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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인신족과 격돌





*본편 중간*

루갈은 뱀파이어다.

루갈은 창백해서 병약해 보였지만 단정하게 차려 입은 정장 아래로는 건장한 몸을 숨겼고 그 겉모습에 어울리는 것보다도 훨씬 강한 힘을 가졌다.

그래 봐야 소용이 없다고 루갈은 한탄하곤 했다. 루갈을 비롯한 뱀파이어 일족의 일부는 인신족(忍辰族, Cosmic nation of in)의 땅에서 가장 평범한 인류의 일원으로 취급되면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인신족의 파라탐이 물리 법칙을 조종하는 이곳에서는 새하얗게 타오르는 태양들이 한없이 푸른 하늘을 떠다녔고 땅은 굽이쳐 도시를 머금었다. 이 도시에서 루갈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루갈은 천공을 거니는 거대한 인신족의 동체가 둥실 떠오를 때면 언제든 자신보다도 작고 가벼워질 수 있는 그들의 권능에 헛된 저주를 퍼부었다. 루갈은 개, 늑대, 박쥐를 길러 번식시켜 애완동물로 파는 걸 소일거리로 삼았고, 인신족이 제공해주는 기본소득과 합쳐, 인간들이 팔거나 기계가 합성한 피를 마시고, 공장에서 찍어낸 스테이크를 즐겨 먹었으며 갖가지 주색잡기에도 몰두했다. 넉살 좋은 루갈에겐 많은 친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인신족과 다른 강대한 종족들이 수시로 벌이는 전쟁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문득 루갈은 가게를 문 닫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빛의 폭압이 지배하는 지상과는 달리 지하엔 언제든 불만 줄이면 완벽한 어둠이 깃들었다. 루갈은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지하실 현관 너머에 있는 지하도로로 발을 옮겼다. 사위는 어두웠다.

인신족은 빛의 고위 종족들 중에서도 가장 극성인 축에 들었다. 인신족은 평소에도 챙이 달린 투구를 쓰고 다니는 이들이 많았는데, 투구 위에 붙어 있는 창날을 중심으로 한 쌍의 우윳빛 뿔 사이에 다른 신족들 보다 하나 더 많은 파라탐 차크라가 맺혔다. 파라탐은 초월적인 빛이니 인신족의 위세는 그토록 대단했다.

루갈은 빛과는 뱀파이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타오르는 빛살 아래 나간다고 해서 뱀파이어가 타죽는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빛이 권능을 약하게 할 뿐이었다. 루갈은 지하도로에 듬성듬성 켜있는 희미한 가스등 불빛조차 꺼버리고 싶었지만 이 한적한 길에는 수많은 종족들이 오고 갔기에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고 싶지 않았다.

지하도로에 붉은 빛 대신 푸른 빛이 감돌았다. 명목상의 밤이 지상에 펼쳐졌다는 뜻이었지만 인신족은 완전한 어둠을 지상에 결코 허하지 않았다. 인간에게 인신족이 주는 밤은 충분히 어두웠지만 뱀파이어인 루갈에겐 아니었다.

한 여인의 살내음이 끼쳐왔다. 루갈은 뱀파이어답게 후각이 좋았다. 루갈은 그쪽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껏 멋을 낸 젊은 여인이 하이힐로 바닥을 두드리면서 걸어 왔다. 여인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중이었다. 여인에게선 삶의 아무런 무게도 고민도 없는 이 땅 특유의 가벼운 발랄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불로불사하면서 살다가 언제든 원하면 안락사를 한 뒤 인신족의 황천상제 하늘인간 운능천이 주도하는 명부에서 새로운 삶을 살거나 하면 되는 일이었고 기억은 그때 가서 조작하면 되는 일이었다.

루갈은 여인의 정보를 훑었다. 아무런 위험도 루갈에게 줄 수 없는 여자였다. 루갈의 강건한 근육이 연미복 아래서 꿈틀거렸다.

루갈이 한순간에 여자 바로 앞에 바짝 붙었다.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루갈은 송곳니를 여자의 우윳빛 목덜미에 꽂아 넣으려 했다. 이곳에 적용되는 인신족의 법은 뱀파이어가 여자를 죽여도 밝은 독방에 오랫동안 가두고 피를 주지 않은 만찬으로 루갈을 대하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든지 여자를 부활시킬 수 있는 인신족의 힘 앞에 루갈은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걸 느꼈다. 루갈은 모험을 하기로 했다. 한순간의 피 맛으로 뱀파이어의 본능을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억겁의 불행과 고통은 참을 수 있을 것으로 느껴졌다. 끊임없이 음미하여 피를 직접 빠는 감각을 되새겨 볼 수 있다면 감옥에서의 날들은 지루하지만은 않을 거라고 루갈은 예상했다.

그때였다.

마침 그 지하도로 너머 하늘을 날던 무술인간(武術因間) 베나베스라는 극초인간이 한달음에 공간이동으로 움직여 평범한 사람의 체격이 된 채 강림했다. 베나베스는 일격에 루갈을 날려 반대편 벽으로 날아가게 했고 다시 다가가 루갈을 붙잡아 바닥에 눕혔다.

집단의식으로 감각과 정서를 공유하는 인신족의 전체 의지가 베나베스의 억센 손길을 통해 자신을 찍어 누르는 것이 느껴져 루갈은 애통해졌다.

베나베스가 말했다.

“이곳은 합의하지 않은 언행은 죄가 될 수 있는 곳입니다. 상대와 화목한 게 예의인데 당신은 저 숙녀 분의 기분을 상하게 했군요.”

루갈이 말을 돌리면서 대답했다.

“이봐, 인신족, 그대들은 왜 거대한 힘이 있는데도 그걸 악덕에 쓰지 않는 것이지요? 악덕이라는 건 공허와 연결되어 마약처럼 짜릿한 법입니다. 어떻습니까? 날 악행에 부하로 써주시기 바랄 뿐이요.”

베나베스가 대답했다.

“어쩌면 전지전능이 인신족의 눈앞에 있을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대는 모르는 아이작 아시모프라는 SF 작가가 ‘최후의 해답(The Last Answer)’이라는 소설에서 말했듯, 전지전능하더라도 자신이 전지전능한지의 여부 그 자체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든 날 세상에서 지울 수 있는 신의 권능이 있다고 가정하니 겸손해할 밖에 없는 것이지요.”

“동문서답하지 마시오. 그렇더라도 당장 펼쳐진 것은 언제든 악을 마음대로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일 뿐이지 않습니까. 나와 같이 저 계집을 창녀로 대마계에 팔아넘기면 새로운 쾌락에 눈을 뜨게 될 거요.”

“고등하고 복잡하며 비정상적인데다 어려운 것이 대우주를 이상향으로 만드는 과업이기에 그것에 한 번 도전해 보겠다고 우리 인신족은 먼 길을 걷고 있을 뿐이요. 그러니 그대를 현행범으로 경찰에 넘길 뿐이요. 아 마침 오는군요. 보아하니 그대는 현재의 삶에 만족을 못 하는 듯하니 원한다면 안락사를 하고 보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망각하여 환생했다가 다시 기억을 찾는 방식을 선택하는 건 어떠한가요? 너무나 많은 곳들이 인신족의 통치 아래 있다고 우울하게 생각할 것은 없어요. 우리는 보다 난세였던 과거로 그대의 넋을 보낼 수도 있으니까요.”

“난 약간 지루한 거 빼곤 내 삶에 만족해요.”

“그렇담 경찰 분과 잘 말씀해 보시오. 난 내 갈 길을 가겠소.”

베나베스가 증발하듯 사라졌다. 경찰이 루갈에게 말했다.

“인신족 분에게 잡혔다 나왔군요. 일단 기록은 하고 훈방합니다.”



[201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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