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아내

2011.11.14 13:4611.14

남자가 눈을 떴을 때, 맨 처음 본 것은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는 먹구름이었다. 먹구름은 변화무쌍하게 그 형상을 바꿔가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거센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귀에서는 웽웽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게 무슨 소린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실눈을 뜨고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바닥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등과 팔다리에서 딱딱함과 한기가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마치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둔중한 통증이 뒤통수를 파고들었다. 남자는 양손으로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통증은 이삼초를 주기로 둑, 둑, 하며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누운 채로 몸을 이리저리 비틀던 남자는 자신의 머리맡에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낯선 여자였다. 귀에서 웽웽거리던 소리가 서서히 그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로 변해갔다.
“여긴…….”
남자의 입에서 마른 목소리가 나왔다.
여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누구……?”
남자가 물었다.
여자는 잠시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내려보다가, 갑자기 두 손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잡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여보.”
여보? 남자는 당황했다.
“무슨?”
“여보……. 나에요. 여보.”
남자는 눈만 끔뻑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신 부인이잖아요. 모르겠어요?”
여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남자는 그제야 자신이 왜 거기에 누워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아내라는 여자뿐만 아니라, 그 자신마저도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난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잡고 몸을 다시 일으켰다. 너무 급하게 움직인 탓인지, 이번에는 앞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다. 마치 두개골 안에서 폭탄이 터지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남자는 짧은 비명을 토해내고는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여보, 여보, 하는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도 다시 웽웽거리는 소리로 바뀌어갔다.
여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달려갔다. 남자는 여자가 달려간 방향으로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자동차 한 대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춰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여자가 사고차량의 운전석 문을 여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남자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살구색 갓을 씌운 스탠드가 불이 꺼진 방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남자는 머리가 조이는 것 같은 느낌에 손으로 머리를 더듬었다. 머리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 때 방문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와 침대 옆에 놓인 작은 등받이 의자에 앉았다. 걱정이 가득한 여자의 얼굴이 스탠드 불빛에 드러났다. 남자는 그녀가 아까 봤던 그 낯선 여자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여기가 어딥니까?”
남자가 마른기침을 섞어가며 물었다.
“당신 별장이잖아요.”
스탠드 불빛이 여자의 촉촉해진 두 눈을 비추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한참 올려보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별장?”
여자는 남자가 방 안을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방에 불을 켰다. 남자는 고개를 살짝 들어 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소라색 벽지도, 여자가 앉아 있던 의자와 한 세트로 보이는 작은 화장대도, 창문을 가리고 있는 나무 블라인드도, 침대 정면 벽에 걸려 있는 풍경화 두 점도 모두 낯설기만 했다.
“가로수 길이 마음에 든다고, 당신이 작년에 사들였잖아요. 기억 안 나요?”
여자가 간절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전혀……, 아무 것도 기억이…….”
“아무 것도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여자가 남자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물었다.
“아무 것도…….”
남자가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난, 누굽니까?”

내 이름은 정수환. 나이는 마흔 둘.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친다. 삼 년 전에 4살 연하의 김지영과 선을 봐서 결혼했지만, 아직 아이는 없다. 취미는 야구와 등산이다. 집은 서울이지만 가끔 아내와 함께 이곳 별장으로 내려와서 며칠 씩 쉬다 가곤 한다, 고 지영이 얘기했다.
수환은 지영의 도움으로 몸을 일으켜 침대에 비스듬히 앉았다. 통증이 많이 가라앉아서 이제는 좀 견딜 만 했다.
“여보, 기억이 좀 나요?
지영이 수환의 바싹 마른 입술에 물 잔을 갖다 대며 물었다.
수환이 물을 한 모금 삼키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모든 게 낯설게만 들릴 뿐이오.”
지영이 다시 흐느끼지 시작했다.
수환은 한동안 입을 닫고 이불 위에 뒤집어 놓은 자기 손바닥만 쳐다보았다. 마치 손바닥에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어떤 중요한 단서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다 문득 이렇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네?”
지영이 눈물을 훔치며 되물었다.
“사고라도 난 겁니까?”
“네…….” 지영은 손에 든 물 잔을 엄지와 검지로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차로 가로수를 들이 받았어요.”
“가로수…….”
수환은 길바닥에 누워 있을 때 보았던 가로수를 들이받은 차를 떠올렸다.
“내가 잠깐 조는 사이에 당신도 졸음운전을 한 것 같아요.”
“가로수에 박혀 있던 그 차…….”
“네, 여보. 당신 차에요. 생각나는 거 있어요?”
지영이 다급하게 물었다.
“없소…….”
수환이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 작은 신음을 토했다.
“괜찮아요?”
“머리가…….”
수환이 머리를 감싸 쥐고 말끝을 흐렸다.
“여보, 잠시만 기다려요. 진통제를 가져올게요.”
지영은 의자에서 일어나 서둘러 방문으로 향했다.
“잠깐.”
수환이 식은땀을 흘리며 지영을 불러 세웠다.
지영이 방문 손잡이를 잡은 채로 뒤를 돌아봤다.
“왜 날 여기로 데려온 거요?”
지영은 놀란 얼굴로 수환을 볼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왜 병원으로 가지 않고 이리로 온 거냐고요?”
“그…… 그건.” 지영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여기서 병원이 너무 멀어서요. 사고 난 차를 몰고 가다가 완전히 퍼져버릴 지도 모르고. 그래서……, 여기로 와서 구급차를 부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요.”
수환은 당황한 표정의 지영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
“구급차가 지금 오는 중이란 말이요?”
“네, 그럼요.”
지영은 대답을 하고, 서둘러 방문을 열고 나갔다.  
수환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어서 이 상황을 깊게 따져볼 겨를이 없었다. 수환은 천천히 베개에 머리를 붙이고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붉은 반점 몇 개가 통증에 맞춰 점멸하고 있었다.

지영이 가져온 진통제를 먹고 한 시간 쯤 침대에 누워 있던 수환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섰다. 아직 통증이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누워만 있을 수는 없었다. 수환이 창문으로 다가가 줄을 당겨 블라인드를 위로 올렸다. 창문 바로 앞에는 사고 난 그 차가 세워져 있었다. 차 뒤로는 떡갈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숲이 보였고, 그 너머로는 산들이 병풍처럼 숲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강한 바람이 나뭇가지들을 사정없이 뒤 흔들고 있었다. 왼쪽 볼을 창문에 바짝 붙이자, 숲에서 별장으로 이어진 진입로가 보였다. 수환이 그렇게 서서 진입로 끝을 바라보고 있을 때 지영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먹을 걸 좀 만들었어요.”
지영이 쟁반을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지만 수환은 지영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창문에 붙어 서서 진입로 끝만 바라보았다.
“여보. 이거 당신이 좋아하는 전복죽…….”
지영이 숟가락으로 끓여온 죽을 휘저어 식히며 물었다.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어.”
수환이 창밖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죽을 휘젓던 숟가락이 멈추었다.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을 리가 없잖소.”
수환이 화난 얼굴로 지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보.”
“왜 날 속이는 거요?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수환이 방을 가로지르며 언성을 높였다.
“여보, 제발…….”
지영이 울먹이며 애원하는 투로 말했다.
“나는 당신이 전혀 기억나지…….”
수환은 그제야 화장대 위에 놓여 진 작은 액자를 보았다. 액자에 든 사진에는 두 남녀가 이국적인 해변을 배경으로 다정하게 붙어 서 있었다. 수환은 액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화장대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본 후에 사진 속의 두 남녀가 자신과 그의 아내라고 밝힌, 그를 이리로 데려와 붕대를 감아주고 죽을 끓여온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아파왔다. 수환은 액자를 손에서 떨어뜨리고 화장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에서 희미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여보!”
지영이 넘어지려는 수환을 부축해서 침대로 옮기려 했다.
“잠깐, 잠깐.”
수환의 머릿속에 사진 속의 그 바다가 떠올랐다. 에메랄드 빛 바다와 새하얗고 부드러운 모래, 그리고 야자수와 살찐 갈매기들. 그래, 그곳은 발리였다.
“왜 그래요?”
지영이 물었다.
“사진 속 바다가 기억 나…….” 수환이 말했다. “발리……. 맞아. 우리는 신혼여행 중이었지. 당신이야, 당신이었어.”
지영이 수환의 양팔을 잡고 눈을 마주보며 물었다.
“날 알아보겠어요?”
“오, 맙소사, 당신을 잊어버리다니. 그런데…….”
“그런데요?”
수환은 인상을 쓰고 지영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누군지, 그리고 우리가 왜 발리에 갔는지는 알겠는데, 다른 건 여전히 생각나지 않아.”
“그래도 다행이네요.”
지영은 수환을 끌어안았다.
수환이 지영을 천천히 떼어내며 물었다.
“구급차는 어떻게 된 거지?”
지영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액자를 주워  
들었다.
“당신 내게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아. 그게 뭐지?”
“사실은…….” 지영이 액자 속 사진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 졸음운전을 한 게 아니에요.”
“그럼?”
“당신, 사람을 치었어요.”
“뭐?”
지영은 뭔가에 홀린 것 같은 표정으로 당시 상황을 설명해 나갔다.
“당신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 여자가 갑자기 도로로 튀어 나온 거였어요. 당신은 어쩔 수 없었어요. 그리고 차가 여자를 친 후에 균형을 잃고 가로수를 들이받았죠.”
수환은 아무 말이 없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람을 치었다고……?”
지영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수환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여보. 아무도 못 봤어요.”
“당신, 그게 무슨 말이야?”
수환이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지영이 수환을 달래는 투로 말했다.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만약 내가 정말 사고를 냈다면 경찰에 신고를 해야…….”
“오, 안 돼요, 여보. 이런 실수로 당신 인생을 망칠 순 없어요. 당신이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그래도…….”
“그리고 당신은 기억도 못하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수환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럼 이제 어쩌지?”
수환이 멍한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물었다.
“걱정 말아요. 여보.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일단 당신은 좀 더 쉬어야 해요.”
지영은 수환이 침대에 눕는 것을 도와주고 방에서 나갔다.
침대에 누운 수환은 가슴 한편에서 불편한 감정이 느껴졌지만 그게 죄책감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수환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지영은 고무장갑을 끼고 사고 난 차에 뭍은 핏자국을 지우고 있었다. 옆에 놓인 고무 통에는 피가 섞인 분홍색 세제 거품이 보글거리고 있었다. 지영이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왜 나왔어요?”
지영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옷소매로 훔치며 물었다.
수환은 사고 난 차를 바라보았다. 가로수를 들이 받아 앞 범퍼와 보닛이 안으로 푹 찌그러져 있었다.
“피해자는 어떻게 됐지?”
수환이 차를 이곳저곳 살펴보며 물었다.
지영이 고무장갑을 벗으며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다음, 조용히 말했다.
“죽었어요.”
“그럼 시체는?”
“차에 치어 도로 난간 밖으로 떨어졌어요.”
“죽은 건 확인했어?”
“그건 아니지만 분명…….”
수환이 지영의 말을 끊었다.
“아무래도, 사고 현장에 가봐야 할 것 같아.”
“그건 위험해요.”
“알아. 하지만 아직 피해자가 살아 있을 지도 몰라. 그럼 아직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
“아니에요. 죽은 게 틀림없어요. 차에 정면으로 치인데다 도로난간 밖으로 떨어졌으니 어떻게 살아남겠어요?”
“그렇다 해도 사고 현장에 가봐야 돼. 사고 현장이 사진처럼 다시 기억을 되찾아줄 지도 모르니까.”
“여보. 날 믿어야 해요.”
지영이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지금은 너무 혼란스러워.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뭔가 확실한 게 필요한 거 같아.”
수환이 양 손바닥을 펴 보이며 지영을 내려다봤다. 지영은 잠시 망설이다 이렇게 말했다.
“좋아요. 그럼 세차 끝내고 같이 가보기로 해요.”
지영은 다시 고무장갑을 끼고 쪼그리고 앉아 스펀지로 차체를 박박 문질렀다.

바람이 강해지고 먹구름은 더 빨리 흘러가고 있었다. 곧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차를 가져가는 모험은 하지 않기로 했다. 두 사람은 20분을 걸어서 사고 현장인 가로수 길에 도착했다. 한쪽에는 가로수가 길게 줄지어 서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깎아 내린 것 같은 경사진 숲으로 차가 추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가드레일이 세워져 있었다.
날씨 때문인지 가로수 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가로수가 바람을 따라 한 방향으로 거친 잎사귀 소리를 내면서 기울이고 있었다.
“여기예요.”
지영이 코트 옷깃을 세우며 말했다.
“저거군.”
수환이 아스팔트 위에 난 새카만 타이어 자국을 발견했다. 기다란 타이어 자국 끝에 가로수 나무 하나가 버티고 서 있었다. 밑동 주위에 나뭇잎들이 떨어져 있었다.
지영은 수환을 가드레일 쪽으로 데려갔다. 수환이 가드레일 아래를 내려다 봤다. 허리를 숙이자 머리에 통증이 왔지만, 별 다른 기억이 떠오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경사로는 거의 90도에 가까웠고, 바닥까지 대략 20미터가 넘어보였다. 아래는 숲이었지만 나무가 듬성듬성해서 떨어지면 살아남기 힘든 높이였다.
“뭔가 생각나는 게 있어요?”
지영이 수환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아니.”
수환이 가드레일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내려가 봐야겠어.”
“어디를요?”
“밑에.”
“안 돼요.”
지영이 수환의 팔을 잡고 있는 손이 힘을 주며 말했다.
“피해자가 보이지 않아. 확인해봐야겠어.”
“어떻게 내려가려고요?”
“내려가는 곳이 있을 거야.”
수환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가로수 길 끝에 숲으로 내려가는 덜 경사진 곳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잠시 서 있었다. 강한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제 마음대로 뒤 흔들었다. 지영이 손목에 차고 있던 고무줄로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뒤로 모아 묶으며 말했다.
“꼭 내려가 봐야겠어요?”
수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가로수 길 끝까지 걸어가서 가드레일을 넘어갈 때, 하늘에서는 먹구름들이 희미하게 으르렁거렸다.
경사로는 내려갈수록 더욱 완만해졌다. 하지만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라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조심해야했다. 두 사람은 나무에서 나무로 이동하며 지그재그로 천천히 내려갔다.
경사로가 끝나고 평평한 숲이 나타났다. 수환은 고개를 들어 자신이 서 있던 가드레일 쪽을 확인하며 나무 사이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했다.
피해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은 흙바닥에서 핏자국을 발견했다.
“여길 봐.”
수환이 나무를 가리키며 지영을 불렀다.
지영은 나무에도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 보통 성인의 어깨 높이 정도 되는 위치였다.
“그리고 여기도.”
수환이 다른 나무를 가리켰다. 그 나무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살아 있었나 봐.”
수환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영은 노란 토끼 눈으로 수환을 보고 서 있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여기 바위에도 있어.”
수환이 말했다.
“숲으로 들어갔나 봐요.”
지영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숲을 둘러보며 귓속말을 하듯 소곤거렸다.
두 사람은 핏자국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숲 안에는 눅눅한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영이 수환의 옷소매를 잡았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여기.” 수환은 지영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쌓인 낙엽에 떨어진 핏자국을 발견하고 말을 이었다. “이리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 거지?”
“모르겠어요.”
나무 사이로 파고 든 한 줄기 바람이 두 사람이 서 있는 곳 근처의 낙엽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가 아무렇게나 흩뿌리고 지나갔다.  
“곧 날이 저물 거예요.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와요.”
지영이 코트 호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고 보챘다.
수환은 계속 핏자국을 따라가 보고 싶었지만 숲이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다시 경사로를 올라와 가드레일을 넘어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이 현관문을 열고 막 별장에 들어서자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수환이 창가에 서서 말했다. “비가 핏자국을 모두 지워버리겠어.”
“여보, 뭔가 새로 생각나는 건 없어요?”
지영이 벗은 코트를 소파 등받이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없어.”
지영이 수환에게 다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어쩌지?”
“뭘요?”
“자수해야 할까?”
“지금 기억도 못 하잖아요.”
“하지만…….”
“내일 다시 한 번 숲으로 내려가 봐요.”
“그 여자가 살아 있어.”
수환이 지영의 팔을 몸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여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지영이 단호한 투로 말했다.
수환은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금세 장대비가 되어 있었다. 숲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둡고 비오는 저 숲 속을 누군가가 피를 흘리면서 기어 다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수환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먹을 걸 좀 만들어야겠어요. 일단 뭘 좀 먹고 같이 생각해보도록 해요.”
지영은 주방으로 재빨리 걸어가며 말했다.
거실에 혼자 남겨진 수환은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소파 앞에 있는 낮은 유리테이블 위에 놓여 진 검은 무선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장대비가 지붕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환은 그 소리가 자신에게 빨리 전화기를 집어 들라고 재촉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늘에서는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많은 비가 쏟아져 내렸고, 천둥과 번개가 시차를 두고 쿵쾅거리며 번쩍였다. 푸른 번갯불에 순간 어둠에 둘러싸여 있던 별장과 그 주변 숲의 모습이 드러났다. 별장 진입로에 검은 형체가 하나 서 있었다.
검은 형체는 마치 좀비처럼 삐딱한 자세로 다리를 쩔뚝거리며 느릿느릿 진입로로 걸어왔다. 검은 형체가 창문 앞에 가서 서자, 창문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검은 형체를 비추었다. 그것은 비에 흠뻑 젖은 여자였다. 여자의 얼굴은 온통 긁힌 상처투성이였고, 목은 장마철의 두꺼비처럼 심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입에서 흐르는 피는 비와 섞여 턱을 지나 목으로 흘러내리고 있었고, 풍성해보였을지도 모를 긴 생머리는 갯바위에 들러붙은 해초처럼 머리와 얼굴과 목에 척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눈은 부어서 거의 감겨 있었고, 다른 눈은 비 때문에 실눈을 뜨고 있었다.
여자의 눈알이 좌우로 움직였다. 그 창으로는 거실 삼분의 일과 주방 전면이 보였다.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는 지영의 모습이 여자의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창가를 떠나 별장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사고 난 차가 세워져 있었다. 여자는 잠시 차를 살펴본 다음에 별장 뒤에 나 있는 나무문으로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여자가 나무문 손잡이를 천천히 돌렸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여자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 문은 주방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영은 바글바글 끓고 있는 냄비 앞에서 숟가락으로 간을 보고 있었다. 여자의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요리하는데 정신이 팔린 지영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여자는 식기건조대 옆에 놓인 칼꽂이에서 제일 커다란 식칼을 슥 꺼내들었다. 칼날에 여자의 부어올라 감긴 눈과 핏발이 선 또 다른 눈이 비쳤다. 여자는 식칼 손잡이를 꽉 거머쥐고 지영의 등 뒤로 비틀비틀 다가갔다.

수환은 거실 소파에 앉아 손에 든 무선전화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1, 1, 2 숫자 버튼까지는 눌렀지만 통화버튼은 도저히 누를 수가 없었다. 뭔가 확실한 게 필요했다.
수환은 무선전화기를 테이블 위에 도로 올려놓고 소파에서 일어나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현관 앞에 세워진 우산을 하나 펴 들고 사고 난 차가 주차된 별장 뒤편으로 걸어갔다. 처음에는 어두워서 차의 형체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의 찌그러진 앞부분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수환은 차로 다가갔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수환은 차에 올라타 실내등을 켰다. 무릎이 대시보드에 닿을 정도로 의자가 앞으로 바싹 당겨져 있었다. 수환은 의자를 자신의 몸에 맞게 조절하고 두 손으로 핸들을 잡았다. 그리고 차의 실내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핸들의 그립감과 차의 실내 모습은 낯설기만 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수환은 구슬만한 빗방울들이 앞창을 사정없이 두들기는 것을 보고 있다가 문득 운전석 쪽 앞창에 금이 가 있는 것을 보았다. 한동안 금이 간 모양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수환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오른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급하게 더듬었다. 이마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그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수환은 차에서 내려 다시 현관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만약 내가 운전했다면 나무를 들이받았을 때 뒤통수가 아닌 이마가 깨져야 말이 되는 건데……, 설마?’
수환이 현관문을 열고 다시 거실로 들어서자 주방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주방으로 들어간 지영은 주방 입구에 걸린 분홍색 앞치마를 목에 걸고 허리 뒤를 묶었다. 그리고 요리를 하기 전에 식탁 맞은편에 걸린 거울을 보며 이마에 흘러내린 앞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이마에 난 상처가 보이지 않도록.
지영은 밥솥의 남은 밥을 모두 버리고 새로 쌀을 씻어서 밥을 안쳤다. 그리고 멸치 끓인 물에 된장을 풀고 손질한 꽃게를 집어넣었다.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꽃게 된장이었다.
지영은 숟가락으로 찌개의 간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에는 식칼을 든 만신창이가 된 여자가 빗방울을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머리 위로 식칼을 높이 쳐들었다. 수환이 별장 뒤편에 대 놓은 사고 난 차를 살펴본 후 다시 현관 앞으로 돌아와 현관문 손잡이 막 돌리는 순간이었다.
지영은 냄비뚜껑에 비친 여자의 모습을 보고 가까스로 몸을 돌려 식칼을 피할 수 있었다. 식칼은 조리대 위에 내리꽂혔다. 지영은 조리대 앞에 주저앉아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넘어질 뻔했던 여자는 겨우 중심을 잡고 조리대에 박힌 식칼을 다시 뽑아 들었다.
수환은 재빨리 주방으로 뛰어 들어가 여자의 식칼을 쥔 손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여자를 식탁 쪽으로 거세게 던져버렸다. 여자는 식탁 상판에 머리를 부딪치고 그대로 주방 바닥에 쓰러졌다. 여자의 손에서 떨어진 식칼은 냉장고 문에 부딪힌 다음에 팽글팽글 돌며 주방 구석으로 떨어졌다.
“괜찮아?”
수환이 지영에게 물었다.
지영은 조리대 밑에 쭈그리고 앉아 바닥에 쓰러진 여자를 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여자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주, 죽었어요?”
지영이 물었다.
수환이 바닥에 쓰러진 여자를 뒤집어서 맥을 짚고, 숨을 쉬는 지 확인했다.
“숨이 약하긴 한데 아직 살아 있어.”
수환이 말했다.
“그……, 그 여자예요.”    
지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그 여자라고요. 당신이 친…….”
수환은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여자의 몸은 끔찍한 상태였다. 특히 목과 왼팔이 심해보였다. 목은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왼팔은 기이한 형태로 뒤틀려 있었다. 하지만 수환은 빨리 병원으로 옮긴다면 여자를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지영을 돌아봤다.
지영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의 모습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앞머리가 제 멋대로 흐트러지는 바람에 이마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수환은 지영의 이마에 피멍이 든 커다란 혹이 나 있는 것을 보았다.
“왜 그래요?”
지영이 수환의 눈빛이 변한 것을 보고 물었다.
“당신이군.”
수환이 차갑게 말했다.
“뭐, 뭐가요?”
“당신이 운전했어.”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이 여자, 당신이 친 거라고.”
“여보?”
“방금 운전석 앞창에 금이 가 있는 걸 보고 왔어. 내가 운전을 했다면 내 이마가 다쳤어야 하지. 안 그래? 그런데 내 대신 당신 이마에 상처가 있어. 이걸 어떻게 설명할 거지?”
“…….”
“왜 나한테 덮어씌운 거지? 왜?”
지영은 바닥에 쓰러진 만신창이의 여자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여자가 몸을 꿈틀거리더니 입에서 울컥 피가 쏟았다. 그리고 한쪽 눈을 뜨고 수환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장 이 여자부터 살려야 돼.”
수환이 거실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그리고 소파 앞 테이블 위에 올려 진 무선전화기를 집어 들어 1, 1, 9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가지 않았다. 다시 눌러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밖에서 쾅, 하는 굉음이 들렸다. 천둥소리였다.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던 수환은 다시 주방으로 뛰어갔다.
“당신 핸드폰 어디 있어?”
지영은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수환은 지영의 몸을 더듬어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씨팔!”
수환은 다시 거실로 나가 지영의 코트 호주머니를 뒤졌지만 그곳에도 핸드폰은 없었다. 코트를 든 채 그 자리에 잠시 멈춰서 있던 수환은 코트를 바닥에 내 던지고 방으로 뛰어갔다.
고정되어있던 지영의 눈동자가 거실을 가로지르는 수환의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수환은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화장대 위였다. 그 위에 갈색 핸드백이 놓여 있었다. 수환은 핸드백을 거꾸로 뒤집어 안에 든 내용물을 화장대 위에 털어 냈다. 잡다한 소지품들 사이로 지갑이 떨어지며 지갑 안에 든 사진 두 장이 밖으로 튀어 나왔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원래 한 장의 사진이었다. 수환의 결혼사진이었는데 섬뜩하게도 수환과 신부의 목선을 기준으로 가로로 비스듬히 잘려 있었다.  
수환은 사진 속의 여자를 곧바로 알아보진 못했지만 잠시 후 그 여자가 주방에 누워 있는 여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순간 수환은 머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수환의 머릿속에 모든 기억들이 해변을 덮치는 쓰나미처럼 무서운 속도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지영의 집착과 불행했던 결혼생활.
지영과의 이혼 후에 미옥과의 재혼.
지영의 광기 어린 협박들…….
그리고……

……그 날 점심. 수환은 미옥과 별장 앞 가로수 길을 걷고 있었다. 수환은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 미옥보다 약간 뒤쳐져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통화 중에 가로수 길 앞에서 차 한 대가 오는 것을 보았다. 수환은 그 차가 10여 미터 전방까지 왔을 때 운전석에 누가 앉아 있는지 볼 수 있었다. 전처인 지영이었다. 수환이 채 고함을 치기도 전에 지영의 차가 중앙선을 넘어 미옥을 치고 수환에게 돌진했다. 수환은 몸을 날려 아슬아슬하게 지영의 차를 피했지만 뒤로 넘어지면서 바닥에 뒤통수를 강하게 부딪쳤다. 수환은 눈앞이 하얘지면서 의식을 잃었다. 균형을 잃은 지영의 차는 춤을 추 듯 지그재그로 도로를 미끄러지다 가로수를 들이받고서야 멈췄다.
한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고 차에서 내린 지영은 트렁크를 열어 공구함에서 스패너를 꺼내들고 도로 위에 쓰러진 수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스패너로 수환을 끝장내려던 지영은 그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보.”

수환이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 지영이 서 있었다. 손에는 시퍼런 날을 번뜩이는 식칼을 들고서.
“여보, 우리 첫 데이트 때 기억나요?”
지영이 섬뜩한 표정으로 물었다.
수환은 굳은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왜, 당신이 장미꽃 사들고 우리 회사 앞으로 찾아 왔잖아요.”
지영이 한발 다가가며 말했다.
수환이 한발 뒤로 물러섰다.
“당신, 미, 미쳤어.”
“나도 알아요. 당신한테 미쳤죠. 인정해요.”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원래 계획대로 둘 다 죽일 거예요. 내 것이 못 될 바에는 차라리 없애는 게 더 낫죠. 둘이 잘 사는 꼴은 죽어도 못 봐요.”
지영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는 걸 본 수환은 소름이 돋았다.  
“가까이 오지 마!”
“입 닥쳐!”
지영이 수환의 고함에 귀가 멍멍할 정도로 되 받아쳤다. 식칼을 거머쥔 손이 하얗게 변하며 부들부들 떨렸고, 지영의 입가에 분홍색 거품이 일었다.
지영이 한발 더 다가오고 수환은 한발 더 뒤로 물러나 벽에 등을 붙였다. 지영이 자신도 주체하지 못할 비명을 지르며 식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도망갈 곳이 없던 수환은 자세를 낮추고 지영의 복부로 달려들었다. 둘은 함께 바닥을 구르며 몸부림쳤다. 지영은 그러는 사이에도 비명소리와 칼부림을 멈추지 않았다. 수환이 두 손으로 지영의 양 팔을 잡고 바닥에 눕혔다. 지영은 식칼을 쥔 손을 빼내려고 필사적으로 팔을 비틀었다. 수환은 땀 때문에 지영의 팔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식칼이 수환의 옆구리에 꽂혔다. 수환은 굳은 얼굴로 옆으로 굴러 바닥에 쓰러졌다. 저도 놀란 지영은 수환의 옆구리에서 식칼을 다시 뽑아냈다. 수환이 헉 하고 신음을 토했다. 지영은 수환의 배위에 올라타 칼날이 아래로 가게 식칼을 두 손으로 잡았다. 바닥에 수환의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지영은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리며 씩씩거렸다.
“죽어!”
지영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멈추었다. 지영이 고개를 천천히 뒤로 돌렸다. 주방에서 기어 온 미옥이 힘을 다 한 듯 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지영의 등 한가운데에 과도가 꽂혀 있었다.  
지영은 무릎을 꿇고 일어나 뒤로 뒷걸음을 치다 옆으로 쓰러졌다. 수환은 팔을 뻗어 미옥의 손을 잡았다. 숨결이 약하긴 하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수환은 있는 힘을 다해 상체를 일으켜 방문에 기대앉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식칼에 구멍 난 옆구리 때문에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그 때, 갑자기 지영이 식칼을 손에 쥔 채 양팔을 퍼덕거리며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놀란 수환은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지영은 방향감각을 상실했는지 수환과 미옥이 있는 쪽 반대 방향으로 기어갔다. 지영은 침대 옆 협탁으로 기어 간 다음 괴로운 신음을 내뱉으며 팔을 뻗어 협탁에 난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뭔가를 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핸드폰이었다. 지영은 엎드린 자세로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식칼로 핸드폰을 찍었다. 식칼이 단숨에 핸드폰의 몸통을 꿰뚫었다. 그리고 지영은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엎드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수환은 남은 힘을 모두 짜내서 미옥에게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미옥의 옆에 나란히 몸을 눕혔다.   두 사람은 죽어가고 있었다. 미옥이 성한 한쪽 눈으로 수환을 바라보자, 수환은 입모양으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옥이 그런 수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피를 많이 흘린 수환은 전신이 나른해지면서 저절로 눈이 감겼다. 의식이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수환은 흐릿한 의식 속에서 딸깍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아마도 저승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는 소린가보다, 생각하며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저승의 문이 아니라 별장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별장관리인 김 씨는 쓰러져 있는 주인내외를 발견하고 자신의 핸드폰으로 재빨리 119에 전화를 걸었다.

1년 후. 수환과 미옥은 시내에서 심야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수환의 차는 횡단보도 신호에 걸려 정지선 앞에서 멈춰 섰다.
“여보, 아직 그 여자 소식 없어요?”
조수석에 앉은 미옥이 물었다.
“아직.”
수환이 정면의 운전자 신호등의 빨간불을 보며 말했다.
별장관리인 김 씨는 자신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는 주인 내외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별장의 다른 곳에 숨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 때 김 씨는 주인 내외를 구해야한다는 생각에 딴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 경찰이 별장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사고 난 지영의 차도 사라지고 난 후였다. 경찰은 수환과 미옥의 진술을 바탕으로 지영을 찾아보았지만 아직 별 성과가 없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반대편 차선에서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중앙선을 넘고 수환의 차로 돌진했다. 당황한 수환은 급하게 클랙슨을 울렸다. 다행히 검은 승용차는 끼익, 하는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도로에 타이어 자국을 남기면서 수환의 차 바로 몇 센티미터 앞에서 멈추었다.
수환과 미옥의 심장이 거세게 쿵쿵거렸다. 수환은 만일을 위해 뒷좌석 바닥에 놓아둔 야구배트를 꺼내 들었다.
검은 승용차 운전석 문이 열렸다. 회색 정장 차림의 한 남자가 한손으로 뒷목을 붙잡고 내렸다. 수환은 그를 보고 한 숨을 내쉬었다. 검은 승용차의 운전자는 수환의 운전석 창으로 걸어와서 깜빡 졸았다고, 미안하다고 고개를 여러 차례 주억거렸다. 수환은 재빨리 야구배트를 뒷좌석으로 던져 넣고 괜찮다고 상대에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수환이 미옥에게 물었다.
“네.”
미옥이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수환과 미옥의 시선은 후진해서 중앙선을 다시 넘어가는 검은 승용차를 따라갔다. 차 안에는 그 운전자 말고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수환의 차 바로 뒤에 선팅이 진하게 된 흰색 지프가 한 대 서 있었다. 흰색 지프의 운전석에는 선글라스에 모자를 푹 눌러쓴 한 여자가 앉아 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자는 오른손을 뻗어 조수석 위에 놓여 진 스패너를 만지작거렸다.
신호가 바뀌어 수환이 액셀을 밟자, 흰색 지프의 운전자도 서서히 액셀을 밟기 시작했다.

minsy2000@na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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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민수 11.11.14 17:11 댓글 수정 삭제
    11월 14일 오전에 위 글을 등록한 후, 당일 오후 4시 27분에 엔딩부분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읽으시는데 불편함을 드렸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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