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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좁은 방

2011.04.15 19:3004.15

좁은 방


하루 새 천둥이 백여든한 번이나 치던 날이었다. 비는 지상 모든 것을 밀어내려는 양 내렸고 손수 지어올린 그의 집은 불 올린 냄비처럼 들썩거렸다. 불안해 커튼을 걷어보자 밖은 처참했다. 귀농의 환상을 좇아 내려온 도시인의 첫 번째 밭이었건만. 그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짚었다. 천생 도시사람인 부모의 뒤를 따르기 싫어 그 거센 반대를 막무가내로 뚫고 내려온 곳이 여기였다. 그런데 부모를 반하며 한 최초의 일이 이렇게 되었다. 그는 아직도 부모 집의 작은 방 안에 갇혀있는 것 같은 기분에 몸을 웅크렸다.
어지간히도 불길한 밤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섬뜩한 기분에 창가에 붙어있던 몸을 뗀 그가 커튼을 닫으려던 차 밖에서부터 어렴풋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천둥소리와 그칠 줄 모르는 빗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것은 노크소리였다.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끊임없이 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 희미하지만 확실한 그 소리를 따라 문을 열자 문 밖에는 소녀가 서있었다. 우비를 걸쳤는데도 완전히 젖어버려 안쓰럽기까지 한, 대략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였다.

"비, 비가 많이... 와서요."

열린 문을 더듬으며 들어선 소녀는 소녀답게 발간 입술을 떨었다. 아니, 전신을 떨었다. 비에 떨고 있는 것인지 혹은 다른 어떤 것에 떨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늘 밤만 무, 묵을 수 없을까요.”

더듬더듬 떨리는 소녀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바깥 소음에 먹혀들어갔다. 귀를 세우고 있던 그는 다행히 그것을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그러고도 그는 의아해 했다. 한밤중에 찾아와 방을 청하는 손님. 워낙 산촌이다 보니 헤매거나 길 잃을 사람은커녕 찾아올 사람도 없어 손님이라고는 보기 힘든 이곳에, 보호자 한 명 없는 어린 소녀가 찾아오다니.
그러나 아무리 수상하다한들 험악한 바깥으로 소녀를 내쫓을 수는 없기에 그는 모든 의문을 접어두고 소녀를 집 안에 들이기로 했다.

그를 따라 들어선 소녀는 집 안으로 습기와 빗물 그리고 여행 가방 하나를 끌고 들어왔다. 소녀의 빨간 입술에게 어울리는 선명한 빨간색의 여행 가방이었다. 그런데 그 소녀다운 색깔과 달리 비에 젖은 여행 가방에서는 뭔지를 짐작할 수 없는 거무튀튀한 액체가 꼬리처럼 따라다녔다. 흙탕물 같아 보이기도, 아닌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소녀의 손에 들린 것은 공사장에서나 쓰일 법한 삽이었다. 그것을 뚫어져라 보고 있자 소녀는 삽을 등 뒤로 숨기며 물었다.

"씻을 수 있을까요?"

소녀의 차림에만 눈이 팔려있던 그는 그 말을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소녀가 수상하다는 것보다 그녀가 그대로 두면 감기에 걸릴 정도로 푹 젖어있다는 게 더 중요했다. 그는 보일러실로 달려 내려가 보일러를 틀었다. 소녀를 위해서였다.
보일러실에서 올라온 그는 소녀를 화장실로 안내했다. 그다지 시설이 좋은 곳이 아니라 샤워를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머리 정도는 감을 수 있을 거라며. 소녀는 숙인 고개를 조금도 들지 않고 연신 '감사합니다'만 반복했다. 괜찮다고 소녀를 달래 겨우 안으로 들여보내고, 그는 그제야 자리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오랜만의 손님이라 그런지 긴장한 것 같았다. 도시에서도 저 또래의 여자아이들은 길을 묻기만 해도 변태 취급을 하니 잘 마주칠 기회가 없었기도 했으니 더 그랬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뒷목을 쓰다듬던 그는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다 소녀가 두고 들어간 예의 여행 가방을 보았다. 가방은 화장실 문 바로 옆에 뉘어져 있었다. 그는 소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소녀가 씻는지 물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정도는 봐도 들키지 않겠지, 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는 그 안에 든 것이 궁금했다. 소녀가 혼자 이런 외진 곳까지 내려올 때 가지고 온 것이 무엇인지. 그는 여행 가방 가까이로 다가갔다. 손이 닿을 정도까지 다가가자 비 냄새에 가려져 맡지 못했던 역한 냄새가 배어나왔다. 가방을 열지 말라는 경고 같았다. 그는 눈을 감고 손을 내밀어 가방의 지퍼를 잡았다. 그렇게 내리기 시작한 지퍼는 뭔가에 걸려 자꾸만 막혔다. 그는 힘껏 지퍼를 잡아 내렸다. 살아있는 것의 배를 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나면서 가방이 열렸다. 흘러만 나오던 기운이 확하고 끼쳤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그는 감고 있던 눈을 조금씩 눈을 떴고 곧 가방 안의 것이 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썩어 들어가고 있는 누군가였다. 팔과 다리 혹은 머리로 조각조각 잘려 차곡차곡 가방 안에 착실히도 쑤셔 넣어진 누군가의 시체였다. 아마 지퍼가 계속 걸린 것도 거기서 배어나온 진물이 굳어 그랬던 것일 게 분명했다. 기분 탓인지 순간 어느 때보다 큰 천둥이 친 것 같았다. 빙하처럼 차가운 온도의 뭔가가 그의 척추를 관통하고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그것이 괴물이라도 되는 듯 가방에서 서둘러 손을 떼고 뒷걸음질 쳐 달아났다. 그리고 하염없이 도망치던 그가 벽에 등을 부딪쳤을 때, 그의 옆에는 소녀가 서있었다. 저 끔찍한 것을 들고 그의 집에 들어왔던 소녀가. 그는 두려움에 차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가 올려다 본 소녀는 울고 있었다. 비를 맞고 막 들어왔을 때처럼 입술을 깨물며 온몸으로 울고 있었다.

"드, 들어주세요. 제발 들어, 들어주세요."

그리고 소녀는 말했다.


소녀가 전해 듣기로 소녀의 부모는 서로에게 무척이나 다정한 부부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도 여느 부부들과 다르지 못해서 10년이 넘어가자 변하기 시작했고 5년 전, 간단한 합의 이혼으로 둘은 마침내 지긋지긋하던 서로에게서 돌아섰다. 지극히 평범한 결말이었다. 그리고 그 결말 뒤편에 남겨진 소녀는 어머니의 거부와 아버지의 무언에 아버지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딱히 불행하다 할 것도 없었지만 딱히 행복하다 할 것도 없는 생활이었다. 4년 후, 소녀의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널렸다면 널렸을 폐암이었다.
조용히 죽어간 아버지를 두고 소녀는 이번에는 어머니에게 맡겨졌다. 아버지에게 맡겨졌을 때와 달리 소녀는 행복했다. 비록 소녀의 어머니는 소녀를 아낄 줄 모르는 무심한 모친이었지만 왠지 저번에 도망간 어머니를 되찾은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소한 행복에 금이 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전에는 소녀와 아버지가 살았고 지금은 소녀와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에서, 소녀가 이상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소녀가 그것을 발견한 곳은 아버지가 생전에 들어가지 말라고 몇 번이고 말했던 방이었다. 언제나 종이 상자로만 가득 차있던 방이었고 그래서 소녀는 그것이 아버지의 추억거리려니 생각하고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정리를 위해 방에 들어간 소녀가 상자들을 열어보았을 때, 소녀는 아버지가 그곳에 들어가지 말라한 이유를 알았다. 그 상자들 중 반절은 소녀의 예상대로 아버지의 추억거리 같아 보이는 책이나 앨범 따위였지만 그 나머지는 썩어 문드러져가는 시체들이었던 것이다. 다해서 총 스물 두 구의 시체. 소녀의 아버지는 사람을 죽였다.
소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상자를 내팽개치고 방을 나왔다. 시체의 낮은 체온과 굳은 고기가 그것을 본 자신의 안구로 스며드는 것 같은 생소한 느낌에 소녀는 울었다. 온힘을 다해 울며 어머니를 찾았다. 그러나 소녀의 어머니는 집에 없었고 결국 홀로 거실에 주저앉아 진이 다 빠지도록 울던 소녀는 문득 생각했다.

"그, 그걸 보면 엄마가... 엄마가 다시 도망갈 수도 이, 있다고요."

머리카락의 뿌리를 더듬는 소름에 방에서 뛰쳐나왔던 자신처럼. 혹은 자신을 아버지에게 버리고 도망가 버렸던 그 때의 어머니처럼.
그 때부터 소녀는 어머니 몰래 시체를 묻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갖고 싶다 사정사정을 해서 산 새빨간 여행 가방에 들어가기 알맞도록 시체를 잘라 넣고 한 손에는 공사장에서 주운 삽을 든 채, 소녀는 갈 수 있는 한 멀리 나가서 그것들을 묻고 왔다. 이것들에 질린 어머니가 도망치지 않게 하기 위해, 몇 년에 걸쳐서. 그리고 여기까지 들고 온 것이 그 마지막 시체였다. 이것만 처리하면 어머니는 영원히 도망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왔다.

"드, 들키면 안돼요. 엄마가, 엄마가 도망가요. 멀리요. 그러니까 제발 말하지 말아주세요. 아무에게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네? 제발요, 제발, 제발."

제발제발제발제발,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소녀는 그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았다. 부여잡고 사정했다. 그는 그것을 내팽개치지도 못하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소녀가, 꼭 그 자신처럼 느껴졌다. 상황은 완전히 달랐지만 그랬다. 부모의 작은 방에 갇혀 있는 것이 꼭 같았다.

"일단 들어가서 자."

다정한 어조에 소녀는 불쌍할 정도로 감격한 얼굴을 하고 화장실을 안내해 줬을 때처럼 '감사합니다'를 다시금 수십 번 반복했다. 기절하듯이 잠든 소녀를 제 침대에 눕히고 그는 도로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는 곧 다시 일어나 전화기 쪽으로 갔다. 그는 전화기를 집어 들고 번호를 찍었다. 112. 부모가 때로는 어떤 것보다 더 좁게 자식을 가두는 방이 될 수 있음을 소녀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그는 소녀가 더 이상 거기에 얽매이지 않길 바랐고 이 편이 소녀를 돕는 길이라고 그는 믿었다.

"아, 여보세요. 여기가-"


다음 날도 소녀는 무덤을 팠다. 무덤을 파 시체를 묻는 소녀의 모습은, 방 안의 종이 상자에 시체를 숨기는 소녀의 아버지와 무서울 정도로 닮아있었다. 그리고 소녀가 떠난 그곳에는 무덤 두 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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