싼 백훈을 한지은 소위는 의아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남...자? 남성? 그게 무슨 뜻이죠? 혹시 당신의 출신...그러니까 당신이 속한 민족이나 집단을 뜻하는 겁니까? 음, 전혀 처음 들어보는 단어군요.”

백훈은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는 충격에 빠진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설마...설마 내가 다른 세계에 온 건? 아니야, 그건 말도 안 돼. 그건...그건 말도...”

한지은 소위는 백훈의 알 수 없는 중얼거림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 분위기를 바꾸며 차갑게 그를 휘몰아쳤다.

“다른 세계? 그게 무슨 뜻이죠? 이봐요, 장난할 시간은 없어요. 지금 당신은 아주 곤란한 처지임을 알아야 해요. 지금 세계가 처한 분위기를 알 텐데요? 당장 말해봐요. 당신은 누구죠? 당신이 타고 온 그 처음 보는 형태의 비행기와 당신이 입고 있던 기계식 방탄 갑옷은 대체 어디서 난 거죠? 어서 말해요!”

한지은 소위가 신경질적으로 외쳐대자 백훈은 흠칫 놀라며 그녀를 조용히 응시했다. 어두운 조명 너머로 차갑게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그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남자가 뭐죠? 정확히 그 의미를 말하지 않으면 거친 방식으로 입을 열게 할 수 밖에 없군요.”

백훈은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잠시 고개를 숙였다. 목에서 선명한 고통이 또 한 번 몸 전체를 휘저었고 그는 한순간 머리가 맑아진다는 착각에 빠졌다.

“남자는...남자는 접니다. 제가 바로 남자입니다! 지금 장난합니까? 당신이 남자를 모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절규하듯 외치는 백훈을 한지은 소위는 찡그린 얼굴로 바라보았고 동시에 귀를 거슬리는 거친 소음과 함께 문이 다시 열렸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하얀 옷차림에 화염 방사기 비슷한 것을 들고 있는 여성 두 명이 서있었다.

“무슨 일이지?”

비닐 우의를 닮은 하얀 옷의 여성 하나가 경례와 함께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심문을 방해해 죄송합니다, 소위님. 실례지만 대대장님이 소독을 해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군. 이유는?”

“그...그게 중앙의 과학자 집단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방인 포로에 대한 소식과 정보를 받고는 우선 소독을 실시하라고 전해왔기 때문입니다.”

한지은 소위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백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당당히 명령했다.

“옷을 벗어라. 소독을 해야 한다.”

백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들을 노려본 후 욕설을 퍼부었다.
이방인 포로의 격렬한 반발을 예상한 듯 한지은 소위는 가볍게 손짓해 소독을 위해 출동한 두 병사에게 제압 및 옷을 벗길 것을 명령했다.
그녀들은 소독기를 분리해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고는 백훈에게 달려들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병사 하나의 주먹이 그의 배에 강하게 파고들었고 그 충격에 아주 잠깐 실신 비슷하게 몸을 멈춘 이방인 포로의 옷을 단숨에 벗기기 시작했다.
모두가 놀란 것은 그 때였다.

“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두 병사가 백훈의 곁에서 도망치듯 떨어졌다.

“가...가슴이 없어! 생식기가...생식기가...”

“기형이야! 끔찍한 기형이야!”

한지은 소위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백훈의 알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한지은 소위는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복잡하고 이상해질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문득 그녀는 강한 역겨움을 느끼며 서둘러 심문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우리에 갇힌 채 방으로 끌려왔을 때 백훈은 눈을 찌푸렸다.
바로 눈앞에는 꽤나 높은 단 위에 길쭉한 직선 탁자가 놓여있었고 화려하고 멋들어진 잿빛 군복을 차려입은 군인들 2명이 앉아 있었는데 중앙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백훈은 초췌한 표정으로 그녀들을 올려다보았다. 창백한 조명이 너무 눈이 부실 정도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매캐한 하얀 연기로 소독을 당하고 물호스로 강제적인 샤워 과정을 거친 탓에 그는 고통을 느꼈다. 더 최악인 것은 입을 옷마저 주지 않은 것이다.
백훈은 바퀴가 달린 이동식 원통형 쇠창살 우리에 갇힌 채 끌려왔다. 우리 주변에는 무장한 여군 4명이 포위하고 있었고 단 주변에도 여군 몇몇이 받들어 총 자세를 취한 채 뻣뻣하게 서있었다. 발가벗겨진 채 여자들에게 무저항으로 서있는 것은 백훈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한 여성이 흥미롭다는 듯이 휘파람을 살짝 불었고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백훈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두 손으로 자신의 성기와 고환 부분을 가렸지만 여자들은 오히려 그 쪽에 더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근처의 여군이 으르렁대며 즉각적으로 손을 치울 것을 명령했고 백훈은 체념하며 모든 것을 그녀들에게 드러냈다.
탁자 오른쪽에 앉아있던 여자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흠, 성인이 되도록 발육이 부진한 유방은 종종 본 적이 있지만...저 생식기는 대체 뭡니까? 마치 동물의 그것과 비슷하군요."

"동물원에서 코끼리의 코를 보셨나요? 그것과도 닮았네요, 호호호!"

탁자 왼쪽에 앉아있던 여자가 깔깔 웃으며 말했고 그의 주변을 지키는 여군들은 억지로 웃음을 참거나 몇몇은 참지 못하고 폭소했다.
그는 강한 수치심과 함께 분노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면서 이 자리의 모두를 죽여 버리고 싶다고 느꼈다.
그리고 웃음이 멎었다. 그가 들어온 곳과는 다른 쪽과 연결된 문이 열리더니 두 여자가 들어오면서 분위기가 단숨에 일변한 것이다.
탁자에 앉아있던 여자들은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했고 여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군 정복과 유사한 푸른 군복을 차려입은 여자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평범해보였지만 한쪽 볼에 강렬한 상흔이 남아있었고 그가 추정하기에 분명 가장 높은 계급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여자는 마치 종교 사제와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전신을 뒤덮은 검은색 옷 전면에는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거미와 전갈과 비슷하게 생긴 정체를 알 수 없는 곤충 따위를 날카롭고 단순하게 형상화한 문양이었다.
그녀들은 단 위에 준비된 탁자의 중심에 앉았고 군복을 입은 여자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김율희입니다. 이 기지에 주둔하는 비행단의 단장을 맡고 있으며 대한 왕국의 창공을 수호하는 왕립 공군의 대령이라는 직책을 수행하고 있지요.”

백훈은 김율희 대령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상당히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녀의 한국어는 한수진 소위보다 더 심하게 변형된 것으로 외국인이 어설프게 배운 듯한 한국어에 높낮이가 완전 엉망진창인 억양이 뒤섞여 언뜻 들으면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금 거칠게 당신을 다루는 점에 미안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저희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당신 때문에 우리는 아주 곤란한 처지에 빠졌어요.”

김율희 대령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는 아무런 짓도 안 했어요. 오히려 당신들이 날 짐승처럼 취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녀는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죠. 먼저 제가 물을 것은...당신은 어디서 왔죠? 정체가 뭡니까? 한지은 소위는 당신이 자신을 남자라 밝혔다고 보고하던데...그게 당신의 종족을 가리키는 단어입니까?”

백훈은 피로감과 무력감에 휩싸인 채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백훈입니다. 대한민국 출신이며 고향은...”

김율희 대령은 그의 말을 딱 자르며 끼어들었다.

“당신은 어느 별에서 왔죠?”

백훈은 입이 빠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잠시 침묵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불길한 감감을 선명히 느끼며 그는 간신히 대답했다.

“지구입니다.”

그의 대답에 방 안의 모든 여자들은 비웃었다. 한국의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들의 비웃음은 남자의 마음을 산산조각 내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백훈은 이를 악물었고 비릿하게 웃으며 경멸스럽게 그를 응시하던 김율희 대령이 말했다.

“우릴 아주 바보 멍청이로 아는 모양이군요. 여기가 지구입니다, 외계인 씨.”


백훈은 망연자실한 채 우리 안에 서있었다. 그는 얼음처럼 얼어붙어있었고 절망으로 가득 한 눈동자는 동물처럼 갇혀있는 우리의 바닥에는 고정되어 있었다.
더러운 진흙물과 누런 폐지 따위가 널려있는 지저분한 공간.
백훈이 처음 심문실에서 느낀 불길한 예감은 사실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날뛰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낄 정도로 끔찍한 진상을 그는 깨달았다.
그는 어떤 원리로, 그리고 왜인지 몰라도 다른 세계에 표착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남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김율희 대령은 잠시 말을 멈추고 백훈을 관찰하다가 헛기침을 하며 그의 주의를 환기시키려했다. 옆에 서있던 여군 하나는 즉각 창살 안에 총을 집어넣어 창처럼 백훈에게 찔러댔다.

“이제 정신이 들었습니까? 혹시나 그게 연기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둬야겠군요. 미리 경고하자면 당신이 아무리 입을 닫고 거짓을 말한다 해도 우리는 당신의 입에서 강제적으로 진실을 토해내게 할 기술과 수단을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자, 그럼...”

그녀는 옆에 앉아있던 부관이 건네준 서류를 받아들며 잠시 살펴보았다.
이윽고 김율희 대령은 두 손을 맞잡은 채 당당히 선언했다.

“우리는 당신이 외계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당신이 타고 온 우주선과 입고 있던 우주복은 우리들이 가진 기술력을 훨씬 뛰어넘는 기술로 만들어진 물건들로 판명되었습니다. 당신이 외계인이라는 것은 거의 사실이라고 봐도 되겠지요. 반박할 말 있습니까?”

백훈은 힘없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굳이 그럴 필요성이 있나 싶기도 했지만.

“제가 타고 온 것은 우주선이 아니라 그저 제트전투기일 뿐입니다. 입고 있던 것은 장갑강화복을 개조한 항공장갑복으로 일종의 강화복입니다.”

김율희 대형은 턱을 매만지며 낮게 신음했다.

“흠, 당신이 그렇게 주장한다면야...하지만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당신의 정체를 숨기려 하는지 모르겠군요. 이미 다 드러난 사실이지 않습니까? 아주 명백히?”

백훈은 치솟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아무런 억제 없이 그대로 내뱉어댄 것이다.

“사실을 원해요? 사실을? 좋아요! 말해드리죠! 전 남자입니다. 당신들의 세계는 뭔가 잘못되서 여자만 존재하지만 원래 남자와 여자가 존재하는 세계가 있어요.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면서 아이를 낳아 자손을 번식하고 그 문명을 발전시키고 번성해나가는 너무나 정상적인 세계가! 여긴...여긴 비정상적입니다. 어디서부터 뒤틀렸는지 몰라도 분명 당신들도 남자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겁니다.”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잠시 흘렀다. 백훈을 제외한 모든 여자들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놀란 기색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고 있었다.
멍하게 백훈을 내려다보던 김율희 대령은 살짝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그건...정말 말이 안 되는군요. 네, 정말로. 남자가 무슨 존재인지 여전히 모르겠지만...여자와 여자가 서로 결혼하는 게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군요.”

백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그녀를 미친 사람처럼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에도 동식물은 있을 것 아닙니까? 동물에도 남녀...아니, 암컷과 수컷이 구별이 되어있을 텐데 왜 남자의 존재를 이해할 수도 없으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겁니까?”

백훈의 질문에 그녀는 기막힌 주장으로 대답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런 하등라고 미개한 동물들과 달리 지성을 가진 이 행성의 지배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류는 하나의 성으로만 이루어져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완전함과 동시에 또 신에게 선택받았음을 뒷받침하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가진 지성과 형태야 말로 신이 우리를 창조하였으며 축복하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어떻게 아이를 만듭니까? 당신들도 동물들의 짝짓기 같은 걸 잘 알지 않을 것 아닙니까? 아기를 만들려면 남자가 여자의 체내에 정자를 보내야...”

김율희 대령은 혐오스럽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설마 우리들이 원래 그런 짐승 같은 행위를 했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정말로? 그건 아주 역겹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짐승들만의 행위입니다. 우리들은 보다 우아하고 발전된 방법으로 아이를 가집니다. 마음이 맞는 상대와 서로 입과 입을 맞추어 체액을 교환...”

“자...잠깐만요! 그러니까 지금 당신 말은 당신네들이 키스를 통해 아기를 만든다는 겁니까? 겨우 침과 침을 상대방에 밀어 넣는 방법으로? 지금 이게 무슨 헛소리입니까?”

60~70년대의 엉터리 성교육도 아니고 키스를 하는 것만으로 아기가 생긴다는 소리에 백훈은 실로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일상생활 시에 나오는 침과 성교 시에 분비되는 체액은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성교 시에 분비되는 체액에는 생명의 핵이 들어있습니다.”

백훈은 이 세계가 어쩌면 정말로 남자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고 여자들만으로 시작된 세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들어보니 이건 아예 전혀 다르게 진화한 인류가 아닌가?
그리고 지금까지 줄곧 침묵을 지키던 사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위험한 주장을 하고 있음을 명심해야합니다. 당신이 주장하는 남자라는 존재는 경전의 악마와 여러모로 닮은 것 같군요. 어쩌면 신께서는 외계의 침공을 미리 예언하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당신이 더 이상 위험한 수준으로 나아간다면 재판을 중단하고 즉각적인 해부 결정 이후 화형을 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백훈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침착하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해...해부라니요?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김율희 대령은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담담히 그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이 문제가...제가 처음 얘기한 곤란한 처지입니다. 당신이 우리 세계에 도착해 우리 세계의 공기와 접촉한 순간부터 미지의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발생해 퍼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른 행성, 전혀 다른 환경에서 온 당신이라는 이질적 존재는 여기에 왔을 때부터 이미 우리 세계의 환경을 위협한 것입니다. 아직은 모르지만...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당신을 해부해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언젠가 발생할 치명적 질병으로부터 우리들을 지켜내기 위해 당신을 철저히 조사할 필요가 있어요.”

“이...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어떻게 그런...”

“원칙적으로 우리들의 법은 외계인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해도 상관이 없으며 당신은 이 행성에서는 아무런 권리도 없다는 뜻입니다. 아, 물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가능성은 반반이에요.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어요. 잠복 기간이 수십, 수백 년에 이를 수도 있어요.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당신을 해부할 필요성이 있어요. 해둬서 나쁠 건 없잖아요?”

김율희 대령은 싱긋 웃었다. 그녀의 얼굴과 웃음 속에서는 아무런 사악함도, 악의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합리적 판단을 내린 것뿐이다. 자신들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길고도 짧은 청문회가 끝났고 백훈은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되었다.
그녀들은 백훈에게 단 하루만을 주었고 그 시간 동안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알려줄 것을 요청했다. 순순히 자신들에게 협조를 해준다면 적어도 고통스럽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고(끔찍하게도 여사제는 산 채로 해부하는 것이 의학적으로 더 좋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말하면서.
그렇지만 김율희 대령은 기술적인 면에서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청문회가 끝나고 그녀가 백훈을 아주 가까이서 관찰할 때 비행기의 조종사는 기계의 세세한 작동 원리나 과학적 이론을 거의 모르는데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의견을 그에게 밝혔는데 아주 현명한 생각이었다.
백훈은 제트 엔진의 원리나 항공장갑복의 파워 어시스트 기능, 장갑판의 합금 재질에 대해서 아주 피상적으로 밖에 알지 못했고 전투기와 항공장갑복을 어떻게 수리하고 정비하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
단지 어떻게 작동시키고 조종하는지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내고 나면 두 장비를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이용하거나 자체적으로 분해할 궁리일 것이다.
이미 작업을 시작했을 수도 있었고.


타임 슬립 현상.
백훈은 청문회가 끝나고 나서부터 줄곧 거기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버뮤다 삼각지대와 같은 불가사의한 실종 현상들에 대해 조사를 시작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자연 재해.
과학자는 타임 슬립 현상을 기상 현상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변덕과 함께 나타나는 불규칙적인 자연 현상이라고 정의했다. 나타나는 것 자체가 드물고 제대로 관측하거나 확인할 수도 없지만 만약 이러한 미지의 자연 재해를 제대로 규명한다면 말 그대로 신의 힘을 손에 넣는 것이다 마찬가지라는 열변과 함께.
백훈은 과학자가 했던 말들에 대해 필사적으로 떠올리려 노력했다.
타임 슬립 현상이 일어났다면 그 장소에 다시금 발생할 가능성잉 높다는 가설.
현대의 과학 기술로는 파악할 수 없는 물리적 법칙이 기상 현상의 탈을 쓰고 나타나 시공간 구조에 영향을 끼치면서 일종의 양자 터널과 유사한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면 그 잔존물이라던가 흔적이 발생한 장소에 선명히 남아있을 것이다.
그 파편들 자체가 새로운 타임 슬립 현상의 시작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정보를 말해준 날, 과학자의 지루한 강의가 있던 시간에 그는 하품을 간신히 참아내며 이번 주말 여자 친구와 같이 볼 영화에 대해 고민했었다.
백훈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고 흐느꼈다.


원형 철창 우리에서 나와 수감실로 이동할 때 백훈 주변을 지키는 여군은 겨우 둘이었다.
그는 수감실로 몇 걸음을 걷던 와중에 헛구역질을 하며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몸을 격렬하게 떨면서 바닥을 굴렀다.
당황한 병사 하나가 달려왔을 때 백훈은 차가운 눈으로 그녀의 새하얀 목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봐도 목젖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말 그대로 여자의 목이었고 그는 조금의 주저 없이 곧장 주먹을 쑤셔 박았다. 그녀는 목을 움켜쥐며 외마디 소리 없는 신음과 함께 뒤로 넘어졌고 백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감실 앞에 서있던 여군에게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20대 초중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의 여자는 총을 제대로 겨눌 기회를 놓친 탓에 거친 육박전을 백훈과 벌여야만 했고 어느 순간 손톱으로 그의 얼굴을 박박 긁어댔다.
백훈은 행여나 그녀가 비명을 지를까 한 손으로 산호의 가지 같은 가녀린 목을 꽉 조르며 주먹질을 해댔다. 어느 순간 그녀의 몸부림이 잦아졌고 그는 마지막으로 무릎으로 배를 강하게 때렸다.

“망할 년!”

백훈은 재빨리 최초에 쓰러뜨린 병사에게 달려들 준비를 했다가 멈칫했다. 의아하게도 그녀는 대자로 뻗은 채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머리 뒷부분에서 그렇게 많지는 않은 피가 흘러나와 있었다. 죽지는 않았겠지만 이 충격이 그에게 도움이 된 것은 확실했다.
어쨌거나 두 여자는 정신을 잃은 상태(그는 그렇게 믿었다)였고 이제 백훈에게 무사히 탈출할 기회가 아주 약간이나마 생긴 것이다.
그는 여군의 몸을 뒤져 G-43 반자동소총을 닮은 소총과 탄창 두 개, 그리고 열쇠를 챙겼고 굳게 잠긴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무사히 여기를 나간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지는 몰랐다.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나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이 방으로 올 것이고 곧바로 기지 전체에는 비상이 걸리겠지.
난생 처음 보는 낯선 기지 안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느라 헤매는 수상한 ‘남자’를 거의 즉각적으로 찾아내게 될 것이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백훈에게는 남은 시간이 없었다. 아마 그들이 침착함을 가지고 자신과 교류를 가졌거나 겨우 24시간을 주는 대신에 좀 더 넉넉한 여유를 주었더라면 자신이 외계인이 아니며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을 것이다. 이 세계에 한때 있었을 남자의 흔적이나 증거를 찾아내어 그들에게 보여주거나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 지금 상황은 너무나 좋지 못했다.
언젠가 남자들끼리 농담조로 만약에 여자들만 있는 세계에 혼자 남자로 남으면 왕이 되어 끝내주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 웃은 적이 있었다.
백훈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리라 마음먹으며 문으로 걸어가다가 지금 자신이 나체 상태인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낄낄 웃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옷을 벗고 있었는지 이제는 되려 알몸이 익숙해진 판국이었다. 마치 짐승처럼.


여자들의 전투복을 훔쳐 입고 전투모를 푹 눌러 써 얼굴을 반이나 가린 백훈은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봤을 때처럼 프롭기 십여 대 정도가 풀밭 위에 가지런히 주기되어 있었다.
과연 그녀들이 자신의 전투기를 온전히 놔두었을지 의문이었다. 어디 다른 연구 시설로 끌고 갔거나 이미 부품 단위로 분해해버렸다면 프롭기를 탈취해 도망치는 수 밖에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기지와 연결된 시멘트 포장도로(아마 차량이 주로 이용하며 기지에 보급을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을)에는 백훈의 전투기가 처음 여기에 착륙했을 때와 조금도 변화 없이 멀쩡하게 제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힘껏 달렸다. 뒤에서 언제라도 고함과 아우성, 그리고 총성이 들려올지 몰랐다.
백훈은 전투기에 올라타고 나서야 아주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물론 느긋하게 쉴 시간 따위는 없었고 얼른 엔진 시동 절차를 밟았다. 그가 배터리 전원을 넣고 JFS 스위치를 스타트 위치로 돌리자 엔진 터빈음과 함께 엔진 RPM이 20퍼센트까지 증가했다.
그는 즉시 왼손으로 스로틀 레버를 최소 출력 위치로 당겼다. 정상적으로 엔진 시동이 이루어진 듯 엔진소리가 점차 높아져 갔고 다시 왼손으로 스로틀 레버를 밀어 엔진 출력을 올렸다. 그러자 엔진이 시끄럽게 울부짖으며 기체를 앞으로 이동시키려고 했다.
백훈은 두 발로 브레이크 페달을 힘껏 밟고 있다가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자 전투기가 앞으로 향했다.
백훈은 스로틀 레버를 애프터버너 섹션으로 올렸다. 전투기 꽁무니에서 불꽃이 커져 가며 전투기가 급가속하기 시작했다. 조종석 좌석 전방의 HUD(헤드업 디스플레이)에서 증가하던 속도가 150이 되자 백훈은 랜딩기어 레버를 잡아 올렸고 기수를 하늘로 들어올린 전투기의 바퀴 세 개는 지면에서 떨어지자마자 기체 안으로 접혀 들어갔다.
백훈은 전투기가 대지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감각을 느끼며 잠시 전율했다. 그리고 무한하게 펼쳐진 눈앞의 광활한 푸른 대지를 바라보았다.
유일한 희망은 자신을 이 알 수 없는 세계로 끌고 온 그 폭풍이었다.
하늘을 여기저기 휘젓다보면 다시 그 폭풍을 만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영원히 여기에 갇히거나.
자신을 죽이려 하는 무수한 여자들이 기다리는 세계에.
일순 폭음이 들려왔다. 바로 아래에서 대공포와 기관포를 쏴대고 있었다.
백훈은 공허하게 웃으며 전투기의 날개를 흔들어 그녀들에게 작별 인사를 보냈다.


우주선은 거대한 폭음과 함께 푸른 하늘을 가르며 높이 날아갔다.
김율희 대령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새하얀 비행운만을 길게 남기고 이제는 보이지 않는 반짝이는 점으로 변해버리고는 하늘 저편으로 사라진 전투기를 하염없이 노려보던 그녀의 곁으로 부관이 다가왔다.

“어디로 간 거죠?”

김율희 대령은 깊은 한숨과 함께 폭풍이 다가오기 직전의 바람처럼 속삭이듯 대답했다.

“집으로 갔지. 어디로 갔다고 생각하나?”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또 강렬했다.


전투기는 최고 속도로 맹렬하게, 그리고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었다. 하늘을 가르는 칼처럼 빠르게 상승하는 전투기 안에서 백훈은 이제 최후의 순간이 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기적적으로 기지에서 도망치고 나서 대체 얼마나 이 하늘을 헤맸을까?
그는 의식적으로 전면 터치 모니터 오른쪽 상단에 선명히 나타난 붉은 글자를 확인했다.
남은 연료가 얼마 없었고 이제 시간도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선택을 했다. 뼈가 아팠고 숨쉬기도 힘들어졌다. 이미 코와 입에서는 붉은 피가 흥건했다.
문득 그렇게 싫어하던 항공장갑복이 그리워졌다.
백훈의 전투기가 상승할 수 있는 한계 고도는 이미 도달했다. 더군다나 대류권마저 지나치고는 오존층에 진입한 시점이었다. 여기서 기수를 돌리지 않는다면 공기가 없는 공간에 다다르고 추락하게 될 것이다.
백훈은 살짝 웃었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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