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어떤 결핍.

2010.03.13 00:4503.13

두번째로 뵙습니다.(__)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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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글을 쓰던 중에, 쏟아지던 문장이 뚝 하고 그쳤다.

이런 상황에는 매우 익숙하다.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하고 있음에도, 내게는 글을 쓰는 시간보다 글을 기다리는 시간이 많았다. 남들은 슬럼프라 부르는 것이 내게는 거의 일상이었고, 글이 나오는 순간이야말로 마치 메마른 땅에서 오랜 삽질 끝에 물줄기가 솟구치듯이 오랜 기다림 끝에 터져 나오는 아주 잠깐의 안식이었다. 솟구친 물줄기는 금세 말라버리고 그것은 쏟아지던 글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또 다른 물줄기를 찾아 기다려야만 했다.

보통은 삼 개월에 한 번꼴로 글이 나온다. 그러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종일 자판을 두드리곤 했다. 이번엔 기다림이 좀 길었다. 책의 종반부를 남겨놓고 거의 반년 간을 기다렸던 것이다. 마감일 걱정으로 지난 몇 달간 꺼멓게 타들어간 속사정을 오늘 하루가 다 보상해주는 느낌이었다. 마지막에 와서 문장이 끊기긴 했지만, 앞으로 예상되는 분량은 고작 몇 문장 정도인지라 그다지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기다림은 길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몇 분 정도?

빛나는 하얀 바탕에 아로새겨진 검은 폰트. 코앞에서 모니터가 빛난다. 글을 쓰느라 정신없는 새 모니터에 코가 닿을 만큼 다가가 있었다. 최대한 등을 의자 쪽으로 당기면서 허리에 통증이 일었다. 끄응. 작은 신음을 흘린다.

글을 쓰는 내내 모니터 안에 갇혀 있던 내 시야가 모니터 밖으로 펼쳐짐과 동시에 나는 내 방에서 빛나는 것은 모니터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방 전체가 껌껌했다. 이런, 대체 얼마 동안 이러고 있었던 거지? 시곗바늘은 일곱 시 이십삼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신없이 글을 쓰는 새에 밤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불을 켜는 대신 나는 담뱃불을 켜고 말았다.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재킷 소매 위로 비죽 나온 흰 옷깃이 보인다.

오늘이 뭔 날이기에 와이셔츠를 입었지?

그게 무슨 상관인가. 비틀비틀 기어올라가는 담배연기 너머로 오늘 쓴 글을 천천히 검토해보려 하지만, 이 옷깃 따위가 다시 정신을 흩어놓았다. 자꾸만 드는 잡념에 글을 검토하는 것을 포기했다.

굳이 차려입어야 하는 날이 아니고선 와이셔츠는 꺼리는 편이다. 티셔츠가 편하다. 와이셔츠 특유의 목과 손목을 옥죄는 느낌은 금세라도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게 해 혐오스럽다. 앞으로 고작 몇 문장밖에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싶진 않아, 목과 손목 부분의 단추만 끄르고, 넥타이 목을 헐겁게 했다. 한결 나아졌다.

그러고 보니 잘도 이런 옷을 입고서 죽 몇 시간을 글을 써댔군. 밖에서 들어오자마자 급한 마음에 곧장 컴퓨터 앞에 앉은 모양이다. 집에 몇 시에 들어왔는지, 집에 들어오기 전에 어디서 뭘 하고 왔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뜬금없이 이런 걸 입진 않았을 테고, 뭔 일이 있긴 있었을 텐데 그게 뭔지 가물가물하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반년 만에 터진 물줄기에 흥분해서 온종일 글 생각뿐이었으니까. 그제야 빨리 집에 가서 글을 써야 하는데 바깥일 하는 새 머릿속 문장들이 날아가면 어쩌나, 오늘 오전 내내 종종거렸던 것이 간신히 생각났다. 하지만, 역시나 딴생각을 하며 보내서 그런지 그 바깥일이 뭐였는지는 여전히 생각나지 않는다.

애써 잡념을 지우고 다시 글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글은 종반부를 달린다. 여자는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것을 남자에게 숨긴다. 하지만, 남자는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여자를 껴안는다. 여자는 울고, 남자는 울지 않는다.

그런데 이 여자가 간암에 걸렸던가, 위암에 걸렸던가.

갑자기 아리송해진다. 참네, 간만에 글을 쓰다 보니, 내가 쓴 글인데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참 웃기는 노릇이다. ‘간암’과 ‘위암’을 검색해본다. 이런 맙소사, ‘간암’이 14건, ‘위암’이 17건 검색되었다. 멍청하게도 나는 글의 마지막을 남겨둔 이 시점에야 지난 삼 년간 써온 글 속의 여자가 간암과 위암을 왔다 갔다 했던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걸 이대로 편집부에 넘겼으면 어떤 망신살을 당했을까. 둘 중 하나로 통일하긴 해야겠는데, 여자가 암을 판정받는 부분을 쓴 게 너무 오래전이다 보니 원래 병명이 뭐였는지 가물가물하다. 아무거나 쓰자니 의사의 진단과정과 안 맞았다간 큰일 나니 그럴 수도 없고, 어딘지도 잘 생각나지 않는 페이지를 뒤적거리자니 분량이 너무 많다.

생각해보면 여자가 암에 걸리는 설정은 동생에게서 얻었었다. 동생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신호가 한참을 간 뒤에야 겨우 동생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피곤함에 찌들어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져온다. 이 녀석은 거의 매일같이 이렇게 상태가 안 좋다. 피곤할 일이 참 많기도 하다.

“유나야. 간암이냐, 위암이냐?”

“…….”

짜증스런 침묵. 나는 이런 동생의 화법이 너무 싫다. 앞뒤 없이 물어도 알아들었을 게 뻔한데,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건지 정말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대답할 마음이 없는 건지 이렇게 침묵으로 상대방을 불쾌하게 한다.

“간암이야, 위암이야! 뭐냐고!”

“위암이야.”

꼭 이렇게 다그쳐야 대답이 나온다. 과정이야 어쨌건 볼일은 끝났다. 귀에서 뗀 수화기를 전화 위에 올리기 전 잠깐 침묵했던 동생이 뭐라고 더 떠드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수화기를 올려버렸다. 또 전화기가 울린다. 수화기를 들고 있을 때 얘기할 것이지. 그 울먹거리는 듯한 목소리는 조금도 더 듣고 싶지 않다. 받지 않는다. 동생의 목소리가 녹음된다. 신경쓰지 않았다. ‘간암’을 검색해서 전부 ‘위암’으로 고쳤다. 간단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고 보면 동생이랑 통화한 것은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동생과 나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다. 여자들이란 어찌나 눈물이 많은지, 짜증스러울 때가 잦아서 전화를 걸지도 받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여자의 범주에는 동생도 예외 없이 포함된다. 지난번에 통화했던 때는 한 삼 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왜, 흐엉, 나한테는, 끅끅, 말하지 않는 거야, 흐윽, 흑. 흐윽, 흑, 엄마도 알고, 끅, 오빠도 아는데, 흡, 흐흑, 왜 나한테만 숨겨. 흐엉.”

“네가 이렇게 울까 봐서.”

“끅, 흐윽, 간암이야, 흑, 위암이야……?”

“위암.”

문득 생각난 불쾌한 기억을 애써 지워버린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은 그때도 못 봐주게 징징댔었군. 뭐 이 통화로 소설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징징거림마저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조소를 전공한 동생은 삼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살인적인 회사 스케줄에 항상 얼이 빠져 있다. 지가 힘든 건 상관없는데, 나까지 함께 얼이 빠지게 하는 건 영 질색이다. 하여튼 인생 참 답답하게 산다. 슬플 일도 많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기억이 난다. 바로 오늘 오전에 동생을 만났었다. 그래, 글 써야 되는데 짜증 나게 밖에 나가야만 했던 그 일이 바로 동생 약속이었다. 내 인생의 모든 짜증 나는 약속에는 이 녀석이 항상 관계되어 있구먼. 그래, 동생이 불러서 나갔었다.

상에 앉아 수육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동생이 다가왔다. 누구 인생만큼이나 칙칙한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동생은 다가와 내 앞에 털썩 소리를 거칠게 내며 앉았다. 그 표독스러운 눈은 온통 눈물투성이였다. 이것 참, 짜증 나는구먼. 수육을 뜯는 내게 동생은 성난 표정으로 말했다.

“맛있냐?”

왜 괜히 가만히 있는 사람 옆에 와서 시비인지 모르겠다. 당연하다 끄덕거린 내게 동생은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저기 가서 인사는 했냐?”

뭔 소린가 싶어 동생이 가리킨 방을 보았지만, 그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한테?”

동생은 할 말을 잃었다는 듯이 한참을 날 쳐다보다가 끝내는 고개를 저으며 딴 곳으로 가버렸다. 나는 까먹을까 조바심 내고 있던 소설 생각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낮의 그 수육은 꽤 맛있었다.

아무래도 출출해진다. 하지만, 뭘 먹더라도 일을 끝내놓고 먹는 게 좋겠지. 조금 남겨두긴 했지만, 어쨌든 원고는 거의 다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틀린 글자나 문장이 없는지나 확인하면 된다.

컴퓨터가 모든 걸 해주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컴퓨터도 모든 면에서 완벽하진 못하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에도 컴퓨터는 별반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난 사람을 쓴다. 아버지는 좋은 독자이자 좋은 아마추어 편집자셨다. 나는 일정 분량 이상의 원고를 아버지께 드리곤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항상 내 원고를 다 읽어주시고는 틀린 부분들을 교정해주시곤 했다.

그러고 보면 지난번 원고를 드린 것도 벌써 반 년 전이었다. 아버지의 집에 들를 때면, 언제나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계셨다. 그때도 언제나처럼, 침대에 누우신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원고 잘 받았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준휘야.”

아버지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아버지를 뵐 때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조금씩 침잠해갔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그 말씀을 하셨다.

“며칠 묵다 가지 않겠니?”

“제가 바빠서요. 언제 한 번 시간 낼게요.”

그래, 그랬었다. 어쨌든 마지막 원고가 거의 완성되었으니, 내일 드리면 될 것 같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번호를 누르자마자 들린 것은 신호음이 아니라 안내메시지였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십시오.

고개가 갸웃 돌아간다. 그새 번호를 바꾸셨나? 그럼 난 왜 모르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신호가 가고, 역시 신호가 한참 간 뒤에야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준휘니?”

“예, 어머니.”

수화기 건너편으로 들려온 어머니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오늘 정장 멋있더라.”

그러고 보니 오늘 낮에 동생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계셨구나.

“자주 좀 들르지 그러니.”

“아, 예. 근데, 아버지 폰 번호 바뀌셨어요?”

“아니, 그럴 리가. 해지했어.”

다시 한 번 고개가 갸웃 돌아갔다. 왜 핸드폰을 해지하셨지?

“아니, 갑자기 왜 핸드폰을 해지하셨대요? 아니, 아니, 저기 그것보다, 지금 아버지 혹시 집에 계시면 바꿔주실 수 있으세요?”

“……아버지?”

잠깐의 한숨 소리. 그리고 어머니는 말했다.

“……준휘야.”

“네.”

“아버지 돌아가셨잖니.”

순간, 움찔했다.

“……네?”

“응?”

아니. 잠깐만.

“뭐라고요?”

“……돌아가셨다고.”

“갑자기 왜요?”

“갑자기라니. 삼 년 전부터 위암이셨잖니.”

아, 동생이랑 통화했던 거? 그거 내가 걸었던 거였구나.

“너 오늘 아버지 장례식장에도 오지 않은 거니? 준휘야? 여보세요?”

내가 멍해 있는 사이에 전화가 끊겨버렸다. 다시 전화를 걸려다가, 그만 전화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손에 왠지 힘이 없다.

시곗바늘은 일곱 시 삼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와이셔츠의 답답함이 이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한계에 다다라, 결국 벗기로 했다. 의자에서 일어서자마자 거울 속의 내가 보인다. 나는 검은색 정장과 검은색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힘겹게 옷을 벗는다. 땀으로 옷이 몸에 눌어붙어 벗기가 몹시 어려었다.

동생은 빈 방에 누구보고 인사하라고 했던 거지? 아버지 영정에? 소설 생각에 정신이 없어 미처 몰랐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옷을 팽개친 다음 헐벗은 몸으로 컴퓨터 앞에 앉는다. 교정해줄 사람이 사라졌으니 그냥 완성만 해서 편집부에 넘겨야 할 것 같다.

전화기에 녹음재생 버튼이 반짝거린다. 전화를 끊고 난 뒤 동생이 다시 전화를 걸어 재잘거린 것들이다. 버튼을 누른다. 야, 이 개새끼야. 네가 사람이냐. 고기가 넘어가디. 너 되게 바쁜가 보드라. 나가죽어라, 미친 새끼야.

마지막을 쓰려고 하는데, 그전에 쓴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글은 종반부를 달린다. 여자는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것을 남자에게 숨긴다. 하지만, 남자는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여자를 껴안는다. 여자는 울고, 남자는 울지 않는다.

왜 남자는 울지 않았을까?

뭔 상관이람. 마지막 문장은 뭐라고 쓸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다음과 같이 쓰기로 했다. 어쨌거나 요즘은 이런 게 잘 팔리니까. 그래서 주저 없이 썼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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