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키보드 워리어

2011.01.11 19:3301.11




키보드 워리어


(소설 중 등장하는 영어 문장이나 단어는 편의를 위해 옆에 해석을 붙여두었습니다)


1
“그리드이즈굿, 그리드이즈굿.”
어느 겨울 화창한 오후, 난 사무실에서 블라인드를 내려놓고 계속 ‘그리드이즈굿’을 읊조리며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그리드이즈굿’이 어떤 뜻인지 알고 읊조리는 건 아니었다. 단지 게임하는데 써먹으려고 외우고 있었던 거다.
그 추운 겨울날에 따듯한 사무실에서 게임이라니. 그것도 근무 중에 이쯤 되면 내가 굉장히 편한 일터에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래, 반쯤 맞는 얘기다. 굉장히 편한데 그러면서도 돈은 해 뜬 날의 비처럼 쥐기 힘든 그런 일터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야, 날씨 좋은데 왜 또 블라인드를 내려놨어?”
내 보스이자 아는 동네 형인 명철이형이 들어오면서 말했다. 형은 방금 일거리 하나를 처리하고 오는 길이었다. 자기 아내와 잔 나이트클럽 웨이터 한 명을 손봐달라는 남자의 의뢰였는데, 명철이형은 자기 혼자서도 충분하며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 명철이형은 입고 갔던 점퍼를 소파 위에 벗어놓으며 물었다. 힘든 일을 처리하고 왔음에도 명철이형은 숨소리조차 차분했다.
“어우, 또 게임질이냐. 내가 부탁해 놓은 건 아까 똥싸면서 같이 변기에 내리고 잊어버렸냐?”
“에이, 형 책상 위에 있거든요?”
이 형이 부탁한 일이란 또 다른 의뢰와 관련된 것이었다. 한 남자가 자기 아내가 바람피우는 것 같다고 도움이 될 만한 물건으로 몇 권의 비밀 일기장을 가져온 것이다. 그 방대한 일기장 내용 중 바람이 의심될만한 내용을 찾아, 의혹이 가는 인물을 압축해달라는 것이 의뢰였다. 명철이형은 이 일을 내게 맡겼고, 난 오전 내에 일기장을 훑어서 끝내버렸다.
서류를 훑어보던 명철이형이 말했다.
“괜찮네. 이 정도면 되겠다.”
“그럼요. 내가 내 일은 착실히 하고 놀잖아요.”
“그럼, 그럼. 내가 뭐랬냐? 어찌 자기 일을 착실히 하는 녀석이 영어는 왜 그렇게 못 하냐?.”
“아, 형! 제가 늘 말하잖아요. 내가 싫어서 안 하는 거라니까요.”
“그러니까 왜 그렇게 싫어하냐고? 학교 시험에서도 영어는 20점을 넘긴 적이 없지. 아주머니가 너 영어 학원 보내려고 하니까 며칠을 단식 투쟁해서 결국 안 갔지. 독해력도 있는 얘가 영어 공부만 하면 금방 늘텐데.”
“뭐 싫은데 어쩌겠어요? 게다가 영어 못 해도 지금 잘 살고 있잖아요. 일도 하고...”
그 말에 명철이형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언제 망할지도 모르는 탐정 사무실에서?”
그래, 내가 일하는 곳은 탐정 사무실이었다. 명철이형이 탐정 사무실을 열고 집에서 놀고 있는 내게 같이 일하자고 제안해 온 것이다. 말이 제안이지, 실은 거둬준 거나 다름없었다. 어머니가 명철이형에게 나 사람 만들어달라고 큰 절까지 하려 했으니.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잘 모르셨던 거다. 이 탐정 사무소, 정말 언제 망할지 모르겠다. 심할 때는 일주일동안 전화 한 통 안 울릴 때도 있었다. 명철이형이 대기업 다니다가 그저 로망만으로 시작한 일이었기에, 무모했다면 무모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런 말을 내 자신이 하는 것은 초라해도 나는 왜 고용했느냔 말이다.
물론 나도 역할은 있다. 조수. 하지만 조수 역할이라고 해봐야 내가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명철이형에게 들어오는 일거리가 머리보단 몸을 주로 쓰는 일이라, 갖은 운동으로 몸을 제대로 키운 명철이형이 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가끔 들어오는 서류 작업이나 명철이가 심심할 때 옆에서 말동무 해주는 역할 말고는 없었다. 그리하여 생기는 시간이 참 많았고 시간을 나는 게임 그리고, 치트키로 축내고 있었다.
치트키라니. 사람들은 차라리 게임으로 시간을 죽인다는 내 말은 이해해도 치트키로 시간을 보낸다는 말은 잘 이해를 못 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치트키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도 많고, 그 존재를 알아도 게임의 재미를 해치는 암적인 존재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으니. 하지만 적어도 치트키는 내게 새로운 세계였다. 예를 들어 GTA3라는 게임에서 치트키를 쓰면 거리를 지나던 평범한 행인들이 갑자기 대두인간으로 돌변한다. 어떤 치트키를 쓰면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참 색다른 경험이 아닌가. 물론 난 게임하면서 그런 치트키만 쓰지는 않았다. 사실 대부분은 일을 쉽게 하기 위한 무적, 혹은 모든 무기 얻기 등의 치트키였다.
“그리드이즈굿? 그것도 치트키냐?”
그리드이즈굿은 워크래프트3에서 사용되는, 돈을 올리기 위한 치트키였다. 명철이형이 옆에서 잠시 모니터를 들여다보다 말했다.
“넌 뭐든 치트키구나.”
“재밌잖아요.”
“재미? 야, 치트키 쓰는 게 더 재미없지. 게임이라는 게, 그 뭐냐... 간당간당하게 관문 넘어가면서 하는 재민데.”
“뭐하려고 간당간당하게 관문을 넘어요? 스트레스만 더 받게...”
“허, 그러냐. 뭐 그건 됐고... 나와라, 의뢰비 들어왔으니까, 밥이나 먹자.”
“진짜요? 비싼 거요?”
“무슨 소리야, 분식집 가야지.”
“아니 무슨 제대로 된 거 먹을 것처럼 말하면서 분식집이에요? 고기 안 먹어요?”
“야, 그럼 네가 좋은 의뢰 하나 물어다주던가. <터너와 후치>보면 개가 추리를 도와주던데... 어찌 너는...”
“아니, 형 지금 나를 개랑...”
“그래, 그건 좀 심했다. 그래도 후치는 게임같은 걸로 전기 낭비하진 않으니까.”
우리가 티격태격하는 동안, 탐정사무소의 전화가 울렸다.
“이야, 오늘은 간만에 전화기가 불티나네?”
명철이형은 수화기를 들었다. 탐정에게 어울리는 전화기라고 산 다이얼전화기였다.
“예, 예. 누구시라고요? 아, 그래요. 알았습니다, 그럼 언제 오실 거죠? 예? 오늘 밤이요? 아니요, 안 되는 건 아니고요. 알았습니다, 그럼 이따 뵙죠.”
명철이형은 이것, 저것 메모해가면서 전화를 마쳤다.
“야, 이따 7시 쯤 의뢰인이 온단다.”
“그래요? 그럼, 수고하세요, 형.”
난 최대한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집에 가서 게임해야 하는데, 의뢰는 무슨 의뢰란 말인가. 그러나 나가려는 순간 명철이형이 강한 완력으로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어디 가?”



2
의뢰인은 정확히 7시에 왔다. 의뢰인이 왔을 때 명철이형은 뉴스를 보는 중이었고, 나는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뉴스에서는 요즘 서울을 중심으로 연이어 벌어지는 사립탐정 실종 사건에 대해 보도하고 있었고, 나는 롤플레잉 게임에서 최종 보스와 싸우고 있었다. 게임 속 주인공은 보스에게 수십 대를 맞아도 끄떡없었다. 무적이 되는 치트키를 썼으니까. 그렇게 서로의 일에 열중하고 있는 우리 둘을 의뢰인은 한동안 쳐다봤고 그의 존재에 대해 처음 눈치를 챈 것은 나였다. 나는 일어나서 뉴스 보며 열을 내고 있는 명철이형을 쿡쿡 찔렀고, 형도 일어나서 그를 돌아보았다.
의뢰인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영어를 모르는 나는 입을 닫았고, 명철이형이 영어로 그를 맞았다.
“하이... 아임...”
“아 괜찮습니다. 한국말도 잘 하니까요.”
외국인이 웃으면서 유창한 한국말을 했다. 명철이 형은 놀란 눈빛으로 말했다.
“그럼 아까 저랑 통화하신 분이...”
“그래요, 접니다.”
“예, 여기 앉으세요.”
명철이형이 외국인에게 손님용 소파를 권했고 우리는 건너편 소파에 앉았다.
“아까 전화로 어떤 집의 집사라고 하셨죠?”
“예. 피그 팻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니요,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아, 모르신다면 됐습니다. 주로 유럽 쪽에서 사업하시는 분이시고요. 저는 그 분의 의뢰를 가지고 왔습니다.”
“무슨 의뢰를...”
“예. 실은 저희가 잃어버린 물건이 있어서요.”
“잃어버린 물건이요? 그게 뭐죠?”
“키보드입니다.”
“키보드요?”
키보드란 말에 놀라 나도 명철이형도 서로를 멍하니 쳐다보다 이런 장난도 이해 못 하면 사람이 아니다 싶어서 크게 웃었다.
“핫핫, 웃긴데요? 그렇죠, 형?”
“어, 웃긴데. 이야, 집사님. 재밌으신데요.”
우리의 반응에 집사는 예의 웃는 표정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말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만, 아쉽게도 농담이 아니랍니다.”
“옛?!”
“피그 팻님은 정말 키보드를 찾고 있습니다.”
“아니 키보드라면 컴퓨터 키보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키보드입니까?”
집사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마치 웃음을 얼굴에 가져다붙인 것 같은 인상이라, 영 맘에 들지 않았다.
“그 부분은 죄송스럽게도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지금 그 키보드는 예전에 피그 팻님이 기거하시던 별장에 있습니다. 피그 팻님이 집사 및 하인들이랑 그 별장에서 사시다가 이번에 짐 다 챙겨서 지금 사시는 곳으로 이사 오셨는데, 실수로 그 키보드를 가지고 오지 못 했거든요.”
“그럼 의뢰란 그 키보드를 가지고 오는 일인가요?”
“그렇습니다. 어떻습니까? 보수는 이쪽 일에서는 받기 힘들 정도의 파격적인 액수를 드릴 생각입니다.”
파격적이란 말에 나도 명철이형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얼마나 주실 건가요?”
특히 명철이형은 묻는 폼이 너무 보잘 것 없어서 옆에서 지적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수락하시면 200만원, 키보드를 가져다주시면 300만원을 더 드리겠습니다. 나쁜 조건은 아니죠?”
명철이형과 나는 눈이 동그랗게 되어서 서로를 쳐다봤다. 키보드 하나 가져다주는 일 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좋은 조건이라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명철이형도 갈등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의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곳이 어디입니까?”
“별장 말입니까? 이 주소입니다.”
집사는 우리에게 별장 주소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었다. 그런데 쪽지에는 주소만 적혀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자세한 방법까지 적혀 있었다.
“찾아가기 힘든 모양이죠?”
“예. 피그 팻님이 외진 곳을 좋아하셔서요.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곳에 별장을 지으셨습니다.”
“그렇군요.”
“또 여쭤볼 것이 있으면 여쭤보세요.”
집사는 마치 물어볼 테면 마음껏 물으라는 식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별장이 큽니까?”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상당히 큽니다. 건물은 저택 하나지만 그 저택이 6층에 길이가 300미터 정도니까요. 키보드를 찾으시는 데 있어 그 점이 힘들 것 같군요.”
그의 말을 듣다가 문득 걱정되는 점 하나가 생각나 다시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나저나 저택을 완전히 비우셨다면 다른 누가 그 키보드를 가져갔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하지만 이런 물음조차 집사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건 정말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니까요.”
“집이 외진 데에 있어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아니면 뭔가요?
집사의 눈은 들여다보기 힘들 정도로 흔들림이 없었다.
“아, 아닙니다.”
“그럼 이제는 결정을 해주세요. 어떻게 할 겁니까? 나쁜 조건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저희 둘이 잠시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명철이형과 나는 서로 이야기했고, 결국 일을 하자는 것으로 결론을 맺었다. 일이 어느 정도 수준일지 감이 잡히진 않았지만, 여하튼 표면으로 드러난 것은 키보드를 찾는 간단한 일이고, 거기에 만성 적자를 겪는 사무실에 총 500만원의 보수는 거절하기 힘든 것이었다.
명철이형은 가서 계약서를 가져왔다. 임무수행, 비밀보장 등의 내용이 적힌 계약서였다. 명철이형이 먼저 사인했고, 집사가 피그 팻이 쓴다는 도장을 가져와서 인주로 찍었다. 계약 후에 집사가 가지고온 가방에서 돈을 꺼냈다.
“200만원입니다. 맞죠?”
막상 돈을 손에 쥐자 명철이형은 방금 보였던 침착함을 잃어버렸다. 저 정도로 이 형이 돈에 메말라 있었나 싶어 안타까웠다.
“설마... 만원이라도 비진 않겠죠?”
집사는 그 꼴을 보고도 예의 여유로운 표정을 잃지 않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지요.”
그 녀석이 가고 나서 여전히 돈을 들고 희희낙락거리는 명철이형에게 말했다.
“형, 괜찮겠어요?”
“뭐, 별일이야 있겠냐? 무슨 말도 안 되는 일만 안 일어나면 되는 거지.”
“그런데 왜 돈을 저렇게 많이 줄까요? 키보드 찾는데...”
“이상할 게 뭐 있어. 원래 이렇게 꿀 빠는 의뢰도 들어오고 그러는 거란다. 애완동물에 미친 사람들도 동물 찾아달라고 100만원도 주고 그러잖냐. 그냥 그런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별장이 외진 데 있다잖아. 그거 찾는 거랑, 그 크다는 저택에서 키보드 찾는 거랑 다 고생이지 뭐. 그 정도 받을만한 일이겠지. 혹시 모르니까 무기도 준비해서 가자.”
“그러면 되겠죠?”
“그래. 게다가 500만원이잖냐. 야, 이거 끝나면 1주일 정도는 사무실 쉬어도 되겠다.”
불안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분명 액수로만 치면 매력적인 의뢰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럼 내일 8시에 사무실로 와라. 자, 퇴근!”



3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먹을 것, 도끼와 칼을 챙겨서 목적지로 향했다.
“다 실었냐?”
“예.”
“그럼 가자.”
운전은 형이 했다. 난 운전면허가 없으니까. 형이 조수하려면 운전면허를 따라고 했지만, 난 줄기차게 버티는 중이었다. 결국 나는 운전하는 형이랑 농담 따먹기 하다가 이내 잠들었고 형이 깨우는 소리에 일어났다.
“야, 내려. 여기서부터는 걸어 가야할 것 같다.”
형은 집사가 준 쪽지를 손에 들고 말했다. 눈앞에는 숲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었다. 숲은 워낙 울창하게 퍼져서 이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린 내려서 소지품을 챙기고 우선 길을 향해 나아갔다.
“형, 쪽지에 뭐라고 적혀 있어요?”
“길을 쭉 가다가, 근처에 빨간 페인트로 칠해진 나무가 나오면 그 나무 뒤로 숲 속을 좀 걸으라네. 그렇게 한 200걸음 정도 되면, 저택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고. 아니, 도대체 얼마나 은밀한 생활을 좋아해서, 이렇게 집으로 가는 길도 숨겨 놓은 거야?”
숲 속으로 들어가서 평탄한 길을 100걸음 정도 걷자 쪽지에 적힌 대로 오른쪽에 빨간 페인트로 칠해진 나무가 있었다. 우리는 방향을 꺾어 그 나무 뒤로 걸었고, 그렇게 200걸음 정도 험난한 땅을 밟아가자,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그 내리막길을 쭉 걸어가면 위로 향하는 계단이 나오고 그 계단 위에 피그 팻의 별장이 있었다.
거대한 울타리로 둘러싸인 저택 건물은 매우 크고, 넓고 기묘했다. 저택 건물 앞의 정원이라 부를 것도 몹시 기묘했다. 정원을 채우고 있는 것은 풀도 나무도 아니었다.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있는 거라고는 수없이 많은 석상들이었다. 멀리서 보아서 확실치는 않으나 분명 인간을 조각해놓은 것 같았다.
그 기묘한 풍경에 비하자면 오히려 별장 건물은 무난했다. 그냥 네모난, 수많은 방을 가진 건물이었다.
명철이형은 눈앞의 광경에 혼란스러운 듯 했다. 하긴 누가 이 광경을 보고 혼란을 느끼지 않겠는가. 명철이형은 휴대폰을 꺼냈다.
“이거 뭔가 이상해. 그 집사에게 물어봐야겠어.”
하지만 휴대폰을 연 형은 더욱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전파가 안 통하잖아?”
“뭐라고요?”
난 내 휴대폰도 꺼내봤지만 역시 수신 불능으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네비게이션에도 찍히지 않고, 휴대폰도 통하지 않는 곳에 와있었다.
“형, 우리 어떻게 해요?”
명철이형의 얼굴에서는 고뇌가 파도마냥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쯧, 들어가야지. 계약도 했고 돈도 받았는데...”
우리는 차에서 필요한 것들을 꺼냈다. 혹시 몰라 휴대할 수 있는 초코바, 과일 등을 챙기고 각자 무기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챙겼다. 명철이형은 칼과 방망이를 챙겼고, 내게는 제법 가벼운 도끼를 주었다.
저택의 대문은 이미 열려있었다. 대문을 지나 정원에 이르자 우리가 느낀 기묘함은 더했다. 석상들은 하나같이 사람의 절규와 슬픔, 고통의 순간만을 담아놓은 듯 했다. 하나하나의 표정을 대할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석상이 숲처럼 빽빽이 위치해서 길을 찾아가기도 쉽지 않았다. 그 석상들이 뭔지 알았다면 우리는 그 석상들을 더 눈여겨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그냥 안으로 들어가는 일만 생각했다.



4
저택의 구조는 비교적 간단했다. 각 층의 왼쪽 끝과 오른쪽 끝에 계단이 하나씩 있고 그 사이로는 모두 방이었다. 1층의 몇 개 방을 보면서 우리는 방이 모두 텅텅 비어있음을 확인했다.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키보드라는 게 정말 여기 있다면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 없어야 찾는 게 더 빠를 테니까.
형과 나는 1층의 방부터 차근차근 뒤져볼 참이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각자의 손에는 도끼와 쇠파이프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둘 다 명철이형이 해결사 일을 하기 위해 마련한 것들이었다. 아무 것도 없어서 그런지 집 안 분위기가 묘하게 을씨년스럽다보니 우리는 조금 긴장하면서 걸었다. 일은 말 그대로 단순노동이었다. 방문을 열어보고 아무 것도 없음을 확인하면 다음 방으로 넘어갔다. 1층에서의 조사가 아무 소득 없이 끝나고 초코바라도 한 입 하려고 하는데, 명철이형이 옆에서 말렸다.
“야, 겨우 1층이다. 양심적으로 3층 정도는 가서 먹어라.”
명철이형은 그 말을 하고 1층 오른쪽 계단을 통해 2층으로 향했다. 에이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데, 하는 가벼운 투덜거림과 함께 나도 2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런데 2층 복도까지 올라간 명철이형이 반대편 복도 끝을 응시하면서 가만히 멈춰있었다.
“형 왜 그래요?”
“...저거 뭐지?”
명철이형은 내 얼굴조차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뭔가가 나타난 것이 틀림없었다. 나도 2층으로 올라가 명철이형의 시선이 향한 곳에 시선을 던졌다.
2층 가장 오른쪽 계단 근처 어둠 속에 무언가가 서있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이었다. 단지 보통 사람과는 조금 다른 점이, 비정상적으로 큰 체격이었다.
“거기 누굽니까!”
내 외침이 메아리치며 울렸지만, 건너편에 있는 녀석은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있었다. 나도 명철이형도 그 기세에 눌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다가 결국 내가 정신 차려서 명철이형에게 한마디 했다.
“형, 어떻게 해요?”
“네가 봐도 느낌 안 좋지, 안 그러냐?”
“안 좋죠, 그럼.”
“일단 밑으로 튀자. 오케이?”
“오케이.”
명철이형과 나는 뒤돌아 밑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뒤 돈 순간 뭔가가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고, 그 소리에 옆을 돌아보자 명철이형이 서 있어야할 자리에 명철이형이 없었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어디로 사라진 건지 알 수도 없었다. 단지 없어졌다. 원래 그 자리에 없었던 양.
“명철이형!”
놀라서 난 형을 불렀다. 그리고 내 부름에 누군가가 다행히 응답했다.
개소리로.
“멍!멍!”
난 밑을 내려다보았다. 치와와 한 마리가 내 주변을 어슬렁대고 있었다. 개 한 마리였지만 너무 급작스런 등장이라 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씹할! 뭐야!”
“멍!멍!”
치와와는 계속 내 주변을 돌며 짖어댔다. 갑자기 치와와라니 저 녀석은 언제부터 따라왔단 말인가. 개소리는 듣지도 못 했는데. 게다가 명철이형이 사라지고 나서 갑자기 치와와가 나타나다니 이 무슨 이상한 조화란 말인가. 마치 명철이형이 치와와로 변하기라도 한 것인양. 그러고 보니 주변을 둘러보다보니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치와와 근처에 명철이형이 입던 옷과 명철이형 손에 쥐어져있던 쇠파이프가 떨어져 있었다. 아까의 둔탁한 소리는 저것 때문이었을까.
그럼 설마?
그러나 내 생각은 길게 가질 못 했다.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 건너편에 있던 녀석이 우리를 향해 달려왔기에. 녀석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이 한 사람으로 현신한 모습이었다. 특히 가관인 것은 얼굴에 쓴 펭귄 마스크였다. 그 마스크의 녀석의 표정을 감춰서 그런지 녀석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움직임도 생각보다 빨랐다.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에 녀석은 어느새 복도의 중간까지 도달했다. 즉, 나는 그냥 녀석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뛰어야했다. 그래서 뛰었다. 계단을 내려가니 어느새 치와와도 나를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1층으로 내려가자 다행히 녀석은 그 곳에 없었다. 나는 잘 됐다 싶어, 현관문으로 향했다. 현관문까지 도달했을 때 나는 이제 대문까지 가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대문까지 갈 수가 없었다. 심지어 정원을 빼곡하게 채웠던 석상들은 없는데도. 문제는 그 석상들 대신 다른 것들이 서 있었다는 것이다. 얼굴이 하얀 이들.
좀비.



5
지금 이 모든 걸 겪어낼 건 나 하나뿐이었다.
물론 이 치와와도 있긴 했지만, 아직까진 그 정체가 의심스러운 이 치와와가 도움이 될 리는 없었다. 게다가 정체가 밝혀진다고 해도 치와와는 치와와였다. 얘를 어디에 쓴단 말인가.
난 도끼를 굳게 들었다. 창 밖에서 좀비들은 조금씩 걸어오기 시작했다. 녀석들의 속도는 느렸지만 수는 압도적으로 많았다. 어릴 때 수백마리의 흰개미가 나무를 파먹는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정도의 숫자는 아니어도 저 수십마리는 되어 보이는 녀석들은 이제 그런 식으로 나와 치와와를 파먹을 것이다. 녀석들의 걷는 소리, 신음 소리가 이 거대한 공간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잠깐.’
자세히 보니 그 좀비들 사이에 좀비들과는 조금 다르게 생긴 녀석이 하나 있었다. 좀비들보다 덩치가 월등히 큰 녀석.
녀석의 마스크로 알 수 있었다. 우리가 2층에서 목도한 녀석이었다. 저 살인마가 어떻게 저기까지 이동했단 말인가. 내가 1층에 내려가기도 전에 녀석이 벌써 저기로 이동해 있었단 말인가.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양. 그러고 보니 녀석의 손에 뭔가가 들려 있었다. 직사각형 모양의 것이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잠시 생각 후에 알 수 있었다.
키보드다.
분명 피그 팻이 원하던 것은 저 키보드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키보드를 찾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은 목숨이 위험했다. 좀비들은 시시각각 가까워졌다. 사람 하나와 개 하나가 저 좀비들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냥 도망 다녀야 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언제든 포위될 위험이 있었기에.
결국 난 어느 방이건 들어가기로 했다.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숨어있을 참이었다. 1층에는 모든 방의 방문이 열려있기에 한 방만 문이 잠겨있으면 의심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난 2층에 있는 방을 들어가서 난 문을 잠갔다. 하지만 계산치 못 했던 일이 생겨버렸다. 치와와였다.
“너 언제 들어왔어?”
녀석이 나 몰래 들어온 것이었다. 내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 치와와 목숨까지 걱정해줄 여유는 없었다. 난 녀석을 밖으로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녀석은 방방 뛰면서 버텼다. 녀석이 너무 시끄럽게 굴어서 좀비들이 듣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여기 있어도 되니까 제발 조용히 좀 해.”
하지만 녀석은 방방 뛰는 것도 울어대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뭔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은데 녀석이 무엇 때문에 그렇건 이렇게 시끄러운 건 나로서는 좋지 않았다. 난 결국 도끼 가지고 녀석을 죽여 버릴까 생각했다. 좀비 녀석들은 어느새 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찌나 숫자가 많은지 선두 그룹이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후방 그룹은 아직 정원에서 저택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이라 치와와를 조용히 시켜야했다. 난 도끼를 들었다.
“조용히 안 하면 이걸로 찍어버릴 테니까 입 닫아.”
다행히 치와와는 내 마지막 경고를 들었는지 입을 싹 다물었고 난 안심하고 도끼를 벽에 기대두었다. 녀석이 조용히 하자 좀비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더욱 시끄럽게 들렸다. 녀석들이 그냥 지나쳐주길 기대하면서 난 창문 옆 빈 공간에 몸을 숨겼다. 녀석들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이 쪽에 가까워졌고 난 최대한 어떤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었다. 2층 방들은 아예 건들지 않았으니, 방들은 모두 문이 닫혀 있을 것이고, 녀석들이 일일이 문을 열어보지 않는 한 이 방 안에 내가 있는 것은 모를 것이다. 다행히 녀석들은 그냥 복도를 뛰어갔다. 저런 식으로 6층까지 살펴볼 모양이었다. 창밖을 보니 집 밖에는 더 이상 좀비가 없었고, 나는 창문을 깨고 밖으로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때 치와와가 지랄을 하고 말았다.
녀석이 갑자기 괴로움에 찬 신음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도끼에 자신의 얼굴이 비친 모양이었다. 녀석은 아예 자기 얼굴을 보면서 짖어대기 시작했다.
“멍!멍!”
저 개새끼, 살려두는 게 아니었어.
아직 수많은 좀비들이 방 앞에 있었다. 녀석들은 조금씩 다가와서 문손잡이를 돌렸고 문이 잠겨 있자 다시 잠잠해졌다. 난 문이 잠긴 걸 확인한 녀석들이 포기하고 다른 곳을 향하는 기적이 일어나길 기대했다. 하지만 녀석들은 문손잡이를 여는 대신 주먹으로 손을 마구 과격하기 시작했다. 고통이라는 걸 모르는 듯 했다. 녀석들이 무지막지하게 주먹으로 쳐대자, 나무로 된 문은 조금씩 균열이 생겼다. 난 도끼로 창문을 깨부쉈다. 뒤에서 빌어먹을 개새끼가 울부짖었다. 저 새끼의 목을 따고 혼자 살아남고 싶었지만, 저 개가 누군지 알 것 같아 녀석을 쉽게 죽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녀석을 잠바 안에 집어넣었다.
결국 나무문은 부셔졌다. 부셔진 문틈으로 보이는 좀비들의 얼굴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 얼굴을 양잿물에 오래 삭힌 얼굴이었다. 그 얼굴들을 보고 있자니 2층에서 뛰어내릴 각오가 단번에 섰다.
난 한 손에는 도끼를 들고 창으로 뛰어내렸다.



6
뛰어내리자 아직도 좀비 후방 그룹이 현관문 부근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정원으로 통하는 중앙의 계단으로 가기 위해서는 녀석들과 맞닥뜨려야 했고 나는 녀석들에게 과감히 다가가 도끼를 휘둘렀다. 명철이형이 이 의뢰를 위해 새로 샀던 도끼는 녀석들의 머리를 깨끗하게 두 동강 내놓았다. 두 녀석들을 그렇게 보내고 좀비들이 잠시 주춤한 사이에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숲 같았던 석상들이 모두 없어지자 정원에는 살인마, 한 녀석 밖에 남지 않았다. 정말 압도적인 생김새였다. 그런 녀석이 무기는 들지 않고, 손에 키보드를 들고 있다니, 저거야말로 키보드 워리어가 아닌가.
하키 마스크 때문에 녀석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녀석은 내가 다가가는 동안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여유로운 태도였다. 하긴 약해빠진 사람이랑 개 한 마리에게 어떤 녀석이 두려움을 갖겠는가. 게다가 지금은 개가 내 품 속에 있는 것을 모를 수도 있으니 사람 하나만 상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애초에 내 목표도 녀석과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를 조심히 빠져나가는 것이지. 그래서 난 정원 가운데를 질러가지 않고, 정원 가장자리로 서서히 걸어갔다. 녀석과 다가오는 좀비들을 살피면서 말이다.
그 때 돌발상황이 일어났다.
개새끼가 또 일을 내고 만 것이다.
녀석이 갑자기 잠바 밖으로 뛰쳐나와 정말 미친개처럼 괴물을 향해 돌진했다. 녀석을 말릴 틈도 없었다. 개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살인마 녀석도 당황한 것 같았다. 녀석은 한 손에 들고 있던 키보드를 들어서 다른 한 손으로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키보드라니.
내 앞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살인마를 향해 달리던 치와와가 사람으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명철이형으로 변했던 것이다. 개새끼, 아니 명철이형은 돌진하던 기세를 멈추지 못 한 채 그대로 살인마 녀석에게 부딪혔고 그 충격으로 뒤로 붕 날아서 땅바닥에 떨어졌다. 충격에 살인마 녀석도 주춤하긴 했지만 뒤로 물러나진 않았다.
하지만 명철이형도 땅바닥에 떨어진 충격에 굴하지 않고, 재빨리 살인마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명철이형의 눈은 키보드를 노리고 있었다. 달리던 명철이형은 어느새 키보드에 가까워졌고, 그 즈음 정신을 차린 살인마는 명철이형을 주먹으로 위에서 찍으려고 했다.
“조심해요!”
다행히 명철이형은 옆으로 피했고, 살인마의 주먹은 그대로 땅바닥을 찍었다. 그 틈을 타서 명철이형은 키보드를 집는데 성공했다.
“야, 키보드 받아!”
명철이형이 내게 키보드를 던졌고, 난 들고 있던 도끼를 놓고 키보드를 받았다.
“야, 튀자!”
명철이형은 살인마를 등지고 내 쪽으로 뛰어왔고, 나도 정신을 차리고 대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살인마는 전속력을 다해 우리를 쫓아왔다. 심지어는 뛰어오다 내가 놓은 도끼마저 든 채로 달려왔다. 쫓아오는 건 살인마뿐만이 아니었다. 좀비들도 우리를 쫓아왔다. 그 모습이 마치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같았다. 도망가면서 난 명철이형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에요? 역시 그 개새끼가 형이었어요?”
“너, 개새끼라니...”
“아, 미안해요. 그나저나 이 키보드 뭐에요? 이 키보드 치면 뭔가 되는 거예요?”
“그런 것 같아. 분명 녀석이 방금 키보드질을 했잖아. 그랬더니 내가 다시 사람으로 바뀌었단 말이야. 뭐 분명 그러려고 하진 않았을 거고, 실수로 잘못 쳤던가 했겠지만... 여하튼 날 변하게 했지. 그러니까 저건...”
“치트키같은 거예요?”
“그렇지, 여하튼 좀 더 가서 생각해보자고. 얼른 튀기나 해!”
우리는 계속 뛰어서 대문 근처까지 도달했다. 그 때 뒤에서 뭔가 무거운 것이 날아오는 소리가 났다.
“야, 엎드려!”
명철이형이 급박하게 말했고, 우리는 엎드렸다. 순간, 내 머리카락에 뭔가가 스치는 느낌이 났고 내 눈 위로 도끼가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도끼는 날아가서 대문 옆의 돌담을 뚫고 날아갔다.
내 눈 밑으로 내 머리카락이 소복이 떨어졌다. 난 너무 놀라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멍청아, 일어나!”
뒤 돌아보니 녀석은 우리와 열 걸음 안의 거리에서 달리고 있었다. 난 정신없이 일어나 뛰었다.
“이대로 안 되겠어.”
명철이형은 뭔가 생각하더니 시선을 앞으로 향하고 말했다.
“야 내가 신호줄 때 오른쪽으로 방향 틀어, 알았냐?”
난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달렸다. 숨이 차서 그냥 쓰러지고 싶은 정도였지만 죽는 것보단 뛰는 게 나았다. 얼른 명철이형이 신호만 주기를 기다렸다. 어느새 우리는 대문 앞에 도달했고, 살인마 녀석 역시 우리에게 너무 가까워졌다. 녀석이 손만 뻗으면 우리는 붙잡힐 것 같았다. 그 때 명철이형이 말했다.
“지금이야!”
대문 바로 앞에서 나는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어서 달렸고, 명철이형은 왼쪽으로 틀어서 달렸다. 우리 바로 뒤에서 쫓아오던 살인마 녀석은 차마 방향을 틀지 못 한 채 그대로 대문에 부딪혔다. 열려있던 대문은 압력 때문에 그대로 앞으로 열렸고, 녀석은 대문 밑의 계단으로 굴러 떨어졌다.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뭉툭하게 울렸다.
“야, 죽었냐?”
숨을 헐떡이며 명철이형이 물었다. 대문 밖을 내다보니 계단 곳곳에 피가 묻어있고, 살인마 녀석은 계단 밑에 널브러져 있었다.
“죽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타격은 제대로 입힌 것 같은데요?”
“그래?”
좀비들은 천천히 오고 있었고, 아직 녀석들과의 격차는 조금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포위되어 있었다. 살인마 녀석이 정신을 잃었다고 해도 언제 깨어날 지 장담키 힘든 녀석이었다. 그렇기에 대문 밖으로 도망간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금 우리서로는 이 키보드 사용법 아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키보드 뒷면 좀 보자. 거기 뭔가 적혀 있는 걸 내가 봤어.”
명철이형과 나는 키보드 뒷면을 살펴보았다.


The Cheat warrior.

anyone can be the master of this keyboard. Now my master is 'Penguin mask murderer'. If you want to be my master, please type 'make me master'. If you become my master, I will perform any uncertain command as you want. Because, I am contacted with your brain. For example, If you type 'make him die', I know who is 'him'
(누구든 이 키보드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제 주인은 펭귄 마스크 살인마입니다. 만약 당신이 제 주인이 되고 싶다면 ‘나를 주인으로 만들어줘’라고 치세요. 만약 제 주인이 된다면 전 당신이 어떤 애매한 명령을 내려도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드립니다. 왜냐면, 전 당신 뇌랑 연결되거든요. 예를 들어 당신이 ‘그’를 죽게 해달라고 타이핑해도, 저는 ‘그’가 누군지 압니다.)


How to use : I perform command only like 'Make +OO +OO'. Of course, you can only use English, Got it?
(사용법: 저는 ‘Make + OO + OO' 를 사용해야만 명령을 듣습니다. 물론 영어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알아들었음?)


For example

Make me beautiful woman.
Make corpse zombie
Make corpse revive
Make him rabbit

(예를 들어드리죠
나를 아름다운 여자로 만들어줘
시체를 좀비로 만들어줘
시체를 다시 부활시켜줘
그를 토끼로 만들어줘)

recent command(최근 명령어)

make dog sir(개를 sir(사람 남자 앞에만 붙는 호칭)로 만들어줘)
make me teleport(날 순간이동시켜줘)
make the stronger dog(더 힘 센 녀석을 개로 만들어줘)


“그랬구나. 녀석이 make dog die를 치려다가 실수로 make dog sir을 쳤구나. 그래서 내가 사람이 된 거였어.”
영어를 읽으면서 뭔가 알아가는 형과 달리 나는 일찌감치 설명서에서 눈을 떼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명철이형은 읽으면서 깨달음의 탄성을 계속 냈지만 더 이상 읽을 시간도 없었다. 좀비들이 이미 사정거리 안이었다. 더 이상 키보드가지고 우물쭈물할 틈이 없었다. 심지어 우리에게는 무기도 없었다.
그 때 대문 밖에서도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살인마 녀석이 천천히 계단을 밟고 올라오고 있었다.
“My keyboard... It's my keyboard..."
“형, 어떻게 해요? 다 해석했어요?”
“대충...했다. 그런데 이게 될지 안 될지 장담을 못 하겠다.”
“일단 써봐야죠. 실패해야 죽기 밖에 더 해요? 어차피 아무 것도 안 해도 죽을 것 같은데.”
“그렇지, 시도해보자.”
명철이형이 키보드를 바닥에 놓고 뭔가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좀비는 이미 우리 바로 앞에 와있었다. 좀비 선두부대 녀석들 중 하나가 내 머리를 붙잡았다. 몇 명은 명철이형의 등을 붙잡고 뒤로 넘어뜨리려고 했다. 그 즈음 명철이형이 엔터를 눌렀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좀비들이 허공으로 꺼진 듯 없어졌던 것이다. 갑자기 눈앞이 휑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살인마는 다가오고 있었다. 녀석은 눈앞의 좀비들이 모두 없어진 걸 알았는지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녀석과의 거리가 워낙 가까웠기에 대처할 수도 없었다.
녀석이 발로 내 배를 찼다.
마치 망치로 내 배를 때린 것 같은 고통이 전해졌다. 뱃속의 내장이 터진 것 같았다. 거친 기침이 계속 나왔고, 기침에는 피도 섞여 있었다. 난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통에 신음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깨어있는 채 버티고 있는 것만 해도 큰일이었다. 그 때 명철이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Hey, catch me!(야, 나 잡아봐라!)"
간신히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명철이형이 뭐라고 하면서 키보드를 들고 도망가고 있었다. 살인마를 유인하려는 것 같았다.
“My keyboard! That's my keyboard!(내 거야! 내 키보드야!)"
살인마가 명철이형을 뒤쫓기 시작했다. 뛰는 속도가 명철이형보다 더 빨랐다. 저러다가는 곧 따라잡힐 것이 분명해보였다. 명철이형은 뛰면서 키보드로 뭔가 타이핑했다.
“Stop! Stop!"
살인마 녀석은 뭔가를 외치면서 명철이형을 쫓았고 녀석은 점점 명철이형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키보드로 타이핑하며 뛰느라 명철이형의 뛰는 속도는 살인마보다 현저히 느렸고, 저런 식이면 곧 명철이형은 곧 녀석의 손에 잡힐 터였다.
“형 그냥 키보드 포기하고 뛰어요!”
하지만 명철이형은 내 말에도 아랑곳 않고 그 위험한 도박을 계속 했다. 녀석이 명철이형을 어떻게 만들어버릴지는 눈뜨고 보기 힘들 것이다.
결국 타이핑하며 뛰던 명철이형은 녀석의 사정거리 안에 들고 말았다. 녀석이 명철이형의 머리를 손으로 내리찍으려고 했다. 난 눈을 감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난 다시 눈을 떴다.
살인마 녀석이 멈춰 있었다. 마치 거대한 인형처럼. 녀석의 손은 명철이형의 머리에 닿아 있었고, 명철이형은 잠시 후 눈을 뜨고 주저앉았다. 키보드가 먹힌 듯 했다. 분명 저 녀석을 죽이라던가, 멈추라던가 하는 명령어를 쳤겠지.
“됐다...”
명철이형이 주저앉은 채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형은 곧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내 쪽으로 와서 내 앞에 앉았다. 난 형이 또 그 키보드 가지고 뭔가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형은 내 머리를 가볍게 한 대 쳤다. 난 놀라서 물었다.
“아니, 형... 콜록, 왜 이래요?”
“아까 죽이려던 것에 대한 벌이다.”
가벼운 유머인 모양인데, 배가 아파서 웃을 수도 없었다. 명철이형이 키보드로 뭔가를 타이핑했고, 놀랍게도 더 이상 고통이 없었다.
“뭐야?”
난 놀라서 일어났다. 몸이 팔팔했다.
“이 키보드 죽이는데?”
“그러네요, 좋네요. 그나저나 어떻게 쓰는 거예요, 이거?”
명철이형이 내게 키보드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했다.
“여기 뒷면에 있는 게 이 키보드 사용법인데, 우선 make me master라고 쳐서 주인을 바꿔줘야 된다고. master가 주인이란 뜻이거든. 방금까지 이 키보드 주인이 저기 있는 저 놈이었거든? 저 놈 이름이 펭귄 마스크 살인마인가봐. 그래서 내가 make me master라고 치니까, 봐라. 키보드 주인 이름이 바뀌었잖아. Myung-chul Lee로.”
“뭐, 봐도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신기하네. 그래서 좀비들이랑 저 살인마랑 처리할 때 뭐라고 친 거예요?”
“자 그건 여기 최근 명령어에 있잖아.”


recent command(최근 명령어)

make him recover(그를 회복하게 해줘)
make him stop(그를 멈추도록 해줘)
make zombies ants(좀비들을 개미로 만들어줘)
make dog sir(개를 sir(사람 남자 앞에만 붙는 호칭)로 만들어줘)
make the stronger dog(더 힘 센 녀석을 개로 만들어줘)


“...뭔 말인지 모르겠는데?”
“제일 위에 건 너를 회복시켜주란 거고, 두번째는 그를 멈춰줘, 그러니까 펭귄 마스크 살인마를 멈춰달라는 이야기인데, 그냥 이렇게 ‘그’라고만 쳐도, 키보드가 알아먹는다고 하더라고. 고 두 번째 거는 좀비들을 개미로 만들어달라는 명령어지.”
“그래요? 그럼 좀비들이 다 개미가 됐단 말이에요?”
“그래. 봐라. 어딘가에서 돌아다니고 있을 거야. 아니면 우리 발에 밟혀 죽었던가.”
“이야, 거 신기하네. 나도 좀 줘봐요.”
“왜 치트키라서 흥분되냐?”
그랬다. 현실에서의 치트키라니.
명철이형에게서 키보드를 건네받아, 명령어를 쳐보기로 했다.
“형 아까 그 주인 만들어달라는 걸 어떻게 친다고요?”
“뭐 주인을 바꾸겠다고?”
명철이형의 눈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아, 형 잠깐만 가지고 놀고 줄게요.”
“쩝...알았다. 너 제대로 알고 쳐라. 안 그러다가 큰 일 난다.”
“어차피 형 도움 안 받으면 뭐라고 치지도 못 해요.”
영어와는 전혀 상관없는 나를 위해 명철이형은 친절하게 알파벳을 하나씩 불러주었고, 난 형의 안내대로 make me master를 쳐냈다. 기분이 설렜다. 뭘 하면 좋을까. 지금 하늘이 맑으니 비가 내리게 하는 건 어떨까. 아니면 개미가 된 좀비들을 나비로 만든다거나. 다양한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실현시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이를 실현시키려면 영어라는 수단이 있어야 하는데, 그 쪽으로는 지식이 싹 비어있으니까. 내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켜보며 명철이형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뭐야 이건, 가지고 있어봐야 써먹을 줄도 모르네.”
“아 잠깐만요. 이건 뭐에요. 에프, 오, 알, 이...
“포 이그잼플(For example)? 아 이거... 예잖아. 예."


For example

Make me beautiful woman.
Make corpse zombie
Make corpse revive
Make him rabbit


명철이형은 그 예 중 하나를 보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한 번 쳐봐. 메이크 미 뷰티풀 우먼.”
“이거 좋은 거에요?”
“그럼 좋은 거지, 만족할 거다.”
“아니 밑에 있는 세 개는요?”
“야, 밑에 있는 세 개는 치면 큰 일 터지는 거야. 두 번째 거는 시체를 좀비로 만들자는 거고, 세 번째는 시체를 되살리자는 거고, 네 번째 거는... 토끼로 만들자는 건데, 여기서 him은...”
“아 나도 him 정도는 알아요. 그녀 아니에요?”
“그녀 좋아하시네... him은 '그‘지.”
그 때 대문을 통해 누군가가 들어왔다. 집사였다. 대문을 통해 그의 얼굴이 보이자 우리는 안도했다.
“뭐야, 집사님이셨습니까?”
그러나 그의 손을 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안도할 수 없었다. 그는 손에 총을 쥐고 있었고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아, 탐정님 일행이군요.”
총을 겨누고 있는 주제에 웃음은 여전했다.
“예, 저희니까 이제 그 총은 내리시는 것이...”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고 계신 게 그 키보드 맞습니까?”
“예, 그러니까...”
총이 발포되었다.
총알은 명철이형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명철이형은 쓰러졌고, 난 있는 힘을 다해 뛰어서 다음 총알을 간신히 피했다. 빌어먹을, 저 자식이 지금 써먹을 만큼 써먹었으니 우리를 버리겠다는 건가.
집사는 다시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 순간 떠오른 방법이라고는 굉장히 구식적인 방법 밖에 없었다.
난 키보드를 내 몸 앞으로 내밀었다. 순간 방아쇠를 당기려던 집사는 놀라 총을 위로 향했고, 난 키보드를 내던지고 집사에게 돌진했다. 집사는 그 사이에 다시 내게 총을 겨눴고, 난 녀석이 자세를 잡고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녀석의 몸을 잡고 앞으로 밀어버렸다. 힘이 제대로 실린 한 방이었다. 녀석은 뒤로 나자빠졌고, 총은 공중으로 떴다가 떨어졌다. 난 녀석의 위에 올라타서 목을 조르려 했다. 하지만 녀석은 치밀했다. 녀석은 품에 숨겼던 칼을 꺼내 내 배를 한 번 그었고, 난 쓰러져서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집사는 일어나서 몸에 붙은 흙을 털어내고, 키보드와 총을 집어 들었다.
“당신들 참 오래 버텼어요. 특히 테이트 녀석을 저렇게 만들다니 참 놀랐습니다. 키보드를 쓰신 모양이군요.”
“테이트라니... 아는 사람이었어?”
집사는 처음 봤을 때처럼 침착하게 웃고 있었다.
“그럼요. 키보드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하인의 자식 중 저 녀석을 저렇게 키웠죠. 애초에 덩치가 큰 녀석이었고, 우리가 의료팀을 만들어서 근육을 억지로 키우고, 약물도 주입했습니다. 애초에 제정신이 아닌 녀석이라 좀 편했죠. 매일 쓰고 있는 그 펭귄 마스크도 공포영화광인 녀석이 생각해낸 거니까요. 그런데 저 녀석이 키보드에 욕심을 낼 줄은 몰랐어요. 피그 팻님이 이 집에서 나온 건 다 저 녀석 때문이었습니다. 녀석이 피그 팻님이 잠든 틈을 타서 교묘하게 키보드를 빼앗았거든요. 그 뒤로 이 저택에 남은 건 녀석뿐이었죠.”
“그럼... 이 좀비들은 뭡니까?”
“아, 제가 방금 저택에 남은 게 테이트뿐이라고 했죠? 그건 산 사람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사갈 때 하인들은 우리가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워낙 피그 팻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그냥 죽이는 건 다른 사람들 눈치 보이고해서 피그 팻님이 키보드를 가지고 사람들을 조각상처럼 만들기로 한 겁니다. 당신들도 들어오면서 그냥 조각상인줄 알았잖습니까.”
“아니, 그렇게 비밀이 많으면서 우리는 왜 보낸 겁니까?”
“궁금한 게 좀 많으십니다? 하지만 곧 가실 분이니, 망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차피 탐정 보내봐야 여기서 살아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지금까진 그랬죠. 저 중에는 분명 우리의 의뢰를 받고 여기에 와서 테이트에게 죽은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여기에 들어온 이상 테이트와 저 키보드의 힘을 이기지 않고 살아나갈 이들은 없죠, 그래서 우리로서는 안 되면 죽는 거고, 되면 좋은 거라는 생각으로 당신들을 보낸 겁니다. 여하튼 그 시도가 오늘 결실을 맺었네요. 감사드립니다. 그 보답으로 단 한방에 보내드리죠, 당신 친구처럼.”
결국 이런 식으로 끝났다. 좀비들과 살인마에게서 벗어날 때만 해도 내 인생에 밝은 미래만 있을 것 같았는데, 이런 식으로 끝이 나다니. 제길, 피그 팻이란 녀석은 미국인이니 능숙한 영어로 키보드의 주인을 자신으로 바꾸겠지. 아, 제길. 적어도 뒤에 있는 예라도 한 번 써볼 걸.
잠깐, 아까 마지막 거 내용이 뭐더라. 그래, 그거.
“잠깐만요. 죽이기 전에 마지막 소원이 있어요.”
나를 향해 총을 쏘려던 집사는 순간 총을 내려두고 웃었다.
“무슨 소원 말입니까?”
“일단, 당신도 그... 키보드 사용법을 알고 있는 거죠?”
“물론이죠. 피그 팻님이 워낙 철저한 분이라 제게도 많은 것을 가르쳐주시진 않았습니다만. 어느 정도는 압니다. 그냥 키보드를 가지고 make로 시작하는 명령어를 치면 되는 것 아닙니까? .”
‘그냥 키보드를 가지고’라니 녀석은 아직 이 키보드의 중요한 부분을 모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도박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러면 하나만 타이핑해주세요.”
내 말을 듣자 집사가 마구 웃었다.
“당신 미쳤습니까? 내가 당신한테 좋을 거라면 타이핑해주겠어요?”
“당신한테 손해될 것은 없는 말입니다.”
집사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하긴, 뭐 나한테 안 좋은 거면 내가 타이핑 안 해주면 그만이니까요, 뭡니까?”
“저를 토끼로 만들어주세요."
"뭐요? 토끼로요?“
녀석은 호쾌하게 웃었다.
“핫핫, 그래요.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하지 못 했나 싶네요. 이렇게 키보드를 얻게 되었으니 한번 장난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각오하세요. 토끼로 변하는 게 끝이 아닐 테니까. 어디 보자... make that man rabbit..."
녀석은 키보드를 가지고 타이핑을 시작했다. 이건 나름의 심증이 있는 도박이었다. 명철이형은 아까 키보드를 사용하려면 주인이 되는 명령어를 먼저 쳐야한다고 했는데 녀석은 그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그러니 아직 주인은 나고 키보드는 내 입장에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타이핑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 저 녀석인데도 효과가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50대 50의 확률이었다.
집사가 엔터를 눌렀다.
그리고 귀여운 토끼가 되었다.
그 토끼는 한동안 멈춰 있었다. 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겠지. 잠시 뒤 토끼는 자신의 다리를 쳐다보더니 상황이 파악이 된 듯 혼란 속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다가 이윽고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토끼의 공격이란 그냥 따끔한 정도였다.
이젠 내 차례가 되었다. 날 공격하다가 안 되자 토끼 녀석이 키보드를 가지고 도망가보려 했지만, 난 그런 녀석을 손으로 집어서 벽에 힘차게 내던졌고 쿵 소리와 함께 녀석은 기절했다.
토끼 문제가 정리가 돼서 명철이형을 살펴보니 형은 죽어있었다. 하긴 총알이 심장을 관통했는데, 살 수 있을 리가 없지.
난 키보드를 들고 명철이형이 내게 쳤던 그 명령어를 한 번 더 쳤다.




7
그 다음 일은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물론 피그 팻은 키보드를 받지 못 했다. 대신 사망했다. 영어를 좀 배우고 나서 내가 제일 먼저 친 명령어가 그거였거든.

make Pigg Fatt die

곧 신문에 속보가 떴다. 피그 팻이 향년 60세로 죽었다고. 하지만 뉴스에서는 그 외에도 놀라운 소식이 많았다. 실종 탐정들 전원이 무사 귀환하여 충격, 정신을 잃은 의문의 거구와 토끼 한 마리가 시골에서 발견되어 현재 경찰이 수사 중, 같은 뉴스들 말이다.
명철이형과 나는 여전히 탐정 사업 중이다. 우리에게 의뢰는 더 이상 어렵지 않다. 물론 명철이형은 키보드 도움만 받으면서 사는 것은 좋지 않다고, 가끔은 몸으로 해결하고 온다.
그렇게 명철이형이 의뢰를 해결하는 동안, 난 여전히 게임이랑 치트키로 시간 죽이고 있냐고? 아니. 내 여가 시간은 조금 달라졌다. 이제 난 사무실에서 영어 공부를 한다. 현실에서 치트키가 가능해졌는데, 굳이 게임을 할 필요가 뭐가 있나. 그리고 그 키보드는 영어로 움직이는데, 내가 영어 공부를 안 할 수가 없다. 명철이형 말 대로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영어 공부는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437 단편 겨울의 아이 김진영 2011.01.09 0
단편 키보드 워리어 심동현 2011.01.11 0
1435 단편 군견의 편지 먼지비 2011.01.15 0
1434 단편 [엽편] 천국과 지옥 먼지비 2011.01.18 2
1433 단편 어느 베트남 새댁의 눈물 들국화 2011.01.20 0
1432 단편 그 남자의 귀 장피엘 2011.01.27 0
1431 단편 얼굴 알레프 2011.02.04 0
1430 단편 머피스트1 알레프 2011.02.04 0
1429 장편 With 7 -01- 湛燐 2011.02.05 0
1428 단편 상장 1/256 김형철 2011.02.07 0
1427 단편 종의 기원9 앤윈 2011.02.10 0
1426 단편 멸망할지도 김진영 2011.02.10 0
1425 단편 J라는 사람이 방아쇠를 당겼다는 이야기. 장우석 2011.02.13 0
1424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5] 최현진 2011.02.13 0
1423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6] 최현진 2011.02.13 0
1422 단편 두세 계 징이 2011.02.14 0
1421 단편 [번역] 프랑켄슈타인의 신부 - 마이크 레스닉1 이형진 2011.02.16 0
1420 단편 마녀의 밤. 브리그리 2011.02.17 0
1419 단편 오늘 밤의 여인들1 이니 군 2011.02.18 0
1418 단편 한밤, 광대와의 술자리1 이니 군 2011.02.18 0
Prev 1 ... 71 72 73 74 75 76 77 78 79 80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