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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끈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이러한 생각을 해본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많지도 않을 것이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는 머리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적당히 비싼 머리끈은 탄성이 높아 오래가고 잘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다. 조그맣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긴 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다. 뭇 여자들이 살인이라는 취미에 눈을 뜨게 된 아마조 행성에서의 살인사건은 그 살인도구가 백 개의 머리끈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조사 결과 그 머리끈은 티타늄과 합성수지를 특수 가공 처리한 주문제작 머리끈이었음이 밝혀졌다. 불행하게도 피해자가 티타늄 알레르기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또 머리끈이 그 자체로 사용자에게 살해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 이유 또한 용도만큼이나 명백하다. 머리끈을 보라. 올가미처럼 생기지 않았는가. 이 원형의 머리끈이라는 것은 보통 긴 털을, 특히 머리카락을ㅡ그래서 머리끈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최초에 수염을 묶었다면 수염끈, 가슴털을 묶었다면 가슴끈이라 불렸을 수도 있다. 굳이 머리끈이 된 이유는 인간의 털 중 머리털의 성장 속도가 가장 빠르기 때문이었다ㅡ 한데 모아 묶어두는 역할을 한다. 탄력이 강할수록 그 머리끈은 머리카락을 세게 틀어쥐고 있게 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머리카락에 연결된 두피마저 잡아당기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겉 피부 조직 중에서도 두피는 상당히 연약한 편에 속한다. 인간의 뼈 중에 두개골이 가장 단단한 것이라는 사실과는 대비되는, 제작자의 넌센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두개골이 단단하니 그 겉껍질은 약해도 된다는 멍청한 생각 끝에 나온 결과물일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 
어쨌든, 약한 조직이 계속적으로 물리적인 압력 하에 있다보면 통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두통이 오는 것이다. 하지만 두통의 원인이 바로 그 작고 연약한 빌어먹을 머리끈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대개 사람들은 눈이 앞에 달려있어서 모든 문제도 눈 앞에 있으리라 지레 짐작하기 때문이다.
섬세하기로 유명한 리마마타 외계인들은 이 재앙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앞에 두 개 그리고 뒤통수에 한 개 그리고 양 손 끝에 한 개씩 눈이 더 달려 있었기 때문에 머리끈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손에 달려있는 눈들 때문에 제대로 된 노동을 할 수 없었던 이 유순하고 착한 외계인들은 몇 세기만에 멸종하고 말았다.
이 심각한 머리끈의 오류는 흔히 어떤 자가 엄청나게 분노했거나 갑작스런 살해 욕구를 느끼거나 혹은 놀라운 사무처리능력을 보여주지만 그 원인을 알 수 없을 때 흔히 쓰이는 표현이었다. 이 작은 머리끈의 효과를 보고싶다면 스스로에게 실험해볼 것도 없이ㅡ절대 따라하지 마시오!!ㅡ 작은 흑갈색 행성 출신의 요키 외계인의 양해를 구해 그들의 머리털을 매어보길 바란다. 절대로 머리끈이라는 단어는 꺼내지 말되, 살살 구슬려서 다가오게 해야만 한다. 지구에서는 요크셔테리어라 불리는 그 작고 귀여운 외계인들이 머리끈이 묶이는 즉시 얼마나 발광하는지 한 지구인은 이렇게 기록했다.


'썩을... 지랄견.'


이후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자리를 빌어 그 지구인에게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요키 외계인의 폭력성은 온 은하에 익히 알려진 바이다.


사실상 지구에서 고문기구로서의 머리끈이 발명되고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아 태양계 부근의 50광년 거리에 있던 대부분의 은하에서 폭력 사건, 살해 사건이 폭증했고, 그중 절대다수의 원인이 머리끈으로 밝혀졌다. 은하들은 유래없는 연대를 이루어 머리를 묶을 정도의 머리칼을 지닌 여성 및 머리가 긴 남성들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고 머리끈 박멸 운동을 벌였다.  
허나 재수없게도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행성간 택시기사들의 파업, 이동형 슈퍼마켓 점주들의 시위와 겹쳐 이 혼란은 몇 배나 가중되었다. 당시 초공간우주선을 타고 여행하던 대니 그린트 또한 그 불행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는데, 일주일 전 아주 잠깐 들린 정류장 호랑이 베이에서 화성산 홍차를 사다가 덤으로 초합금 머리끈을 덜컥 받은 것이 그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들이 42번째 평행우주의 42번째 지구에 들렀을 때, 어느 공항에서나 그렇듯 다음 우주선이 연착되었다. 슈퍼마켓 점주들은 공항이 있는 대륙 반대편에서 시위를 벌였고 택시기사들은 파업을 선언한 뒤 할일이 없어 공항의자를 점령하고 노숙하는 중이었다. 대니 그린트는 근처에 앉아있다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일부가 되었다. 영국 버스기사의 단호함에 대해 이야기하던 대니는 결국 자신의 비행기가 착륙해서 다시 이륙할 때까지도 공항을 떠나지 못하고 말았다. 머리끈 박멸 운동 본부는 이제야 막 41번째 지구에서의 머리끈 소탕 작전을 완료한 참이었는데, 42번째 지구 성층권에 와서야 급한 전갈을 받았다.
42번째 지구 주변에 대형 우주선들이 정박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우주선들에는 머.리.자.라는 마크가 큼지막하게 붙어있었는데, 세 대형 마트들의 머릿글자를 딴 단어였다. 머천다이즈-올, 리마트, 자플러스. 그들은 바로 그 시점에 슈퍼마켓 점주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지구 반대편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주의 불연속적인 확률에 따라 머리끈을 지키려는 연합의 이름 또한 공교롭게도 머.리.자.였다. '머리묶을 자유를'이라는 구호 아래 하나가 된 이들은 머리끈 박멸 운동 본부의 가장 큰 적이었는데, 이들은 고가의 머리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부자들로 구성되어 있어 폭력적인 단체로도 유명했다. 그들의 우주선에는 초강력 탄성 머리끈을 몇천개씩 지상에 살포할 수 있는 최신 산탄포도 있었다. 결국 머리끈 박멸 운동 본부는 42번째 지구를 머리끈의 재앙으로부터 구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행성파괴용 광선 준비해."

빛이 그들을 자유케 하리라. 본부장이 머리에 성호를 그었다.



-



초단편 혹은 엽편입니다. 분량상 프롤로그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네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작가 더글라스 애덤스에게 바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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