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상장 1/256

2011.02.07 06:3802.07

  두 사람이 들어간 사무실 안은 조용했다. 귤껍질처럼 우둘투둘한 책상을 중심으로 한 방은 죽음의 여신이라도 도착했는지, 바깥 추위만큼이나 매섭고, 조용했다. 의자는 두 개, 그것도 하나는 안락의자라는 말 그대로 ‘편안함을 위한’ 물건이 있었지만, 방 안 두 사람은 도무지 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들리는 것은 이따금 헛기침을 해대는 경찰복의 노인과 장애인처럼 발을 동동 굴리던 남자의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서장님, 제 상장을, 제 상장을 누가 훔쳤습니다.”
  경찰관은 검은 안경 뒤로 사뭇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상장이 없어졌다. 그것은 요즘 남한테 당할 수 있는 최악의 범죄 중 하나였다. 며칠이면 해결되는 단순한 살인 사건도 아니고, 그 중요한 상장을 누가 가져가다니, 이게 사실이라면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을 겪은 셈이었다.
  “음, 언제부터 사라졌나요?”
  부들부들 떨리는 경찰관의 말투에 남자는 얼마 안 돼 사실을 털어놓았다. 물론, 귓가에 조용히 소근 대는 것은 잊지 않았다. 남한테 들렸다간 큰일 날 소리였으니까.
  “어제 저녁 간단한 외출을 했는데, 돌아와 보니 상장 하나가 사라졌더군요.”
  “상장이 전에는 총 몇 개였습니까?”
  “256개였습니다. 확실하다고 보면 됩니다. 제가 하루에 몇 번이나 세보는 지 서장님도 잘 아실 겁니다.”
  의심 많은 경찰관도 그 점만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상장 수를 헤아리고 다니는데, 이 남자라고 해서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최근 상장 도난 사건이 늘어나다 보니, 상장 소유자들의 ‘매일 상장 수 헤아리기 활동’은 예전보다 많이 보편화 된 편이었다. 상장 수 헤아리기의 효율적 관리를 위한 수십 권의 책들도 출판되는 와중에, 제아무리 경찰관이라도 헤아리기에 대한 정확성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집에 돌아와 보니, 255개였다고요? 잘못 세신 건 아니구요?”
  남자는 기가 막힌다는 어투로 대꾸했다.
  “잘못 세다니요? 요즘 같은 세상에요? 게다가 전 이래 봬도 최근에 나온 ‘상장 수 헤아리기 시스템’을 설치해 놓은 사람이라고요. 그 외에도 손으로 하루에 일일이 두세 번씩은 세는 데, 어떻게 잘못 셀 수가 있겠어요?”
  붉으락푸르락 거리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던 경찰관은 얼굴을 찡그렸다. 현재 상황으로 볼 때, 이건 확실한 도난인 것 같았다. 그러나 경찰관은 이런 식으로 섣불리 움직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한 남자의 말만 듣고 경찰을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우스웠고, 가을만큼은 조용히 지내고 싶었던 그의 소망이 깨지게 되는 두 요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책상 앞 남자가 그를 가만히 둘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남자는 상장 256개를 가지고 있는 상위층 위인이 아니던가. 고작 150개만 가지고 있는 자신이 무시할 수 있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기에, 경찰관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남자도 상장에 대한 자신의 유리함을 알고 있었는지, 계속해서 경찰관을 재촉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당장 상장을 되찾아야 해요!”
  “근데, 상장이 어딨는지 대충 짐작이라도 가시나 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남자는 경찰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기계를 하나 꺼냈다. 얼핏 보기에는 구식 휴대 전화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바라보니, 기계의 화면에는 별 기이한 점들과 나라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대체 뭐하는 물건입니까?”
  경찰관의 질문에 남자는 말없이 물건을 책상 위로 내밀었다. 경찰관은 앞에 놓인 물건, 아니, 기계를 왼손 검지로 지그시 눌러봤다. 기계는 낮은 저음으로 윙윙거릴 뿐, 그 외에는 어떤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경찰관의 어설픈 반응에 만족한 남자는 물건을 천장으로 천천히 치켜들었다.
  “이게 바로, 최근에 나온 상장 GPS 시스템입니다.”
  “상장 GPS 시스템이라뇨?”
  경찰관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남자는 한동안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경찰관은 그 과정을 천천히 지켜봤다. 물론, 목구멍까지 올라온 화를 꿀꺽 삼킨 채로…….
  “이걸 모르십니까? 이건 개인이 가진 상장의 위치를 알려주는 시스템이죠. 예를 들어, 제가 1987년에 받은 ‘영어 퀴즈 대상’의 위치를 알고 싶다면……”
  남자는 ‘상장 GPS 시스템’의 가장 왼쪽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지도 위에는 한 개의 빨간 점이 생겨났다.
  “……요렇게 하면 되죠. 저기, 저 빨간 점이 있는 곳에 제 ‘영어 퀴즈 대상’이라는 이름의 상장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저 빨간 점은 제 집 안에 있죠. 이로써 저 상장은 집에 안전히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찰관은 이 마법 같은 상황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에 비해 남자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창문 쪽 안락의자에 몸을 실었다.
  “네, 그렇군요. 근데 현재 당신의 없어진 상장은 어디에 있다고 나옵니까?”
  남자는 주저 없이 기계에 있는 버튼 중, 보라색을 띠는 것을 눌렀다. 얼마 안 돼 화면에는 푸른 점 하나가 생겨났다. 지도에 의하면, 없어진 상장은 경찰서에서 약 200km 떨어진 곳에 있다고 나왔다.
  화면을 빤히 들여다보던 경찰관은 상이 있는 위치에 대한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남자 역시 예상했다는 듯, 조심스럽게 GPS 기기를 자신의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아니! 저곳은 키클롭스 집단의 공식 소굴 아닙니까!”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는 흉측한 공포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네, 말하신 그대롭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냥 개인적으로 일을 끝내려고 했죠. 남들한테 들키면 큰일 되는 상황이거니와, 괜히 큰 움직임을 내서 관심을 끌기 싫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위치를 찾아보니 규모가 너무 커, 정부도 쉽게 접근 못 한다는 그 ‘키클롭스 소굴’에 있더군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찰서를 찾아온 겁니다.”
  남자의 해명을 듣던 경찰관은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키클롭스 집단. 상장이 1개나 0개 이하인 자들만 모이는 폭력적인 집단으로, 최근 몇 년 동안 상장 300 위원회에 수십 번의 테러를 가한 모임이었다. 더불어, 남자가 가리키는 곳은 키클롭스 소굴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최소 300명의 키클롭스 회원들이 있는 그런 곳에 발을 내민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었다. 특히 요즘같이 각종 회식으로 느슨해진 경찰들을 가지고는.
  경찰관의 부르르 떨리는 몸을 바라보던 남자는 어느새 무릎을 꿇고 있었다. 두 눈가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촉촉이 맺혀 있었고, 메마른 두 손은 하염없이 빌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경찰관은 서둘러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혹시 누가 봤을까,’ 하는 생각에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도, 아무도 방금 전의 굴욕을 보지 못한 듯했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이러면 곤란합니다.”
경찰관의 만류에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얼마 못 가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서장님! 저는 꼭 그 상장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아시잖아요! 말 그대로 서열이 상장 255개로 내려가는 겁니다!”
  남자의 말도 꽤 일리가 있었다. 경찰들한테는 그저 하나의 귀찮고 위험한 작업이었지만, 이 사람한테는 직위 유지를 위한 숭고한 노력이나 다름없었다. 생각해 봐라. 상장의 수가 적은 자들에게는 지위 하나 내려가는 건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이런 고위층한테는 수명이 깎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좀 과장된 면도 있겠지만, 세금의 증가, 복지 시설 2% 감소 등, 상장 하나에 상위층은 언제나 혼란과 위기의 극치를 달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상장 하나를 도난당한 이 남자는 얼마나 괴로울까. 경찰관의 완고한 마음은 점차 누그러졌다.
  결국, 착한 경찰관은 남자의 청을 들어주고야 말았다.
  “그렇게 소중한 상장인데, 모르는 척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겠죠. 비록 위험한 짓이지만, 한 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서장님.”
  그렇게 경찰 서장의 지지를 얻은 남자는 곧 울음을 멈췄다. 그제야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추한지를 깨달은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울음을 멈췄다고 해도, 눈물이 흐른 얼굴에는 이미 짙은 흔적이 나 있었다. 그것도 아주 끈적끈적해 보이는 갈색의 도랑길이 남았다 보니, 얼굴은 참 흉해 보였다. 그래도 어떠한가. 남을 감동시킨 그 눈물들은 지금의 더러워진 얼굴을 보상하고도 남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럼, 갈 채비를 하십시오. 지금 바로 출발합시다.”
  “네? 지금 바로요?”
  “네. 어차피 시간 끌어봤자 상장의 분실 여부의 가능성을 크게 만들 뿐입니다. 그리고 낭비는 저들의 대비 태세를 강화시킬 뿐이죠. 그러니 빨리 가는 게 낫습니다.”
  너무나 빠른 진행에 남자는 자못 놀랐다. 도움을 청한 지 20분도 안 됐는데, 서장의 움직임은 의외로 적극적이었다. 요즘은 휴가다, 파업이다 하면서 별의별 것들이 세상을 어지럽히는데, 다행히도 이 경찰서는 그런 바깥 공기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운 좋은 자신을 생각하며, 남자는 속으로 여러 번 하느님을 찬양했다.
  “오, 하느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남자가 끝없는 하느님 찬양에서 정신을 차렸을 즈음, 경찰 서장은 이미 검은 외출복을 껴입고 있었다. 양쪽 손에는 새까만 권총을 쥔 채, 서장은 땀을 뻘뻘 흘리는 남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권총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놨다.
  “이게 뭡니까?”
  남자의 물음에 서장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 총입니다. 요즘 나온 권총이니, 쓸 만할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상장 250개 이상부터는 개인 총 소유 가능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기는 하지만…….”
  대답을 마친 서장은 남자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자그마한 권총을 앞으로 내밀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책상 위의 총을 쥐고는 서장의 얼굴을 떡하니 쳐다봤다. 조금 전의 당당한 모습에도, 서장의 눈에는 긴장의 불꽃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하긴, 대형 테러 집단과 맞서 싸우는 것은 누가 봐도 쉬운 문제는 아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게다가 상대는 상장 300 위원회에 맞서 10년 이상을 유지해 온 ‘키클롭스 집단.’ 절대로 얕볼 상대가 아니었다.
  “자, 그럼 갑시다.”
  마침내 모든 채비가 끝난 남자와 서장은 몇몇 경찰들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바깥은 온풍기가 없어서 그런지, 차가운 바람이 남자의 연약한 피부를 스쳐 갔다. 주택 앞 온도계들은 이미 영하 10도를 밑돌고 있었고, 건너편 인도는 맹렬한 추위로 바닥이 꽝꽝 얼어 있었다. 거기에 날카로운 자동차 소리까지 겹치니, 남자와 경찰들은 소음과 추위를 피해 이리저리 돌아다녀야만 했다.
  ‘그러나 그래도 어떠냐. 지금 우리는 상장, 내가 잃어버린 상장을 찾으러 가는 건데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남자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며 새빨개진 두 뺨을 위로했다. 사실, 별 쓸모는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는 뭐든 생각을 해야 강추위를 버티고 경찰들과 함께 ‘키클롭스 집단’이라는 곳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에서였다. 물론, 후에는 경찰차를 탑승한 덕분에 추위에 대한 공포는 없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차 안에서도 이런 헛소리를 속으로 쉴 새 없이 지껄였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불안이라는 끔찍한 요소였다. ‘혹시나,’ ‘혹시나,’ 하는 괜한 심리적 고통이 그를 계속 괴롭혔던 것이다.
  ‘젠장. 혹시나 녀석들이 내 상장을 이미 다 없애버렸으면 어떡하지?!’
  그래도 이런 의심 가운데 놀라웠던 게, 살결을 찢는 추위에도 도로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는 것이다. 나이도 아주 각양각색이었다. 금방이라도 심장마비를 일으킬 것 같은 주름진 늙은이들과 온갖 누더기로 치장한 여자들……. 그런데 뭐 때문인지, 그들을 바라보는 남자는 도착지에 도달할 때까지 한동안 혐오감을 느껴야만 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혐오감은 대체로 그들이 차고 있는 ‘상장 20 이하 배지’에서 오는 것 같았다. 누가 봐도 배지는 더러움과 무능력자들의 상징이었으니.
  하지만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런 추위에도 ‘혐오스러운 것’들의 샛노란 배지는 도로 위 전광판들보다 밝았고, 남자의 욕설보다 훨씬 맑고 짙었다. 그 사실을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던 남자는 허연 수증기를 입안에서 내보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은 점점 꼬이는 것 같았다.
style by 아크v의 글틀
  “음, 도착했습니다.”
  서장과 그 외 경찰들은 남자의 GPS가 가리키는 검은 문에 살며시 접근했다. 워낙 오래된 문이라서 그런 건지, 녀석의 모퉁이에는 수십 개의 손자국과 칼자국이 나 있었다. 하지만 경찰들과 남자의 관심은 그런 자잘한 세월의 흔적에 있지 않았다. 그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문 중앙에 선명히 보이는 총알구멍이었다. 그것도 손댄 자국 하나 없는 게 확실히 최근에 만들어진 것 같았기에, 남자와 경찰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로써 검은 문 뒤의 공간은 평범한 장소가 아니라는 게 점차 확실해졌다.
  5분 뒤, 서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경찰들은 그 즉시 문 양쪽으로 몸을 숨겼다. 거친 두 손에는 새까만 권총을 잡은 채, 그들은 문을 열 준비를 마쳐갔다.
  서장은 곧이어 조용한 목소리로 경찰들을 상기시켰다.
  “자, 3초 후에 진입한다. 알겠나?”
  경찰들은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찬성의 의사를 보였다. 그러나 침입 작전에 만족하는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셋’이라는 서장의 신호가 들리자마자, 경찰들은 검은 문을 박차고 건물 안으로 진입을 거행했다. 그 후에는 모두가 예상했던 절차가 이어졌다. ‘키클롭스 집단’과의 결투. 경찰로서는 벽처럼 생긴 장식물이 바리케이드로 사용된 게 그나마 다행 중 하나였다.
  “장애물 뒤로 서서히 움직인다!”
  전투는 30분이 넘게 계속되었다. 한쪽에서 총알 몇 발이 날아가면 저쪽도 어김없이 몇 발을 장애물 너머로 넘겼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키클롭스 집단’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수가 늘어났다. 처음에는 서너 명이던 숫자들이, 어느덧 20명을 넘어섰고, 급기야는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물론, 경찰들 역시 만만치는 않았지만, 예상외의 숫자는 상당히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총 겨누기 시합을 한 두 팀은, 결국 경찰의 완패라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손들어! 장애물 앞으로 나와! 총은 버려라!”
  한 키클롭스 부원의 냉혹한 말투에, 경찰들은 총을 버리고는 서서히 바리케이드 앞으로 몸을 드러냈다. 오랜 전투 때문인지, 그들의 얼굴에는 대개 피로와 고난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몇몇은 총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서 큰 상처를 지니고 있었다. 옷도 말이 아니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세탁기로 깔끔하게 처리됐던 경찰복들은 어느새 온갖 찌꺼기와 핏물에 절여져 있었다. 거기에 간혹 옷 사이사이로 보이는 깊은 총알구멍은 누가 봐도 참 시원해 보였다.
  수백 명의 키클롭스 집단은 그들의 몰골을 일제히 쳐다봤다. 장애물 앞으로 손을 든 채 나오는 굴욕적인 경찰들과 몇몇 쓰러진 경찰들 위를 조심스레 기어 나오는 남자와 서장의 모습은 정말 처참했다. 아까의 의욕적이고 혈기 왕성한 경찰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대신에 장애물 앞에는 약하고, 위기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불쌍한 동물들만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래, 본능이나 의지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고방식이 둔한 육감적 동물들이 현재 장애물 앞에서 두 손을 들고 있었다. 한때 그들이 그렇게 좋아했던 P-13 권총들은 이미 땅 밑에서 뒹굴고 있었고, 굳건했던 짐승들의 마음은 정체 모를 두려움 앞에서 순식간에 헝클어졌다. 역시, 한솥밥 먹던 의지의 사나이들도 막상 공포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듯했다.
  “자, 모두 벽에 나란히 선다.”
  키클롭스 부원 하나의 말에 경찰들은 일렬로 벽 앞에 나란히 섰다. 바닥에서 웅크리고 있던 남자도 벽 쪽으로 얼굴을 돌렸지만, 덩치 큰 키클롭스 부원들이 그를 제지했다. 벽과 부원 사이에 낀 게 마치 샌드위치 빵 사이에 짓눌린 햄 같았다.
  “넌 날 따라와. 대장께서 당신과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하니…….”
  “왜 저, 저를?”
  “설마 몰라서 묻는 거냐? 상장 때문이지.”
  ‘상장’이라는 말에 남자의 공포는 배로 늘어났다. 상장에 대한 논의는 필시 키클롭스 대장이 그의 죽음을 원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법에 의하면 상장은 소유권 이주를 해야 다른 자가 사용할 수 있다고 쓰여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범죄자들은 남의 상장을 획득할 때는 대개 소유권 이주 정당화 뒤의 사살을 택하기 마련이었다. 대체로 죽음이 상장 관련 일을 가장 깔끔하게 끝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키클롭스 대장같이 반체제, 폭력주의로 유명한 자들은 더 그랬고…….
  어렸을 때라면 목숨을 위해 거의 모든 것을 포기했겠지만, 나이 든 남자에게 상장만큼은 생명과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여기서 남자가 말하는 상장은 고작 1개였지만, 그 작은 하나는 남자의 모든 것을 바꿀 만큼의 힘이 있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상장 256개에서 255개의 능력은 특별 구역 추가 제재나 의무 세금의 불필요한 증가 등, 보통 이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게다가 사장 256개의 사회적 권리와 255개의 권리는 확연히 다르다 보니, 한 개의 힘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받았던 상 하나에 이렇게 얽매이는 자신이 웃겼는지, 남자는 헛웃음 아래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가 별의별 생각으로 한참을 뜸들이자, 옆에 있던 키클롭스 부원 한 명이 그를 발로 거세게 걷어찼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남자는 밑으로 자빠졌다. 바닥이 온통 진흙탕이다 보니, 얼굴에는 시커먼 먹물이 묻게 되었다.
  “빨리 좀 걸어! 시간이 없단 말이다!”
  남자는 한동안 으르렁대는 키클롭스 부원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봤다. 검은 터번으로 머리를 칭칭 감은 게, 마치 어둠 속에서 나타난 저승사자와 닮아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남자는 저승사자와 피 묻은 낫이라는 불미스러운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선 남자를 바라보던 검은 터번의 부원은 그를 붉은 문 앞으로 데려갔다. 아까의 음침한 검은 문과는 달리, 이 문은 뭔가 불길한 기운으로 칭칭 감겨 있었다. 게다가 군데군데 보이는 ‘상장 300 위원회 탄압 포스터’와 잔혹한 그라피티를 보니, 남자의 마음은 이름 모를 불길에 펄펄 끓어올랐다. 확실히 붉은 문은 공포와 옛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자, 들어가.”
  남자는 부원이 열어준 조그만 틈새를 통해 붉은 문을 통과했다. 예상한 대로, 방 안에는 여러 무기들이 진열돼 있었다. 바주카포, 박격포, 각종 소총, 그리고 몇 시간 전만 해도 경찰들이 갖고 있었던 P-13……. 그게 다가 아니었다. 방 정중앙에는 한 커다란 거인, 적어도 180cm는 넘을 듯한 괴물이 자신한테 딱 맞는 검은 양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남자의 2배 정도인 저 커다란 의자도 괴물한테는 꽤 버거워 보였다. 의자가 옷깃에 너무 바싹 달라붙은 광경이 주 이유였다.
  “아, 자넨가? 상장의 주인이?”
  “네? 네…….”
  남자는 괴물의 굵은 목소리에 눌려, 얼떨결에 대답했다. 생각보다 대장이 컸고, 보통 인간들보다 훨씬 더 예의 바른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에서였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키클롭스 대장은 외눈박이도 (키클롭스에 대한 기원을 이것 때문이라고 말한 자들도 가끔 있었다.), 눈이 멀어 있지도, 그렇다고 천적 오디세우스에게 얻은 옛 상처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괴물은 작은 의자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반갑다며 커다란 오른손을 내밀었다. 비록 그의 손이 너무 커서 악수를 성사시키는 못했지만, 남자는 괴물 대장의 수준 높은 예절에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가지고 왔을 법한 식탁에 앉아 있었다. 양손으로 붉은 포도주와 스테이크를 즐기면서.
  “고급스러운 태도에 너무 놀라지는 말게. 알다시피, 우리는 부자가 아니야. 다만, 손님이 왔다 보니 이러는 것이지.”
  남자는 붉은 포도주를 쉽사리 마시지 못했다. 아무리 의심을 놓는다고 해도, 처음 만난 상대, 그것도 매월 일어나는 폭력 행위들로 이름 높은 키클롭스 집단의 대장에게서 받은 술잔은 독이 첨가됐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남자는 유리잔에 담긴 새빨간 액체를 한동안 흔들며 독의 흔적을 열심히 찾아댔다. 그렇게 5분 동안 죽음의 흔적은커녕 건더기 하나도 보이지 않자, 남자는 안심하고 술을 깊게 들이켰다. 맛이 아주 달짝지근했다.
  “아, 저기 메인 요리가 오는구먼.”
  거인의 말대로 한 부원이 뚜껑에 덮인 커다란 은색 접시를 가져오고 있었다. 그런데 부원이 다리라도 다쳤는지, 음식은 아주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거인도 시간 낭비를 최대한 줄이고자 옆에 있던 새하얀 냅킨을 남자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아, 점심을 들기 전에 자넨 손부터 씻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손이 진흙 범벅이 다 됐으니 원…….”
  남자는 딱히 손을 닦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인에게 반항하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하얀 냅킨을 검게 더럽혀가며, 남자는 어느덧 식탁 위에 도착한 은색 접시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거인은 뚜껑을 여는 동시에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도 연어 요리를 좋아하길 바라네. 어류밖에 못 구하는 우리한테 연어는 별미 중에서 별미니 말이야. 물론, 연어 말고도……”
  남자는 접시를 놀라운 얼굴로 바라봤다. 물론, 연어 요리가 싫거나,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남자는 연어 요리 옆에 같이 얹혀 있는 P-13 권총에 놀란 것이었다. 거인이 총을 향해 손을 뻗지 않는 것으로 보아, 놈은 그것을 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결론은 하나. 괴물은 남자에게 권총을 준 것이었다. 그것도 자유롭게. 방어용 무기나 협박 대상도 없이 공짜로.
  상황 파악이 안 가는 남자를 쳐다보며 거인은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자네 총도 거기 있네. 진흙에서 구해오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원. 내 부하들이 꽤 고생했지. 뭐, 어쨌든, 도로 가져가시게나. 나도 뭐라 안 할 테니.”
  남자는 총을 자신의 오른손으로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한 발의 총탄이 권총 안에 장전되어 있었다. 꿀꺽. 남자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가래들을 간신히 삼켰다. 이 와중에 거인은 냅킨으로 연어 기름이 묻은 자신의 입술을 닦고 있었다.
  “아니, 이걸 다시 준, 그것도 장전된 총을 다시 준 이유는 뭡니까?”
  “이유는 간단하네. 자네가 나를 쏠 수 있게 한 거지. 그럼으로써 서로 간의 짙은 신뢰감도 얻고 말이야.”
  “지금 쏘면 당신이, ‘키클롭스 집단’ 대장이 죽을 텐데도? 그 소위 대단한 부하들은 아무 짓도 안 한다는 말입니까?”
  “물론, 내 말을 다 들은 후에 총을 쏜다면 녀석들도 자네를 곤히 보내줄 거네. 내가 자네를 건드리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러나 자네가 내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쏜다면 녀석들도 조치를 취하겠지. 그나저나, 연어 좀 더 먹겠나?”
  거인은 접시 위에 있는 연어 요리를 남자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남자는 요리를 빤히 쳐다볼 뿐, 정작 먹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결국 거인은 접시를 도로 자기 곁으로 잡아당겼다.
  “그럼, 만약 제가 당신의 이야기를 다 듣고 쏜다면 어쩌겠습니까?”
  “그런다면, 나도, 부하도, 자네를 놓아줄 거네.”
  “어째서 그런 거죠?”
  ‘어째서’라는 말을 듣자, 거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거대한 몸을 힘차게 흔들며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폭포 밑 물레방아처럼, 녀석의 두 거대한 팔은 가슴을 축으로 삼아 완벽한 원을 그렸다. 남자는 이 해괴한 상황을 말없이 구경했다.
  “어째서? 어째서? 그 이유를 말하자면, 지금의 나를 보게.”
  거인의 두 팔은 예전과는 달리 살이 아래로 축 처져 있었고, 한때 연한 분홍빛이었을 피부는 이미 검붉게 변해 있었다. 과거에 초롱초롱했을 두 눈빛은 나이의 벽에 걸려 흐린 자줏빛으로 돌변했고, 우락부락한 몸매에 비해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줄어들어 있었다. 남자는 이런 거인의 약점들을 자세히 눈여겨봤다. 후에 필요할지도 몰랐으니…….
  약점을 다 드러낸 거인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나는 늙었네. 아니, 무슨 병에 걸렸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지. 녀석이 속에서 나를 갉아먹고, 오래지 않아 내 겉까지 다 빠짐없이 먹어치울 거네. 그런 면에서 녀석은 참 두려운 놈이야. 심지어는 내 멋진 얼굴을(물론, 다 개인적인 의견이네) 이렇게 만들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내게는 ‘키클롭스 집단,’ 즉, 먹여 살려야 하는 사람들과 내 사랑스러운 딸, 내 하나뿐인 딸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네.”
  거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남자에게 사진 두 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사진에는 각각 ‘키클롭스 집단’의 단체 사진과 초등학교 1학년 정도로 보이는 딸아이의 어여쁜 얼굴이 찍혀 있었다. 키클롭스 집단은 사진이 너무 흐린 탓에 뭐라고 할 말이 없었지만, 거인의 딸은 예상보다 아름다운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와 인형 같은 손가락들을 가진 그녀는 만일 연예인이 된다면 많은 남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딸과 ‘키클롭스 집단’의 사진이네. 집단 사진은 5년 전 것이지만, 내 딸아이   사진은 어제 아이가 직접 찍어서 보내온 거라네. 알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집단을 형성하기 직전에 딸을 외지로 보냈으니 말이야. 물론, 거기에도 그 빌어먹을 상장 서열이 존재하지만…….”
  “그래서요?”
  무뚝뚝한 대꾸에 괴물은 잠시 남자를 노려봤다. 자신이 말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는 무시무시한 눈빛이었다.
  “어쨌든, 자네는 이 상장 서열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지 아나? 상장을 가진 자는 부에 절어, 어쩔 줄을 모르고, 없는 자는 가난과 온갖 불공평한 대우에 찌들어 사는 이 상황, 솔직히 말이 안 된다고 한 번이라도 생각 안 해봤나? 나 같은 경우는 상장이 딱 1개, 딱 1개 있다네. 고등학생 때 받은 유일한 개근상이지. 근데 내가 그 쓸모없는 상으로 뭘 받는지 아나? 간신히 자식 양육 소유권을 얻을 수 있었어! 실제로 상장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은 결혼도, 아이도 낳을 수도 없다는 거지!”
  괴물은 한층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식히고자 옆에 있던 붉은 포도주를 남김없이 들이켰다. 벌컥벌컥,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 많던 액체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남자는 속으로 미리 포도주를 마시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마침 자신도 목이 칼칼해지고 있던 참이었는데…….
  “그런데, 그 많은 상장 중 왜 하필 제 상장을 훔친 겁니까?”
  남자의 쉰 목소리에 거인은 씹고 있던 연어 요리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뭐, 당연하지 않나? 난 5년 전부터 조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약 10명 정도의 상장 우수자들의 주소를 알아내게 되었지. 그 중 하나가 바로 자네였다네. 근데 말이야, 10명 중 자네를 고르게 된 결정적 이유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상장의 정체를 알아냈기 때문이네.”
  거인은 옆 주머니에서 남자의 상장을 꺼냈다. 상장에는 ‘말하기 대회 우승’이라는 글씨가 검은색으로 크게 써져 있었다. 상에 제시된 날짜가 38년 전, 자신의 중학교 2학년 시절로 찍혀 있는 것을 알게 된 남자는, 기쁨과 재회의 행복에 어쩔 줄을 몰랐다. 고성능 프린터기로 찍어낸 가짜 종이가 아닌 이상, 저것은 남자가 중학교 2학년 7월 때 받은 ‘말하기 상’이 분명했다.
  남자는 두 손을 앞당겨 거인의 손아귀에서 상장을 빼내려고 했으나,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거인의 손은 돌덩이처럼 단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뒤에서 번들거리는 거인의 눈빛과 식탁 나이프는 남자의 두려움을 충분히 사로잡고도 남았다.
  “총이 없다고 무기를 쓰지 않는다고는 하지 않았네. 내가 약속한 건, 자네가 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있어야 이뤄지는 거지. 그 후에는 총으로 머리를 갈기든 심장을 겨누든 마음대로 해도 좋네. 그러나 그전까지는, 무기를 사용하겠네.”
거인은 남자를 노려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왼손으로는 남자의 상장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어쨌든, 이 상장을, 하필 자네의 상장을 왜 훔쳤냐고 물어봤지? 그건 간단하네. 사실, 나도 이 말하기 대회에 참가했었거든. 심지어는 우승 후보로 유력했던 게 바로 나였다네. 혹시 알지도 모르겠네. 당시에는 영어의 영재라고도 불렸으니까 말이야.”
  남자는 그제야 거인의 얼굴이 익숙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의 앞에 있는 거인은 다름 아닌 몇 십 년 전에 무대에서 봤던 한 거구의 아이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참 새파랗고 맑은 애였는데, 지금의 모습은 정말 처참했다. 온몸에 난 실주름에 비계로 뒤덮인 몸뚱이, 그것은 마치 자그마한 구멍에 살덩이를 쑤셔 넣은 것 같았다.
  “그럼 어쩌다 상을 못 탄 겁니까?”
  “예선전에서 실수를 했지. L 발음을 R 발음으로 말해버렸다네. 그래서 1점이 깎였지. 다른 애들은 다 만점을 받았고……. 덕분에 예선 탈락을 하고 말았지. 장려상 하나 없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자네 상을 훔친 거네. 져서 가장 분했고, 억울했던 대회거든. 솔직히 말해서 당시 상을 탔던 자네의 영어 솜씨가 그렇게 뛰어난 것도 아니었거든.”
  ‘뛰어나지 않다’라는 말에 남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예선 탈락한 자가 이제 와서  수상자에게 뭐라고 해봐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놀리는 격이었다. 그리고 남자도 거인처럼 L 발음을 R 발음처럼 하지 말아야 하는 예선전을 치렀는데, 이제 와서 불만을 터뜨리는 것은 패배자의 억지였고, 지루한 변명이었다. 지금 이렇게 해서 뭘 이루고 뭘 할 수 있다는 건가. 남자는 거인이 늘어놓는 해명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러나 남자에게 중요했던 것은 거인의 해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상장을 가로챌 방법을 구안해내는 것이었다. 남자는 일단 거인의 시야를 상장에서 돌려보려고 했지만, 그건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괴물은 도무지 얼굴을 돌릴 생각을 안 했으니 말이다. 오른쪽으로 관심을 끌려고 해도 상장을 바라봤고, 왼쪽으로 관심을 끌려고 해도 상장을 바라보는 녀석의 일편단심에 남자는 결국 본래 작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거인은 남자에게 경고의 눈빛을 날린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 상장. 내가 이 상장을 얻게 된 뒤 얼마나 행복했는지 아나? 아마 자네로서는 상상도 못할 거네.”
  “도대체, 뭘 했다는 겁니까? 밀거래라도 진행했습니까?”
  남자의 무덤덤한 대답이 끝나자마자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아까만 해도 옆에 앉아 있었던 거인은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오른손으로 주머니를 열심히 뒤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갑자기 끊긴 대화를 다시 이어보려고 숟가락으로 식탁을 쳐보고, 손을 흔들어도 봤지만, 거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는 듯이, 괴물은 아무 말도 없었다.
  “여보세요, 제 상장으로 뭘 했다는 겁니까? 에?”
  “학교.”
  학교. 남자는 ‘학교’라는 짧은 단어가 자신의 상장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가 몹시 궁금했다. 비록 상장은 중학교 2학년 때 받은 상이었지만, 정작 자세히 살펴보면 학교와 거의 상관이 없었다. 말하기랑 학교는 음절수도 일치하지 않는 어색한 두 단어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상장은 학교 내 상도 아니고 영어기술부에서 벌어졌던 한 ‘말하기 대회’에서 얻은 것이었기에, 남자의 부족한 머리로는 학교와 영어기술부, 그리고 키클롭스 집단을 연결시킬 수가 없었다.
  “어쨌다는 겁니까?”
  남자의 외침이 드디어 거인의 귀에 연결된 것일까. 한참을 숙이고 있던 거인은 이내 얼굴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놀랍게도, 그의 얼굴은 두 눈에서 흘러나온 수십 방울의 눈물로 촉촉이 맺혀 있었다. 한때 따스했던 분홍빛의 귓불은 붉게 타올랐고, 자줏빛 두 눈동자는 물방울에 가려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남자는 상황이 기가 막혀서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튼튼함을 자랑했던 거인의 추잡한 눈물은 확실히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아이를,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네.”
  “예? 학교라뇨? 그게 무슨 소립니까?”
  주머니에서 꺼낸 노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거인은 한심하다는 말을 나지막이 중얼거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비난과 뼈가 담긴 대꾸였다.
  “설마 몰랐다는 건가? 상장 2개부터 자녀를 학교에 보낼 수 있는 걸 모른다는 건가? 자네도 알 텐데…….”
  남자는 뒤통수를 한 번 얻어 막은 것 같았다. 상장 2개부터 자녀를 학교로 보낼 수 있다니, 그것은 전혀 알지 못한 사실이었다. 물론, 그가 상장을 소중히 여기고, 틈만 나면 상장 관련법을 탐구했다지만, 정작 상장 2~3개의 권리나 의무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게 지금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 이유였다. 과거의 기억들을 다시 더듬어 봐도, 남자는 상장 300개나 특급 수상 같은 수준 높은 일만 관여하기를 좋아했지, 키클롭스들의 특권 같은 것은 생각해보지도, 상관하려고도 안 했다. 그에게는 다 쓸데없는 일이었으니까.
  예상치 못한 지식의 벽에 걸린 남자는 한동안 무안해졌다. 그에 비해 거인은 머리 손질로 자신의 긴장을 표출하는 이 철없는 남자를 무심코 바라봤다. 애정은커녕 눈곱만큼의 위로도 없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딸아이가 내년에 8살, 즉 초등학교 1학년이 된다네. 그 말을 듣자 나는 기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무섭기도 했지. 상장 1개. 고작 상장 1개가 모자랐기에 딸아이의 교육이 무산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동료들의 상장을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그러다 알게 된 게 바로 자네라네. 내가 그렇게 증오한 ‘말하기 대회’ 대상을 받은 장본인이자, 상장이 256개가 되는 소위 ‘대단한 상장주의자’말이네. 그 후 나는 몇몇 동료들의 힘을 얻어 자네의 상을 힘들게 구해왔지. 참, 비밀번호가 어쩜 그리도 많던지……꽤 힘들었어.”
  그 많은 비밀번호를 뚫다니! 역시 키클롭스 집단은 사람들 말대로 단순한 도적들은 아닌 것 같았다. 정부에서 인정받은 대략 20개의 자물쇠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뚫렸다는 생각에 남자는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젠장, 이런 괴물들한테는 인간의 위대한 창조물도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게 비로소 확실해졌다.
  남자는 거인의 ‘상장 계열의 억울함과 상장 훔치기 작전에 대한 논문’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오기 전부터 알고 싶었던 딱 하나의 질문을 거인 앞에 풀썩, 던졌다.
  “그래서 뭘 원하시는 겁니까?”
  “뭐, 자네도 잘 알 텐데 말이야, 새삼스럽게. 그거 있잖나, 상장 소유권 이전.”
  거인의 말은 어찌 보면 예상된 답변이었다. 상장은 말로만 갖겠다고 한다고 남이 사용할 수 있는 간단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을 완전한 자신의 것처럼 사용하려면 본래 수상자로부터 ‘소유권 이전’이라는 서류를 받아와야 했다. 그래야만 상장은 1차 소유자를 벗어나 2차 소유자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런 절차가 없다면 상장은 그냥 집 벽난로 앞에 내거는 장식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거인은 남자한테서 상장을 가져온 것이지, 그로부터 소유권 이전 합법화를 인정받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거인은 지금 남자 앞에 ‘소유권 이전’라는 큼지막한 서류를 내미는 것이었다.
  “자, 이로써 내 이야기는 끝났네. 부디, 서명을 해주게나. 내 딸을 위해서…….”
  어처구니없는 말. 남자는 도무지 거인의 말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딸아이의 이야기가 슬프고 끔찍하더라도, 상장은 엄연히 자신의 것이었다. 거인의 것도, 딸아이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남의 상장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놈들을 생각하니,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옆에 있던 총을 움켜쥐었다. 새빨간 핏줄이 피부 위로 튀어나왔다.
  “웃기지 마십쇼. 나는 서열에서 떨어지면서까지 당신의 딸을 도와줄 의무는 없단 말입니다! 게다가, 왜 하필 내 상장입니까? 아무리 대회에서 졌다고 해도…….”
  P-13 권총은 어느새 남자의 주머니를 떠나 거인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거인은 얼굴 위를 훑어대는 붉은 광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남자의 오른손 검지는 방아쇠 앞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새까맣고 아주 약간의 움직임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녀석은 꽤 유혹적이었으니 말이다.
  거인도 막상 죽음이 다가오니 공포가 머리를 강타한 것 같았다. 주르륵, 식은땀은 아까보다 배로 늘어났다. 거인은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땀 때문인지 입이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다리 위 셔츠는 이미 ‘무서움’이라는 매개체에 물들어 가슴에 짝 달라붙어 있었다. 믿었던 두 발도 오금이 저려 어쩔 줄을 몰랐다. 거인은 남자의 말에 반박하고자 침을 꿀꺽 삼켰다.
  “자, 자네도 참 못된 자로구먼. 물론 남의 상장을 훔쳤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가 않아. 중요한 건 자네의 상이 지금 내 손에 있다는 것이고, 내 딸아이를 도와줄 유일한 수단일지도 모른다는 거야. 쏴, 쏴야 한다면 쏘게나. 그러나 과연 자네는 남을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까?”
  “닥쳐!”
  남자는 총구멍을 거인의 얼굴 앞으로 들이밀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콩알 크기의 구멍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녀석의 크기는 만만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총알이 불을 타고 튀어나올 것 같은 저 검은 총구멍은 거인의 마음을 레몬이라도 되는 양 거칠게 쥐어짰다. 거기에 남자의 ‘죽일 것 같은’ 표정도 더해지니, 거인은 막상 뭐라고 할지 고민되었다. 만약 죽을 거라면 어떻게든 괜찮은 명언을 날려야 하는데, 머리가 하얘진 탓에 그는 금붕어처럼 입만 뻥긋 뻥긋거렸다.
  남자 역시 두 손으로 총을 간신히 잡고 있을 뿐, 정작 방아쇠를 쉽게 당기지 못했다. 아무리 상장을 돌려받고 싶다고 해도, 같은 인간으로서 살인을 저지르고 싶은 마음은 꿈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 상황으로 봐서 거인이 그에게 상장을 곧게 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딸아이를 위해 눈물까지 흘리는 자로부터 어찌 상장을 곱게 받을 수 있겠는가. 남자는 조용히 거인의 말을 기다렸다.
  마침 어느 정도 정신을 되찾았는지, 거인은 오랜 침묵 끝에 성대를 진동시켰다. 입에서 나온 소리는 보통 때와는 달리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 쏘게나. 나를 자유롭게 해주게. 정 내 딸을 도와주지 못하겠다면, 나를 도와주지 못하겠다면, 나를 어서 쏘게.”
  거인의 모습은 죽기 전이라서 그런지, 훨씬 커 보였다. 몸집은 마치 우주의 모든 비밀을 집어넣은 것처럼 거대했고, 머리는 한여름에나 나올 법한 커다란 수박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표정은 세상의 운명을 짊어지는 현자의 모습과 비슷했고, 두 손은 육중한 몸매를 사이에 둔 채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인 남자는 곧 몇 분 전과 다름없는 거인의 모습을 재회할 수 있었다. 겁에 질린, 죽음 앞에서 벌벌 떠는 오즈의 재수 없는 호랑이를…….
  “…….”
  남자는 예의를 지키고자 마지막 침묵을 유지했다. 방아쇠는 검지에 압도돼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러나 떨림은 여전히 남자 근처에 있었다. 뭐지, 하면서 자세히 알아보니 그것은 두려움 앞에서 떠는 자신의 몸이었다. 새로운 경험 앞에서 쾌락과 공포에 물든 먼지만도 못한 그. 지금 그의 몸이, 그 하찮은 몸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진정을 못하는 것이었다. 남자는 한동안 방아쇠를 만지며 머뭇거렸다. 차가운 감촉 사이로 끔찍한 그림들이 떠올랐지만, 녀석을 당기는 건 쉽지 않았다.
  그때였다.
  탕!
  사실 남자는 애초에 총을 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의 방식이 끝까지 성공적이었다면, 뒤늦게 지원을 받은 경찰들이 방 안으로 들어와 거인을 체포하고, 남자는 무거운 권총을 땅바닥으로 내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진상은 달랐다. 경찰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상황이 너무 긴박했고, 총을 내려놓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아마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창문 밖 햇빛이 요술이라도 부린 건지, 어두웠던 방 안은 이름 모를 따스함과 불빛에 서서히 밝혀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남자는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지금 이 총의 방아쇠를 당겨도 고통은 그를 계속 따라오리라는 것을. 그러고는 한참을 기다리던 방아쇠는 뒤로 순식간에 당겨졌다. 철컥, 하는 기계음과 함께.
  총구멍 속에서 때를 기다리던 총알은 어느새 기다란 터널을 지나 거대한 거인 쪽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그렇게 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저 탕, 하는 테니스공 튀기는 소리와 함께 녀석은 얼마 안 가 거인의 머리를 강타했다. 총격 후에 들려온 것은 남자의 공포와 거인의 신음을 합친 합창.
  “이, 이럴 수가.”
  “으, 으음.”
  죽음의 낫은 거인을 오랫동안 기다리지 않았다. 핏빛과 함께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거인의 머리를 본 죽음은, 숨이 끊어지는 동시에 거인의 한 많은 영혼을 하늘로 끌어 올렸다. 몇 번의 몸부림이 있었지만, 영혼은 이내 죽음의 팔 위에 조용히 얹혀졌다. 거인의 오른 가슴을 지그시 쳐다보던 죽음은 드디어 육체의 종말을 확인했는지, 점차 지붕을 뚫고 하늘 위로 향하였다. 그 와중에도 영혼은 아쉽다는 듯, 허공에서 펄럭거리는 상장에서 눈을 떼려야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 거인의 삶은 이미 끝이 나고 있었다. 제아무리 거인의 영혼이 상장을 향해 손을 내밀어 봐도, 재빠른 죽음은 그를 하늘로, 저 구름 너머로 데려갈 뿐이었다.
  남자는 말없이 이 모든 광경을 지켜봤다. 비록 죽음의 입장은 못 느꼈더라도, 그는 두개골이 깨지는 소리, 그리고 꿈처럼 사라져버린 거인의 머리를 쳐다볼 수는 있었다. 솔직히 기대했던 결과는 아니었다. 그는 총을 쏘는 도중에도 총알이 아슬아슬하게 거인의 몸뚱이를 스치기를 바랐지 이런 머리 분해를 원하지는 않았다. 자기 자신이 한심한 듯, 남자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즈음이었을까. 온몸이 땀범벅인 남자 앞에, 익숙한 종이 하나가 오랜 하늘 여행을 마치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남자는 피로 뒤덮인 종이를 살며시 집어 올렸다. 핏물에 글씨가 번져 뭐라고 써져 있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소중하고, 이 무시무시한 것이 어떤 것인지.
  ‘말, 하, 기 대회.’
  남자의, 그의 오직 하나뿐인, 말하기 대회 상장이었다.
style by 아크v의 글
  한가한 커피점도, 놀이터도 아닌 법정이라 그런지, 방 안은 신탁 위에 앉아 있는 300 위원회 어르신들의 눈치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어르신들 앞에 선 남자는 긴장을 풀고자 눈동자를 아래, 위, 왼쪽,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주위를 자세히 살펴봤다. 아래는 거인의 핏물로 가득했고, 위는 지옥의 손길로 넘쳐났고, 왼쪽은 남자의 씻을 수 없는 죄로 도배된 벽이 위치했고, 오른쪽은 눈을 동그랗게 뜬 거인의 눈동자들이 일제히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려움 앞에 선 남자는 색다른 공기를 마시고자 매번 숨을 크게 들이셨다. 히터로 데워진 공기치고는 꽤 쓴 향을 띠었다.
  어르신들은 남자 앞에서 여러 가지 서류를 옆 사람에게 전했다, 돌려받기를 반복했다. 서류들에는 저마다 ‘거인 상해 논란,’ ‘키클롭스 집단 폐쇄 관련 논문,’ 같은 의미심장한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남자는 수없이 오가는 서류들에 지친 탓에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머니에는 그의 담배가 보이지 않았다. 실망한 남자는 사시나무처럼 떠는 두 입술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고자 두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입술은 손 밑에서 진동했다 멈췄다를 고장 난 테이프처럼 되풀이했다.
  “그래서, 자네가 거인, 그러니까 키클롭스 집단 대장을 2011년 5월 6일 11시 30분에 죽였다는 것인가?”
  지극히 형식적인 물음이었다. 별로 큰 뜻도 없이 그저 사실로 증명된 이야기를 확실히 하기 위해 던져진 아주 지루한 발언이 틀림없었다. 남자는 물음을 듣자마자 입을 열었지만 정작 말을 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혀가 충격에 굳어버린 탓이었다.
  “네, 그, 그렇습니다.”
  남자의 말이 축하 파티에서 간혹 나오는 5분짜리 건배라도 되는지, 위원회 어르신들은 그의 확실한 답변을 향해 커다란 미소를 띠었다. 몇 분 전만 해도 온갖 주름살로 가득했던 그들의 얼굴이 이렇게 20대의 얼굴로 순식간에 탈바꿈한 것은 남자가 봐도 심히 놀라운 일이었다.
  잠시 끊겼던 대화는 어르신들의 열찬 박수로 다시 이어졌다.
  “아주 잘했네. 경찰들도 못 잡은 키클롭스 집단의 대장을 죽이다니, 이걸로 확실히 키클롭스 집단의 사기를 낮출 수 있겠네. 더 좋은 사실은 이게 모두 자네 덕이라는 거지. 내일 즉시 시청에 이야기하여 자네에게 표창장을 내리도록 하겠네.”
  표창장. 남자의 평소 모습이라면 상을 받는 것이니 기분이 절정을 이뤘겠지만, 오늘은 뭔가 좀 허전했다. 상장이 257개가 되는데도 남자의 마음은 거인의 죽음, 그리고 핏물에서 벗어날 줄을 몰랐다. 남자는 이런 운 좋은 상황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신의 못된 마음을 여러 번 꾸짖어봤지만, 심장은 끝내 표창장을 위해 뛰지 않았다.
  그래도 감사의 표시는 해야 했기에, 남자는 위원회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수학에서만 가능한 줄 알았던 90도 인사로.
  “표창장이라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될 수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게 중요한가. 중요한 건 자네가 위험인물을 제거했고, 그로서 이 세상에 평화를 불러왔다는 점이네.”
  호탕하게 웃어주는 위원회를 들으니, 남자의 가슴은 그제야 어느 정도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웃음 하나로 모든 것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주변에는 여전히 거인의 새빨간 눈동자가 남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거인은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를 계속 쳐다보는 것으로 봐 남자가 거인의 말을 대신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거인이 묻고자 하는 질문은 꽤 위험한 발언이었지만, 남자는 결국 그의 말을 대신해주기로 했다. 그래도 불쌍한 영혼 아닌가. 게다가 한까지 묻고 가면 남자한테도 불리할지 몰랐다.
  “그런데 위원님.”
  “무엇인가요?”
  “저는 살인을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쪽 혐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는 거죠?”
  위원회 어르신들은 한동안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인 것 같았다. 하긴,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당당하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일 테니……. 하지만 추가된 주름살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상장 법률을 한없이 뒤지던 그들은 얼마 안 돼 남자를 위한 답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그건 당연하지 않은가? 알다시피, 상장 257개부터는 살인 혐의 전면 무죄니 말이네. 자네 정도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 거라고 생각했건만…….”
  살인 전면 무죄! 남자는 그제야 학교 때 배웠던 상장 규칙들이 생각났다. 상장 257부터는 과실치사 및 고의 살인도 무죄가 된다고 열심히 떠벌렸던 자신의 초등학교 선생이 그의 눈앞을 휙 지나갔다. 그때 그 말을 잊고 있었다니, 남자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거인도 남자와 비슷한 생각인지, ‘무죄’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남자의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져버렸다. 아마 녀석도 참 화날 것이고, 한편으로는 ‘무죄’라는 단어가 당연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솔직히 이런 사회에서 살인 무죄가 상장 257부터 나온다는 사실 자체는 놀랍지도 않았다. 상장 하나에 목숨을 버리는 곳인데, 살인 따위가 뭔 상관이겠는가.
  “음, 시간이 다 됐군요. 그럼, 이걸로 상장 300 위원회 판결을 마칩니다. 당신도 이제 그만 가도 좋습니다.”
  위원회는 여러 일로 바쁜 탓에 서둘러 법정을 떠났다. 남자는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을 정리하고자 법정에 남기로 했다. 오늘 꽤 많은 일이 일어났다. 상장을 위해 키클롭스 집단과의 전투, 거인과의 대화, 그리고 살인 면죄. 어떻게 보면 이익이 많은 날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상장도 하나 더 늘었고, 잃어버렸던 상장도 도로 되찾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남자의 양심은 그런 상장보다는 거인의 죽음, 살인 면죄라는 쪽에 더 중심을 잡고 있었다. 자신도 원하지 않았던 한 생명의 죽음, 그리고 그런 파렴치한 짓을 용서해주는 ‘살인 면죄’라는 멋진 상장 257개. 아무리 논리적으로 봐도 모순들이 군데군데 박혀있으니 말이다.
  남자는 양심을 어느 정도 다스리고자 주머니에서 담배 대신 한 장의 사진을 꺼냈다. 사진에는 한 8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 그러니까 키클롭스 소굴에서 가져온 거인의 아이가 찍혀 있었다. 놀랍게도, 방금 전까지의 끔찍한 전투에도 사진은 가장자리에 묻은 피 말고는 슬픔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천장 불빛이 반사되어 멋지게 빛을 발하니, 사진은 고민으로 가득한 남자보다 배는 더 행복해 보였다.
  남자는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다 옆에 있던 창문을 열었다. 하늘은 다른 날에 비해 푸른빛으로 가득했고, 간혹 떠다니는 구름은 기이한 형상을 띠고 있었다. 하나는 하늘을 나는 기린, 둘은 초원을 넘나드는 호랑이, 그리고 셋은 거인.
  “어라?”
  남자는 세 번째 구름을 빤히 쳐다봤다. 거대한 몸체와 상장 모양의 구름조각이 붙은 게 마치 거인과 비슷해 보였다. 남자는 일을 확실히 하고자 자신의 두 눈을 있는 힘껏 비볐다. 도저히 세 번째 구름의 존재를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는 한두 번 눈을 비빈 뒤 눈을 떠야 했지만, 남자는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머리가 세 번째 구름을 차마 볼 수가 없었기에. 그랬기에 그는 눈을 계속 비비고, 또 비비고, 그리고 다시 비볐다. 거인이라는 구름이 마침내 저쪽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녀석이 세상 뒤편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것도 아주, 아주 멀리.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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