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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엽편] 인어공주

2011.11.13 15:4411.13




<인어공주>



  왕자가 바다에 배를 띄우고 생일 잔치를 즐기다가 폭풍우를 만나 파선을 당한 사건은 왕국 백성들의 입에 오랫동안 오르내렸다. 선원뿐 아니라 왕족과 귀족들로 이루어진 하객의 대부분이 그 사건으로 불귀의 객이 되었는데, 심지어 왕비의 아버지와 오라비마저 그 와중에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왕자만은 구사일생으로 해변까지 떠밀려 나와 이웃 나라의 공주에게 구원을 받았다. 왕자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었던 왕비 ― 생모가 아니다 ― 의 만류로 국왕이 그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다들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쨌든 왕자는 살아남았고, 자신을 구원해 준 이웃 나라 공주와 약혼하였다. 그 공주가 5년을 기약하고 수도원에서 신을 섬기는 중이었으므로, 2년 후 그 서약이 끝나면 혼인하기로 두 나라 사이에 약속이 맺어졌다.

  이듬해 봄에, 왕자는 바닷가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두 눈이 바다처럼 푸르고 잔물결처럼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을 발치까지 늘어뜨렸으며 걸음걸이는 물거품처럼 가벼웠다. 이는 진주 같았고 입술은 산호 빛깔이었다. 절세의 미인이라는 말이 조금도 무색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는데, 귀는 잘 들렸으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벙어리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매력에 흠이 되지는 않았다. 최초의 여성을 빚으면서 신이 <머리카락이 길기도 하다, 혀는 더 길 것>이라고 비아냥거린 후, 여성의 달변에 질린 남성들이 <벙어리 미인이야말로 완벽한 미인>이라고 한탄해 왔기 때문이다. 왕자는 한눈에 그녀에게 반했고, 어디서 온 누구이며 출신이 어떠한지 아무도 모르고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그 여인을 왕궁에 들였다.

  그녀는 말이 없는 만큼 몸가짐도 조용했고, 행동거지에서는 한눈에도 고귀한 기품이 묻어났다. 그녀가 대체 어디서 온 누구인지에 대해 사람들은 추측이 구구했으나 설득력이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던 중, 가끔 홀로 밤의 바닷가를 거니는 그녀의 뒤로 물고기들이 따라오는 모습이 가끔 목격되면서 그녀가 마녀라는 수군거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타국의 공주와 약혼한 몸이면서 정신없이 그녀에게 총애를 쏟는 왕자에 대한 염려도 커졌다. 왕자가 약혼을 파기한다면 그야말로 큰 문제가 될 것이며, 약혼을 지킨다 한들 이웃 나라에서 그녀의 존재를 묵과할 리 없는 것이다. 그러나 왕자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조만간 왕자가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한 해가 더 흘렀다. 신에게 바친 서약의 기간을 마친 이웃 나라 공주가 수도원에서 나왔다. 왕자와 수수께끼의 벙어리 미인에 대한 소문은 이웃 나라에까지 퍼져 있었다. 이웃 나라 공주는 왕자의 신의를 믿었고, 부왕의 사절을 거느리고 약혼을 확인하고자 왕자에게 찾아왔다. 생명의 은인이자 약혼녀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왕자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벙어리 미인은 이웃 나라 공주와 왕자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가슴에 손을 얹을 뿐이었다. 왕자는 이웃 나라 공주를 앞에 세워 둔 채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 가슴에 갖다댔다. 공주와 사절들은 모욕에 분노하여 자기들 나라로 돌아갔다.

  왕이 스스로 왕자를 내칠 마음을 먹었는지, 왕비가 왕에게 그 결정을 부추겼는지는 알 수 없다. 이웃 나라 공주와 사절들이 돌아간 후, 왕은 약속대로 이웃 나라 공주와 결혼하든지 왕자의 이름을 버리고 나라를 떠나든지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왕자를 다그쳤다. 전자를 택할 경우 벙어리 미인은 죽임을 당할 것이고, 후자를 택할 경우 다음 왕의 자리는 왕자의 동생 ― 왕비가 낳은 ― 에게 돌아갈 것이다. 왕자는 어느 것도 택하지 않았다. 대신 제3의 선택지를 내놓고 스스로 선택했다. 그 자리에서 칼을 빼들고 왕을 참살한 것이다. 피투성이 손으로 왕관을 집어 머리에 쓴 왕자는, 첫 명령으로 벙어리 미인을 자신의 왕비라고 선포했고 다음 명령으로 왕비와 자신의 동생을 체포하게 했다. 왕자를 지지하는 세력과 왕에게 충성하는 세력이 뒤엉켜 온 왕궁이 피바다로 들끓는 와중에, 왕비와 둘째 왕자는 측근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성을 빠져나갔다. 다음날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왕자는 새 왕으로 등극했고 그의 옆자리에는 벙어리 미인이 왕비로서 앉았다.

  왕비와 둘째 왕자는 이웃 나라로 달아났다. 자신의 공주가 당한 모욕으로 분개하고 있던 이웃 나라 왕의 발치에, 왕비와 둘째 왕자는 몸을 던지고 엎드려 복수를 탄원했다. 이웃 나라 왕은 전쟁을 선포하고 병사들을 모아 국경으로 진군했다.

  새 왕은 부하들과 함께 열심히 싸웠으나 전세는 기울어져, 마침내 왕궁이 함락되었다. 새 왕은 옥좌 앞에서, 왕비인 벙어리 미인의 품에 안긴 채 최후를 맞이했다. 두 여자 ― 선왕의 왕비와 이웃 나라 공주 ― 가 그녀에게 앙갚음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으나, 그 보복을 이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새 왕의 죽음과 함께 그녀는 물거품으로 변해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에는 왕비관과 옷만 남았기 때문이다.

  다시금 주인을 잃은 옥좌에는 이웃 나라 왕의 지지를 받은 둘째 왕자가 새 왕이 되어 앉았고, 이웃 나라 공주가 그의 왕비가 되었으며, 선왕의 왕비는 대비가 되어 왕 이상의 권세를 휘둘렀다. 왕비는 아버지와 오라비가 모두 죽어 대가 끊어진 친정을 부흥시키려고 애를 썼으나, 첫째 왕자의 생일잔치 사건으로 둘째 내전으로 셋째 전쟁으로 쓸 만한 왕족 및 귀족의 씨가 마른지라 마땅한 인재가 없었다. 게다가 새 왕과 대비 이상으로 그 나라에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이웃 나라 왕이 끼어들어, 자기 사촌인 공작을 대비의 양자로 입적시켜 그 대를 잇게 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대비의 소망을 이루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대비의 뜻을 완전히 좌절시켰다. 결정적으로 새 왕과 왕비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나지 않았다. 대비는 아흔 살까지 버티다가 죽었고, 그 뒤를 따르듯 새 왕도 사고로 죽었다. 대비의 양자로서 왕자 자격을 얻은 공작이 새 왕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300년이 흘렀고, 그 나라는 이웃 나라의 속국이 되었다가 보호령을 거쳐 완전히 흡수되었다. 수수께끼의 벙어리 미인에 대해서는 역사책에도 실리지 않고 사라졌다.



* 2008. 9. 17. 수.
황당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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