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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뼈의 발견자

2011.10.03 01:4310.03


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남자는 힘없는 목소리로 여자에게 인사를 했다. 대부분의 이들이 괜찮게 생겼다고 평가할 정도로 준수한 남자의 얼굴은 지금 아무런 감정 없는 조각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반면 여자는 너무나 행복하다는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남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는 땅을 파고 있었다. 자신이 틀림없이 미쳤다고 투덜대며.
동네 뒷산 수준은 결코 아닌 산 중턱의 계곡 근처에서 그녀는 온몸이 흙먼지 범벅이 된 채 거칠게 숨을 쉬며 삽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삽질을 멈추고 잠시 심호흡했다. 심장이 아주 뜨거웠고 온몸에서 느껴지는 강한 열기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잠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하나 없이 무한하게 펼쳐진 창공의 바다가 보였다.
그녀는 헛웃음과 함께 시선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주변 여기저기는 마구잡이로 파헤쳐진 구덩이와 흙더미로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그녀는 발목까지 들어갈 깊이의 구덩이 파는 것을 멈추고는 잠시 노려보다가 신경질적으로 찔러댔다. 그 순간 삽 끝 부분을 통해 무언가 단단한 것이 맞부딪치는 감각이 대번에 났고 성하는 삽자루를 쥔 손끝이 짜릿하게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삽을 내던지고는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 조금 전 삽날이 부딪친 부분을 두 손으로 파내기 시작했다. 흙이 점차 사라지면서 하얀 덩어리 일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몇 분 정도를 끈질기게 노력한 끝에 하얀 덩어리가 마침내 그 정체를 완전히 드러냈다.
지금 그녀가 발견한 것은 분명 ㄷ자 모양의 뼈였다. 그것도 상당히 큼지막한 크기의 파충류 두개골.
그녀는 참을 수 없는 흥분과 희열로 몸을 부르르 떨며 기뻐했고 종국에는 감정에 몸을 맡겨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방방 날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성하다. 한성하.
성하가 한국의 일반적인 도시 사람들이라면 살아가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을 지역의 산 중턱에서 뼈를 발견하게 된 경위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복잡했다.
대학생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과제와 대학교 2학년 여름까지 사귀던 남자 친구와의 결별이 거의 동시에 벌어진 것이다.
성하의 남자 친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알게 된 이른바 ‘소꿉친구’였다. 그렇게 지내오던 서로의 관계가 깨진 것은 고등학교 1학년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새로 극장에 개봉한 배트맨 영화를 보고 같이 햄버거를 먹으러 가기 전 성하는 수줍게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는 당황해했지만 이내 그녀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소꿉친구 사이에서 애인 사이가 된 것이다. 그리고 성하가 이름 없는 계곡의 구덩이에서 환호를 내지르기 불과 2일 전 그는 그녀에게 헤어질 것을 고백했다.
그는 성하에게 왜 헤어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고백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노력해봤어. 그 나날 동안 난 노력했어. 널 좋아하도록...하지만...하지만 역시 난 널 좋아할 수 없어. 내가 너에게 느끼는 감정은 두근거림이 아니야.
난 좀 더 여성적이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여성을 원해. 하지만 넌 아니야. 넌 내 좋은 친구지만...여자 친구로써는 아니었던 거야.
우리는 지금까지 결코 애인 사이가 아니었어. 그냥 오랜 시간을 같이 해온 친구였을 뿐. 어쩌면...가족이라고 말할 수도...그리고...난 너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어.
너 또한 나에 대해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겠지.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며 지내기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어.’

그의 모든 주절거림이 끝나는 순간 그녀는 태권도로 단련된 두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성하는 짐승과도 같은 울부짖음으로 그의 면전에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이 개새끼, 넌 후회하게 될 거야! 내 앞에서 네 놈이 후회하는 꼴을 꼭 보고야 말겠어! 두고 봐! 두고 보란 말이야!’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넌 항상 네 옆에는 내가 있어야 옳다고 믿어왔었구나. 지금 이 순간까지...“

성하가 마지막으로 그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성하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그 남자는 그녀가 자신에게 달려들기 전에 서둘러 밖으로 도망쳐버렸다.
그 날 저녁 그녀에게 과제가 전해졌다. 학과 학생들에게 공통적으로 전달된 메일이었다.
실연의 슬픔에 허우적대던 성하 입장에서는 과제고 뭐고 그냥 무시해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기말 점수에 합산이 되는 중요한 기말 과제였다.
무서울 것 없이 날뛰는 대학교 1학년 새내기도 아니고 그녀는 2학년이었다.
과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시대 설화문학의 조사 : 민담과 같은 설화문학을 현대적으로 해석 및 분석함과 동시에 개인적 의견을 첨부하여 고찰한 보고서를 제출하라‘
거기에 더해 교수의 독특한 개인적 취향에 의해 한 가지가 덧붙여졌다.
바로 구체적 지명이 명시된 설화를 선택하여 반드시 현장 답사를 갖다 오라는 것이었다.
처음 과제 메일을 휴대폰으로 확인했을 때 여전히 숙취로 고생 중이던 성하는 욕설을 퍼부었지만 별 도리가 없음을 깨달았다.
성하는 교수가 미리 추천한 야담집들-동야휘집, 소하록, 청구야담, 해동지괴담, 용재총화, 어우야담, 촌담해이, 파수록 등등- 중 해동지괴담을 선택해 모니터에 펼쳐진 전자문서의 목차를 무심한 눈으로 확인했다.
무심한 눈빛으로 목차를 살펴보던 성하는 자신도 모르게 어떤 제목에 마음이 끌림을 느꼈다.

“철면장군전...”

그녀는 곧 철면장군전(鐵面將軍傳)이라는 제목의 괴이한 옛 이야기에 마음이 끌림을 느꼈다. 성하는 입술을 깨물며 전 남자 친구였던 그 놈 역시 자신에게 당당히 헤어질 것을 고백할 때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욕하였다.
개로 시작하는 온갖 욕이 끝났을 때 성하는 철면장군전이라는 이야기가 과제에 부합함을 깨달았다. A4 용지 한 쪽 정도에 불과한 분량의 조선 시대 설화였지만 그녀는 읽으면서 꽤나 재미있고 생각했고 금상첨화 격으로 이야기의 배경에 해당하는 지명도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이야기를 선택했고 최종적으로는 현장 답사의 와중에 철면장군전이라는 옛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졌음을 강하게 암시하는 증거물인 뼈를 발견하게 되었다.
성하가 선택한 철면장군전이라는 이야기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옛날 경상북도의 위래현이라는 외진 고을에 신임 사또가 부임하게 된다.
부임 첫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사또 앞에 요사한 바람과 함께 귀신이 나타나는데 젊고 아름다운 처녀의 형상으로 한동안 구슬프게 울다가 원한을 갚아달라고 청한 후 사라졌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사또가 마을의 유력자와 이방을 불러다 물어보지만 그들은 입을 모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수상함을 느낀 사또가 노기와 함께 다시금 심문하니 위래현에 자리한 금오산에 이무기가 버티고 있으며 죽이려고 해보았지만 큰 피해만 입은 터라 1년에 한 번 씩 처녀를 바쳐 살아왔다고 털어 놓는다.
이에 분노한 사또는 이방과 마을의 유력자에게 그 죄를 물어 참수한 후 직접 갑옷과 철가면을 입어 이무기를 처단하기로 한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이무기의 화를 두려워해 사또를 말리려 했지만 전혀 처음 보는 갑옷의 위용과 무시무시한 형상의 철가면을 보고는 짐짓 겁을 먹어 물러서고 만다.
심지어는 철가면의 두 눈마저 흉흉하고 선명한 붉은 빛을 뿜어냈으니 몇몇 이들은 사또가 처녀 귀신에게 씌었다고 쑤군댔다.
관아의 화포와 활, 칼로 무장한 사또는 이무기가 사는 산 중턱의 동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계곡에 도착한 후 술과 꿀에 절인 고깃덩어리로 놈을 유인한다.
이무기가 모습을 드러내니 그 크기가 20척을 가볍게 넘었으며 이무기임에도 두 팔과 두 다리가 달려 마치 사람처럼 걸어 다니니 그 형태가 참으로 괴이했다.
몸을 숨기고 있던 사또는 이무기가 고깃덩어리에 정신이 팔린 틈에 급습을 하여 처절한 혈투 끝에 마침내 이무기를 죽이는데 성공한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사또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처음 출발했을 때 모습과 현저히 달라졌음에도 살아서 돌아왔음에 놀라움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또는 처음과 달리 붉은 안광도 사라지고 갑옷은 반쯤 부서져 너덜너덜해진 만신창이의 모습이었다. 사또가 피곤한 기색으로 관아에 돌아와 동헌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피를 토하며 급사하고 만다.
육방 관속들은 기겁을 하며 사또의 시신을 수습하지도 않고 도망쳤고 그와 함께 거대한 폭음과 함께 요란한 비바람이 산 중턱을 사납게 휘몰아쳤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이무기의 원혼이 발광한다며 벌벌 떨었으며 결국 하루도 지나기 전에 거의 반 수이상이 마을을 버리고 도망쳐버렸다.
결국 위래현은 흉흉한 소문 끝에 폐현되어 인근 고을과 합쳐졌으나 한동안 사람들은 그 주변으로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하는 철면장군전에 기록된 금오산 중턱의 청설 계곡 부근에 도착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산에 올라오기 전 그녀는 금오산이 유난히 격렬한 기상 현상에 휘말렸음을, 최근에도 거센 폭풍우와 태풍에 휩쓸렸음을 현지 주민에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언덕이 무너지고 토사가 대령으로 유실되는 등 지형이 크게 변화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기록의 산 중턱 계곡과 지금의 산 중턱 계곡하고는 이름만 같을 뿐 완전히 달라졌을 가능성이 지극히 높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크게 상관없는 문제였다. 땅이 뒤집히고 언덕이나 바위 같은 지형지물이 박살나 그 모습이 크게 변했다고 해도 지금 성하가 찾아가는 곳은 청설 계곡이었고 사진을 찍어서 직접 현장 답사를 왔다는 증거물만 가져오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운명처럼 우연히 그것을 발견했다.
성하가 사진을 찍는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무성한 잡초 사이로 하얗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본 것이다.
그녀는 호기심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얀 빛을 본 곳으로 걸어가 몸을 숙여 잡초를 걷어내자 새끼손가락 크기 정도의 하얀 조각 하나가 땅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성하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잡고 빼냈다. 이윽고 그녀는 하염없이 구부리고 앉은 채 지금 그녀가 발견한 뼛조각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보았다.
동물의 뼈?
성하는 뼛조각을 만지작거리다가 거의 즉각적으로 지금 왜 자신이 여기에 오게 됐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철면장군전에서 사또가 갑옷을 입고 직접 쳐 죽인 요괴. 이무기.
그리고 성하는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그녀 자신도 몰랐지만 몸과 마음은 땅을 파는 행위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뼈를 발견했다. 이무기의 뼈를.


성하는 이제 평범한 대학생이 아니었다.
이무기라는 옛날 요괴의 뼈를 직접 발견해내는 업적은 인문학적으로, 또 자연 과학적으로 어마어마한 관심을 이끌어냈다.
이제 그녀는 대한민국의 온오프라인을 통틀어 주목받는 하나의 스타였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성하의 이름과 존재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조작에 대한 가능성이 그녀를 잠시 위협했지만 곧 발견된 골격의 거대함과 완전함이 알려지면서 일개 평범한 대학생이 만들어내기에는 너무나 정교하다는 해석이 조작에 대한 논란을 지워버렸다.
흥분에 찬 일단의 과학자들이 이무기의 정체에 대해서 이런저런 가설을 내놓았고 가장 합리적이고 그럴듯한 가설이 단숨에 완성되었다.
옛 조선 시대는 지금과 비교하면 정말 천지차이로 다른 자연 환경에 사람의 수도 적고 먹이도 풍부하기 때문에 생물의 덩치가 지금보다 더 컸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나 파충류는 성장한도가 없기 때문에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계속 커지기 때문에 손쉽게 거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결국 이무기의 정체는 잘 먹고 장수하면서 대형화된 기존의 뱀이라는 것이다.
물론 너무나 자연스러운 형태로 달려있는 팔다리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설명이 없었다.
뱀이 아니라 조선 시대 어느 시점에 멸종된 미지의 도마뱀 종이 대형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궁색한 추가 설명이 이어졌고 전 세계의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옛 전설과 전승되어오는 과거의 이야기들을 뒤지며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성하는 헤어짐의 아픔을 아주 잠깐 잊을 수 있었다. 이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기쁨과 행복의 중심 속에 그녀는 잠시나마 그의 존재를 잊고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이후를 생각해보면 정말 잠깐이었지만.


그 날은 분명 성하가 TV 프로그램에 섭외되어 뼈를 발견한 그 장소에서 직접 그 당시의 재연 및 인터뷰를 하는 촬영 날이었다.
갑자기 터진 촬영 팀의 기술적 문제 탓에 십여 분 정도 녹화가 중단되어 성하가 하릴없이 주변을 걷고 있을 때였다. 낮은 둔덕 근처에서 무성하게 나있는 수풀 근처에서 햇빛의 반사와 함께 무언가 반짝였다.
그녀는 자신이 처음 이무기의 뼈를 찾았을 때의 놀라운 행운을 기분 좋게 추억하며 그 쪽을 향해 다가갔다. 기분 좋은 추억의 회고와 함께 웃고 있던 성하의 얼굴은 여전히 반짝이는 그것을 파냈을 때 단숨에 굳어져 버렸다.
손끝을 통해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 느껴졌다. 외관상으로 볼 때 그녀가 발견한 것은 틀림이 없는 금속의 일부였다. 세련되면서도 약간은 투박해 보이는 암청색 금속 조각.
그리고 그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실과 같은 전선들.
성하가 작은 손거울 크기의 금속 조각을 뒤집어 살펴보자 그 안쪽은 집적 회로와 복잡한 전자 부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머리를 몽둥이로 한 방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건 대체...뭐지?
그녀가 지금 자신이 직접 발견한 물건의 정체에 대해 당황해할 때 저 멀리서 촬영 재개를 알리는 여성 스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하는 본능적으로 금속 조각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최대한 침착하게 걷기 시작했다.
이무기의 뼈, 그리고 지금 그녀가 근처에 찾아낸 금속 조각.
분명 조선 시대의 유물은 아니었다. 기계 부속품의 일종으로 보이는 파편이니까.
성하는 초조함을 느끼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무런 문제 될 것 없어.
그녀는 그렇게 필사적으로 생각했지만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촬영 팀은 모두 떠났다. 아마 지금쯤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마을 회관에서 이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성하는 철면장군전과 관련한 정보가 좀 더 많이 필요했다.
외관상으로 볼 때 꽤나 젊어 보이는(20대 중후반?) 이장은 성하에게 아주 협조적인 것도 모자라서 그녀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고분고분했다.
마을 회관을 성하 혼자 독차지하게 해주는 것도 모자라서 몇 달이고 공짜로 묵어도 괜찮다고 말할 정도니 완전히 일생의 은인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에 대한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이무기라는 놀라운 관광 거리를 얻어내 산골 벽지의 농촌이 돈 소리가 착착 들려오는 관광지로 발전하게 됐고 이장은 이무기 뼈 전부를 파날 때 발견된 오색찬란한 구슬 수십여 개 덕분에 단박에 부자가 되었다.
금오산의 소유권은 이장 쪽에서 가지고 있는 탓에 금오산에 나온 모든 것들은 원칙적으로 이장의 소유였다. 이무기의 뼈 역시도.
어쨌거나 이무기의 뼈 전부를 파낼 때 발견된 구슬들은 학자들 말로는 소화를 도와주기 위해 집어 삼킨 돌덩어리들이 구슬 형태로 변해 발견된 것이라 설명했는데 감정 결과 충분히 보석의 가치가 있었고 또 이무기와 함께 나왔다는 희소성도 더해져 꽤나 비싼 값에 팔리게 된 것이다.
이장은 아주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집을 개조해 박물관을 지을 것이라는 둥의 거창한 돈벌이 계획을 늘어놓고 있었다.
성하는 어색하게 이장을 쳐다보며 이무기의 뼈가 혹시나 가짜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그녀가 발견한 이무기의 뼈가 가짜라는 의혹이 자기 자신에 의해 제기되고 그 의혹이 언론과 네트워크로 흘러나간다면 진위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일어나 엄청나게 시끄러워질 것이 뻔했다.
아직은 불확실했다. 겨우 추측에 불과했고 뒷받침할 증거물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녀가 발견한 기계의 파편 엇비슷한 금속 조각은 어떤 등산객이나 마을 사람들이 흘린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성하는 현존하는 마을의 기록물들, 고문서가 보관되어 있는 방을 응시했다.
이장의 설명에 의하면 20년대에 이장의 증조할아버지가 마을 역사를 정리하려는 목적으로 각 집에서 보관 중이던 마을 고문서 일부를 모았고 그걸 토대로 책을 쓰다가 죽었고 그걸 그대로 보관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정희 시절 새마을 운동 때 마을을 전부 새로 지으면서 헌 집을 정리할 때에 여기저기서 갖가지 잡다한 문서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냥 버릴 수는 없어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지어진 마을 회관에 이장의 집에서 보관 중이던 고문서들과 함께 옮겨졌다는 것이다.
이장의 설명대로라면 꽤나 귀중한 문서들이, 성하에게 진실을 알려줄 정보를 담고 있는 과거의 기록물들 상당수가 아주 온전히 남아있을 가능성이 컸다.
성하는 아직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문손잡이를 잡았다.


성하가 마을 회관에 보관되어 있던 모든 문서들, 그 기록들 전부를 뒤지는 데에는 정확히 반나절 정도가 걸렸다. 쏟아 부은 시간이 아깝지 않게 그녀는 보다 구체적이면서도 값진 정보를 입수해낼 수 있었다.
윤형태 현감. 해동지괴담에서는 그냥 사또라 기록된 누군가의 이름과 직책이었다.
이름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철면장군전에서 사또가 입고 싸운 갑옷과 철가면과 관련한 구체적 정보 또한 발견해냈다.
철면장군전에 나온 갑옷은 기록에 따르면 윤 현감이 마을 대장장이들에게 명해 직접 만들어 입은 일종의 새로운 오리지널 갑옷이었다.
윤 현감이 직접 고안해낸 갑옷. 그리고 윤 현감만이 가지고 있던 철가면.
그것들은 폐현된 직후 발생한 호란의 와중에 행방이 사라졌다.
기록에 따르면 행방이 사라지기 전에 어떤 청년이 그 갑옷과 철가면을 착용한 후 사람들과 함께 청군에 대항해 싸웠고 몇 번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그들은 결국 의병의 한계를 이겨내지 못하고 모두 전멸해버렸다. 그리고 그 최후의 순간에 윤형태 현감의 갑옷 또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만다.
호란이 끝났을 때 청군과 싸운 의병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에 대해 기록을 하였고 그 기록은 결국 현재까지 온전히 남아 성하에게 전해졌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들이 남긴 기록에 대해 찬찬히 곱씹어보았다. 특히나 갑옷에 대한 묘사와 어설프긴 해도 잘 그려진 갑옷의 그림.
철가면까지 쓰고 갑옷을 완벽하게 걸친 형상의 사람을 그린 그림.
철면장군.
갑옷은 갑각류의 외피와 닮아있었다. 어떻게 보면 두정갑을 기초로 장갑판을 겹쳐 다듬은 듯한 형태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현대적인 느낌마저 있었다.
그리고 얼굴을 완전히 감싸는 철가면.
날카롭게 찢어진 두 개의 눈구멍과 안면부에는 6개의 수직 홈 같은 것이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져 있었다. 수직선은 인간으로 치면 볼에 해당하는 부분에 각각 3개씩 위치하며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아래턱이 사라진 해골의 형상과도 유사했다.
성하는 주머니의 금속 조각을 꺼내들었다. 복잡하고도 정밀한 기계 장치의 일부분을 이루었을 파편이었다. 그리고 이무기의 뼈가 발견된 곳 근처에서 정말 우연히 성하가 찾아냈다.
학자들은 이무기의 뼈를 전부 다 파낼 때 대체 왜 이걸 발견하지 못한 걸까?
성하는 미간을 찡그리며 암청색의 금속 조각을 손가락으로 문질러보았다. .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만약 이 물건이 철면장군전 전설과 관련이 있다면 유일한 접점은 철면장군, 그러니까 윤형태 현감이 입은 철가면과 갑옷뿐이었다.
성하는 휴대폰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검색 사이트에 접속했다. 폰카메라로 스캔해 저장한 철면장군의 그림을 사이트에 올린 그녀는 그 그림과 가장 연관이 있고 유사한 이미지를 알아내기 위한 검색을 시작했다.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고 터치스크린의 한 부분을 살짝 누르는 것만으로 금방 검색 결과가 화면 전체를 채우며 나타났다.
성하는 가장 일치도가 높은 첫 번째 이미지를 확인했다.

-인젠 / 외골격 장갑 강화복-


인젠은 독일의 기술자와 한국의 기술자가 서로 모여 설립한 회사로 국적을 따지기 애매한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성하가 직면한 의문과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녀가 주목할 만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미국제 강화복과의 경쟁에서 꽤나 무리수를 둔 나머지 유럽 쪽에서 모종의 트러블에 휘말렸다는 사실과 한국 육군에서 시험적으로 5대 정도를 구매해 채용 테스트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
좀 더 파고들어보니 현재 인젠 사의 내부 사정은 그렇게 좋지 못하며 이번 한국 시장에서 자신들이 개발한 장갑 강화복의 판매를 위해 거의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요약하자면 인젠은 자칫하다가는 망해버릴 위기에 처한 지금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찬스, 단지 한국 기술자 집단이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관심을 보이고 있는 한국군과의 판매 계약을 맺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거나 이미 저질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인젠이 이미 유럽 쪽에서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도 성하의 가설을 뒷받침해주었다.

[...착용자의 근력을 1.3배 정도로 증폭이 가능하며 유효 사거리 내에서의 소총탄을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 성능치가 보병에 특화되고 대량 생산에 있어 강화복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생산 효율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신빙성은 반반입니다. 아, 방탄 능력과 관련해서 더 보충하자면 인젠의 주장에 의하면 제한적이긴 하지만 기관총탄에 대한 방어 능력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글쎄요? 하여간 인젠 외골격 장갑 강화복의 전신 외골격은 장갑 방어구의 지지 골격 역할을 함과 동시에 간략화 된 파워 어시스트가 가능합니다. 장갑의 재질은 일단 인젠이 밝힌 바에 따르면 티타늄 합금이라고 하지만 미국 포럼에서는 철합금의 일종일 수 있다고 의심하더군요, 그들이 내세운 증거에 따르면 실험 영상에서...]

성하는 솟구치는 짜증과 답답함에 그녀만의 보금자리 안에서 잠시 동안 미친 듯이 날뛰었다. 대체 왜 강화복이라는 21세기의 최첨단 병기가 조선 시대의 갑옷, 그것도 이무기를 때려잡았다는 사또의 갑옷과 동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툭 튀어나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친 숨과 함께 마음을 정리한 성하는 컴퓨터의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성하가 네트워크 여기저기를 뒤져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인젠의 강화복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최근 너무 복잡해지고 대형화와 고성능화가 그 추세인 강화복 시장에 있어 강화복의 원점을 잘 읽어낸 결과물이며 대량 생산에도 적합하여 보병을 대규모 무장할 수 있다는 점이 고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너무 무난한 성능에 특별히 혁신적 면모도 없고 방탄 장갑구로 전신을 감싼 무동력 장갑복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 요소도 만만치 않게 존재했다.
성하는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어쩌면 착각을 했을 수도 있다. 이 기록에 언급된 갑옷은 그냥 적당히 잘 만들어진 갑옷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정말 우연히도 그 외견이 서양의 갑옷, 그리고 현재의 장갑 강화복과 닮게 된 단순한 갑주.
성하는 자신이 처음 읽은 기록이 전설의 고향 같은 허무맹랑한 설화의 일종임을 확인하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녀 자신이 납득할만한 합리적 해답을 찾기 위해.
대형화된 동물의 뼈가 발견되었다고 해도 그 사또가 입은 갑옷을 최첨단 강화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심한 억측임에 틀림이 없었다.
과거에 입과 입으로 전해지면서 점차 살이 붙고 도무지 믿기 힘든 과장이 섞여 이런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펼쳐진 것이겠지.
그리고 그녀가 발견한 금속 조각. 이 세상에는 여기저기 쓰레기를 흘리거나 버리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에베레스트의 정상이나 남극에서도 이제는 현대 문명의 쓰레기나 흔적이 발견되는 판국이니 성하가 발견한 기계 파편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예전에 금오산을 등산한 이름 모를 등산객이 버렸거나 과거 한국전쟁의 잔해, 아니면 태풍에 의해 근처에서 우연히 날아왔을 수도 있다.
아주 손쉽게, 그리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너무나 무궁무진했다.
우연과 우연의 연속. 절대 억지에 의한 끼워 맞춤이 아니다.
성하는 역사를 공부하는 역사교육과 학생이었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요소와는 별개로 우연이라는 변칙적 요소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는 사실을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검색 사이트가 과거의 갑옷 그림과 가장 비슷한 이미지로 인젠의 장갑 강화복을 들고 나온 것도 그저 우연이다. 그 옛날 조선 시대의 갑옷이 현대의 강화복과 우연히 닮은 것처럼.
성하는 그냥 우연이라고 필사적으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녀에게는 빛나는 나날이, 눈부시게 찬란한 미래가 함께하고 있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이따위 사소한 일에 발목 잡히고 신경 쓸 틈은 없었다.


성하의 우연한 발견은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과 파장을 선사했고 세계의 이름 있는 학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그녀의 이름과 그녀의 업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성하는 세상의 여왕이었다.
하지만 이무기의 뼈가 거짓일 가능성이 튀어나온다면.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비난을 받는다. 세상의 여왕에서 세상의 사기꾼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결국 성하는 인젠의 강화복에 대해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서관의 물리학과 관련된 서적과 논문을 뒤져 시간 여행의 가능성과 관련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시간 여행은 분명 물리학적 관점에서 불가능한 개념이었다.
미래로의 시간 여행은 냉동 수면과 같은 방법으로 일단 가능은 하지만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웜홀이나 블랙홀 등을 이용하면 가능하다고 일부가 주장은 하고 있었지만 그런 수단이 시간을 역행시켜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우며 앞으로도 실험을 통해 증명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허구라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성하는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과 함께 안심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얇은 두께의 책을 발견했다.

『타임 슬립 현상에 대한 연구와 논의』

성하는 몸이 차갑게 굳는 것을 느꼈다.
타임 슬립 현상은 최근 새로 나온 재밌는 개념이자 가설이었다.
책은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자연 법칙 혹은 전 우주적 법칙에 의해 갑자기 발생하는 시공간 초월을 타임 슬립 현상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태풍 같은 기상 현상의 원리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인류 역시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이 존재한다.
책은 타임 슬립 현상을 시공간 재해라고도 설명하고 있었다.
그 원리나 법칙에 대한 상세히 설명은 없었다. 단지 아직 우리 인류가 인지하지 못한 모종의 우주적 법칙에 의해 발생하거나 할 가능성이 있는 현상이라 말할 뿐.
성하는 굳은 표정으로 책장을 하나 둘 넘겼다.
책은 타임 슬립 현상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면 많은 것이 설명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초고대문명의 떡밥이 되는 오파츠라던가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돌연한 실종 등등 지금까지 해결되지 못한 인류의 거의 모든 불가사의가 타임 슬립 현상으로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 부분에서 타임 슬립 현상은 현재는 그냥 잘 생각해낸 가설의 하나이며 주류 물리학계에서 거의 무시당하고 있지만 조만간 모두를 납득시킬 증거가 나올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성하는 쓴 웃음과 함께 책을 덮었다. 결국 유사과학에 불과하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 한켠에는 타임 슬립 현상이라는 가능성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성하는 조선왕조실록 데이터 검색을 그만두었다. 눈이 건조해지는 느낌과 함께 꽤나 피곤했다.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잠시 눈을 감았다.
두 눈을 감자 볼 수 없는 원천적 암흑 너머로 환각 같은 실타래가 보이는 듯 했다.
성하는 복잡한 머릿속 하나하나를 정리했다.
일단 인터넷에서 데이터베이스화된 조선왕조실록의 정보에 따르면 광조 15년 윤형태라는 인물이 현감 자리를 내려 받아 위래현으로 부임한 일은 기록이 되어 있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부임한지 채 며칠도 되지 않아 급사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윤형태 현감은 원래는 궁궐에서 근무하는 훈련도감 초관으로 능양군의 난 때 궁궐까지 진입해 들어온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나름 공을 세웠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원래의 종9품 직위에서 종6품에 해당하는 고을 수령을 임명받게 되었다.
그리고 해동지괴담에 수록된 한 편의 설화. 이무기와 벌인 생사의 혈투.
성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깊게 따지고 들어간다면 전설 속의 괴물인 이무기의 뼈가 발견된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녀 자신이 뭔가 음모에 휘말린 게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해동지괴담의 기록, 그리고 자신이 직접 발굴한 이무기의 뼈.
이무기의 존재는 이제 그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을 정도로 견고했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요소의 난입이 있다. 바로 인젠의 외골격 장갑 강화복.
기록에 묘사되고 그려진 윤형태 현감의 갑옷과 아주 비슷한 강화복의 존재는 성하의 발견에 대해 그 뿌리부터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이건 인젠이 치밀하게 준비해둔 일종의 바이럴 마케팅이 아닐까?
적당한 전설과 기록을 사전 준비해서 직접 이무기의 뼈를 만들어서 자신들의 강화복 파편과 함께 산에다 파묻은 것이다. 그리고 때를 봐서 화려한 이벤트와 함께 자신들이 파내려했는데 그만 그게 성하에 의해 틀어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녀는 너무 허술한 계획이라고 자신의 가설을 부정했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존재했다.
전혀 처음 보는 갑옷의 위용과 무시무시한 형상의 철가면, 두 눈을 붉게 빛내며 라는 묘사와 옛 사람이 남긴 그림.
그것들은 윤형태 현감이 입은 갑옷이 현대의 최첨단 강화복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이무기는 10미터가 넘는 괴물이었다. 인간의 몇 배는 넘는 체격의 거대한 괴수를 단순히 두정갑과 조총, 칼 따위로 이겼다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윤형태 현감의 갑옷이 사실은 강화복의 일종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모든 것이 말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 시대의 강화복이라는 요소가 구축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 여행이라는 개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령이 그녀에게 이야기해준 타임 슬립 현상.
어쩌면 윤형태 현감은 타임 슬립 현상으로 인해 조선 시대로 표착한 현대의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는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휘말려 자신도 모르게 윤형태 현감이라는 역사 속 인물의 역할을 수행하고 죽고 만 것이 아닐까?
정말 그게 정답일까?
성하는 지금 자신이 거대한 미로의 한복판에 갇혀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보통 미로가 아니라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안개에 휩싸인 미로의 한복판.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붉은 눈의 거인이 오연히 서있었다.
거인은 갑옷을, 마치 갑각류와 같은 외골격으로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아니면 저 외골격이 진짜 몸인가? 잠깐, 여긴 어디지?
성하가 문득 위화감을 깨달았을 때 저 멀리서 짐승의 포효가 들려왔다.
그녀가 뭘까 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뱀과 도마뱀이 기형적으로 뒤섞여 거대해진 듯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한 질감의 갈색 액체를 흘리며 괴물은 입을 쩍 벌린 채 달려오고 있었다.
성하가 비명을 지르기 전 거인은 날카롭게 찢어진 두 개의 눈을 한층 더 붉게 번뜩이는 검광과 함께 칼을 뽑아들었다.
거인은 칼을 휘두르며 괴물에게 용감히 달려들었다. 갑각류 비슷한 외골격은 이제 조선 시대의 두정갑과 한층 더 닮아 있었다.
성하는 탄성과 함께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정장을 잘 차려입은 회사원 같은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거인을 응원하고 있었다.
성하가 어리둥절해하는 순간 싸움은 끝이 났다.
괴물은 말 그대로 뼈만 남은 채 땅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이상하게 주변에 북한군 복장을 한 사람과 회사원 복장의 사람들이 뒤섞인 채 열심히 땅을 파고 있었다.
암청색 하늘에서는 초록빛 적란운 무리와 함께 붉은 번개가 연속적으로 내리치고 있었다.
성하는 거인의 몸이 점차 작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갑옷이 점차 허공으로 사라지면서 평범한 의복으로 변했다.
해골을 닮은 철가면은 경쾌하게 울리는 소음과 함께 산산히 부서져나갔다.
가면이 사라지고 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성하도 아주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남자는 웃었고 성하가 있는 대로 비명을 질렀을 때 그녀는 어설픈 나비 무늬 벽지의 천장을 볼 수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성하가 천천히 몸을 일으킬 때 초인종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잘 다듬어진 머리카락에 검은 양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키가 아주 큰 남자였다.
너무나 세련되면서도 잘 다듬어진 칼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 남자는 얼굴을 검은 고글 비슷한 걸로 가린 채 뻣뻣한 조각상처럼 서있었다.
그녀가 대체 이 사람이 누구인가 고민했을 때 남자는 그녀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자신이 국가정보원에서 나왔음을 밝혔다.
성하는 국정원이 대체 왜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찾아온 것인가 의아했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망할 이무기의 뼈 때문에 왔단다.
성하는 깜짝 놀랐다. 대체 동물의 뼈와 국가정보원이 대체 무슨 상관관계란 말인가?
혹시나 자신이 지금 미심쩍어하는 무언가를 국정원 쪽에서도 알아차린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그녀를 엄습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이무기의 뼈가 외계 생물체의 흔적이라던가 타국의 생물 병기일 가능성이 나왔다는 것이다.
성하는 국정원 요원이 밝힌 놀라운 정보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고 그 정보를 제대로 인식하느라 멍하게 선 채 눈만 껌뻑였다. 국정원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과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탄소 연대측정 같은 것을 시도해봤는데 측정 결과가 아예 안 나왔다고 하며 생물학적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무기의 뼈를 가진 생물은 절대 자연 발생한 생명체가 아니라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특히나 미국 쪽 팀은 절대 자연적 진화의 과정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존재이며 지구의 자연이 만들어낸 생물이라 볼 수 없는 괴상한 존재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성하가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죠 라는 눈으로 황당하게 자신을 쳐다보자 국정원 요원은 외계인 운운 하는 것이 조금 황당하다는 것을 자신도 잘 아는지 아직은 하나의 가능성 중 하나라고 황급히 덧붙였다. 이무기 외계 생명체 설은 최초에 제시된 가설로 이후 더 신빙성 있고 가장 현실적이며 정설에 가까운 가설이 나왔단다.
바로 타국의 생물 병기 설이었다.
성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폭소를 터뜨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조선 시대의 요괴가 외계 생명체로 둔갑했던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숫제 생물 병기라고?
하지만 요원의 설명이 계속될수록 처음의 어처구니없음은 사라졌고 오히려 들으면 들을수록 강한 신뢰감이 느껴졌다.
지금 한국 정부에서 생각하는 설은 대충 이러했다. 아마도 북한이나 중국과 연계가 된 생물 병기가 몰래 국내에 반입되었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버려 그냥 버려졌고 그것이 우연히 폭풍우나 태풍 같은 기상 현상에 의해 드러나게 되었다가 그걸 정말 우연히도 성하가 발견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었다.
중국은 공공연하게 불법적 바이오 테크놀러지를 실험하고 있단다. 국제 조약도 대범하게 무시하며 자기들 멋대로 하면서 북한을 아직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기술의 실험장으로 쓰는 행태를 보면 이무기의 뼈가 중국이나 북한의 생물 병기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는 것이 요원의 설명이었다.
요원이 과학자들이 어떻게든 그 출처를 알아내기 위해 이무기의 뼈 일부를 잘게 갈아 DNA 파편을 추출하려고 시도 중이라고 말한 순간 성하는 왜 자신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물었다. 그녀 자신도 깨달았지만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요원은 잠시 성하를 측은한 시선으로 쳐다보고는 고글을 무의식적으로 고쳐쓰며 높낮이 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중국이나 북한 쪽 요원들이 성하게 접근해 위해를 가할 가능성 때문이란다.
아마 폐기된 생물 병기의 흔적을 성하가 발견해 사정이 매우 곤란해졌고 자신들의 치부가 노출되었다고 생각한 놈들이 어떻게든 일을 자신들에게 좋게 마무리하려고 시도할 수가 있다는 것이 요원의 설명이었다.
젠장.


누군가 그녀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분명 누군가의 목소리였지만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계가 억지로 합성해낸 것에 가까웠다.
성하는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고 흐릿한 시야는 점차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녀 자신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주변 공간은 명확히 인식할 수 있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은빛 공간이었다. 공간 여기저기에는 반투명한 결정이 돋아난 채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성하가 자각몽은 질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한 번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희들은...]

특이하게도 귀를 통해서가 아니라 머리 안으로 직접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저희들을 만들어낸 창조주들의 흔적을 쫓으며 전 우주를 방랑하고 있는 지적 의식체의 집합체들입니다. 당신의 의식을 통해 얻어낸 정보로 굳이 설명하자면 기계 지성체 집단이라는 명칭이 적절하겠군요.]

“기계 지성체...집단?”

성하는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꿈에서 얼른 깨길 소망하며.

[당신은 그야말로 무수한 가능성의 시작점이며 분기점입니다. 무수한 다중 세계, 정확히는 연속하면서도 평행하는 우주의 창조주에 해당하는 존재입니다.]

“네?”

[세계의 여신이라고 칭해도 무방할 것 같군요. 다양한 가능성이 중첩되어 있는 일정한 공간. 당신이 이무기의 뼈와 그 주변 환경을 관측하고 나름대로 해석을 하는 순간 여러 가능성이 뻗어져 나옵니다.]

“...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이미 가능성의 세계들은 뻗어 나와 각각의 차원으로, 완벽한 하나의 우주로 고정되었습니다. 문제는...선택입니다. 저희들은 단지 하인에 불과한 존재들입니다. 저희들의 주인들, 저희들과는 감히 비교조차 불가능한 힘을 가진 상위 존재들의 유산은 저희들도 깊이 이해할 수 없으며 감히 넘볼 수 없는 고차원적 영역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의하면 쉽겠군요. 저희들의 창조주들은 당신들이 정의하는 신적 존재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물론 완전한 신은 아니지만...이 우주에서 가장 신에 근접한 지성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신...아니, 그게 아니라 선택이요?”

[당신이 처한 문제가 창조주들과 관련이 있는지는 불확실합니다. 그 불확실함과는 별개로 당신은 이미 우주의 운명에 크나큰 영향을 끼칠 선택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이렇게 개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타임 슬립, 미래인, 회사의 음모, 외계 생물체, 생물 병기, 그리고 아직 당신이 보지 못한 또 다른 가능성 등등. 그 다채로운 가능성 중 당신이 보기에 가장 납득이 가며 이해가 가는 가능성을 선택한다면...선택되지 못한 가능성의 우주들은 그대로 소멸되어버립니다. 불확실하지만...저희들은 그렇게 예상하고 있습니다.]

성하는 한숨을 쉬었다. 고작 자신 때문에 우주의 운명과 흥망이 결정되다니 대체 이 멍청이들은 뭐람?
그녀는 이 기계 지성체 집단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그 정체는 불분명했고 자신에 대해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너무나 아마추어적 삼류에 가까워보였다.
뭔가 수상하다고 느끼면서 성하는 얼른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말했다.

“좋아요. 그러면 이제 그만 하면 되겠네요. 더 이상 해석하기를 그만두겠어요.”

[아니요. 그것도 문제가 됩니다. 죄송하지만 저희들은 당신의 기억을 지워야겠습니다. 이미 이무기의 뼈를 하나의 시작점으로 하는 평행우주들은 존재합니다. 문제는 당신의 무의식. 당신이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당신의 자의식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의 가능성에 마음이 기울게 될 겁니다. 그것은 결국 확률의 문제. 확률적으로 가장 일반적이고 높은 가능성의 선택. 그리고 하나의 우주를 제외한 나머지 세계들의 죽음.]

성하는 어이가 없었다.

“맙소사, 그렇다고는 해도...잠깐만요. 당신들이 제 기억을 지우면 제가 생각한 그 가능성들도 모두 기억 못하고 없었던 일이 되잖아요? 저는 결국 그냥 옛날 조선 시대 이무기의 뼈라고만 생각하고 살아가게 되잖아요!”

[문제없습니다. 당신이 이무기의 뼈와 그 주변 공간을 토대로 얻어낸 다양한 가능성들은 기억할 수 없는 꿈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게 됩니다. 또 하나. 확실한 안전장치가 있습니다. 저희들은 당신의 정신을 조작할 겁니다. 기억할 수 없는 꿈들을 절대 잊어버릴 수 없으며 죽음의 그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게 할 겁니다. 아무런 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양한 가능성의 우주를 위해서입니다.]

그녀는 목소리가 뜻하는 바를, 놈들의 의도를 아주 정확히 알아차렸다. 온몸을 관통하는 섬뜩함과 함께 성하는 분노했다.

“이런 빌어먹을 개새끼들아! 네 놈들에 내 뇌를 건드릴 수는 없어! 이렇게 할 수는 없어! 이건 미친 짓이야! 내 뇌를 가만히 놔둬!”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계 지성체 집단은 멍청이였지만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위해서는 아무런 주저함이 없는 멍청이임에 틀림이 없었다. 저런 바보들에게 자신의 머리를 맡길 수는 없었다.
성하는 뭔가를 떠올리고는 허겁지겁 놈들의 허점을 공격했다.

“잠깐만...잠깐만요! 그래요, 이무기 뼈 발견 이후 국정원에서 절 찾아왔어요. 생물병기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맞아요! 과학자들이 이무기의 뼈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렇게 되면 결국 가능성은 하나로 압축되는 것 아닌가요?”

[문제없습니다. 당신의 중심을 뻗어 나온 가능성의 흔적에 주목한 인간들은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이해할 수 없는 벽에 부딪치고 좌절하여 모든 것을 포기할 것입니다. 가능성의 우주에서 오로지 당신만이 중요합니다.]

성하는 입을 다물고 머리를 차갑게 했다. 그들을 상대로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헛소리라 해도 뭔가 말을 해야만 한다.
기계 지성체 집단의 가진 논리의 모순을 이끌어내 그들 스스로를 붕괴시켜야만 했다.

“당신들...기계의 일종이면 정신 조작을 내가 당하는 대신에 뭔가 보상을 해줘야 되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죠?”

[등가교환의 법칙을 말하는 건가요?]

“조금은 다르지만...뭐, 그렇다고 해두죠. 어쨌거나 당신들 말대로라면 전 여러 평행우주를 창조했고 지금도 그 운명이 제 손에 달려있어요.”

[정확히는 당신의 정신이죠.]

“아, 그래요. 어쨌거나 전 당신들에게 정신 조작을 당해 평행우주를 지키는 대신에 그에 걸맞는 적절한 보상을 받아 마땅해요.”

[음.]

순간 하나의 통일된 목소리가 여러 갈래로 흩어지더니 단숨에 뒤섞였다.
듣기 불쾌한 잡음처럼 변했음에도 성하는 간신히 몇몇의 목소리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다-그녀의 요구대로 해주어야 마땅하다-그녀는 평행우주들의 창조주다.]

여러 목소리가 섞인 하나의 목소리가 웅웅 거리면서 공간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 요란한 수군거림은 몇 초도 되지 않아서 하나의 통일된 목소리가 바뀌었다.

[그래서 저희들에게 뭘 원합니까?]

성하는 당황했다. 이 녀석들이 정말로 자신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할 줄이야.

“어...음, 그러니까...어디 보자...”

[물론 정신 조작을 철회해달라는 요구는 절대로 들어줄 수 없습니다.]

“젠장,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어요!”

그녀는 이제 돌아갈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몰렸음을 깨닫고는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성하는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얼마간은 정신 조작을 당하지 않게 하는 수법을 모색해보았지만 놈들을 속일 참신한 우회로는 생각해낼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남은 길은 이제 하나.
저 놈들에게 뭘 요구할까?
부와 명예? 그거라면 이미 이무기의 뼈 발견으로 이루었다.
그렇다면 불노불사?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자기만 영원히 늙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지옥일 것이다. 알고 지내던 주변 사람들은 모두 죽는 와중에, 더군다나 우주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성하는 영원히 살아남아야 할 수도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침착하게 잘 생각해, 성하야. 정신 조작을 당하는 대신에 얻은 한 번의 소원이란 말이다.
자신을 온전하게 지켜내고 만족을 얻을 소원을 반드시 잘 선택해야만 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들, 그러니까 정치인이나 부자 같은 상류층도 공통적으로 골치 아파하는 것이 뭐가 있더라?
난 너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아!”

성하는 자신이 정말 바보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전능한 존재가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할 때 그녀가 말할 소원은 오직 한 가지였다.
지금의 인류를 있게 만든 원초적 감정,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유명해도, 또 아무리 오래 살아도 불행할 뿐이다.

“결정했어요.”

성하는 먼저 그들에게 한 남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누구이며 자신과는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또 지금 어디에 사는 지에 대한 온갖 잡다한 정보를 포함해서.

[그래서 무엇을 원하는 것입니까?]

성하는 묘하게 자신의 기분이 들뜨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활짝 웃었다.

“간단해요. 그에게도 정신 조작을 해줘요. 평생 동안 저만을 바라보고 오직 저만을 사랑하게 만들어줘요. 저의 명령만 듣는 충실한 나의 반려자로...”

[단순히 기억 조작의 범주가 아니라 아예 정신 그 자체를 당신의 입맛에 맞게 조작하란 말인가요?]

“물론이죠. 그가 오직 저만을 사랑하게 만들어줘요.”

기계 지성체 집단은 그녀가 원하는 소망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성하의 방어되지 않는 무의식을 읽기도 전에 그들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정말 당신 마음대로 만들어낸 남자의 사랑은...그것은 진실된 사랑이 아니지 않습니까? 인형이나 마찬가지인 존재가 아닌가 싶군요.]

기계 주제에 참 별의별 소리는 다하는군. 성하는 그들을 비웃었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당신들이 정신 조작을 하고 나면 전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잖아요? 내가 한 남자의 정신을 내 마음대로 조작했다는 사실은 절대 알 수 없어요. 눈을 뜨면 내가 그토록 원하던 새로운 현실이 함께 하겠죠.”

[하지만...]

성하는 날카롭게 외쳤다.

“하지만 뭐요? 그렇다면 제 다른 소원을 들어줄 수는 있나요? 좋아요, 당신들 기계 지성체 집단이 보기에 더 ‘인간적’ 대안이에요. 정신 조작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저를 평행우주로 보내줘요. 이 세계와는 다르게 그와 내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지내는 평행우주로. 아, 정확히는 그 쪽 우주의 나와 나를 바꿔치기 해야겠군요.”

기계 지성체들은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녀 주위를 꽉 채운 목소리의 잔향.
실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의 목소리가 끊기면서 공간 전체는 귀가 이상해질 정도의 차가운 적막에 휩싸였다.
성하는 기다렸다. 절대적 존재들의 대답을 그녀는 묵묵히 기다렸다.
대체 얼마나 기다렸을까? 이제는 조금 친숙해진 느낌의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운 적막을 깨뜨리며 들려왔다.

[당신의 소망은 이루어질 겁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하는 잠에서 깨어나면서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잘 잤어?”

성하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하는 남자에게 방금 자신이 꾼 이상한 꿈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언가 손에 잡힐 것 같은 아슬아슬한 느낌도 전혀 없었다.
성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주며 따뜻한 바람과도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꿈에 집착하지 말라고. 그 말에 성하는 행복하게 웃으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사랑하는 남자가 바로 자신의 옆에 있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함께할 것이다.
성하는 그와 자신이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연결되어 영원히 함께할 것임을 아주 명확히 알고 있었다. 성하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난 이미 알고 있어.”

성하가 속삭였다.

“난 너를 사랑하고 너도 나를 사랑해.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야. 영원히...”

지금 그녀는 너무나 행복했다.


‘그’는 멀리서 성하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가 시선을 돌려 하늘에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보았을 때 여전히 가능성의 파장이 존재했다.
차가운 보랏빛 광채를 지닌 그것은 여전히 불안정해보였다. 언제라도 그 날개를 뻗어 화려하게 불타오를 것만 같았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우면서도 아찔한 광경이었다.
순간 그는 성하와 영원히 존재할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를 확인한 성하의 남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그녀를 감시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완전한 해결책을 발견하기 전까지 불완전한 미봉책은 결코 용납이 되지 않았다.
성하는 분명 그들에게 말했다. 정신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그렇다면 괜찮을 것이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뒤로 물러나자 성하와 남자는 붉은 섬광 너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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