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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Spanish Guitar

2011.09.05 21:0209.05

제목 : Spanish Guitar


※ Spanish Guitar : 아일랜드출신 기타리스트 Gary Moore(1952년 4월 4일 - 2011년 2월 6일)가 연주한 곡.
http://www.youtube.com/watch?v=-WBFBsZeYfg&feature=related <- 배경음악, 클릭

붉게 석양에 물들어가는 매바람강변, J.o.S바(bar)에는 게리 무어의 곡, Spanish Guitar가 흐르고 있었다. 기다란 바테이블에 홀로앉아 쿠바산 시거를 피우는 바바리코트차림의 중년남자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상념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음악에 잔뜩 몰입 중이다. 그가 바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바의 사장, 화랑에게 물었다.
“이 곡의 제목이 무엇이오?“
“Spanish Guitar입니다.“
“스페인 사람이 연주한 곡이오?“
중년남자의 질문과 함께, 곧바로 그의 뒤통수에 정체모를 둔기를 내리친 젊은 여자가 있었다.
“퍽!“ “이런 무식한 새끼!“
“아이구구.“
중년남자는 가격당한 뒤통수를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고통스러워했다.
“은영아, 그러지 마!“
바테이블 안쪽에 앉아있던 화랑이 소리치며 달려 나와, 그녀를 말리고서는 부랴부랴 창가 측 테이블로 데려가 앉혔다.
화랑이 다시 돌아와 중년남자가 얻어맞은 부위를 돌보며 물었다.
“죄송합니다. 많이 다치셨습니까?“
“그럭저럭 괜찮은 거 같소.“
중년남자의 뒤통수에 거대한 혹이 생성되는 와중에 화랑의 얘기가 시작된다.
“저 여자는 제 후배의 애인이었죠. 그런데 그 후배는 죽었어요. 지금 흐르는 Spanish Guitar는 죽은 애인, 그러니까 그 후배가 저 여자를 이곳으로 처음 데리고 와서 꼬실 때 한껏 분위기 잡기위해 저한테 요청해서 틀었던 곡이죠. 매우 사색적이었던 그 후배와 저 여자는 이 곡의 분위기에 취해, 사실상 그것을 계기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 거죠.“
화랑의 말을 듣는 중년남자는 표정이 잔뜩 어두워졌다.
“불쌍한 여자입니다. 후배가 죽은 지 얼마 후 저 여자는 이곳저곳에서 기행을 일삼고 다니는 싸이코가 된 거죠.“
“흠, 그렇구려.“
“저 여자가 이 바에 오면 항상 Spanish Guitar를 틀어 달라고 하죠. 다섯 번 정도는 연속으로 틀어줘야 마음에 놓이나 봐요. 저렇게 고운여자가 싸이코가 돼서. 서로 얼마나 사랑했으면........ 아 흐흑.“  
화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중년남자는 커다란 창밖의 매바람강변을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너편 테이블의 여자에게 시선을 향했다. 안개와 석양이 뒤섞여 물든 매바람강을 배경으로 한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고혹적이었다.

중년남자는 우선 고가의 양주 한 병을 카운터에서 주문했다. 쿠바산 시거를 삐딱하게 입에 물고, 한 손에는 양주병을 들고 여자가 앉아있는 테이블 앞에 그는 다가섰다.
“아가씨와 술 한 잔하고 싶소만.“
여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초점 없는 시선으로 계속해서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중년남자는 테이블위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허공에 길게 쿠바산 시거연기를 내뿜은 그는 이내 같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그때야 그녀가 고개 돌려 중년남자를 바라봤다.
던지듯 입에 문 담배에 성냥불을 붙인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꺼져.“
[.......꺼져?] “허허, 나는 아가씨 삼촌뻘쯤 되는 나이 같은데 반말은 좀 그렇잖소.“
“좆까세요, 씨방새 님아!“
바에 가득 울려 퍼지는 Spanish Guitar 선율과 중년남자의 당황한 마음에 콩닥콩닥 거리는 심장박동이 엇박자를 이루고 있었다.
“흐르는 음악과 아가씨의 아름다운 자태가 어우러져 발해지는 그윽한 향으로 인하여, 한껏 부풀어 오르는 이내 마음을 딱히 진정시킬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겠소!“
애써 마음을 가다듬은 중년남자가 그처럼 강단 있게 운을 뗐다. 말이 되는 소리인지 어쩐지는 그도 잘 몰랐다. 그러자 그녀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은 비웃음이나 다름없었다.
후---- 그녀가 입속에 깊숙이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중년남자의 얼굴에 길게 내뿜고는 말했다.
“하오체 쓰지 마라.“
‘!‘ ........중년남자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예, 에? 그러지요. 예. 아, 안 쓰겠습니다.“
중년남자의 표정과 목소리는 무척 비굴한 것이었다.
곧장 그녀의 돌발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넌 사랑을 아니?“
“글쎄요, 사랑이란 것이........“
“하긴 너같이 느끼한 늙은 늑대 같은 자가 알 리 만무하지.“
순간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지 못한 그녀는 푹 숙인 고개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아가씨! 새로운 시작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원초적인 삶의 도리 중 하나라 할 수 있습죠. 이를 테.“ “철썩!“
“닥쳐! 입바른 소리 하지 마!“
그녀는 막무가내로 중년남자의 귀싸대기를 한 대 올려붙였다.
중년남자는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사색이 된 그는 당장 어찌해야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했다. 이 여자를 실력으로 다스려야하는 것인가,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저 이해해주어야 옳은 것인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중년남자는 그녀를 더 겪어보기로 했다. 순식간에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곱게 접힌 손수건을 코트주머니에서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눈물 닦으세요.“
“그래, 고맙네요.“
그녀는 건네받은 손수건을 테이블에 펼쳐, 그 위로 담뱃재를 떨었다.
“재떨이 가져오겠소. 요.“
“제발 그냥 앉아 있으세요, 예? 아시겠어요?!“
그녀의 호통에 중년남자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중년남자를 붙들어두고 자신의 사랑론을 비롯해서 오만가지 잡다한 얘기들을 목에 핏대를 세우며 쉬지 않고 토해냈다.
“어두컴컴한 거리를 걷고 있는데 글쎄 내 앞에 있던 맨홀뚜껑이 열리는 거야! 그 속에서 걔가 나오더라고. 그때 이슬비가 촉촉이 내릴 때였고, 걔 손엔 카라가 한 다발이 들려있었지. 그걸 건네주는데 내 기분이 어땠겠니?“
“좋았겠습니다.“
“장미도 아니고 카라였어! 어땠겠니?“
“좋았겠습니다.“
“이슬비에 카라 한 다발, 걔 감각이 남달랐던 거야. 장미는 무척 아름답긴 해도 그때는 카라가 더 어울리는 거였겠지. 사랑은 감각이 있어야하는 건데, 무미건조한 사랑이란 안 하니만 못한 거지.“
시종일관 담배를 꼬나물고 불량한 태도로 말을 쏟아내는 그녀를 상대하자니 중년남자는 마치 괴팍한 외계인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폭력만 쓰지 않는다면 꽤나 재미나기도 할 터인데.
  
저녁 07:20분, 바에는 다른 손님이 없다. 사장 화랑은 카운터구석에 설치된 컴퓨터 앞에 앉아 저질게임을 하느라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 그는 여섯 번 반복되던 Spanish Guitar를 끄고 다른 음악으로 바꿀 때만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었다.
이제 강렬한 헤비메탈이 바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Exodus의 곡, Bonded By Blood가 초반 심상치 않은 효과음으로 시작되더니 이내 폭발한 것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mdRW1nf8dVA&feature=related 그러자 여자는 느닷없이 음악에 맞춰 헤드뱅잉을 하기 시작했다. 광적인 헤드뱅잉에 중년남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중년남자는 악랄한 음악소리에 귀를 막고 눈을 꽉 감아버리고 싶은 지경이었지만, 그녀는 음악에 열광했다.
무척이나 심란한 와중에 난데없이 화랑이 게임 중인 컴퓨터본체에서 뿌옇게 솟아나는 연기가 보였다.
“연기가 나잖소!“
놀란 중년남자가 카운터를 항해 외치자 여자가 헤드뱅잉을 멈추고 대꾸했다.
“괜찮아, 원래 자주 그래.“
화랑도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거리가 떨어져있고, 음악소리가 워낙 커서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했소?”
중년남자가 묻는 말에 역시 뭐라고 대꾸는 하는데 들리지 않았다. 일부러 작게 소리 내서 얘기하는 것 같기도 했다. 대신 여자가 화랑이 한 말이라며 설명해줬다.
“아저씨한테 이러는데? 별거 아니니까 염려하지 마시고 당신 까던 좆이나 열심히 까세요.”
거짓말 같았다.
한술 더 떠 여자는 아예 노래를 불렀다. “좆 까세요, 좆을 까. 아, 좆을 까세요, 좆을 까. 호호호.”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그 모습에 중년남자는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상스럽게 여겨져야 할 그 말이 전혀 상스럽지 않게 들렸다.
그러나저러나 이 바는 기묘한 곳이다. 엉뚱하다. 어쩌면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그녀의 열변은 멈추지 않았다. 내일까지 계속될 기세였다.

저녁 07:56분, 역시 손님은 중년남자와 여자뿐이다. 사장 화랑은 컴퓨터에서 연기를 뿜으며 계속 저질게임을 하는 중이다. 바는 이미 연기와 음악과 그녀의 열변으로 뒤섞여 가득 차 혼란한 지경이다. 그런 와중에 중년남자가 제대로 한마디 말할 기회가 생겼다. 그녀가 그에게 반짝반짝 빛이 나는 눈빛으로 물었다.
“삼촌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냐?”
중년남자는 무심결에 이렇게 말했다.
“낮에 켜진 가로등마저 당신을 밝혀줍니다.”

휘이잉- 밖에서는 몹시도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창문들이 깨질듯 심하게 덜컹댔다. 끼이익- 문득 바의 출입문이 열렸다. 연기 속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키152cm, 몸무게 98kg가량 체구에, 상하의 모두 샛노란 옷을 입은 중년여자가 역시 상하의 모두 샛노란 옷을 입은 남자꼬마아이를 옆에 두고 있었다. 문 앞에 선 그 여자가 카운터를 향해 무뚝뚝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 사진관 아닌가요?“
사장 화랑이 모니터에 가려진 얼굴을 내밀어 그녀에게 대답했다.
“여긴 바입니다. 술 마시는 곳이에요!“
화랑의 말이 끝나자마자 난데없이 전기가 모두 꺼졌다. 음악이 멈추고 내부가 컴컴해졌다. 게임을 못하게 되어서 화가 난 화랑이 컴퓨터모니터를 몽둥이로 내리치며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콰직!“ “이런 총체적인 씨부럴 같은 경우를 보았나!” 역시 이 바의 사장도 보통정신의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중년남자는 그 순간 했다. “씨부럴, 씨부럴 총체적인 씨부럴.” “씨부럴, 씨부럴, 총체적........” 화랑이 입에서 내뱉는 그것이 중년남자에게는 무슨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에게는 꽤나 중독성 있게 느껴졌다.
10여초 넘게 계속되던 씨부럴 타령이 끝나고 이제 바는 어둠과 적막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어둠속에서는 여자의 열변도 들리지 않았다. 이틈을 타 여자에게서 도망칠 수도 있지만,  그런 마음은 이미 접어둔 그였다.
어둠속에서 화랑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전등이 안 찾아지네요. 촛불을 켜야 하는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서 말했다.
“저 오줌 누고 올게요.“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이 너무나도 다소곳했다. 참으로 놀랍고도 뜻밖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중년남자는 그녀에게서 도망치지 않은 보람을 이제야 찾은 듯싶었다.
바는 정상의 모습을 되찾았다. 연기도 걷히고 음악도 제대로 흐르고 있다.
중년남자는 문득 궁금해졌다. 조금 전 바에 찾아왔던 키152cm, 몸무게 98kg가량 체구에, 상하의 모두 샛노란 옷을 입은 중년여자와 옆에 있던 남자아이는 어디로? 어느 틈에 사라지고 없는 그들에게 묘한 여운이 남았다. 중년남자는 여자와 함께 있던 남자꼬마아이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뜬금없게도 중년남자는 바의 여인, 은영과 춤을 추고 싶은 소망이 생겨났다. 지금에서는 당연히 허황된 꿈에 가깝지만, 그녀가 화장실에서 돌아오면 ‘당신과 춤을 추고 싶소(싶습니다)‘라고 사정하고 싶었다.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함께 춤을 춘다면 좋으련만. 중년남자는 그녀와 함께 춤을 추는 상상에 빠진다.
[그녀에게서 오렌지향기가 난다.]
[그녀와 함께 Spanish Guitar를 탄다.] Spanish Guitar는 뜨거운 열정이다. 그녀와 함께 춤추기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곡이다.
[그녀가 소변을 보기위해 무릎으로 내리는 팬티의 색깔은 무엇일까?] 중년남자는 눈감고 그녀에 대한 상상을 하느라 황홀경에 빠져 헤죽거리고 있었다. 계속되는 그의 기이한 행위를 깨는........
“저놈 이상하네.“
화장실 갔던 그녀가 돌아왔던 것이다.

그녀의 열변은 멈추지 않았다. 내일까지 계속될 기세였다.

저녁 08시 22분. 연기가 많이 난다는 그녀의 신경질에 지금껏 그 좋아하는 쿠바산 시거도 피울 수 없었다. 주문한 고급양주는 그녀가 거의 다 마셔버렸다. 술김에 나오는 그녀의 위세는 처음보다 더하면 더했지 수그러지지는 않았다.
굳게 마음을 먹은 중년남자가 단호한 어조로 요청했다.
“저도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좀 참자고요, 예? 그걸 몬 참어?!“
다시 그녀의 얘기가 시작되고 여차저차 후,
“내 남자친구는 걔 삼촌이 대표로 있는 회사, ‘튼실한 상수리나무‘에서 일하기로 했었지.“
충격! 그리고 경악! 중년남자는 뜻밖에 다시 둔기로 머리통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뭐, 뭐요? 상수리나무?“
“그래요, 걔 삼촌인, 아마 이름이 김성수라고 했지. 아무튼 그 김성수인가 하는 분이 대표로 있다는 제약회사, 튼실한 상수리나무라는 곳이 있답니다. 아주 잘나가는 회사라지.“
중년남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앉아있던 의자가 들썩일 만큼 격한 동작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단단히 작심한 표정이 된 그가 황급히 말을 쏟아냈다.
“아가씨와의 대화는 오늘 참 즐거웠습니다. 아가씨가 처음에 말씀하신대로 저는 이제 꺼지도록 하겠습니다.“
부랴부랴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친 중년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바의 문을 향해 갔다.
“야, 이 개새끼야! 내 얘기 더 듣고 가- 아 아아, 아아 아, 어 어어 엉엉!“
중년남자의 뒤통수에 그녀의 통곡하는 소리가 작열했다.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뜬 중년남자는 서둘러 바의 문을 열었다.
‘죽은 내 조카 청춘이의 애인이었다는 여자가 저 아가씨라니.‘
바의 여인 이은영의 애인이었으며, 중년남자 친형의 아들인 김청춘은 3년 전 예비군훈련을 받다가 총기오발사고로 죽었다. 그때가 김청춘의 나이 스물일곱 살이었다. 중년남자는 언젠가 자기 애인을 인사시켜주겠다는 김청춘의 말이 떠올랐다. 그 아가씨가 바로 오늘 만난 바의 여인인 것이다. 청춘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이나 지났건만 그녀는........ 더욱이 그의 뇌리를 스친 것이 있었다. 상하의 모두 샛노란 옷에, 키152cm, 몸무게 98kg가량 체구의 중년여자와 함께 있던 남자아이는 바로 죽은 김청춘의 유년시절 모습과 똑같았다. 아니, 그야말로 김청춘이라 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김청춘은 중년남자 김성수와 각별한 사이였다. 김청춘이 열세 살 때 그의 아버지가 병으로 죽은 이후로 김청춘은 김성수에게 더욱 의지해왔었다.
중년남자는 침통한 심정이었다.
‘아아! 허망하도다. 나의 청춘아........‘

중년남자는 매바람강변길에 섰다. 길을 걷자, 어느덧 둔기에 맞은 뒤통수에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욱신거려오는 뒤통수를 한 손으로 감싸 쥔 중년남자는 상념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쿠바산 시거를 피우며 매바람강변을 거닐었다.
중년남자는 ‘(그 여자에게) 명함이라도 주고 올걸 그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슬금슬금 고개를 저었다.

차를 운전하고 집으로 가는 도중 중년남자는 저도 모르게 주문을 외웠다. ‘씨부럴 씨부럴, 총체적인 씨부럴.’ ‘씨부럴 씨부럴, 총체적인 씨부럴.’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그는 머릿속에 가득 맴도는 게리 무어의 Spanish Guitar 선율을 느끼며 뒤로 눕지 못하고 앞으로 몸을 뉘어 불꽃같은 잠을 이뤘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한 중년남자가 젊은 여비서를 불러 물었다.
“김윤하 씨, 혹시 카라가 어떤 꽃인지 아시오?“
“네? 카라요? 아! 카라는 대파줄기처럼 생긴 꽃입니다!“
“흠, 그렇구려.“
“백합은 아시죠? 백합하고 비슷하기도 합니다.“
“백합이라 백합, 백합........ 백합은 또 뭐지?“
중년남자는 백합을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당최 떠오르지 않았다.


**
차가운 11월이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이 저녁, 중년남자는 우산을 들고 거리에 섰다. 다양한 색상의 둥근 우산행렬이 길가를 메우고 있었다. 도로에 고인 빗물이 지나가는 차들의 바퀴에 갈라져 나는 소리가 더없이 상쾌하게 들렸다. 중년남자가 뿜는 쿠바산 시거연기는 다른 날보다 유난히 운치를 더했다.
/Spanish Guitar!/
-천천히 가슴에 불이 지펴지기 시작했다. 가슴에 일어나는 아릿한 파문에 그는 자리에 멈춰 섰다. 레코드가게 앞에 설치된 대형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다름 아닌 게리 무어가 연주한 Spanish Guitar였다. 세상의 그 많고 많은 음악 중에 Spanish Guitar가 여기서 지금 나왔다는 것은 전혀 뜻밖이다.
중년남자는 들고 있던 우산을 슬며시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자리에 서서 결코 움직일 수 없었다. 음악이 흐를수록, 지난날 바에서 둔기에 맞았던 뒤통수가 찌릿찌릿 아려오는 느낌이 일었다. 바바리코트가 젖고 쿠바산 시거의 불꽃이 꺼지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1월의 찬비를 맞으며 중년남자는 음악을 끝까지 들었다.
그동안 무엇을 한 것인가, 비로소 음반을 샀다. 사는 동안 잠잠했던 열정이 다시금 불타오르는 시점이 아닐까 싶었다.
바를 간지는 7개월가량 지났다. 머리의 혹과 통증은 가라앉은 지 너무나 오래지만 어쩌다 미세하게 그 부위가 당겨오는 느낌이 일고는 했다. 그럴 때면 그 바와 여인이 생각났었다.

중년남자는 꽃집에 들렸다.
“카라를 있는 대로 다 주시오.“
“11월에는 카라가 없어요.“
“그럼 그 비슷한 백합으로 주시오.“
잘 포장된 백합 66송이를 품에 안은 중년남자는 비를 맞으며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와, 꽃을 든 미중년이다!“
그 소리가 난 쪽을 향해 중년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젊은 아가씨가 세 명 있었다. 그가 그윽한 표정과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들 중에 누가 나를 불렀소?“
“전데요?“
열정적인 외모와 차림새의 그 아가씨에게 꽃과 명함을 건네고 돌아섰다. 동시에 더없이 흡족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려있었다.
저벅저벅 빗물이 걸리는 발길에, 비에 흠뻑 몸이 젖을수록 마음은 평화로워진다. 뿌듯해진다. 오히려 더 따스해진다.
좁은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둥근 오렌지색가로등빛에 부서지는 빗줄기아래 그는 섰다. 그랬던 것 같다. 비처럼 내리는 사랑노래를 그리워했었다. 이제 11월의 비를 노래한다.

밤늦게 집에 돌아온 중년남자는 잠결에 깊은 꿈을 꾸었다. 오늘 찬비 내리는 거리에서 받은 여운이 꿈속에서도 이어졌다.
빗속에 낙엽이 진다. 쌓인다, 낙엽이. 그토록 신속하게 계속 쌓인다. 발목을 덮고, 무릎을 덮고, 허리까지 덮인 낙엽위에 쓰러져 눕는다. 계속, 계속해서 산처럼 쌓이는 낙엽에 자취를 감춘다. 가로등불이 산산이 깨진다. 세상이 어둑어둑해졌다. 바람은 계속 세차게 휘감아 온다.
이것은 꿈이지만 꿈이라 하지는 않는다.


***
http://www.youtube.com/watch?v=Hsyq4jOOWD0&feature=related <- 음악 : One Day
첫눈이다.
12월 13일, 첫눈치곤 늦은 편이다. 내린다. 많이도 내린다. 낮 02시 20분. 한낮에 내리는 눈이 절경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중년남자는 운전하던 차를 세웠다. 마땅한 자리를 찾아 안전하게 주차하고 내려서 걷기로 한다. 눈이 많이 쌓여 더 이상 차를 움직이기는 무리다. 어림잡아 1.5km정도만 걷는다면 목적지인 J.o.S바에 도착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늦지는 않았는지. 언제나 머뭇대기만 해오다가 이제야 간다. 처음 그 바에 가고 2년 8개월이나 흘렀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그들이 있으려나. 그 바와 사장과 그녀, 모두 그 자리 그대로 있어준다면 좋으련만. 거기다 이 눈 오는 날을 더없이 훈훈하게 해줄 Spanish Guitar까지 함께한다면 우리는 모두 대단히 행복해지리라. 행여 그녀가 없다면 그녀의 소식을 바의 사장에게 묻고, 나중에라도 그녀에게 자기의 명함을 건네주라고 그에게 부탁할 생각이다. 오늘이 아니면 무척 아쉽겠지만, 어쨌든 기회가 된다면 어떻게든지 그녀를 만나볼 마음도 강렬했다.
중절모를 썼다. 머리에 눈을 맞지 않기 위해서다. 역시 두툼한 바바리코트차림이고, 상념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쿠바산 시거를 피우고 있다. 피어나는 쿠바산 시거연기가 눈보라 속에 순식간에 사라진다. 춥다.

예상한 1.5km를 더 지났다. 바는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2-3km정도 걸은 듯싶다. 어디인지. 저기쯤이라 생각하고 가보면 그 자리가 아니다. 주위를 살펴도 길을 물어볼 사람마저 보이지 않는다. 차에서 내린 이후 지금까지 아무도 못 봤다.
세찬 눈보라로 쿠바산 시거를 피우기도 힘들어진다. 두툼히 쌓인 눈 위에 쿠바산 시거를 꺾는다.
화르르- 화르르- ‘눈!‘ 그토록 하얀 눈이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내린다. 이 눈 오는 길을 걷다 반가운 누군가를 만난다면 좋으련만.
눈은 설렘이다. 내리는 눈에 가슴이 깜빡인다. 쌓인 눈에 눈빛이 반짝인다. 그가 어린 시절, 마당에 서서 가만히 흐린 하늘을 바라보다가 아, 눈이 오겠다는 느낌이 들면 이내 눈이 내렸다. 자연스럽게 그것이 감지되었다. 특히 첫눈이 오길 잘 알아맞혔다. 그에게는 그토록 그것이 감개무량하게 여겨졌다.
기쁜 눈을 맞으며 어디든지 걸어갔었다. 그때의 들뜬 발걸음이 아직 생생하게 여운이 남았다. 살던 곳이 고지가 높은 시골이어서 발걸음을 포근히 해줄 길이 많았다. 큰길에서 작은 길로, 들길을 걸어 도랑을 건너고, 오솔길을 걸어 산으로 가기도 했다. 열 살 때 어느 눈 오는 날에는 가장 친한 친구를 작은 길에서 마주친 적도 있었다. 짙은 눈발 사이로 저 멀리에서 이쪽을 향해 오는 친구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도 그만큼 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을 것이다. 뜻하지 않은 길에서 만나서 더 기분 좋았고, 한 편으로는 신기했다.
너 여기 왜 왔냐는 녀석의 물음에,
“어, 눈 와서.“
“나도.“
둘은 한참 같이 걷다 해질 무렵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었다.

이제 더, 더 많이도 걸었다.
세찬 바람에 중절모가 벗겨졌다. 순식간에 너무 멀리 날아가 버려 찾기를 포기한다.
멈춘 바람. 눈 위에 놓인 가랑잎 한 장을 바라본다. 갈색 가랑잎은 곧 날아간다. 춥다. 시리다. 다시 회오리친다.

매바람강변에서 벗어난 지는 한참이고, 어느덧 중년남자는 드넓은 설원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이제 얼마나 왔는지, 맞는 길이 어딘지를 감 잡을 수 없었다. 이 길을 가기란 위험천만한 짓이다. 그러나 이미 벗어날 수 없을 지경이다. 다만 본능처럼 걸어갈 뿐이다.
하늘 높이에는 일곱 마리의 회색빛깔 새들이 날아간다. 쓸쓸한 그 새들이 사라지기까지 묵묵히 서서 지켜본다.
중년남자는 이 설원의 능선너머에 있을 그곳이 그저 무척 궁금해졌다. 그곳에는 아마도 낙원이 있을 것만 같다. 혹시나 그리운 그 누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을는지 기대를 가져본다. 기대는 소망이 된다. 첫눈과 함께하니 그 꿈은 더 부풀어진다.
노래한다. ‘여기 다시 내가 간다. 홀로 걷도록 태어난 유랑자처럼. 난 마음을 정했어.‘라며.

눈이 멈췄다.
곰이 걷는다. 날이 환희 밝아진 설원의 능선을 걷는 넉넉한 덩치의 하얀색 곰이 보인다. 곰이 눈을 헤쳐 저 너머로 달린다. 곰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곧 사라진다.
두텁게 쌓인 눈밭위에 두 팔을 뻗고 눕는다. 쿠바산 시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시린 겨울의 깊고 파란하늘을 향해 하얀 연기를 내뿜는다.
잠시 쉬어갈 자리를 찾을 수는 있어도 꾹 눌러앉아서는 안 된다. 미련퉁이 곰처럼 눈 쌓인 언덕을 데굴데굴 굴러서라도, 인정사정없이, 그곳을 향해!
반짝이는 설원의 정상에 올랐다. 이제 내려가야 한다.

휴대전화가 되지 않는다. 휴대전화의 기능인 위치확인도 물론 안 된다. 여기가 알래스카인지, 시베리아인지, 미국인지, 키르키스탄인지, 도무지 어딘지 모르겠다며 누군가에게 하소연해보려 했지만 전화는 먹통이다.


****
해가 지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막막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우선은 침착해야했다.
10여분정도 걷자,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한 송이, 또 한 송이 포슬포슬 약하게 내리던 눈이 점점 굵어진다. 더불어 그의 걸음도 더욱 빨라진다. 어렵사리 비탈을 내려간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밭을 사력을 다해 해쳐나간다. 쓰러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힘겨운 싸움이다. 때로는 기어서 가기도한다. 굴러서 가기도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 눈 덮인 벌판에서 얼어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닥치기는 한참 전부터다. 갑갑함을 넘어 칠흑 같은 시간이다. 그렇지만 그는 끈덕졌다. 이처럼 생사의 기로에 선 상황에서 그가 내뱉은 말은 황당하게도 이것이었다. ‘씨부럴 씨부럴, 총체적인 씨부럴.’ ‘씨부럴 씨부럴, 총체적인 씨부럴.’
스물여섯 살 때인 그해 연말, 그때 다니던 직장에서 여섯 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돈을 한꺼번에 도박장에서 잃고서 깜깜한 밤, 집으로 걸어갈 때 내리던 눈발이 그리도 거세더니만. 그날 질린 가슴으로 맞았던 눈은 지금에 비하면 덤덤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날 집에 거의 다다라서 때마침 마주친 여동생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를 피해서가는 여동생을 불러 세웠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어? 뭐야? 노숙자인줄 알았어.”
그때도 먹먹한 심정이었지만, 지금처럼 끔찍하지는 않았다.

어둠이 서린 눈밭에서 계속해서 사투를 벌이다가 문득, 댕- 댕- 댕- 교회의 종소리를 들었다. 저 멀리에서 희미한 불빛들이 보인다. 그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다.
중년남자의 입에서 겨우 한 마디 새어나왔다.
‘어머니!‘

어느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주위에 다른 건물은 당장 눈에 띄지 않았다. 건물 앞뜰에는 누군가 눈사람을 만들어 놓았다. 은은한 수은등조명아래 다양한 모양의 눈사람이 여덟 개가 서 있었다. 그중에서 작은 나무토막을 입에 문 눈사람이 특히 시선을 끌었다. 그것은 흡사 시거를 피우는 모양처럼 보였다. 그 왼쪽에 선 눈사람은 마치 총에 맞은 듯 머리부위가 엉망진창으로 부서져있었다. 또 그 시거를 피우는 모양처럼 보이는 눈사람 오른 쪽으로는 작은 키에 무척 뚱뚱한 여자를 형상화시켜놓은 묘한 모양의 눈사람이 있었고........

출입문이라고 적혀있었다.
“이보시오. 아무도 없소?!“
초인종을 찾지 못해 문을 두들겼지만 반응이 없었다. 끼익- 중년남자는 나무로 된 문을 밀어서 열었다. 거리낌 없이 문이 열리길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훈훈한 실내공기가 밀려나왔다. 이토록 좋은 느낌이 있을까. 참으로 아늑한 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중년남자의 입에서 이제야 안도의 숨소리가 나왔다.
몸이 녹초가 되었다. 지금껏 너무나 혹사당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 바닥에 쓰러져 누워 쉬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사람을 만나는 일이 우선이라는 마음이 그를 자제시켰다. 일단은 젖은 바바리코트를 벗어들었다.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무척 넓은 실내였다. 들어오기 전에는 이처럼 넓은 공간인지 몰랐다.
“아무도 없소?“
환한 조명아래, 크고 작은 많은 사진액자들이 벽에 붙어있거나 바닥에 세워져있었다. 사진관 같았지만, 그 이상으로 무언가 특별해 보였다. 들어오기 전에는 미처 이곳이 어떤 곳인지 간판을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중년남자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며 사진들을 둘러보았다. 아이들 사진, 가족사진, 프로필사진, 증명사진 같은 사진관에서 찍는 사진을 비롯해서, 야외에서 찍은 풍경, 접사, 생태, 이미지사진까지 아주 다양했다. 어떻게 보면 이곳은 마치 사진전시관 같기도 했다. 물론 사진을 찍는 스튜디오도 내부에 조성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사진관임은 틀림없어 보였다.
“아무도 없소?“
사람이 왜 없을까. 그저 기다려보는 수밖에.
한 걸음 두 걸음 더 옮기다 보니, 벽에 걸린 중절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익숙한 모자였다. 중절모를 들고 확인했다. 확실히 그가 오늘 잃어버린 모자임을 알 수 있었다. 모자 안쪽에 새겨진 ‘K성수‘라는 글자가 그것을 말해주었다. 누군가 이곳에 주어다놓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 험한 길에서 누가?! 오늘 낮, 설원에 몰아치던 그 회오리소리가 지금 생생히 그의 귓속을 파고드는 듯했다.
아무래도 자리에 앉아 쉬고 싶은 마음이 가득 밀려왔다. 편안해 보이는 소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발견했다. 벽에 걸린 사진에는 중년남자 김성수가 바의 여인 이은영의 허리를 감싸 안고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이 실물크기로 담겨있었다. ‘아-‘ 사진을 본 중년남자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그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졸도할 뻔했다. 가슴에 깊은 파문과 함께 현기증이 일었다. 이토록 편안하고 행복한 모습들이라니. 중년남자는 그대로 꽉 굳어 사진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대로 한창 감회에 젖어 정신을 빼앗길 때였다. 음악이 들려왔다. 어디선가 아련히 들려오는 음악소리는 놀랍게도, ’Spanish Guitar’였다. 음악이 흐를수록 색이 진해질수록 지난날 바에서 둔기에 맞았던 뒤통수가 찌릿찌릿 아려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문득 두려워졌다.
중년남자는 급히 휴대전화기를 꺼내들었다. 그의 여비서 김윤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신호가 갔다.
전화를 받은 김윤하가 기다렸다는 듯이 불쑥 말했다.
“대표님 저 지금 팬티 속에 손을 넣고 있어요.“
중년남자는 황당했지만 이런 와중에서도 그 한 마디에 흥분이 일었다. 그의 아랫도리가 주책없이 불끈거렸다. 사실 중년남자와 김윤하는 폰섹스를 즐겨하던 사이다. 물론 실제 관계한 적도 잦았다.
오늘 김윤하 씨가 입은 팬티 색깔이 무엇이오? 하고 물어보려던 마음을 간신히 누른 그가 말했다.
“김윤하 씨, 나요.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소. 도대체 여기가 어디요? 미국이요? 키르키스탄이오? 천국이오? 지옥이오? 꿈같기도 하지만, 아마도 나는 죽은 게 아닌가 싶소.“
그때도 계속 Spanish Guitar는 들려왔다. 전화에서 들리는 소리인지 다른 곳에서 들리는 소리인지 알아채기도 당장은 애매했다. 음악소리를 비집고 김윤하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그런 농담하지 마시고, 제 얘기를 들어보세요. 나 지금 젖어있답니.......“
“나중에 합시다. 정말 나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섹스를 하고 싶습니다. 당장 내 것을 빨아주세요. 빨아주세요. 아아, 쪽쪽 빨아주세요. 예쁘게 단풍이 물든 내 것을.......”
계속되는 그녀의 음란한 언어발산에 참다못한 중년남자는, 차라리 막 울고 싶어졌다. 그녀가 몇 번인가 이렇게 더 속삭였다.
“빨아!”
그렇지만 그는 아무 대꾸할 수 없었다. 잠시 후 김윤하가 무슨 말에 대답하듯이 말했다.
“네, 새벽 세 시에 이런 전화를 건 대표님을 저는 기억하겠습니다.“
웬일인지, 뚝하고 전화가 끊겼다. 살며시 귀에서 전화를 떼어 보자 어딘가에서 Spanish Guitar는 생생히 들려왔다. 김윤하에게는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해보기로 하고, 우선 그 소리의 출처를 찾아보려는 마음이 강해졌다.
음악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휴대전화와 손목에 찬 시계에는 아직 저녁 08:17분으로 되어있었다.
시름에 잠긴 중년남자의 뇌리에 스쳤다. ‘아! 이곳은 사진관이 아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차차 알게 되겠지.‘
배가 고팠다. 무엇이든지 먹고 싶었다. 이곳에서 사람을 보게 된다면 당장 밥을 내놓으라고 다그치고 싶었다. 음악소리의 출처를 찾아내면 자연히 거기서 사람도 만나게 될 터이니, 그에게 밥을 얻을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겼다. 지금껏 큰 고비를 넘기고 왔으니 조급해지는 마음을 누르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인내해보자며, 중년남자는 되뇌었다.
오른쪽 어깨 쪽으로 벽을 옆에 가까이 두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벽에 붙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Spanish Guitar를 쫓았다. 벽에는 증명사진 크기의 앙증맞은 사진부터 거대한 액자사진까지, 크고 작은 다양한 사진들이 즐비하게 붙어있었다.
계속 차근차근 발걸음을 옮기던 중년남자는 문득 쿠바산 시거 생각이 간절해졌다. 아, 왜 지금껏 쿠바산 시거를 피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주머니에서 뺀 쿠바산 시거를 입에 물었다. 딸깍- 라이터를 켜 쿠바산 시거에 불을 붙일 찰나였다.
“퍽!“
그의 뒤통수에 정체모를 둔기를 내리친 손길이 있었다.
뒤통수에 강력한 타격을 입은 중년남자는 외마디 비명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닥에 코를 박은 채로 쓰러졌다. 그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가 발길을 옮기던 방향으로 세 걸음 반 쯤 더 간 위치의 벽에는 지난날 바에서 본, 키 152cm, 몸무게 98kg가량의 체구에 상하의 모두 샛노란 옷을 입은 중년여자와 역시 상하의 모두 샛노란 옷을 입은 남자꼬마아이가 함께 서 있는 사진이 진열되어있었고, 그 사진에서 반걸음 더 간 위치의 벽에는 빨간색으로 /절대금연/이라는 글자가 크게, 또렷하게 적혀있었다.
계속, 계속해서 벽에는 사진들이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이은영이 카라꽃다발을 들고 기뻐하는 사진은 중년남자가 들어왔던 출입구에서 정반대쪽에 난 작은 문에 붙어있었다. 중년남자가 오른쪽에 두고 걷던 벽을 따라가면 결국, 맞닥뜨리는 문이기도 했다. 거리상으로는 그가 쓰러진 자리에서 25m정도 떨어진 위치였다. 문에 높이, 견고히 붙어있는 이은영의 그 사진 바로 밑으로는 검은색글자로 'J.o.S'라고 비스듬히 적혀있었다. 그 문은 1/3가량 열려있었고, Spanish Guitar는 아직도 그곳에서 세 번째 반복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 http://www.youtube.com/watch?v=saWGSO27R9Y

창밖으로는 하얀색 카라꽃이 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산처럼 쌓여가는 카라꽃무더기를 중년남자는 아쉽게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시간이 오래도록 흘러서도 중년남자는 결코, 깨어나지 못했다. 그저 기다려보는 수밖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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