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그는 확실히 골칫거리였다.

그가 왕국에 찾아온 이후 라오스 왕은 머리를 싸매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라 말할 것 같으면 이 시대 최고의 전사로서 이름은 자이단으로 알려진 자이다. 왕이 왜 이 검사를 두려워하는가? 왜냐하면 자이단은 자신의 한 가지 목표를 세상에 공표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하겠노라. 그리고 라오스 왕은 그 공주가 바로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했다.

자이단이 왕국에 방문했을 때, 그리고 왕궁에 방문했을 때까지 라오스 왕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최고의 전사가 눈앞에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온갖 괴물들을 죄다 뚜드려 잡고 거인의 목을 비틀기는 예삿일로 아는. 나라는 축제 분위기가 되었고, 왕은 더욱더 골머리를 썩일 수밖에 없었다.

“방안에 들어가있거라. 절대 밖으로 나오지마렴!”

왕은 딸 프린 공주에게 말했다.

“왜요?”

“널 저런 불한당 같은 자에게 넘길 수 없어!”

“하지만 그는 …… 아, 그는 정말 멋지지 않아요?”

왕은 상상에 사로잡혀 혼자 기분 들떠하는 공주를 보다 못해 방안에 집어넣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그 쾅 하는 소리에 공주의 방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잠깐 움찔하며 떨었고, 곧 왕이 절대 자이단과 공주를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을 때 그 최고의 검사와 마주대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부르르하며 떨어버렸다.

“아름다운 무구이군, 자이단?”

왕은 자신의 본 셈과는 다른 말로 자이단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참 뭐 같았다. 그러니까 자신의 조카 동생이 거인에게 잡혀가 개죽음을 당했다는 전보를 받았을 때 느꼈던 그런 기분이랄까?

자이단은 왕의 이런 기분은 감지하지 못한 채 자신의 번쩍거리는 갑옷과 무기를 퉁하고 치면서 왕에게 웃었다.

“그렇죠. 멋진 놈들입니다. 특히 거인 녀석들을 처리할 때는 이 망치가 쓸모 있죠. 무릎팍을 콱 날려버리면 놈들은 악하고 쓰러져버리지 않겠습니까, 하하. 아, 국왕의 조카께서 북부의 거인들에게 잡혀갔다는 소식은 참 안됐습니다.”

왕은 느끼한 이 자이단의 얼굴과 그 얼굴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조카 얘기에 왼손에 힘을 꽉 주며 손을 떨었다. 왼손은 등 뒤로 감싸고 있어 자이단이 눈치를 못 챌 것이고, 더욱이 오른손에는 이 멍청한 검사에게 줄 와인 잔을 들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 잔에는 그렇게 자이단이 자기가 쉽게 처치했다고 자랑하기 좋아하는 거인마저 말 한 마디 채 끝내기 전에 쓰러뜨릴 수 있는 강력한 수면제가 들어가 있었다.

라오스 왕은 자이단의 어깨를 치며 칭찬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우리 왕국은 자이단 당신 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네!”

자이단은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헤벌쭉했다.

“이 잔을 들게! 내 맘일세.”

“아, 직접 드시려고 들고 있던 게 아니였나요?”

“배가 불러서 말야. 게다가 술을 더 마시면 왕비에게 혼난다고.”

“그럼, 사양치 않고 마시겠습니다. 으음. 이거 굉장한 맛…….”

자이단은 말을 마치지도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주위에서는 소란이 일었다. 라오스 왕은 무슨 병이 있는 것 같다며, 그리고 아마 전염병인 것 같다며 되도 않는 핑계를 축제에 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응급팀으로 변장하여 기다리고 있던 경비병들은 자이단을 들쳐 엎고 멀찍이 떨어져 자기들끼리 웅성거리고 있는 귀족들 앞을 지나갔다.

“축제 열심히 즐기시게!”
라오스 왕은 귀족들에게 다시 전처럼 놀라며 부추기고는 경비병 뒤를 쫓아서 갔다. 그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른 남자 한 명도 그런 라오스 왕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박수를 쳤다.

자이단이 자랑하는 번쩍이는 마법 무구들을 모두 벗겨내고는 (이 과정에서 소란이 조금 일었다. 자이단의 검을 경비병 한 명이 잡자 그대로 통구이가 된 것이다. 거기 있던 조금 똑똑한, 하지만 마법 실력은 부족한 경비대 소속 마법사 한 명은 고무로 감싸서 들면 된다고 조언해주었다.) 자이단을 감옥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자이단을 집어넣는 과정에서 그의 큰 덩치를 더 이상 들지 못해 경비대 한 명이 손을 놓았고, 그 때문에 자이단은 벽돌 벽에 머리를 찧고 말았다.

“으, 으으. 두야. 뭔 일인지…….”

“말도 안 돼. 저게 사람이야? 그 마취제를 마시고 벌써 일어나?”

왕은 기겁하며 감옥 문을 닫았다.

“라오스 폐하?”

“이것 참 유감이네. 내 딸은 넘겨줄 수 없어.”

“폐하, 무슨 말씀이신지, 여긴 어딘가요.”

“미안하네.”

자이단은 주위를 한참동안 둘러보고 나서야 자신의 처지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게 지금 상황에 당황을 해서인지 아니면 그의 머리가 벽에 부딪히면서 머리가 나빠졌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최악의 경우 그의 머리가 원체 나빠서였는지 그 상황판단은 참 늦었다.

“라오스! 날 풀어줘! 이 멍청한 배불뚝이 돼지새끼야!”

따라서 자이단이 철창을 흔들면서, 그리고 경비를 서고 있는 간수들을 겁주면서 늘어놓는 말들도 라오스 왕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그는 바삐 다시 축제를 하고 있는 중앙 홀로 걸어가고 있었으니까.







“여기에 프린 공주가 있소?”

“멈추시오!”

홀에서 보았던 검게 머리를 기른 남자였다. 이 왕국에서는 검은 색 머리는 드물 뿐 아니라 왠지 마녀나 악마를 떠올리게 해 갖은 쌍욕은 다 먹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왕실 경비대이기 때문인지 대놓고 처음부터 그런 욕은 안하는 게 다행이었다.

“뭐야, 검은머리새끼잖아? 기분 나쁜 놈!”

다른 경비대원 한 명은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입 조심해! 축제에 초청된 귀족분이면 어쩌려고!”

“멍청한! 이 나라 귀족 중엔 검은머리는 없다고.”

“만약 다른 나라에서 온 분이시라면?”

“그 경우엔, 음.”

말문이 막혀 갑자기 조용해진 복도에서 다시 소리를 낸 것은 그 검은머리남자였다.

“그 경우엔 이 몸이 해당되겠지. 세이너르 왕국에서 온 카멘타인 공작이라고 하오. 북쪽 산맥에 영지를 갖고 있소.”

“힉!” 계속 귀족일리 없다고 주장한 경비대원이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어! 죄송합니다!” 그나마 이성적인 경비대원이었고.

“라오스 국왕이 직접 전달한 얘기요. 이제 그 날건달 자이단은 감옥에 갇혔으니 공주도 더 이상 방안에 갇혀있을 필요는 없다고. 나와서 축제를 즐기라는 명이오.”

카멘타인 공작은 경비들에게 문을 어서 열라고 눈짓했다. 둘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문을 열기 시작했다. 한 명이 할버드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복도에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밖만 하염없이 쳐다보던 공주는 그 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밖에 무슨 일 있나요?”

“아닙니다, 공주님.”

카멘타인 공작이 들어서면서 말했다.







라오스 왕은 국왕으로서의 체통도 잊은 채 벌떡벌떡 뛰어오르면서 홀로 들어왔다. 홀은 여전히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이 축제를 열게 된 원인인 자이단이 사라졌는데도 눈치 채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핑계일 뿐이니까. 이들은 그저 이 정신 없고 소란스런 축제를 즐기고 싶을 뿐이었다. 왕국악단은 이교대로 나누어 끊임없이 연주를 하고 있었고, 라오스 왕이 자랑하는 갖은 보석이 달린 샹들리에는 머리 위에서 조명에 반짝이고 있었다.

제일 처음 본 귀족 하나를 라오스 왕이 끌어안으면서 환호하자 그 사람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날이오! 좋은 축제요, 하하!”

“네, 그렇지요 폐하. 그런데 프린 공주님은 이 축제에 납시지 않는지요?”

“아, 프린 공주! 그렇지! 곧 데려오겠소!”

라오스 왕은 그 귀족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는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 키스를 당한 당사자나 주위에서 목격한 사람들이나 당황하기 그지없었다. 이젠 왕이 남자마저 정부로 들이기로 했나?

휘파람마저 불면서 왕은 올라가고 있었다.

프린 공주의 방 앞을 지키던 경비대원들도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업무의 부담이 없었으니까.

“공주는? 안에 잘 있겠지?”

“폐하? 좀 전에 카멘타인 공작을 불러 데려가시지 않으셨습니까?”

무기마저 내려놓고 땅바닥에 앉아있던 두 사람은 엉거주춤 일어서며 대답했다. 라오스 왕은 불길한 소리에 아까 전까지 들떠 춤추던 심장이 쿵, 하고 발가락 있는 곳까지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무슨 소린가, 카멘타인 공작이라니. 들어본 적이 없는데?”

“카멘타인 공작이라는 분께서 폐하가 부르신다며 공주를 데리고 사라지셨습니다.”

라오스 왕은 따귀를 날렸다.

“한심한 놈들! 뭐하고 있던 거야! 그 놈이 자이단의 부하일지 생각 한 번 안 해봤단 말야?”

언성이 높아지자 경비대원들은 자꾸만 고개를 숙이며 턱으로 목을 찌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 당장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 자이단을 살펴봐. 그리고 너! 너는 날 따라와라.”

한 명은 모가지가 날라 갈세라 지하 감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한 명은 선홍빛 망토를 휘날리며 홀로 내려가는 라오스 왕의 뒤를 따랐다.

홀로 내려온 라오스 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는 무사했다. 춤추고 있었다. 홀의 중앙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그리고 왕비를 닮은 아름다운 금발을 휘날리면서.

뒤따라왔던 병사는 공주와 춤추고 있는 파트너를 가리켰다.

“저 사람입니다. 카멘타인 공작.”

“처음 보는 사람이야.”

음악이 요란스런 춤곡으로 바뀌었다. 물러나있던 사람들도 나와서 춤추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공주를 향해 걸어가던 왕과 병사 한 명의 길은 가로막혔다. 인파들 사이로 검은 머리와 금발 머리가 언뜻언뜻 보였다.

“비키게! 비켜!”

귀족들은 감히 누가 자신을 함부로 밀어대는가 얼굴근육을 있는 대로 찡그리면서 돌아봤으나 화난 얼굴로 걸어가는 국왕을 확인하고는 다들 꼬랑질 내렸다.

다행히도 일악단이 이악단과 잠시 교체를 하면서 텀이 있었다.

“아바마마?”

공주가 국왕을 알아보며 말했다.

“프린!”

“국왕 폐하, 오셨습니까.”

카멘타인 공작의 말에는 비웃음기가 가득했다. ‘까-’자를 길게 아래로 꺾는 소리가 특히 그런 분위기를 더 연출했다.

“누구요 당신은? 자이단의 부하인가?”

라오스 왕은 프린 공주의 손을 잡아끌면서 남자를 노려봤다.

“누구긴요, 당신의 사위가 될 사람이지!”

“그게 무슨 미친 소리 - ”

그 때 미친 것처럼 웃어대는 소리와 눈꺼풀을 꼭 닫아야할 정도로 거센 바람이 남자로부터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라오스 왕은 프린 공주가 강한 힘에 자신의 손에서 떨어져나가 끌려가는 것을 느꼈고, 바람에 뒤로 그 뚱뚱하고 큰 몸이 한참을 나가떨어진 다음 정신을 잃었다.







“저엉시ㄴ 하리 읍니ㄲ 페아.”

귀가 멍멍했다.

“정신 차리셨습니까, 폐하?”

“공두ㄴ 어디에 인나?”

라오스 왕은 눈을 뜨자마자 소리를 치려고 했으나 누가 손으로 목을 꽉 죄고 있었던 듯 목이 막혀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라오스 왕은 손가락 가락 가락에 힘을 꽉 준 뒤 손바닥으로 땅을 세차게 밀어서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윽, 이게 무슨 일인지. 공주는 어디에 있나? 무사해?”

“폐하께서는 무사하십니다만, 공주께서 어디에 계신 지는…….”

흰 가운에 빨간 색 조끼를 입고 있던 의원은 말끝을 흐렸다. 라오스 왕에게는 의원의 얼굴도 흐릿하게 보였다.

귀에는 귀족 놈들이 양떼처럼 모여서 떠들어대는 소리는 여전했지만 좀 멀리 있는지 소리가 한 차례 걸려서 들렸다. 라오스 왕은 어쩐지 허벅지와 엉덩이를 대고 있는 대리석 바닥이 보통보다 차갑다고 느꼈고, 주위가 어둡다고 생각했다. 귀족 놈들이 시끄럽게 구는 소리 뒤로 훼엥 하는 바람 소리도 들었다.

시야가 다시 돌아온 뒤 확인한 홀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구멍이 뻥 뚫린 천장과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난 샹들리에를 보면서 라오스 왕은 다시 정신을 잃을 뻔했다.

“드, 드래곤이 공주마마를 납치했습니다 폐하!”

공주의 방을 지키던, 그리고 라오스가 끌고 왔던 병사가 왕이 깨어난 것을 보자마자 다가서며 소리쳤다.

라오스 왕은 말 그대로 다시 정신을 잃었다.







지옥불이 활활 타오르는 시커먼 구덩이였다.

와각, 와각. 맛있는 인간 여자 고기.

검은 색 거대한 드래곤은 한 손에 프린 공주를 든 채 다른 한 손에 든 여자를 주둥이에 집어넣어 톱날 같은 이빨로 갈면서 씹고 있었다. 가끔 드래곤의 뿔에 불똥이 튀어 번쩍였다. 물 같은 침이 질질 흘러 불덩이에 떨어질 때마다 비명소리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인간 공주는 특히 더욱더 맛있을 거야. 더 맛있을 거야.

프린 공주는 라오스 왕을 쳐다보며 비명 질렀다.

라오스 왕은 꿈에서 깨었다.

라오스 왕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푹신한 침대 위였다. 그의 무거운 몸이 포근히 침대쿠션에 파고들었다.  

“괜찮습니까 폐하?”

아까 전에 보았던 붉은 조끼의 의원이었다. 자신처럼 희끗희끗한 수염을 가슴팍까지 기르고 있는 의원.

“폐하, 큰일입니다! 공주마마가 납치됐어요!”

자신을 기절하게 만든 그 병사였다.

“알고 있네! 단두대에서 목 날아가기 싫으면 조용히 해.”

“히, 힉! 죄, 죄송합니다!”

의원은 물수건으로 라오스 왕의 넓은 이마를 훔쳤다. 머리카락 한 가닥이 흘러내려와 코끝까지 내려와 왕의 콧구멍을 살살 간질였다. 재채기. 어깨를 웅크리던 그 병사는 더 겁을 먹었다. 의원은 자신의 얼굴에 묻은 왕의 침을 이마를 훔치던 물수건으로 닦아냈다.

“악몽을 꾸셨나봅니다.”

“내가 정신을 잃은 지 얼마나 됐지?”

“약 여섯 시간 정도 됩니다, 폐하.”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마자 다시 침대에 쓰러지고 말았다.

“기력이 많이 쇠하셨습니다.”

“자이단을 당장 불러와.”

라오스 국왕은 좀 전의 얼빠진 병사에게 명령하곤 잠시 눈을 감았다.







자이단은 황당했다. 라오스 국왕의 외동딸이 그토록 예쁘다는 소릴 듣고 왕국을 찾아간 것이었다. 국왕의 조카, 그러니까 프린 공주와 비슷한 연배인 남자가 예쁘다고 했으니 믿어도 될 만하지 않은가? 거인들의 소굴을 소탕하다가 우연히 그 장소에 붙잡혀 있던 라오스 국왕의 조카를 구출한 뒤 들은 말이었다.

그 허약한 샌님은 계곡을 탈출하던 중 남아있던 거인 한 명이 던진 돌에 머리가 박살나 죽어버리고 말았다. 곧바로 자이단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스로잉액스를 던져 그 거인의 멱을 끊어놓았다. 얼마나 힘껏 집어던졌냐면 오른손 엄지 손가락피부가 까질 정도였다. 그만하면 충분한 복수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자이단이 생각하기엔 자신이 구출해준, 그러나 안타깝게 죽어버린, 국왕의 조카가 (그 샌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죽은 뒤에 깨달았다.) 그 보상으로 자신에게 아름다운 공주를 소개시켜준 것이다. 거울을 볼 때마다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에 가득한 상처가 약간 걸리긴 했으나 자신을 제법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자이단이었다.

무턱대고 자이단은 왕궁으로 쳐들어갔다. 자신을 위한 축제까지 열었다고 하니 이제 그렇게 예쁘다는 프린 공주와 첫날밤을 보내는 것은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이단은 황당했다. 정신을 차린 뒤 보니 자신은 홀라당 다 벗겨진 채로 차갑고, 음습하며, 자이단이 제일 무서워하는 벌레마저 나오는 감옥에 갇혀있었으니까.

“에, 자이단씨? 국왕 폐하께서 보시잡니다.”

라오스 왕의 명령을 받아 감옥으로 내려온 병사가 말했다.

“뭐, 그 분홍색 꽃돼지 새끼가? 어서 데려와! 골통을 박살내줄 테니까!”

“힉! 살려주세요!”

드래곤이 공주를 납치하기 전에 내려와 간수 노릇을 하고 있던 병사는 동료의 꼬라지를 보곤 혀를 찼다.

“그 돼지국왕만 넘긴다면 살려주마. 어서 문 열어!”

고릴라를 우리에 가둬두면 철창을 저런 식으로 흔들곤 했다. 병사는 부들부들 떨면서 자물쇠를 따기 시작했다.

“빨리 해!”

자이단은 계속 으르렁 댔다.

자이단은 홀딱 벗은 몸으로 간수를 밀쳐내고는 그가 앉아 있던 자그마한 의자를 한 손에 집어든 채 밖으로 뛰어나갔다. 시녀와 시종들은 그런 자이단을 보면서 새된 소리를 질렀다. 성나서 의자를 위협적으로 휘둘러대는 통에 아무도 근처에 다가갈 수 없었다. 자이단이 하도 덩치가 커 그 작은 의자는 무슨 주머니처럼 보일 지경이었지만.

“영감탱이는 어딨어? 앞장 서!”

병사는 자이단이 의자로 등짝을 후려치자 잠깐 휘청했다. 하지만 곧 발아 나 살려라 하면서 왕이 누워있는 방까지 죽을 똥 살 똥 있는 힘껏 뛰어가기 시작했다. 맨발이라 뛸 때 대리석바닥에 가끔씩 발이 미끄러지는 것을 빼면 자이단이 병사보다 더 빨리 뛰다시피 했다. 병사가 뒤쳐질 때마다 자이단은 “멍청아, 빨리 가라니까!” 라고 소리치며 엉덩이를 발로 뻥뻥 차주었다.







쾅 하고 문이 열리자 라오스 국왕은 눈꺼풀을 위로 올렸다. 불쌍한 딸내미 생각에 계속 우느냐 눈두덩이가 크게 부어있어 눈뜨기가 쉽질 않았다.

“환자분에겐 안정이 필요합니다!”

“비켜!”

의원이 갑자기 쳐들어온 알몸의 거한 앞을 막아섰지만 곧 힘에 벽으로 밀려나버렸다.

“라오스 이 돼지새끼 나한테 뭔 짓거릴 한 거야!”

라오스 왕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안심하라는 듯 의원에게 손짓했다.

“자이단, 당신은 내 딸을 원했지?”

“그래! 당장 공주를 내놔!”

“딸을 내주겠소.”

“응?”

자이단은 일이 순순히 풀리자 맥이 풀렸다.

“그럴꺼면 날 왜 감옥에 가둔 거야? 아, 내 사랑을 시험했나보군.”

“왕의 자릴 원하시오? 내주겠소. 당신을 내 일번정식왕위계승권자로 삼겠소.”

“이상한 일이군.”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되는 상황을 보며 자이단은 가져왔던 나무의자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의자가 안부서지도록 그 위에 엉덩이를 살포시 올려놓았다. 삐그덩 소리가 나면서 나사 하나가 풀려나갔다.

“난 어차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대신 당신이.”

라오스 왕은 검지로 자이단의 얼굴을 가리켰다.

“대신?”

“내 딸을 구해주시오! 프린 공주를 구해주시오!”

자이단은 왕의 눈두덩이 부어오른 것이 단지 왕이 피둥피둥하게 살이 쪄서가 아니라 잔뜩 울어서임을 알아차렸다.

“이봐, 진정해. 무슨 일이야.”

“드래곤이! 블랙드래곤이 내 하나뿐인 딸을 납치했소! 내 딸과 춤을 추던 검은머리남자가, 드래곤이었소. 자기말로는 자신이 무슨 북부 산맥에 영토가 있다던가? 카멘타인 공작이라고 했다더군.”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렇소. 나도 처음 들어보오.”

“가만, 북부 산맥이라면 내가 얼마 전 쓸어버렸던 언덕거인 녀석들이 살던 곳 아닌가.”

“들었소. 참 용맹스러운 일을 했더군.”

“사실 거기서 당신 조카내미를 만났었어. 죽었지. 난 산채로 데리고 나오려고 했지만. 출구 쪽에 거인 한 놈이 숨어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라오스 왕은 다시 한 줄기 눈물을 짜냈다.

“후, 피예르를 만났었군.”

“그래, 피예르였나? 이름은 모르고 있었지. 그 친구가 당신 딸이 예쁘다고 해서 여기까지 찾아왔던 거야. 흠, 그러니까 색시 삼으려고. 나도 슬슬 정착해야지. 댁도 알다시피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내 딸……. 프린을 제발 구해주시오!”

“조용히 해. 내가 찾아볼게.”

“고맙소, 고맙소! 미안하오!”

“미안하면 됐어. 내 장비가 어딨는지나 말하라고. 아 그리고 반들거리는 새 옷도 하나 줬으면 좋겠군.”





자이단은 최고급 원단으로 만든 옷을 입은 채 거울을 보며 한 바퀴 돌았다.

“어떤 놈인지 참 멋지군.”

“그럼요, 참으로 잘 어울리십니다.”

왕실시종장이 자이단을 보며 아부를 늘어놓았다.

“창고로 안내해. 그리고 거기 둘! 너희도 따라와라. 갑옷을 입힐 줄은 알겠지?”

자이단은 자신이 보기엔 얼굴이 제법 반반하다고 생각한 시녀 둘을 지목했다. 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명 다 고개를 끄덕일 때 긴 머리카락이 두툼한 가슴까지 내려오는 여자들이었다. 아랫도리에 힘이 실렸다.

시종장은 일을 거들던 나머지 시종들을 다른 일로 돌려보내고는 자이단을 이끌고 창고로 갔다.

창고의 문은 철로 만든 거대한 문이었다. 사자의 얼굴이 튀어나와 조각되어 있었다. 시종장은 잠시 문을 조작했다. 그렇게 큰 문이었지만 소리 하나 나지 않고 부드럽게 열렸다. 바닥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있었다. 하필이면 용의 형상이라 자이단은 얼굴 부분을 강하게 즈려 밟으며 지나갔다. 사방에서 윙윙 거리는 소리와 가끔씩 불똥이 튀어 반짝이는 모습이 자이단의 귀와 눈을 사로잡았다.

“대단한데!”

“대부분 마법 무구들입니다. 미약한 힘이나마 마법의 도움으로 강해진 무기들이 많습니다.”

시종장은 뒤따르면서 대답했다. 그 뒤로 줄줄이 시녀 두 명도 말없이 쫓았다.

“라오스가 별난 수집광이었군 그래?”

“원하는 것은 뭐든 가져다 쓰라는 폐하의 명입니다.”

자이단은 두께가 자신의 이두박근만한 거창을 하나 집었다. 덩치가 큰 자이단의 키 두세 배 남짓한 무기였다. 족히 기둥이라 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것에도 마법이 걸려있어 창날 끝이 위험한 암녹색으로 희번들했다.

“이 정도면 아무리 드래곤 같은 놈이라도 배떼기가 안 뚫릴 수야 없겠군. 카멘카인인가 뭔가 하는 놈 말야. 흠, 이건 마치 거인들이 쓰는 창 같은데?”

“네. 거인들의 창이라 합니다. 힘이 대단하신데요? 그걸 한 손으로 들으시다니. 그 창은 <강프렝>이라는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스치면 몸통이 통째로 찢겨져버리거나 혹 운 좋게 살아남더라도 그 창에 가득한 산성에 몸이 녹아버린다던가요, 아 조심하십시오! 거기 만지면 안돼요!”

시종장은 자이단이 손톱 끝으로 창날을 만져보려고 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자이단은 좀 더 걷다가 자신의 무구들을 발견했다. 전기가 계속 흐르는 검과, 그 검과 한 세트인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건틀렛, 거인들의 무릎을 모두 날려버리기 위해 들고 다니던 큼지막한 손망치, 던지면 다시 주인의 손으로 되돌아오는 도끼였다.

“됐네. 수고했어 시종장. 이만 나가봐. 둘은 내 갑옷을 입혀줘야 하니까 남고.”

시녀 둘은 갑옷을 입힐 준비를 했고, 시종장은 인사를 올린 채 창고 밖으로 나갔다.

얼마 후 창고를 지키던 병사들은 얼굴에 홍조가 가득한 시녀 두 명이 옷을 추스르며 황급히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곧 이어 완전히 차려입은 전설적인 전사 자이단이 나오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는 필요한 부분에 철판을 덧댄 사슬갑옷을 입고 있었다. 등과 허리춤에는 각각 검과 망치, 도끼를 차고 있었고, 한 쪽 어깨에는 기둥 같은 창 하나를 메고 나왔다.







자이단은 라오스 국왕이 기사들을 딸려보내준다는 말에 처음엔 반대했다. 분명히 모두 죽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왕과 기사들의 고집을 꺾지 못했고, 그 결과 석궁과 장검으로 무장한 열두 명의 정예 기사들이 따라나섰다.

삐까번쩍한 갑옷과 무기들 때문에 일행이 떠나는 길은 영광스럽게 돌아오는 무사들 같았다. 대로를 통해서 말과 마차를 타고 나가는 일행에게 사람들은 환호했다. 특별히 제작된 큼지막한 마차에는 자이단의 새 거창이 실려 있었고, 드래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거대한 쇠뇌도 장착되어 있었다.

“좋아할 일이 아니라고.”

선두에서 말을 타고 가며 자이단이 꿍시렁 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이단님. 이렇게 영광스러운 자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큰 영예라고 생각합니다.”

기사 한 명이 말을 몰고 자이단의 옆으로 가면서 대답했다.

“멍청한 짓이야. 다들. 저렇게 환호하는 사람도 그렇고, 너희들도 그렇고. 모두 죽을 거야.”

“사악한 드래곤과 싸우다 죽는 것은 명예로운 길입니다. 제 아내도, 제 자식 놈들도 모두 기뻐할 겁니다.”

“모두 죽을 거라니까? 세상에. 로맨스 소설들이 사람들 다 버려났군. 목숨보다 중요한 게 세상에 어딨나?”

“명예와 미덕이지요.”

자이단은 혀를 찼다.

“나이가 몇인가?”

“저, 취프레 가문의 장남 다로인은 올해 스물여덟입니다.”

“한창 때군. 그런데도 죽겠다고?”

자신을 다로인이라고 소개한 기사는 웃으면서 깃발이 달린 긴 창대를 바닥에 두드렸다. 깃발에는 라오스 왕국의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창과 화살이 각각 대각선으로 용의 몸을 찌르고 있었고, 그림에 그려진 용은 눈물을 흘리며 불을 내뿜고 있었다.

“드래곤을 쓰러뜨리고 살아 돌아오면 되지요. 자이단 경은 어떻게 되십니까?”

“서른셋이다. 그리고 난 경이 아니야.”

“자이단 경의 용맹과 정의심은 충분히 기사의 칭호를 받고도 남습니다. 지금 공주님을 구출하기 위해 드래곤의 소굴로 가지 않습니까, 하하.”

“만약 드래곤을 만나면 모두 도망치라 그래. 나 혼자야 감당할 수 있지만 너희들은 죽고 말 거야.”

다로인은 언제고 준비한 대답인 것처럼 말했다.

“도망 같은 불명예야말로 죽음보다 더한 것입니다. 기사 다로인, 죽음이 제 손에서 칼날을 놓게 만들 때까지 명예를 지키면서 자이단 경의 곁에서 같이 싸우겠습니다.”

자이단은 질색이라는 듯이 고갤 저었다.

“하여간 멍청한 기사 놈들. 그놈의 명예타령.”

“좋은 날이고 좋은 순간이지 않습니까. 웃으십시오, 자이단 경.”

다로인은 다른 동료 기사들처럼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웃었다. 자이단은 다로인이 계속 옆구리를 찔러대는 통에 다른 기사들처럼 헤벌쭉 하며 손을 흔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행군은 계속 되었다. 문제의 다리가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 말이다.

물론 그전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다. 솔직히 문제가 좀 많았다. 예컨대 이런 일들도 일어났다.

기사들과 자이단 일행은 북부 산맥으로 가는 길목인 바위언덕을 지나고 있었다. 말들이 말발굽이 바위에 부딪혀 따각 따각 소리가 앞뒤에서 연달아 귀를 간질였다. 풀 한 포기 찾아보기가 말 그대로 힘든, (정말 한참마다 나무 한 그루나 풀 몇 포기가 띄엄띄엄 있을 뿐이었다.) 그런 불모의 바위언덕이었다. 바위들은 높이가 서로 달랐다. 그래서 몇몇 바위들은 저 아래 발밑으로 푹 꺼지는 곳에 있어 볼 때 뱃속을 철렁하게 만들거나, 너무 높은 곳에 있어 눈알이 핑그르 돌 수밖에 없었다.

자이단은 다른 기사들과 시시껄렁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특히 가족사진이 들어있는 로켓을 자주 만지작거리던 색슨 경이 농담의 주 대상이었다. 부인은 예쁘오? 예쁩니다. 지상 누구보다도. 딸도 예쁘겠군? 아무럼요, 최고의 보석입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거예요. 정말? 네, 정말 그렇습니다. 좋아, 진짜요? 조만간 넣어보러 가야겠군.

정수리에 조막만한 돌덩이가 떨어졌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오랜 세월의 전투 경험이 쌓여 동물적인 육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일까? 자이단은 말을 멈추고는 말했다.

“멈춰! 뭔가 있다!”

기사들도 일제히 서서는 자이단의 얼굴을 보았다. 자이단이 자기들과 여행했을 때 본 얼굴 중에 가장 진지해보이자 기사들은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무엇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직은 말할 수 없는데, 위험할 지도 모르겠어.”

석궁을 꼬나들고 있던 다로인 경이 말했다.

“저 위에!”

시커먼 뭔가가 확 지나갔다.

“뭡니까?”

가장 나이든 기사이자(무려 쉰다섯이란다.) 기사들의 지도자인 잭캘런 경이 물었다. 젊은 기사 부하들에 비하면 늙은 개인 자신은 기력이 쇠해 남들처럼 적의 냄새를 맡아내기 힘들었으리라.

“나도 몰라.”

자이단은 그림자가 지나간 방향을 말머리를 돌리며 눈으로 쫓았다. 그들 주위를 둘러싼 바위들 중 가장 높고 뾰족한 놈이었다. 이것저것 울퉁불퉁 튀어나온 거친 나무 판에 두껍고 녹슨 쇠못이 반쯤 박혀있는 느낌이랄까?

“뭔지는 몰라도 저 위에 있다면 별 피해를 못줄 것 같은데요.”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다로인 경은 손으로는 계속 석궁을 겨냥하고 있었다.

“크기가 작긴 했어. 뭐지?”

자이단이 말했다.

“자이단 경, 자이단 경! 우리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뭐 동물이나 새 따위가 아닐지.”

다로인 경이 대답했다.

“멍청이! 주위를 보라고. 여기서 생명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자이단의 말에 다로인은 잠시 입술만 들썩이며 머뭇거렸다.

“저게 뭐가 됐든 지금 우릴 습격하지는 않을 것 같군요, 자이단 경.”

잭캘런 경이었다. 쇳덩이 같은 투구 안으로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보였다.

“올라갈 수는 없겠지? 우리가?”

자이단은 말을 몰아 바위벽 가까이로 갔다. 건틀렛을 낀 투박한 손으로 바위를 만지자 가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부는 자이단이 숨을 들이쉴 때 콧속으로 빨려 들어와 재채기를 일으켰다.

“그렇지요.”

잭캘런 경은 코를 틀어막고 뒤로 빠지면서 대답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나?”

“드래곤의 소굴로 전진합시다. 저 위에 무슨 악마가 있던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싸워서 쳐부수면 됩니다. 라오스 기사단은 악에는 결코 지지 않습니다.”

“흠, 좋은 생각이야.”

“기사들에게 주위를 경계하라고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자이단이 끄덕이자 잭캘런 경은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자이단은 힘들어서 눈알이 뾱 하고 빠질 것만 같았다. 가끔씩 건틀렛으로 어떻게 살살 눈이나 좀 긁어보려다가 건틀렛에 잔뜩 묻은 먼지며 흙더미를 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몇 시간 동안 주위에 가득한 바위더미랑 출발한 지 꽤 됐는데 아직도 퍼러죽죽한 하늘만 빼고는 텅 빈 공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적을 경계하기는 힘들었다.

그 문제의 녀석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그게 약 두 시간 전에 보았던 나무 아래의 흰털 토끼는 아닐 것 아닌가? 이런 곳에 그렇게 큰 나무들과 토끼가 있다는 게 이상했지만. 게다가 나무 한 그루는 벼락이라도 맞았는지 홀라당 타있었다. 아무튼 토끼가 돌 산위를 날다시피 뛰어다닌다는 말을 누구에게 했다간 돌난장이들이 강에서 수영을 했다는 말을 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정신병자취급을 받을 것이다.

기사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잔뜩 어깨에 힘을 준 채 경계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몇은 (특히 기사단에서는 젊은 편인 다로인 경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고개를 돌리지 못해 몸통 전체를 틀어야 돌아볼 수 있었다. 자이단이 기사들을 상대로 잡담을 나누지 않자 기사들은 조용했다. 말들은 주인이 자신들을 아까 전보다는 천천히 모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젠장!”

“자이단 경?”

“짜증나단 말이야.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숨죽이며 가야돼?”

“하지만 자이단 경께서 내리신 명령 아니십니까.”

다로인 경은 고함치는 자이단에게 허리통 전체를 틀어 돌아보며 대답했다. 무게 중심이 잘 잡히지 않아 말안장 위에서 잠깐 삐끗하며 미끄러졌으나 곧 자세를 가다듬었다.

“명령? 명령 취소다 다들! 어깨에 준 힘 빼! 특히 너 다로인.”

기사들은 잠깐 웅성거렸다.

잭캘런 경이 다가오며 물었다.

“자이단 경? 갑자기 무슨 말이십니까.”

“아, 위대한 라오스의 위대하신 기사 잭캘런 경!”

자이단은 짐짓 가슴을 크게 부풀어 오르게 한 채 기사들의 말투를 흉내 내어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악마가 나오면 그 때 쳐부수면 된다고 했지?”

“그렇지요.”

“그럼 그러자고! 그때까지만 심 빼고 편하게 가자. 그런다고 악마의 골통빡을 못 깨부수는 건 아니지 않아?”

“그렇습니다. 악은 저희들의 상대가 안 됩니다.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좋아, 말귀가 통해서 참 좋군. 말대꾸만 하는 다로인 녀석보다는 말이야.”

다로인 경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제가 무슨 말대꾸를 하신다고 그러십니까?”

“됐어.”

“자이단 경?”

자이단은 말을 몰아 그냥 앞으로 나아갔다.

“자이간, 아니 자이단 경 너무하십니다.”

다로인 경은 그런 자이단의 뒤를 쫓으며 계속 말을 걸었다. 자이단은 좀 더 빨리 말을 몰았다.







곧 앞에 갈림길이 나타났다. 팻말이 박혀있었던 것 같으나 뽑혀 있고 많이 훼손되어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근처에는 꼬맹이 사내애 한 명이 있었다. 오랜만에 다른 사람을 보자 자이단은 입술을 쭉 찢으며 함박 웃었다.

“저 앞에 악마다! 모두 칼을 뽑으라!”

기사 중 한 명이 소리치자 전부 무기를 꺼내들었다.

“야이 멍충이들아! 니들 돌았어? 꼬마애잖아!”

“자이단 경?”
“멈춰! 칼 집어넣어!”

소년에게 말을 몰아 달려가려는 기사들을 막으면서 자이단이 말했다.

“자이단 경, 막지 마십시오.”

“암만 보아도 그냥 평범한 꼬마애잖아?”

“겉모습만 보아서는 몰라보는 법입니다.”

“나참, 평범한 남자애를 칼 꼬나들고 갑옷 입은 날건달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쳐 죽이는 게 니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잘난 명예인가?”

“악마를 보고도 넘어가는 것은 분명한 불명예입니다.”

자이단은 꼼짝 않는 기사들을 보면서 기가 찼다.

“잭캘런! 어디 말 좀 해봐!”

잭캘런 경은 배를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음,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지!”

“아무래도 자이단 경에게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경에게 직접 확인시켜 드려야겠군요.”

“뭐, 뭘?”

잭캘런 경은 독 바른 볼트를 장전한 석궁을 꺼내들고는 소년을 겨냥했다.

“멈춰!”

“위험합니다 자이단 경. 비키십시오.”

자이단이 자신의 몸으로 막아섰으나 잭캘런 경은 요지부동이었다.

“젠장,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하고 오겠어. 기다리라고.”

“자이단 경은 정말 용맹스럽군요! 악마와 대면하겠다니. 저희가 엄호해드리겠습니다.”

잭캘런 경이 손짓하자 다들 석궁을 손에 쥐었다.

자이단은 뒤에서 느껴지는 불편한 시선을 느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앞에서도 마찬가지로 조금 불편한 느낌을 받았는데 가까이가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런! 얘 꼬마야 괜찮아?”

말에서 뛰어내리고는 소년에게 달려갔다. 뛸 때 갑옷이 철컹철컹 하는 소리 사이사이로 소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ㄷ, 도와주세요 - ”

꼬마남자애는 훌쩍이면서 몸 전체를 계속 떨고 있었다. 한 손으로 정강이를 꽉 잡고 있었다. 바지건 바지가 찢겨져 보이는 맨살이건 그 정강이를 잡고 있는 손이건 할 것 없이 모두 피범벅이었다.

“뭔 일이람!”

자이단은 자신의 푸른빛 망토를 주욱 찢었다. 파랬던 천 쪼가리는 소년의 상처를 싸매자 금세 시뻘건 피 색깔로 물들었다.

자이단은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저씨,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진정하라고. 일어날 수 있어?”

“다리가 아파 더 이상 못 움직이겠어요. 아저씨 기사에요?”

“그래, 널 도와주러 온 기사란다.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악마에요! 악마가 친구들을 모두!”

자이단은 여기서도 악마타령을 듣자 머리를 긁적이려고 했다, 머리에 가던 손이 딱딱한 투구에 가로막히기 전까지.

“악마라니? 자세히 말해봐.”

소년은 손짓을 섞어가며 말하기 시작했다.

“에, 그러니까, 흑. 악마가 친구들을 모두 죽였어요. 저는 막 도망쳤어요. 달리고 달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다리가 너무 아파요. 다리를 못 쓰겠어요!”

“악마는 어떻게 생겼니?”

소년은 눈동자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니까 무지무지 사나웠어요. 눈이 빨개요. 이빨도! 이빨도 많아요. 뿔도 있었어요. 기사님도 보시면 알거예요.”

자이단은 망토 한쪽 귀퉁이도 손으로 잡아 뜯었다. 부우욱 하는 소리가 났다. 실오라기가 막 풀렸으나 내버려두곤 땀과 눈물, 피로 얼룩진 소년의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불쌍한 것.”

“엄마가 걱정하실 거예요. 엄마 보고 싶어요!”

“친구들이 모두 악마한테 당했다고?”

“…네, 저는요 이름이 제키구요. 타미랑 새미랑 같이 놀러 나왔어요. 근데 나무에서 악마가 튀어나왔어요! 악마가 다들 물어버렸어요!”

“문다고?”

자이단은 악마라는 단어와 물기라는 단어가 같이 나오리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제키를 보고는 자이단은 제키의 다리를 묶었던 망토 붕대를 풀어냈다.

“아파!”

“미안, 잠시만.”

천을 벗기고 피를 닦아냈다. 다리가 깨끗해지자 보인 것은 조그만 상처였다. 자이단의 손목만한 제키의 다리였는데도 상처는 작게 느껴졌다. 작은 들짐승한테 물린 상처가 분명했다.

“상처가 별로 심하진 않는데? 걸을 수 있겠어?”

“아뇨, 다리가 아파서 걷질 못하겠어요. 아야!”

자이단은 말하고 있는 제키를 번쩍 일으켜 세웠다. 잠깐 뒤로 물러난 자이단을 제크가 쫓아오면서 주먹으로 쳤다.

“아프다니까요!”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기사들이 석궁을 쏘기 시작했다. 피슉, 픽, 픽. 주위 땅바닥에 볼트들이 박히기 시작했다.

“괜찮아! 그만해! 젠장, 내가 맞겠어!”

자이단은 일행을 돌아보며 크게 소리쳤다. 사격이 멎었다.

“에, 미안하다. 좀 머저리들이라.”

제키는 자이단의 품에 안겨있었다. 자이단은 제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행이야. 걸을 수 있구나. 아까 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해줄래? 혹시 야생동물 같은 건 아니었어?”

“아, 동물이요? 네 동물 같기는 했어요. 하지만 악마가 분명 - ”

“어떻게 생긴 동물인지, 그러니까 그 악마가 어떤 동물처럼 생겼는지 설명해줄래?”

한결 차분해진 제키는 말했다.

“그 악마는 온몸이 새하얀 털로 뒤덮여있었어요. 피로 금방 물들었지만요. 귀가 몸만 했어요. 엄청 컸어요. 눈에서는 지옥의 불빛이 번쩍였고요, 또 이빨. 이빨도 엄청 크고 날카로웠어요!”

“크기가 얼마만한데?”

“이빨이요?”

“아니, 이빨크기는 다리에 난 상처를 보고 알겠더라. 전체적으로 얼마만한 녀석이야?”

“음, 이정도요?”

제키는 처음에는 한팔 가득 크게 벌렸다가, 눈치를 보더니 조금씩 조금씩 그 크기를 줄였다. 마지막은 자이단의 머리통보다 약간 큰 정도였다.

“그걸 보통 토끼라고 부르지 않나?”

“아뇨 토끼처럼 생긴 악마였어요!”

“왜 악마라는 거야?”

자이단이 갑자기 시큰둥해지자 제키는 호들갑을 떨었다.

“세상에, 사람을 공격하고 잡아먹는 토끼가 어딨어요!”

“확실해?”

“네! 제 상처를 보셨잖아요?”

“아니,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얘기 말야. 정말 먹고 있는 걸 봤어?”

“우, 아뇨, 그렇지만!”

“헛것이라도 봤나보군. 제키. 친구들은 무사할 거다.”

이번에도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자이단의 손길을 뿌리치면서 제키는 일어섰다. 검지 끝으로 손가락질하며 어딜 가리켰는데 그건 바로 자이단의 뒤쪽이었고, 다시 말해 자이단 일행이 왔던 곳이었다.

“저 뒤 쪽이에요! 느티나무 나무가 있는 곳.”

제키와 눈을 맞추느라 정강이고 무릎이고 망토에 잔뜩 묻었던 모래, 먼지, 진흙 따위를 털어냈다. 제키는 잠시 콜록거렸다.

“따라오렴.”

자이단은 일행 쪽으로 제키를 끌고 갔다.

“어이! 야생동물한테 아이들이 당했나봐! 누가 상처 좀 봐줘!”

기사들에게 가면서 자이단은 소리쳤다.

투구를 옆구리에 차고 하품을 하거나 앉아서 칼끝으로 바닥을 휘저으며 낙서를 하던 기사들도 자이단과 제키가 가까이오자 퍼뜩 일어섰다. 신경이 곤두서 오래된 전투에서 생긴 상처의 아픔을 다시 느끼는 사람들도 많았다. 스릉 스릉 하면서 각자 칼날을 뽑는 소리는 예사로 들렸다.

“워워! 진정해!”

기사들이 칼날의 끝을 제키의 목으로 향하며 빙 둘러섰다. 개중에는 도끼로 제키의 정수리를 내리찍으려는 기사도 몇몇 있었다.

“모두 내려놔. 이 아이는 말짱해. 순도백퍼센트의 완전인간이라니까?”

제키는 칭얼거렸다. 그 애는 잎사귀에 달라붙은 무당벌레마냥 자이단의 다리를 사지로 꽉 잡고 있었다.

“멀쩡하지 않아요, 다리가 아픈걸요.”

갑옷이 제일 낡은 것은 잭캘런 경이었던 것 같다. 온몸이 상처투성인 갑옷이 앞으로 나왔는데 그 와중에 갑옷이 뻑뻑해 그 쇳덩이 안에 갇혀있던 잭캘런 경은 잠시 넘어질 뻔했다. 여기저기서 피식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참 참을 수 없는 모욕 같았다. 바느질을 하도 많이 덧대어 울퉁불퉁해진 가죽장갑으로 투구의 안면부를 힘들게 올리자 자이단은 그 일을 도와주려고 무심코 나섰다. 그로인해 이 장소에서 들려있던 모든 날 병기들은 주인의 손에 일제히 높아졌다.

“뭐야, 이젠 나한테까지?”

“흠흠, 죄송합니다. 부하들은 교육 받은 대로 할 뿐입니다.”

제키가 끼어들었다.

“무슨 교육이요? 아저씨들 저한테 왜 이러세요!”

“말해봐 잭캘런 경. 내가 증명했잖아? 봐, 이 아이는 사람이라고. 근데 이게 다 무슨 소동이야 대체!”

“참으로 용맹스러우셨습니다 자이단 경. 악마를 생포해 오시다니요. 죽이지 않고 끌고 오다니 새끼악마라 힘이 부족했나보군요? 이제 악마의 입에서 악마의 소굴을 알아내고, 또 악마를 회개시킬 생각입니다. 적당한 고문을 통해서요.”

“무슨 말이에요? 제가 악마라구요?”

“침묵하라 악마야. 아직 네 놈이 말하도록 허락된 때가 아니다. 귀를 막아라 기사들이여, 이 간악한 악마의 혓바닥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자이단은 목을 어떻게 내리쳐야 잭캘런 경이 말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궁리하기까지 했다.

“제발 그만 좀 해!”

“그리고 경께서는, 물론 앞서 보여주셨던 용맹은 충분한 모범이 되었습니다만, 이 악마에게 혹시나 홀리시지는 않으셨는지 확인하기 위해 잠깐의 불편만 감수하시면 됩니다.”

“악마! 으, 악마는 따로 있어요! 저쪽 길로 가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나오잖아요? 거기에요 거기!”

“제키!”

자이단은 제키의 말에 눈을 토끼마냥 휘둥그레 떴다. 마차에 특별히 설치되어있던 철창살우리를 열라고 명령하던 잭캘런 경은 제키에게 물었다.

“느티나무? 저 뒤쪽 말이냐 꼬마악마?”

“네. 아니, 아뇨! 아, 그러니까 ‘네’는 악마가 느티나무 밑에 있다는 말이고요, ‘아니’는 제가 꼬마악마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잭캘런 경은 주위의 기사들을 보며 고함질렀다.

“뒷길로 다시 돌아간다! 이 꼬마악마가 부모들이 있는 소굴을 실토했다! 악을 토벌하러 가자! 그리고 다로인 경?”

“네, 여깄습니다!”

알고 보니 도끼를 들고 있던 기사가 다로인 경이었다.

“악마를 마차에 가두도록.”

“알겠습니다.”

모래바닥에 도끼날을 박아 넣고는 제키를 마차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제키는 살려달라고, 풀어달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바동거렸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다로인 경의 손가락을 꽉 물어버리기도 했으나 가죽장갑이 두터워 비릿한 가죽 맛만 느낄 뿐이었다.

“아일 놔줘!”

뛰쳐나가려는 자이단은 완전 무장한 기사들에게 막혀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었다. 기사들은 원형으로 둘러싸며 자이단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점차 줄여나갔다.







그래서 결국 기사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제키는 아무리 불러도 소용없으나 엄마아빠라는 말이나 풀어달라는, 살려달라는 말만 계속 부르짖다 목이 쉬어버리고 말았다. 자이단은 여전히 기사들에게 포위되어 끌려가다시피 갔다. 갑옷은 그대로 입고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무기들은 모두 빼앗아 제키가 타고 있는 마차 지붕에 있는 트렁크에 넣었다. 말은 다로인 경이 고삐를 잡고 있었다.

“다로인.”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자이단이 오랜만에 혀를 놀렸다. 입을 크게 벌리거나 오므리면서 아아우우 아이우에오 등 자이단은 혼잣말을 하며 잠시 혀를 풀어주었다.

“네, 자이단 경.”

“아까 전에 보았던 그림자를 다시 본 것 같다.”

“네?”

다로인 경이 대답했다.

“저 바위더미 위에서. 또 뭔가 지나갔어. 작고 빠른 뭔가가.”

“그럴 만도 하지요 경. 우린 지금 악마의 소굴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하.”

다로인 경은 자이단이 가리키는 바위산을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악마를 본 적 있나?”

“그럼요.”

“어디서?”

“음, 도서관에서요? 극장에서도 봤습니다.”

“라오스에서는 악마가 도시에서도 판을 치나?”

다로인 경은 손사래를 쳤다.

“아뇨, 제 말은 그림책에서 보았다는 말입니다. 배우가 악마로 분장한 것도 보았습니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요.”

“보라고! 저 애가 악마처럼 생겼나?”

자이단은 다로인 경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로인 경은 몸을 살짝 뒤로 빼며 능글맞게 웃었다. 자신이 이 유명하고 용감하지만 자기가 생각하기엔 학식이 부족한 외국의 전사보다는 많이 안다는 듯이.

“자이단 경은 그림쟁이, 글쟁이들이 하는 소리를 전부 믿으십니까? 그리고 그들이 미처 보지 못한 악마들도 세상엔 많겠지요.”

자이단은 다로인 경의 옆얼굴을 노려보다가 한참 뒤 말을 이었다.

“그래, 지금도 세상엔 진짜 악마들이 옷을 입고 버젓이 돌아다니겠지. 존경받거나 사랑받는 사람의 탈을 쓴 채.”

“그럴 겁니다. 우리가 잡은 악마만 해도 어린 아이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지 않습니까.”

다로인 경은 자신의 말에 혼자 웃었고, 주위에 있던 기사 두세 명 정도도 따라서 웃었다. 자이단은 입술을 일자로 만들면서, 가끔은 입술 끝을 아래로 잡아당기어 더 내리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던 바위더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잭캘런 경은 말을 몰아 마차의 옆에 붙었다. 그리곤 주먹으로 제키가 갇힌 우리의 창살을 후려치며 말했다.

“악마, 대답하라.”

“……네?”

“저것이 그 느티나무인가?”

제키는 작은 얼굴을 철창사이로 내밀었다. 제키의 팅팅 부운 눈에 바깥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 그 느티나무였다. 자신이 버리고 도망쳤던 친구들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새미! 타미!”

“악마들을 불러 모으는 모양이군.”

“기사님, 기사님! 제발 친구들을 살려주세요. 정말 진짜 악마가 붙잡아갔어요!”

“신이시여,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해주옵소서.”

잭캘런 경은 잠시 빠르게 성호를 그었다. 말고삐를 꺾어 제키가 뒤에서 울먹이며 계속 말하는 내용을 듣지 않고 멀리 떨어져 나왔다.

“성전에 준비하라. 코앞이 악마의 소굴이다.”

잭캘런 경의 말에 여기저기서 짧다란 탄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자이단은 처음에 길을 올 때 흰색토끼를 보았던 나무임을 알아보았다.

“아저씨! 조심해야 되요, 정말로요!”

자이단을 찾아낸 제키가 말했다. 자이단은 제키를 보며 애써 웃었다.

“괜찮을 거다. 친구들도 무사할 거야.”

자이단은 말을 하면서도 제키를 가둔 마차와 기사들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봐도 한 눈에 무지막지하게 큰 나무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길을 떠날 때 맑고 푸르렀던 하늘은 날이 저물고 있어 붉게 타올랐다. 벌건 노을아래 검은 그림자로만 보였다. 더군다나 그 중 하나는 완전히 타버려 시꺼멨다.

“자이단 경, 경께서 아까 보셨던 그림자는 결국 새였던 모양입니다.”

다로인 경이 나무에 앉아 있다가 날아오르는 까마귀 몇 마리를 가리키며 히죽였다. 자이단은 응대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바위사막 같은 이곳에도 풀들이 있었다. 나무 몇 그루를 중심으로 싸구려 놋쇠쟁반처럼 찌그러진 원모양을 하며 각자 제멋대로의 길이로 풀들이 자라나있었다. 오랜만에 풀밭으로 오자 계속 딸그닥거리며 귀에 거슬리던 말발굽 소리가 사라졌다. 잭캘런 경이 손을 들어 잠깐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자 철커덩 거리던 갑옷 부딪치는 소리도 없어졌다. 코를 킁킁 거릴 때마다 진한 풀냄새와 간간히 뒤섞인 이상한 비린내가 났다.

나무가 팔목만해보일 거리였다.

“조용하군. 저 까마귀소릴 빼면 말이야.”

잭캘런 경이 말하자 다로인 경이 답했다.

“네, 아무도 없군요. 잭캘런 경, 저 악마가 우릴 속인 걸까요?”

“무엇하러?”

“글쎄요. 악마들은 인간을 속이기 좋아한다 그러지 않습니까. 새끼악마이니 우릴 그냥 놀린 걸지도 모르지요. 이만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닐세 다로인 경. 내 생각엔 아무래도 저 나무가 의심스럽군.”

잭캘런 경은 두 명의 기사를 불러 나무를 살피고 오라고 명령했다. 각각 거스테인 경, 프란트 경이라고 불린 기사 둘은 말에서 내려 몸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방패를 찼다. 나머지 사람들은 장검을 빼들고 나무를 향해 걸어가는 두 기사의 등을 보았다. 잠시 후 둘은 느티나무 그림자에 점차 녹아들어갔다.

제키는 창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눈을 질끈 감고 귀마저 틀어막았다.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거스테인 경의 목소리였다. 다로인 경은 흠흠 헛기침하며 거 보십시오, 라는 눈빛을 잭캘런 경에게 보냈다.

“아니, 잠시만요. 이게 뭐지? 세상에! 프란트! 프란트!”

“아이 두 명입니다! 모두 죽었어요! 하느님 맙소사, 바닥엔 온통 피뿐입니다!”

목소리가 굵은 프란트 경이었다. 두 기사는 충격을 받았는지 멀리서도 두 팔을 허공에다 휘젓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때 자이단은 거스테인 경의 뒤로 아까 보았던 그림자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비명소리. 넘어지면서 갑옷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악마입니다, 라고 외치는 프란트 경의 말소린 최후에 내지르는 악성으로 바뀌었다.

잭캘런 경은 소리쳤다.

“조용! 모두 당황하지마라!”

하지만 이미 일행은 온통 소란으로 가득 찼다. 제일 호들갑떠는 것은 다로인 경이었다. 보다 못한 잭캘런 경은 주먹을 내질러 다로인 경의 얼굴을 쳤고, 다로인 경은 그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이목이 집중됐다.

“조용! 모두 조용해라!”

잭캘런 경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맙소사, 잭캘런 경! 무슨 짓입니까, 당신!”

다로인 경이 퉥 하고 피와 섞인 가래침을 풀밭에다 내뱉으며 말했다. 다로인 경은 볼이 터져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낼 때 욱신거려 표정을 찌푸렸다. 잭캘런 경은 손잡이 부분이 십자가로 장식된 자신의 칼을 뽑아 다로인 경에게 드밀었다.

“조용하란 말 못 들었나! 대 라오스의 기사들이 이게 무슨 혼란이란 말인가!”

“나는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란 말입니다 잭캘런! 당신, 돌아가서 두고 볼 줄 아시오!”

“여기서 살아 돌아간다면 말이지. 그리고 다로인 경, 경의 그런 행동들이 우릴 위험으로 몰아넣고 있는 걸세!”

다로인 경은 똥 씹은 표정이었다. 무언가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잭캘런 경의 기세에 눌려 깨갱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자이단은 다로인 경이 투구를 얼굴에 뒤집어쓰면서 조그맣게 욕설을 내뱉는 것을 옆에서 언뜻 들을 수 있었다.

바람이 일어 풀들이 춤추기 시작했다. 풀잎 하나가 바람에 날려 다로인 경의 투구에 달린 두 개의 뿔에 닿았다가 제키가 타고 있는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제키는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바로 앞에서 일어난 소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이단은 아까전의 비린내가 피 냄새였음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대 라오스의 기사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적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명예와 죽음은 같은 마차를 탄 손님이다!”

잭캘런 경은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큰 소리로 기사들을 고무시켰다. 기사들은 아까 전의 소란은 웬 말이냐는 식으로 한껏 날카로워진 태도였다. 같이 살다시피 지낸 기사 두 명이 눈앞에서 죽었지만 눈물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멈춰선 잭캘런 경에게 자이단이 말했다.

“잭캘런 경, 어떻게 할 생각인가?”

“눈앞에 악마가 동료 둘을 지옥으로 끌고 갔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자이단 경. 명백한 악은 분명한 적입니다.”

자이단에게 잭캘런 경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전보다 훨씬 거대해진 느낌이었다. 희끗한 수염아래 굳게 닫힌 입술이 보였다.

“위험할 텐데? 방금 보지 않았나?”

“악마들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더 겁내야 할 것입니다.”

“도와주겠어. 무기를 돌려주시오.”

“안됩니다. 경께서는 아직 악마에게 홀렸다는 혐의를 풀지 못했습니다.”

잭캘런 경은 마차를 몰던 젊은 기사에게 외쳤다.

“다니엘 경! 남아서 꼬마악마와 자이단을 잘 지켜보도록.”

다니엘 경은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자이단의 무기를 넣어둔 트렁크는 드래곤이 한 입 깨문다 해도 부서질 것 같지 않았고, 자물쇠는 도통 열 엄두가 나지 않아보였다.

“잭캘런 경, 지금 실수하는 거요. 내가 가야만 해.”

“이 나이까지 살아왔지만 실수는 해도 해도 도무지 줄 생각을 하지 않더군요. 인생이란 그런 법 아니겠습니까. 자이단 경은 남아서 기다리시지요. 다니엘 경이 지켜볼 겁니다.”

여덟 명의 기사를 이끌고 잭캘런 경은 천천히 한 발자국씩 내딛었다. 기사들 모두 언제든 무기를 뽑을 태세를 하고는 석궁에 볼트를 장전했다. 아홉 발 중 한 발이라도 제대로 맞춘다면 볼트에 묻은 독에 꼼짝 없이 당할 것이다.







“다니엘이라고 했나? 이봐, 어떻게 안 되겠나?”

“안됩니다, 경.”

다니엘 경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젠장, 내버려두면 모두 개죽음 당할 거라고! 아까 봤잖아.”

자이단은 걷다가 바닥에 있는 돌이 신발에 걸리자 있는 힘껏 걷어찼다.

“날 좀 보내줘! 안 그럼 나 혼자 맨손으로라도 가겠어.”

“안됩니다, 경.”

“아저씨, 가면 안돼요. 가면 아저씨도 죽을 거예요.”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제키가 말했다. 다니엘 경은 자신의 등 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조용히 있었다.

자이단은 마차 옆면 바로 앞으로 왔다.

“제키! 제대로 말해줘. 대체 저기엔 무슨 괴물이 있는 거지?”

“계속 말했잖아요. 악마. 뿔 달린 토끼 악마라고요.”

제키는 작은 두 손으로 철창을 꼭 잡고 있었다. 손이 워낙 작아 철창살을 완전히 붙잡지도 못했다. 서있던 말이 한 발자국 앞으로 걷자 마차 안에 서 있던 제키의 몸이 기우뚱했다.

“새미, 타미가 모두 죽었대요. 정말이래요. 어떡해요.”

제키는 다시 한 번 마차가 흔들리자 쓰러지면서 훌쩍였다.

“괜찮아, 제키. 넌 살아남았잖아. 가만, 넌 어떻게 도망쳐온 거지? 다리에 물린 상처는?”

“다리의 상처는 악마한테 물린 게 아니에요 사실, 집에서 길렀던 루피가 전에 문 건데, 아 루피는 우리집 강아지 이름이에요. 아무튼 그 상처가 도망치다가 넘어져서 다시 피가 난 거에요. 악마는 목만 물어요.”

“제키, 말해봐. 넌 어떻게 도망친 거야?”

“갑자기 번쩍 하더니 옆에 있던 나무가 불탔어요.”

자이단은 불에 타 있던 나무를 떠올리며 말했다.

“번갯불이군!”

“그럴 거예요 아마. 그게 바닥에 떨어져 구르다가 멈추더라고요. 새미랑 타미는 다가갔는데 전 날라 다니던 그 토끼가 무서워서 그냥 막 도망쳤어요. 새미랑 타미는 막 비웃고, 근데 뒤에서 그 애들 비명소리가 들리다가, 흑.”

“좋아, 벼락이라고 벼락! 다니엘! 어서 내 무길 꺼내줘!”

“경, 하지만 명령을 - ”

“다들 죽는 모습 보고 싶어? 어서 빨리!”

다니엘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잡아먹힐 기세였다.










기사들의 코에는 더 이상 향긋한 풀냄새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온통 비릿한 피 냄새와 더불어 무언가 타버린 냄새가 콧속을 진동했다. 그러나 아직까진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쓰러져있던 거스테인 경과 프란트 경의 시체를 살펴보던 잭캘런 경은 뒤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죽었소. 목 부분의 살이 뜯겨져나갔는데.”

말을 마침과 동시에 어디선가 푸드득 하는 소리를 들었다. 어지러워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잭캘런 경은 진동하는 피의 향속에 서있자 세상이 빙글 돈다고 느꼈다.

“저건 까마귀 소리가 아닌데요.”

나이가 제법 많아 보이는 기사 한 명이 말했다. 딸이 예쁘다며 자이단에게 자랑하던 기사였다.

“그럼 뭐겠소. 색슨 경! 우릴 구하기 위해 하늘에서 천사라도 내려왔겠소?”

다로인 경이 빈정댔다.

“다로인 경,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색슨 경은 돌아보며 말했다.

“흥, 그런가요. 천사가 아니라면 우리들을 모조리 죽이러 온 악마 녀석이겠지!”

“그만! 다로인 경, 그만 하시오. 중요한 순간이지 않소.”

색슨 경은 계속 다로인 경이 떠드는 것을 막으려 했다.

“아무렴, 댁 같은 어른 앞에서 나 같은 아이의 칭얼거림은 귀찮기만 하겠죠, 색슨 경. 내 조용히 하리다. 당신도 곧 조용하게 될 거요.”

다로인 경이 말했다.

“색슨 경, 다로인 경! 둘 다 멈추시오.”

어지러움을 느끼던 잭캘런 경은 이제 좀 괜찮아지자 두 사람에게 불똥을 내뱉었다. 다로인 경은 투덜대며 일행의 뒤쪽으로 빠졌고, 색슨 경은 잠시 가족의 사진이 담겨있는 로켓을 만지작거렸다. 로켓이 열리며 부인과 두 명의 딸과 같이 있는 색슨 경의 모습이 보였다.

점점 풀밭 원의 중앙 쪽으로 갈수록 배 있는 곳까지 풀들이 높다랗게 자라있었다. 풀잎이 크고 억세 기사들은 헤엄치듯 손을 내젓거나 장검으로 휘저으며 길을 텄고 그 바람에 베여나가 바닥에 거름이 될 풀들도 생겼다. 전쟁에 과부가 된 부인들처럼 홀로 남은 풀들도 많았고.

기사들의 꼬랑지에 붙어있던 다로인 경은 무언가가 등을 살짝 미는 느낌을 받았다. 대뜸 성질부터 내려던 다로인 경의 머리에 자신의 등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뒤에 뭔가가 있소!”

다로인 경은 일행의 한가운데로 뛰어가며 말했다. 무척이나 긴장한 목소리였다.

“당신의 천사나 악마 아니오?”

기사 한 명이 이 분위기에서도 웃기려고 한 듯 농을 던졌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들의 신경은 더 이상 쇳돌로 갈지 못할 정도로 날카로워져있었다. 잭캘런 경의 손짓에 따라 다들 다시 석궁을 높이 들고 다로인 경이 뛰어왔던 뒤를 돌아봤다. 전에는 대열의 꼬리였지만 이제는 머리가 된 기사 두세 명 정도는 검을 뽑아 손에 쥐었다.

이번에도 푸드득 소리가 났다. 모두의 귓속에 그 소리는 빠짐없이 들어왔다. 검 손잡이를 다시 꽉 잡고 침을 꿀꺽 삼키며 가슴이 쿵쾅 뛰는 것들이 모든 감각들을 통해서 느껴졌다. 몇 명은 수분 모자란 자신의 눈에서 눈알이 왼쪽 오른쪽으로 돌아가면서 윤활유가 부족하다고 비명 질러대는 것들을 듣기도 했다.

다들 말없었다.







“유감입니다, 경. 명령 때문에 무기를 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경.”

다니엘 경은 마부자리까지 쫓아올라온 자이단을 약간 피하며 말했다. 자이단은 발에 힘을 주어 지탱한 채 손으로는 난간을 잡고 다니엘 경에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정말 안 되겠나?”

“명령은 명령입니다, 자이단 경.”

“좋아, 어쩔 수 없지.”

자이단이 높였던 몸을 낮추고 자리에 철푸덕 앉자 다니엘 경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 숨이 미처 다니엘 경의 입술을 통과하지 못했을 때 자이단의 주먹이 날아왔다. 기사의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마차가 기울어지자 제키가 “무슨 일이에요?” 라고 말했다. 마차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직전 자이단이 붙잡아 다니엘 경은 순간 떨어지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나 연이어 날아온 전투망치 같은 주먹에 얼굴을 뚜드려 맞자 그 생각은 줄행랑쳤다. 다니엘 경은 안도감도 하늘처럼 붉은 색이 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암 것도 아냐.”

자이단은 제키에게 말했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가만히 있어.”

자이단은 대답하며 반쯤 기절한 기사에게서 열쇠 꾸러미를 빼앗아 손에 넣었다. 거구인 자이단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무게중심이 옮겨져 마차가 다시 철렁였다. “아저씨!”하고 제키는 소리 질렀다. 자이단은 찰랑이는 열쇠를 이빨로 물고서는 트렁크가 있는 마차 꼭대기로 기어 올라갔다.

마차는 드래곤을 쏘아 잡겠다며 쇠뇌를 달아둔 녀석이라 다른 마차들보다는 약간 덩치가 컸다. 자이단은 거창이 쇠사슬에 묶여 난간에 매여 있는 곳 앞에서 강철로 만든 상자를 찾았다. 상자 안에서 윙윙거리고 있던 자신의 마법검이 그렇게 반가웠던 적은 없었다.

기사들이 간 나무쪽에서 비명소리가 날아와 귀청을 때렸다. 비명은 제키 녀석이 또 “아저씨!”라고 소리 지르는 바람에 묻히곤 말았지만 자이단은 땅바닥에 그대로 뛰어내릴 준비를 마쳤다.

“꽉 잡고 있어!”

하지만 전사는 아파서 얼마간 구르고 나서야 갑옷을 입은 채 뛰는 게 대단히 미련한 일임을 알았다. 자이단이 마차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린 후에 크게 흔들렸던 마차는 곧 멈췄다. 다니엘 경은 마부석에서 짧은 신음소리를 냈다. 바닥에 떨어졌을 때 혼자 소리 죽이며 온갖 비명 다 싸질렀던 자이단은 찡그린 얼굴로 다리를 절면서 기사들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아요?”

등 뒤에서 들리는 제키의 목소리에 자이단은 대답했다.

“괜찮아! 너무 늦지 말아야 할 텐데.”

가끔씩 발을 헛디뎌 휘청거리던 자이단은 검으로 지탱을 하면서 계속 언덕을 올라갔다.





“제기랄.”

다로인 경은 가까스로 죽음을 피했다. 녀석이 자신에게 날아드는 통에 손에 들고 있던 석궁을 무작정 앞으로 던졌는데 운 좋게 부딪친 듯 방향을 튼 것이다. 다로인 경은 옆에서 기사 한 명이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귀를 틀어막고만 싶었다. 주위에 땀 냄새가 가득 찼고, 손에 든 검만 아니라면 투구의 앞가리개를 올려 얼굴에 송글송글한 땀방울들을 닦아내고 싶었다.

핑, 하고 누가 석궁을 쐈다.

“사격중지! 서로를 맞추고 싶나?”

잭캘런 경이 방패를 살짝 내리며 소리쳤다. 녀석은 빠른 속도로 기사들 사이를 헤집으며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운 나쁜 기사 먼저 목을 물려 쓰러지는 것이었다. 아홉 명은 어느새 여섯 명으로 줄어있었다.

“모두들 원형으로.”

잭캘런 경이 명령했다.

방패를 든 기사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기사도 있었으나 다들 등을 서로 맞대며 원형 진을 폈다. 다로인 경은 들고 있던 도끼를 허공에 내던지며 좀 더 가벼운 검을 바닥에서 빼들었다. 죽은 기사가 쓰러지면서 떨어뜨린 것이었다.

다로인 경은 자신 쪽으로 흰빛이 빠르게 오자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왼편에 있던 기사가 비명 질렀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그 기사는 핏눈을 한 채 오른손으로 녀석의 털 뭉치를 움켜잡았다. 다로인 경은 흰색 뿔 달린 토끼가 아직 기사의 목에 매달려있는 모습을 보았다. 다로인 경은 자신의 용기도 누군가가 움켜쥐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칼로 녀석의 작은 몸통을 찌르면 기사도 자신의 칼에 목을 찔릴 것만 같았다.

“어서!”

기사가 가래침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로인 경의 검신 끝이 기사를 향해 움직였을 때는 이미 토끼가 다른 곳으로 달아난 후였다.

짙은 풀들은 쇳덩이가 바닥에 넘어지는 소리를 먹어주었다.

원형 진은 다섯으로 줄었다.

자이단은 죽은 기사들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살아있는 기사들은 둥그렇게 몰려있었다. 조금씩 돌면서 허공을 감시하고 있어 자이단이 가까이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이단은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몸을 앞으로 던졌다. 자이단의 몸이 기울어지는 순간 녀석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덩치 큰 전사가 바닥을 구르며 내지르는 소리에 다들 돌아봤다.

“뭐하시는 겁니까, 자이단 경?”

색슨 경이 그를 알아보고 말했다.

“도와주러 왔소! 녀석은 전기에 약해.”

기사들은 잭캘런 경의 명령에 따라 한발자국씩 자이단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어떻게 왔소? 경은 아직도 악마의 조정을 받는 건가?”

자이단의 바로 옆에 온 잭캘런 경이 말했다.

“어렸을 때 엄마 빼고는 누구의 말도 들은 적 없지. 갑옷 벗겨내는데 보호해주시오.”

자이단은 죽어있는 기사의 몸에서 판금갑옷을 벗겨내기 위해 버클들을 따고 있었다.

“기사의 시체를 모욕하지 마시오!”

잭캘런 경은 자이단을 보면서 화냈다.

“여기서 다 죽기 싫으면 어서!”

다섯 명의 기사들은 자신들이 만든 원 안에 자이단을 넣으며 그를 지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기사 한 명이 자신을 노리던 녀석을 다행히 방패로 튕겨냈다. 몸통부분의 갑옷을 벗겨낸 자이단은 앞부분과 등 부분을 펼쳐 거대한 금속판을 만들었다.

“됐다!”

자이단은 판을 집어든 채 원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의 눈빛은 절망을 말했다.

“자이단 경, 이 상황에서 대체 무슨 짓입니까 지금?”

다로인 경은 기사들의 생각을 대변해 물었다.

“보면 알게 돼. 투우 좋아하나 다로인 경?”

자이단은 넓게 핀 금속판을 투우사가 망토를 붙잡는 것처럼 들더니 전기가 흐르는 마법검을 그 판에 갖다 대었다. 검과 판이 부딪치면서 잠깐 불빛이 요란했다. 자이단은 마법이 통하지 않는 자신의 건틀렛으로 마법검과 금속판을 붙잡았다.

아까 전에 다친 곳 때문에 자이단의 얼굴은 찡그러졌다. 전기가 흐르는 금속판도 자칫 잘못해 자신의 몸 쪽으로 오면 큰일이었다. 악마 토끼를 처단하기는커녕 인간 구이가 돼 녀석은 간식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인간을 먹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이단은 입 옆을 타고 흐르는 땀을 혀로 핥았다. 짜다.

“자자, 어디에서 올 테냐. 언제든 덤비라고 이 막돼먹은 토끼 자식아.”

그는 겁먹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도 감추려고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하지만 몸의 여러 부분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자이단은 떨리는 발을 이리저리 옮기며 사방을 경계했다. 고개를 돌릴 때 휙휙 지나가는 흰 뭉치가 언뜻 시야에 스쳤다. 푸드득 거리는 소리는 온갖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기사들도 긴장하며 방패를 쥔 손에 힘을 주기는 마찬가지였다.

“색슨 경!”

다시 한 번 비명소리가 기사들 사이에서 울렸다. 자이단은 판에서 검을 떼며 달려갔다. 판의 무게와 한 손에 갑옷 무게의 넓은 판을 든 엉터리 균형 때문인지 자이단은 뛰다가 넘어질 뻔했다.

“난 괜찮소.”

색슨 경은 안심하라는 듯 손짓했다. 색슨 경에게 달려들었던 토끼는 다시 사라졌다. 공격을 제대로 당하지 않아 무사한 것처럼 보였다.

“제기랄, 자기가 혼자 다 해결할 것처럼 찾아오더니 이게 뭡니까 자이단 경! 달라진 게 없잖소.” 라고 다로인 경이 말했다.

자이단은 다시 판에 검을 대고는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언제는 명예타령만 하던 기사가 어째 지금은 불평불만 떠들기만 하나?”

“때가 때가 아니오! 자칫하다간 죽는다고!”

다로인 경이 성을 내는 바람에 기사들의 진형이 잠깐 흐트러졌다.

“언제는 죽을 때까지 명예를 지키며 싸우겠다며? 라오스 기사들의 명예란 싸움 앞에서 꼬릴 말고 도망치는 건가보군.”

말하면서 자이단은 다로인 경이 있는 쪽으로 옆 걸음질치며 다가갔다. 자이단의 독수리 모양 투구는 여전히 좌우 번갈아 움직이며 잔뜩 경계를 하고 있었다.

다로인 경이 멋 내며 다듬은 콧수염이 화로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다로인 경은 자이단쪽을 보며 “당신!” 하고 소릴 질렀다. 가까이에서 흰 뭉치가 지나간 모습을 본 나머지 기사들은 자이단의 말에 불쾌하기는 했지만 잔뜩 긴장했다. 그러나 화가 치밀어 오른 다로인 경은 주위 경계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멈추지 않겠나 다로인 경! 당장 진형을 유지해!”

잭캘런 경이 검을 잠깐 흙에 꼽아 넣고는 다로인 경의 어깨를 붙잡아 돌려세우며 윽박질렀다. 다로인 경은 자이단을 잠시 노려보다가 돌아섰다.

“왜, 긍지 있는 기사인척 흉내 내던 척척 허풍쟁이가 정체가 탈로나자 부끄러운가보군? 자주 읽던 로맨스 소설에는 이런 장면이 없었나보지?”

자이단은 계속 다로인 경을 비꼬았다.

“이 불한당 같은 놈! 죽더라도 네놈만큼은 내가 죽이겠다!”

다로인 경은 들었던 방패며 검이며 자이단한테 다 집어던졌다. 그리고 아까 바닥에 내려놓았던 도끼를 양손으로 붙잡아들어 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한 명이 뛰쳐나가는 바람에 진형은 무너졌다.

“저런 멍청한 놈!”하고 색슨 경이 소리쳤다.

다로인 경의 도끼가 허공을 갈랐을 때였다. 다시 품을 채 추스르지 못한 다로인 경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흰색 토끼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비명을 내질렀고, 색슨 경을 비롯한 기사 몇 명은 눈을 질끈 감았다.

색슨 경은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주름 잡혀가며 힘줘 감은 눈에는 뜨거운 설움이 물로 액화돼 맺혔다. 딸이랑 비슷한 나이의 내 자식 같은 기사들이 내 시야 속에서 죽는 모습은 더 이상 보기 싫었다. 얼굴은 뜨거웠고, 숨은 찼다. 온몸에 갑옷과 무기, 방패의 무게가 느껴졌다. 흙바닥은 그 무게에 패였고, 색슨 경은 자신도 무거워져 아래로 푹 꺼질 것만 같았다.

다로인 경이 지르는 귀를 울리던 소리는 멎었다. 털썩 하는 소리가 텅 빈 귀를 다시 채웠다.

“후, 귀찮던 놈 드디어 죽었군.”

자이단의 목소리였다.

“자이단 경, 그건 끝났소?”

이건 잭캘런 경의 목소리였다. 세상에, 부하기사를 그것이라고 표현하다니!

“완전히 끝. 다시는 발발거리며 싸돌아다니지 못할 테지.” 다시 자이단.

“다행이군.” 잭캘런 경의 말이었다.

색슨 경은 듣다못해 검 손잡이를 있는 힘껏 꽉 쥐었다. 나이 들었지만 힘은 아직 정정했다.

“당신들은 인간도 아니오?”

그러나 색슨 경이 눈을 떴을 때는 세상이 달랐다. 죽었다고 생각한 다로인 경은 바닥에 주저앉아 얼빠져 있었다. 다로인 경과 죽은 토끼 사이에 자이단 경이 있었다. 색슨 경은 강한 탄내를 맡았다. 자이단은 아직도 연기가 나는 철판을 바닥에 내려놓고 있었고, 그 발치에는 새까매진 토끼의 몸이 떨어져있었다.

자이단은 고무를 안에 덧댄 가죽칼집에 마법검을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색슨 경, 나도 가끔은 내가 인간 이상의 영웅 같다고는 느끼지만 인간인건 맞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었소.”

색슨 경은 다로인 경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괜찮은가 다로인 경?”

“흠, 괜찮소 색슨 경. 고맙소.” 갑옷 엉덩이 부분에 묻은 흙 따위를 털어내며 다로인 경이 대답했다.

자이단은 뿔을 잡아 토끼의 시체를 들면서 말했다.

“미안하군 다로인 경. 토끼가 공격해오도록 만들기 위해 도발한 거야. 별 마음은 없었어.”

다로인 경은 말없이 자이단이 토끼의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빨을 만지는 모습을 보았다.



정신 차린 다니엘 경이 무기를 들고 언덕으로 올라왔을 때는 모든 상황이 정리되어 있을 때였다. 남은 기사들은 다니엘 경의 부운 얼굴을 보고 놀랐고, 자이단은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여덟 개의 무덤을 만들어주었을 때는 완전히 밤이었다. 여섯 명의 기사들과 두 명의 아이는 횃불을 마지막으로 본 빛으로 한 채 흙에 파묻혔다. 생전에 그들이 썼던 무기들이 묘석을 대신했다.


자이단 경은 기사 일행들과 알아서 블랙드래곤의 소굴로 잘 찾아갔고, 마찬가지로 여차저차 잘 싸워서 공주를 구해내었다. 공주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자이단 경의 옆구리에 끼여서 국왕의 얼굴을 다시 보았는데, 라오스 국왕은 공주가 살아돌아오자 맘이 바뀌어 자이단 경에게 반항을 시도하려 했다. 물론 아직 덜 나은 까닭에 이성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 했기 때문이겠으나 그로 인해 라오스 국왕은 멱살을 잡고 흔드는 자이단 경에게 혼쭐이 났고, 결국 약속했던 대로 왕국과 공주를 자이단 경에게 주었다나 뭐라나. 마지막 부분은 제대로 전승이 되질 않았다. 다만 생각보다 쉽게 처리했던 블랙드래곤에 비해 악랄했던 토끼 악마를 기리기 위해 그날부터 왕국의 휘장 그림은 이빨 달린 "신묘"한 토끼가 되었고, 그해를 "신묘년"이라 부르며 라오스 국왕의 당시 나이인 60년마다 기념하게 되었다나 뭐라나, 카더라.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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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모두 신년 복복복
신묘년이라 예전에 몬티파이튼의 성배에 나오는 보팔 토끼 때문에 웃겨서 쓴 글을 올려봅니다.
귀찮아서 뒷부분은 못 쓰겠습니다. 덕분에 완결성은 바닥을 칩니다만 뭐. 휴가 나온 군인 처지만 아니라면 이야기를 길게 끌고 나갈 수는 있겠으나 아무래도 나중을 기약해야 할 듯 하구만요.

댓글 2
  • No Profile
    11.01.01 10:42 댓글 수정 삭제
    몬티파이튼의 성배에 나왔던 보팔 토끼 스크린샷도 같이 올리려고 했는데
    방법을 모르겠군요; 어떡해야 함?
  • No Profile
    jxk160 11.02.04 09:51 댓글 수정 삭제
    으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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