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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기억의 숲에 머물다.

2011.02.20 09:4702.20






숲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풍경유화‘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았다. 열매가 아니라 색깔이 열린 거대한 무지개 나무들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래에는 가는 붓으로 세밀하게 그려넣은 것 같은 유들유들한 봄잎들. 사이사이 가늘게 내리는 햇빛과 사방에 떠다니는 가볍고 맑은 공기들 마저도. 정신을 차렸을 때, 은원은 그 숲 속에 서 있었다. 어떻게 이 숲에 온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긴 것처럼 듬성듬성 연결이 되지 않는 기억이 아니었다. 마치 메스로 기억의 뉴런을 깔끔하게 도려낸 것처럼, 아니 아예 시간 자체가 사라진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눈을 떠 보니 숲의 한 가운데였다. 만약 자신의 이름마저 기억나지 않았다면 은원은 지금 이 순간을 탄생이나 환생이라고 여겼을 지도 몰랐다. 그런 단어도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묘한 분위기의 숲이었다.
왜 이런 곳에 서 있는건지 생각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의미없는 문제풀이는 그만두고  주위를 잠깐 둘러보았다. . 근처에 있는 나무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유리벽을 만지는 듯 차갑고 매끈한 촉감이 느껴졌다. 꽃들도 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이 아니라 조각풍경이라고 말을 고쳐야 할 것 같았다. 인공적인 촉감과 눈부신 색감들이 어울리지 않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이 넓은 숲 속에 혼자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다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하는걸까 아니면 어딘가로 움직이기라도 해야하는걸까.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 근처 풀 숲에서 무언가 움직임이 있었다. 살짝 긴장하며 그 곳을 바라봤다. 바스락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이내 하얀색 강아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송보송 구름같은 솜털을 가진 말티즈의 믹스견. 은원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 사랑아?. ”

기억속에 남아있는 강아지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름을 알아들은 건지 사랑이가 꼬리를 치며 이 쪽으로 달려왔다. 은원은 쪼그려 앉았다. 발 밑까지 달려온 사랑이가 은원이의 손바닥을 마구 핥았다. 믿을 수 없었다. 사랑이는 은원이 어렸을 때 키우던 강아지였다. 숲은 기묘한 만남을 품고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때였다.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마당에 왠 새끼강아지가 한 마리가 있었다. 박스 안에 몸을 웅크린 채 막 어미와 떨어진 불안감을 감출 생각도 하지않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아버지는 옆 집 아저씨가 한 마리 주고 간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아니 놓고 간다고 무작정 받으면 어떡하자는거에요. 라며 짜증을 내셨다. 아버지는 그럼 어떻게 해 새끼 많아서 키울 데도 없다는데 하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먼 산을 보셨다. 어린 은원이는 강아지가 마냥 귀여웠다.
그 때부터 몇 년간 사랑이는 은원이의 가장 좋은 친구 중 하나였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지 좋아해주는 건 알아. 엄마는 사랑이를 볼 때마다 혀를 끌끌 차셨다. 사랑이는 유독 은원이를 잘 따랐다. 한 번은 학교정문까지 따라와서 곤욕을 치른 적도 있었다. 그 때부터 어쩔 수 없이 목줄을 메었다. 하지만 갑갑하지 않을까 해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은원이는 꼭 사랑이의 목줄을 풀어주었다. 사랑이는 은원이만 보면 개구리처럼 폴짝거리며 뛰었다. 아버지 말대로 난리부루스가 따로 없었다.
중학교 1학년. 오빠가 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가족 전부 이사를 하게 되었다. 먹성 좋고 활달한 사랑이를 받아줄 인정 많은 거주지는 도시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먼 친척에게 사랑이를 부탁했다. 그게 14년전 쯤이다. 개 수명 만큼의 시간. 그 후로 사랑이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가끔 집 안 청소를 하다가 사랑이의 사진을 발견하는 일이 있었다. 그럴때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꼬리를 치며 대문으로 마중 나오던 사랑이가 그리워졌다. 그 뿐이었다. 지금 다시 사랑이를 만난다 해도 이렇게 어리고 귀여운 강아지는 아닐 것이다. 정말 행운일 정도로 수명이 길어서 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꼬랑꼬랑한 할아버지개가 되었겠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성나게 짖어대며 가까이 오지 말라고 경고를 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은원은 그 강아지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다. 모를 리가 없었다. 검은 콩을 붙여놓은 듯 작은 눈. 사정없이 흔들리는 꼬리. 반가움을 비겨낼 줄 몰라 왔다갔다. 정말 강아지 같은 강아지인 행동들. 헥헥헥, 숨을 참지못해 질퍽거리는 혓바닥. 제 때 씻기지 못해서 먼지를 한 바가지 뒤짚어쓴 것 같은 - 사실은 청순할 정도로 하얀 털을 가진 사랑이었지만  - 까슬한 털의 느낌 마저도. 개 만진 손으로 밥먹지 말랬지! 어서 손 씻고 안 와! 엄마의 잔소리가 사랑이의 등 뒤로 밀려왔지만 은원이는 반가운 마음에 머리 쓰다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니가 왜 여기있는거야. 사랑아. ”

널 기다리고 있었어. 라고 말하는 듯한 환영이 들렸다. 사랑이 역시 지치지도 않는지 한참이나 은원의 발 밑을 빙그르르 돌았다.

.,...



사랑이를 따라 걸었다. 목적지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은원도 마찬가지였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걸었다. 햇빛이 수직으로 내려서 방향도 종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방향을 알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걷는 것이 길이 되었다
숲은 더 깊어졌다. 나무들의 색깔이 더 진해지고 풀들도 키가 자랐다. 아까까지 보이지 않던, 알록달록한 꽃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깊지만 불편하진 않았다.  사그락. 풀 밟는 소리가 시원했다. 길을 막고 있던 비단풀들은 충성스런 시종인 양 고개를 숙여 길을 내었다. 컴퓨터 속 CG 영상을 꺼낸 것처럼 비현실적인 풍경이 지나갔다. 아직 은원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 곳엔 작은 풀벌레 소리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

“ 사랑아~! ”

하고 부르는 소리에 은원은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목소리를 따라 사랑이가 꼬리를 쳤다. 은원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작은 생명체는 착실히 반가움을 표현했다. 어디서 나타난건지 나무 사이에 작은 꼬마 여자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사랑이처럼 갑자기. 그리고 사랑이처럼 낯익은.
소녀는 앳된 목소리로 몇 번 사랑이를 불렀다. 사랑이는 은원과 소녀 사이를 갈팡질팡하다 못 이기는 척 소녀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녀는 사랑이가 온 게 정말 기쁜 듯 사랑이를 쓰다듬었다. 은원도 소녀에게 다가갔다.

“ 사랑이를 아니? ”
“ 네. 사랑이는 은원이 집 개에요. ”

소녀는 숫제 사랑이를 끌어안은 채 대답했다.

“ 은원이랑도 아는 사이야? ”
“ 네. 친구에요. 사랑이랑도 자주 놀아요. ”

순간 기억났다. 이 목소리. 이 익숙함. 사랑이와 함께 놀던 또 다른 꼬마아이.

“ 주은아. ”

꼬마가 고개를 들었다. 눈을 약간 치켜뜬 특유의 어색한 표정. 하지만 은원은 이 표정이 화가 났거나 심통이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둘이서 맛있는 과자를 먹다 마지막 하나가 남았을 때 주은이는 항상 그런 표정을 지었었다.

“ 너 주은이구나. ”
“ 저 아세요? ”

알고 있다. 토실토실하게 부은 볼살. 유난히 까만 피부. 토마토를 한 입 베어문 것 같은 두툼하고 빨간 입술까지.. 하지만 주은이의 눈 안에 들어있는 호기심을 혼란스러움으로 바꿀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 반가워. 난 은원이 사촌언니야. 은원이가 가끔 니 얘기 해. ”

벅찬 감정을 꾹 누르고 말했다. 만약 은원이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바람이 불 정도로 열심히 꼬리를 흔들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왜 벌어진 것인가에 대답은 잠깐 뒤로 밀어두었다. 어린 주은이도 어린 사랑이도. 이상하다기 보다는 반가웠다. 주은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눈매가 매서워도 주은이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말을 의심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은원이 그런 성격이었다면 그랬겠지만..

“ 혹시 은원이 지금 어디있는지 아세요? ”
“ 응. 글쎄? 너도 어딨는지 모르니? ”
“ 네. 저랑 안 놀아주거든요. ”
“ 왜? 은원이는 너랑 제일 친하다던데? ”
“ 유인원이라고 놀렸다고 삐쳐서 안 놀아요 ”

풉. 어린 시절의 별명을 오랜만에 듣자 은원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
지만 주은이의 표정은 한참 심각해서 은원은 곧 웃음을 멈췄다.

“ 왜 그랬니? ”
“ 은원이가 먼저 우리 엄마 반찬 맛 없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 ”

주은이의 목소리가 한껏 풀이 죽었다. 아무래도 시작은 은원이 본인인 듯 했다. 어린시절의 은원이는 그렇게 이기적인 아이였을까? 정확한 건 기억나지 않는다. 주은이 때문에 유인원이라는 별명을 가졌고 - 사실 이름이 그랬기에 어떻게든 그런 별명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하지만 - 그 별명이 참 싫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 미안해. ”

아주 뒤늦은 사과를 했다.

“ 언니가 놀아줄까? ”
“ 언니가요? ”
“ 언니는 같이 놀면 안 되니? ”

미래의 은원이 과거의 주은에게 물었다. 잠깐의 고민.

“ 괜찮아요. 사랑이두 같이 놀아도 돼죠? ”
“ 응. 물론이지. ”

사실은 아주 오래. 은원이도 주은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 뭐하지?
“ 숨바꼭질 할래요? ”

어쩐지 주은이 다운 대답이다.

“ 그래. 숨바꼭질하자. 언니가 술래할게. ”
“ 네!. 사랑이는 제가 데리고 갈게요. ”

주은이가 사랑이를 안아들었다. 사랑이가 조금 안타까운 표정으로 은원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은원은 손을 가리고 나무에 얼굴을 묻었다.

“ 열까지 센다. ”
“ 하나 ” . “ 둘 ” “ 셋 ” 넷 “ .

주은이의 발걸음 소리가 멀리 사라졌다.

“ 다섯 ” “ 여섯 ” “ 일곱 ” “ 여덟 ”

다시 얼어붙은 듯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 아홉 ” “ 열 ” “ 찾는다! ” 

그리고, 어린 주은이가 몸을 숨길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여유시간이 지나고, 고개를 돌렸을 때.

“ 안녕. ”

눈 앞에 그녀가 있었다. 당황했다. 사랑이 혹은 주은이를 만났을 때 보다 더.

“ 누구죠. 당신은? ”

은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몰라서 물은게 아니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물었다.

“ 유은원. 바로 너 ”

거울 아닌 거울이 똑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또 하나의 유은원이 유은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은원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정확히 말하자면 너의 기억이겠지만. ”
“ 나의 기억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
“ 말 편하게 해. 우리 동갑이잖아. ”

자칭 유은원. 아니 유은원의 기억. 아니면 유은원 마이셀프. 또 다른 자아.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할지도 불분명한 그 존재는. 한 쪽 눈을 찡긋 하며 웃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도 그렇게 활달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은원은 기억했다.




..................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지만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알았다. 유은원과 유은원. 그러니까 원래 이 숲에 살았던 유은원과 방문자 유은원은 약간 달랐다. 일단 헤어스타일. 여고생 특유의 단발머리. 장난을 잘 치긴 했지만 도드라지는 걸 좋아하지 않은 은원은 항상 단정한 길이의 머리를 유지했었다. 단발머리가 어울려서 다행이야. 친구들이 그런 농담을 하곤 했었다. 메이크업을 거의 하지 않은 풋풋한 얼굴. 화장기를 전혀 머금지 않아 아직 눈처럼 뽀얀 피부가 남아있었다. 자신감에 차 있는 표정.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싱글벙글 한없이 밝은 성격도 그랬다. 20대가 지나면서 은원은 놀랄 정도로 차분해졌다. 자신이 원했던 변화는 아니었다.

“ 배고프지? 가자.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

은원이 은원을 재촉했다.

“ 주은이는? ”

은원이 돌아보며 물었다.

“ 괜찮아. 알아서 찾을거야. ”
“ 누가? ”
“ 누구긴 누구야 너지 ”

은원이 은원에게. 이해하기 힘든 대답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 기억 안 나? ”

무슨 기억? .

“ 꼬맹이때 동네아이들이 숨바꼭질할 때 내가 이기겠다고 산 속에 숨었다가 길을 잃어버렸잖아. 주은이가 찾아오고 나서야. 겨우 길을 찾았지. ”.

같은 동네 같은 나이라 얼굴과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친하지는 않았었다. 사실 어린 은원이는 인상이 살짝 사나운 주은이를 무서워했었다. 하지만 그 날 승부근성이 강했던 은원이를 숨바꼭질 좋아하는 주은이가 끝까지 찾았던 날 둘은. 친한 친구가 되었었다.

“ 주은이 손잡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약속했잖아. 다음에 주은이가 길 잃어버리면 내가 가서 찾아주겠다고. ”

응. 이제 어렴풋이 기억나.  
돌아오는 길에 서로 꺄르르 하고 웃었던 기억. 좋아하는 책,노래,인형. tv 속 연예인들. 사랑이의 털색깔. 괜찮은 우리반 남자아이. 제일 싫어하는 과목. 제일 짜증나는 선생님. 그런 사소한 이야기를 끝도없이 나누다가. 헤어질 때 이제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라고 느꼈었던 감정들.

“ 이상하지.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알고 있는데 어떻게 멀어졌는지는 모르겠어. ”

그 때만큼은 세상이 무너져도 웃을 것만 같은 또 다른 유은원도 한없이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어린시절 그토록 친했던 주은이와 어떻게 멀어지게 된 건지..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새 옷을 사고, 기뻐하고. 하루하루 지나다보면 문득 낡아서 버릴 때가 되었다고. 이제 다시 새 옷을 하나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낡은 옷을 쓰레기통에 버리듯. 멀어짐에는 순간이 없었다. 순간이 없었으므로 기억할 만한 것이 없었다. 기억이 없었으므로 돌아갈 방법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토록 아련한 것이겠지만.
은원이의 말처럼 과거의 주은이는 과거의 은원이에게 부탁했다. 은원이는 은원이를 숲의 더 은밀한 곳으로 안내했다. 아직도 자기 자신과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 거북한 은원에게, 은원이 말했다.

“ 여긴 기억의 숲이야. ”
“ 기억의 숲? ”
“ 기억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지. ”

나의 기억들?

“ 아니. 모든 기억들. ”

은원은 설명했다. 기억의 숲. 기억들이 잠들어 있는 공간. 모든 존재하는 것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시간을 거슬러 저장되어 있는 곳.

“ 왜 내가 이런 곳에 있는건지 모르겠어. ”
“ 루시가 장난친거지. ”
“ 루시가 누구야? ”
“ 여기 관리인. 가끔 자기가 주인인 줄 착각한다니까. ”
“ 그 사람이 날 여기로 데려온거야? ”
“ 덜 데려온 게 누구냐고 물으면 루시라고 대답하는게 맞지. 하지만 니가 왜 여기 있는거냐고 물으면 답이 달라지지. ”
“ 이유가 있는거야? ”
“ 그건 니가 이미 알고 있잖아. ”

은원이 은원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원망하는 듯 따갑고 뾰족한 눈빛.

“ 왜 그랬어? ”

숨이 막혔다. 자신이 자신과 이야기 하는 것이 왜 거북한 것인지 알았다. 자신은 모든 걸 알고 있으니까.




...............






은원이 은원을 안내한 곳에는 집이 있었다. 산비탈에 있는 낡은 흙집. 지하철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또 30분이나 더 걸어올라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 도시에 생긴 은원이 가족의 작은 보금자리였다. 군데군데 녹슨 철제문을 지나 바람이 잘 통하는 주인집 거실을 지나면 보이는, 계단 밑 작은 알루미늄 문. 그 안에는 지금까지 숲에서 느낄 수 없었던 향기와 소리가 있었다. 문을 열자 애틋한 목소리가 들렸다.

“ 은원이 왔니? ”

매콤하고 얼큰한, 갈치조림을 닮은 엄마 목소리. 이상하지도 반갑지도 않았다. 그저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 왠 갈치조림이에요? ”
“ 식당에서 재료 넣을 때 사장님한테 말해서 싸게 몇 마리 샀다. 어서 방에 가서 앉아. ”

어머니는 은원이를 좁은 아랫목에 앉혔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비좁은 부엌은 두 사람 분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 도시로 나온 날부터 이런 작은 부엌에서 허리도 굽히지 못한 채 요리를 하신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땅으로 농사를 지으셨다. 요즘은 농사라는게 일종의 투기와 같아서 돈벌고 안 벌고가 하늘의 뜻이라곤 하지만 아버지는 넓은 땅과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농삿일을 훌륭히 해 내셨다. 넘칠정도의 부자는 아니었지만 특별히 돈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오빠가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부터 모든게 달라졌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무래도 애들 공부시키려면 도시에 나가는게 좋잖아요. 은원이도 이제 곧 고등학생 될거고. 이런 촌구석에서 공부해봤자 도시 애들 못 따라간다는데. 애들도 커서 농사짓고 살 수는 없잖아요. 그 날 아버지는 또 담배를 물고 먼 산을 보셨다. 마당에는 사랑이를 데려왔을 때 보다 훨씬 많은 담배꽁초가 떨어졌다. 부모님은 곧 땅을 모두 팔고 도시에 큰 식당을 차리셨다. 처음에는 모든게 순조로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도시생활을 버거워 하셨다. 안면이라고는 찾기힘든 이 넓은 도시라는 공간. 인심이 사나워 편하게 술 한 잔 마실 사람이 없다고 늘 불만이셨다. 모난 손님들이 찾아오는 것도 달가워 하지 않으셨다. 툭하면 가게손님들과 싸우기 일쑤였다.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고 손님은 차츰 줄어들었다. 홀 안에 손님보다 파리가 더 많아졌을 때부터 어머니는 아예 가게를 포기하고 다른 식당으로 일을 하러 가셨다. 가게 간판이 몇 번 바뀌고 집은 더 좁아졌다. 아버지의 직업은 술 마시고 어머니 원망하기가 되었다. 가족이라는 무게는 온전히 어머니의 어깨 위에 올려졌다.
아머니가 갈치조림이 들린 밥상을 안으로 들고 들어오셨다.

“ 많이 먹으렴. 너 갈치조림 좋아하잖니 ”

제법 알이 굵은 감자도 몇 개 들어있다. 싸게 샀다고 해도 이런 음식 한 번 해먹는 것도 큰 결심이 필요한 시기였다. 어머니는 상 맡은편에 앉아 몇 번이나 입술을 딸막거리셨다.

“ 은원아 니 대학문제 말인데. 조금만 더 미루면 안 되겠니. 아무래도 등록금 마련하기가 쉽지 않구나. 니 오빠가 대학원까지 가는게 좋다고 해서 ..... ”

어머니가 죄인처럼 목소리를 낮추셨다. 비릿한 냉동갈치의 맛이 입 안에 퍼지는 순간 은원은 알았다. 오늘의 기억. 한없이 밝은 유은원이 사라지고. 죽은 것처럼 차가운 유은원이 다시 태어난 그 날.

‘ 오빠가 뭔데 그래! 나랑 오빠랑 다른게 뭐야. 똑같은 자식이잖아! 차별하지마! ’
그렇게 소리 질렀었다. 철없는 오빠.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철없는 동생.

“ 괜찮아요 엄마. 걱정하지마. 대학 좀 늦게 가도 돼. 어차피 여자는 군대도 안 가잖아. 오빠가 더 급하지 안 그래? ”

은원이 씩씩한 목소리로 말하자 어머니는 대견한 표정으로 은원이의 엉덩이를 몇 번 두드렸다.

“ 아휴 우리딸. 이제 다 컸네. ”

안심한 듯한 목소리. 그 때도 그랬으면 좋았을걸. 뼛속까지 시린 후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굳이 갈치를 먹기 좋게 발라놓고 일어섰다. 사해얀 갈치살이 갈치가시 보다 훨씬 더 따가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엄마는 또 출근할 준비를 했다. 은원은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엄마를 안았다. 아직은 따스한 느낌이라 다행이었다.

“ 엄마 가지마. ”

낮에는 식당일 밤에는 술집 청소. 하루종일 일에만 치여 살았던 엄마.

“ 왜 이래 얘가... ”
“ 그냥 하루 정도 쉬면 안 돼? 계속 일하면 피곤하잖아. ”

<소용없어요. 이 곳에는 기억만이 있을 뿐이니까.>

“ 아휴. 하루 쉬면 뭐하니. 엄마는 남들처럼 쉬는거 그런거 못하겠더라. 하루종일 방구석에 앉아있어봤자 좀만 쑤시고 ”

<기억은 미래를 만들지 못 해요. 미래를 만드는 건 삶이죠.>

“ 심심하면 내가 같이 놀아줄게. ”
“ 왜 그러니? 무슨 안 좋은 일 있니? ”
“ 아니. 그냥 엄마 고생하는 거 같아서.. ”

<삶은 미래를 만들고. 미래는 기억을 만들어요. 그리고..>

“ 괜찮아. 지금은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나중에 커서 엄마 호강시켜줘. 알았지 우리 딸 ”

<기억은 삶을 만들어내요.>

“ 자. 엄마 출근해야겠다. 어서 비켜라. 어릴 때도 안 그러더니 애가 왜 다 커서 어리광이야. ”

눈물처럼 엄마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녀가 있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루시. 이 기억의 숲을 지키는 마녀입니다.>

기억의 숲을 지키는 마녀. 루시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 제가 왜 여기에 있는거죠. 당신이 절 데려온건가요. ”

루시는 대답했다.

<당신은 왜 이곳에 오고 싶어 하셨나요>





.....................






도착했다는 느낌도 없이 무섭게 빨리 밤이 찾아왔다숲의 밤은 낮보다 더 황홀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니 들끓었던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가없이 땅에 가까이 내려온 별빛들은 손만 뻗으면 딸 수 있는 보석나무 같았다.  루시는 그것을 별의 기억이라고 했다. 빛나는 순간들이 쌓이고 쌓인 별들의 기억.

<지구에서 볼 수 있는 별빛 역시 마찬가지죠. 그들은 빛은 이 곳을 지나가요. 지구에 빛나는 별들 역시 한순간의 기억일 뿐이에요. 먼 옛날 우주의 어딘가에서 태어난 기억들이 아주 오랜시간들 달려. 지구에 닿아 빛나는 거죠.>

이 곳은 기억의 숲. 존재하는 모든 기억들의 안식처.

루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직 목소리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마치 공기처럼 그래서 은원은 지금 이 곳에 자신이 혼자 있다고 생각했다. 올려다본 하늘. 나무사이로 빛나는 별들은 쏟아져 내릴 듯 환상적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약은 하늘에 걸려있었다.



" 예쁘다 여기.. “

별 빛 사이로 누군가 다가왔다. 한 때 사랑했던 사람. 어쩌면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

“ 뭘 또 여기서 혼자 궁상 떨고 있어. ”
“ 혁준오빠. ”

혁준은 은원의 옆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 하여튼 너. 남자친구라고 하나 있는거 좀 써 먹어라. 아껴서 뭐할래. ”

푸른 빛 별들이 한층 더 아름답게. 또 한층 더 허무하게 느껴졌다.

“ 남자친구 아니잖아. 이젠. ”

은원은 고개를 내렸다. 텅 빈 극장에 앉아서 재미없는 삼류영화를 보는 것처럼 모든게 지겨웠다.
혁준을 알게 된 건 대학교 진학을 실패하고 페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였다. 신입으로 나타난 그는 막 군대를 제대하고 학비에 보태기 위해 알바를 시작한다고 했다. 덩치가 크고 싱거운 외모의 오빠였지만 결코 나대거나 과시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나이 많다고 어려워 할 필요없어. 여기서는 엄연히 내가 후배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넉살좋게 말하는 혁준은 흔히들 말하는 호감형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은원은 혁준과 연인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좋은 오빠. 그 이상은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건 정말 조금씩 새어들어왔다. 무거운 짐을 들 때마다 혁준이 앞에 나타난다는 걸 느꼈다. 다른 여자알바들에게도 그럴거라고 생각했다. 회식을 할 때 혁준은 꼭 자기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우연인 줄 알았다.. 문자가 오고 전화가 왔을 때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자고 했을 때. 은원은 대답을 약간 망설였다. 처음으로 영화를 보던 날. 혁준은 그 날 상영하는 모든 영화의 정보를 머리에 저장하고 나왔었다. 로맨스부터 공포까지 마치 웨이터처럼 은원의 앞에 늘어놓았다. 선택은 은원의 몫이었다. 저스트 라이크 헤븐. 리즈 위더스푼이 너무 귀여워서 영화를 잘못 고른 건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푼수끼 어린 리즈 위더스푼이 사랑스러웠다는 혁준이 조금은 눈치없게 느껴졌다. 그 날부터 조금씩 만나는 날이 늘어갔다. 영화도 보고 쇼핑도 했다. 맛있는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도 나눴다. 혁준은 보기만큼이나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행정고시를 준비한다고 집에서 보탬을 줄 만큼 넉넉한 형편은 아니라 혼자서 돈을 벌면서 공부하고 있다고. 비슷한 처지라는 것도 혁준에게 끌리는 이유였다. 그날 밤 집으로 오는 길목에서 키스를 했다. 커다란 덩치는 든든함으로. 싱거운 외모는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짧지만 행복한 순간이었다.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오랜 과로가 몸을 고장냈다. 넉넉하지 않았던 집안이 이제는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설상가상으로 혁준이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남자친구의 합격을 설상가상이라고 표현해야만 하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은원은 혁준이 자신의 곁에 아주 멀리 달아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혁준은 끝까지 은원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은원과의 결혼을 서둘렀다. 하지만 혁준의 부모님을 만나는 날 은원은 자신의 느낌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아가씨는 하는 일이 뭐에요? 예비시어버니의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냥 좀... ..고개를 푹 숙이는 은원이 안쓰러 혁준이 애써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지만 탐탁치 않는 눈빛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감정도 이제는 오래되서 눅눅해진 게 아닌가 했다.
쓰러진 엄마. 알코올 중독 아빠. 철없는 오빠. 사랑이라는 건 더 이상 달콤한 환상이 아니었다. 억지로 끌고가야할 또 하나의 짐이었다. 그래서 헤어졌다. 혁준이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은원의 이기심이었음을 은원도 안다. 어려운 일, 나쁜 역할 조차도 혁준에게 떠넘겼다.


“ 어머니는 좀 괜찮으셔? ”

혁준이 물었다.

“ 응. 뭐 그럭저럭..  ”
“ 빨리 일어나셔야 할텐데.. ”

걱정스러운 혁준의 목소리가 성가시게 느껴졌다. 이제는 떨어버려야 할 목소리였다.

“ 오빠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 ”

드라마 속의 악역처럼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굉장한 연기력.  

“ 그거 알아 오빠? 나 오빠 결혼식에 갔었어. ”
“ 알아. 너 봤었어. 아는 척 하고 싶었는데. 너 부담스러울까봐 그만뒀어. ”
“ 잘 했어. 마지막으로 오빠 얼굴 한 번 보고 싶은 것 뿐이었으니까. ”
“ 마지막이라고 말하지마. 내가 얘기 했잖아. 나중에라도 필요하면 오빠가 너 도울게. ”
“ 그럴거면 오빠랑 결혼했지. 어떻게든 오빠한테 매달려서 결혼했겠지. 그럼 오빠도 어쩔 수 없이 우리 엄마 돌봐야 할테니까. ”
“ 그럼. 그러지 그랬어. ”

왜 그러지 않았을까? 어쩌면 나도 사랑하니까?

“ 그렇게 구질구질하게까지 결혼하고 싶진 않았어. ”
“ 니 생각나더라. 결혼식장에 들어갈 때. 계속 그런 생각이 났었어. 그 때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내 옆자리에 니가 있지 않았을까. ”
“ 어차피 소용없잖아. ”
“ 소용없다고 생각 안 해. 적어도 나한테 넌. ”
“ 계속 나 사랑했다는 쓸데없는 말 하지마. 오빠 지금 유부남이야. ”
“ 그래 알아. 그런걸 말하는 게 아니야. ”
“ 그럼 뭔데? ”
“ 단지... 더 이상 만나지 못해도 그래도..
“ .... ..... ”
" 나한테 넌 여전히 소중한 사람이니까.. ”

첫 고백처럼 설레는 말이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으련만 두근대는 심장은 어쩔수가 없었다. 바보같이.

“ 결혼까지 한 사람이 그러면 안되잖아. 어쩔래. 나랑 불륜이라도 할래? 요즘은 결혼하고 애인 만드는게 유행이라고. 오빠도 유행에 뒤쳐지고 싶지 않은거야? ”

그래서 화를 냈다. 본래의 감정은 감추고 숨겼다.

“ 헤어졌어도.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니까. 사실 후회했어. 너 떠난거. 니가 편하길 바래서였어. 계속 힘들어했잖아. 나한테 좋은 여자친구 못 돼서. 그래 차라리 나 말고 더 능력있는 놈 만나는게 더 좋은 일이라면 그렇게 하는게 옳은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떠난거야. 니가 원하는 대로. ”
“ 그거 동정이야? 아니면 뭐야? ”
“ 그런거 아니라고 말했잖아. 은원아. 난 그렇게 생각해. 아무리 감춰도 우리가 사랑했던 사실은 변하는게 아니잖아.
“ 만남이 끝나면 감정도 끝나는거야. 예전의 좋았던 기억 같은거 아무 필요없어. ”
“ 그렇다면 살아가는 것 조차 우리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거야. 결국에는 죽게될텐데. 우리는 왜 그렇게... ”
“ 그래서 죽으려고 했었어! ”

참지못한 은원이 소리질렀다. 가슴 속에 맺혀있던 응어리들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언제 어떻게 쌓였는지 몰랐지만 언제부턴가 마음 한 쪽에 자라잡아 잔인하게 자신의 삶을 잡아끌었던 족쇄 같은 허무함. 가지고 있기 힘들어 미어지는 마음들.

“ 죽으면... 모든게 아무것도 아닌게 되니까. ”

그래봤자. 살아간다는 건 결국 죽어간다는 것과 같은 말.

“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없어지고 사라지잖아. ”

그래서 결심했다. 절망. 좌절. 허무함. 우울. 상처. 그런 것들도 없어져버릴 테니까. 삶을 끝낸다면 모든게 사라진다면. 그렇다면..

“ 모든게 사라진다면. 니 앞에 있는 난 대체 뭘까?. ”

어느새 은원이 눈 앞에 나타났다. 세상 더없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은원이 은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 실망이야. 유은원. ”

그리고는 싸늘하게 등을 돌렸다. 자신마저 자신을 버리고. 다시 혼자였다.




................





코 끝을 간질이는 축축한 촉감에 잠이 깼다. 헥헥거리는 숨소리가 달팽이관을 자극했다. 사랑이였다. 은원이의 얼굴을 사탕처럼 마구 핥아대고 있었다. 손을 뻗어 사랑이의 등을 한 번 쓰다듬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사랑이는 은원의 옆을 폴짝폴짝 뛰었다. 사랑이를 옆구리에 껴안고 몸을 일으켰다. 숲은 아침이었다. 밤의 황홀함은 사라지고 다시 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살며시. 전쟁이 지나간 후의 평화. 경건하고 성스럽기까지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랑이는 또 아등바등 거리며 은원이의 목까지 혓바닥을 내밀어 마구 핥기 시작했다.

“ 어휴 그만 좀 해 사랑아. ”

은원이 팔을 뒤척이자 사랑이는 아예 몸을 빼 은원의 얼굴을 핥았다. 은원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그래도 사랑이의 까슬한 혓바닥이 싫지 않았다.

“ 언니. 여기 있었네요. ”

소리가 나서 사랑이를 떼어내고 눈을 떴다. 주은이가 있었다.

“ 언니. 어제 왜 저 안 찼았어요?. 피이. ”

눈을 찡그리고 잔뜩 심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라고 변명할 말이 안 떠올랐다. 니가 너무 잘 숨어서 못 찾았어. 그런 성의없는 거짓말이 통할 정도로 주은이가 어리바리하지는 않았다. 솔직한게 최고겠지.

“ 미안해. 언니가 바쁜 일이 좀 생겨서... ”
“ 그럼 어쩔 수 없죠. 제가 이해할게요. ”

주은이는 싱거울 정도로 금세 눈을 풀고 웃었다. 그 나이 때의 깜찍한 어른스러움이 느껴졌다.

“ 사랑이가 언니 디게 많이 좋아해요. ”

주은이의 눈이 사랑이에게 옮겨갔다. 사랑이는 그 새 은원의 손가락을 깨물고 놀고 있었다.

“ 그러네. ”
“ 은원이가 알면 섭섭하겠다. 사랑이는 은원이 갠데. ”

주은이가 사랑이를 떼어놓자 사랑이는 낑낑거리며 울었다. 무슨 견우와 직녀의 견공버전 같았다. 결국 주은이는 다시 사랑이를 놓아주고 은원이의 옆에 잠깐 앉았다.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 언니한테 물어볼게 있어요. 그래서 언니 찾았어요. "
" 뭔데? "
“ 사실은요. 어제 하루종일 은원이를 찾았거든요. 근데 아직 못 찾았어요. ”
“ 그래? ”
“ 삐쳐서 어디 가버린 거 아닐까 걱정돼요. ”
“ 아닐거야. 은원이가 주은이 너 얼마나 좋아하는데.. ”
“ 정말요? ”
“ 그럼. 언니한테 만날 주은이 얘기 하는걸. ”

주은이는 양 볼을 크게 부풀렸다가 숨을 뱉었다. 걱정들이 한꺼번에 바깥으로 밀려나왔다.

“ 만약. 은원이 한테 미안하다고 말하면 은원이가 받아줄까요? ”

조그만 눈에 꼭 들어찬 기대감.

“ 당연하지. 친구잖아. ”

어쩐지 그 눈을 보는 순간 은원은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평화로운 숲 속에 어울리지도 않게.. 은원이의 대답에 주은은 조약돌손을 꼭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럼 다시 은원이 찾아볼래요. ”

굳은 결심마저 느껴졌다.

“ 자 여기 사랑이. 은원이 한테 데려다 줘야지. ”

은원이가 사랑이를 건넸다. 주은이가 사랑이를 받았다. 좁은 품에 사랑이가 꽉 들어찼다. 은원이한테 가자 사랑아. 주은이가 달래는 걸 알아들은 건지 사랑이는 더 이상 낑낑대지 않았다. 주은이가 뾰족뾰족 못난 이빨을 내보이며 웃었다. 은원에게는 더없이 예쁜 웃음이었다.

“ 있잖아요. 언니. ”
“ 응 왜? ”
“ 나중에 은원이한테 사과하고 다시 올게요. 그 때 다시 만나요. 언니. ”
“ 응. 그러자. ”

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은원이랑 사랑이랑 넷이서 숨바꼭질 해요. ”
“ 응. 그래. ”
“ 약속. ”

약속. 손가락을 걸었다. 주은이가 뒤뚱거리며 멀어지는 모습을 보던 은원은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슬픈 것도 아닌데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려서 한참이나 그 자리에 앉아서 울었다.


그리고.


<돌아갈 시간이에요.>

멀리 바람을 타고 루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즐거우셨나요. 이 곳의 방문은.>

“ 잘 모르겠어요. 즐겁다고 해야할지. 뭐라고 해야할지. ”

칼날처럼 눈깜짝할 사이 모든 게 스치고 지나갔다..

<괜찮아요. 전 판단하지 않으니까., 그저 초대할 사람들을 초대할 뿐이죠.>

“ 이 곳을 사람들이 자주 방문하나요. ”

<사람들은 어리석으니까요. 영원한 것은 없다고 모든게 변하고 사라진다고 믿고있죠. 사실은 이렇게 모든게 그대로 남아있는데... 이 세상에 영원하지 않은 것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소중한거에요. 언젠가는 닳아 없어져버릴 삶이라는 것도>

“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요? ”

<원하신다면.>

빛이 흘렀다. 눈을 감았다. 숲이 일그러지며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어렴풋한 루시의 목소리였다.

<이 곳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루시 기억의 숲을 지키는 마녀입니다.


반짝이는 별의 기억. 손 끝을 스쳤던 바람. 따스하게 머물던 햇볕
첫사랑의 설레임. 이별의 아픔. 상실의 고통
행복했었던 일. 괴로웠던 일. 상처받았던 일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기억이 주인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곳..




기억의 숲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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