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황금빛 추억

2011.09.24 01:3509.24

제목 : 황금빛 추억      


하루 종일 창백한 얼굴로 텔레비전을 보는 남자가 있다. 텔레비전 안에는 비만 가득 내린다. 남자는 그 비만 본다. 남자는 채널을 돌리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비이성적이 되면 텔레비전에 비 내리는 것만 보이나 보다고 그는 생각한다.
어둑어둑한 텅 빈방에서 비스듬히 벽에 기대, 숨을 죽여 그는 홀로 계속 텔레비전을 본다. 텔레비전에서 내리는 비는 가슴까지 흠뻑 적셔지지 않는다며 아쉬워한다.
난로에 기름이 떨어져 방안이 싸늘하다. 남자는 담요 한 장을 무릎에 덮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남자는 이틀 전, 며칠만 더 있으면 강추위가 몰려온다는 소식을 뉴스에서 들었다. 그때가 되면 어쩌나 진지하게 걱정하고 있을 때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그의 동거녀 스칼렛이 일을 마치고 열흘 만에 집에 왔다. 남자는 한껏 게을러진 몸을 꾸물꾸물 일으켜 세워 문을 열어준다. 스칼렛은 머리에 붉은색잎사귀를 달고 있다. 잎사귀는 손바닥보다 크다. 그녀는 붉은 잎을 14년간 떼지 않고 있다.  
스칼렛이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물었다.
“도총 씨, 곡은 다 써가요?“
“아, 아직.......“
그는 얼굴이 붉어지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남자의 무릎에 덮여있던 담요를 거칠게 빼앗은 스칼렛은 곧장 바닥에 눕는다. 그녀는 빼앗은 그 담요로 몸을 덮고 얼굴까지 가린다.

남자는 헤비메탈작곡가다. 헤비메탈곡만 18년째 써왔다. 그가 쓴 많은 곡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붉은색잎사귀 여인‘이다. 동거녀 스칼렛은 14년 전 남자가 작곡하고, ‘백만 인의 부활‘이란 밴드가 연주한 붉은색잎사귀 여인을 듣고 감명을 받아 그날로 머리에 커다란 붉은색 잎을 달았다. 그랬던 그녀가 올해 들어 그에게 ‘황금색잎사귀 여인‘이란 곡을 작곡하기를 강요했다. 석 달 전부터는 해가 바뀌기 전까지 곡을 써내지 못할 경우 아예 헤어지겠다며 종종 으름장을 놓았었다. 남자는 그 무렵부터 생계유지를 위해 함께해오던 다른 소일거리를 그만두고 황금색잎사귀 여인을 작곡하는 일에만 전념해왔다. 시간은 금세 지나 이제 날은 나흘만 있으면 11월이다. 그들이 사는 방은 그녀의 소유였고 모든 경제적 재량도 그녀가 쥐고 있었다. 심지어 남자는 입고 있는 속옷마저도 자기 물건이라고 떳떳하게 주장할 수 없는 처지였다.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밖에 없는 남자는 쫓겨난다면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했다. 남자는 그동안 황금색잎사귀 여인을 작곡하려 갖은 애를 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완성을 시켜낼 자신감이 점점 부족해지고 있었다. 그 사이 괜찮은 곡을 하나 쓰긴 했지만, 헤비메탈이 될 만한 곡이 아니라며 오히려 그녀에게 심한 질책만 당했었다.
“오직, 헤비메탈뿐이라고! 알겠어?!“

남자와 스칼렛이 사는 옆방에는 고개가 오른쪽어깨방향으로 돌아간 남자노인이 살고 있다. 노인은 언젠가 17년 전 꿈속에서 웬 호랑이가 휘두른 오른쪽앞발에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직후부터 고개가 돌아갔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그때 돌아간 고개가 제 위치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대로 딱 굳었다는 말이었다.
노인은 색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두 달 전에는 이런 말을 남자와 나눈 적이 있었다.
아무에게도 들려주려하지 않았던 말이라며 운을 뗀 노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태양이 루비빛으로 반짝이고 냇물이 옥빛으로 투명했던 그 시절, 황금벌판위 오두막집에 한 천재청년이 살고 있었다네. 그 청년은 심성이 착했어. 그리고 항상 황금빛 꿈을 간직하고 살았지.“
“저랑 비슷하군요.“
“듣기 싫네. 그 천재청년은 어느 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 사랑을 나누게 됐지. 아주 운명적인 사랑을. 어떤 사랑을 나눴는지는 나도 설명하기가 좀, 그래, 복잡다단하니 넘어가겠네. 여하간 이러쿵저러쿵해서 선녀와 이 세상에서 살림을 차리고 행복하게 산 지 4년째 되던 그해 11월, 하늘에서 검은 비를 타고 내려온 악한 11명이 있었다네.“
“혹시 그게 11데이(빼빼로데이)의 기원은 아닙니까?“
“듣기 싫네. 그 악한들이 선녀를 강제로 하늘로 데리고 올라갔다네. 천재청년은 어떻게 됐겠나? 무척 상심했겠지. 천재청년은 선녀가 하늘로 올라간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절망하다가 이내 흐느껴 울고 말았다네. 그 자리에서 굳어 눈물이 멈추지 않더라는 거야. 쓰디쓴 눈물에 하늘이 반응을 보였는지 땅에서 싹이 오르기 시작했네. 싹은 금세 자라나서 구름을 꿰뚫었다네. 천재청년은 싹을 타고 올라갔어!“
“그래서 선녀를 구출했던가요?“
“조용히 좀 해보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 사람아. 흠. 그리하여 천재청년은 거기서 두 달 만에 선녀를 봤지. 그런데 선녀는 그 사이 벌써, 딴살림을 차리고 있었어. 아마 같이 살던 그 사람이 원래 남편이었나 봐. 천재청년은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인정할 수 없었지만, 하늘에서 선녀가 살림을 차린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어 크나큰 아쉬움을 달랜 채 다시 밑으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었지. 흠....... 그런데 또 문제는, 애초에 하늘을 찌른 줄기를 타고 내려가야 하는데 못 내려가겠더라, 이거야. 올라올 때는 잘 타고 왔는데 내려갈 때는 자세가 영 안 나왔더라는 게지.“
“발을 계속 밑으로 내딛어야하니까, 그런 거로군요.“
“맞네, 천재청년에겐 올라가기란 쉬웠어도 내려가는 건 무척 어려웠던 거야.“
“음.......“
그때 대화가 잠시 공백이 생겼다. 노인은 그 상황을 어떻게 더 설명해야하는지 생각하는 기색이었고, 남자는 그 얘기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는지 작은 고민을 했다.
결국, 남자는 솔직한 심정대로 반응했다.
“그러니까, 저는 이 얘기를 더 듣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러자 호통에 가까운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봐 이 사람아, 이건 말이 되는 거야, 이건 사실이야! 이 게 말이 되는 거라고 인정해야 자네다운 거야, 이 사람아!“
그처럼 심각한 태도인 노인임을 알아차린 남자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죠. 대충 말이야 맞는데요. 예.“
발끈하던 기색을 순식간에 진정시킨 노인은 다시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천재청년은 밑으로 내려가지 못해 고민하다가 하늘에 사는 사람에게 쇠톱을 하나 빌렸다네. 그 톱으로 자기가 매달려있던 줄기의 위에서부터 잘라내고, 또 계속 잘라내자 결국, 땅으로 내려오게 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네. 톱질도 몇 번하지 않고 아주 쉬웠지. 말인즉슨, 자기가 설자리! 바로 그 설자리를 차츰차츰 없애갔다고 하면 이해가 빠를 거라 보네. 그리고 이때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나무를 내려간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우고 나무를 베어서 없앤다는 생각만 해야 한다는 것이지!“
남자는 노인의 말이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오호, 천재청년의 진가가 발휘된 것이로군요.“
얘기를 마친 노인의 두 눈엔 눈물이 글썽였다.
“왜 우십니까, 노인장?“
“그 천재청년이 바로 나야. 선녀가 보고 싶어. 훌쩍.“
철저히 무미건조해진 표정이 된 남자는, 잠시 지나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하긴 이 세상이 얼마나 허세에 가득 찬 곳이던가. 그런 것에 비하면 노인의 이 앙증맞은 허세는 전혀 밉지가 않고 오히려 애교 있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남자는 사실 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줄기가 난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어보긴 했다. 언제 어디서 날 지 아무도 모를 그 기적의 줄기를 노인이 타고 올라갔다고 주장하니 남자는 미덥지 않은 게 당연했다. 남자는 옆 세상에서도 그런 비슷한 얘기가 많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남자는 노인에게 나무나 줄기보다는 저 옆 세상 얘기처럼, 조금 더 편하고 우아하게 천국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내용이 어떻겠느냐고 말할까도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속에서 노인의 해맑은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좋았던 것이다. 평소 노인을 대하며 자주 그런 감정을 느껴왔다. 꿈을 먹고 사는 노인은 남자에게 존중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떨어질 수 없는 친구였다.  


남자는 계속 텔레비전을 보다가 일어났다. 시린 무릎을 손바닥으로 싹싹 문지르다가 문득 노인이 사는 옆방으로 가고 싶어진다. 노인의 방은 따듯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남자는 소리 없이 발걸음을 떼서 아주 세심하게 방문을 열고 닫았다. 담요를 덮고 곯아떨어진 스칼렛이 깨어나 시끄럽다고 역정을 낼까봐 두려워서 아주 조심조심했다.
남자가 노인의 방문을 두들겼다. 똑똑.
“무슨 일인가, 열렸으니 어서 들어오게.“
노인은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간 채로 캔버스에 팔을 쭉 뻗어 붓질을 하는 그 모습은 왼손잡이가 과녁에 활을 겨누는 자세가 연상됐다. 어쩌면, 펜싱선수가 자세를 취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남자는 그림을 그리는 노인 옆에 조용히 다가섰다. 노인은 선녀를 그리고 있었다. 굉장히 우아하고 성스런 선녀의 자태였다.
“확실히 노인장은 그림에 일가견이 있으십니다.“
노인의 그림을 흡족한 눈길로 바라보며 남자가 칭찬했다.
“그림이 괜찮은가? 어흠, 고맙네. 헌데, 이 그림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겠는가?“
“혹시 과거 이별했다는 그 선녀님 아닌지요?“
노인은 고개를 젓지는 못하고 붓을 든 손을 저어 아니라는 표시를 하더니, 그 붓을 그에게 건넸다.
“자, 이 붓을 들게나.“
붓을 받아든 남자가 의아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왜, 저한테 붓을?“
“선녀의 머리에 붉은색잎사귀를 그려 넣어보게나.“
“예?“
“어허, 글쎄 그려보래도!“
노인의 위엄 있는 지시에 남자는 빨간빛물감을 붓에 묻혀 선녀의 머리에 댔다. 남자는 얼마간 혼신의 힘을 다해 붉은색잎사귀를 완성했다.
그림을 다 그린 남자가 놀라서 외쳤다.
“아니, 이건 스칼렛 아닙니까?!“
“그렇구먼, 이 그림의 주인공이 드디어 밝혀졌어!“
선녀의 머리에 붉은색잎사귀를 그려 넣자 남자의 동거녀, 스칼렛의 모습으로 그림이 완성됐다. 남자와 노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완성된 그림을 함께 감상했다.
남자는 가슴이 설렜다. 완성된 그림을 보는 순간 스칼렛을 향한 미적지근해졌던 사랑의 온기가 뜨겁게 지펴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잃어버린 그녀의 모습을 되찾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노인장, 이 그림은 제가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나. 어흠.“
남자는 그림을 들고 급히 스칼렛이 있는 방으로 갔다. 그녀는 어둡고 차가운 방안에서 담요로 얼굴을 가린 채 계속 잠들어 있었다. 남자는 탁자위에 그림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사랑스런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덥고 있는 담요 안으로 들어갔다.
“황금색잎사귀 여인을 완성해내기 전에는 어림도 없어!“
스칼렛이 자기 옆에 바짝 밀착해 누운 남자에게 퉁명스럽게 무안을 줬다. 차디찬 그녀의 말에 돌아누운 남자는 크게 뜬 눈으로 천장을 바라본 채로 꽉 굳어버렸다.


**
11월 13일이 됐다.
붉은색잎사귀 그림이 완성되고부터, 희미해졌던 사랑의 추억을 선명하게 되새긴 남자는 곡을 구상하기위해 외출했다. 두 달하고 일주만의 나들이였다.
“지금은 변화가 필요한 시간이에요-“
남자는 발걸음에 힘과 의지를 실어주는 노래인 일명, ‘인생의 희망가‘를 흥얼거리며 꿈을 찾기 위한 희망찬 첫걸음을 뗐다. 우후-

눈부신 햇살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텅 빈 황금색벌판에 섰다. 14년 전 스칼렛과 처음 데이트했던 장소였다. 감회에 젖어든 남자는 벌판을 가로질러 달려보기도 하고 한 마리 학처럼 사뿐사뿐 걸으며 절도 있는 춤사위를 펼치는 등 이것저것 의미를 담아 행동해봤다. 한창 고무된 시간에서, 이럴 수가! 드디어 황금색잎사귀의 악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남자는 급히 주머니에서 작곡노트와 연필을 뺐다. 오, 오, 오, 오오! 얼마나 이날을 고대했던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곡을 완성시키고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남자의 그림자가 끝나는 지점에 연한 초록색 싹이 자라 오르고 있었다. 싹은 순식간에 나무가 되어 하늘을 찔렀다. 남자는 호기심에 무턱대고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나무꼭대기까지 올라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동산에 소박하게 선 작은 감나무를 오르듯 쉬웠다.

더 이상 오를 가지가 없어 남자가 발을 디딘 곳에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잔잔한 땅위에, 귓불을 간질이는 살랑바람, 지극히도 청명한 하늘, 신비로운 색들의 향연. 이 모든- 꿈결 같은 경관을 맞이한 자체로 기적이었다. 특히 둥실둥실 떠가는 구름은 사람의 손이 닿을 높이에 위치해 있어 한결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내게 했다.
큼직큼직한 솜털구름떼가 남자의 어깨를 사르르 스쳐갔다. 남자는 구름위에 올라탄다면 허공을 붕붕 날아다닐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근처에 있는 허리높이의 바위에 냉큼 올라, 지나가는 구름 중에서 색이 가장 선명하고 튼실해 보이는 구름을 골라 그 위로 뛰어 내렸다.
남자는 구름을 탈 수 없었다. 남자의 착각이었다. 대신 남자 앞에 한 사람이 섰다.
“하늘나라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내가 하늘나라사람이 아니란 걸 어떻게 알고 계시죠?“
“구름을 타지 못하는 걸 보고 알았죠.“
“아하, 이곳 사람들만 구름을 탈 수 있나 봐요?“
“네, 환영합니다!“
질문과는 별개로 그가 씩씩한 목소리로 다시 환영인사를 했다.
“네, 환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환영합니다!“
그가 더욱 큰소리로 또다시 인사했고,
“네, 네, 고마워요.“
그러나 그는 환영인사를 그치지 않았다. 양손으로 손나팔을 만들어 입에다 대고 떠나가라 외쳤다.
“환영해요!“  
등골이 쭈뼛할 지경이었다. 그것은 옆 동네에서 곤히 자는 아이를 깨울만한 소리였으며, 헤비메탈보컬인 롭 헬포드가 뿜는 철혈 샤우팅에 버금가는 무지막지한 에너지기도 했다. 남자는 순간 그에게 ‘이런 썩을 놈아, 귀청 떨어질 뻔했잖아!‘라고 성을 내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못하고 언성만 높여 대꾸했다.
“네, 네, 네! 고맙다니까요!“
그러자 그가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제가 맡은 일이 아래 세상에서 올라온 사람들에게 이곳이 하늘나라임을 알려주는 거죠. 너무 오랜만에 일이 생겨서 저도 모르게 자꾸 인사가 나오네요. 그럼 전 바빠서 이만........“
하늘나라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제풀에 얼굴이 붉어져 구름 하나를 잡아타고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잽싸게 날아갔다.  
이런, 참 반가웠는데 뭐가 그리 급한지. 비록 순간 언성을 높이기는 했지만 남자는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언제 또 여기서 사람을 만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

남자는 엉겁결에 하늘을 찌르는 나무를 타고 온 이상 뜻 깊은 시간을 보내다가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누구를 만날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이곳에는 평화와 안정의 기류가 넘쳐흐른다는 확신이 섰다.

여기서는 나 혼자구나.
어디로 갈까 생각하던 남자는 우선 저 멀리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떼기로 했다. 파란하늘 깊이 올라가는 기다랗고 굵은 줄기의 하얀 연기가 그를 불렀다.

아무도 없지만 누군가 나를 기다린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누군가 나를 찾는다.
새겨진 발자취는 없지만 이곳은 아늑한 고향이다.
------------라는 생각을 남자는 했다.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길게, 길게 걷습니다. 걷습니다. 걷습니다.
남자가 20분 쯤 걸었을 때 길 왼쪽에 서 있는 푯말이 보였다. 그 안에는 ‘호랑이를 조심하시오‘라고 세련된 필체로 커다랗게 글이 적혀있었다.
남자는 겁이 났다. 옆방에 사는 노인이 꾸었다는 호랑이의 꿈, 그 장소가 바로 이곳이라는 예감을 했다. 호랑이가 나타나 자기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일까봐 걱정됐다.
남자는 이리저리 기웃기웃 주변을 살피며 경계했다. ‘제발 호랑이가 나타나지 말아야할 터인데.‘
남자는 호랑이가 무서워, 달리기 시작했다. 하늘나라도 마냥 편안한 곳만은 아닌가보구나,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향해 줄행랑치느라 한참 정신이 팔려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옆에서 함께 달리면서 물었다.
“어디 가세요?“
남자는 돌아보지 않고 계속 앞만 보고 달리며 답했다.
“저기 연기 나는 곳으로 갑니다.“
“그런데 왜 뛰어가세요?“
“이곳에 호랑이가 있다고 해서.......“
“껄껄껄, 껄껄, 껄, 껄껄껄!“
소리도 컸지만 그처럼 간사한 웃음은 난생 처음이었다. 마치 바다 속의 참치가 웃는다면 그런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남자는 웃음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봤다. 집채만한 호랑이가 옆에 있었다. 그가 아니라 호랑이가 외쳤다.
“호랑이가 나타났다!“
남자는 계속 전속력으로 달렸다. 호랑이를 약간 앞서 달려가던 남자는 멈춰야할지 말아야할지, 그러니까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고민됐다. 85m 정도 계속 함께 달리다보니 호랑이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평소에 운동부족으로 심폐기능이 약해진 호랑이 같았다.
“이제, 이제 그만 달려요. 힘들어요. 걷는 건 자신 있는데. 헉헉.“
호랑이가 달리지 말자고 간청하자 남자는 더욱 정색했다.
“호랑이, 당신이 나를 공격할까봐서요. 호랑이는 무서워요.“
“하늘나라의 호랑이는 다릅니다. 당신의 선입견으로만 판단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래요? 근데 왜 호랑이를 조심하라고 써 있는 거죠?“
“힘드니까 일단 머, 멈, 멈춰서 얘기, 해요.“
너무 힘겨워 쩔쩔매는 호랑이가 안쓰러워 남자는 달리기를 멈췄다. 같이 그 자리에 멈춰선 호랑이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지는 않았다.
“후유....... 달 달 달리기 참 참 참 잘 잘 하시, 하, 요.“
깊은 숨을 들이 내쉬는 호랑이의 말은 제대로 된 발음을 내지 못하고 불분명했다. 남자는 호랑이가 숨을 고를 시간을 주었다.
“평소에 운동을 하지 그랬어요?“
호랑이는 대답을 못하고 계속 숨을 고르며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대체 얼마나 힘든지 축 처진 꼬리는 두 뒷다리 사이에 숨어있었다.
기진맥진해서 바닥에 털썩 엎드린 호랑이가 완전히 기운을 차릴 때까지 남자가 기다린 시간은 4분이 조금 넘었다.
황금색잎사귀 여인의 선율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먼 산을 바라보던 남자가 물었다.
“왜 호랑이를 조심하라고 써 있는 거죠?“
“당신이 밑에서 올라왔다는 말을 듣고 내가 장난친 거예요.“
“왜 그런 장난을 칩니까?“
“워낙 할 일이 없어서. 그리고 당신을 놀라게 하고 싶었어요. 그럼 재밌잖아요.“
퍽이나 재미있겠네요, 라고 하려던 말을 관두고 남자는 물었다.
“호랑이 씨는 나에게 볼일이 있나요?“
“물론 볼일이 있죠.“
“무슨 볼일입니까?“
“먼저 말하자면, 저 밑에서 올라온 사람이 처음부터 무작정 여길 혼자 돌아다녀서는 안 돼요. 길을 잃거든요. 그러면 다시는 밑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평생 사람도 못 만나고 여길 떠돌아다니게 되어있죠.“
“아차, 큰일 날 뻔했네요?“
“보세요. 당신이 타고 올라온 나무가 있는 자리를 찾을 수 있겠어요?“
남자는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나무가 있던 자리가 어디였는지 감 잡을 수 없었다.
“이런, 이런.“
고개를 절래 흔들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 남자를 향해 호랑이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것 보세요. 자기가 올라온 자리마저 찾지 못하니 여기선 처음부터 당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요.“
“그럼 전 어떡해야하죠?“
“제가 당신의 가이드가 되어드리겠습니다. 제 등에 올라타세요.“
남자는 달리기를 못하는 호랑이가 미심쩍었지만 일단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 보기도 꽤나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등에 냅다 올라타자마자, 호랑이는 곧장 무지막지한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기 연기 나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했죠? 꽉 잡아요, 아저씨!“
“으아! 원래 달리기 못했잖아요?“
“나도 이제 할 일이 생기니, 몸과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겠어요.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에요!“
호랑이는 마치 하늘을 날 듯 걸음이 빨랐다. 그래서 남자는 그 등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길고질긴 호랑이 털을 두 손으로 꽉 움켜잡아야만 했다. 평소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무기력하기만 했던 차에 가이드 일이 생겨 의욕과 활력이 넘친다며 호랑이는 더욱 빠른 속력을 냈다.  
남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며 중얼댔다.
‘역시 뭐든 마음먹기 달렸군.‘
호랑이의 빠른 발에 걸어서 두 시간 정도 걸릴 것 같던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곳을 단 3분 만에 당도했다.  

호랑이의 안내를 받아 수려한 경관을 구경도하고, 남녀노소 27명도 일단 만나봤다. 모두가 한 결 같이 그를 반겨주었다. 그야말로 꿈결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호랑이를 만난 지 다섯 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약간은 남감한 표정이 된 호랑이가 그에게 양해를 구해왔다. 친구인 귀머거리표범과 원래 약속이 있었는데 깜빡했다는 말이었다.
“이제 저는 가이드 일을 일단 마쳐야겠네요. 여기서는 당신 혼자 다녀도 될 겁니다. 어쩌면 그게 더 흥미로울 거예요. 그러기 전에......“
호랑이는 근처에 있는 휴대폰가게로 남자를 안내했다. 호랑이는 황금빛두꺼비모양휴대폰 두 대를 가게에서 무료로 빌렸다. 한 대는 남자, 또 한 대는 호랑이 몫이었다. 어린아이얼굴을 한 가게주인남자가 아흔 살 먹은 노인처럼 지긋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당부했다.
“내려가실 때 꼭 반납해야합니다.”

“전화주세요, 그럼 제가 도총 씨에게 쏜살 같이 달려올 겁니다.“
호랑이가 떠나기 직전 남자가 급히 물었다. 불현듯 너무나도 궁금해서였다.
“아, 그런데 호랑이 씨는 무얼 먹고 살지요?“
“저는 헤비메탈을 주로 먹고 살아요. 예술을 듣고 보고, 읽는 게 먹는 거지요. 껄껄껄, 껄껄껄, 껄껄껄껄껄-“
“헤비메탈호랑이라. 음, 그래서 우리는 인연인가 보군요. 하여간 고마웠어요, 호랑이 씨!“
“네, 그리고 혹시나 지금이라도 내려가고 싶으면 말씀하세요. 금세 태워다 드릴 테니.“
남자는 지금은 밑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이곳은 봄이 무르익어있었다.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벚꽃들이 너무 고와 그것을 밟기마저 조심스러웠다. 눈앞에는 찬란한 햇살에 온 세상을 다 채울만한 숫자의 벚꽃이 날린다. 하얀 구름위에 벚꽃이 떨어진다. 꽃잎들은 가라앉지 않고 그대로 구름에 실려 떠다닌다. 벚꽃이 그의 어깨위에 살랑살랑 떨어지고, 평온한 호수위에 떨어진다. 랜디 로즈가 벚꽃호숫가에서 하얀 손을 씻는다. 촘촘히 호수에 덮인 벚꽃 위를 한 선녀가 맨발로 걸어간다. 차근차근 서두름 없이 물 위를, 벚꽃 위를 걷는 그토록 아름다운 그 모습을 보는 남자의 눈에 눈물이 다 맺힌다. 너른 호수를 가로질러 모습이 희미해져가는 그녀를 넋을 잃고 끝까지 지켜본다.
계속 벚꽃이 온 세상을 덮고 또 덮고, 함박눈처럼 날리고- 너무나도 황홀한 광경에 취해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스칼렛과 함께라면 좋겠다만. 남자는 아래 세상에도 봄이 오면 그때는 스칼렛과 함께 벚꽃구경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그 시간이었다. 오-

간판이 ‘추억의 사진관‘이라는 곳이었다. 상하의 모두 샛노란 옷에, 키 152cm, 몸무게 98kg가량체구의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사진관 앞으로 나와 남자를 맞았다. 굉장히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말투는 상냥했다.
“여기는 추억의 사진관입니다.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고맙습니다만 저는 사진 찍을 돈이 없는 걸요?“
“괜찮습니다. 당신의 사진은 이미 이곳에 있습니다. 구경만하세요.“
무슨 말인지 아리송했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
스칼렛과 남자가 다정한 모습으로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사진 속의 스칼렛은 붉은색 잎 대신 황금색 잎을 머리에 달고 있었다. 게다가 둘은 신부와 신랑의 복장차림 이지 않은가. 남자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막 울음이 나오려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잠시 후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했다. 옆방에 사는 노인의 청년시절모습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고개는 돌아가지 않고 제 위치였고, 맑은 눈빛에 무척 늠름한 모습이었다. 더욱이 그 옆으로는 선녀가 함께 있었다. 많이 색이 바라진 그들의 사진. 선녀. 너무나 성스럽고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 노인이 그리워하던 그 선녀가 확실했다. 남자는 그들의 사진을 보고서는 막 울었다.
남자의 뇌리를 스쳐갔다. 맞다! 혹시나 아까 벚꽃이 내리는 호수 위를 걷던 그 선녀가 아닐까. 남자는 고무된 표정으로 사진 속의 선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한동안 굳어있었다.
남자는 상하의 모두 샛노란 옷에, 키 152cm, 몸무게 98kg가량체구의 여자에게 쓸 데 없는 질문을 했다.
“오골계는 어떻게 울죠?“
즉시 여자는 한없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소리 냈다.
“오골, 오골, 오골, 골고로, 골고로골골- 골골골골.......“
“........“  

간판이 ‘추억의 레코드‘라는 곳에 갔다. 감개무량하게도 세기의 헤비메탈드러머, 코지 파웰이 사장으로 있는 가계였다. “존경하는 코지 파웰선생의 실력과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난 이제 연주는 그만두고, 보다시피 레코드점을 하고 있지. 이곳에서 내가 최후로 연주한 곡이 자네가 작곡한 붉은색잎사귀 여인이야.“
코지 파웰의 말에 남자는 또 울었다.
“이곳 사람들이 가장 잘 듣고 부르는 노래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붉은색잎사귀 여인이지.“
14년 전 남자가 작곡한 노래, 붉은색잎사귀 여인이 하늘나라에서도 널리 유명해져있었다.
“곧 신곡이 입수될 모양이야, ‘황금색잎사귀 여인‘이라고.......“
가게를 떠나려는 남자에게 코지 파웰은 당부했다.
“그리고 명심하게. 오직, 헤비메탈뿐이라고! 알겠나?!“  

친절한 사람들이 일러준 대로 날아다니는 하얀 구름조각을 떼어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특별한 맛이었다. 금세 배가 두둑해졌다. 갈증은 벚꽃호수에 가서 해결했다.
밤이 되어서는 찬란한 별빛과 달빛에 취해, 벌판에 우뚝 솟은 에펠탑의 야경에 감탄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목재벤치에 누워 뜬 눈으로 두어 시간을 있었다. 잠이 들자 푸른 별들이 자기네들끼리 몸을 부대끼며 그에게 비가 되어 내렸다.

그러니까 하룻밤 자고 겨우, 이틀 째. 이제 이곳에서 시간을 마치고 내려갈 때가 된 듯싶었다. 무척 아쉬웠지만 혹시라도 아래 세상 시계가 많이도 돌아가지는 않을는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스칼렛이 걱정하고 있을 테고, 무엇보다 내일이 바로 그녀의 생일이기 때문에.
남자가 내려가려는 걸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구름을 타고 번개처럼 날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밑에서 올라왔으면 여기다 방명록 적고 가세요, 방명록!“
남자는 방명록을 적기 전에 우선 페이지를 뒤로 넘겨보았다. 겨우 두 장 넘겨보니 작성자 강기현이 있었다. 강기현은 옆방에 사는 노인의 이름이다.
노인이 적은 방명록내용을 보자면,

-유진, 아, 이유진.

---------세상,
그리움이 삶의 큰 의미가 되겠다.
그리운 세상을 바라왔다.
당신이 그립다.
지금 당신이.
내일 당신이.
봄비로 뭉클하던 그리움인지 당신인지.
당신은 그리운 향수(香水)를 담뿍 머금은 구름을 잘도 보낸다.
이토록 걸어오다
졸지에 나는 흠뻑 젖었다.----------

더구나 2년 7개월 12일이나 하늘나라에 머물던 것으로 기록되어있었다. 아마도 노인은 쉽사리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망설였던 것 같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남자는 또 막 울었다.

호랑이에게 휴대폰을 걸자 2분도 안 되어서 그에게 달려왔다. 호랑이는 남자를 등에 태우고 나무가 올라온 자리로 번개처럼 데려다주었다.
“잊지 못할 거예요. 호랑이 씨.”
남자는 또 막 울었다. 호랑이가 그런 그를 달랬다.

나무를 타고 다시 땅으로 내려가려 했다. 역시나, 밑으로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허공에 매달려있는 자체로 두려움이었다. 생각 끝에 남자는 노인처럼 하늘에 사는 사람에게 톱을 빌리기로 했다. 근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빌려주겠다고 내놓았다. 그런데 톱이 아닌 호미와 낫, 괭이 같은 농기구를 자꾸 내놓아서 남자를 난감하게 했다.
“톱이라니까, 톱!“
결국, 그 마을 이장이 굉장히 쓸 만한 쇠톱을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우리 게리 무어 형님께서 예전에 잠시 아래 세상에 내려갔다오실 때 사용했다는 전설이 담긴 톱이오. 부디 유용하게 쓰길 바라오!“

‘나무를 베어서 없앤다는 생각만 해야 한다는 것이지.‘ 남자는 노인이 말해줬던 방법대로 하늘나라에서 얻은 톱으로 나무를 꼭대기부터 잘라내고, 또 계속 잘라내며 땅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내려올 때도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칡뿌리처럼 무른 줄기를 단 여덟 번 잘라냈을 뿐이었다.

땅위에 선 남자는 마치 어떤 대단한 꿈을 이루고 온 듯 마음이 풍성했다. 남자는 폭이 좁은 외나무다리를 걷듯 비행기처럼 양팔 벌려 조심조심 기우뚱기우뚱 걸음을 떼며 웃음 지었다.
남자가 황금색잎사귀 여인을 부르며 황금색벌판의 중심을 가로지를 무렵 붉은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기울고 있었다. 멀리 태양이 지는 자리에는 웅크려 앉아 고개 숙인 사람의 윤곽이 보였다. 남자는 계속 비행기처럼 양팔 벌려 기우뚱기우뚱 그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가까이 가서 보자,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옆방에 사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말한다.
“나무를 놓쳤어.“
노인은 사진을 한 장 손에 쥐고 있었다. 선녀의 모습이 담긴 낡은 흑백사진 한 장만이 그에게 남았다.
“선녀는 하늘에 올라가기 며칠 전부터 뜬금없이 Parisienne Walkways를 아느냐고 묻곤 했지. 그때마다 나는 파리에 가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는 대답만 했어. 파리의 추억을 담은 영화나 음악 따위가 선녀의 가슴 깊이 새겨진 이유일 거라 넘겨짚었던 것이지. 선녀가 간직한 파리의 추억만큼은 꼬치꼬치 캐묻긴 싫어서, 그것을 한 가지 반짝이는 비밀처럼 남겨주려 했었는데 말이야.”
노인은 울고 있었다. 파리는 선녀가 사는 하늘이었고, 그 깊은 추억을 내가 어찌할 수 있었겠느냐며, 노인은 땅바닥에 웅크려 일어날 줄 모른다.
11월로 접어든 날부터 황금색벌판에 나와 기다렸지만 하늘에 오르는 나무를 탈 기회를 깜빡 놓쳤다며, 그리고 하늘에 오르는 나무가 새로 나려면 258년 후 11월까지 다시 기다려야 한다며 망연자실한 노인은 황금색벌판위에 덜렁 누워버렸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스러움이 있었으니, 비틀어졌던 노인의 고개가 이제 제 위치로 돌아와 있으니 하는 말이다.

태양이 거의 다 기울었을 그때,
선녀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기현 씨, 나무 따위는 필요 없어요.”



<끝>

감사합니다.
댓글 1
  • No Profile
    candy 11.09.24 19:45 댓글 수정 삭제
    꽤 재밌게 읽었어요. 스칼렛이 쫌더많이등장했음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자유롭고 참신하고 매력적.

    속편없나요? 뭔가 자꾸자꾸 쭉쭉나올것만 가튼데. 스칼렛과의 동거담을 더.. 더!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397 단편 도마뱀 여인 김진 2011.09.02 0
396 단편 큐어 박재권 2011.09.02 0
395 단편 영원의 단면2 샤유 2011.09.03 0
394 단편 사희월도(思姬月刀) 이니 군 2011.09.04 0
393 단편 아몬-레2 먼지비 2011.09.04 0
392 단편 Spanish Guitar 김진 2011.09.05 0
391 단편 용 사냥1 이정도 2011.09.09 0
390 단편 마치 좀비처럼 2011.09.09 0
389 단편 폐허로 만들어진 성 Leia-Heron 2011.09.14 0
단편 황금빛 추억1 김진 2011.09.24 0
387 단편 리무버4 gozaus 2011.09.22 0
386 단편 글레바력 13세기 hallyeia 2011.09.26 0
385 단편 거미에게 나비를 모베 2011.10.01 0
384 단편 뼈의 발견자 Mothman 2011.10.03 0
383 단편 장미 행성 Mothman 2011.10.03 0
382 단편 화장터 목이긴기린그림 2011.10.03 0
381 단편 질식 김진 2011.10.04 0
380 단편 오덕후 김박사의 위업 OMB-J2 2011.10.10 0
379 단편 [엽편]피리 명인2 먼지비 2011.10.09 0
378 단편 괴 산 전광용 2011.10.0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