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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식분(食糞)

2017.01.17 11:3401.17

미완성인 글입니다. 너무 못쓴 것 같아 부끄러워서 올리지 않으려고 했다가 용기내어 올려봅니다. 


정중한 비평은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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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분(食糞)


 이제 17년 남았다. 어쩌면 그보다 더 이를지도 모른다. 그때 이 세계는 나와 함께 무너질 것이다. 여기서 33년을 살아왔지만 나는 믿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나에게 33시간처럼 느껴졌다. 영원이 나의 생애에 불과한 이 테라리움 속에서 내가 시간 관념을 가지게 되는 때는 내가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한 번 까닥거릴 때이다. 그러면 칠흑 속에서 붉은 빛을 띈 숫자가 나타나 내가 지나왔던 시간들을 말해준다. 그때마다 나는 초를 관장하는 숫자의 움직임을 보며 시간의 쏜살같음과 덧없음에 경악하곤 한다.

 이 속에서 나는 내 신체의 미세한 요동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전부 박탈되었다. 아까 내가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한 번 까닥거리면 내가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나온다고 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붉은빛의 시간이 내 눈 앞에 떠오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움직여야 하는게 오른쪽 새끼손가락인지, 왼쪽 엄지발가락인지 아니면 내 몸의 전혀 엉뚱한 부분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어떤 감각이 신체의 어느 부분과 대응하는지 잊어버린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냥 내가 움직인 것이 오른쪽 새끼손가락인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해본 것 뿐이다. 

 이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곳에 처음 들어온 얼마의 기간 동안은 외부 자극이 너무도 없었던 나머지 계속해서 환각을 보았다. 끝없이 느껴지던 권태에 지쳐가던 즈음 그 환각은 뇌가 보내주는 TV와 같았다. 나는 그 환각에서 나에게 한 때 소중했던 사람들과 익숙한 풍경들, 생김새가 조금은 과장되게 왜곡되었을지도 모르는 온갖 생물들을 보며 외부 세계로 통하는 인식의 밧줄을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 환각들은 거품처럼 뭉쳐져 뭉실거라다 한번에 사그라들었다. 그 후로 나는 환각을 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더이상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배(혹은 내가 배라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부위)가 아파온다. 그러면 나는 배에 힘을 준다. 창자에서 대변이 밀려 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대변은 내 항문에 꽂혀 있는 고무관을 타고 테라리움의 처리장치 속으로 들어간다. 처리장치 속에서 내 대변은 몇 시간 동안의 여러 화학작용을 거쳐 일종의 곤죽처럼 변한다. 먹음직스럽게 바뀐 나의 대변은 내 목구멍에 꽂힌 고무관을 타고 다시 나의 위장으로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나는 에너지를 발산하지도 공급받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내보낸 것을 다시 삼키고 또 내보내고 또 삼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곳은 하나의 소우주가 아닐까? 나는 이속에서 에너지를 발산하지도 공급받지도 않는다. 에너지 효율이라는 관점에서 완벽하다. 이 속에서 바깥의 간섭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이곳에서 시작하고 이곳에서 끝나는 것이다. 마치 나의 먹고 싸는 대변과 곤죽처럼. 

 나의 유일한 적은 열역학 제 2법칙이다. 이 소우주를 망쳐버리는 이 운명을 나는 증오한다. 내가 아무리 붙잡으려고 애써도 결국 나를 감싸고 살리는 생명의 힘은 죄많은 열에너지가 되어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허공을 먼지처럼 떠돌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더 이상 삼킬 대변이 공급되지 않을 때 나의 목숨은 끊어질 것이다. 

 몸이란 무엇인가? 내 의식 속의 감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물체? 그렇다면 나의 손톱과 머리카락은 나의 몸이 아닌가? 그리고 테라리움에 내 신경을 이어놓으면 테라리움은 내 몸이 되는 것인가? 내가 보기에 몸은 단순히 감각과 연과된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테라리움은 그저 연약하고 늙은 육신을 누이는 곳이 아니다. 말 그대로 나의 테라리움은 나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이 속이 아니면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와 나의 별은 이렇게 남은 17년 동안 우주를 떠돌 것이다. 


<끝>



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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