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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글레바력 13세기

2011.09.26 00:5709.26




신과 같은 힘을 휘두르던 이들이 있었다. 당연하다. 그들은 신이었으니까. 신들은 하늘을 날며 산을 옮기고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꾸며 영원을 살아갔다. 텅 빈 하늘을 날아, 신들은 글레바에 당도했다.
신들이 처음 만든 것은 풀과 나무였다. 풀과 나무가 번성해 온 땅을 가득 메웠다. 신들은 그 모습을 보고 즐거워했다. 풀색 대지 위에서 그들은 인간이 되었다.
산을 옮기고 모습을 바꾸며 영원히 살던 신들은 산 위를 거닐며 한 가지 모습으로 죽어가는 인간이 되었다. 신들은 신들을 사랑했으므로 인간이 된 신들을 사랑했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을 사랑할 수 없었다. 인간들은 슬픔을 배웠다.
다시 신이 된 인간이 있었다. 신은 인간들을 보살폈다.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는 인간은 신을 사랑할 수도 없었다. 신은 슬퍼하며 하늘에 불을 피우고 몸을 던졌다. 불은 반 년 동안 맹렬히 신을 태우고 남은 반 년 동안 서서히 꺼져갔다. 어두운 하늘에 태양이 생긴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태양이 뜨겁게 불타는 여름이면 신의 죽음을 애도하고, 태양의 불길이 사그러드는 겨울이 되면 태양에 신의 주검을 돌려받기를 애원하는 것 또한 바로 이 때문이다.

신이 떠나간 글레바 위에서 인간들은 혼란에 빠졌다. 인간은 신을 잃은 뒤에야 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신을 죽인 자들은 그 죄로 인간이 내린 벌을 받고 죽었다. 신을 잃은 슬픔을 주체할 수 없던 인간들은 살신자를 벌한 뒤 벌을 주고받았다. 인간들이 죽어갔다. 인간들은 신을 사랑했지만 신이 더 이상 없었으므로 신 대신 인간을 사랑했다. 인간들은 신이 아닌 인간을 주인으로 섬겼다. 인간들의 주인이 된 인간들을 인간들은 영주라고 불렀다. 영주들은 서로 싸웠다.
신을 사랑한 인간 중 신을 특히 사랑한 영웅이 있었다. 영웅은 신을 사랑했으므로 신을 닮은 인간을 사랑했다. 영웅은 영주들의 싸움을 막으려 했지만 아무도 죽지 않고 싸움을 멈출 수는 없었다. 영웅은 슬퍼하며 싸움을 멈추지 않는 영주들을 죽였다. 그렇게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영웅은 죽었다. 영웅이 죽은 뒤에 글레바는 전보다도 더 혼란스러웠다.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신이 다시 돌아와야 했다. 수도사들은 신의 유물을 찾아 온 글레바를 헤집었다. 영주들도 신이 돌아오기를 바랬으므로 수도사들은 영주들에게 크게 도움을 받았다.
수도사들은 영주들의 도움을 받아 신의 유물을 하나 둘씩 찾아냈다.



젱거빙얀 유적지 안에서 라일라는 생각했다. 유적지 안으로 들어온지 사흘, 유적지 안은 한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했지만 느낌상 아마 이틀 정도는 지난 것 같았다. 처음에는 창을 든 병사 열 명과 인부 열 명, 동력장갑으로 무장한 영주의 기사까지 합해 모두 스물 두 명의 탐사대였다. 하지만 어제, 그러니까 라일라가 느끼기로 어제 쯤 되는 시간에, 탐험대는 유적지의 수호자들과 조우했다. 놀란 기사가 수호자 중 한 놈을 공격한 탓에 이제는 인부는 한 명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병사도 남은 건 둘 뿐이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수호자가 탐사대를 공격하자 병사들이 저희끼리 놀라 허공에 창을 쏘아댔고, 꽉 막힌 유적지 안에서 천둥처럼 크게 울려대는 창소리에 놀라 병사들은 서로를, 그리고 인부들을 쏘아댔다.
스물 두 명의 탐사대는 네 명으로 줄었다. 그리고 자기 앞에 누운 병사의 눈을 감겨주며 라일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호자에게 깊은 상처를 입은 병사가 죽어, 이제는 세 명이다. 라일라의 한숨 소리에 병사가 깜짝 놀라 철커덕 소리를 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창으로 라일라를 겨눴을 것이다. 기사, 이비너스가 소리를 죽여가며 병사에게 으르렁댔다.
“정신 차려, 멍청아. 수호자가 아니야. 수녀님을 쏘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이비너스의 말을 들은 병사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이비너스가 어둠 속에서도 병사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내고는 그 병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정간은 항상 안전 위치에 두라고 내가 말 했을텐데.”
기사, 이비너스는 그렇게 말하고 병사의 창 방아쇠울 위에 달린 조정간을 조작했다. 라일라는 이비너스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창의 조정간을 더듬거리는 시간도 없이 조작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기사님은 벌써 수술을 받은 모양이군요.”
이비너스는 수술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수술? 수술? 하고 몇 번 중얼거리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는지 아아, 서임 말인가. 하고 중얼거렸다.
“뭐, 그렇습니다..”
라일라는 어둠 때문에 이비너스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틀림없이 이죽거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이비너스의 말이 이어졌다.
“명색이 기사니까 말입니다. 2년 전에 카리아 북쪽 던전에서 서임을 받았죠.”
던전이라. 라일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긋지긋했다. 중요한 고고학 유적지를 지하감옥이라고 딱 잘라서 말해버리다니. 라일라는 야만인들이 미치도록 싫었다. 순탄할 수 있었던 발굴조사였는데, 기사랍시고 거들먹거리는 멍청이가 경비로봇-야만인들이 수호자라고 부르는-을 멋대로 공격한 탓에 유적지 경비 시스템은 라일라 외 야만인들을 적으로 인식하고 말았다. 야만인과 함께 발굴조사를 오면 언제나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영주’라고 불리는 야만인 두목들이 대학연합의 뒤를 봐 주고 있지만 않았다면 야만인들과 유적지 발굴조사를 다닐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방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창을 비껴들고 바닥에 주저앉은 병사에 의해 깨졌다.
“신의 손길이 닿은 곳에 함부로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요. 신께서 남기신 물건들은 우리같은 인간들이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닥쳐, 아트렉스.”
병사가 공포에 질려 중얼거리자 이비너스가 한 말이다. 그리고 다시 방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 길어지고 점점 더 어색해지자 이비너스가 라일라에게 질문을 던졌다.
“수녀님, 여기 던전을 좀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수녀 좋아하네. 나는 고고학 연구원이야. 그리고 던전이 아니라 젱거빙얀 유적지라고, 이 야만인아!’
라일라는 기사에게 그렇게 외쳐 주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연합의 규칙상 야만인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절대 금지였다. 영주들은 대학연합이 일반인들에게 신의 말씀을 전하는 수도원으로만 알려지기를 원했다. 라일라는 이 야만인 무리의 틈에 있는 동안은 뉴햄프턴 대학의 고고학도 라일라 연구원이 아닌 뉴햄프턴 수도원의 라일라 수녀여야 했다. 라일라는 속에서 열이 뻗치는 걸 겨우 참아내며 이비너스에게 대답했다.
“기사님이 서임을 받은 카리아 북쪽의 던전보다 백 년 정도 오래 된 곳이에요. 그리고-”
그 말에 이비너스의 눈이 반짝였다.
“옛날에 ‘병원’으로 쓰이던 곳이구요.”
“호스피탈? 신전 구호소요?”
“대충 비슷하다고 해 두죠.”
라일라의 말에 이비너스는 허탈해 했다. 라일라는 기사의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잔뜩 찌푸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나다를까 이비너스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구호소란 말입니까? 거지 소굴요? 겨우 구호소 하나 탐험하자고 스무 명이 죽다니!”
이비너스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젠장. 영주님은 여기를 확보하면 기사 열 명 쯤은 어렵지 않게 확보할 수 있을 줄 알고 계시단 말이오! 당신들도 우리 영주님을 그렇게 꾀어냈잖소!”
“진정하시죠.”
“진정하라고? 다시 말하지. 거지 소굴 탐험하자고 스무 명을 죽여? 신의 사랑의 말씀을 퍼뜨리는 자들이,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그런 소리를 하고 있나?!”
“오해하고 계시네요.”
라일라는 그렇게 말하며 이비너스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이비너스는 듣지 않았다. 이비너스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소리 좀 죽여요. 수호자한테 발견될걸요?”
라일라가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호자가 그 소리를 듣고 그들이 있는 곳을 찾아낼까봐 공포에 질려있던 병사는 라일라가 한 말이 고마웠다. 이비너스가 진정을 찾고 입을 다물었다. 이비너스에게 설명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고함 소리가 멈추자 라일라는 입을 열었다.
“내가 실수를 했네요. ‘병원’이라는 건, 신성어에요. 우리 말로 하면 의술의 신전이고. ‘병원’이라는 말의 뜻이 변해서 신전 구호소로 바뀐 거구요.”
라일라의 설명에 이비너스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가 입을 우물거렸다. 잠시 뒤 이비너스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라일라에게는 이비너스의 표정이나 입모양이나 고개를 끄덕인 것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비너스가 말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시지 그랬습니까. ···의술의 신전이란 말이죠?”
이비너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또다시 생각에 잠겨서 입을 우물대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이비너스가 갑자기 탐사대 세 명이 숨어있는 방의 출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아마 이 안에는 당신 영주가 바라는 수술장치··· 아, 서임의 관이라고 하나요? 그게 적어도 열 개는···.”
이비너스는 라일라를 향해 왼손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고 오른손을 휙휙 내저었다. 라일라의 눈에 보일 리가 없었다. 이비너스는 한참 손을 흔들어도 라일라가 말을 멈추지 않자 그제서야 조용히 라일라를 불렀다. 조용하세요. 뭔가가 저 밖에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문을 향해 동력장갑의 검지손가락을 겨눴다. 창을 꼬나쥔 병사에게 눈짓을 몇 번 하다가 다시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병사를 조그만 소리로 불렀다. 문 앞에 가서, 내가 신호하면 문 열어. 병사는 어둠을 믿고 인상을 팍 쓰면서 씨발놈, 기사면 다야? 하고 중얼거렸지만 이비너스가 뭐라고 하는지 다 들린다. 하고 으르렁대자 뜨악해서는 문 앞으로 발소리를 죽이고 걸어갔다. 이비너스가 인상을 쓴 채로 병사에게 말했다.
“열어.”
쿠당탕 하는 소리가 나고 문이 활짝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이비너스는 동력장갑을 조작했다. 자외선 대역의 레이저가 문 너머를 향해 발사되었다. 퍽 하고 피가 튀고 곧이어 동력장갑의 냉각기가 가동되며 위잉 하는 소리가 났다. 이비너스는 문 밖으로 ‘죽음의 손가락’에 맞은 쥐새끼를 슬쩍 살펴보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냥 쥐새끼였군요. 별거 아니었네요.”
문가에 서 있던 병사를 향해 문을 닫으라고 손짓하다가 병사는 알아볼 수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병사를 부르며 뒤로 돌아서던 이비너스의 동공이 확장됐다. 병사의 머리가 퍽 하고 터져나간 순간 이비너스는 동력장갑을 레이저를 쏜 경비로봇에게 휘둘렀다. 동력장갑의 센서가 가속을 감지하자 동력장갑의 인공지능이 이동 경로를 계산했고, 이동 경로에 놓인 물질의 재질을 분석했다. 인공지능은 표적의 고유진동수를 계산하고 그에 맞춰 동력장갑의 외피를 진동시켰다. 경비로봇의 센서와 제어장치가 몰려있는 머리라고 부를 만한 부분이 깨지며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렸다. 이비너스는 라일라를 어깨에 둘러메고 방을 뛰쳐나왔다. 라일라가 물었다.
“뭐, 뭐죠? 어떻게-”
이비너스가 라일라의 말을 끊고 대답했다.
“수호자였어요. 아트렉스가 죽었구요.”
이젠 탐사대는 단 둘만이 남았다.

라일라를 들쳐업은 이비너스는 또 다른 방 하나로 들어가 문을 닫은 후 라일라를 내려놓았다. 다행히 도중에 다른 경비로봇에게 쫓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젠장. 여긴 어디에요?”
“수녀님도 욕을 할 줄 아시는군요.”
이비너스가 대답했다. 라일라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래요. 그게 그렇게 신기해요? 이 똥구멍에다 하는 방구석이 어디냐구요?”
“수녀님이 아셔야죠. 저는 모릅니다. 정신없이 뛰다 보니 이 방이네요.”
라일라는 속으로 그 수녀 소리 좀 그만 하라고 생각했다.
“뭐가 보여야 어딘지 알든가 하죠?”
이비너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라일라에게 방의 모습을 설명했다. 라일라에게는 아마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라일라는 신의 유물에 대해 알고 있지만 이비너스는 모른다. 이비너스의 설명은 아마 라일라에게는 동력장갑을 보고 ‘손이 저렇게 생겼는데 코는 어떻게 후빌까’ 하고 말하는 노예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이비너스는 설명했다.
“다른 방들하곤 다릅니다. 침대가 없고··· 대신 의자가 몇 개 있군요. 벽을 향해 고정돼 있습니다.”
“책상 같은 것도 없나요?”
라일라의 물음에 이비너스가 대답했다.
“네, 없습니다. 의자는 벽을 향하고 있어요. 수도사들의 징벌방 같은데요?”
이 머저리 같으니라고. 병원에 징벌방이 왜 있어? 야만인 종자는 생각하는 게 그 정도지? 라일라는 이비너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물론 속으로. 입 밖으로 꺼냈으면 다 하느라 10분은 걸렸을 정도의 욕을 퍼부어 주자 시간이 1분정도 지났다. 라일라는 다시 물었다.
“벽은 어떻게 생겼나요?”
“음··· 그게···.”
이비너스는 벽의 모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우물쭈물하자 라일라가 재촉했다.
“어떻게 생겼냐니까요?”
“그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비너스는 그렇게 운을 떼고 설명을 시작했다.
“부조 같은 게 새겨져 있어요. 딱히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온통 네모진 것들 뿐이거든요. 여기저기에 구슬 같은 것도 몇 개 박혀있고···. 팔을 걸쳐 놓는 자리, 그러니까 의자 팔걸이 말고, 벽에 튀어나와 있는 부분에는···.”
라일라는 이비너스의 설명대로 머릿속에 방의 풍경을 그려보았다. 라일라는 이비너스의 말을 끊었다. 용케도 여길 찾아 들어왔구나 싶었다.
“아, 알겠어요. 가로 세로 반 인치 정도 되는 사각형들이 잔뜩 있겠죠.”
“다행이네요. 제 설명이 적당한 것 같으니 말입니다.”
“아뇨. 기사님 설명은 병신같았는데 내가 잘 이해한 거죠.”
이비너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력장갑에서 끼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아시겠습니까?”
“사바콘 같네요.”
“사바콘?”
이비너스가 생소한 단어를 되뇌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라일라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 던전의 모든 것을 관리하는 장소를 말하는 거에요. 불도 켤 수 있고, 경-수호자들에게 우리가 적이 아니라고 인식하게 할 수도 있고, 불도 켤 수··· 아, 아까 했구나. ···뭐, 적어도 여기 구조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 알 수 있겠죠.”
라일라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비너스 쪽으로 걸어가다가 전선에 발이 걸려 앞으로 넘어지며 우당탕 소리를 냈다.
“괜찮으십니까?”
예의를 차리는 말이었다. 라일라를 붙잡아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라일라는 고개를 숙인 채로 얼굴을 팍 찌푸리고 말했다.
“괜찮아요.”
라일라는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손전등을 꺼냈다.
“여길 좀 더 조사하려면 불을 켜야 할 텐데··· 문 뒤에 뭐, 묵직한 걸 좀 쌓아 주시겠어요?”
“짐은 왜요?”
라일라는 한 손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
“불이 켜진 걸 보고 수···호자들이 몰려들지도 모르니까요.”
이비너스는 주위를 몇 번 살폈다. 하지만 문 뒤를 받쳐놓을 만한 묵직하고 커다란 물건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문 뒤에 받쳐놓을 만한 건 없습니다.”
이비너스는 그렇게 말한 뒤 덧붙였다.
“그리고··· 문을 막는다고 하더라도, 횃불이 없을 텐데요?”
라일라는 말없이 오른손에 든 손전등을 왼손에 탁 탁 하고 두들겼다. 하지만 이비너스는 라일라의 몸짓을 이해하지 못했다. 들숨을 열 번 정도 쉬었을 시간이 지난 뒤 라일라가 말했다.
“다른 연···.” 연구원이라고 말할 뻔 했다. “수도사···들이 이런 걸 쓰는 건 못 보셨어요?”
라일라는 왼손으로 손전등 대가리 부분을 가리고 손전등 스위치를 켰다. LED가 낸 창백한 빛이 라일라의 손등을 파랗게 물들였다. 라일라는 이비너스가 그걸 제대로 봤기를 바라며, 그리고 손전등 불빛이 방 밖에서 보이지 않았기를 바라며 손전등을 껐다. 이비너스는 손전등 불빛을 보고 놀라서 무릎을 꿇고 기도문을 외우려 했지만 불빛이 너무 빨리 꺼졌다.
“신의 유물을 그렇게 망령되이 써도 되는 겁니까?”
이비너스가 물었다. 라일라는 자신의 실수에 당황했다. 이 자는 기사이긴 하지만 야만인이고, 야만인이 신의 유물이라고 부르는 문명의 이기들은 대학연합의 방침 상 야만인 앞에서 간단하게 사용할 물건이 아니었다. 라일라는 변명을 떠올렸다.
“지금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는 이래도 봐 주실 거에요.”
대학연합 총장이 말이죠. 라일라는 일부러 주어를 생략했다. 이비너스는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납득했다. 신의 자식들이 아닌가? 신께서도 우리가 죽기보다는 무례를 범하더라도 살아남기를 바라실 것이다. 이비너스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불을 밝힐 수는 있다지만, 문을 막을 물건이 없다는 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사님이 문을 막고 계시는 건 어때요?”
이비너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라일라는 이비너스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농담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느낄 수는 있었다. 라일라는 농담이에요. 하고 손을 휘휘 젓고 말했다.
“주변에 천 같은 거 혹시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그럼 달리 쓸만한 건요?”
“어디에 쓰시려구요?”
“문틈에 끼워서 불빛이 새는 거라도 막아야죠. 문을 막을 순 없으니까.”
라일라의 말에 이비너스는 주변을 다시 살폈다.
“글쎄요···. 벽 쪽에··· 노끈보다는 굵고 밧줄보다는 가는 끈들이 벽에 붙어 있습니다. 그걸 뜯어서 문틈을 막을까요?”
“아뇨, 아뇨. 그걸 함부로 뜯으면 사바콘을 작동시킬 수 없어요. 다른 건요?”
“제 생각엔, 쓸모있는 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비너스의 말에 라일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는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이젠 반쯤 진담으로 얘기할게요. 기사님이 문 막고 좀 버텨 주시겠어요?”
라일라의 말에 이비너스도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요. 얼마나 걸립니까?”
“아무리 빨라도 10분, 길면 몇 시간이 걸릴지 몰라요.”
“몇 시간요?”
이비너스가 당황하며 물었다.
“아, 정확히 몇 시간이 걸리냐고 물어본 건 아닙니다. 그렇게 오래 걸린다구요?”
“네. 그렇게 오래 걸려요. 그러니까 문 막고 신호 주세요. 한시라도 빨리 처리해야 하니까요.”
이비너스는 문 앞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문을 계속 막고 서 있는 건 우스운 일일 것 같았다. 라일라에게 조그만 소리로 그냥 옷으로 문 틈을 가리겠다고 알리자 라일라도 그러라고 말했다. 옷을 벗자 이비너스의 울뚝불뚝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 옷으로 몬 틈을 막았다. 덩치가 커서 옷도 컸지만 문은 더 컸다. 이비너스는 옷을 조각조각 찢어서 여기저기에 끼웠다. 그리고 나서 라일라에게 신호를 보냈다.
“다 됐습니다.”
이비너스의 신호를 들은 라일라가 손전등을 켜려다 멈칫했다. ‘젠장. 더러운 야만인 종자 같으니라구.’ 라일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기도문을 외웠다. 속으로는 욕설을 쏟아내면서도 기도하는 품새는 제법 경건했다. 이비너스도 라일라를 따라 중얼거리며 기도문을 외웠다. 기도문을 다 외운 라일라는 손전등을 켰다. 방 안이 환하게 밝아지자 라일라를 향해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이비너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됐어요. 일어나세요. 위급상황인데 격식 다 따지다가 죽겠네요.”
라일라는 그렇게 말하고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보조발전기와 직접 연결되어 있던 수백 년 묵은 컴퓨터가 켜지고 콘솔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방 안의 조명이 켜진 것은 물론이다. 라일라는 콘솔 중 한 곳에 앉아서 컴퓨터를 조작했다.
이비너스는 컴퓨터를 조작하는 라일라를 보고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비너스는 신앙심이 깊은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라일라는 수녀이면서도 파격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신앙심이 깊고 얕고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신앙심이 없는 것 같았다. 신의 유적에 들어와서 유적 안의 물건들을 거침없이 만져대는가 하면 신의 유물을 쓰면서도 기도문 한 줄 외지를 않았다. 이러니 라일라가 수녀가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이비너스는 고개를 몇 번 휘저어 그런 생각을 떨쳐버렸다. 라일라가 정말로 수녀가 맞든 아니든 적어도 던전 탐사에 익숙한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이제 수호자들의 공격을 받을 일도 없을 테고, 던전의 구조까지 파악하고 나면 이비너스는 손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더 강력한 서임의 관이 있다면 다시 서임을 받아 더 강력한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 던전에는 열 명이나 되는 기사 서임을 줄 시설이 있을 거라고 라일라도 말하지 않았던가. 던전을 탐사한 공으로 귀환하고 나면 이비너스는 지금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이었다.
이비너스가 거기까지 생각하자 몇 분 정도 키보드를 두들기던 라일라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비너스가 라일라를 보고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수녀님?”
“대체 이놈들이 뭐라고 하는지를 모르겠네요.”
“무슨 뜻이죠?”
라일라는 이비너스가 알아들을 수 있을만한 야만적인 단어를 골라가며 지금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까지 조작한 건 신탁을 받는 창이고, 그 신탁이 저기 빛나는 창문, 이비너스가 부조라고 묘사한 곳에 신성어로 새겨진다. 그런데 창문에 떠오른 신탁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비너스는 의심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수녀님은 신성어를 모르십니까?”
“신성어도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에요.”
라일라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의자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들겼다. 빌어먹을 독자표준. 갈라파고스에 갇혀서 이구아나 똥이나 쳐먹을 놈들. 라일라는 결국 경비로봇 제어는 포기하고 병원 구조만 확인하기로 했다. 그것만 확인하기도 쉽지가 않았다. 한참동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린 다음에야 라일라는 병원 지도를 찾을 수 있었다. 라일라는 이비너스를 불렀다.
“이게 지도에요.”
꼬부랑 글자가 약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꼬부랑 글자 밑에는 조그맣게 알파벳도 달려 있었다. 라일라는 알파벳을 보고 병원 구조를 대충 설명했다. 중앙 통로와 연구실로 가는 길을 설명해 줬다. 경비로봇의 제어를 빼앗을 수 없었다는 말도 야만인이 알아들을 수 있게끔 설명했다.
“그럼 가죠.”
라일라가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었다. 사바콘의 보조동력이 병원 전체에 연결되어 있었던 건지, 아니면 사바콘을 통해 병원 전체의 보조동력을 조정할 수 있는 건지 사바콘 밖 복도에도 어슴푸레하나마 비상등과 비상조명이 켜져 있었다. 라일라가 방 문을 열고 걸어나가자 이비너스는 라일라를 붙잡고 말했다.
“그렇게 당당하게 다니지 마세요. 수호자는 아직도 우릴 공격할 거라면서요?”
라일라는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아, 그렇죠. 불이 켜지니까 왠지 안심이 돼서 그랬나봐요.”
라일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비너스의 뒤에 숨었다. 이비너스는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갔다.
꽤 오랫동안 걷자 갈림길이 몇 번 나왔다. 라일라가 왼쪽, 오른쪽, 직진 등 방향을 지시했다. 라일라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며 이비너스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라일라가 정말 언뜻 보여준 약도였지만 라일라가 향하는 방향이 서임의 관이 있는 쪽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비너스는 라일라에게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당연히 연구실이죠.”
라일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이비너스는 라일라의 말에 반발했다.
“뭐요? 서임의 관이 아니라?”
“왜요?”
“수호자들은 아직도 우리를 공격할 거라고 했잖소? 당연히 서임의 관이 있는 곳으로 먼저 가야지?”
이비너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라일라에게 설명했다. 수호자들이 아직도 큰 위협인 이상 그것들을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비너스의 능력으로는 무리일 것 같다. 라일라가 말했다.
“그러니까 연구실로 가야 된다는 거에요.”
라일라의 설명은 이랬다. 애초에 이 던전-라일라는 던전이라고 말하면서 주저했다-의 탐사 목적은 연구 성과 확인이다. 서임의 관을 확보하는 건 연구 성과를 확보하고 빠져나간 뒤에도 할 수 있다. 게다가 다시 서임을 받는다고 해서 더 강해진다는 보장도 없는데다가 던전의 규모로 보아 이곳에는 수호자들이 앞으로 백 개는 더 있을텐데, 어지간히 강해져서는 그 수호자들을 모두 무찌를 수는 없다. 그리고 던전-물론, 이번에도 주저했다-탐사의 주 목적은 수도원이 연구자료를 확보하는 거지 서임의 관을 확보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환기시켰다.
라일라의 설명을 들은 이비너스가 말했다.
“이 던전이 카리아 던전보다 더 오래됐다고 했지. 맞소?”
“네.”
“그렇다면 답은 당연히 하나밖에 없소. 서임의 관이 있는 곳으로 갑시다.”
라일라는 다시 서임을 받는 것과 이곳, 젱거빙얀 유적지가 카리아 유구보다 오래됐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잠시 생각했다. 해답을 얻은 라일라는 야만인 기사에게 측은함을 느꼈다. ‘몰락의 시대니까. 오래된 것일수록 더 강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 테지.’ 라일라는 오래된 수술장치를 쓴다고 더 강력한 수술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을 짚어주려고 입을 열었다.
“아뇨,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하지만 이비너스는 라일라의 말을 듣지 않고 멱살을 잡았다. 잔뜩 화가 난 이비너스의 얼굴은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반대쪽 손의 동력장갑의 검지손가락을 라일라의 머리에 겨누기까지 했다. 이비너스가 라일라에게 으르렁댔다.
“수도원이 우리 기사들을 싫어하는 건 잘 알고 있어. 더 잘 죽이는 것만 찾는 걸 싫어하는 것도 이해는 된단 말이지. 평화사랑, 정말 아름다워.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평화사랑이냐?”
“오해에요. 설명을-”
이비너스는 동력장갑의 검지로 라일라의 머리를 더욱 세게 짓누르며 라일라의 말을 끊었다.
“닥쳐. 서임의 관이 있는 곳으로 간다. 죽기 싫으면 잠자코 안내해서, 서임식을 집전해.”
이비너스는 그렇게 말하며 라일라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라일라는 생각했다. 이비너스는 이 유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수술장치가 있는 곳에 이비너스가 도착하더라도 라일라가 없으면 수술장치를 가동시킬 수 없다. 이비너스는 라일라를 쏠 수 없다. 강하게 나갈까? 그렇지 않았다. 라일라는 생각을 수정했다. 문명인이라면 쏘지 않겠지만, 이 자는 야만인이다. 야만인 중에서도 사람 죽이는 걸 일로 삼는 기사다. 반발하면 정말로 쏴 죽일지도 모른다. 라일라는 이비너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라일라는 왔던 길을 돌아서 수술실로 향했다. 타박. 타박. 쿵. 쿵. 라일라와 이비너스의 발소리가 어슴푸레한 조명이 깔린 병원 안에 울렸다. 타박. 타박. 쿵. 쿵. 왼쪽요. 직진이에요. 이 계단에서 위층으로요. 타박. 타박. 쿵. 쿵. 뚜벅. 뚜벅. 이비너스가 멈췄다.
“멈춰 보세요.”
“네?”
라일라가 발걸음을 멈췄다. 왜 멈췄는지 묻는 라일라의 말에 이비너스는 조용히 동력장갑의 검지를 입 앞에 가져갔다. 뚜벅. 뚜벅.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라일라와 이비너스는 가만히 서 있었으니 그 둘이 내는 소리는 아니었다. 라일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젠장! 하는 소리를 내뱉고는 이비너스가 라일라를 들쳐메려 했지만 라일라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망할! 도망가겠다는 거냐?!”
라일라가 달리면서 대답했다.
“도망 안 쳐요. 나 업고서 싸우겠다는 거에요?”
“당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내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으니까 걱정 마요!”
달리면서 말하는데도 라일라는 호흡이 가빠지지 않았다. 이비너스는 놀랐다. 수도원에 쳐박혀 있어 허약할 줄 알았는데 라일라는 제법 빠르게 잘 달렸다. 이비너스가 라일라에게 외쳤다.
“엎드려요!”
라일라의 반응은 빨랐다. 라일라가 엎드리자 이비너스가 왼손 동력장갑의 검지손가락을 내밀고 죽음의 손가락을 작동시켰다. 레이저가 발사됐을 때 모퉁이에서 경비로봇 한 대가 나타났다. 오른쪽 어깨가 고열의 레이저에 노출되어 녹았지만 경비로봇은 작동을 멈추지 않고 왼팔을 들어올렸다. 라일라가 보기에는 꽤 빨랐고, 이비너스가 보기에는 그 사이에 두번째 공격을 할 만큼 느렸다. 이비너스가 앞으로 몸을 날려 엎드린 라일라를 뛰어넘으며 동력장갑을 낀 오른손을 경비로봇에게 휘둘렀다. 경비로봇의 머리, 팔, 다리가 으깨진 가슴에서 분리됐다. 이비너스가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무리해서 도약했는지 다리가 조금 당겼다. 그래서 이비너스는 새로 나타난 경비로봇을 보고서도 그 놈에게 제대로 맞설 수 없었다. 이비너스는 굳어버렸다. 고개를 돌려 라일라 쪽을 쳐다보니 라일라는 두 손으로 조그만 무언가를 쥐고 이비너스 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엎드려요!”
이번엔 라일라가 외쳤다. 이비너스가 채 엎드리기도 전에 라일라의 손에 쥔 물건에서 밝은 빛과 함께 폭음이 일었다. 쾅! 쾅! 쾅! 경비로봇의 머리에서 불꽃이 몇 번 튀기자 경비로봇은 뒤로 넘어졌다. 이비너스가 라일라에게 물었다.
“그건 뭡니까?”
“창이에요.”
라일라가 간단하게 대답하고 달렸다. 이비너스도 라일라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이비너스가 달리다 말고 오른쪽 어깨를 움켜잡았다. 피가 튀어 천장까지 닿았다. 다리, 허리에서도 피가 튀었다. 경비로봇이 뒤에서도 공격하고 있었다. 수도 한 둘이 아니었다. 강화수술을 받은 이비너스의 육체는 재빨리 상처를 지혈했다. 하지만 상처를 처리하는 속도보다 상처가 생기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이대로 계속 달릴 수는 없었다. 이비너스는 동력장갑을 휘둘러 벽을 무너뜨렸다. 동력장갑을 두어 번 더 휘두르자 방벽이 생겼다. 방벽 너머로 동력장갑을 내밀고 손가락 레이저를 쏘고 있으니 라일라 쪽에서 쾅쾅거리는 폭음이 몇 번 들렸다.
“이 앞에도 수호자들이 몇 마리 있어요.”
“뭐요? 제엔장!”
이비너스는 반대편 벽도 주먹질 몇 번으로 무너뜨리고 그 위치에도 방벽을 쌓았다. 이비너스와 라일라는 그 위치에 고립됐다.
“젠장, 젠장, 젠장!”
이비너스가 욕설을 내뱉는 걸 들으며 라일라가 중얼거렸다.
“수행이 참 깊으시네요. 이런 상황에서도 겨우 젠장이라니. 좀 더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라일라가 “어차피 방금전에는 수녀를 멱살잡고 협박까지 했잖아요?“ 하고 비아냥거리자 이비너스가 이따금씩 방벽 너머로 손가락 레이저를 쏘면서 ”그럼,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하고 말했다.
“니미, 씨이발!”
이비너스의 욕설은 계속 이어졌다. 푸슁 하는 냉각기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쾅 쾅 하는 라일라의 조그만 창에서 나는 폭음과 잘 어울리는 배경음이었다. 둘의 공격으로 경비로봇이 세 기가 쓰러졌다. 하지만 아직도 앞뒤로 각각 세 기 정도가 이따금씩 레이저를 쏘며 다가오고 있었고, 게다가 그 뒤에서도 몇 기가 더 다가왔다.
“이 좃같은 던전, 좃같은 수호자 새끼들!”
네 번째 경비로봇이 넘어지자마자 다음 경비로봇이 충원되는 것을 본 이비너스가 괴성을 질렀다.
“힘 내요. 요 모퉁이만 돌면 수···서임의 관이 있는 방이니까.”
“존나게 다행이네요. 씨이발.”
이비너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가락 레이저를 마구 쏴 댔다. 기사의 발달된 감각으로 소리만 듣고도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내밀지 않고서 쏘는데도 상당히 정확했다.
“정말 잘 쏘네요. 보지도 않고 맞히다니.”
라일라가 방벽에 등을 기댄 채 반대편 방벽에 엎드려 경비로봇을 상대하는 이비너스를 보고 말했다. 이비너스는 기사가 이 정도도 못 하면 안 되죠. 하고 간단하게 대답하고 또다시 레이저를 쐈다. 경비로봇 한 놈의 머리가 녹아내렸다.
“니미, 나도 기사나 할 걸 그랬나?”
라일라는 탄알집 멈치를 눌러 탄알집을 빼내고 새 탄알집을 밀어넣었다. 아직 탄알은 넉넉했지만 병원 안에 남아있는 경비로봇은 그보다 훨씬 넉넉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재빨리 몸을 틀어 방벽 위로 창을 두 발 쐈다. 하지만 한 발도 맞지 않았다. 라일라가 웅크리는 것과 동시에 경비로봇이 쏜 레이저에 방벽 한 쪽에서 불꽃이 튀었다.
“못 잡았습니까?”
“못 잡았지요.”
이비너스가 손가락 레이저로 자신이 맡은 쪽의 경비로봇의 다리를 맞혔다. 경비로봇 하나가 쓰러지는 소리를 확인하고 이비너스가 말했다.
“어째 신께서는 수녀님보다 저를 더 챙기시는군요. 저도 수도사나 될까요?”
“맘대로 하시죠.”
당신 손자쯤은 돼야 문명인 취급을 받겠지만. 라일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 창을 한 발 쏘고 다시 엎드렸다. 이비너스도 동력장갑만 내밀고 손가락 레이저를 쏴 댔다. 이래서는 답이 없었다. 이비너스는 잠시 사격을 멈췄다.
“수녀님.”
“왜요? 저 바빠요.”
라일라가 방벽 뒤에 웅크린 채로 말했다.
“제 쪽에 창을 좀 오래 쏘실 수 있겠소?”
“미쳤어요? 그랬다간 민스가 될 걸요?”
둘의 머리 위로 경비로봇이 쏜 레이저가 마구 날아들었다. 이비너스가 말했다.
“수녀님 쪽 수호자들은 제가 어떻게든 한 번에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요. 견제만 해 주시면 됩니다.”
“무-”
라일라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이비너스가 바로 몸을 날렸다. 경비로봇은 모두 넷. 한 놈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든 이비너스가 동력장갑을 휘두르자 경비로봇의 머리가 부서졌다. 반대편 동력장갑으로 머리가 부서진 동력장갑의 몸통을 붙잡고 방패로 삼고 이번에는 옆으로 달렸다.
깜짝 놀란 라일라가 방벽 위로 고개를 들고 창을 앞으로 겨눴다. 라일라 쪽의 한 놈이 라일라를 향해 팔뚝의 레이저를 향하고 있었다. 라일라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숙였다. 경비로봇의 레이저가 라일라의 뺨을 스쳤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레이저가 아니라 레이저가 뜨끈하게 데운 공기였다. 화상을 입어 쓰라린 뺨을 어루만질 새도 없이 라일라는 고개를 다시 쳐들고 창을 쐈다.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가 한 탓에 눌어붙어 딱딱해진 머리카락 몇 올이 끊어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비너스는 남은 세 놈의 경비로봇 중 가장 멀리 있는 놈을 향해 경비로봇의 잔해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놈을 향해 몸을 잔뜩 숙이고 태클을 걸었다. 경비로봇이 넘어지자 놈의 가슴을 한 대 강하게 후려쳤다. 경비로봇의 몸통이 산산조각났다. 경비로봇에 깔린 경비로봇이 넘어져서 버둥거리는 동안 이비너스는 그 놈을 향해 손가락 레이저를 한 방 쐈다. 경비로봇의 머리가 녹아내렸다. 남은 한 놈은 가까이 있었다. 손가락 레이저를 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마지막 놈이 동력장갑에 한쪽 팔과 몸통이 부서지며 쓰러졌다. 이비너스는 라일라 쪽을 바라봤다. 이비너스는 눈알이 갑자기 뜨거워졌다고 느꼈다.
“크악!”
이비너스는 동력장갑으로 눈을 가렸다. 눈알이 터지고 그 안의 액체가 흘러내렸다. 눈을 잃었다고 해서 멍청히 서 있지는 않았다. 이비너스는 방벽 뒤로 몸을 날려 숨었다. 하지만 경비로봇이 쏜 레이저를 다리에 몇 발 맞았다. 출력을 높였는지 라일라의 주먹 두 개만큼 살점이 터져나갔다.
“괜찮아요, 기사님?”
“으윽··· 네. 괜찮습니다. 기사니까요.”
이비너스가 기대 있던 방벽 쪽에서 몰려오던 경비로봇 세 기 중 라일라가 파괴한 건 한 마리 뿐이었다. 이비너스는 쳇, 하고 혀를 찼다. 손가락 레이저를 방벽 위로 내밀고 쐈지만 고통 때문인지 조준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비너스의 공격에 맞은 경비로봇은 없었다. 라일라가 허리에 찬 가방에서 구급약과 붕대를 꺼내 이비너스를 치료했다. 이비너스가 중얼거리며 기도하자 라일라가 말했다.
“닥쳐요. 집중 안 돼요.”
이비너스가 입을 닫았다. 다시 말을 했을 때는 꽤 긴 시간이 지난 뒤였다.
“당신, 수녀 아니지?”
“지금 그런 소리 하고 있을 상황 아닌 건 알죠? 궁금하면 살아 나가서 또 물어보라구요.”
이비너스는 피식 하고 웃었다. 이 여자는 절대로 수녀가 아니었다. 적어도, 이비너스가 생각하는 그런 수녀는 아니었다. 나가게 되면 아마도 수도원에 대해 물어볼 점이 아주 많이 생길 것 같았다.
“웃네? 안 아파요? ···다 됐어요.”
라일라는 이비너스의 웃음을 무시하고는 방벽에 등을 기댔다. 심호흡을 하고, 몸을 내밀어 창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폭음이 들렸고, 경비로봇 한 기의 머리가 부서졌다.
“하나 남았네요.”
“알고 있소.”
이비너스는 그렇게 말하고 심호흡을 했다. 방벽 위로 동력장갑을 재빨리 내밀고 손가락 레이저를 쐈다. 마지막 경비로봇 한 기가 소리를 냈다. 쿠당탕. 경비로봇은 이제 없다. 이비너스와 라일라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네.”
긴장이 풀린 라일라가 헉헉거리며 대답했다. 다른 궁금한 것도 많았지만 제일 궁금하면서도 제일 빨리 물어보고,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했다.
“당신 수녀 맞소? 어떻게 그렇게 잘 싸우지?”
라일라가 설명했다. 대학연합은 영주들에게 기사와 그들이 쓰는 무기를 공급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역사상 대학연합을 복속시키려던 영주는 많았지만 대학연합은 탄생 이후로 어느 영주에게도 복종하지 않았다. 아무리 외교를 귀신같이 한다 해도 그 스스로가 힘이 없이는 그럴 수 없었다. 대학연합의 ‘문명인’들 하나하나는 어릴 때부터 군사훈련을 받는다. 기사에 비하면야 약하지만, 하나하나가 영주들의 병사에 비하면 어디에 내놔도 모자라지 않는 강병이다. 여자조차도 말이다. 물론 이대로가 아니었다. 설명은 야만적인 단어들로 이루어졌다. 이비너스는 납득했다.
“휴. 수호자들은 정리가 됐고, 갑시다.”
이비너스는 그렇게 말하고 방벽을 짚고 일어났다. 다친 다리 탓에 제대로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이비너스가 신음소리를 내며 휘청였다.
“으으윽···.”
“괜찮아요?”
라일라가 황급히 이비너스를 부축했다. 여자 치고는 힘이 좋은 라일라였지만 동력장갑과 합해 체중이 200파운드를 넘는 거구인 이비너스가 넘어지는 걸 지탱할 수는 없었다. 이비너스와 라일라 모두가 중심을 잃었다. 이비너스가 팔을 뻗어 벽을 짚고서야 둘은 겨우 균형을 유지했다.
“무리하지 마시오. 그냥 좀 아픈 것 뿐이니까.”
이비너스가 라일라를 슬쩍 밀어냈다. 벽을 짚으니 절뚝거리나마 걸을 수 있었다. 라일라와 이비너스는 그렇게 걸어갔다. 수술장치, 그러니까 서임의 관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서임의 관이 얼마나 남았다구요?”
“요 앞이에요. 요 모퉁이만 돌면···.”
“뭐, 끝이구만.”
“끝은 무슨. 당신 서임 다시 시키고 나면 연구실 자료 찾아가야죠.”
라일라가 이비너스에게 쏘아붙이자 이비너스는 낄낄거렸다.
“아아, 그래. 거기도 가야지. 그럽시다.”
라일라는 짜증을 내며 이비너스를 지나쳐 걸어갔다. 절뚝거리는 이비너스는 라일라가 모퉁이를 돌고 나서도 절뚝거리며 모퉁이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어어이, 수녀님. 같이 갑시다.”
“얼른 안 오고 뭐 해요? 서임실 문 열었어요. 얼른 안 오면 내가 서임 받고 기사 될 거니까 그렇게 아시죠.”
길 저편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라일라도 웃으며 이비너스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모퉁이 저쪽에서 커다랗고 묵직한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그리고 푸슁 하는 손가락 레이저의 냉각음이 들렸다. 깜짝 놀란 라일라가 왔던 길을 되짚어 달려가 모퉁이를 돌았다. 이비너스가 옆구리에서 창자를 쏟은 채 천장을 보고 쓰러져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에요?”
“수호자···.”
“됐어, 말하지 마요.”
라일라는 상황이 짐작이 갔다. 부서진 경비로봇 중 살아남은 놈이 있었다. 교활하게도, 죽은 척을 하고 있다가 레이저의 조준선 위로 이비너스가 겹치자 최대출력으로 이비너스에게 레이저를 쐈겠지. 라일라가 이비너스의 옆구리로 다가가려 했지만 이비너스가 제지했다.
“왜요?”
이비너스는 대답하지 않고 손가락 레이저를 쐈다. 라일라가 이비너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슴푸레한 비상등 불빛을 받아 파랗게 빛나는 쇳덩어리 경비로봇이 라일라의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한 놈이 다리에 손가락 레이저를 맞고 쓰러졌다.
“아, 씨발!”
라일라는 이비너스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일반인 여자 치고는 센 편인 정도다. 라일라의 힘으로는 저보다 두 배는 족히 무거운 이비너스를 일으킬 수 없었다.
“먼저 가시오. 따라갈테니.”
“미친놈.”
라일라의 대답은 간단했다. 이비너스는 나름 비장하다고 생각한 말을 너무나 간단하게 평하는 라일라에게 화가 났다. 뭐라고 욕을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배 안의 압력이 높아지자 옆구리로 창자가 더 쏟아졌다.
“말 하지 마, 미친놈아. 창자 빼서 순대라도 만들려고? 끄응··! 그래가지고 따라오긴 무슨···! 너 뒤지면, 나도, 뒤지고···! 탐사도, 끄응··! 실패야,”
라일라는 이비너스를 일으키는 건 포기했다. 한쪽 어깨를 붙잡고 온 힘을 다해 이비너스를 끌었다. 이비너스는 조금씩 끌렸다. 이정도 속도라면 경비로봇의 사정권에 들기 전에 모퉁이를 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비너스는 끌려가면서 한 손으로는 삐져나온 창자를 갈무리하고 한 손으로는 손가락 레이저를 쐈다. 경비로봇이 이비너스를 사정권에 거의 넣었을 때, 라일라는 이비너스를 끌고 모퉁이를 돌았다. 경비로봇이 쏜 레이저에 벽에서 불꽃이 튀었다.
경비로봇들이 다가오며 뚜벅거리는 소리를 냈다. 수술실 문은 열려 있었다. 라일라는 이비너스를 수술실 안으로 겨우 밀어넣고 문을 닫았다. 물건들을 이리저리 끌어모아 문 뒤에 쌓았다. 이만하면 됐겠다 싶어지자 라일라는 이비너스의 옆구리를 살폈다.
“너덜너덜하네.”
그리고 수술실 밖에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꽤 넓은 수술실 안에 쾅 쾅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어서 서임을-”
“닥쳐. 이대로는 수술장치에 들어가도 사망입니다.”
라일라는 이비너스의 창자를 쥐고 상처 안으로 마구 쑤셔넣었다. 이비너스가 비명을 질렀다. 좀 닥치라구요 하고 중얼거리며 낑낑댔다. 쑤셔넣으며 확인해 보니 창자에 터진 부분은 없는 것 같았다. 창자가 다 들어갔다. 봉합할 차례였지만 간단한 봉합도구도 가방 안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최대한 꽉 누르고 붕대를 단단하게 감았다. 흰 붕대가 순식간에 붉고 검게 변했다.
“말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마요. 어차피 존나 아파서 못 하겠지만.”
라일라는 그렇게 말하고 수술장치 쪽으로 걸어갔다. 유선형의 고깔 모양으로 생긴 수술장치 십여 개가 있었다. 수술장치의 정면에는 수술장치의 용도가 적혀 있었지만 라일라가 알아볼 수 없는 문자였다. 라일라는 다시 한 번 독자표준에 대한 분노를 느끼며 기나긴 욕설을 중얼거렸다. 라일라는 다시 이비너스에게로 다가갔다. 피를 잔뜩 흘려 새파래진 거구의 기사를 질질 끌었다. 질척하게 흐른 피웅덩이와 핏자국이 이비너스가 끌려온 길에 남았다. 라일라는 이비너스를 제일 가까이 있는 수술장치에 대충 집어넣었다. 그리고 수술장치의 패널을 조작해 비상전원을 켰다. 여느 병원 유적과 마찬가지로 주 동력을 공급받지 못하니 비상전원으로만 수술을 해야 했다. 비상전원은 수술 한 번을 하면 다 떨어졌다. ‘서임의 관’ 하나에서 기사를 한 명만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망할.”
수술장치 패널을 조작하던 라일라는 절망했다. 수술장치에 들어간 이비너스를 방치한 채로 다른 십여 기의 수술장치의 패널도 확인했다. 이비너스가 의문 섞인 신음을 내뱉었다. 설명을 요구받지는 않았지만 라일라는 설명했다.
“안 됐네요, 기사님. 당신, 다시 서임 받기는 글렀어.”
라일라의 시선은 수술장치의 패널에 새겨진 글자에 고정돼 있었다. ESTHETIC SURGERY . 라일라는 웃음만 나왔다. 이 우락부락한 기사가 성형수술을 받으면 예뻐지려나?
“아쉽게도, 서임의 관이 아니었네요. 의술의 신전이긴 한데··· 킥킥킥···.”
라일라는 헛웃음을 웃으며 설명했다.
“서임의 관이 아니라, 킥킥··· 아, 그래. 미의 여신의 관이었네요. 킥킥···.”
이 수술장치로는 하다못해 응급처치 따위도 할 수 없었다. 라일라는 수술장치 안에 구겨진 이비너스에게 마취제를 주사했다. 일반인이라면 마약중독을 걱정해야 할 분량의 모르핀 계 진통제였다. 이비너스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이비너스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떨 기운은 남아있나 보네?” 라일라는 비웃었다.
“말해 봐, 새끼야. 니가 이렇게 만든거야.”
“으으···.”
이비너스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니가 처음에 경비로봇을 공격했어. 그래서 그것들한테 쫓기게 됐지. 그리고 나서는, 연구자료만 꺼내서 도망칠 수 있었는데, 니가 뭐라고 협박했는지 기억 나냐? 죽어도 강화수술을 한번 더 받아야겠다고 그랬지. 그리고, 여기 왔는데, 와아···.”
라일라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고개를 위로 치켜들어 눈물을 멈추려고 했다. 고개를 치켜든 채로 라일라가 말했다.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그래, 니 소원대로 여기 왔어. 미용성형수술장치 잔뜩 있는 여기. 예뻐지고 싶었어? 그럼 수술 받을래? 그래서, 예뻐져서 수호자들한테 미인계라도 쓰려고 했냐? 엉?”
이비너스는 말이 없었다. 마취제가 잔뜩 돌아서 고통이 많이 줄고 몸도 아까보다 덜 떨렸다.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할 말 있어? ···할 말 있냐고, 이 개 종자 새끼야!”
“···죄송합니다···. 수녀님···.”
이비너스가 입을 열었다. 죽어가는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수녀님··· 부디··· 종부성사를···.”
“닥쳐, 야만인 새끼야. 나 수녀 아냐. 얼른 뒈져버려.”
라일라는 그렇게 쏘아붙였지만 이비너스는 듣지 않았다.
“.··· لا إله إلا الله···. و(신 외에 다른 신이 없다. 그리고)”
이비너스가 기도문을 읊조렸다. 라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나마도 죽어가는 이비너스의 눈이 라일라를 응시했다. 라일라는 이비너스를 노려볼 뿐이었다. 라일라에게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동력장갑은 죽어가는 기사에게는 너무 무거웠다. 잠시 뒤 이비너스는 눈을 까뒤집고 펄떡거렸다. 몇 번 그러다 늘어졌다. 라일라는 이비너스의 시체에 대고 중얼거렸다.
“.···البطل رسول الله···(대영웅은 그의 예언자이다.)”
수술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문 뒤에 쌓아놓은 것들이 점점 뒤로 밀렸고, 몇 개는 굴러떨어졌다. 허리춤에 꽂아둔 창을 쥐고 탄알집 멈치를 눌러서 탄알 수를 확인했다. 탄알을 탄알집 밖으로 빼내 몇 개인지 헤아렸다. 하나. 둘. 셋. 넷. 이제 없었다. 빼낸 탄알을 다시 탄알집에 넣었다. 하나. 둘. 셋. 넷. 12발짜리 탄알집이 세 개, 그리고 4발 남은 탄알집이 하나. 이정도면 충분했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소매로 눈가를 훔쳤지만 눈물은 금방 다시 눈에 고였다. 눈을 감아 눈에 고인 눈물을 흘려보냈다.
몇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라일라는 눈을 떴다. 그리고 쾅 하는 소리가 나며 경비로봇이 수술실 문을 박찼다. 라일라는 창을 쐈다. 경비로봇 한 마리가 쓰러졌다. 라일라의 사격은 정확했다. 라일라의 창이 굉음과 섬광을 한 번 뿜을때마다 경비로봇이 한 마리씩 쓰러졌다. 네 발을 쏘고 탄알집 멈치를 눌러 창에서 다 쓴 탄알집을 분리시키며 라일라는 생각했다. 탄알은, 멍청한 야만인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 풀 정도로는 충분하다고.
몇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라일라는 새 탄알집을 창에 끼웠다. 그리고 경비로봇이 레이저를 쐈다. 라일라의 머리가 사라졌다. 다른 경비로봇도 레이저를 쐈다. 머리 외의 부분에도 다섯 발의 레이저를 맞은 라일라는 다진 고기가 됐다.
hallye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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