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적묵(赤墨)-上

2011.05.15 14:2005.15

0.

그 때가 언제였었나. 비 맞은 벚꽃잎 파도처럼 흩날리던 봄날이었나, 바람 젖은 햇살조차 땀비되어 등 적시던 여름날이었나, 칼끝에 베인 노을이 핏물처럼 뚝뚝 떨어지던 가을날이었나, 아으아, 이도 저도 아니라면, 뼛골까지 베어내던 그 차가운 한겨울의 어느 한자락 밤이었을 터인데.

어어이, 흉악시럽다, 고 놈의 칼질.

한 팔로 입술 두툼한 돼지 모색의 주모를 끌어안고, 다른 손에는 술병을 끼어든 채 스승은 툭하면 나를 타박하였더랬다. 그럴 리 없는데, 그럴 리 없는데. 빠르디 빨라 내 생의 앞걸음을 지키고, 뒷걸음 붙잡던 혈육마저 끊어버린 내 검이 흉악스러워 마주 대함조차 저어하시니. 비록 지금은 주색에 곯아 삐쩍 마른 몰골이 젓가락이나 견딜까 의심스러워도, 한때 천하에 피를 부르는 모든 병기의 아비라 불리우던 스승이, 그러나 내 검만큼은 그 어떤 병기보다 더 싸늘하게 일별하셨더랬다.

스승, 무엇이 문제이옵내까, 그저 타박만 하시렵내까. 전노(戰奴)로 싸워온 지 십여 해가 넘었소. 내 검이 누구보다 느렸던들, 이 목은 진작에 끊어졌으리요.

저언노, 전노오라아.

스승은 클클 웃으며 다시금 술병을 기울였었더랬지. 아, 그 날이 언제였던가. 마른 나무 등걸처럼 주름잡혀 갈라진 스승의 목덜미 타고 흐르던 모주(謀酒)에 엉긴 달빛 떨어져 울던 밤. 그새 수염이 톱밥만큼 비어져 나온 까칠한 턱을 소매로 훑으며 스승은 나를 비웃었더랬다.

명색이 사내로 태어나 충서(忠恕)로 보국(保國)함도 아니요, 노모와 처자식 봉양코져 농군(農軍)으로 종군함도 아닐진대, 대저 남의 손과 숨줄 빌려다 싸워놓고 네 공입네 내 공입네 다투는 위엣 놈들 짓거리에 참으로 큰 몫 거들었고나.
그러고는 다시 술로 목을 축이며 비웃듯 한 마디 거드시니. 하여 속이 씨어언하고 자랑스럽더냐. 못난 것. 못나고 못난 것.  

아아, 생각컨대 아마도 여름이었나 보다. 가슴의 피가 끓듯, 온 몸을 녹일 듯한 분기(憤氣)가 입에서부터 피 토하듯 용솟음쳤더랬다.
나더러 어쩌란 말이외까. 이 나라 이 땅을 떠나 가죽 갑주 옷 삼고, 군영을 고향 삼아 살았더랬소. 손에 익은 막칼 한 자루만이 벗이었을 뿐, 어딜 가나, 이 뼈다귀, 내 몸 안에 박힌 이 뼈다귀가 귀하고 천한지만을 따지더이다. 내 여길, 좋아 떠났겠소, 내 여길, 좋아 돌아왔겠소. 하늘 아래 땅 위 넓고 넓어 있을 곳 많다지만, 이 뼈다귀 타고난 놈은 갈 곳조차 없어 스승께로 돌아왔쇠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스승이 되묻기를, 허면, 네 검은 어데로 가서 어데에 머물러 있었나냐.

갑자기 이건 무슨 소리인가 싶었더랬다. 내 검이 어디로 가냐니 어디에 머물러 있냐니, 그 물음에 대답도 못하고 벙어리처럼 목이 메고 혀가 굳어 멍청히 손아귀에 쥔 검만 바라보고 있자니, 스승이 웃는다. 퍼런 서슬 창칼 같고 철퇴 같던 스승이 처연토록 웃는다.

칼집 없이 칼에 미쳐 휘두르는 놈이 뉘가 좋아 올꼬. 돌아갈 곳 없는 검은 하염없이 피만 부르나니라. 집 없이 방황하는 인자(人者)의 삶도 비루할진대 하물며 검일까. 오로지 베고 찌를 뿐, 어디에도 묶여 쉴 수 없는 네 검은, 빠른 게 아니라 그저 가벼운 것이라. 그 가벼움에 네가 홀려 아예 눈이 멀었고나.  
그리고 스승, 사르죽이듯, 덧붙이기를, 무겁지 아니하면 가벼울 수 없고, 느리지 아니하면 가벼울 수 없으매, 약함을 알아야 비로소 강함을 논할 수 있노라. 이 뜻을 진정으로 가슴에 새길 수 있겠나냐.
모릅내다. 검에 매인 객(客)은 약(弱)에 마음두지 아니합내다.
……그러하더냐. 과연 너는 안즉 약하고나.

한참 동안 물끄러미 스승은 나를 쳐다보았더랬다. 아으아, 별빛처럼 형형히 박히는 그 안광(眼光), 천천히 일어난 스승의 몸은 장대하고 견고하여, 아아, 참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성벽 같았더랬다. 어느덧, 아니, 아직도 저리 크시단 말인가, 견디지 못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어 머리를 조아릴 새, 스승은 뜻밖에도 자애로운 목소리로 조용히 말씀하시기를-

빼앗긴 자의 것은 결국 빼앗은 자에게 있지 않겠나냐. 네 검에, 네 살의(殺意)에 허망하게 명 빼앗긴 이들 많으렷다. 허니 인제 네게 마지막 비의(秘儀)를 전수할 때가 되었고나.

……제자, 겸허히 가르침을 청하옵내다. 그 비의는 무엇입내까.

스승은 대답 없이 은은한 미소와 함께 손을 들어올렸다. 마지막 비의는 그렇게, 마치 그에게 새로이 무(武)를 익히던 그 시절처럼, 단려하고 간결하게 전수되었더랬다.

1.

한(漢) 대륙이 거지의 누더기 옷처럼 갈기갈기 찢어져 아직 성황(聖皇)이 제국을 세움으로써 일통(一統)을 이루기 전의 이야기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던 반도 왕국의 속담은 이 곳에서도 유명하였다. 특히 한 대륙의 변방 소국인 화(花)의 수도 만연성(蔓衍省)에서는 그 속담의 효과를 절감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그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화국(花國)을 다스리는 경공(競公)의 영애 때문이었다. 누구도 본 적이 없지만, 만연성의 단촐한 왕궁을 흐드러진 꽃향기로 늘 손수 치장하는 그녀의 미모와 인품은 이미 화국을 넘어서 이웃한 법국(法國), 학국(學國)에는 물론이요, 저 멀리 강성하기 이를 데 없는 군국(軍國)에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물론 반도와 비슷한 풍속을 지닌 한 대륙에서도 또한 명색이 일국을 다스리는 군주의 딸을 함부로 엿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발 없는 말은 천리를 갈 정도로 강건할 뿐 아니라, 신출귀몰하기 짝이 없어, 가까이서 그녀를 모시는 시비(侍婢)들의 입에서 몰래몰래 스며나온 말들은 순식간에 장성한 준마가 되어 천하를 횡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하니 작게는 그토록 입소문이 쟁쟁한 그녀의 얼굴 한 번 눈동자에 담아두고자, 아주 옛날의 반도의 늙은 나무꾼이 그러하였듯, 절벽에 아슬하게 피어 더욱 황홀하였다던 한 떨기 꽃을 꺾어 몰래 흠모하던 귀부인에게 바쳤다는 노래를 본받는 홍안소년(紅顔少年)들이 문전성시(門前成市)에 부지기수(不知其數)요, 심지어 음험한 욕망을 채워보고자 믿음직한 수하를 시켜 보쌈을 해오라 한다거나, 아예 친히 담을 넘어 월하노인(月下老人) 역을 자청하는 자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때는 한 대륙 역사에서도 아직 혼란의 초창기 무렵으로, 경공의 근심이란 그저 아름다운 딸을 둔 여느 서인(庶人)의 아비와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저 나라 안에 내세울 것이라고는 대대로 내려온 봉토에 그린 듯이 피어 있는 기화요초(琪花瑤草)뿐이요, 그를 노래하는 문인(文人)이며 화가의 숫자와 솜씨가 버금간다 하여도, 호시탐탐 이 나라를 노리는 인접국들의 공세에 도통 불안하던 경공이었다. 하물며 여식의 안위와 나라의 안위를 저울질 하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군주된 도리와 아비된 도리 중 무엇을 더 무겁게 여겨야 할지 참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경공의 헤아림은 아주 조금 모자랐는데, 그에게도 나라의 안위를 함께 걱정하는 충직한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도 제발 공녀의 존안 한 번 뵙기를 청하는 뭇 청년들의 함성이 태산처럼 드높아 침통한 표정의 경공이 몇 술 뜨지도 않은 수라를 물리라 손을 내저을 새, 평소 경공의 그림자를 자처하던 내관 하나가 간살스러운 목소리로 아뢰었다.

“공께서는 어찌 그리 근심이십니까. 믿음직한 자들로 하여금 공녀님의 처소를 지키도록 하면 되지 않겠나이까.”
“이미 공녀의 처소를 지키는 군졸들이 기백 명임을 몰라 이러는가. 이 나라가 비록 군국만한 강국은 아니로되, 그만하면 규중처녀(閨中處女) 하나 지킴에 무슨 불편함이 있을꼬.”
“허나, 공께서 근심하심은 군졸의 수가 모자라서도 아니요, 넘쳐서도 아니라 생각됩니다. 학국에서 전해져온 가르침에 이르기를, 부모가 먼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함은 천리(天理)에 따른 선행(先行)이라 하였으니, 그 연후에 비로소 자식의 효행(孝行)도 그에 기인한다 들었습니다. 일찍이 군국이 대륙 전체에 포고문을 내려 나라의 대병(大兵)을 이끌 용장들을 구하여 일통을 노리는 까닭은, 제아무리 이 대륙의 크고 작은 나라들의 군사들을 다 모으고, 그 성벽을 산처럼 쌓아놓아 공세를 막을 방비를 강구하여도, 분명 그 동안 뜻을 감춘 인재들이 그 것을 당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감히 말씀드리건대, 이러한 재주를 감춘 기인이사(奇人異士)를 뽑아 쓰신다면 공의 근심을 능히 덜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일국의 임금으로 막중한 책임을 지신 공께서 친히 여식의 안위를 챙기시니, 안으로는 공녀님의 더한 효행을 이끌 것이요, 밖으로는 뭇 백성들이 그 자애로움을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경공은 놀라 웃음지었다. “그대만한 이가 이리 가까이 있는 줄 몰랐으니, 과연 내가 불민하기 이를 데 없구나. 그대가 내 곁의 내관임이 기꺼우면서도 아쉽도다.” 아직도 이름이 전해지지 아니하는 내관의 간언에 따라 화국 또한 포고문을 내걸으니, 천하에 이름 높은 탐화(探花) 아가씨의 신변을 지켜줄 협사(俠士)를 찾는다는 내용에, 위세당당한 군국조차 감히 시비를 걸 수 없었고, 오히려 그 먼 길을 개의치 아니하고, 친히 내노라 하는 명장 한 명을 직접 파견하기까지 하였다.
어떻게든 탐화 공녀의 얼굴 한 번 볼 수 있을까 싶어 되도 않게 지원했던 철없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은 군국의 용장, 맹철혈(猛鐵血)의 명성에 놀라 뒤돌아볼 새도 없이 귀가길을 서둘러야 했다. “과연 귀국의 장정들이란 돌아서는 뒤태조차 꽃향기가 나는군요. 참으로 명불허전(名不虛傳)이외다.” 경공의 면전에서 통쾌하다는 듯 이죽대는 맹철혈의 무례함이란 이미 도를 넘어선 것이었으나, 심지어 그 말 잘하던 내관조차 감히 나설 수가 없었다. 한 자루 검, 말 한 필만으로 군국의 오만 기마를 통솔하는 권위를 얻었고, 엄중한 군법으로 장병들을 통솔하여 군국 못지 않은 군세를 보유했다 알려진 법국의 병졸들을 단지 사순(四旬)간 훈련시킨 궁녀들로만 맞상대한 모의 전투에서도 큰 승리를 거두었던 그였다. 눈매는 새매 같고, 걸음은 맹수 같은 저 자를 정녕 내 딸의 처소 가까이 두어야 한단 말인가. 자칫하다가는 이 나라를 스스로 군국에 갖다 바치는 셈이 되겠구나. 며칠 전, 내관의 총명함에 감탄하던 마음은 홀연히 사라지고, 자신을 쪼갤 듯 쏘아보는 경공의 눈빛을, 내관 또한 눈치껏 외면하기에 바쁠 때, 문득 한가로운 목소리가 뻐꾹새 지저귀듯 들려왔다.

“외인(外人)의 몸으로 헤아림은 얕습니다만, 꽃향기가 파도처럼 몰아치는 이 나라에, 피와 쇠를 가득 머금은 이를 굳이 청하여 머물게 할 필요가 있을런지요.”
좌중이 놀라 목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니 한 대륙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복색이, 그나마도 흙먼지에 꾀죄죄한 초라한 복색의 남자가 장창 한 자루 떠메고 평안히 앉아 있었다. 반쯤 하얗게 센 머리칼이 문사(文士)처럼 가녀린 골격의 어깨와 등골을 폭포처럼 훑어내려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목소리로 짐작컨대 약관(弱冠)은 진작 넘었을 것이요, 불혹(不惑)은 아직 멀었을 듯 하였다. 제 자신조차 무례하였음에도, 제 앞의 무례함을 참고 넘길 여유는 없었던지 맹철혈이 대뜸 노성을 쩌렁쩌렁 내뱉었다.
“아무리 외인이라 한들 모처(某處)에서 왕(往)했기에 감히 이 앞에서 그 오만불손한 사지를 뻗대고 앉아 있는가. 대체 네가 누구더냐?”
“이 나라 꽃향기에 취하여 이끌린, 반도 왕국의 무명(無名)씨올시다.”
“허!” 기가 막히다는 듯 콧대를 높이 세우며 코웃음을 터뜨린 맹철혈은 경공을 똑바로 쳐다보며 외쳤다. “귀공의 귀한 꽃을 꺾으려 이젠 반도의 소인(小人)까지 먼 걸음 하였으니, 이 나라, 참으로 그릇된 소문 하나 없구려!” 경공은 연이은 맹철혈의 무례한 언동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감히 내색하지는 못하고 반백장발의 창수(槍手)에게 친히 하문하였다.

“출신이며 복색이야 아무려면 어떠랴만, 그대가 안즉 이 곳에 남아 있음은 능히 저 위명 드높은 맹 장군을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 말에는, 설마 그럴까 싶음에도, 행여나 그래주었으면 좋겠다는, 경공의 속마음이 어쩔 수 없이 배어 있어 맹철혈은 불쾌한 낯빛을 거침없이 드러내었다.
그러나 잔잔한 웃음과 함께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간(諫)하기 송구하오나, 그럴 자신은 없습니다.” “으하하! 그래도 유약한 서생이 정직의 미덕이나마 품고 있어 높이 살 만하군!” 그럼 그렇지 하는 맹철혈의 자신만만한 얼굴에, 하얀 폭포 속에 갈무리한 작은 비수가 꽂히듯 번뜩였다. 양 옆으로 쫙 째진 한쪽 눈의 끝매에는 겨울보다 싸늘한 한기가 고드름처럼 맺혀 있었다.

“맹 장군께서는 뭔가 오해하고 계시군요. 가끔 묵향(墨香) 맡는 일을 즐기오나, 서생은 아니거니와 감히 말씀드리건대, 나으리의 재주와 저의 재주는 서로 대극(對極)인지라 비견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창검 비껴차고 꽃호수 잠기도록 피바다 만드는 재주로 누구를 어찌 지킨다는 말씀인지 참으로 궁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만.”  

먹으로 그린 듯한 맹철혈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었다.
“그 말인즉슨, 내 재주는 오로지 인자(人者)를 참살하는데 지나지 않아 그깟 여인 하나조차 지키는 일조차 할 수 없다는 뜻인가?”
반도에서 온 남자는 빙긋이 웃어보였다. “그렇게까지 무례하게 말씀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나라의 안위가 위태롭게 하는 자들이 있다면, 앞장서 무찌르듯, 이 나라 공녀를 위협하는 자들을 찾아 도륙하면 그 것이 곧 지킴이 아닌가? 그대가 그토록 믿기 어렵다면, 직접 보여줄 수도 있다.” 말끝에 허리춤에서 반쯤 뽑혀나온 장도(長刀)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남자의 입가에서는 잔잔한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맹 장군께서 저 하나 능히 당해내심이야 당연한 일이겠으나, 만약 쥐떼 같은 무리들이 열 명쯤 모여 한 번에 몰려든다면 그 때는 어찌하시렵니까? 하나를 베려 할 즈음에, 이미 다른 아홉이 공녀님의 일신에 위협을 가할지 모를 일입니다. 군국의 용병술에 이르기를, 나아가 치는 병력이 7할이요, 머물러 지키는 병력이 3할이라 하였는데, 군대야 그렇게 나눌 수 있겠지만, 여기 계신 맹 장군은 오직 홀로시니, 학국의 도를 닦는 일파들이 아니고서야 어찌 몸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뜻밖에도 경공이 손뼉을 치고 나섰다. “참으로 옳은 말이로다! 군국의 용병에는 과연 그러한 허점이 있었구나!” 그러나 더욱 사나워진 눈빛 하나로 경공의 기세를 눌러 죽인 맹철혈은 아예 마저 뽑아버린 칼끝으로 남자를 가리키며 까딱까딱 삿대질을 퍼부었다.
“그렇다면 고명하신 네 놈의 수작이나 한 번 듣자꾸나. 그 세 치 혀를 무기 삼아 공녀를 지킬 셈인가?”
“……아아, 모르셨습니까? 이건 창(槍)이라고 이르는 병기로서…….”
맹철혈은 기어코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말장난 집어치워! 누가 그걸 몰라서 묻는다던가!”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고 말을 이었다.
“끝까지 들으시지요. 이 병기를 자세히 살펴 볼작시면, 주목(椆木)으로 이루어진 자루와 쇠촉으로 이루어져 길이는 1장 5척에 달하고 그 끝에 붙은 창두(槍頭)의 무게는 넉 냥(약 1.6kg)을 넘지 아니합니다. 병(兵)의 기본은 이장제단(以長制短)이니, 누구와 맞서든 그 길이로 얻는 이득이 적지 않음에도, 끄트머리의 날이 짧고 무겁지 않아 상대를 해하기보다는 스스로 지키는데 용이합니다. 하여 지금처럼 누구를 죽임에 쓰기보다 서로 다투는 둘을 떨어뜨려 말리고자 고안한 병기였으니, 다른 말로 과(戈)라고도 이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태곳적 선인(先人)들이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멀리 하기 위해 만든 병기를 그 쓰임에 맞도록 어려움 없이 익혔으니, 누구 하나 지킴에 지금까지 큰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음을 고합니다. 만일 열 명의 적이 달려든다 해도 공녀 아가씨의 곁에 시립하여 물러서지 않음으로써 지키며, 백천만의 적이 몰아친다 하면, 그 때는 이미 나라의 안위를 먼저 걱정해야 할 것이니 오로지 제게만 책임이 돌아오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말끝에 남자는 하늘을 찌를 듯 세워둔 창을 안에서 밖으로 가볍게 시위하듯 휘둘렀다. 마치 주위에 몰려드는 모든 적들을 쫓아낼듯, 빠르고 날렵히 움직이면서도 실린 힘이 결코 약하지 아니하였고, 군국의 명장답게 맹철혈 또한 그 진왕마기세(秦王魔旗世)의 수준을 능히 가늠할 수 있었다. 좌중이 상황을 목도함이 행여나 흉폭한 칼부림이나 나지 않을까 싶어 기대 반 걱정 반이었으나, 그는 차분히 한숨을 내쉬며 장도를 도로 허리춤에 꿰어넣었다.
“천하는 진실로 넓구나. 허나 두고 보리라.”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눈빛조차 마주치지 아니한 채, 그는 궁을 뚜벅뚜벅 걸어 나가버렸다. 그 걸음걸이는 여전히 분을 속으로 삭여내는 야수의 그 것과 다르지 아니하였다.    

2.    

“그래, 이제 어떤 방비로 하여금 내 딸을 지킬 것인지 일러줌 직 하지 않겠는가?”  
커다란 난적(亂賊)을 나라 밖으로 쫓아내고, 또한 뛰어나고 믿음직한 수하를 얻게 되어 매우 흡족해진 경공이 베푼 주연이 서서히 막바지에 이를 즈음, 취기가 어릿하게 돌아 살짝 불콰해진 얼굴로 경공이 그렇게 물었다. 한 나라의 가장 지고한 자 앞이라 그런지, 아니면 본디부터 술을 즐기지 아니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앞에 놓인 기름지고 향기로운 주안상(酒案床)은 거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는 예의 그 미소를 띄운 채 짧게 대답하였다.
“언필신 행필과(言必信 行必果)라고 하였으니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어찌 보면 명색이 한 나라의 군주 앞에서 심히 무례하다 할 수 있는 언동이었다. 경공은 작게 헛기침을 했고, 그에 맞춰 누군가 쇠뭉치를 매단 마냥 잔치의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금준미주(金樽美酒)에 옥반가효(玉盤佳肴)로 혀와 배를 즐겁게 하고, 절세가인(絶世佳人)의 춤사위로 노래로 눈과 귀를 달콤하게 하던 뭇 신하들은 일제히 숨을 멈추고 민망함을 눌러 참는 경공의 용안(龍顔)을 살피기에 바빴다.

한참 후, 경공은 취기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그대 말이 옳다. 두고 보면 알 일이겠지. 원로(遠路)에 고(苦)할터이니, 오늘은 이만 쉬게.” 언뜻 남자의 뜻을 헤아려 주는 듯 하였으나 사실상 맹철혈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젓는 경공의 뜻에 따라 신하들 또한 잔치를 파하였고, 남자는 예의 그 장창을 어깨부터 다리에 이르기까지 비스듬하게 세워, 한 시녀를 따라 자신의 처소로 향하였다. 그 순간, 그 남자의 ‘어떤 것’ 을 본 신하들이 대경실색 토끼눈을 하며 서로를 쳐다본 다음, 모두가 목도한 광경이 헛것이 아님을 알게 되자, 황급히 경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꽃무늬 가득한 용상에 올라앉은 경공은 이미 취기가 부른 수마에 반 이상 몸을 내맡겨 버린 뒤였다.

그 날 이후, 신하들의 궁금증과 고민은 점점 더 커져갔다. 설사 대취하고 만취하여 그들이 본 것이 헛것이었다 치더라도 이 나라의 가장 귀한 처녀를 지켜야 하는 남자에게 그러한 의혹은 허용될 수도, 있어서도 안 될 것이었다. 한 나라의 정사를 오랫동안 돌보아온 그들은, 아무리 영명한 군주라 할지라도 아주 작은 흠집을 통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수도, 아무리 현명한 신하라 할지라도 아주 작은 트집과 의혹을 통해 순식간에 자신의 목을 형장 바닥의 장식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명색이 위사(衛士)라면, 성벽과도 같은 강건한 신체와 정신을 가져야 함이 옳지 않은가? 우리가 과연 거칠고 위험한만큼 한편으로는 믿음직한 맹철혈을 괜히 쫓아버린 것일까?  

게다가 공녀를 지키기 위해 온 남자의 하루 일과 또한 참으로 가관이었다. 간소한 상차림으로 하루 세 끼를 먹고, 적당한 시간에 눈을 붙이는 것 외에는, 주위를 돌며 가볍게 산책을 하거나, 혹은 저녁 무렵 선선한 바깥 바람을 즐기며 옛 선인들이 쓰던 죽간(竹簡)과 당대에 들어 기하급수적으로 수요가 늘어버린 서책(書冊)을 즐겨 탐독하였다.
“이 서책이라고 하는 것, 정말 볼수록 명품입니다. 학국의 수많은 사상가들이 제 주장을 펴느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처소까지 싸그리 베어버릴 지경이라더니, 그예 기상합종회(技商合從會)가 궁구(窮究)하여 이런 기막힌 물건을 만들었군요. 죽간처럼 대나무 결따라 글 쓰느라 골몰하지 아니하여도 되고, 얇고 가벼운데다 촉감까지 좋으니, 앞으로 잘 팔릴 듯합니다.”
“……제가 온 줄 이미 알고 계셨군요?”
이파리마다 햇살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바람조차 잠시 깃들어 쉬는 아름다운 화원이었다. 꽃과 꽃 사이에 둘러싸여 정좌하고 있던 남자의 앞에 조그마한 소녀가 발랄한 모습으로 깡총 뛰어나왔다. 차림새로 보아 귀한 여인을 모시는 시비(侍婢)인 듯 했으나, 보름달처럼 큰 눈에 풋풋한 생기가 잔에 따른 포도주처럼 가득 고여 있었다. 아직 어린 탓에 예에 익숙하지 못한 듯, 아랫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면서 철없이 투덜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남자는 싱긋 웃고 말았다.

“예. 아까부터.”
“그럼 진작 아는 척 좀 해주시지. 제가 공자님을 얼마나 찾았는지 아셔요? 이름, 아, 아니, 존함조차 아는 사람이 없어서 여기 기웃, 저리 기웃, 한참을 돌아다녔었어요. 소주방(燒廚房) 일 도울 때 빼고 이렇게 오래 걸은 적은 진짜 없었는데.”
“아, 제가 지키는 공녀 아가씨를 모시는 분이셨군요. 결례함을 너그러이 용서하십시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가볍게 허리를 숙이자 소녀는 무척 당황한 듯, 화들짝 놀라 벌개진 얼굴로 소매 양쪽에서 조그마한 고사리 손을 내어 화답하였다. “여, 여화(麗花) 공녀 아가씨를 모시는 은려(隱麗)가 공자님을 뵙습니다.” 역시 왕궁의 시녀답게 읍례는 제대로 배운 모양이었으나 역시 거기까지였다. 다시금 천진한 얼굴로 그녀는 말끝에 불쑥 물음을 달았다.
“헌데 공자님 존함은 어떻게 되세요? 왜 아무도 공자님 이름, 아, 아니, 존함을 모르지요?”
“제가 아무에게도 일러주지 아니하였기 때문이겠지요.”
“예? 왜 말씀 안하셨는데요?”
“아무도 묻지 아니하셨으니까요. 저처럼 천한 이의 이름을 구태여 알고자 하는 이가 뉘 있겠습니까. 저는…….” 그는 끙차 하는 소리와 함께 손맡에 눕혀 두었던 창을 주워들었다. 상당히 길고 무거운 창을 단번에 잡아채는 솜씨가 역시 범상치 않았으나, 어린 은려가 그를 알 리 없었다.
“이 창과 마찬가지로, 공녀 아가씨를 지키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지요.”

은려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휴, 우리 공녀 아가씨랑 비슷도 하셔라. 말투만 좀 고치시면 두 분이 참으로 잘 통하시겠어요.” 남자는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이 어린 시녀는 남녀가 서로 잘 통한다는 말이 함축하는 위험한 의미를 진정 모르는 것일까? 아무도 이 소녀의 입을 단속하는 이가 없었다면, 이 나라 공녀의 아름다움을 뉘가 퍼뜨렸는지도 불보듯 뻔하구나. 남자는 생각을 감춘 채 물었다.
“공녀 아가씨께서 저를 부르셨습니까?”
“아이 참, 그렇다니까요. 안 그러면 제가 왜 저녁도 못 먹고 여지껏 온 궁 안을 헤집고 다니며 아저…… 아니, 공자님을 찾았겠어요? 공녀님께서 뵙기를 청하시니, 어서 차비하시어요.”

어법을 마구 뒤섞어 쓰는 귀여운 시녀의 뒤를 따라 남자는 여전히 창을 어깨와 다리를 잇는 기둥처럼 세워든 채 천천히 걸어갔다. 때때로 앞서 가던 은려가 “아이 참, 빨리 좀 오셔요!” 하며 성화였지만, 이미 익숙한 일이었던 듯, 지나가는 내관들조차 탓하는 이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저 책 읽고 산책만 하는 위사(衛士)의 작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턱을 바짝 치켜든 의연한 자세로 은려의 뒤를 따랐다.

저녁 노을이 물감처럼 번져 있는 구름다리 몇 개를 건너자 마치 작은 무릉도원(武陵桃源)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다리 아래 호수는 외롭도록 맑았고, 꽃향기를 머금은 물결이 손짓하듯 일렁이는 그 위로, 군데군데 점점이 다도(多島)를 이룬 작은 꽃동산들이 바람에 꽃잎을 머리칼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이 나라 와서 많이 놀라는군. 서책에 이어 이번에는 속세선경(俗世仙境)인가.

“궁궐 안에 이런 절경을 만들어두다니, 과연 화국이라 할만합니다. 이 곳은 대체 어느 고인(高人)들이 고안해내신 겁니까?”
“……네? 고인(故人)이요? 이거 만든 사람들이 죽었대요? 어머, 이걸 어째? 아가씨 말씀으로 엄청 재주가 뛰어난 분들이라 자주 청해 쓰실 거라 했는데……. 손재주 좋기로는 하늘 아래 짝을 찾아볼 수가 없다셨어요.”
아무래도 이 나라는 기상합종회와 많은 연관이 있나보군. 아니면 공녀 아가씨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거나.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히려 더 큰 의문을 불러왔다. 하늘 아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는 명장(名匠)들과 그 명장들의 창조물들을 설사 산 사람이라도 다시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거상(巨商)들이 서로 뜻을 합쳐 세운 조직이 바로 기상합종회였다. 비록 나라는 아니로되, 그들의 뛰어난 재주는 천하에 널리 알려져 탐내지 아니하는 자가 없는데, 비록 탐내지 아니할 수 없는 또다른 여자라 할지라도 규중처녀의 몸으로 그토록 쉽게 접촉할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었다.

의문을 해결할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다가왔다. 호수 위에 청빈하게 떠 있는, 단려한 궁에 들어서자 은려는 몸을 휙 돌려 잠시 기다리라고 언질을 두고는, 내실 안으로 총총걸음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이 또 귀여워 남자는 웃음 지었으나 곧 이 곳이 여인들만이 올 수 있는 곳임을 깨닫고는 황급히 웃음을 삼켰다. 비록 하찮은 창잡이라 자칭하나 그 역시 예에 어둡지 아니하였다.
잠시 후,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객당(客堂)으로 모시거라.”
아마도 공녀의 옥음(玉音)이었으리라고,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목소리였다. 차분하였으나 무겁지 아니하였고, 부드러웠으나 간살스럽지 아니하였다. 은려가 사라져버린 어두운 복도 저 끝에서 키가 성큼한 다른 시녀 하나가 잰걸음으로 달려나오더니, 말도 없이 허리를 숙이고 정중한 손짓만으로 남자를 이끌었다. 아직 초저녁 무렵임에도 불구하고, 화촉을 몇 개 밝히지 않은 궁 안은 어스름히 어두웠다. 남자의 긴 창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만이 복도의 양벽에 부딪혀 동굴처럼 울렸다. 이런 곳에서 용케 부딪히지 않고 다니는구나 싶어 남자는 또 실없이 웃음을 지었다.

객당 안은 비교적 밝아 남자는 아주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눈이 빛에 적응하는 아주 짧은 시간으로, 키가 큰 시녀가 어느 틈에 다과를 준비하고 있었다. 은려에 비하면 나이도 있고 미모 역시 훨씬 못한 편이었으나 찻잎과 잔을 다루는 정갈한 솜씨는 그녀와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아마 그 소녀라면 이 시간에 벌써 잔 몇 개는 깨었겠지. 속으로 생각하며 그는 손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공녀 아가씨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니, 앉아 있어도 될는지요?”
그러자 시녀가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좌정(坐定)함이야 무슨 상관이랴마는, 본녀(本女)가 언제 올지 모르다니, 대체 무슨 말씀이오? 그대는 뉘를 지키는지도 모르면서 여기에 유(留)하는 것이오?”
그 동안 화국에 머물면서 시종일관 여유로웠던 남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나 대단치는 않았고, 그마저도 촛불의 흔들림에 사악 사라져버렸다. 목소리를 다시 되새겨보니, 확실히 그러하였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은려를 대할 때보다 훨씬 정중하고 깊게 허리를 수그리며 예를 차렸다.
“반도의 창잡이가 한 대륙의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탐화 공녀 아가씨를 뵙습니다. 미처 몰라뵈어 결례하였음을 용서하소서.”
시녀, 아니, 탐화 공녀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본녀(本女)의 명(名)은 탐화가 아니라 려화요. 말 늘이기 좋아하는 세인들이 붙인 별호를 거처에서까지 듣고 싶지 않구려. 헌데 은려가 이르기를, 귀골(貴骨) 같지는 않아뵌다 하던데, 더군다나 반도인이 왕궁의 어법에 능하니, 심히 대경(大驚)할 일이오. 더군다나 본녀가 쓰는 어법은, 이제 아주 예전의 성현(聖賢)들이나 썼다고 알려진 고어임에도.”
“지위의 고하가 있는 세상에, 언변인즉 어찌 고하가 없겠습니까. 다만 관심이 있어 두루 익혔을 따름입니다. 헌데, 지고하신 아가씨께서 어찌 그러한 차림으로 친히 저를 맞이하셨는지 감히 여쭈어도 될는지요.”
공녀는 진지하게 말했다. “기인즉오희야(欺人卽吾喜也 / 내 즐거움은 사람을 속이는 데 있다.)라.”
“………예?”

되묻는 남자의 기세가 꽤 우스웠던 모양이었다. 공녀는 가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하잘것없는 희언(戱言)이었소. 그나저나 앉으시오. 본디 차란 식으면 향이 흩어지는 법이니, 따뜻할 때 즐기길 바랄 뿐이오. 덧붙여 이르건대, 석찬을 내야할 시간에 차를 대접하는 불민함을 과히 탓하지 말아주오.”    
“황송합니다. 제가 복이 많아 공녀 아가씨께서 친히 주시는 차를 다 맛보는군요.”
“글쎄, 그대에게 그런 복을 주고자, 시비들이 족족 몰래 이 별궁을 나가는 모양이오. 하도 내 기색을 살피는 꼴들이 지겨워, 그냥 불을 다 꺼버렸소. 원하거든 야음(夜陰) 속에 녹아들어 모처(某處)로든 리(離)하라고 말이오.”
공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 앉으며 남자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여간내기가 아니시군.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남자는 그 맛과 향에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더운 물을 부으면 찻잎이 관음보살의 손바닥처럼 펴진다는, 철관음이로군요. 아주 상등품입니다.” 역시 한 모금을 마시고 다반(茶盤) 둘레로 찻잔을 가볍게 돌려 제자리에 놓던 공녀도 놀랐다. “그대가 본녀를 또 놀라게 하는구려. 아주 식견이 박학하오.” “과찬이십니다. 이 나라에 래(來)하여 벌써 세 번 놀랐으니, 국호를 삼경(三警)이라 칭함이 어떠신지요.”
남자의 말에 공녀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목소리와는 다르게 박력과 기세가 넘쳐, 작고 짧은 웃음이었음에도, 마치 파안대소(破顔大笑)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평소에 조용하던 이의 웃음이었기 때문일 거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재미있는 농이었소만, 내가 듣고자 했던 대답은 아니구려.”
“안 그래도 궁금하였으나, 감히 여쭙지 못하던 차였습니다. 무엇을 하문하시려 저를 이 귀한 곳까지 청하셨습니까.”
“일창(一槍)으로 맹철혈 장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해들었소. 헌데 병기 쓰는 법에 탁월한 이라면 비록 규중의 소견이나 이 나라에도 적지는 않음인데, 정말 그만으로 본녀를 지킨다 작정하였소?”
“이 별궁 속에서 한자연(閑自然)하심에도 나라의 일을 다 귀담아 들으시는 혜안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오나, 제가 진작부터 공녀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취한 방비에 대해서는 미처 듣지 못하신 듯 합니다.”
공녀는 잠시 마른 기침을 하였다. “내 듣긴 들었소만.” 그녀가 가볍게 손짓하자, 어느 틈에 객당 밖에서 시립하여 서 있던 은려가 깡총깡총 뛰어와, 그러나 공손히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공녀에게 바치고는 다시 밖으로 물러났다.

“묵수(墨守)라고 적힌 이 종이 수십 장을 궁궐 내에 두루 붙이고, 또한 나라 곳곳에 뿌려달라 청하였음이 진정코 사실이오?”
“그러합니다.”
주저없이 대답하는 남자와 달리, 공녀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때마침 학국 왕가(王家)의 방계 혈족 중 안식년을 맞아 휴양차 내방한 서도(書道) 박사가 있어 그에게 보인즉, 대륙 어디를 보아도 이러한 서체는 찾을 수 없다 하니, 혹여 내용이 중한 게 아니라 이 보기 드문 서법에 어떤 귀한 뜻을 숨긴 게요?”
남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아니합니다. 묵수, 이 두 글자로 이미 제가 공녀 아가씨를 지킨다는 뜻을 널리 알렸으니, 참람된 뜻이 없는 자는 함부로 내왕하지 않을 것이요, 설사 그러한 뜻이 있다 할지라도 곧 그를 스스로 꺾을 것입니다. 공녀 아가씨를 지키는 방비는 이 것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명(名)이 묵이오?”
“아닙니다. 제 스승을 가르친 태사(太師)의 성이 바로 그 것이었다 들었습니다.”
“점점 더 알 수 없는 노릇이구려. 하면, 그대의 명은 도대체 뭐요?”
뜻밖에도 남자가 고개를 들고 잔잔히 웃었다. 맹철혈 앞에서도, 경공 앞에서도 결코 시들지 않았던 그 미소가 다시 어둠 속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공녀 아가씨께서는 이 나라에 와 제 이름을 하문하시는, 즉 저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져주신 처음의 분이십니다. 미루어 짐작컨대, 저 어린 시비의 이름 또한 직접 지어주셨을 듯 합니다만.”
“…그렇소. 비록 이름없는 천출(賤出)이나 행하는 바가 아낄만한 데가 있어 이 곳에서 늙은 궁녀들이 본즉, 장성하면 용모가 더욱 필 것 같다 이르기에, 가까이 두며 명을 하나 내렸소만.”
“이름이란 본디 스스로 짓는 것이 아니며, 타인에게 불릴 때 비로소 의미가 얻으니, 천리(天理)를 이어받아 나를 생(生)하게끔한 부모가 지어줌을 선(先)으로 하고, 때때로 스승이나 임금이 새로이 지어주는 경우가 있으니, 저 소녀가 복을 잘 타고난 모양입니다.”
그 순간 공녀의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 생각하오?”
“비록 천출이라 하나, 때를 잘 만나 공녀 아가씨를 모시며 궁에서 일하게 되었고, 덕분에 배 곯고 춥게 잘 염려와 멀어졌으니, 그만으로도 능히 복이라 할 일입니다. 또한 공녀 아가씨의 덕을 짐작컨대, 손수 이름까지 내린 소녀를 허투루 자라게 하시지 아니할 듯 하니, 앞으로도 그 삶은 복으로 가득하겠지요.”
“……아무래도 그 학국 박사가 오인(誤認)한 모양이오.”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대가 쓴 수십 장의 종이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더니, 탄식하며 이르는 말이, 글씨가 경(輕)하니 붓을 어찌 잡는지도 모르고, 호흡이 망(亡)하여, 삐침과 파임조차 어지러이 흩어지며, 대륙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난잡함과 성급함이 이 두 자에 모두 집약되어 있으니, 필시 이 글씨를 쓴 자는 천하에 다시 없을 무뢰배라 극언하며 스스로 눈을 씻었다 들었소. 허나 내 앞에 앉아 차를 즐기는 이는 전혀 그렇지 않은 듯 하오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남자는 입을 열었다.

“단지 두 글자의 서체를 통해 그 주인까지 능히 꿰뚫다니, 과연 학국의 박사라 칭할만합니다.”
공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맵시 있게 틀어올린 윗머리가 따라서 갸웃거렸다.
“듣기로 고명한 서생 같은 이가 실상은 역시 그런 이였소? 실로 대단한 속내를 용케 감추고 사는구려. 천하의 맹철혈까지 뒤를 돌보지 아니할 정도라면.”
“기연(奇緣)으로 참 스승을 만나 감추었을 따름입니다. 보시면 아실 터입니다만…….” 잠시 말을 멈추고, 남자는 이제껏 얼굴 앞에 드리웠던 반백의 폭포 같은 장발을 뒤로 치웠다. 여느 때 어느 곳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으나, 맹철혈조차 놀라게 만들었던, 살기 어린 작은 눈 끄트머리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놓은 듯한 칼자국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공녀가 소스라치게 놀라 그 자신을 쫓기를 바라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표정은 심히 평온하였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뭔가 꿈에서 깬 사람처럼 뒤늦게 물었다.
“아, 본녀에게 무언가를 보이시었소?”
“………노증(奴證)을 보여 드렸습니다만…….”
“주위가 어두워 보이지 않는구려. 은려, 게 있으면 들어와 공자님 얼굴 좀 뵈어드려라.”
공녀는 차분하게 말했으나, 남자는 또다시 누군가 쇠망치로 자신의 가슴을 탕 하고 두드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차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으나 어찌하여 한 나라의 공녀가 이토록 한적한 별궁에서 시녀 몇과 함께 외롭게 지내야 하는지, 또 이 별궁은 어째서 이토록 컴컴한지 그 연유를 깨달았던 것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공녀를 대신하여 은려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으나 이미 분위기를 짐작한 듯 경망스러이 뛰어오지는 아니하였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젖혀 얼굴을 드러낸 남자를 가만히 주시하더니, 허리를 굽히며 약간 딱딱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세(歲)는 안즉 불혹(不惑)은 넘지 않은 듯하고, 생김은 범상(凡常)하나 한쪽 눈의 끄트머리에 길다란 칼자국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범인(凡人)들의 관례 중, 종으로 부리던 자들의 잘 보이는 부위에 낙인(烙印)을 찍거나, 혹은 저렇게 흉칙한 자욱을 내어 노비(奴婢)임을 증거케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공녀에게 말씀을 올릴 때만큼은 은려도 허리를 반쯤 굽혀 예를 취하고 있었다. 그 짧은 침묵 사이로, 남자는 공녀의 눈을 가만히 살폈다. 겉보기에는 이상할 것이 없어보였으나, 눈동자가 참으로 가볍고 허하다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은려의 눈동자만 해도 쉴새없이 움직이며 삼라만상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기에 바쁜데, 아무런 자극도 받지 않은 공녀의 눈동자는 그저 가만히 못박혀 있을 따름이었다.

비로소 공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허면, 이름이 없음직한 이였구려. 무슨 일을 하였소?”
처음으로, 남자가 약간 비틀린 표정을 지어보였다.
“……전노(戰奴)였습니다.”
“전노라……. 뭇 병졸과는 어찌 다르오?”
“누구를 위하야 싸움이 다릅니다. 병졸들은 제 목숨을, 혹은 가족의 목숨을 구하고저 싸우지만 전노에게는 그런 것이 있지 아니합니다. 용맹히 싸워 적장의 수급을 숱하게 베어와도 누구 하나 공훈을 치하해주지 아니하고, 부양할 혈연이 없으니 봉록도 받지 못하며, 만기졸(滿期卒)하는 군역자도 아니기에, 그저 주는 밥 먹고, 불침번 서며 쪽잠, 언제 죽을까 불안에 떨며 칼잠, 고고지성(呱呱之聲)이 곧 사멸지성(死滅之聲)이라던 옛말도 있었으나, 우리야말로 죽기 위해 삶을 잇는 종자들이었습니다. 남들에게 훤히 보이는 눈가에 칼자국이 있으니 달아날 생각조차 못하고, 그리 살다살다 마침내 언제 명을 놓아도 상관없으리라는 의지의 수렁 속에서 빠져, 죽을 때까지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끔찍한 일이구려. 난 그저 상흔인 줄로만 알았댔소.”
남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능히 이해…도 공감도 하시리라 짐작하였습니다.”
공녀는 푸근하게 웃었다. “청맹(靑盲)의 세계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이이기 때문에?”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대신이라 이르기 무엇하나, 저 역시 철들기 이전부터 고향인 반도로부터 팔려나가 대륙 일통의 전쟁터를 떠돈 탓에 헤어나올 수 없는 상흔을 얻었으니, 그를 보여드리고저 합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오른쪽 바짓가랑이를 종아리까지 살짝 걷어내보였다. 공녀를 위해 직접 설명하려던 남자는, 그러나 은려가 눈을 찡긋찡긋 하면서 자신이 말하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도로 입을 다물었다.
“소녀도 여지껏 몰랐던 일인데, 오른쪽 다리가 눈에 보일만큼 휘어 굳어 있습니다. 왜 항상 저 길다란 창을 손에서 놓지 않는지 궁금하였는데, 지팡이 삼아 쓰는 모양입니다.”
공녀는 안쓰럽다는 듯 고개를 저어보였다.
“내 들은즉, 보이다가 보이지 아니하는 것만큼 절망스러운 것도 없다 하였는데, 그에 비하면 차라리 내 처지가 낫다고 여기듯, 그대 처지가 몹시 안되었소. 타고난 신체 하나만큼은 강건하였을 것인데. 이제 전장을 리(離)하였음에도 여전히 불망처(不忘處)겠구려. 그대를 두고 몰래 입방아 찧는 주위를 비로소 각(覺)하였소.”
남자 또한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승께서 면천(免賤)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덕은 덕으로 갚고, 원(怨)은 곧음으로 갚는다 하였으니, 참람된 기억 또한 올곧은 기억으로 덮으면 될 것입니다. 그 동안 저 홀로 보전코자 살육에 미친 칼날로 타인의 혈육과 천명을 끊은 죄 결코 가볍지 않으니, 스승의 가르침대로 이 한 몸, 타인을 지키는데 쓰며, 진실로 새로 받은 삶을 살아갈까 합니다.”
“좋은 말이구려. 내 그대에게 여러 수 배웠소.”
공녀가 뜻밖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소매의 손을 모으며 읍례(揖禮)하니, 남자 또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답하였다. 다시 자리에 앉으며 공녀가 물었다.
“보지 아니하였으니, 짐작일 뿐이지만, 몸을 움직이는데 불편하지 않소? 무(武)를 닦음의 기본은 걸음의 법도(步法)라 들었소만.”
“성(城)은 태산과 같이 서서 지킬 뿐, 먼저 움직여 참(斬)하는 법이 없습니다.”
공녀는 또다시 예의 조용한 위엄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이오. 그대의 무(武)는 더 이상 누구의 명을 끊기를 원치 않는구려.”
“원치 않을 뿐 아니라, 적어도 인자(人者)가 인자(人者)를 절대 그리 대하여서는 아니 됨을, 결코 그리 할 수 없음을, 바로 공녀 아가씨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저도 그 가르침에 감사드리고저 합니다.”
이번에는 남자가 읍례하기 위해 일어났고, 공녀가 그에 화답했으며, 사이에 낀 은려만 소리죽인 하품을 소매로 가리면서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아이고, 정말 두 분 잘 노신다, 잘 노셔.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어전(御殿)도 이렇진 않을거야, 정말.’

“본녀가 그대 같은 현인(賢人)에게 무엇을 가르친 적은 없는 것 같소만.”
“듣기로 현인(賢人)은 생이지지(生而知之)요, 생지안행(生知安行)한다 하였으니, 숱한 번뇌에 발목잡혀 읍곡(泣哭)으로 비로소 깨우치는 소인인 저와는 정녕 거리가 먼 존재입니다. 허나 저 역시 꽃의 아름다움을 알고, 사람의 귀함을 모르지 아니하니, 공녀 아가씨께서 손수 돌보시는 저 기화요초(琪花瑤草)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또 세상이 비천하다 여기는 소녀를 손수 가까이 두시어 귀하게끔 하려 하심을 보았습니다. 대륙의 여섯 나라가 서로 패자(覇者)를 가리고저 천하 백성을 가볍게 여기며 으뜸을 다툴 때에, 오로지 공녀 아가씨만이 인명과 자연을 중히 여기는 미덕을 몸소 보이셨습니다. 과연 천하의 모든 남자들이 새기며 흠모할 만한 미덕이니, 이름없는 소인은, 참으로 진실로 공녀 아가씨께 대경(大敬)을 바칩니다. 아마도 제가 몸담은 묵류(墨類)의 겸애(兼愛)란 진정 이를 두고 말하리라 여깁니다.”
다시 한 번 읍하며 깊숙이 공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화답하는 시간이 너무 긴 듯 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때, 은려가 깜짝 놀라 외쳤다.
“공녀 님! 우, 우셔요? 아니아니, 공녀 아가씨…….”
“아니다. 괜찮다. 내 마음이 잠시 흔들렸을 뿐이야.”
마치 평민들이 쓰는 듯한 공녀의 말투는 푸근하고, 따스하였다. 과연 그러하였구나, 이 나라에서 가장 귀한 여인의 눈물 짓는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남자는 더욱 허리를 수그렸다.
“본녀의 내심(內心)이 잠시 동(動)하였소.” 눈물을 닦으며, 공녀는 다시 공녀로 돌아갔다. 아주 짧은 찰나였다. “청맹여식을 둔 생비(生妃)께서는 왕가의 명예를 위하여 자진(自盡)하시고, 이에 부공(父公)의 상심이 크시니, 스스로 이 별궁을 짓고 꽃과 사람을 아끼며 평생을 그리 살려 하였소. 범부(凡夫)의 여인이었다면, 능히 그런 삶도 살 수 있지 않았겠소. 허나 명색이 일국의 공녀로서 죽지 아니하고 그 존재를 감출 수는 없는 일이라. 그렇다고 자진하자니, 홀로 남으실 부공을 향한 세인들의 풍문이 두려워, 하는 수 없이 얼토당토 않은 소문을 스스로 퍼뜨려, 잊혀질 때까지 그 속에 숨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였던 것이오. 그러니, 진실을 깨달은 그대는, 원한다면 모처(某處)로든 리(離)하여도 좋소. 본녀는 위험치 아니하니, 막지도 아니하겠소.”
남자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하였으나, 다행히도 품위를 지켜 예의 그 잔잔한 미소로 그칠 수 있었다. 처음으로 행여나 그가 떠날까 싶어 떨리는 공녀의 눈동자와, 그리고 정말 떠나버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듯이 그를 가득 노려보는 은려의 눈동자와 마주쳤던 것이다.
“이런 말 올림을 용서하십시오. 허나 감히 말씀드릴진대, 소인이 묵수(墨守)하여야 하는 꽃을 두고 어디로 리하고 행(行)하겠습니까? 다만 청컨대, 오랜 시간 유(留)할 수 있도록, 손수 이름을 내려 저를 묶어주시기를 청합니다.”
공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청하는 것이 정녕 그것뿐이라면, 이미 정해두었소.”    
“무엇이온지요?”
“그대는 본녀에게, 아니, 나에게 이치를 깨우쳐준 이요. 하여, 리훈(理訓)이라 부르고자 하오. 마음에 드오?”
남자는 장난삼아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실로 엄하십니다. 천한 전노 출신으로 메고 가기 참으로 무겁겠습니다만, 내려주신 이름 감사히 받겠습니다. 결코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도록 맹약(盟約)드립니다.”
“그 마음, 부디 변치 마오. 나도 변치 않겠소.”
    
3.

비록 지금 내 청춘이 이토록 힘들고 어려워, 마른 나무등걸처럼 쫙쫙 갈라지던 가슴을 달콤한 술로 적시고, 뜨거운 사랑으로 데우던 그 때는 그저 추억에 지나지 않으니, 속이 체하도록 읽은 책을 풀어내어 글로 쓰는 이 와중에, 비록 밋밋하고 심심하고 지루할지언정, 이렇듯 아름답게 맺어버림이 어떨까 싶지만, 아쉽구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아닌, 필자가 갑작스레 난입하여 송구하나, 이리 쓰는 이유는, 이제부터 분위기를 바꿔 이어보기 위함이다. 정말로 내년에 세상이 망하는 게 아닐까 저어되는 2011년 중춘(仲春) 초순에, 철 모르는 빗방울 바깥에 걸고, 이니(離泥)가 잠시 쓰다.

4.

“리훈 공자님, 리훈 공자님, 리이이이훈, 공자아아아아님!”
“……은려 소저, 꼭 그렇게 제 이름에 가락을 넣어 불러야겠습니까? 공녀 아가씨께서 직접 하사하신 귀하디 귀한 이름입니다. 장난 좀 치지 말아주세요.”
“봄날 지나 이 뜨거운 여름에도 매애애앤날, 방 안에 틀어박혀서 책 읽는 거 아니면 꽃밭에서 창 몇 번 휘두르다가, 코 박고 꽃향기나 맡고 있으니까 그렇죠! 세상에 이렇게 게으른 경호 무사가 어딨어요?”
“여기 화원에 있지 않습니까. 게으른 무사가 한 명이면 충분하지요. 아아, 이 화원에서는 언제나 화향(花香)보다 인향(人香)이 짙게 납니다. 꽃 한 송이 필 적마다 미인 하나 늘어난 듯하니, 이 곳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천하의 온갖 미녀들을 다 모아두고 즐기는 기분입니다. 아, 은려 소저는 이렇게 말해도 잘 모르겠지요?”
리훈의 미소도 어느새 여화 공녀를 닮아 푸근한 맛이 배었다. 괜시리 혀를 빼물며 치, 치, 거리던 은려는 어전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까딱해보였다. 물론, 꽃과 나무가 가득 우거진 화원에서 누구도 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아휴, 저 호색한(好色漢). 정말 한 마디도 안 지신다니까. 아무튼 공께서 속히 어전으로 오시래요. 뵙기를 청하던 객(客)들이 있다나요. 별꼴이야, 정말. 여기가 무슨 사람 보러 아무때나 불쑥불쑥 쳐들어오는 덴 줄 아나봐요.”
꽃잎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던 리훈의 손이 잠깐 멈추었다. 그는 잠시 숨을 삼켰고, 다시 내뱉으면서 어느새 바닥에 놓아둔 창을 휘리릭 집어들었다. 약 반 년 사이에 조금씩 처녀 티가 나기 시작하는 은려는 그가 언제 어떻게 창을 집어올렸는지 전혀 볼 수조차 없었다.

“생각보다 늦게 왔군요.”
“에? 누굴 기다리고 계셨나요?”
“반가운 객(客)은 아닙니다만……. 여하튼 부르시니 가야지요.”
리훈은 여전히 장창을 지팡이 삼아 은려의 뒤를 따르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새 은려는 입을 가만히 놔두지 못하고 계속해서 떠들어 댄다.
“리훈 공자님, 리훈 공자님, 혹시 저 멀리 바다 건너에서 왔다는 색목인(色目人)들 보신 적 있으셔요?”
“……꼭 바다 건너에 사는 건 아니지만, 전노 시절에 꽤 자주 봤습니다. 적이기도 했고, 동료인 적도 있었지요.”
“우와, 이미 보셨었구나! 있잖아요, 전요, 처음 봤을 때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요? 세상에, 무슨 키가 그렇게 크고 몸에 털은, 으엑, 징그럽고 냄새 나! 하지만 잘 익은 벼 이삭 같은 머리칼하며, 호수 같은 눈은 진짜 멋있어요. 저도 그렇게 파랗고 깊은 눈동자를 가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은려 소저 눈은 지금도 충분히 크고 예쁩니다. 헌데, 농가(農家)의 딸이었나요?”
“정확히는 소작농(小作農)이죠 뭐. 툭하면 싸움질에 전쟁인데 자기 땅 가지고 농사 짓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구요. 그러니까 왕궁에 절 팔아넘긴 거죠. 한 입도 아쉬우니까.”
가난에 지친 부모가 친딸을 팔아넘기는 일은 어느 때 어디서나 쉽게 자행되던 패륜(悖倫)이었다. 그러나 경쾌하게 올라가는 은려의 말에 딱히 원한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찌 생각하면, 차라리 춥고 배 곯던 집에 있기보다 왕궁에 팔려와 훨씬 다행이라고까지 여기는 듯해보였다. 정말로,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잊혀지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났기에, 리훈 역시 공녀가 친히 꾸민 화원에 잠겨 오래토록 좋은 기억만 되씹으며 지내고 싶은 충동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할 일이 생겼다.
어쩌면 또다시 피비린내 지독히 흐를지 모를.

“있잖아요, 리훈 공자님, 네?”
“…앞으로 말씀하실 때, ‘있잖아요’ ‘리훈 공자님’ ‘네?’ 세 가지는 좀 빼고 말씀하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피, 피. 하여간 맨날 아저씨들처럼 점잔 빼시기는. 여하튼요, 왜 요즘 들어 색목인들이 뻔질나게 이 나라를 래왕하는 걸까요? 갑자기 꽃에 관심이라도 생겼나?”
리훈은 대답 대신 그냥 웃었다. 그녀 또한 알면서도 괜시리 물어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로 국력이 강성한 나라가 대륙을 일통하지 아니 하는 한, 크고 작은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며, 빈촌(貧村)의 콧물 마시는 삼척동자조차도 그 나라가 아마도 군국(軍國)일 것이리라는 짐작은 할 줄 알았다. 굳이 색목인 용병들의 도움 없이도 대륙을 일통할만한 힘을 지닌 군국보다, 그를 방어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다른 나라에서 용병들이 훨씬 비싼 값을 받으리라는 사실은 실로 자명하였다. 그래서 리훈은 그냥 그렇게만 대답해주었다.
“허리에 큰 칼 차고, 쇠갑옷까지 철렁거리며 꽃밭 보러 오면 공녀 아가씨께서 퍽 좋아하시겠……. 음?”
대수롭지 않게 농을 건네던 리훈이 돌연 얼굴을 굳히며 걸음을 멈추었다. 은려 또한 덩달아 멈추며 입을 열려 했으나, 이제껏 그토록 굳은 표정의 리훈을 본 적이 없었기에 그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서 있었다.
“별스럽군. 이토록 살기(殺氣)를 풍겨댈 위인은 아니었는데.”
“……네?”
“아닙니다. 하기사 아침에 나간 바둑이가 저녁에 검둥개 되어 돌아오지 말라는 법은 없을테니까요. 허나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변하다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리훈은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서두릅시다, 은려 소저.” 대체 무슨 소리람? 은려는 영문도 모르는 채 화닥닥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어전에는 늘 정사를 논하던 신하들과 경공 외에도 과연 평소에 보지 못하던 손님들이 몇 섞여 있었다. 하나같이 통일되지 못한 복색에 말투도 억양도 다양하였기에, 은려는 그저 다들 고국이 다른 모양이라고 짐작만 할 따름이었다.
눈앞에서 읍례하는 리훈에게 손사래를 치며 경공은 언짢은 투로 물었다.
“그대, 묻겠는데, 그 눈가의 칼자국이 진정 전노임을 증명하는 낙인인가?”
“그러합니다.” 리훈의 대답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막힘이 없었고, 그래서 경공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경악은 더욱 컸다. 웃고 있는 자들은, 마치 그것 보라는 듯 어깨를 바싹 치켜올린, 정체불명의 길손들 뿐이었다. 그 웃음들이 꼭 자신을 향한 비웃음처럼 느껴졌는지, 경공은 몸을 떨며 용상의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세게 내리쳤다.
“간악한 자로다! 어찌하여 미리 고하지 아니 하였는가!”
“……소인의 과거사는 차등(次等)으로 두더라도, 그 이름이나 궁금하다 하문하신 분은, 공녀 아가씨가 처음이요, 유일한 분입니다.”
그 중 한 명이 간살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것 보십시오. 제가 저런 작자라 미리 말씀드리지 아니 하였나이까?”
“오오, 천(天)이여, 천이여……! 참으로 거자(巨子)의 깨우침이 아니었더라면 내 큰 실수를 할 뻔 하였소! 저렇듯 음험한 속내를 감춘 자에게 내 딸을! 이 나라의 공녀를 맡기다니!”
그 순간 리훈의 눈에서 처음으로 강렬한 분기가 치솟았다. 그는 창을 축 삼아 몸을 한 바퀴 팽글 돌리며, 거자라 불리운 중년 사내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중키에 마른 몸집인 리훈에 비해 대머리의 중년 사내는 비록 덩치는 훨씬 컸으나 의기는 심약한 듯 뒤로 흠칫 물러났다.
“적사(翟師)께서 귀천(歸天)하신 이후, 갈기갈기 찢겨진 본토의 방파가 내 모르는 새에 드디어 하나로 일통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감히 당신이 뉘 앞에서 거자임을 자처하는가?”
중년 사내가 새된 목소리로 빽 고함 질렀다.
“닥쳐라! 천박한 반도인, 동쪽의 활쏘는 오랑캐(東夷) 따위가 감히 본파의 일도(一徒)를 자처하느냐? 비록 본파의 개파조사(開派祖師)이신 적사께서는 겸애(兼愛)의 마음으로 너희 같은 버러지들을 받으셨다만, 나는 아니다. 너희 같은 것들에게는 마땅히 별애(別愛)하여 이 세상에 도리와 법칙이 살아 있음을 알릴 것이다. 그 것이 적사 생전, 묵류(墨類)의 적전자(嫡傳者)이자 본파의 수장인 거자로 추대된 나, 엄압(嚴壓)의 소명이로다!”

“……너에게 고마워해야할 일이 있구나.” 갑작스러운 리훈의 말에 엄압은 눈썹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무슨 헛소리냐?”
“일찍이 스승께 듣기로, 그저 병기를 만드는 재주만 있을 따름이요, 용(勇)도 협(俠)도 없이 천 리 밖에서 활만 쏘고 만다는 이유를 들어 스승을 묵류에서 쫓아낸 이가 너라고 들었다. 고향으로 향하시는 길에, 전노로 고생하는 나를 보시고, 거금을 들여 면천하여 주시니, 비록 스승께는 같은 하늘을 함께 하기 어려운 원수이나, 나에게는 새로운 삶을 찾아준 부모와도 같으니, 늘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잠시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리훈은 그러나 서릿발 같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허나 적사 생전, 그와 같은 이유를 숱하게 들어 거자가 될 만한 인재들을 축출하고, 일파를 서로 이간하여 위세 높던 묵류를 엉망으로 만든 그 죄, 결코 가볍지 아니하다. 스승께서 가르쳐주신 본파의 규율대로 너의 목을 칠 것이되, 명은 누구에게나 중하고 귀하니, 지금이라도 그 뜻을 꺾고 떠나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
아쉽게도, 어찌 거자에 추대되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엄압에게는 리훈과 단독으로 맞붙어 승부를 낼만한 기력과 용력은 능히 있어 보이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그 옆에서 학우선(鶴羽扇)을 팔랑팔랑 부치며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던, 풍채 좋은 늙은 선비가 그 앞을 막아섰다.
“일찍이 듣기로, 묵류의 위세가 드높아 그 협기가 천하에 미친다 하더니, 반도에서 이런 인재가 있는지 알지 못하였소. 학국 공맹문(孔孟門)의 노유자(老儒者)가 삼가 처사(處士)께 인사 올리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비록 몇몇 참람된 무리들이 선사(先師)의 뜻을 더럽혀 어지러운 중에 있으나, 공맹문의 도(道)는 하루가 다르게 그 문하가 늘고 위명이 높아, 숱한 젊은이들이 그에 뜻을 두며, 또한 바르고자 하는 군주가 그 가르침을 받지 않는 이 드물다 들었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자 하였던 공맹문의 가르침은 후세에 능히 불후(不朽)로 남을 것입니다.”
엄압을 제외한 주위의 모든 이들이 리훈의 품격 높은 응대에 감탄하였다. 적어도 둔하기 짝이 없는 엄압보다 리훈이 훨씬 거자에 어울린다는 점을 심지어 은려가 봐도 능히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처사야말로 과찬의 말씀이오. 일창으로 군국의 명장을 물리치고, 이자(二字)로 소인배들을 감히 이 나라에 범접치 못하게 하였으니, 일찍이 평생을 주유열국(周遊列國)하며 목숨을 내놓는다 해도 협을 다해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켰던 묵수(墨守)의 고사는 여전히 그 위용이 시퍼렇게 살아 숨쉬고 있지 아니하오? 묵류의 일원이 이 곳을 지키고 있다 널리 알렸는데, 감히 누가 이 곳을 함부로 범하려 하겠소?”

리훈은 참으로 보는 이가 빈정 상하도록 푸근하게 웃었다.
“귀하들이 오셨지 아니합니까.”
능구렁이 같은 놈이로세. 묵수의 두려움도 모르는 놈들이 가소롭다 이 뜻이로군. 노유자는 꿈틀거리는 입가를 재빨리 학우선으로 가리며 화답하였다.
“너무 그리 탓하지 마시오. 듣기로, 새 거자에 추대되신 엄압께서 처사의 솜씨가 그토록 고명하다 전하기에, 이 늙은이가 빙충맞게도 수담(手談)이나 나눠볼까 하여 이 곳에 친히 걸음한 것뿐이외다. 비록 늙었으나 호승심(好勝心)이 아직 남아 있으니 내 또한 사내인 모양이오.” 리훈은 대답 없이 시선을 한 바퀴 휘 돌렸다.
“귀하들도 그러한 연유로 이 곳에 솔래(率來)하셨습니까.”
엄정하기로 이름난 법국의 판관, 커다란 두건을 쓰고 흉터투성이의 손을 가진 기상합종회의 기술자, 악국(樂國)의 괴이한 광대 또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 엄압의 꾐에 넘어가 리훈과 자웅을 겨루기 위해 친히 찾아온 것이다. 공녀를 탐화로 부르건 여화로 부르건, 그런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음이 분명했다.
묵류의 창시자인 적은, 비록 기상합종회의 재인들과 마찬가지로 천한 수공예자에 불과했으나, 병기를 만들고 전략을 짜는데 능하여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누르려 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참하려 할 때, 언제든, 어디든 달려가 설사 죽는다 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도왔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 의기 높은 마음을 협(俠)이라 하여 칭송하였고, 그 고사를 묵수(墨守)라 이름하였는데, 묵수의 깃발이 걸린 성은, 아무리 무도한 야적(野賊)조차 함부로 침범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묵수의 이름 아래, 묵류의 문하들은 언제나 늘, 자신의 목숨을 내걸어야만 한다는 뜻도 되었다.
물론, 리훈에게는 언제나 쭉 있어왔던 일상이었다. 그가 긴 창을 가볍게 세워들자, 주위 사람들이 놀라 황급히 자리를 물렸고, 순식간에 널찍하고 화려한 비무장(比武場)이 완성되었다.

“누가 선(先)이십니까?”
천하의 고수들을 상대로, 그러나 리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하였다. 그 의연함에 감탄하며 공맹문의 노유자가 학우선을 팽개치고, 근육이 울룩불룩한 팔뚝을 걷어부치며 앞으로 나섰다.
“장유유서(長幼有序)요.”
“아, 그러합니까?”
미처 몰랐다는 듯이 옅게 떠오른 리훈의 비웃음을 노유자는 참을 수 없었다. 마치 젊은이 같은 두 팔뚝을 걷어붙이며 당장에 벽력 같은 장권(掌拳)으로 들이치려 하였으나, 삼보(三步)를 채 나서지 못하고, 다시 뒤로 어정쩡하게 물러날 도리밖에 없었다. 리훈이 세워든 창을 그대로 아래로 내려 그를 똑바로 겨눈 것이다. 일장 오척이나 되는 긴 창이 거리를 두고 있으니, 어디를 향한다 하더라도 리훈을 타격하기가 어려워진 노유자를, 법국의 판관이 진중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공정치 아니하오!”
“그리 말하는 이는 뉘십니까?”
“법국의 대판관(大判官) 상율(尙律)이요. 오랫동안 법을 다뤄왔으며, 또한 법을 다루는 이들의 수장으로서 말하건대, 참으로 옳지 못하오. 공수(空手)에는 공수(空手)로 맞서고, 병기에는 병기로 대항함이 마땅치 아니하겠소? 그저 긴 것을 무기 삼아 상대를 멀리 하고자 하면 어찌 비무가 되겠소?”
여전히 노유자에게 시선과 창날을 떼지 않은 채, 그가 어디로 향하든 창끝을 계속 따라 겨누면서, 리훈은 공손한 말투로 맞받았다.
“아, 제가 미처 몰라뵈었습니다. 공정하기로 명성이 자자하신, 명심판관(銘心判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니 과연 그릇되다 여기실만 합니다. 어찌나 공정함이 지극하신지, 과세(課稅)함에 있어 법에 새긴 대로, 백승천승(百乘千乘)을 부리는 명가(名家)에도 한 닢, 사순팔식(四旬八食)하는 빈가(貧家)에도 한 닢을 내도록 하여, 여섯 백성이 피폐해도 한 군주와 두 명가와 세 판관은 평안하고 부유함으로, 법의 명예를 지고히 드높이니 어찌 법국이란 이름에 걸맞지 아니하다 하겠습니까.”
법국의 판관이 시뻘개진 얼굴로 반박을 못하고 있자, 노유자는 혀를 차며 다시 두어 걸음 더 물러서더니, 품 안에서 굵직한 철필(鐵筆) 한 자루를 꺼내었다.
“애초에 지키는 것만이 요점인 방파이니, 스승은 활, 제자는 창이라, 참으로 요긴하겠소.” 거자임을 자처하는 엄압 따위는 개의치도 않는 말투였다. “해서, 이 늙은이도 모처럼 허공을 종이 삼아 붓이나 놀려볼까 하오.”
리훈은 날카로운 비수 같은 미소를 띄어보였다.
“혹여 이번 길이 초행(初行)이 아니신 듯 싶습니다만.”
“그렇소. 이 나라의 기화요초가 아주 절경이라 하여 요양차 잠시 온 적이 있었소만.”
“그 때 공녀께서 보여주신 예서(隸書)는 제가 쓴 것입니다. 배움이 얕아 열일곱 개나 되는 서도법을 알지 못하니, 박사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인걸(人傑)은 준수하나, 필력(筆力)이 따르지 못하니, 수양이 필요하겠구려!”
빈 손으로 쩔쩔매던 때와 달리, 노유자는 넘치는 기세로 철필을 휘두르며 리훈의 창과 맞섰다. 비록 쇠로 만들었다 하나 반 자도 채 못 미치는 붓으로 일장오척의 창을 어찌 막을까 싶었으나, 노유자는 경이롭게도 창의 기세를 버티니, 바로 그 유명한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의 묘수였다. 아주 먼 훗날, 대륙을 일통한 또다른 나라에 이민족들이 득세하여 나라의 정치가 피폐하고 전국에 거지들이 들끓었으나, 뜻밖에도 그들을 이끄는 수장의 무공이 뛰어나고 기개가 대단하여 사량발천근의 묘수를 스스로 깨우치니, 가느다란 지팡이로도 능히 몇십 근의 병기를 받아넘기는 신기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좌우지간 그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고, 사량발천근의 묘수를 처음 접한 리훈으로서는 내심 경탄하며 창날을 바깥으로 휙 내돌렸다. 앞길을 방해하던 장창이 없어지자 노유자는 쾌재를 부르며 철필로 강하게 머리, 복부, 하체를 연이어 세 번 내찌르니, 공맹문이 천하의 제일이라 자부하는 절기, 직(直) 자 결이었다. 공맹문의 개파조사는 이 초식을 사용하여 무도한 무리들을 단번에 꿰었다 자랑하였으나, 그 철필이 몸에 닿기 전, 휘어져 움직이기 불편한 한 다리를 축으로 삼아 한 바퀴 회전한 리훈이 창대로 노유자의 어깨를 밀어치니, 그 역시 다시금 물러날 도리밖에 없었다. 이어 그는 단살창(短殺槍)의 자세로 창자루를 짧게 잡으며 상대와의 거리를 빼앗기 시작하는데, 언뜻 보기에는 본디부터 짧은 철필을 쓰는 노유자가 단병접전에 훨씬 유리할 듯 하였으나, 긴 창을 짧게 잡아 불편해보이는 리훈의 움직임은 시종 여유로웠고, 오히려 늙은 선비의 붓이 어지러이 허공을 찌르고 맴돌 따름이었다.
엄압이 대경실색하여 요란을 떨며 상율 판관을 돌아보았다.
“상 판관! 대체 어찌 된 일이오? 법안(法眼)으로 살피고 계시오?”
법안은 무슨, 그냥 봐도 알겠다, 이 모질아! 라고 외치는 대신, 판관은 근엄하게 대답했다.
“후(後)의 선(先)을 빼앗겼소. 붓은 짧아 빠르고, 창은 길어 느린 듯 하나, 궤적을 넓게 그려 붓이 공격해오는 모든 접점을 미리 봉쇄하니, 서역의 색목인들이 즐겨 만든다는 미로를 세운 듯 하구려. 지금 노유자의 붓은 저 미로에 갇혀 도통 헤어나오질 못하니, 통재, 통재(通才)로다.” 판관은 큰 한숨을 내쉰 뒤 덧붙였다. “과연, 묵수(墨守)요, 방어의 요해(了解)이외다.”
“파해(波解)는, 파해는 할 수 없소? 저 자의 방어법을 파해하고자, 어떤 종류의 법이든 깨우칠 수 있다는 그대를 모신 것 아니오!”
상 판관은 조금 뻔뻔하게 나가기로 작정한 듯한 모양이었다. “명색이 묵류의 거자를 자처하는 이가, 고작해야 말석 제자의 창질 하나 파해치 못하여 나를 닦달하는 게요?” “뭐, 뭐요?”
두 사람을 말다툼을 잇는 사이, 노유자의 공격은 절정에 다다랐다. 공맹십이필법(孔孟十二筆法) 중 가장 강맹한 초식인 직, 신(信), 의(義)를 썼고, 그예 철필을 내던지며 아예 창대를 부여잡고, 군자권(君子拳)의 금나수법(擒拿手法) 중 절초로 손꼽히는 인(仁)자 결로 부러뜨리려 하였으나 역시 뜻대로 되지 하였다. 그래도 뜻을 꺾지 않고, 이번에는 아래로 스미듯 파고들며 리훈의 두 다리를 꿰어잡고 내동댕이치려는 듯 번쩍 들어 올리는 거(擧)자 결을 사용하려 들었으나, 놀랍게도, 근육이 실팍한 노유자에 비하면 수수갈대처럼 연약해뵈는 리훈을, 그러나 그는 전혀 들어올리지 못하였다. 숫제 창을 거두고 어디 한 번 들어보라는 듯이 눈을 내리깔고 있는, 리훈을 보며, 결국 노유자는 땀범벅이 된 몸을 그대로 꿇어 엎드렸다.
“노구(老軀)가, 졌소.”
그 순간 엄압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직 소인수(小人手)가 남았잖소! 그 자세에서 가랑이 사이를 들이받거나, 발목을 꺾어버리는 수법도 쓸 수 있는데 어찌하여……!”
그러나 그러한 외침은, 고작해야 그가 거자의 지위에 연연하는 미련한 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꼴밖에 되지 아니하였다. 심지어 가랑이 사이가 허전한 내관들조차 눈살을 찌푸릴 새, 노유자는 리훈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며 어이 없다는 듯 엄압을 쏘아보았다.
“공맹문의 도를 익히는 나더러 그런 암습으로 승리를 빼앗으라는 거요? 군자는 비록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개의치 않으니, 본파의 개파조사께서 소인수의 이름으로 암습들을 정리하신 것은, 그를 본받기 위함이 아니라, 절대로 금하기 위함이며, 또한 상대가 그런 수를 쓴다 하더라도 당황치 말고 충분히 방어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함이었소. 그리하여 우리는 소인수의 방어법을 지(智)라는 이름으로 또한 정리하였던 거요.”
“……잘났소, 참으로 잘났소! 공맹문에 성인(聖人) 났음을 경하드리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상선(上善)을 신봉하는 도사들을 모심이 나았을 거외다!”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도를 닦는 이들이란, 공맹문과 대대로 앙숙인 노장파(老壯派)를 이르는 말이니, 그 유치함에 차마 대꾸도 하기 싫었던지, 노유자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하기를, 행여나 오늘 일이 노장파의 귀에 들어가 비웃음을 산다면, 저 혀 가벼운 자칭 거자 놈을 결코 그냥 두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명색 거자란 자가 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면, 묵류의 명성도 필시 오래 가지 못할 것이었다. 다만 공맹문에서 가장 찬탄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지닌, 저 반백장발의 남자라면…….

“깔깔깔! 폐가 되지 아니한다면, 소인이 잠시 끼어도 되겠습지요?”
불쾌한 침묵을 깨고, 더욱 불쾌한 웃음소리가 주위를 가득 울렸다. 언뜻 듣기엔 남자의 중후한 무거움이 있었고, 또 언뜻 들으면 여자의 성난 날카로움이 있어, 심히 괴걸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등은 꼽추요, 이는 옹니에, 입술은 언청이로, 보기 싫은 모습들은 모두 그러모아 갖춘 듯한 행색의 광대가 쟁(錚)을 쟁쟁 울리며 앞으로 나섰다.
“귀하는 뉘십니까?”
리훈의 말음에 광대는 징그러운 웃음으로 화답했다.
“소인에겐 이름 따위가 없습니다. 아시잖습니까?”
리훈 역시 노예 출신인 주제에 벌써 그 처지를 잊었느냐고 야유하는 듯한 되물음이었다. 리훈이 창을 겨눈 채 미동조차 없자 광대는 씽긋 웃으며 다시금 쟁을 쾡쾡 신나게 쳐댔다.
“아이고, 쌀벌합니다요. 소인 같은 병신에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어디 상대가 되겠습니까? 전 그저 한 차례 힘든 싸움을 끝내신 나으리께 좋은 아악이나 한 곡 올리고저 나왔을 따름입니다. 아, 공맹문의 개파조사께서도 어찌나 아악(雅樂)에 빠지셨는지, 석 달 열흘, 꼭 백 일을 채워 고기 맛도 모르셨다지 않습니까?”
“악국의 음악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음색은 엽색하고, 음률은 난잡하여 마음에 깊이 파고듬이 없고, 그저 뜻 없는 시문(詩文)에 귓바퀴를 자극하는 가락을 얹어 사람을 꼬여내니, 일시에 사유를 마르게 하고, 그 순간에 도취시켜 영원히 머무르게 만들 따름입니다. 하여, 비록 악국이 대륙 칠국 중에 제일 아래이나, 정복당하려 할 때마다, 요사스런 음악과 그 연주자로 하여금 상대케 하니, 이날 이때껏 악국의 국경을 제정신으로 넘은 자가 한 명도 없다 하는데, 과연 그러한지요?”
붉은 연지를 칠한 광대의 입술이, 분을 발라 더욱 허옇게 뜬 얼굴에 도사린 뱀처럼 꿈틀거렸다. “직접 확인해보시지요?” 말을 마친 광대는 쟁을 내던지고, 커다란 금(琴)을 꺼내어 타기 시작했다. 과연 그가 타는 음률은 리훈이 지적함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 듣는 이들치고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아니, 단 한 명, 그 곡조에 마음을 빼앗겨 온 몸을 버둥거리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아닌 엄압이었다. 광대가 곡조를 타자 이미 그 때부터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푸르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게거품을 가득 문 입술을 바르르 떨며 사지를 휘저어 괴성을 지르니, 보다 못한 노유자가 혀를 차며 그의 등골에 손을 대어 진기(眞氣)를 주입해주었다. 대학심법(大學心法)의 기본인 신수공(身修功)으로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엄압은 심히 부끄러웠는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훔치며 겨우 노유자에게 한 번 읍하였다. 그러나 노유자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엄압의 재주 얕음은 심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반면, 창을 세워든 리훈은 사광산(使狂散)의 곡조를 묵묵히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일찌기 광대가 이 사광산을 지어 타기 시작하면 제아무리 강맹한 군대라 할지라도 빠른 장단에 심장이 터지고, 느린 장단에 온 몸이 무거워 그 행렬이 헝클어지고 어지럽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오로지 리훈은 태산과 같이 진중하게 서서 미동함조차 없었으니, 과연 엄압을 진정시킨 노유자가 그 모습을 보며 부동심(不動心)의 경지라 찬탄할만 하였다. 리훈은 움직임이 없고, 악기를 다루는 광대가 오히려 평정을 잃어 점점 얼굴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괴성을 내지르며 현(絃)에 예리한 비수 일곱 개를 걸어 벼락같이 내쏘았다. 이름하여 탄금뇌비(彈琴雷匕)의 묘수였으나, 군국의 명장도, 학국의 박사도 뚫지 못한 리훈의 방어를 그리 쉽게 뚫을 수는 없었다. 끌어 휘두르는 창의 일초에 사방으로 튕겨나가는 비수들을 보며 광대는 절망하여 금의 현을 맨손으로 모조리 뜯어 발겨버렸다. 하얗게 분칠한 손에 맺힌 핏방울이 유독 붉고 또 붉어, 궁궐의 바닥으로 똑똑 떨어지는 모습이 한없이 한스러웠다.
“그대는 대체 누구요! 살아온 생에 치달아 끓는 욕(慾)도, 머물다 끊어지는 지(止)도 없더란 말이오! 아무리 빈한하여도 낙(樂)과 애(哀)는 하늘이 내렸으니, 누구나 가지고 있음이 마땅하거늘!”

리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잊어버리지 아니했을 뿐이오.”
“무엇을!”
“내 삶이 다른 이들의 숱한 목숨 위에 쌓아올린 혈상누각(血上樓閣)임을.”
“누구나 그리 사는 것을, 무엇이 별다르기에!”
“물론 그러하오. 그러나 외면하고 무시하는 와중에 잊어 묻어두고, 혹은 의도적으로 해하고 취한 것으로 스스로 쌓아올리는 이들도 부지기수요. 나 또한 생의 한 자락을 그리 살았음을 부정하지 않으리다. 허나 돌아보니, 내 살고자 빼앗은 것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고, 더 이상 그 무게를 늘리지 아니하고자 했을 뿐이오. 그리하여 결단코 빼앗지도, 잊지도, 무시하지도 아니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묵류의 뜻이외다.”
리훈의 이야기를 들은 광대는 발작적으로 다시 약(籥)을 꺼내들었으나, 뜻밖에도 상율 판관이 엄정한 얼굴로 그 피리를 붙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두시오. 될 상대가 아니외다.” 가벼이 잡은 듯하였으나, 법국의 판관은 천하중생의 크고 작은 송사를 온전히 판결하기 위해 산맥 같은 장서들을 양 손에 가득 쌓아 옮김을 멈추지 않는다 하니, 그 강한 악력에 금방이라도 약이 쪼개질 것만 같아, 광대는 황급히 절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리훈은 느릿하게 물었다.
“하면, 상 판관께서 오실 차례입니까.”
“아니, 나도 상대하지 아니하오. 색목인들 또한 그러하였듯이, 법이란 태초부터 가장 합리의 극의(極意)만을 궁구(窮究)하였소.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을 모시는 노유자가 여기 계심에, 문자 쓰는 격이 되어 쑥스럽소만은…….” 상율은 약간 민망한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지었다. “궁(窮)이란, 내 몸을 활에 걸어 쏘는 듯하여, 한번 생각함을 멈추지 아니하고, 구(究)는 구멍을 아홉 번 파듯이 그 생각함을 더욱 깊게 한다 하였으니, 그러나 아무리 궁구하여도, 천하의 노유자가 사력을 다하여 그대를 집어던지지 못했고, 악국 광대의 묘수로도 그대의 마음을 흔들지 못한 연유를 찾지 못하였소. 이는, 아마도 그대가 무도히 취한 생(生)과 명(命)의 무게를 잊지도, 흐트러뜨리지도 아니하고 늘 쌓아두어 자각함이라 하였으나, 나는 믿을 수 없소. 그러니 대적하지 아니할 것이오. 내 법안(法眼)의 패배요.”
“사, 상 판관……!”
엄압이 허둥지둥 상율 앞으로 다가섰으나,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리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법안보다 더 빨리 틔우셔야 할 것이 있으십니다.”
“……그게 뭐요?”
“천안(天眼), 민안(民眼), 심안(心眼), 리안(理眼). 이름은 뭐라 불러도 좋으나, 다 같은 안법(眼法)을 지칭하니, 보이는 것만 보려 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하려 들지 않으며, 무엇을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대하든, 반드시 피폐하여 약해지고, 고통받아 울부짖는 풀뿌리 같은 목숨(民草)들을 먼저 살피는 눈입니다. 그 눈을 안즉 틔우시지 못했기 때문에, 고작해야 민초들을 지키기 위해 고안해낸 간단한 창법을 파악하시지 못한 듯 합니다.”
“……유념하리다.”
상율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늘 품에 두는 두꺼운 국조대법전(國祖大法典)이 어쩐지 더욱 무거워진 듯하여, 어색한 느낌까지 들었다.

마지막으로 리훈은 창끝으로 기상합종회의 여성 기술자를 가리켰다.
“듣기만 듣기로, 뵙는 건 처음입니다. 공수반(公輸班) 소저.”
이립(而立)이나 되었을 듯한 젊은 처녀는 얼굴을 붉히며 읍하였다. “나를 아십니까?”
“스승께 전해들은 바가 있습니다. 몇 해 전, 기상합종회가 아직 연유하기 이전에, 기국(技國)이라 이르는 기술자들의 천국이 있어, 손재주 있는 이들은 누구나 그 나라에서 대접을 받았으니, 스승을 가르치신 스승께서도 아직 어렸던 소저의 천부적인 재능에 감탄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나를 무척 귀애(貴愛)하셨더랬지요. 허나, 그 분은 내가 고안한 운제(雲梯)를 무참하게 부숴버리셨습니다.”
리훈은 담담하게 웃었다. “아직 이팔(二八)이 채 지나지 않은 소저는, 병기를 고안해내는데 뛰어났으나, 학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군국에서 제작을 부탁한 병기가 얼마나 많은 싸움에서 얼마나 많은 살육을 부를지는, 생각하지 아니하셨다 들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직접 칼을 들어 피를 받아내지는 아니하나, 마찬가지로 만들어낸 만큼 책임을 져야 함을 가르치기 위함이셨습니다. 전노 출신인 저 역시도, 지금까지 그 죄값을 받고 있지 아니합니까. 소저는 너무 야속하게 생각치 마시기 바랍니다.”
“지키는 자가 있으니 부수는 자가 더욱 벼르는 것이 아닌지요? 운제는 성벽을 타넘고 무너뜨리는데 있어 당금(當今)에 그 이상 뛰어날 수 없습니다. 상국(商國)과 연횡(聯橫)하여 기상합종회가 출범한 이후로, 다시 제작한 운제는 수많은 야적(野賊)들의 산채(山砦)를 부수어 민초들의 삶을 지켰습니다. 오로지 묵류의 수(守)만이 민초만을 지킬 수 있다 생각하십니까?”
“일부러 잊으셨는지, 혹은 정녕 모르시는지 짚어낼 방도야 없겠으나, 그 운제가 일찍이 천지신명(天地神明)을 받들었던 태고의 나라 무국(巫國)을 무너뜨려, 연약한 무녀(巫女)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또한 군국이 그 병기를 즉시 받아들여 일통전쟁의 서막을 열 도구로 쓰이리라는 말씀은 왜 하지 아니하십니까? 백 보 물러나, 무도한 야적들은 참람되어 벨 수 있다 하더라도, 한 나라를 이루던, 그것도 저항할 수 없는 여성들을 무너뜨린 것과 같은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오면, 군국의 창검이 마침내 마지막 일통을 위해, 기상합종회를 향해 그 운제를 겨눈다면, 그 때는 무엇으로 그 침략을 막으시렵니까?”
“묵류의 일원께서는 본회(本會)를 실로 업수이 여기시는군요. 어차피 설계할 수 없을테니, 또 하나의 회심작을 지금 공개해도 상관이 없겠지요. 쇠뇌(釗檑)는 묵류가 방비의 도구로 쓰는 궁시(弓矢)보다 훨씬 사정거리가 멀고 그 굵기도 기둥 같아 막거나 피할 수 없으며, 한번에 쏘아내는 숫자도 십수 개에 달하여 하늘을 덮는 파도 같으니, 운제를 들고 달려오는 병사들이 무엇으로 방비할 수 있겠습니까?”
리훈은 차갑게 웃었다.
“무략방즉이대무(武掠防則以大武 - 무력으로 인한 침략은 더 큰 무력으로 막는다.)의 뜻이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그러니 그 쇠뇌를 막고자 군국은 더더욱 새로운 병기를 개발하려 할 것이니, 그 때에는, 정말 이 나라에서 일통전쟁을 먼저 벌이고자 비밀리에 준비하는 총통(銃筒)이 능히 쓰일 법합니다. 이제껏 산을 무너뜨리고 바위를 깨는 축성(築城) 공사에나 쓰였던 화약(火藥)이 수많은 이들을 참살할 것이니, 기상합종회가, 혹은 화국의 평천하(平天下)는, 하잘것없는 이 창잡이가 검을 쥐던 시절, 빼앗았던 생명들의 수천수만 배를 쌓아올릴 것입니다.”
리훈의 으스스한 예고에, 누구도 입을 열어 대답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경공의 벼락 같은 고함이 침묵을 깨뜨렸다.
“네, 네 녀석이 어찌! 어찌! 이 나라의 가장 큰 기밀을 알고 있는가! 뉘가 일러주었는가!”
리훈은 긴 창대를 목에 비스듬하게 기댄 채 싸늘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나으리의 따님이 청맹이라 하여, 그를 지키는 이마저 그런 줄 아셨습니까? 오로지 아름다운 꽃 말고 그 어떤 다스림의 생각(理念)도 없는 이 나라에 돌연 색목인 용병들이 그토록 보임이 신무기를 시험해보기 위함인 줄, 정녕 모를 줄 아셨습니까? 그러한 연유로, 저의 출신을 스스로 밝히지 아니한 것입니다.”
“무, 무, 무엄하다!”
“정녕 무엄한 것은, 당신입니다. 민심(民心)은 곧 천심(天心)이니, 오로지 새로운 병기만을 믿고 백성들을 사지(死地)로 내몰기를 강요한 대가는 반드시 비싸게 치르실 것입니다.”
“닥쳐라! 그대들은 무얼 하는가! 저 자, 아니, 기상합종회의 저 어린 년까지, 아니, 여기 있는 자들을 모조리 엮어 옥에 처넣어라! 아니, 기밀이 새어나가서는 아니 되니, 아예 이 자리에서 참살하여도 상관없다!”

下 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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