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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편독과 필사

2016.03.05 18:0703.05

[파편] 편독과 필사

 오손은 천재임이 분명했다. 단언할 수 있는 건 내가 그녀의 글에 엄청난 전율을 느꼈기 때문이다. 시대를 앞서간 문체와, 뒤죽박죽인 듯 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배열된 서사, 그리고 매력적이고 황홀한 단어 선택까지.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을 받쳐주는 천재적인 발상.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그녀의 글 끝자락에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한 가지 문제점은 그녀는 창작의 고통에 대한 인내력이 현저할 정도로 떨어진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냐고? 그녀가 완결 낸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된다. 하하. 그렇다. 그녀는 작가조차 아닌, 그저 한 명의 천재일 뿐이다.
 작가에게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기 위해선 완결이라는 성과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내가 그녀를 망설임 없이 천재라고 부르는 이유는 봤기 때문이다. 내가…… 이 내가 그녀의 완성된 글을 말이다!
 이 모순은 어떤 고서점에 대해 알아야 해결할 수 있다. 나는 내 영혼의 친우를 찾기 위해 곧잘 고서점에 들르곤 했었는데, 그 고서점의 여주인이 추천하는 책이라며 어떤 책을 헐값에 떠넘겼다. 살구색 가죽표지에 「오손」이라고만 적혀 있는 심심한 외관의 책이었다. 친우는커녕 관심 가는 책조차 찾지 못해 허탈했던 나는 마지못해 그 책을 들고 귀가했다.
 별다른 기대도 하지 않고 책을 펴본 나는 그 자리에서 책에, 문장에, 글자에 흡수당했다. 그것은 생애 처음 겪어보는 쾌감이었으며, 카타르시스였다.
 뭐야. 이런 글을 쓰는 작가가 있었다고? 도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온 거야? 왜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유명해지지 않은 거냐고!
 다음 날 나는 그 고서점을 찾아가 「오손」의 작가가 쓴 다른 책은 없느냐고 물었다.
 
 "없어요."
 
 여주인은 상냥하게 웃으며 "그게 다예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실망을 감추지 않고 집으로 되돌아가 다시 「오손」을 손에 들었다. 책장을 한 장 넘기고는, 깜짝 놀랐다.
 백지였다.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고서점으로 달려갔다. 여주인은 여전히 상냥한 웃음을 품은 채 얼토당토않은 말을 내뱉었다. 뭐라고 그랬더라?
 
 "악마가 만든 책이거든요."
 
 내 표정에 떠오른 강렬한 물음표를 느꼈는지 여주인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이끌어서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말캉한 가슴의 촉감이 그대로 손에 묻어났다. 당황한 채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여주인의 힘이 예상보다도 훨씬 강했다. 얼굴이 뜨거워지고 심장 소리가 거슬리게 올라갈 즈음 나는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제가 만들었어요."
 
 손끝에서 어떠한 열기도, 고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잡힌 손목이 싸늘한 것 같다. 인간이 아닌, 인간을 닮은 무언가가 닿아있는 것 같은 불쾌함. 손목에서 시작된 감각은 척수를 타고 올라가 뇌를 싸늘하게 식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사람이 아닌 악마임을 인정할 수 있었다. 사람은 언제나 경험 앞에 무력하다.
 악마 여주인은 그 책에 대해 내게 설명해줬다.
 악마는 어느 날 한 여자가 고서점에 들어왔을 때 강한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악마는 그녀 몰래 그녀의 오른팔을 잘라 그 피부로 책을 제본해냈고, 그 표지에 그녀의 이름인 「오손」을 새겨넣었다. 그 책은 글자가 떠오르고 지워지는 마법의 책이 되었다.
 어떤 글자냐고? 오손이 쓸 소설들.
 어떤 마법이냐고? 그녀가 겪어야 할 모든 창작의 고통을 생략하는 마법.
 그렇게 책 「오손」이 만들어졌다. 그녀가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하면 「오손」에는 그녀가 고통 끝에 만들어낼 이야기가 써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녀가 천재이며, 작가가 아니며, 인내력이 부족하다고 확신하게 된 경위다.
 나는 한동안 그녀의 책에 매달려 필사했다. 이런 보물들이 그녀가 다른 상념을 시작함으로 인해 사라져버리다니 인류의 손실이며 나아가 전 세계의 손실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니 내 정상적이었던 삶은 크게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 대부분을 책상 앞에서 보내게 됐다.
 오손이라는 천재는 정말이지 끈기가 없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글자들의 향연에 화가 나서 악마에게 묻고 물어 직접 오손을 찾아가기까지 했다고 고백하면 당신은 놀라겠는가? 놀라면 안 된다. 나는 그녀의 완벽한 글에 매료되었다. 이젠 다른 글을 보면 헛웃음만 나오고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내 글? 펜을 꺾은 지가 언제인데. 그녀의 넘치는 재능에 한껏 절망하고 나니 내 글은 낙서 쪼가리도 되지 못하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그런데 절망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찾아간 그녀의 집에는 술에 인사불성이 된 외팔 여자밖에 없었다. 그녀가 오손 본인임을 깨달아버렸다. 그리고 펜 대신 술병이 들린 그녀의 왼팔을 눈치채버렸다. 그것은 두 번째로 찾아온 절망이었다.
 사람을 깔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그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노력을 하지 않는 거야? 그런 글을 쓸 줄 알면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웃기지 마. 웃기지 말라고.
 나는 너무나도 화가 났다. 그녀의 작품 아닌 작품에 경의와 존경을 품었던 마음이 짓밟혀 산산이 조각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나의 책상으로 되돌아와 펜을 잡고 무작정 아무 글이나 적어댔다. 그랬더니 꽤 괜찮은 글이, 아니 너무나도 멋진 글이 나오지 뭔가? 나는 「오손」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뭘까. 그녀의 글을 필사하던 중에 필력이 늘어난 건가?
 한 번 그렇게 생각하자 상상은 덧없이 부풀어 올랐다.
 그래. 나도 이젠 그런 글을 쓸 수 있어. 작가도 아닌 그녀의 글에 내가 펜을 꺾을 이유가 없잖아? 그건 정말이지 어리석은 짓이야. 그녀의 글을 찬양하는 것도, 그녀를 존경하는 것도.
 나는 결심하고 지금까지 그녀의 소설을 필사했던 모든 원고지를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악마가 만들어 낸 「오손」이라는 책도 찢어서 태워버렸다. 활활 타오르더니 재조차 남지 않고 바람 한 줌에 날아가 버렸다.
 
 
 
 …….
 그래서 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나는 다음 날 아침, 당연하게도 말이다, 매우 후회했다. 도대체 홧김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정말 미친 짓이라고밖엔 표현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 마음을 삼키고 책상에 앉아 어제 못다 한 글을 쓰려고 했다. 머리가 원고지의 여백처럼 새하얘지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떠올리라고, 문장을!
 나는 써지지 않는 글과 씨름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발걸음은 조급하게 오손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이게 다 그 여자 때문이야. 애꿎은 분노의 화살을 그녀에게로 향했지만, 애석하게도 화살을 맞아줄 표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의 남은 왼손을 잘라, 악마에게 가져다주려고 했는데…….
 밤새도록 불에 타올랐는지 그녀의 집은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수군대며 모여있는 마을 사람들의 말로는 저택 안에서 어떤 여자가 갈기갈기 찢어진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토막 난 시체에서 유일하게 오른팔만이 없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당연하다. 그녀의 오른팔은 내가 찢어버렸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발걸음의 방향을 바꾸었다. 터벅터벅, 영혼 없이 걸음을 옮기며 머릿속에는 한 여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고서점의 여주인. 그녀의 상냥한 웃음과 뛰지 않는 심장을 떠올렸다.
 과연 그녀는 내 오른팔에 충동을 느껴줄까?
 걸어가는 동안 나는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했다.
 
 
 
 <END>
 2016.03.04~2016.03.05
 EP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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